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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토지법5)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7. 9. 10: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재물에 관한 구원론적 평가

마가복음 10:23에서 우리는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얻는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여기서 ‘재물’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원어는 ‘크레마’이다. 이 단어는 단지 토지만이 아니라 유동성 재산도 가리킨다. 70인역 다니엘 11:28에서 ‘크레마’는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킨다. “그가 많은 재산(크레마)을 가지고 그의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일 수는 없다. 사도행전 4:37에서도 ‘크레마’는 토지를 팔아 받은 돈을 가리킨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크레마)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러한 용례를 통하여 볼 때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0:23에서도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다.

마가복음에서 ‘크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곳은 오직 마가복음 10:23 뿐이므로 마가복음의 용례로 마가복음 10:23의 ‘크레마’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고 검증할 길은 없다. 그렇지만 마가복음 10:23의 문맥을 통하여 이 단어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를 가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24절)은 ‘크레마’의 뜻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만일 ‘크레마’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은 율법(레위기 25:23; 신명기 27:17)을 어긴 자들이므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은 ‘크레마’가 토지가 아닌 (토지의 소산으로서의) 재물을 가리킴을 암시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데, 재물은 많이 소유해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율법이 문제 삼지 않는 것까지 예수께서는 문제 삼으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물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도덕적으로 불의하다고 평가하지 않으셨다. 세상에는 깨끗한 부자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모든 부자들을 비윤리적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내리신 평가는 구원론적 평가이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 받는다”는 뜻을 가진 표현임을 26절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말씀을 제자들은 “구원받기 힘들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많이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즉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본문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맥을 통하여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자의 경우처럼 율법을 어기면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깨끗한 부자가 존재하기 어려운 만큼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부자의 경우에도 또 하나의 장애물이 존재한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신다(21절). 불의한 재물의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재물을 사용하기 원하실 것이다. 깨끗하게 재물을 모은 부자들 중에서도 재물을 사랑의 실천에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최소한 부자들이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지키기 어려운 만큼 부자들이 구원받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의 불가능성

사람이 구원받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함을 25절은 지적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랍비문헌들은 불가능의 이미지로서 코끼리가 바늘귀로 나간다는 비유를 쓴다. 동일한 이미지를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동물인 낙타는 자연스런 선택이다. 25절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26절: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은 25절의 비유가 구원의 불가능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음을 보여 준다.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으로서 나귀가 짐을 내리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이었다면 제자들이 놀라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였을 이유가 없다. 또한 바늘귀라는 예루살렘 성문이 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예수께서 당시에 존재하지 않은 성문을 언급하셨을 리 없다. 그러므로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의 바늘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불가능한 것보다 어려운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은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부가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로 여겨진 문화 속에서는 부자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받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은 부자들에게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그러한 복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불가능할 것인가? 26절은 이러한 생각의 결론을 보여준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제자들의 이러한 결론을 예수께서는 긍정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27절).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예수께서는 부자는 구원받기 힘들지만 가난한 자들은 구원받기 쉽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부자가 구원받기 힘들면 가난한 자들은 더더구나 구원받기 힘들다는 생각을 전제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 불가능하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도 부자들처럼 구원받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부자들은 21절 말씀대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의한 부자가 불의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줄 때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진다면(21절), 깨끗한 부자가 깨끗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줄 때 더더구나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그들이 언제 많은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구원받기도 역시 힘들다.

예수께서는 부유함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셨다. 예수께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신 것은 단지 토지만이 아니다. 율법의 견지에서 보면 토지를 과다 보유한 지주는 악하고 재화를 많이 보유한 자본가는 선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깨끗한 부자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렇지만 부자에 관한 예수의 평가는 부자를 가난한 자와 대조시키면서 부자를 심판하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관점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선언함으로써 가난한 자도 구원받기 어려움을 암시한다.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기 어려움을 깨닫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

예수께서는 구원의 불가능성을 지적하시면서 가르침을 끝맺지 않으신다. 구원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예수께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조시키지 않으시고,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신다. 하나님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모두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익숙한 구원론으로 환원하면 안 된다. 27절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음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시는지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왜 부자에게 불가능한 지 살펴야 한다. 구원이 부자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토지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간 익명의 부자와 관련이 있다. 그는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포기하기 힘들어 고민하였다. 그렇다면 합법적으로 소유한 재물을 포기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재물의 포기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는 명령과 관련된다. 이 명령은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즉,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가진 명령이므로 구원론적 함의를 지닌다.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산의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땀 흘려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는 더더구나 구원이 약속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랑을 명하신다.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명하신다. 이것은 인간에게 심히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심으로써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사랑은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므로(갈라디아서 5:6)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궁극적인 조건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고 말해야 옳다.

재물과 제자도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으셨다. 다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지 가르치셨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악하지 않다.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도 악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우리의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남에게 주기 위하여 열심히 벌어야 한다.

재산을 축적하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 아니라 축적된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다. 근면검소하게 생활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축적된 자본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근심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근심할 때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가난에 처한 사람에게 부유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부유한 자들이 가진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가난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재물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토지 투기를 통해 재물을 축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며 근검하게 재물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깨끗하게 경제활동을 하여 깨끗한 부를 모아야 한다. 우리의 경제활동은 또한 신앙생활이다. 우리는 더러운 부를 많이 모으는 것보다 깨끗한 부를 적게 모으는 쪽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모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예수 제자의 길일 뿐 아니라,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기도 하다. 구원받은 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걸어가야 할 길이므로 그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함부로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기준에 미달된 사람들을 은혜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 은혜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여 이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들을 심판하실 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의 하나님은 또한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참된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변화시켜 참된 제자의 길을 가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삶의 변화시키어 바른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구원은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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