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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구원의 확신

예수께서는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마가복음에서 구원의 확신에 관련한 예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29-30이다.

이 본문은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되는지 알려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마가복음에서 ‘영생을 얻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과 동의어이며(마가복음 9:45-4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다’는 표현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25-26). 그러므로 이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반드시 받는 지 알려주는 본문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배운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당혹해 할 것이다. 집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리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 의문은 다분히 흑백논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에 관해 말하지 않고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즉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 중에도 구원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마치 합격의 확신이 없는 수험생 중에 합격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있는 자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와 복음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다. 예수를 참으로 믿지 않으면서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포기를 못하는 사람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말로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며 신앙생활을 할 경우에 우리는 늘 입시생처럼 불안하지만, 구원을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시험에 합격하고 입학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쁘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하게 만들기도 한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에게 방종과 죄의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러한 구원의 확신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을 보고 초신자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날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조롱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도의 문은 막힐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아무리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더라도 나의 구원의 확신으로 남이 구원받는 길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먹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헛된 구원의 확신은 일찌감치 없애는 것이 좋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교리는 무슨 죄를 지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한국교회에서 왜곡, 과장되어 가르쳐졌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아무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으로부터 탈락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었다. 결국 잘못된 구원의 확신은 많은 교인들이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차라리 구원의 확신 없이 구원의 길을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지 분명히 알려준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가 그들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믿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의 믿음이 거짓 믿음일 수는 없다. 예수와 복음을 선택하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사람에게는 그가 포기한 것보다 더 큰 보상이 기다린다. 그것은 구원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버림의 의미

그런데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라고 할 때, ‘버린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과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버린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마가복음 10:28에서도 사용되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할 때, 그는 재물을 가진 자가 구원 받기 어렵다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물을 버렸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하였는가? 베드로는 예수를 따를 때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마가복음 1:18).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마가복음 1:20). 그렇지만 그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린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른 후에도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마가복음 1:29). 그러므로 ‘버리다’는 말은 소유의 포기로 이해할 수 없다.

‘버리다’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허락하다”(1:34; 5:37; 7:12, 27; 10:14; 11:6, 16), “용서하다”(2:5, 7, 9, 10; 3:28; 4:12; 11:25[2회]), “거절하다”(5:19; 7:8), “남기다”(12:19, 20, 22; 15:37), “남아있다”(13:2),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14:6; 15:36)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러한 의미는 마가복음 10:28의 문맥에 맞지 않는다.

이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떠나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1에서 이 동사는 열병이 떠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4:36; 8:13; 12:12; 14:50에서 이 동사는 사람들을 떠나가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34에서 이 동사는 집을 떠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18에서는 그물을 관리하기를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20에서 이 동사는 아버지 세베대를 돕는 것을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0:28의 문맥은 마가복음 1:18, 20을 연상시키는 문맥이므로 ‘버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문맥상으로나 마가복음의 용례상으로나 “떠나다”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실제로 소유를 버린 것이 아니므로, ‘버림’은 순회 사역 기간 동안 가족이나 소유를 떠나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마가복음 10:28)라는 베드로의 말은 “우리가 모든 것을 떠났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열두 제자들은 재물과 가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따라다니며 복음 사역을 하기 위하여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떠났다.

그런데,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릴 때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의 말씀(29-30절)에서도 ‘버리다’는 단어를 “떠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문맥은 이러한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들이 이것들을 100배나 받을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은 ‘버리다’는 단어가 단지 내버려 두고 떠난다는 뜻에서 더 나아가 소유의 포기와 관련됨을 암시한다. 집, 가족, 토지를 100배나 더 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믿음의 가족을 100배나 얻고 많은 집과 토지를 공동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버리다’는 단어도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공동소유로 내어놓는다’는 뜻으로 또는 ‘그 혜택을 독점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집, 가족, 토지의 버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마가복음 10:21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가르침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족의 버림은 가족을 떠남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집이나 토지의 버림은 단지 떠남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의 경우에도 기업의 분량에 해당하는 토지나 가옥까지 포기하라는 것은 아님을 베드로와 안드레의 경우에 여전히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마가복음 1:29).

‘버림’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최소한 떠남을 뜻하고 공동소유 내지 소유포기를 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버림’이 어떻게 이해되든지 간에 가족이나 집, 토지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은 동일하다.

버림의 이유: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다. 그런데, 이 때 한 가지 단서가 있다. 무엇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토지를 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그런데,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가 무슨 뜻인가?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가옥,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다는 뜻일 수 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예수는 소유(문맥상 토지)의 포기를 명하셨기 때문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복음을 위하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집, 가족, 또는 토지’의 “포기”는 그것들을 “떠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도 여행을 하고 계신 예수를 따라 나서려면 집과 가족과 전토를 떠나야 한다. 그래야 전도 여행을 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가옥,’ ‘가족’이 포기의 내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문맥에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포기’가 마가복음의 용례상, ‘떠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지원한다(위 참조).

집과 가족을 떠나 전도 여행하는 복음 전도자들에게 예수께서는 100배의 집과 가족을 약속하신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30절). 그들에게는 가는 곳마다 거할 곳이 생기고 그들을 보살펴 주는 믿음의 가족이 생긴다. 물론 그들은 전도 여행 과정에서 고난도 받을 것이다. “박해를 겸하여 받고”(30절).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구원이 확실히 약속된다.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30절).

그런데, 버림의 목록에서 ‘아내’가 빠져 있는 것은 ‘버림’이 문자 그대로의 ‘버림’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누가복음에서처럼 ‘아내’가 버릴 목록에 포함된 전승이 본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누가복음 18:29). 그러나 마가복음의 문맥에서는 ‘아내’가 빠진 것을 고려하여 본문을 해석하여야 한다. 아내를 버리는 것, 즉 이혼을 금하는 예수의 가르침(마가복음 10:9, 11)의 일관성이 여기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버림’이 잠시 떠나는 것이었다면 유독 ‘아내’만을 떠나야 하는 목록에서 뺐을 리 없다. 예수의 12제자들이 아내를 동반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며 사역을 하였다고 볼 수도 없기에, ‘버림’은 단지 ‘떠남’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 가족, 토지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율법이 허락하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들)이나 토지의 소유를 포기하고, 복음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들과 결별하는 것을 뜻한다. 다만 아내는 복음 전파의 삶을 원하지 않더라도 이혼시킬 수 없다. 그녀가 함께 살기 원하는 한 이혼시키지 말아야 한다(고린도전서 7:12-13 참조). 복음을 따르는 것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그러나 복음 자체가 이혼을 금하기 때문에 버릴 수 있는 목록에서 ‘아내’(또는 ‘남편’)는 제외된다.

본문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예수와 복음을 믿기 때문에 가정에서부터 쫓겨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가옥, 토지 등의 상속자로서 권리를 함께 상실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구원을 약속하신다. 세상에서 기업을 잃은 그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신다. 그러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된다.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크나큰 위로와 소망이다. 그에게 구원의 확신마저 없다면 너무도 비참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고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죄를 지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이 없는 자들에게 마가복음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확신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토지의 포기와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누가 가질 수 있는가?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하여 집이나 가족, 토지를 포기한 사람은 마가복음 10:30에 토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축적한 가옥이나 토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정설을 믿은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하여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하였다. 부의 축적에 성공하는 것이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 증거라고 여긴 칼빈주의자들은 열심히 일하여 벌고 절약하여 씀으로써 부를 축적하여 자본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부의 축적이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축적된 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과 토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부의 축적을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본 칼빈주의자들의 근검절약은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렇다면 부의 포기를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보는 예수주의자들은 새로운 경제체제를 태동시키지 않을까? 근검절약하며 부를 축적하되 부동산투기 등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축적된 부를 지속적으로 포기하여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만드는 예수경제체제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토지를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토지에서 나그네가 쉼을 얻을 때,

그는 낙원에 예수와 함께 거할 곳을 얻을 것입니다.

가옥을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집에 가난한 자들이 깃들일 때,

하늘의 도성에 그를 위한 집이 마련될 것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족에게마저 버림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지만

영원한 것을 얻는 그에게 복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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