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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토지법9)사본학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0. 19. 15: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과 사본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라는 헬라어를 담고 있으며 이것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모든 사본들이 일치하여 이 헬라어 단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저술하여 출판한 이후에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을 필사를 하여 전수할 때, 모든 필사자들이 마가복음의 원문을 있는 그대로 필사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필사자들에 의하여 마가복음 본문이 필사되어 전수되는 가운데 어떤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의 본문을 변경하였다. 그렇게 변경된 본문은 또 다른 필사자들에 의하여 필사되어 전수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 사본들을 비교하여 원래의 본문을 복원하는 작업을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하는데, 편의상 이를 사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많은 사본들에 ‘끄떼마따 뽈라,’ 즉 ‘넓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 담겨 있지만, 서방 사본들에는 다른 표현들이 발견된다.

(1) 끄떼마따 뽈라 나머지 사본들

(2) 뽈라 크레마따베자사본, 고대 라틴어 역본

(3)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 클레멘트

베자 사본과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서방 사본들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대 라틴어 역본들이 로마제국의 서방 지역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은 칼빈의 제자인 베자가 소장하고 있다가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 기증한 사본으로서 지금 켐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에는 마가복음 10:22에서 ‘뽈라 크레마따’ 또는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많은 재산’이라고 번역된다. ‘크레마따’는 ‘크레마’의 복수형이며, ‘크레마’는 ‘재산,’ ‘부,’ ‘돈’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37에서 ‘크레마’는 토지를 팔고 받은 돈을 가리킨다.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값’이라고 번역하였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다니엘 11:28도 ‘크레마’가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많은 ‘크레마’를 가지고 그의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가 아니라 돈이나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

만일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가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면 이것은 ‘토지’로 번역되기보다는 ‘재산’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끄떼마따’가 원래 마가복음 10:22에 담겨 있지 않았다면 ‘토지’라는 번역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에서 ‘재산’이 옳은 번역인지 ‘토지’가 옳은 번역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와 대부분의 사본들에 담긴 ‘끄떼마따’ 중에서 어느 것이 마가복음이 원래 가진 표현인지 검토하여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마가복음 인용에는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많은 재산과 전토)라고 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 중에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은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을 가진다. 이것은 위의 (3)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이것은 아마도 (2)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2)의 ‘크레마따’는 토지를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필사자들은 ‘까이 아그루스’(~와 전토)를 추가하여 토지가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3)은 (2)의 ‘뽈라 크레마따’(많은 재산)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그것의 기원인 (2)를 지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서방 사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본들은 (1) 즉 ‘끄떼마따 뽈라’를 지원한다. 더구나 고대 라틴어 역본들 중에 일부(f, q)는 마가복음 10:22에서 divitias(부) multas(큰)라는 표현을 가지는데 이것은 (1)의 어순에 일치하므로 (1)을 지원한다. 많은 사본들에서 (1)이 발견된다고 (1)이 원래 마가복음 10:22에 있던 표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1)을 담은 많은 사본들 중에는 매우 오래된(4 세기) 사본이면서 우수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들이 있으므로 (1)이 원래의 것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본들도 언제나 원문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증거를 좀더 수집해야 한다.

마태복음 19:22의 영향인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인가?

마태복음 19:22에는 마가복음 10:22와 유사한 본문이 발견된다. 동일한 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인데, 마태복음 19:22도 ‘끄떼마따 뽈라’란 표현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1) 즉 ‘끄떼마따 뽈라’가 마태복음의 영향에 의하여 발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한 변화를 사본학자들은 조화(harmoniz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원래부터 마가복음에 일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마가복음을 마태복음 저자가 자료로 사용하였다는 가설(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가능성을 더더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설에 입각하면 마태복음의 ‘끄떼마따 뽈라’는 마가복음의 ‘끄떼마따 뽈라’에서 그대로 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마가복음과 본래부터 일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많은 곳에서 문자적 일치를 보이므로 이곳에서도 그러한 일치가 본래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이 마태복음 19:22의 표현과 동일한 표현이라는 이유만으로 (1)은 마태복음의 영향을 받아 조화된 것이라고 단정하여 이것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 아니라고 판단할 개연성이 없다. 더구나 (2)의 ‘크레마따’가 바로 다음 절(막 10:23)에 나오는 ‘크레마따’의 영향으로 동일하게 변화된 결과일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1)이 마태복음 10:22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은 (2)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다.

마가복음의 문체가 주는 증거

성경의 각권은 저자에 따라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책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사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듯이 성경도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다. 마가복음이 가지는 독특한 문체도 성경의 인성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은 ‘뽈라’(많은)라는 단어가 명사를 꾸며주기 위해 사용될 경우에 언제나 예외 없이 그것이 수식하는 명사 뒤에 위치시킨다(1:34; 4:2; 6:13; 7:4, 13).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세 가지 표현들 중에서 이러한 마가복음의 문체에 일치하는 표현은 (1)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성경 독자의 경향성

(1)이 마가복음 10:22에 담긴 원래적 표현이라면 이것은 ‘넓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번역 성경들이 한결같이 ‘많은 재산’에 해당하는 번역만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가복음 10:22의 번역자들은 (1)을 원문으로 택하였어도 그 의미를 (2)처럼 이해하여 번역하였다. (1)을 원문으로 택한 네스틀레-알란트 27판이나 UBS 4판의 본문을 눈앞에 두고 번역자들이 이를 (2)처럼 번역한 것은 (1)을 담은 원본이나 사본을 눈앞에 두고 필사자들이 이것을 (2)로 고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필사자들의 경향성과 번역자들의 경향성은 서로 일치하기도 한다.

필사자나 번역자나 모두 성경 독자의 일종이므로 이들은 서로 유사한 경향성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어떠한 경향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대의 필사자들의 경향성을 살펴봄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필사자들이 어떤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변경시켰는가를 관찰해 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그 구절을 어떻게 곡해할 수 있는 지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추측을 토대로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성을 조심하며 본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비유사성의 원리와 성경 본문 이해

독자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을 저자의 의도대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고의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곡해하기도 한다.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의미를 곡해하는 독자들의 경향성을 극복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독자들의 경향성은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필사자들의 본문 변경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일단 독자들의 경향성이 파악되면 “비유사성 원리”를 통해서 본문의 본래적 의미 파악을 시도할 수 있다. “비유사성 원리”(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되는 방법론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 발생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원리이다. 초대교회의 전승 경향에 유사한 예수 전승의 경우에는 그 역사적 진정성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초대교회는 그 경향성에 유사한 예수의 말씀을 왜곡함 없이 전승하였을 것이지만, 그 경향성에 유사하지 않은 말씀은 때로 그 경향성에 맞게 소화하여 전승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가능성이지만 이 가능성 때문에 초대교회의 경향성에 유사한 전승들은 그 진정성이 의심될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경향성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들은 초대교회가 지어낸 전승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비일치하는)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론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비유사성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는 성경의 독자들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비유사한 해석을 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독자들의 주관성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다. 비유사성의 원리에 따르면, 사본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마가복음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마가복음 해석은 독자의 주관성에 의해 왜곡된 본문 해석일 가능성이 비교적 낮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마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지는 마가복음의 용례와 문맥에 맞는지 검토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비유사성 원리는 성경 이해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지만 이해된 내용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방법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필사자들이 “토지”를 가리킬 수 있는 ‘끄떼마따’를 “재물”을 뜻하는 ‘크레마따’로 바꾸어 읽은 것은 오늘날의 성경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경향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고한다. 비유사성 원리를 따라 이러한 경향성을 조심하면서 그 경향성에 역행하여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읽으면 이것은 “토지”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본문 이해가 과연 정확한지는 용례와 문맥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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