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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 14) 역사적 예수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3. 30. 11:5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전승자들은 전통을 보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승 과정에는 전승자의 경향성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전승자의 경향성은 전통에 담긴 내용에 적용된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고 전승자의 신학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17-22은 본래의 전승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일 수도 있고, 마가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여 재해석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0:17-22에 담겨진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과연 역사적 예수께서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주신 내용을 그대로 담은 것일까? 

설명가능성 원리로 본 마가복음 10:21-22 

사도행전 2:45과 4:34-35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5:1-11에는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숨기고 바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벌을 받아 죽는 이야기가 기록된다. 누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일부러 창작하였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누가는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 마가복음 10:22을 부에 관한 것으로 바꾸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23). 이처럼 토지에 관한 마가복음 본문을 부 일반에 관한 것으로 변경한 누가가 토지에 관한 이야기를 창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바치지 않아서 벌을 받아 죽게 되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어려움은 이 이야기의 진정성의 표지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일을 행한 이유는 그들이 믿고 따른 예수의 가르침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내용이 있을 때 설명이 잘된다. 그러므로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한 마가복음 10:21-22의 내용은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유대교에의 비유사성 

토지의 소유가 소수에게 편중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린 사회를 배경으로 볼 때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마가복음 10:21)은 매우 적합하다. 이것은 그 시대에 마땅히 선포되어야할 메시지였다. 또한 이러한 메시지는 당시 유대인 권력자들이 싫어할 메시지였으므로 예수께서 그를 죽일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당하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그의 죽음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이므로 역사적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가의 전승경향성에의 비유사성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난해구절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2:5-7은 예수께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 용서를 하심을 기록하며, 마가복음 6:48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물 위를 걷는 일을 행하심을 기록한다. 마가복음 14:62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될 것과 하늘 구름을 타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듣기엔 신성모독으로 들렸다(마가복음 14:64). 그러므로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 이야기를 창작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마가 10:18은 역사적 진정성 때문에 보존되어 왔고, 그리하여 마가도 이것을 보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22에 사용된 ‘끄떼마따’(토지)는 과연 마가가 창작한 흔적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누가복음의 ‘쁠루시오스’(부유한)가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는가? ‘끄떼마’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단지 4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1번 사용된다. 한편 형용사 ‘쁠루시오스’는 신약성서에서 28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2번 사용된다. 70인역(외경제외)에서는 ‘끄떼마’가 7번, ‘플루시오스’가 31번 사용된다. 그러므로 ‘끄떼마’는 ‘쁠루시오스’보다 덜 친숙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더 친숙한 ‘쁠루시오스’(부유한)를 ‘끄떼마’(토지)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혹시, ‘끄떼마’(토지)가 아니라 ‘크레마’(재물)이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을까? ‘크레마’라는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10번 사용되었고, 신약성서에서 6번 (마가복음에서는 1번)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7번, 신약성서에서 4번 사용된 단어인 ‘끄떼마’보다는 더 친숙한 단어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크레마’를 일부러 상대적으로 덜 친숙한 ‘끄떼마’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마가가 10:22을 창작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만일 창작하였다면 마가는 그가 다른 곳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끄떼마’보다는 9번이나 사용한 ‘아그로스’(전토)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공관복음서 전승경향성에서 비유사성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예수는 “왜 나를 선하다고 부르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답한다(18절). 예수의 신성을 믿은 초대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일부러 만들어 내었을 리는 없다. 초대 교회의 전승 경향성은 마태복음에 반영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평행구절(19:17)에서 “왜 나에게 선함에 관하여 말하느냐? 오직 한분이 선한 분이시다.”라고 표현을 바꿈으로써 예수를 선하다고 부른 것을 부정하는 마가복음의 표현을 피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마태복음의 저자도 고치고 싶어 한 마가복음 10:18의 내용과 표현을 창작하였을 리 없다.

마가복음 10:19의 ‘사취하지 말라’는 마태복음(19:19)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절(18:20)에서 생략된다. 이것은 이것이 십계명에 속한 계명이 아니므로 십계명에 속한 계명들을 언급하는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일부러 십계명 목록의 중간에 십계명 중에 하나가 아닌 ‘사취하지 말라’를 추가하였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1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곧 이어 그 사람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지적되고(21절), 그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근심하여 떠나감이 묘사된다(22절). 결국 이렇게 행할 사람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때 예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의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져 생략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는 기록을 일부러 창작하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마가복음 10:21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네가 온전하려고 한다면”이라고 바꾼다.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는 마가복음의 신학이 너무 과격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고 믿고(마태복음 5:17) 이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5:19) 마태복음 저자에게마저도 과격하다고 여겨진 예수의 가르침이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마가복음 10:22도 전승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기보다는 역사적 진정성에 토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검증된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의 일치 

마가복음 10:17-22에 나타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토지제도를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면모이므로 이러한 면모에 일치하는 (많은 토지를 가진 자는 토지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는) 마가복음 10:21의 예수의 가르침도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0:9은 창세기 2:24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데,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10:9의 내용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증거는 우선 이 말씀이 많은 독립 자료들에 의해 지원받는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0-11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나누이지 말고, - 나누일지라도 재혼하지 않고 지내거나 남편과 재결합하라, - 남편은 아내를 이혼시키지 말라.” 이 말씀은 이혼을 금하는 점에서 이혼(법적 이혼) 내지 별거(사실상의 이혼)를 금하는 마가복음 10:9(“하나님께서 합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게 하라”)의 말씀의 내용과 일치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는 마가복음이 기록되기 전이었을 것이므로 고린도전서의 증거는 마가복음 10:9-12의 진정성을 지지한다.

예수 당시 유대교에 이혼을 완전히 금한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의 말씀은 당시 유대교에 의하여 쉽게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예수께서 미움을 받아 박해를 당할 수 있게 된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7:15은 믿지 않는 자가 이혼하고자 하면 이혼하라고 권하는데, 이것은 이방 기독교인의 경우에 배우자가 불신자일 경우 이혼이 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마가복음 10:9의 말씀이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9은 초기의 이방 기독교의 산물일 수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므로 마가복음 10:9은 마가의 창작이 아닐 것이다.

마태복음 19:9은 마가복음 10:11에 “음행으로 인하지 않고는”이라는 예외 조항을 추가한다. 이것은 마가복음 10:11이 너무 엄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배우자가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상황에서도 이혼을 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너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저자는 이러한 예외 조항을 추가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매우 철저한 유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마태복음에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마가복음 10:11이 마가나 초대 교회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가복음 10:9은 배우자를 이혼시키고 재혼한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부합한다. 세례 요한이 이러한 결합을 비판하고 죽임을 당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셨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마가복음 10:9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주어질 수 있는 말씀이다. 또한, 마가복음 10:9은 남편이 아내를 마음껏 이혼시킬 수 있었던 (불공평한) 당시 상황 속에서 주어질 수 있었던 말씀이다. 그러므로 당시 역사적 배경도 이 말씀의 진정성을 지원한다.

구약의 정신을 철저히 적용하는 마가복음 10:9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마가복음 10:17-22도 나타난 구약이 토지법의 정신이 철저하게 적용하므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회 배경에의 적합성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에서는 전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하는 귀족들이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통치 영역의 절반 이상의 땅을 소유하였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예를 들어 하르솜(Charson)의 아들 엘르아잘은 아버지로부터 1,000 개의 마을들을 상속받았다고 한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사도행전 4:36-37은 레위인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사도들에게 내어놓는다고 기록한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구약의 토지법이 어겨지고 있던 당시 사회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사람과 같이 십계명을 지키되 토지법은 어기는 유대인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미 토지의 균형적인 소유가 깨어진 사회 속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는 구약성서의 토지법을 어기고 있는 것에 관한 가책을 갖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가책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마가복음 10:20, 22은 당시 배경에 잘 들어맞는다.

맺음말 

마가복음 10:17-22은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 즉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본문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한 증거들을 검토해 볼 때, 이것은 마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예수를 믿든지 역사적 예수를 믿든지 예수를 따르고자 하면 토지에 관한 무한한 권리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를 포기하기는커녕 부동산에 대한 세금마저 내기 싫어하는 모습은 예수를 따르는 바른 모습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중에는 대토지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토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일 수 없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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