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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 2)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넘어서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5. 21. 12:2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성서와 사회

예수를 믿는 우리의 신앙이 어찌하여 삶 속에서 힘을 잃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분리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의 분리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신앙과 삶이 종종 분리되어 왔다. 그리하여 성서와 사회도 분리되어 왔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신앙생활이 사회 속에서의 삶과 무관하였다. 성경을 연구하며 성경에서 깨달은 만큼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사회 정의를 세우는 실천에까지 쉽게 나아갈 수 없었다. 성경에서 사회 정의 운동을 위한 토대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종 발생했다. 그들의 사회 참여는 성경이 명하는 규범에 따르기보다는 시대가 요청하는 필요에 따라 일어나곤 했다. 그리하여 성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나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사회와 관계없는 책으로 여겨지곤 했다.

성서가 사회와 분리되면, 성서는 그저 종교적인 책으로 남게 된다. 성서가 종교 영역을 다루는 책으로 제한되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고백도 예수의 왕 되심에 대한 신앙 고백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성서가 사회 문제에 대한 지침을 주는 책이 되지 않는 한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은 그저 말뿐이게 된다.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이 참으로 진실되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메시지를 사회에도 적용해야 한다.

그리스인들의 삶 속에서 왜 성서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었을까? 왜, 정의감이 충만한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서 없이 행동해야 했을까? 왜, 성경을 사랑하는 신실한 기독인들이 성경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비전을 얻지 못하였을까?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안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기는 경우에는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이를 사회 문제에 적용하지 못한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거룩한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을 개인의 종교적 삶을 위한 책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위대한 성경을 이렇게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약 성경과 기독교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교회가 사회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이다. 믿음과 행함이 연결되어도 성서와 사회가 분리된다면 행함은 교회 속에서의 종교적 행위로 제한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힘을 잃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하려면 우선 그러한 분리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의 원인은 성서 안에서 구약을 삶의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시작한다. 한국 교회들은 구약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며 구약 성경의 형식적 권위를 존중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구약 성경의 형식적인 권위는 인정하면서 실제적 권위는 부정하는 셈이다. 구약 성경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처럼 물러나게 된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되면 왜 성서와 사회가 서로 분리되는가? 구약 성경에 사회와 관련된 법들이 많기 때문이고 이러한 법들과 관련된 선지자들의 선포가 많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될 경우에는 이러한 법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에 적용되지 못하게 된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를 위한 원리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잘 알아도 그러한 내용들이 폐지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구약 성경은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이 사회와 분리된 상태에서 신약 성경만을 사회와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 가진 사회적 차원을 전제하고 이것을 기초로 영적인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고 신약 성경을 읽으면 사회적이면서 영적인 신약 성경은 단지 개인적이면서 영적인 것으로 오해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구약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삶의 기준이라고 고백하지만, 동시에 구약 성경의 규범적인 효력은 폐지되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구약 성경 39권의 삶의 기준으로서의 효력을 믿지 않고 있다. 신구약성경 66권 전체가 삶의 기준이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동시에 신약시대에는 구약의 법들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이러한 모순이 위대한 구약 성경의 빛이 사회 속에 비치는 것을 가리고 말았고, 구약 성경을 맛 잃은 소금처럼 만들고 말았다.

구약 성경의 율법 조항이 폐지되어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적용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교회의 삶 속에 제멋대로 적용하는 것은 또 하나의 모순이다. 교회 생활에 구약 성경을 적용할 때에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며 적용한다. 그리하여 구약 성경은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나 헌금을 강조할 때, 목사의 권위를 강조할 때 이용된다. 구약의 제사는 헌금으로, 제사장은 목사로, 성전은 예배당으로 연속되는 것처럼 적용한다. 사회를 향한 구약 성경의 메시지는 무시하면서 교회를 위해서는 마음껏 이용한다. 이것은 성경을 믿는 태도가 아니라 이용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태도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성전 제사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예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므로 구약 성경의 제사법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헌금을 만들어 내며 이를 설득하기 위하여 구약의 다양한 제사들을 언급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폐지된 제사법들을 적용하는 한편 폐지되지 않은 계명들은 율법 폐지를 외치며 지키지 않는다. 십계명은 신약 시대에 계속 지켜져야 한다는 데에도 대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일요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전통마저도 점점 사라지면서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이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십계명을 무시하면서 제사법은 적용하려고 하는 모순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엄연히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다른 율법 조항들이 존중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예배당 건축이나 헌금과 관련하여 이용할 수 있는 율법들은 열심히 강조되고 적용된다. 한국 교회에선 십일조법도 열심히 지켜지고 있다.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십일조법이 지켜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안식일법은 헌금과 관련되지 않지만 십일조법은 헌금과 관련되기 때문은 아닌가?

물론 필자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율법 폐지론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십일조만은 예외라고 하며 열심히 지키는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폐지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십일조를 폐지하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니라”(마태복음 23:23).

십일조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바리새파 비판은 더군다나 폐지되지 않았다. 십일조를 드리지만 더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비판되어야 마땅하다. 율법에 담긴 공의를 내어버린 반율법주의는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렸다. 어찌하여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리면서 덜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담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내어버리고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아닌가?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신 율법의 효력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인정하신 율법은 신약 시대에도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더 철저하게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신약 시대에도 지켜져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과 제사장,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십일조법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이 사라진 현대에도 지켜져야 한다면,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지켜져야 마땅하다.

예수와 율법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셨는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율법을 버리고 폐하는 자들을 비판하신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부여잡고 있다”(마가복음 7:8). “너희들은 너희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부수고 있구나!”(마가복음 7:9). “너희들은 너희들이 전수받은 너희의 전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마가복음 7:1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신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율법을 잘못 적용하여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전통을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5:17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으셨고 완성하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9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키도록 가르칠 것을 권장한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구약에 명령된 율법을 신약 시대에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며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는 율법의 일부로서 토지법이 담겨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레위기 25: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토지는 단지 임대될 수 있을 뿐 매매될 수 없었다. 이것은 율법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19을 토지법과 관련시켜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토지법을 폐지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또한 토지법을 지키며 이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토지법을 신약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토지법을 폐지하셨다는 증거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한 증거가 없는 한 우리는 구약의 율법들을 지키려는 시도와 노력을 존중해야 한다. 폐지된 흔적도 없고 지키라고 명해진 증거도 없는 율법 조항들은 열심히 지켜지는 것이 안전하다. 적어도 그러한 율법 조항들을 열심히 지키려는 사람들을 신율주의자라고 부르며 정죄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켜야 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낭패를 당하기보다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을 지키는 불편을 겪는 것이 더 안전하다.

율법 조항들 중에서 예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율법들은 신약 시대에도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 예수께서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이 율법의 일부라는 이유로 거부된다면 이는 예수를 믿지 않는 태도이다. 율법폐지론이라는 신학적 입장이 중요한가, 예수의 가르침이 중요한가? 율법폐지론은 신학자들의 가설이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메시아의 명령이다. 인간의 가설을 따를 것인가,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인간의 신학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이 폐지된 흔적이 없다면 그것을 지키려는 운동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폐지론에 은연중에 빠져 있다. 토지법이 폐지된 증거가 없다는 소극적인 논리로 그들이 토지법을 존중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 율법폐지론에 빠진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예수께서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만일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 과연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는가? 예수께서 토지법에 관하여 어떠한 태도를 보이셨는지 알려주는 본문이 복음서에서 발견된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17-31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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