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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모든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우리는 다른 주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예수는 만 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이시다(계시록 17:14). 우리에게는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고 두 왕이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고린도전서 8:6).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주이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오직 예수만을 왕이요 주로 모신 사람들이다.

우리가 오직 예수를 주라 고백할 때, 예수는 종교 영역에서만 주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의 주라고 고백한다. 예수는 교회의 주인이시며, 가정의 주인이시며, 또한 사회의 주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개인의 주로 고백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예수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지극히 중요하며 개인적인 영역에서 예수는 분명 우리의 주이시다. 그러나 예수께서 개인의 주라고만 고백하며 교회의 주이심을 잊어버리진 않았는가? 그리하여 교권주의자들이 교회의 주권을 찬탈할 때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는가? 우리는 예수를 개인의 주로 고백하면서 과연 세상에서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살려고 했는가? 예수를 성경과 교회 속에 가두어 놓고 사회에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는 않았는가?

예수는 온 세상의 주이시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자연도, 온 우주도 그의 주권에서부터 제외된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 활동은 이윤을 추구하는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그러한 원리에 따라 약육강식하는 것을 그 영역의 법도라며 예수의 주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수를 대항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멸하실 것이다.

왕의 명령을 실행하지 않는 백성

우리는 예수께서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영역의 주인이심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주권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순종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주신 명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의 명령을 알지 못한다면 예수께서 주라는 고백은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예수는 명목상의 주로 대접받게 되고 기독교 전통과 개인의 견해가 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처럼 예수를 대접하고 실제적 통치권을 기독교인들이 행사하게 된다. 이러한 불행은 오로지 지식이 없음으로 발생한다. 예수의 명령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 4:6).

예수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예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여 멸망하는 것을 방관하고 서로 위로할 것인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하게 하는 것은 머리를 눈 속에 파묻고 사냥꾼이 다가오는 진실을 외면하는 꿩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를 참으로 자유하게 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우리는 먼저 무지와 싸워야 한다. 예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함을 벗어나지 않으면 기독교에는 소망이 없다.

예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는 예수의 이름을 내걸고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불법 종교 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회원들을 늘려 교세를 확장시키고 그 교세를 힘입어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삯꾼들의 사조직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수의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맛 잃은 소금처럼 되고 말 것인데, 하물며 예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오죽하겠는가?

우리의 왕 예수의 명령을 알지 못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를 높이는 찬양도 시끄러운 목청의 떨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왕 되심을 존중하고 그 분을 높이는 방법은 예수의 왕명을 받들어 따르는 것이다. 왕명이 적힌 칙서를 읽지 않거나 해독을 못하여 알지 못하면서 왕께 충성할 수 있겠는가? 왕의 칙서를 읽고도 따르지 않으면서 왕을 존경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백성들에게 예수께서 무어라 하시겠는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23)고 하시지 않겠는가?

토지의 주인은?

토지, 자본, 노동은 생산의 3요소이다. 토지와 자본, 노동은 생산을 위해 사용되고 여기서 창출된 이윤은 각각 지대, 이자, 임금으로 지불된다. 자본은 노동의 결과 발생한 임금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며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지만, 토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인간이 토지를 점유하고 사용하지만 그 소유주는 궁극적으로 조물주이시다.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의 것이며, 그러한 인간으로부터 유래하는 자본과 노동도 결국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것인 토지를 소유하는 제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것인 다른 인간을 소유하는 제도처럼 불합리하다.

토지와 자본, 노동 중에서 가장 공급의 유동성이 없는 것은 토지이다. 토지는 그 값이 오른다고 해서 더 생산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물론 간척 등을 통해 넓혀질 수 있고 고층빌딩을 통해 활용이 가능한 공간을 넓힐 수도 있지만 이것은 토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용을 위하여는 엄청난 자본과 노동이 투입되어야 한다.

열심히 일하여 임금을 지급 받는 근로자와 열심히 모은 자본을 투자하여 이자를 받는 자본가와 달리 토지를 빌려 준 지주는 가만히 앉아서 지대를 받는다. 물론 토지의 소유자는 열심히 일하여 모은 자금으로 토지를 구입하였을 수도 있다. 토지를 구입하는 이유는 토지를 임대하는 것보다 구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지대가 이자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토지를 구입하는 것이 토지를 임대하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토지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토지의 가치는 점점 상승하게 된다. 이러한 상승세를 더욱 부추기는 것은 자신의 필요와 관계없이 토지를 구매하는 사람들이다. 토지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남는 것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급적 많은 토지를 사두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런 경제 행위이다.

토지의 값이 급격히 오르는 것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그렇지만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는 나쁜 소식이다. 토지가격이 상승하면 주택가격이 상승한다. 주택가격은 오르고 또 올라 근로자들이 평생 저축해도 살 수 없을 만큼 상승한다. 융자를 받아서 구입해도 갚기 힘들만큼 상승한다. 그리하여 임금 인상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물가도 상승하게 된다. 집값이 오르면 전세값도 따라 올라가서 서민들은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게 된다.

토지 가격의 상승은 기업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토지 값이 오른 사회 속에서 공장이나 사무실을 마련하려면 고액의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거나 오를 대로 오른 값의 토지를 사야한다. 또한 근로자들을 고용하려면 이러한 사회 속에서 적어도 생존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토지 구입 내지 사용 비용과 임금을 감당하려면 생산품의 가격을 낮게 책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가격이 높으면 생산품이 팔리지 않게 된다. 결국 기업의 운영자는 토지 가격과 임금이 낮은 지역으로 공장을 옮겨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한국의 기업들은 이미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였다. 많은 기업들이 이주한 후 한국 사회엔 일자리가 부족해 질 것이다. 그리하여 취업이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취업을 해도 평생 일하여 주택 하나 마련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정규 직업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토지의 값이 오르는 사회엔 빈곤이 찾아온다. 값비싼 토지를 많이 소유한 소수를 제외하고 많은 서민들과 기업인들이 힘겹게 살아가게 된다. 많은 가정들이 빚에 시달리게 되고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게 된다. 투기를 통해 고가의 토지를 많이 구입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사회 전체가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망해가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고, 기회조차 불평등하게 하는 것이 과연 용납되어야 할까?

구약 성경의 토지법

만 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무어라 말씀하실까? 예수께서는 토지에 관하여 가르치시지 않으셨는가?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전해지지 않았을까? 이러한 의문에 관한 답을 얻기 전에 먼저 구약 성경은 토지에 관해 어떤 가르침을 주는 지 살펴보자.

구약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잃고 빚에 허덕이다가 남의 노예가 되는 상황을 방지하려는 장치로 가득하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시고 다시는 노예 상태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를 주셨다. 빚탕감(신명기 15:1), 노예해방(출애굽기 21:2; 신명기 15:12), 토지매매금지(레위기 25:23) 등이 그것이다.

레위기 25장에는 토지와 관련된 제도가 소개된다. 이 제도에 의하면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은 토지를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고, 한시적으로 임대할 수도 있으나 매매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는 토지를 투기적 목적으로 사고파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토지투기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토지 문제에 관한 해법은 이미 성경 속에 제시되어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구약의 토지법을 잘 알고 못하며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천덕 신부나 그의 제자들이 만든 “성경적 토지 정의를 위한 모임”을 통해 구약의 토지법이 교회와 사회에 계속 전파되어 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구약의 토지법을 토지가치세제를 통해 현대 사회에 적용하려한 헨리 조지의 경제학도 대천덕 신부나 김윤상 교수, 전강수 교수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 계속 전파되어 왔다.

한국에 실행되는 종합토지세는 일종의 토지가치세로서 토지 투기를 방지하는 효과를 가진다. 아직 세율이 매우 낮지만 과세 표준이 현실화되고 있고 세율이 조금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점점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구약 성경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존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토지세를 매우 기쁘게 내어야 할 것이다.

토지의 값이 오르지 않게 되어 투기가 발생하지 않는 상황은 매우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토지를 조금이라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의 가치가 상승하기를 바란다. 주택을 한 채만 소유해도 그 주택의 값이 오르게 되기를 염원하게 된다. 주택 한 채의 값이 오를 때 다른 주택의 값이 동시에 오르기 때문에 그 주택을 팔아도 비슷한 조건의 주택밖에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지 구약 성경이 제시하는 토지법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사회에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또 복권에 당첨되지 않지만 그 복권을 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소수의 부유층에 진입할 기회와 환상을 택하며 결국 그 소수에게 자신이 힘써 번 돈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는 대신 계속 복권을 사서 복권 당첨자에게 돈을 몰아준다. 한 채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상황도 그러하다.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은 결국 많은 주택을 투기적으로 구입하여 실수요자들에게 팔아넘기는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간다. 간신히 주택을 한 채 구입한 실수요자는 자신이 산 집의 값이 오르기를 바라지만, 차라기 투기가 없었다면 그는 애당초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주택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 가지 경제 체제

구약의 토지법이 적용되는 사회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토지에 관한 권리를 가지는 사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평등하게 토지를 나누어 주셨듯이(민수기 26:52-56) 모두 평등하게 토지의 가치를 나누어 가지는 사회이다. 이에 반해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국가가 모든 토지를 소유한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국민은 결국 국가의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 중국의 경우처럼 공산주의 국가가 토지를 임대하는 제도를 도입할 경우 토지를 최초로 임대받는 사람들은 대개 공산당원들이다. 그들은 값싸게 임대받은 토지를 재임대하여 엄청난 부를 얻는다. 결국 그들은 권력만이 아니라 재력까지 얻게 된다. 이 사회 속에서 권력도 없고 재력도 없는 대다수의 인민들은 노예처럼 살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는 토지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자신의 토지를 넓힐 수 있다. 자유경쟁체제 속에서 부의 불균형이 발생하고 국민의 약 1%(50만명)가 민유지의 57%를 차지하고 전체가구의 40.1%가 한 조각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있는 한국사회와 같은 상황이 전개된다(2005년). 토지를 많이 차지한 극소수는 엄청난 부를 누리고 토지가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예처럼 살아가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도 자본주의 사회도 대다수의 인민을 노예화시키는 사회이다. 그 속에 노예화방지 장치를 만들지 않는 한 노예화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이 디자인하는 출애굽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사회이며 그들이 노예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사회이다.

구약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법이 집행되는 사회는 복지 사회와도 다르다. 복지 사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지원금을 주지만 그들이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치료하지 못한다. 구약 성경의 사회는 가난한 자들이 발생하는 원인까지 없앤다. 노예 상태가 6년보다 길게 지속되지 않게 하고, 주요 생산수단인 토지가 임대될 뿐 매매되지 못하게 하여 결국 모든 국민이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유인의 신분을 되찾고 유지하게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회는 분명히 공산주의 사회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흑백논리에 빠졌었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도 한 때 공산주의 체제가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흑백논리에 빠졌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이 그려주는 사회는 모든 국민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는 공산주의 사회도 아니고 소수의 국민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는 자본주의 사회도 아니고 모든 국민이 토지를 평등하게 소유하는 평균지권 사회이다.

이 사회 속에서는 토지가 많이 필요한 사람은 토지를 다른 개인들로부터 임대할 수 있으므로 얼마든지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이 사회는 모든 국민이 국토의 주인이 되어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참된 민주주의 사회이다. 국토에 관한 권리 없이 어찌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주권은 모든 국민이 국토에 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릴 때 실현된다. 자유와 평등, 참된 국민의 주권은 공산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평균지권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체 세대의 59.9%가 평균 1억 1800만원(공시지가기준) 상당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2005년 현재). 그러므로 1세대는 7068만원 상당의 토지 소유권(평균지권)을 가질 수 있다. 평균지권이 세제에 적용된다면 세대당 7068만원까지의 토지 보유는 과세 때에 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토지보유(즉 초과분)에 대해서는 정부가 임대료를 징수해야 한다. 그 임대료는 토지를 기준치보다 적게 가진 세대들 및 가지지 못한 세대들 중에서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평균지권 제도를 토지 소유의 불균형이 있는 사회에 갑자기 적용하면 열심히 일하여 번 돈으로 토지를 구입한 사람에게 잔인하다. 그들은 애써 마련한 토지로부터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은행에 저금을 해 두었더라면 최소한 이자는 받았을 것이다. 김윤상 교수(경북대)는 이러한 문제의 해법을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세금를 부과할 때 은행 이자에 해당하는 정도를 공제하면 된다. 토지보유로 인해 70만원을 토지세로 내어야 하는 사람의 경우, 그 토지가치만큼의 금액을 예금했을 경우 이자가 50만원이라면 이를 제하고 20만원만 내면된다. 이러한 제도가 실시되면 토지에 투자하는 것이 은행에 예금하는 것보다 벌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토지투기는 사라지게 된다. 결국 토지가치가 안정되어 토지를 구입하는 실수요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토지법이 실현되는 사회를 꿈꾸어 왔다. 미국에서는 헨리 조지가 이러한 꿈을 꾸었고, 러시아에서는 톨스토이가 그러한 꿈을 꾸었다. 중국에서는 손문이 삼민주의의 일부로 이를 실천하고자 했고 결국 손문의 제자 장개석을 통해 대만의 토지법은 구약 성경의 디자인을 일부 반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천덕 신부와 그의 제자들을 통해 구약 성경의 토지법이 교회와 사회에 알려져 왔고, 종합토지세 등으로 조금씩 법제화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를 기독교인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교회가 오히려 앞장서서 반대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는가? 이 백성들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신현우 교수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신약학

  * 이 시리즈는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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