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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7)교회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9. 7. 16:17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교회와 토지

마가복음 10:29-30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주택이나 가족, 토지를 포기한 자에게 백 배의 주택과 가족, 토지가 주어질 것을 약속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마치 한 알의 씨앗이 100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마가복음 4:8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가 되었느니라.”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싹이 터서 100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마치 이처럼 한 채의 집을 포기하면 100 채의 집을 얻게 되고, 한 평의 땅을 포기할 때 100 평의 땅을 얻게 된다. 한 사람의 가족을 포기할 때에는 100 명의 가족을 얻게 된다. 부활 이후가 아니라 현세에 그렇게 된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그런데 이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가능해 지는 기적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야말로 한 알의 씨앗이 100 배의 결실을 맺는 기적의 장소이다.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가? 교회는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므로 교회에서 이러한 기적이 이루어진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자식(‘떼끄논’)이라고 부르고,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로마서 16:13). 초기 기독교인들은 서로 형제, 자매라 불렀다. 이처럼 ‘어머니,’ ‘형제,’ ‘자매’라고 부른 것은 서로 서로를 가족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를 믿기 위해 가족과 결별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인 교회에서 100 배의 가족을 얻는다.

포기되는 목록 중에서 ‘자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어른에게도 사용될 수 있는 ‘떼끄논’이다.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빠이디온’이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복음을 핑계로 부모의 의무를 회피하지는 말아야 함을 암시한다. 포기될 수 있는 목록에서 ‘아내’가 빠진 것도 복음을 핑계로 이혼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과 일관성 있게 연결된다.

100 배 받는 목록 속에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며 사람 중에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는 전통적인 아버지가 없어야 함을 암시한다(마태복음 23:9 참조).

가족은 재산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가족을 100 배 얻을 때, 재산도 100 배 얻게 된다. 따라서 집이나 토지도 100 배 얻게 된다. 교회가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라면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가옥이나 토지는 그들 모두의 소유처럼 여겨진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집과 가족을 떠난 선교사들은 선교 여행 때 가는 곳마다 기독교인 형제들에 의하여 집들을 제공받으며 결과적으로 많은 집들을 소유함이나 다름없게 된다.

가옥과 토지를 100 배나 얻게 되는 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사도행전 4:32). 이러한 교회에 소속한 사람은 그 교회의 성도들의 재산을 모두 공유하므로 재산을 100 배 이상 얻게 된다. 단 이러한 교회에 소속하기 위해서 (여분의) 토지나 가옥이 있는 자들은 이것을 포기해야 했다.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사도행전 4:34-35). 토지를 제대로 포기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결국 죽음을 당한다(사도행전 5장). 그러나 집과 토지를 포기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공유되는 모든 재산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가옥과 토지를 포기한 자가 현세에서 100 배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은 교회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가옥이나 토지를 포기한 자는 교회를 통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교회는 그러한 가옥과 토지를 공동재산으로 관리하여 가난한 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소유를 포기한 사람도 교회가 관리하는 모든 재산들을 공유하며 사용할 수 있게 되어 포기한 재산의 100 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교회들은 성도들이 포기한 것의 100 배를 얻게 하는 공동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그들이 포기한 것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포기한 자들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집을 포기한 자들에게 집이 되어 주고 전토를 포기한 자들이 일할 수 있는 전토를 제공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전체 교회가 그렇게 될 수 없을 경우에는 최소한 교회 속에 그러한 공동체를 두어야 한다.

교회에는 예배당이 필요하고 교육관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생활관이나 숙소들이 필요하다. 그곳에는 집 없는 사람, 복음전도자, 은퇴한 선교사 등이 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숙소들이 많이 생겨나서 집이 없는 자들과 복음을 위하여 집을 버린 자들이 세계 어디를 가든지 자기 집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토지나 가옥을 교회에 내어 놓은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마땅히 현세에서도 100 배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내세의 구원과 함께 현세에서 약속받은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그것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는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나야 하며, 교회들 사이에서도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나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예수를 믿고 그의 계명을 따르기 위하여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전토를 떠나고 포기한 자는 현세에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100 배나 보상받을 것이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21절)이 지켜지는 교회에서는 또한 복음을 믿다가 가족의 버림을 받고 상속받을 집과 토지도 잃어 가난하게 된 자들 역시 교회에서 형제들, 자매들, 어머니들, 자녀들을 100 배나 만날 것이며 집과 토지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교회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는 더더구나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교회이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교회가 예수께서 기대하신 교회이다. 우리는 현실의 교회를 예수께서 기대하시고 원하신 교회의 모습으로 바꾸어야 한다.

부자들을 위한 복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이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을 수혜자로 하는 듯하지만 실은 부자들을 가장 큰 수혜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예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마가복음 10:30), 현세에서도 토지와 가옥, 가족을 100 배나 더 받을 수 있기에 가장 큰 수혜자들이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가르침은 토지를 많이 가짐으로 율법을 어긴 자들이 죄를 사함 받을 뿐 아니라 현세에 100 배의 토지를 더 얻을 수 있고 또한 내세에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이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가난한 자들이 들으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부자들이 포기하는 토지로부터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100 배의 재산을 얻을 기대도 할 수 없다. 그들이 영생을 얻을 것을 확신하고자 한다면 많은 재산을 모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아주 기쁜 소식은 아니다. 그들이 언제 재물을 모으고 토지를 마련하겠는가? 언제 율법이 허락하는 평균지권의 분량 이상의 토지를 마련하여 그것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한 채의 가옥도 없는 그들이 언제 여러 채의 집을 마련하여 남는 집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는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사실상 복음이 아니라 절망의 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 오히려 부자들에게 슬픈 소식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을 포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100 배를 남기고 내세에 영생까지 얻는 결과를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손에 든 것을 포기하기 아까와 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깝게만 여겨지는 것은 예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남는 투자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망설이다가 투자를 하지 않게 되고, 그들은 포기하지 못한 재물을 세상에 버려두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때엔 그들이 손에 쥐고 있던 재물마저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된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마가복음 4:25)는 말씀은 토지의 포기의 경우를 잘 반영하는 말씀이다. 복음을 위해 토지를 투자할 믿음이 있는 자는 100 배를 얻고 영생까지 얻게 될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 없는 자는 그 가진 재물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소유하지 못할 토지를 포기하여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다. 예수께서는 토지부자들에게 그러한 길을 열어주셨다. 영원하지 않은 토지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는 길을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이러한 복음을 부자들이 싫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세상에서 포기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가난한 자들이 이 가르침을 싫어할 이유는 있다. 그들은 예수께 항의할 것이다. 빚을 지지 않고 연명하는 것도 힘이 든데 남에게 주라니요? 우리는 언제 빚을 면하고 돈을 벌어 땅까지 사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이는 복음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을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먼저 받아들였듯이, 부자들을 위한 복음은 부자들에 의해 먼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 의해 먼저 받아들여진다. 마가복음 10:31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여기서 ‘먼저 된 자’는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권력의 서열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다. 마가복음 6:21에서 이 단어는 “권력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9:35에서도 ‘먼저 된 자’는 ‘종’에 대조되어 쓰였으므로 섬김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마가복음 10:44에서 ‘먼저 된 자’는 ‘노예’(둘로스)에 대조되어 쓰여서 주권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31에서도 ‘먼저 된 자’는 권력자, 주인, 높은 자 등을 가리키며, 부에 관하여 이야기되고 있는 문맥상 부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자들이 나중 된다는 것은 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중에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그들은 “나중 된 자”들이다.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에 대조되었고 ‘먼저 된 자’는 부자를 가리키므로 ‘나중 된 자’는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 가난한 자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다.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서 쓰인 ‘먼저 될 자’는 ‘나중 되고’에 대조되어 시간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 10:31은 부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나중에 받아들이게 되고,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이게 됨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부자가 구원받는 길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을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인다. 가난한 자들은 이 가르침으로부터 직접 얻는 것이 없는데도 이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부자들은 이 가르침의 가장 큰 수혜자인데 이 가르침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물질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된다. 문제는 이때 발생한다. 가난할 때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부자가 된 후에는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 이제 그가 가난할 때 받아들인 복음을 따라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만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

부자가 된 후에 복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복음을 변질시켜서 믿는 사람들도 생긴다. 부자들에게 토지를 포기하라고 주신 말씀을 흐려버린다. 부는 물론이고 토지나 가옥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괜찮다고 성경이 가르친다고 왜곡한다. 나아가 토지와 가옥을 많이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대적한다. 이렇게 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복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 못지않게 악한 것이다.

교회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수적인 성장의 기반을 다지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면 교회를 부자친화적으로 변질시키고 복음도 물질친화적으로 변질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참으로 부자들을 위한 복음을 이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못주는 복음으로 전락시킨다. 재물친화적인 복음의 수혜자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자도 아니다. 그 속에서 부자들은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며, 가난한 자들은 무시당하여 실족한다. 그러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마저도 수혜자는 아니다. 심판 때에 그들이 받을 벌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복음을 왜곡하는가?

우리는 복음을 믿고 복을 받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을 피할 필요는 없으며 벌어서 남에게 주기위하여 부자가 되려고 힘쓰면 좋다. 그러나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고 복음을 부자들이 받아들이기 좋게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복음을 그렇게 변질시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게 된다. 부자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복음은 더 이상 부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복음이다.

세상이 바뀌고 그리스도인들이 부자들이 되어도 복음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교회의 편의를 위해서나 우리의 기분을 위해 그것을 바꾸면 안 된다. 교회성장을 위해 복음을 변질시키는 죄, 토지를 포기하기 싫어서 복음을 변질시키는 죄, 이 죄는 복음을 따르지 않는 죄보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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