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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토지법5)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7. 9. 10: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재물에 관한 구원론적 평가

마가복음 10:23에서 우리는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얻는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여기서 ‘재물’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원어는 ‘크레마’이다. 이 단어는 단지 토지만이 아니라 유동성 재산도 가리킨다. 70인역 다니엘 11:28에서 ‘크레마’는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킨다. “그가 많은 재산(크레마)을 가지고 그의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일 수는 없다. 사도행전 4:37에서도 ‘크레마’는 토지를 팔아 받은 돈을 가리킨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크레마)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러한 용례를 통하여 볼 때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0:23에서도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다.

마가복음에서 ‘크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곳은 오직 마가복음 10:23 뿐이므로 마가복음의 용례로 마가복음 10:23의 ‘크레마’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고 검증할 길은 없다. 그렇지만 마가복음 10:23의 문맥을 통하여 이 단어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를 가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24절)은 ‘크레마’의 뜻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만일 ‘크레마’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은 율법(레위기 25:23; 신명기 27:17)을 어긴 자들이므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은 ‘크레마’가 토지가 아닌 (토지의 소산으로서의) 재물을 가리킴을 암시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데, 재물은 많이 소유해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율법이 문제 삼지 않는 것까지 예수께서는 문제 삼으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물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도덕적으로 불의하다고 평가하지 않으셨다. 세상에는 깨끗한 부자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모든 부자들을 비윤리적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내리신 평가는 구원론적 평가이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 받는다”는 뜻을 가진 표현임을 26절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말씀을 제자들은 “구원받기 힘들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많이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즉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본문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맥을 통하여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자의 경우처럼 율법을 어기면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깨끗한 부자가 존재하기 어려운 만큼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부자의 경우에도 또 하나의 장애물이 존재한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신다(21절). 불의한 재물의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재물을 사용하기 원하실 것이다. 깨끗하게 재물을 모은 부자들 중에서도 재물을 사랑의 실천에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최소한 부자들이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지키기 어려운 만큼 부자들이 구원받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의 불가능성

사람이 구원받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함을 25절은 지적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랍비문헌들은 불가능의 이미지로서 코끼리가 바늘귀로 나간다는 비유를 쓴다. 동일한 이미지를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동물인 낙타는 자연스런 선택이다. 25절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26절: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은 25절의 비유가 구원의 불가능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음을 보여 준다.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으로서 나귀가 짐을 내리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이었다면 제자들이 놀라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였을 이유가 없다. 또한 바늘귀라는 예루살렘 성문이 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예수께서 당시에 존재하지 않은 성문을 언급하셨을 리 없다. 그러므로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의 바늘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불가능한 것보다 어려운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은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부가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로 여겨진 문화 속에서는 부자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받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은 부자들에게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그러한 복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불가능할 것인가? 26절은 이러한 생각의 결론을 보여준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제자들의 이러한 결론을 예수께서는 긍정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27절).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예수께서는 부자는 구원받기 힘들지만 가난한 자들은 구원받기 쉽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부자가 구원받기 힘들면 가난한 자들은 더더구나 구원받기 힘들다는 생각을 전제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 불가능하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도 부자들처럼 구원받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부자들은 21절 말씀대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의한 부자가 불의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줄 때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진다면(21절), 깨끗한 부자가 깨끗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줄 때 더더구나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그들이 언제 많은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구원받기도 역시 힘들다.

예수께서는 부유함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셨다. 예수께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신 것은 단지 토지만이 아니다. 율법의 견지에서 보면 토지를 과다 보유한 지주는 악하고 재화를 많이 보유한 자본가는 선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깨끗한 부자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렇지만 부자에 관한 예수의 평가는 부자를 가난한 자와 대조시키면서 부자를 심판하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관점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선언함으로써 가난한 자도 구원받기 어려움을 암시한다.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기 어려움을 깨닫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

예수께서는 구원의 불가능성을 지적하시면서 가르침을 끝맺지 않으신다. 구원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예수께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조시키지 않으시고,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신다. 하나님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모두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익숙한 구원론으로 환원하면 안 된다. 27절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음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시는지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왜 부자에게 불가능한 지 살펴야 한다. 구원이 부자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토지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간 익명의 부자와 관련이 있다. 그는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포기하기 힘들어 고민하였다. 그렇다면 합법적으로 소유한 재물을 포기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재물의 포기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는 명령과 관련된다. 이 명령은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즉,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가진 명령이므로 구원론적 함의를 지닌다.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산의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땀 흘려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는 더더구나 구원이 약속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랑을 명하신다.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명하신다. 이것은 인간에게 심히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심으로써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사랑은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므로(갈라디아서 5:6)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궁극적인 조건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고 말해야 옳다.

재물과 제자도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으셨다. 다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지 가르치셨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악하지 않다.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도 악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우리의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남에게 주기 위하여 열심히 벌어야 한다.

재산을 축적하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 아니라 축적된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다. 근면검소하게 생활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축적된 자본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근심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근심할 때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가난에 처한 사람에게 부유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부유한 자들이 가진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가난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재물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토지 투기를 통해 재물을 축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며 근검하게 재물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깨끗하게 경제활동을 하여 깨끗한 부를 모아야 한다. 우리의 경제활동은 또한 신앙생활이다. 우리는 더러운 부를 많이 모으는 것보다 깨끗한 부를 적게 모으는 쪽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모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예수 제자의 길일 뿐 아니라,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기도 하다. 구원받은 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걸어가야 할 길이므로 그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함부로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기준에 미달된 사람들을 은혜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 은혜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여 이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들을 심판하실 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의 하나님은 또한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참된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변화시켜 참된 제자의 길을 가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삶의 변화시키어 바른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구원은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예수와 토지법 3) 구원과 율법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6. 5. 09:3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영생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토지 문제에 관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살피기 위하여 우선 영생에 관하여 다루어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토지 문제는 영생에 관한 관심과 관련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장에서 22절과 30절은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이것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다.

토지와 관련된 경제 윤리적 문제는 마가복음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의 일부가 아니라 영생과 관련된 신앙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토지 문제는 교회의 사회 참여 문제나 기독교 경제학의 맥락에서 다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제자도의 문제와, 영생을 얻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진다.

마가복음 10:17-31은 영생에 관한 한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생을 얻는다’는 표현은 원어를 직역하면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다”고 번역된다. ‘상속받는다’는 용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후(민수기 26:55) 각 가족이 상속받은 것은 토지였다. 토지는 각 가족에 속하여 상속되었다. 그것을 매매하여 소유권을 이전할 수 없었다(레위기 25:23). 이러한 ‘상속’ 개념을 배경으로 ‘영생을 상속받는다’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소유로 확실하게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영생’이란 무엇을 가리킬까?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이 ‘영생’이란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용례를 살펴야 한다. 마가복음 9:45에는 ‘영생’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여기서 ‘영생’은 ‘지옥’의 반대말로 쓰였는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동의어로 등장한다.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9:45).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9:47).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마가복음 10:23에도 나온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상속받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표현과 같은 뜻을 가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마가복음 10:25-26은 이를 명확히 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이를 구원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구원 얻는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영생을 상속받는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들이다. 그렇다면, 영생을 상속 받는 길에 관한 질문은 곧 구원을 얻는 길에 관한 질문이다. 영생에 관하여 좀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다니엘 12:2을 읽어보아야 한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여기서 ‘영생’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받을 수 있는 상태이다. 즉, 영생이란 부활 후에 얻을 수 있는 복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단지 현세에서 누리는 복된 상태 이상의 종말론적 구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러한 미래적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구원의 길

종말론적인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관한 질문에 예수께서는 무어라고 답하시는가? 예수께서는 “네가 계명을 안다”고 답하신다. 이것은 문맥상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질문한 사람은 그렇게 알아듣고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마태복음 19:17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명확하게 진술한다. 이 말씀에 예수의 구원론이 담겨 있다.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

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결론은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야고보서 2:26은 이것을 명확히 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4은 행함이 없는 믿음, 즉 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함을 수사의문문의 형태로 주장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런데 행함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함, 즉 계명을 지키는 행함이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믿음을 행함과 무관한 지식적 믿음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믿음에 관하여 야고보서 2:19은 말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임을 믿는 믿음, 예수는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믿음은 귀신들도 가진 지식적 믿음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순종적 믿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다. 믿음 없이 행위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행위 없는 죽은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도 없다.

어떠한 행함인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그렇지만 행함이란 어떠한 행함을 말하는가? 구원의 조건을 논할 때 막연하게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대체 어떤 행함이란 말인가? 행함도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의 본질적 필요조건으로서의 행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행함이다. 우리의 행함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면 그 행함은 믿음의 행함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대로 행하면 그 행함은 믿음이 없는 행함이다. 행함 자체를 미화할 수 없다. 죽은 믿음이 문제가 되듯이 죽은 행함도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것인가? 각자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어 행동할 것인가? 물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알려주셨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관한 지침을 제공해 준다. 그 지침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율법을 배제할 수 없다. 율법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질문 받으셨을 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율법 조항들은 주로 십계명에 담긴 계명들이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처럼 예수께서 제공하신 행함의 기준은 계명들이다.

행위 구원 교리가 틀렸다고 할지라도 행함은 강조해야 하고, 율법주의는 틀렸다고 할지라도 율법은 강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구원과 관련하여 명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의 기능이 예수로 대체된 신약 시대에 율법의 역할이 상대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십계명을 제외하고 율법이 모두 폐지되었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십계명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십계명에 포함된 안식일 계명은 어찌하여 지키지 않는가? 참으로 십계명 외의 모든 법이 폐지되었다면 왜 십일조법은 열심히 지키는가? 무엇이 폐지되고 폐지되지 않았는지 인간의 편리에 따라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5:17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완성함으로써 율법을 폐지하러 오셨다고 해석할 것인가? 제사법에 관하여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계명이 폐지되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마태복음 5:19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우리는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현대사회 속에서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킬 수 없더라도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버릴 수 없다. 명확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담은 구약 성경을 버리고 단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겠다고 하는 것이나 자신의 직관이나 도덕적 감정에 의지하는 태도나 단지 합리적 계산에 의존하는 것은 모두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내어야 하고 그 뜻을 적용해야 한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적용할 때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런데 율법 없는 행함은 죽은 행함이다. 행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율법을 떠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열심히 행하는 행함이라면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행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특히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들과 신약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의 새 계명들과 관련될 때 구원과 관계된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갈라디아서 5:6).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이다. 성경은 행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강조되는 행함은 성령께 순종하는 행함이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라디아서 5:16).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성취하는 삶이다(갈라디아 5:23).

행함 없는 믿음의 강조도 율법 없는 행함의 강조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생의 길과는 무관하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길에 관한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신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태복음 19:17).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예수의 말씀을 행위 구원이라면서 배격하고 율법주의라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과연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인가? 예수를 믿음이 없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교리에 관한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교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서 계명들을 어기고 살인하고 간음하며 도적질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자유가 하나님께 있지만 구원하지 않으실 권리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신다면 우리가 이신칭의 교리를 근거로 하나님께 부당하다고 따질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리를 용서해 주실 의무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법칙이 아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도 법칙이 아니라 구속사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신칭의 교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교리적 법칙 속에 가두면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을 제한하게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한 성도가 드리는 겸허한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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