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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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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공개한 "4대강 사업 본색! 제1탄 - 라인강의 교훈" 편에 이어..
([영상] 4대강 사업 본색! 제1탄- 라인강의 교훈(무한펌질 환영!)

"4대강 사업 본색! 제2탄 - 홍수, 가뭄" 편을 올려드립니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의 이유로 얘기하는 홍수 및 가뭄 예방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지 영상으로 엮어 봤습니다.

이 동영상을 보시고 많은 곳으로 퍼날라주시면 4대강 사업을 막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동영상을 보고 4대강 사업의 문제를 알 수 있도록 함께 동참해주세요!


"4대강 사업 본색!" 시리즈는 앞으로 2~3편 정도 추가로 제작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나올 영상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이 영상은 4대강을 지키기 원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재능기부와
"강은 살아있다"의 저자 최병성 목사님의 도움으로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고화질 영상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Here's a link to '4대강 사업 본색-홍수 가뭄편.wmv'

<관련 포스트>
[영상] 4대강 사업 본색! 제1탄- 라인강의 교훈(무한펌질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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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맘몬 숭배'가 배태한 '삼성숭배교'
'삼성숭배교'에 맞설 예언자적 지식인이 절실하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돌이킬 수 없는 국토 훼손에 착수했고, 언론 장악 및 검찰과 사법부 장악 시도를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쉼 없이 위협하고 있다. 정부가 사장 및 이사장의 인사권을 통해 공영 방송을 장악한 결과, 공영 방송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모든 기사들을 외면하고 올림픽 경기, 범죄 현장에 대한 도가 넘는 선정적인 취재 및 보도 등에 몰입해 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려 야당과 비판적인 시민들의 전열을 흩트려 놓고 전 국민의 탈정치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 땅의 가난한 시민들을 폭압적으로 다루고도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법이 거의 없다. 태안 앞바다 유조선 충돌로 생업의 터를 잃은 어민들이 부르짖어도, 용산 재개발 지역 주민들에 대한 강압적인 철거 진압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에게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과와 위로의 말을 하지 않는다.

대운하 사업의 추진 가능성이 막히자 4대강 사업으로 이름을 바꾼 참혹한 대토목 공사를 벌이는 정부의 무리하고도 강압적인 일 방식 앞에 양식 있는 국민들은 민주주의 역사가 급격히 후진하고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인다. 그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외골수로 자기 길을 가며 국토를 불가역적으로 훼손해 가는 정부를 보면 탄식과 불안은 깊어 간다.

그러나 이런 명시적인 실정 외에도 이명박 정부가 끼친 더 지속적인 폐해는 몰윤리적 금권숭배, 물신 숭배 풍토를 전 국민적으로 확산시킨 일이다. 경제 성장과 부에 대한 전 국민적 열망을 등에 업고 등장한 이 정부는 한 나라의 근본인 공평과 정의의 토대를 무너뜨릴 기세를 서슴없이 보여 주고 있다.

나라의 근본은 가장 가난하고 약한 국민에 대한 친절과 배려, 돌봄임과 동시에 불법적인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떨치는, 범람하는 권력 계층들을 공명정대함으로 견제하고 감시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OECD 가입국 중 가장 적은 복지 예산을 갖고 있는 주제에 그 작은 복지 예산마저 삭감하고 강한 자 중심의 국가 운영에 전력을 기울인다.

마침내 정부는 지난 연말에 이건희 삼성 회장만을 단독으로 사면했다. 이건희는 여러 가지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지 1년도 안 되어 사면된 것이다. 이건희의 사면에 의혹의 시선을 보낸 국민들에게 그 사면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청와대 당국자는 삼성의 평창올림픽 유치 지원이나 삼성의 세종시 입주 및 투자를 암시적으로 요구하는 논평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삼성이 갖는 경제력을 믿고 정의감과 법적인 형평의 원칙을 아주 손쉽게 내팽개쳐 버렸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삼성은 어떤 가치와도 다툴 수 없는 초월적 신성 구역에 존재하는 일종의 종교적 성소처럼 보인다. 삼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한 국민의 민족정신과 얼의 집결체요, 삼성의 성취는 현대 한 국민의 국가적 성취의 집약물이라는 생각이 많은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삼성이 이룬 모든 것, 그것은 50여 년 전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이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 꿈이었다고 보는 통속적인 국민감정을 호소하여 삼성을 비호한 것이다. 삼성의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한 정부의 사면은 돈만 있으면 정의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국민에게 심어 줌으로써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모순의 괴이함을 전혀 감지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정희식 조국 근대화와 '잘 살아 보세'의 귀착지, 삼성

삼성과 같은 재벌 그룹은 엄격하게 말하면 특정 기업가 가문이 키운 순수 사기업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관치 금융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의 각종 지원과 특혜 속에 성장했다. 그것은 "5,000년 가난을 떨쳐 보자"며 등장한 박정희 군사 정부가 양육한 기업이며 사주 기업가 가문의 창의 경영이나 공세적인 기술 개발로서만 아니라, 온갖 악조건에 저임금을 참고 불리한 노동 여건을 견뎌 가며 일해 준 직원들과 삼성에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 납품하는 하도급 업체들, 중소기업에 속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일어선 기업이기도 하다.

삼성은 결국 우리 조국의 슬픈 근대화 역사에서 태어난 한국민의 정신적 열망의 집약적 외화물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민주주의 가치와 물질적 번영과 부에 대한 추구가 각축하는 전장이었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경제 성장과 번영을 위해 모든 국가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경제적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인 민주주의, 인권, 정의와 평등, 자유와 안식권을 포기했다.

이런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향한 질주는 박정희 군사 정권 이래 권력과 견고한 동맹을 맺어 온 전근대적인 재벌 기업들에 의해 추동되었다. 그 한복판에 삼성이 있다. 삼성은 국민 기업이 아닌 다국적 자본들에 의해 움직이는 다국적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성이 대한민국의 국민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은 기실 알고 보면 4%의 지분을 갖고 있는 창업주 가족들의 출자 순환이라는 독특한 제도와, 얼마 전까지 존치되었던 그룹기획구조본부실이라는 기관의 음험한 기업 공학적 경영을 통해 전체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세습 왕조적인 기업(dynastic enterprise)이다. 세습 왕조라는 틀 때문에 그 내부에서 어떤 비리가 자행되어도 공개적인 비판과 감시를 받지 않으며, 공식 회계 장부에는 드러나지 않는 천문학적 비자금을 운영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망하지 않으려고 삼성은 그 비자금을 갖고 정부 기관, 고위 공무원, 검찰의 기소권, 법관의 판결, 지식인의 날카로운 펜, 언론, 그리고 종교적 양심까지 매수한다. 비자금의 힘으로 사로잡고 아우르고 거느리고 마침내 지배하는 일종의 신적인 영향력을 무소불위로 행사하는 신성한 지휘부로 올라선 것이다.

이 세습 왕조적 재벌 그룹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있다. 삼성물산과 반도체 등 주력 기업을 통해 우리나라 국민 총생산 22%를 담당하는 국가 대표급 기업, 삼성반도체나 전자 제품을 통해 한국의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제고하는 국가 대표급 기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성의 불의와 불법을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세계를 상대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무역으로 외화를 획득하여 국부를 증가시켰고, 한국 경제의 파이를 늘린 선구자적인 기상을 과시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7년 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전 삼성구조본 소속 법무 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의 3대 죄악을 폭로하고 고발했다. 사제단과 김용철이 밝힌 삼성의 죄악은 첫째, 조직적인 비자금 조성과 탈세를 위한 회계 조작, 둘째 용인의 에버랜드 전환 사채 헐값 매수를 통한 경영권 불법 승계 및 법정 증거 조작, 셋째, 정관계·학계·법조계·종교계·언론계를 대상으로 한 로비를 통한 양심 매수 행위다.

정치권은 삼성 비리를 수사하기 위한 특검을 임명했으나, 특검은 도리어 삼성에 면죄부를 주는 지극히 미약한 기소로 종결되었다. 약 2년 이상 끌다가 작년 연말에 이뤄진 삼성 불법 승계 관련 일반 재판도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고, 정부는 급기야 이건희를 작년 성탄절 단독 사면으로 기업 일선에 복귀시켰다. 이건희 복귀는 세종시 기업 유치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에 힘을 써 달라는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이뤄진 거래라는 것이 언론과 시민들의 판단이었다.

삼성은 이른바 떡값 검사 파동에서 밝혀진 것처럼 검찰에 엄청난 양의 돈을 뿌려 장학생들을 키우고 있으며 <중앙일보>를 통해 언론계로부터 오는 간헐적인 공격을 막아 낼 방어진을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철 변호사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고급 호텔 숙박권으로 사람들을 매수하도록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장면도 나온다. 삼성은 한국의 지휘부를 돈으로 매수하여 지배한다.

그 결과 삼성의 가족으로 입적된 사람들은 보편적인 공익이나 대의가 아니라 삼성 기업의 사적 이익에 우선 복무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지휘부·언론·지식인·사법부 모두가 삼성 앞에서는 작아진다. 일반 국민들도 삼성의 경제적 위력이 내뿜는 아우라에 의해 삼성 숭배에 쉽게 빠져든다. 삼성은 도덕·윤리·정의·인권 가치 등을 삼켜버리는 무저갱이며, 부·풍요·국가적 자부심·국가주의의 상징이다.

삼성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담은 <삼성을 생각한다>.

 
 
전 삼성그룹 구조기획본부의 법무 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를 읽어 보면, 삼성 문제가 단지 정치와 경제 영역의 일탈이나 불법이라는 단순한 악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정밀한 신학적 성찰을 요하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삼성의 경영 지휘부는 로마제국의 멸망기에 나타나는 흥청망청한 부패한 귀족들과 달리, 아주 영악하게 깨어 끊임없이 정복지를 찾아 나서는 민첩성과 공격성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

분별력을 잃고 유흥과 쾌락에 탐닉하여 자기 파멸로 치닫는 명백한 악이 아니라, 작은 일에는 선을 도모하면서 더 큰 악을 범하는 교묘하게 위장된 악이다. 스스로도 자기가 하는 일들이 악임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삼성 지휘부는 확신에 차 판사를 30억으로 매수할 생각을 하고 국회의원에게 돈다발을 갖다 줄 생각을 스스럼없이 실행한다. 삼성은 우리나라의 모든 중요한 요소에 자기들의 에이전트(대리자)를 심어 둔 거대한 왕국인 것이다. 대형 법률 회사를 능가하는 300명 이상의 변호사들을 거느리고 국가 정보기관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정보망을 구축한 경제 연구소와 비선 정보 구축 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의식 있는 시민들은 삼성 문제를 알지만 그 위세에 눌려 무력감 속에 방치하거나 외면해 왔다. 삼성의 문제에 문제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김용철 변호사는 이 책을 통해 삼성의 조직적 비리를 폭로하고 삼성이 국민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공개적으로 피력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이건희 일가의 자기 보존을 위한 원색적인 금권 정치 공학에 관한 이야기이며, 무슨 이유인지 삼성의 쟁송을 분별 있게 다룰 능력을 박탈당한 무능한 검찰과 사법부 이야기이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언론의 이야기다. 그는 책에서, 삼성이 이렇게 큰 죄악들에 연루된 기업이면서도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경제라는 물신을 위해 오늘날 모든 가치를 뒤로 미루는 이른바 국민 정서 때문이라고 본다(86쪽). 떡값 검사나 기자들, 학자들도 이런 국민 정서의 뒤에 숨어 삼성 비리를 은닉하거나 모른 체한다고 볼 수 있다. 김용철이 이 책에서 부각시킨 삼성 비리 중 하나는 삼성 왕조의 경영권 세습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증언이다.

이 책이 폭로하는 또 하나의 삼성의 대국민 위장 비리는 <중앙일보>의 삼성 계열 분리 선언 책동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99년에 <중앙일보>는 삼성으로부터 계열 분리하겠다고 대국민 선언을 하지만 그것은 음험한 거짓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앙일보>의 삼성 계열 분리는 위장이었고, <중앙일보> 편집국 내부 정보 보고가 하루 두 차례씩 삼성 구조본에 전달되었다"고 폭로했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또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비판한다. 삼성에서 노조를 설립하면 어떻게 되는지 전 삼성노조 위원장 '김성환'의 고난에 찬 인생 역정이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저자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직원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 공무원의 철저한 매수로 인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왜 삼성은 노조를 무서워할까? 삼성 직원들의 급료가 다른 회사들의 급료보다 월등이 높다는 사실을 보면, 삼성의 노조 포비아의 원인은 임금 협상 때문이 아니라 딴 데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비자금 경영, 불투명 경영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노조는 너무 투명한 공조직이라서 뇌물로 매수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노조가 있다면 이건희가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자기 아들에게 삼성그룹 전체를 넘겨주기 위해 에버랜드 전환 사채 발행을 통한 불법적 경영권 승계 행위를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한 회사의 노조는 단지 임금 협상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라, 기업의 공적인 본질을 지키려는 기업 자체의 자기 검증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성은 자기반성과 점검을 수행할 기관이 없는 윤리와 도덕의 사각지대에서 돈으로 모든 것을 성취해 온 것이다. 삼성은 돈의 신적 위력을 가장 신실하게 신봉하는 물신 숭배교 종단인 것이다. '돈이 충성을 낳는다'는 삼성식 보상 원칙은 종교적 구원론처럼 잘 작동하고 있다. 실적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의 급여를 지급함으로써 삼성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직원들에게 뿌듯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심어 준다. 이것은 삼성 숭배자가 누리는 일종의 유사 구원감인 것이다(참조. 마 6:22~24).

이처럼 돈에 위력에 토대를 둔 삼성의 금권 숭배적 구원관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더러는 삼성 비자금을 한국 기업의 특수 상황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다국적 기업 삼성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비책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비자금은 단지 회장 개인이나 가문의 축재의 일환이 아니라 기업으로서의 자기 존속을 영속화하려는 비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삼성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와중에서 여차하면 몰락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고도의 기업 경영 방식의 일환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삼성의 비자금 의존적인 기업 유지나 확장 노선이 그 안에 엄청난 반기업적 불의와 죄악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건희가 운용한다고 알려진 비자금 4조 5,000억 원은 대부분 사원들과 직원들에게 돌아가야 할 임금, 주주들에게 돌아가야 할 배당금, 고객들이 맡겨 둔 보험금 등에서 갈취한 자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자금은 횡령과 배임을 통해 생긴 돈인 셈이다. 엄연히 주식회사인 삼성이 주주들과 사원들을 오랫동안 속인 결과 그렇게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용철의 책에서 밝혀졌듯이, 삼성의 비자금은 불투명하고 어두운 용처를 위해 비축되었던 돈이다. 지식인, 언론인, 공무원, 그리고 법조인의 영혼을 사는 데 뇌물로 사용된 돈이었던 것이다. 전 세계 50위권 대기업이 비자금을 갖고 대한민국의 양심을 매수하고 자기 이익에 복무하도록 역사한다는 사실은 무섭고도 서글픈 일이다. 결론적으로, 김용철은 삼성 비리의 뿌리는 비자금이며 그 비자금의 용처는 인격(영혼) 매수임을 분명하게 밝힌다(346쪽).

대한민국 국민의 물신 숭배가 바로 삼성 숭배교의 발상지

19세기 미국의 기독교 정치 사상가인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자신의 저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전 국민적 존경도 누리는 권력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권력자가 타락한 자라면 국민의 도덕성도 함께 타락한다"고 경고한다. 또한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삼성 이건희를 존경하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민 기업가로 추켜세우며, 엄중한 죄를 짓고 유죄 판결을 받은 지 1년도 안된 사람에게 사면을 단행하는 나라에서는 국민성이 덩달아 급격하게 타락하게 된다. 삼성이 겉으로는 국가 대표급 기업이지만 우리 사회의 근본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지극히 반공동체적인 암적 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명박 정부와 삼성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맘몬 숭배(Mammonism)라는 한 배에서 태어난, 쌍생아(雙生兒)처럼 제휴하여 국민성의 타락을 부추기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돈을 숭배하고 성공과 쾌락을 갈망한다. 삼성과 이명박 정부, 돈을 숭배하고 수단 방법을 불문하며 성공과 쾌락을 타락한 국민들은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당기는 동맹자들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삼성,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은 우리 국민들, 우리 자신들의 타락한 인간성, 뒤틀리고 왜곡된 기독교 신앙을 문제 삼는 행위임이 드러낸다.

돈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경배하는 것이 물신 숭배다. 이 물신 숭배의 근본은 구매력, 욕망 충족력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욕망이다. 돈 숭배는 결국 영적 존재가 자기의 욕망을 신격화하고 무한히 확장하려는 데서 생겨난다. 자기의 안전과 영원한 존속 욕구를 신격화하는 것이다. 삼성 자체가 비자금을 비축하는 이유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안정 욕구의 신격화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물신 숭배는 조직이나 기업의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원천이다. 한 기업의 영속적 존속은 비자금에 의해 가능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공평과 정의를 보좌로 삼는 하나님나라와 견고한 동맹을 맺음으로써 성취되지 돈을 통한 권력 매수, 양심 매수를 통해 결코 성취될 수는 없다. 또한 가난과 불편을 견디는 능력이 있다면 '돈 숭배교'에 빠지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8장은 물신 숭배의 본거지인 음녀 바벨론의 멸망을 그리는 묵시록이다. 여기서 두 번씩이나 "무너졌도다"라는 선고를 받은 나라는 큰 성 바벨론이다.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본거지며,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동굴이라고 불린다(2절). 바벨론은 땅의 왕들과 음행하여 정절을 더럽힌 음행의 대가로 받은 부로 땅의 상인들(23절에 따르면 왕족들)을 치부케 했다는 명성을 들었다(3절).

그러나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바 되었다(5절). 음녀 바벨론은 땅의 상인들로부터 온갖 상품을 사들였는데 그 상품 목록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 상품들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었다(12~13절). 사람들의 목숨, 영혼, 인격이 바벨론이 매입한 상품이었다. 이 구절은 바벨론이 인격과 영혼을 매입해 노예 무역을 했다는 말로 이해된다. 동시에 그것은 바벨론 체제에 저항하는 의인들의 목숨을 빼앗는 살상 행위를 함의할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음녀 바벨론 중에서 발견되었다(24절). 바벨론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외치는 선지자들과 성도들을 죽이고 부를 탐하고 축재하고 사치와 번영을 누린 도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성 바벨론을 하나님께서는 파괴시킴으로서 심판하셨다(20절, 계 14:4~5, 8). 음녀 바벨론은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으로서(14:15~18)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대변하는 예언자들과 성도들을 죽여 버림으로써 방해받지 않고 얻은 부로 자기 영화화, 자기 영속화를 꾀하며 땅의 왕들과 견고한 동맹을 이루었으나, 하나님은 홀연히 그 바벨론을 파멸시켜 버렸다. 사람들의 영혼까지 매수하여 노예화하는 음녀 바벨론을 하나님은 처참하게 심판하셨고 파멸의 바다로 집어던지셨다.

이것이 물신 숭배자의 말로다. 물신 숭배의 본거지 음녀 바벨론은 자신이 범한 죄악과 음행의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영원히 번영할 것 같은 부를 손에 넣었으나 홀연히 망한다. 돈의 힘으로 영혼을 사들이고 국가 기관의 양심을 통째로 매수하는 재벌 기업의 불법 행위와, 가난한 자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에 전혀 응답이 없는 불의한 정부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홀연히 망하는 운명이 엄습한다는 것이다.

삼성 숭배 마법 깨울 예언자적 사명자

삼성 숭배의 마법에서 국민을 깨워야 할 사명자로서의 예언자적 지식인의 분발을 기대하며 장 폴 사르트르(<지식인을 위한 변명>)와 에드워드 사이드(<권력과 지식인>)에 따르면, 지식인의 핵심 조건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거부하는 비판 정신이다. 특히 사이드는 지성인은 언제나 자신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분명하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절대적으로 권력에 흡수 고용되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하며, 어떤 권력이나 권위라도 그들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 만큼 독립적이고 비판적으로 행동할 것을 주장한다.

   
 
 

▲ 김회권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사이드는 지성인들은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적·인종적·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며, 보편적 진리를 확산하기 위하여 특정 인간들을 특권적으로 우대하는 안이한 확신들을 초월하기 위해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의 사명을 수행할 용기는 인간 스스로에게서 연원될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을 경험한 지식인들만이 이런 의미의 고독한 그러나 보편적인 지식인의 기개를 획득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점차로 기업체, 국가 기관, 정당 등의 권력에 고용된 유기적인 지식인들로 가득 차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주장을 각종 논리와 통계와 전통적 지혜의 이름으로 주창하고 있다. 이런 지식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지식인의 구원은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영적 개안을 의미하며,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계급, 국가적 기업적 특권으로부터의 창조적 탈출을 통해 보편적인 진리를 설파하는 사명인으로 거듭나는 경험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 폐쇄적이고 자기 복무적인 삼성 같은 조직체들로 가득 차 있다. 당파적 이익을 초월하는 진리를 말하는 의인들이 씨가 말라가고 있다. 모두 다 정신적으로 삼성 지향적인 기생적인 인간형으로 변질되어 간다. 물신 숭배적 자기 조직 존숭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무한 증식적 자기 확장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지식인이 더없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런 예언자적 지식인은 삼성에서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국가 기관에서도, 다른 기업체들에서도, 그리고 세속화되어 짠맛을 잃어버린 교회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김회권 / <복음과상황> 발행인,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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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원하신 교회의 모습 

마가복음 10:17-22에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토지를 포기하는 교회이다. 대토지 소유를 포기한 자들만이 소속되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교회이다. 평균이상의 토지가치 소유를 포기하지 않고 교회로 들어 온 자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징계를 받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이 교회에 소속하고 싶을 경우에 심히 슬퍼하며 근심하게 된다. 그들은 토지를 택하든지 예수를 택하든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0:21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이러한 교회를 이루도록 뜻하셨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음을 사도행전 2:43-47은 보여준다. 이러한 교회에는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으며,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표적과 기사가 사라지고 있으며,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부동산 투기를 할 때 교회도 부동산 투기를 하였기 때문이며, 세상 사람들이 토지를 탐할 때, 교인들도 토지를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물을 좋아하고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가 하나님의 것임을 잊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주신 토지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레위기 25:23)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웃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토지 투기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교회가 받는 벌은 성령께서 떠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표적도 기사도 사랑도 기쁨도 없으며, 오직 불신과 부패와 탐욕과 투쟁이 남을 뿐이다. 세상은 이러한 교회를 미워하게 되고 그러한 교회는 결국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다.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는 세상과 같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른 교회이다. 세상이 토지를 탐할 때, 토지를 버리는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은 어둡지만 교회는 밝아야 한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희생적이어야 하며, 밤이 깊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별빛처럼 정결해야 한다. 교회는 밤 같은 세상 속에서 함께 밤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동화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의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동화된다면 세상이 교회로 나아올 이유를 잃게 될 것이다. 교회는 결코 세상처럼 되어선 안 된다. 잠시 살기 위해 세상처럼 된 교회는 영원히 죽게 될 것이며, 고난을 받더라도 세상처럼 되지 않은 교회는 잠시 죽는 것 같으나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한국의 미래 

하나님은 지계표를 옮겨가며 남의 토지를 점령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셨다(미가 2:2-4).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남의 토지를 빼앗는 자들이 받는 벌은 그들의 땅이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동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빼앗아 넓힌 이스라엘의 대토지소유주들의 땅은 결국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로마에 빼앗겼다. 결국 나라를 잃고 땅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빼앗긴 땅에는 자유도 풍요도 없이 슬픈 애가만 남을 뿐이다. 빼앗긴 땅에는 과연 봄이 오는가? 봄이 와도 그 봄은 동일한 봄이 아니고 가을이 와도 그것은 동일한 가을이 아니다. 봄은 정복자들을 위해 고단히 일해야 하는 봄이며 가을은 정복자들에게 열매를 빼앗기는 가을이다.

한국이 부동산 투기 세력에 의해 멍들고 있을 때,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땅인 간도와 우리 민족의 역사인 고구려사와 고조선사를 빼앗고 있었다. 이제 중국은 유사시에 북한의 토지 전체를 차지하려고 넘보고 있으며, 일본은 독도를 침탈하려고 애쓰고 있다. 한국에서 국민이 국토에 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할 때에는 미가서의 예언대로 한국은 주변 나라에 의하여 그 영토를 빼앗기는 벌을 받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공의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며 온 국민이 국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된다면, 이 땅을 노리는 나라들이 오히려 지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받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웃의 토지를 소유하려는 야욕을 실행에 옮기려는 자들에 관하여 구약성서는 선언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한 나라의 영토 경계를 지키는 일은 한 나라 속의 토지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 나라 속에 이웃의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투기 세력들이 많이 있으면 그 나라의 영토 경계표도 이웃 나라에 의해 옮겨질 위험에 처한다. 로마가 망한 것은 자영농들의 토지 경계표들이 무너지고 대토지소유제가 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가 각각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망한 것도 토지 경계표가 옮겨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토지법이 무시되고 대토지소유제가 도입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에도 토지경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많으면 대한민국의 영토 경계표도 옮겨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 자신의 땅을 한 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누가 한국의 영토를 수호하려고 외적과 싸우겠는가? 그러므로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는 법과, 토지가 전 국민에게 골고루 소유될 수 있는 정책은 조국의 영토 수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 나라의 국방력은 곧 그 나라의 경제력에 비례하며, 나라의 경제력은 산업의 경쟁력에 비례하여 발전한다. 그러나 자본이 산업기술에 투자되는 대신 토지에 투기되는 나라에는 산업의 경쟁력이 생길 수 없다. 그러한 나라는 거품으로 인해 경제규모가 성장하는 듯하지만 그 거품이 꺼지는 날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품 경제를 키우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국가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이다. 따라서 이것은 영토를 수호할 힘을 잃게 하는 매국적인 정책이다. 조국의 영토의 경계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지키려면 부동산 투기 세력으로부터 이 땅을 보호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따라서 모든 국민은 국가의 영토에 관한 평등한 주권을 가진다. 이러한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진 나라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계제국 로마도 그러했으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마저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멸망했다. 대한민국의 영토 주권을 무너뜨리려 하는 이웃나라의 야욕 앞에 우리가 저항력을 키우는 길은 조국의 영토의 주권을 모든 국민이 누리는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국민이 가질 수 있는 평균치 이상의 토지가치 소유에 대해서는 적절한 과세가 이루어져야 한다. 토지의 경계표를 옮긴 사람들이 세금으로 대가를 치러야 국가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고 영토를 수호하는 재원도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애국자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고귀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예수를 따르는 자의 신성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국민의 약 1%가 민유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전체가구의 반가량이 한 조각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은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소수의 부자들이 전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1세기 로마제국의 상황과 유사하며,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킨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과 유사하다. 이처럼 토지 경계표를 무너뜨린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 오시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토지와 부동산을 많이 가진 자들이 세금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시면 무어라 하실까?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부동산 투기에 열심인 자들을 보면 무어라 하실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토지가 필요하여 보유하려거든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지재원으로 사용하도록 하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맺음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을 환영할 사람들이 교회로 모일 수 있고, 이 예수의 말씀에 슬퍼하여 예수를 떠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면 한국교회에는 미래가 있다. 또한 그러한 교회가 있는 사회에도 미래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암담한 것은 한국 사회에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빛을 잃고 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암담하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지만 그 정신은 이미 죽지는 않았는가? 죽은 시체와 같이 되어버린 교회들이 썩는 냄새가 세상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많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반대하고 있다.

이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이 아니면 이러한 교회에는 소망이 없다. “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교회는 나사로처럼 살 것이지만, 이를 거역하는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게 될 것이다. 예수냐, 토지냐의 선택은 교회에게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이다. 기독교는 토지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예수 없이 살 수 없다.

재물과 권력을 얻었지만 예수를 버린 기독교의 앞날은 불을 본 듯 분명하다. 그것은 멸망이다. 그러한 교회는 오히려 세상에 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 그러나 교회의 멸망은 세상이 기뻐할 일이 아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무엇으로 세상을 비추고 무엇으로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할 것인가? 구한말과 비슷한 시기를 맞이한 지금 이 민족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그 복음을 체화한 참된 교회가 필요하다. 그러한 교회들이 하나둘 늘어나지 않고 돈과 성장과 권력만을 좋아하는 교회만 늘어난다면 한국 기독교와 이 민족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이 사회에 남은 마지막 소망이다.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신음하며 기다리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교회의 등장이다. 이러한 교회가 등장하여 세상을 비추기를 온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이 한국을 가득 채울 때 한국은 동방의 찬란한 등불로 깨어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공의로운 나라가 될 것이다.

토지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교회가 앞장서서 따를 때, 한국 사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디자인한 노예 없는 사회, 헨리 조지가 꿈꾸던 토지가치세 복지사회, 손문이 소망하던 평균지권 사회, 자신의 토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산상수훈의 삶을 살려고 한 톨스토이가 염원하던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강대국들이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애국가 가사처럼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우하시는 나라가 될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명기 28:1, 7).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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