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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 14) 역사적 예수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3. 30. 11:5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전승자들은 전통을 보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승 과정에는 전승자의 경향성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전승자의 경향성은 전통에 담긴 내용에 적용된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고 전승자의 신학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17-22은 본래의 전승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일 수도 있고, 마가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여 재해석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0:17-22에 담겨진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과연 역사적 예수께서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주신 내용을 그대로 담은 것일까? 

설명가능성 원리로 본 마가복음 10:21-22 

사도행전 2:45과 4:34-35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5:1-11에는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숨기고 바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벌을 받아 죽는 이야기가 기록된다. 누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일부러 창작하였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누가는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 마가복음 10:22을 부에 관한 것으로 바꾸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23). 이처럼 토지에 관한 마가복음 본문을 부 일반에 관한 것으로 변경한 누가가 토지에 관한 이야기를 창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바치지 않아서 벌을 받아 죽게 되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어려움은 이 이야기의 진정성의 표지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일을 행한 이유는 그들이 믿고 따른 예수의 가르침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내용이 있을 때 설명이 잘된다. 그러므로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한 마가복음 10:21-22의 내용은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유대교에의 비유사성 

토지의 소유가 소수에게 편중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린 사회를 배경으로 볼 때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마가복음 10:21)은 매우 적합하다. 이것은 그 시대에 마땅히 선포되어야할 메시지였다. 또한 이러한 메시지는 당시 유대인 권력자들이 싫어할 메시지였으므로 예수께서 그를 죽일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당하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그의 죽음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이므로 역사적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가의 전승경향성에의 비유사성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난해구절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2:5-7은 예수께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 용서를 하심을 기록하며, 마가복음 6:48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물 위를 걷는 일을 행하심을 기록한다. 마가복음 14:62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될 것과 하늘 구름을 타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듣기엔 신성모독으로 들렸다(마가복음 14:64). 그러므로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 이야기를 창작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마가 10:18은 역사적 진정성 때문에 보존되어 왔고, 그리하여 마가도 이것을 보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22에 사용된 ‘끄떼마따’(토지)는 과연 마가가 창작한 흔적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누가복음의 ‘쁠루시오스’(부유한)가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는가? ‘끄떼마’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단지 4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1번 사용된다. 한편 형용사 ‘쁠루시오스’는 신약성서에서 28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2번 사용된다. 70인역(외경제외)에서는 ‘끄떼마’가 7번, ‘플루시오스’가 31번 사용된다. 그러므로 ‘끄떼마’는 ‘쁠루시오스’보다 덜 친숙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더 친숙한 ‘쁠루시오스’(부유한)를 ‘끄떼마’(토지)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혹시, ‘끄떼마’(토지)가 아니라 ‘크레마’(재물)이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을까? ‘크레마’라는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10번 사용되었고, 신약성서에서 6번 (마가복음에서는 1번)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7번, 신약성서에서 4번 사용된 단어인 ‘끄떼마’보다는 더 친숙한 단어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크레마’를 일부러 상대적으로 덜 친숙한 ‘끄떼마’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마가가 10:22을 창작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만일 창작하였다면 마가는 그가 다른 곳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끄떼마’보다는 9번이나 사용한 ‘아그로스’(전토)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공관복음서 전승경향성에서 비유사성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예수는 “왜 나를 선하다고 부르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답한다(18절). 예수의 신성을 믿은 초대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일부러 만들어 내었을 리는 없다. 초대 교회의 전승 경향성은 마태복음에 반영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평행구절(19:17)에서 “왜 나에게 선함에 관하여 말하느냐? 오직 한분이 선한 분이시다.”라고 표현을 바꿈으로써 예수를 선하다고 부른 것을 부정하는 마가복음의 표현을 피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마태복음의 저자도 고치고 싶어 한 마가복음 10:18의 내용과 표현을 창작하였을 리 없다.

마가복음 10:19의 ‘사취하지 말라’는 마태복음(19:19)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절(18:20)에서 생략된다. 이것은 이것이 십계명에 속한 계명이 아니므로 십계명에 속한 계명들을 언급하는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일부러 십계명 목록의 중간에 십계명 중에 하나가 아닌 ‘사취하지 말라’를 추가하였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1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곧 이어 그 사람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지적되고(21절), 그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근심하여 떠나감이 묘사된다(22절). 결국 이렇게 행할 사람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때 예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의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져 생략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는 기록을 일부러 창작하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마가복음 10:21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네가 온전하려고 한다면”이라고 바꾼다.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는 마가복음의 신학이 너무 과격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고 믿고(마태복음 5:17) 이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5:19) 마태복음 저자에게마저도 과격하다고 여겨진 예수의 가르침이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마가복음 10:22도 전승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기보다는 역사적 진정성에 토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검증된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의 일치 

마가복음 10:17-22에 나타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토지제도를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면모이므로 이러한 면모에 일치하는 (많은 토지를 가진 자는 토지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는) 마가복음 10:21의 예수의 가르침도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0:9은 창세기 2:24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데,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10:9의 내용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증거는 우선 이 말씀이 많은 독립 자료들에 의해 지원받는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0-11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나누이지 말고, - 나누일지라도 재혼하지 않고 지내거나 남편과 재결합하라, - 남편은 아내를 이혼시키지 말라.” 이 말씀은 이혼을 금하는 점에서 이혼(법적 이혼) 내지 별거(사실상의 이혼)를 금하는 마가복음 10:9(“하나님께서 합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게 하라”)의 말씀의 내용과 일치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는 마가복음이 기록되기 전이었을 것이므로 고린도전서의 증거는 마가복음 10:9-12의 진정성을 지지한다.

예수 당시 유대교에 이혼을 완전히 금한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의 말씀은 당시 유대교에 의하여 쉽게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예수께서 미움을 받아 박해를 당할 수 있게 된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7:15은 믿지 않는 자가 이혼하고자 하면 이혼하라고 권하는데, 이것은 이방 기독교인의 경우에 배우자가 불신자일 경우 이혼이 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마가복음 10:9의 말씀이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9은 초기의 이방 기독교의 산물일 수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므로 마가복음 10:9은 마가의 창작이 아닐 것이다.

마태복음 19:9은 마가복음 10:11에 “음행으로 인하지 않고는”이라는 예외 조항을 추가한다. 이것은 마가복음 10:11이 너무 엄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배우자가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상황에서도 이혼을 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너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저자는 이러한 예외 조항을 추가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매우 철저한 유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마태복음에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마가복음 10:11이 마가나 초대 교회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가복음 10:9은 배우자를 이혼시키고 재혼한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부합한다. 세례 요한이 이러한 결합을 비판하고 죽임을 당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셨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마가복음 10:9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주어질 수 있는 말씀이다. 또한, 마가복음 10:9은 남편이 아내를 마음껏 이혼시킬 수 있었던 (불공평한) 당시 상황 속에서 주어질 수 있었던 말씀이다. 그러므로 당시 역사적 배경도 이 말씀의 진정성을 지원한다.

구약의 정신을 철저히 적용하는 마가복음 10:9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마가복음 10:17-22도 나타난 구약이 토지법의 정신이 철저하게 적용하므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회 배경에의 적합성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에서는 전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하는 귀족들이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통치 영역의 절반 이상의 땅을 소유하였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예를 들어 하르솜(Charson)의 아들 엘르아잘은 아버지로부터 1,000 개의 마을들을 상속받았다고 한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사도행전 4:36-37은 레위인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사도들에게 내어놓는다고 기록한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구약의 토지법이 어겨지고 있던 당시 사회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사람과 같이 십계명을 지키되 토지법은 어기는 유대인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미 토지의 균형적인 소유가 깨어진 사회 속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는 구약성서의 토지법을 어기고 있는 것에 관한 가책을 갖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가책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마가복음 10:20, 22은 당시 배경에 잘 들어맞는다.

맺음말 

마가복음 10:17-22은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 즉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본문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한 증거들을 검토해 볼 때, 이것은 마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예수를 믿든지 역사적 예수를 믿든지 예수를 따르고자 하면 토지에 관한 무한한 권리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를 포기하기는커녕 부동산에 대한 세금마저 내기 싫어하는 모습은 예수를 따르는 바른 모습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중에는 대토지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토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일 수 없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장로 대통령이 믿는 건 돈의 신 '맘몬'
 난, 4대강에 생명의 십자가 세운다"
[인터뷰] <강은 살아있다> 펴낸 최병성 탐사보도 전문 시민기자
10.03.08 10:25 ㅣ최종 업데이트 10.03.08 10:55 김병기 (minifat) / 권우성 (kws21) / 홍현진 (hong698)
  
최병성 목사.
ⓒ 권우성
최병성

그는 지난 2년여간 틈만 나면 배낭을 메고 4대강으로 향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그리고 전국 곳곳에 산재한 저수지 등 물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번 출장 때마다 3000여컷 이상의 사진을 찍어 그의 외장하드엔 10만여컷 이상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의 커다란 책장도 강과 물의 생태계에 대한 책과 논문 등으로 빼곡이 채워져 있다. 최근 그는 <강은 살아있다>(황소걸음 출간)를 펴냈다. 발로 쓴 대한민국 4대강 사업 재앙 보고서다. 

전업기자도 흉내내기 힘든 4대강 사업에 대한 탐사보도 시민저널리즘의 전형이다. 최병성(47) 시민기자는 목사다. '장로 대통령'은 4대강에 불도저와 굴착기를 총집결시키고 진두지휘하고 있는데, '목사 시민기자'는 온몸을 던져서 이를 막고 있다. 아이러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지난 4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최 목사는 "이명박 대통령이 믿고 있는 것은 돈의 신인 맘몬"이라고 규정했다. 왜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가 펴낸 263쪽의 책 속에 그 이유가 담겨있다.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대국민 사기극"  

"이명박 대통령이 꿈꾸는 4대강의 비전은 여의도와 잠실 앞의 한강입니다. 손도 발도 담글 수 없고 사람과 강이 단절된 그 곳. 얼마전 <조선일보> 기사도 언급했듯이 4급수입니다. 성직자가 순화된 말을 써야하지만, 사실 '똥물'입니다." 

최 목사에게 4대강 사업을 한마디로 규정해달라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더 험한 표현이 되돌아왔다. 

"국토와 국민, 그리고 생명에 대한 국가권력의 테러입니다. 그럼에도 혈세를 써가면서 강을 살린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니,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대국민 사기극입니다." 

그는 이어 "이명박 장로님이 펼쳐보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되어 있고 이 땅의 생명을 보존하고 유전케하라는 게 기독교에서 믿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생명을 단절시키고 파괴하는 4대강 사업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맘몬의 뜻"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외국의 강 살리기와 '이명박표 강살리기'의 차이점을 물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을 통해 기후 이상에 대비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이 맞다면 독일 등 선진국은 이미 150년, 200년 전에 강을 콘크리트 수로로 만들어 기후 이상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100여 년이 지나면서 지하수가 고갈되고 홍수가 났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수로를 다 뜯어내고 모래톱과 여울을 만들어 원래의 강으로 복원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이명박표 강살리기는 1-2세기 전에 선진국에서 했던 실패를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녹색 뉴딜'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며 강살리기 사업을 통해 일자리도 만들고 지역경제도 살리겠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는 이같은 주장에 대해서도 "당장 들통날 거짓말"이라고 단언했다.  

"4대강 사업 현장에 가보세요. 굴착기과 중장비만 있습니다. 또 사업비 22조 원 중 5조7천억 원이 준설비용입니다. 요즘 삽으로 준설하는 데가 있습니까? 파이프 흡입 기계로 준설하는 데, 사람이 없어도 그냥 돌아갑니다.  

최근 한강 이포교 공사현장에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경비가 쫓아왔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다리에 경비를 세워놓고 사진을 못 찍게하더라고요. 불편한 진실을 가리려고 고용한 경비, 이게 4대강 사업이 창출한 일자리입니다." 

그는 이어 "부자감세로 인해 지자체 교부금이 몇조 원씩 삭감돼 올 7-8월 이후로는 공무원들 월급 줄 돈도 없는 상황인데 4대강 사업에만 세금을 쏟아붓고 있다"면서 "지역의 중장비업체들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덤핑을 해서 참여하고 있고, 큰 몫을 챙기는 곳은 턴키방식으로 수주한 서울의 대형 건설업체들뿐"이라고 말했다. 

전체 하천의 1% 공사로 홍수 예방하겠다고?  

  
최병성 목사.
ⓒ 권우성
최병성

그는 또한 "4대강 마스터플랜에 적시된 사라지는 농경지, 그러니까 강변의 채소 경작지와 보(사실상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는 농경지가 5천7백만평에 달한다"면서 "여기에서 쫓겨난 많은 농민들이 무직자나 거리의 부랑자가 될 것이고, 이로인해 채소류 가격이 폭등하면 국민들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는 4대강 사업을 통해 물부족을 해결하고 홍수를 예방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 목사는 이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일축했다.  

"정부 논리를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4대강 사업 공사구간은 634km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하천의 길이는 64만km입니다. 전체 하천의 1% 구간을 공사해서 홍수를 예방하겠다는 것은 말장난입니다. 게다가 공사구간인 4대강의 경우 홍수가 나지 않습니다. 홍수는 지천과 샛강에서 납니다.  

우리나라 하천법상 최상위계획인 수자원종합장기계획에는 '대한민국은 더 이상 물부족 국가가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치수장과 정수장의 가동률은 설계 용량의 50% 미만입니다. 그만큼 물이 남아돌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이 부족한 곳은 수도공급률이 40% 미만인 섬지역과 산간지역인데, 4대강에 모아놓은 물을 섬과 산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최 목사가 가장 크게 우려하는 바는 식수대란이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녹색은 녹조류가 똥처럼 떠다니는 죽음의 녹색"이라면서 '공사중'과 '공사완료 후'의 식수 대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최근 함안보 등에서 발견된 오니토에 대해 정부는 수질오염이 아니기에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준설의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1차적으로 파이프로 강바닥을 준설할 때 탁수가 일어납니다. 대대적으로 준설을 하면 오니토에서 나온 치명적인 성분들이 강물로 퍼져가겠지요.  

또 우리나라 수중 준설의 경우 모래만 뽑아내는 게 아닙니다. 70% 이상이 물입니다. 오니토와 섞인 중금속 물을 침사지에서 거른 뒤에 다시 강물로 내보내야 하는데 낙동강만해도 4.4억톤을 준설합니다. 이명박 정권 3년, 아니 그 이후 정권 5년동안에도 그 많은 모래를 침전시킬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 공사 현장을 갔는 데, 침전지가 5평 미만이에요. 황당한 일이지요. 금강쪽 현장에 갔는데 거기에는 침사지도 없어요. 이게 현실입니다." 

10조 원 들여서 수질개선하고 2조8천억 들여 식수원 다른 데로 옮긴다? 

그는 이어 "정부는 수량이 풍부하면 물이 희석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물이 깨끗해진다고 말하고 있는데, 물이 정체되면 수질이 악화될 뿐 아니라 대청댐의 경우 비가 온 뒤에 녹조가 가장 심하다"면서 "농경지에서 흘러든 농약과 도로 등에서의 오염 물질이 다 강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낙동강에 10조 원 이상을 들여서 수질을 개선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2조8천억 원을 들여서 낙동강의 식수원을 남강댐과 지리산댐으로 옮기겠다고 말하고 있다"면서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강이 살아나는데 왜 취수원을 옮겨야하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국민이 낸 혈세 22조원 만 쏟아부으면 4대강 정비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업비 22조원에 포함되지 않는 돈으로 밝혀진 것을 한번 얘기해볼까요? 소수력 발전 2200억 원이 제외됐습니다. 또 농지보상비를 1조2천억 원으로 잡았는데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4대강 준설로 인해 강바닥에 묻혀있는 도시가스 관로를 이전해야 합니다. 다리밑까지 준설을 해야 하는데 다리가 흔들리니까 안전공사를 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부산역에 갔더니 부스를 만들고 4대강 사업 홍보책자를 주고 있더군요." 

그는 "미국 플로리다의 키시미강(Kissimmee River)은 10억불을 들여서 운하로 만들었는 데 지금은 100억불을 들여서 원상복구하고 있다"면서 "키시미강 복원을 한 자료에는 10억불의 10배인 100억불을 들여서 공사를 하지만 원래의 자연으로 되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고 적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살아있는 4대강을 22조 원을 들여서 죽인다면 후손들이 이를 복원하는 데에는 220조원을 들여도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을 영영 복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최 목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람들에게 기억이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됐으면 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인데 인터넷에서는 '쥐XX'라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권위를 상실한 대통령, 목사로서 안타깝습니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이 대통령 스스로 일개 건설사의 사장이 아니라 전국민의 소통을 책임지고 있는 국민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4대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제가 나서서라도 기념비를 세워드리겠습니다." 

최 목사가 지난 2년간 발품을 팔면서 강에 대한 애정을 녹여낸 책의 출판기념회는 오후 6시30분에 서울 중구 정동의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 홀에서 열린다.   

"생태박물관 지켜낼 수만 있다면…"

쓰레기 시멘트 박사가 '4대강 박사'된 까닭

 

  
▲ 최병성 목사의 책 표지
강은 살아있다

"이 책 한권으로 열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최병성 목사의 말이다. 그는 "지금 많은 사람들은 4대강 사업에 대해 막연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이 책을 보면 구체적으로 엄청난 재앙임을 알 수 있다"면서 "이 책을 이웃에게 선물하는 것 자체가 4대강 사업을 막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보면 작심하고 책 장사에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계산은 저잣거리의 셈법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99년도에 서강 싸움할 때 배웠어요. 누군가 한 사람으로 인해서 살아있는 생태박물관인 강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손해는 중요한 게 아니지요. 강의 보존가치는 죽어있을 때보다 수천배, 수만배가 넘는겁니다. 저는 그걸 10년전에 터득했습니다." 

하지만 목사인 그 역시 생활인이다. 없는 살림에 돈과 시간을 거의 4대강 싸움에 바치는 남편의 모습이 부인에게는 곱지않게 보일 수도 있다. 

"이틀, 삼일에 해야 할 일을 하루에 몰아서 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열심히 부인을 섬기고 있습니다. 집사람은 돈에 대해 초탈해 있습니다. 내가 청량리 588에서 걸인들이랑 함께 사는 모습에 반해서 결혼을 했으니까요." 

그는 "어떤 사람들은 왜 목사가 교회에 있지 않고 4대강 싸움을 벌이고 있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전 이게 목사가 해야할 일이라고 대답한다"면서 "지금의 활동은 4대강 곳곳에 십자가를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년에는 교회에 가고 싶은데 만날 돈만 내라는 교회가 싫은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한편 그는 일반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쓰레기 시멘트 박사'로 유명하다. 그는 블로거 활동을 통해 폐타이어와 철 쓰레기 등 산업 폐기물을 섞어 만든 '쓰레기 시멘트'의 유해성을 알렸고, 시멘트 업계가 권리침해 신고를 하면서 블로그 글이 삭제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최병성 목사의 게시물을 삭제한 조치는 잘못된 것"이라며 최 목사의 손을 들어줬다. 방통심의위의 게시물 삭제가 행정 행위라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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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토지’로 번역하면 문맥에 맞는다는 것은 ‘재산’대신 ‘토지’를 번역어로 선택하기 위해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재산” 또는 “재물”이라는 의미도 마가복음 10:22의 문맥에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여 더 문맥에 잘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즉, ‘토지’란 번역을 선택하는 충분한 이유는 다른 번역 가능성들보다 ‘토지’란 번역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이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한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을 때, 강조점은 “팔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쪽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과 관련된다. 율법의 정신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은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명기 15:9-11).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러한 구약의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명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진 것을 팔라”는 예수의 말씀 앞에 부자가 항의 한 마디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율법이 허용하는 유동성 재산까지 처분하라고 하시는 것을 너무하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자는 왜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 하는지 예수께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가 갑자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그에게 단지 유동성 재산만 많았을 경우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많이 가진 것이 토지였을 때에는 그의 행동이 잘 설명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것은 명백하게 율법에 위배되기에 토지를 팔아서 처분하고 이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지적을 원칙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의 명령을 실천하느냐 못하느냐 인데 그는 토지에 관련된 율법의 요구를 적용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23절처럼 재물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까? 

그런데, 23절에는 재물, 부, 돈 등을 뜻하는 ‘크레마’의 복수형 ‘크레마따’가 등장한다. 23절 문맥도 ‘크레마따’가 토지를 뜻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크레마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반응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24절). 이로 미루어 보아 ‘크레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하는 구약의 토지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놀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3절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이 되려면 ‘크레마따’가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가리켜야 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 있었다.

물론 23절부터 재물에 관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토대하여 22절까지에서 다루어진 내용도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예수는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에게 그의 재물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을 수도 있다. 그가 재물을 포기하기 힘들어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보고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지적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읽을 경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으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일까? 물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율법 정신을 염두에 둘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28-29절에서 토지와 가옥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가고 유동성 재산이 이 목록에서 빠져 있는 것은 23절의 ‘재물’(크레마따)마저도 특별히 가옥과 토지를 염두에 둔 것이며, 25절의 ‘부자’도 토지를 많이 가진 부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과연 토지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을까? 

예수께 나아온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20절). 이러한 대답을 듣고 예수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구약성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법인 토지법을 어길 수 있었을까?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지킨다고 한 것은 18-19절에 언급된 계명들이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속여 취하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다. 이 사람은 이 계명들에 토지법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하였을 수도 있다.

토지법을 어긴 것은 도둑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토지법을 어겼다면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토지법을 어긴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을 수 있다.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대토지 소유가 도둑질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은 문맥상 앞에서 언급한 계명 또는 구약성서에 담긴 율법을 실천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킬 때 토지법까지도 잘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신 것(21절)도 그가 율법을 모두 잘 지켰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을 지킴에 헌신한 정도를 일단 인정해 주시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헌신을 하도록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에게만 사랑을 표현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 외에는 흠 없이 율법을 지킨 이 사람에게 얼마든지 사랑을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이다. 또한 사랑을 표현하시면서도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우도록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다.  

마가복음 10:17-31의 흐름 속에서의 토지와 재물 

마가복음 10:22에는 ‘끄떼마따’가 사용되고 23절에는 ‘크레마따’가 사용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는 토지를 다른 하나는 재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은 과연 본문을 일관성 있게 읽는 것인가? 22절의 ‘끄떼마따’를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하려면 이러한 의문도 해소하여야 한다.

23절에 ‘크레마따’를 사용한 것은 마가복음의 서사의 흐름 속에서 예기하지 못한 전환을 통해 놀라움을 자아내는 문학적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영생을 얻는 길을 율법, 특히 십계명에 관련시킨 후 십계명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부자에게 토지법을 지켜야 함을 지적하여 그를 놀라게 한다. 이어서 토지만이 아니라 부 일반의 소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토지법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제자들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침내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는 절망으로 제자들을 몰아간다(26절). 이 절망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에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이러한 절망 후에 반전이 도래한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7절). 이러한 흐름 속에서 22절은 “토지”에 관하여 23절은 “재물”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일관성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극적 효과를 낳는 문학적 기법으로 볼 수 있다.

28-31절의 말씀은 27절에 도입된 반전에 이어지는 위로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신다(27절). 그리하여 반드시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전토를 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29-30절). 여기서 재물 일반에 관한 가르침은 가옥, 전토 등의 부동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가족이 추가적으로 다루어진다. 복음에 반응하여 가옥이나 전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어놓고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마가복음의 독자들 중에는 이미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물한다. 

왜 좀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다면, 마가는 왜 더 명확한 용어대신에 이처럼 애매한 용어를 선택하였을까?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였다면 마가는 22절에서 얼마든지 30절에서처럼 ‘아그루스’(전토)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끄떼마따’처럼 토지나 재물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 애매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가가 이 단어를 “재물”이란 뜻으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만 ‘끄떼마따’는 우리에게 명확하지 않을 뿐이며, 마가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언제나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 그러므로 1세기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단어는 명확하게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볼 수 있다.

22절에 ‘아그루스’대신 ‘끄떼마따’가 쓰인 것은 23절에 등장하는 ‘크레마따’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운율을 위한 고려였을 수도 있고, 토지를 다루는 22절에서 재물을 다루는 23절로 매끄럽게 넘어가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토지를 가리키려면 22절에서 다른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는 설명은 이 단어가 “재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설명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재물”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이라, 문맥에 맞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따라 ‘끄떼마따’를 “재물”보다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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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12) 마가복음 10:22의 주해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2. 23. 16:5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친숙한 주해 

번역 성경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주석서를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보다는 “재물”을 접하게 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마가복음 10:22에 쓰인 헬라어 단어 ‘끄떼마따’가 “재산”이나 “재물”의 뜻을 가진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건드리(R. H. Gundry)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그 어원인 ‘끄따오마이’(획득하다) 동사에 관련시켜 “획득물”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획득물’은 물론 문맥에 따라 토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좀더 넓은 의미로 쓰여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재산’이란 단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네덜란드의 판 이어설(B. M. F. van Iersel)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도나휴와 해링턴(J. R. Donahue & D. J. Harrington)이나 에반스(C. A. Evans)의 이해도 동일하다. 후커(M. D. Hooker)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부”(wealth)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독일학자 그닐카(J. Gnilka)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소유”란 뜻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사본 필사자들이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듯이 성경주해자들도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많은 주해자들이 마가복음 10:22를 해석할 때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누가복음 18:23의 영향일 수 있다. 

“그 사람은 끄떼마따를 많이 소유하였으므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가복음 10:22, 사역).

그 사람은 큰 부자였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슬퍼하였다”(누가복음 18:23, 사역). 

사본학에서 친숙한 읽기가 원래의 읽기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듯이 주석학에서도 친숙한 주해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왜곡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본문을 주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서 본문을 주해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안경으로 본문을 보며 본문을 자신에게 친숙한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해자들의 경향을 벗어나려면 덜 친숙한 주해를 선택해야 한다. 많은 주해자들이 동의하는 친숙한 주해를 따르는 것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일 수는 있으나 학문적으로 바르지는 않다. 본문 주해에 있어서도 진리의 길은 좁아서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원문을 복원할 때 기계적으로 사본의 수를 따라가는 것이 위험하듯이 본문을 주해할 때 무조건 학자들의 수를 따라가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대신 독자들의 반응을 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덜 친숙한 주해 

주석가들 가운데에는 동료 주석가들이 빠져 있는 경향성을 벗어나 낯선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제안을 엉뚱한 소수 의견이라고 간주하지 말고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성경 주석가들은 언제나 주관적 경향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본문 연구를 통하여 독자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경향성을 극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반적인 경향성을 벗어나는 주해는 낯선 제안이며 한동안 소수 의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주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해를 하면서 주관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지만, 주관성을 많이 극복한 주해는 본문의 의미를 많이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없다면 주해 작업은 애초부터 무의미할 것이다. 개인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자들의 주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빠지는 공통적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창조적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에드워즈(J. R. Edwards)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또는 “소유지”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지적하면서 이 단어가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밝히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우트레흐트 대학 교수였던 발욘(J. M. S. Baljon)은 이미 20세기 초에 ‘끄떼마따’가 재물을 가리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이 단어가 특히 소유지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런데 테일러(V. Taylor)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소유지”를 가리키며, 따라서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그 사람은 지주임이 밝혀진다고 주장하였다. 레인(W. L. Lane)과 스웨테(H. B. Swete)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고 간주한다. 독일에서 페쉬(R. Pesch)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소유를 가리킨다고 간주하였고, 만(C. S. Mann)도 이 구절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중에서 특히 토지와 관련된다고 본다. 성서번역학자들 중에는 브랫처(R. G. Bratcher)와 나이다(E. A. Nida)가 ‘끄떼마따’가 일반적으로는 재산을, 특수하게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문화권에 따라 농장’이나 ‘가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해는 흔히 접하게 되는 주해들과 달리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해는 번역 성경의 영향을 받거나 통설의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학문적인 통찰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비유사한 예수의 모습을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영향에 의하며 채색된 모습이라고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예수의 모습이 전승된 이유는 그것이 진짜 예수의 모습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 원리는 주석학에도 다음과 같이 응용될 수 있다. 즉 주석학자들의 경향성에 상반된 주해는 성경저자의 의도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문맥을 통한 검증 

위에 제시한 주석학자들의 제안은 참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므로 참된 본문의 뜻을 드러내는 주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은 증거의 제시 없이 단지 주장된 것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과연 “토지”를 뜻할 수 있는 지는 단지 주장될 것이 아니라 검증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뜻은 그 문맥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할 때 문맥에 더욱 잘 맞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주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리는 문맥이다. 주해는 문맥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 나가는 학문적 작업이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가 가진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1절). 즉, 그가 슬퍼한 이유는 포기해야 하는 끄떼마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문맥에서 ‘끄떼마따’는 토지일 수도 있고 다른 유동성 재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팔아야만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토지나 집일 가능성이 높다. 유동성 재산, 즉 돈이나 보물이라면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의미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께서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명령할 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신 데에 있다(21절).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임이 19-20절을 살펴보면 곧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기에, 부족한 것은 율법 지킴과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끄떼마따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이유는 율법 준수와 관련되어 있다.

도대체 끄떼마따가 무엇이기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게 되는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율법은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을 따른 사람은 토지를 많이 가질 수 없었다. 소유지의 경계를 나타내는 토지 경계표를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자신의 토지와 이웃의 토지의 경계표를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이웃의 토지를 영구적으로 구입할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넓힐 수 없음을 뜻한다. 레위기의 토지법에 의하면 토지를 영구 매매하면 안 되고(레위기 25:23), 희년 때까지 임대할 수 있을 뿐이다(레위기 25:14-16, 28). 희년이 되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토지 경계표는 옮겨지지 않게 된다.

대토지 소유를 금하는 율법 조항은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레위기 25:23).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배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민수기 32장; 여호수아 13장 이하) 마땅히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땅을 많이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아합 왕의 땅과 교환하기를 거부한 것은(열왕기상 21:3) 이러한 토지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나봇의 시대에도 토지법은 나봇처럼 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었다. 아합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나봇의 거절 앞에 어찌할 수 없어 근심한 것은(열왕기상 21:4) 그 역시 토지법을 쉽사리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 여인 이세벨이나 이 토지법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토지법이 점점 더 어겨지게 되었고, 드디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마저도 토지법을 지키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토지법을 따르면 토지를 많이 가지게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많이” 가짐으로써 율법을 어기게 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토지였을 것이다. 조상이 율법을 어기고 취한 토지를 물려받아 소유하고 있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해도 그가 그러한 토지를 돌려줄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9절에서 버림의 목록에 ‘전토,’ ‘집’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지 않는 증거이다. 29-30절은 가옥이나 전토, 가족을 포기한 자가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21절은 가진 것들을 포기한 자가 하늘에서 보화를 받는다고 약속한다. 따라서 29-30절은 21절과 평행된다.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며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가질 것이다(21절, 사역).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 전토를 버린 자들 중에 ...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아무도 없다(29-30절, 사역). 

그리하여 21절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해진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이 언급하는 가옥, 가족, 전토에 평행된다. 그러므로 21절의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의 목록 중에서 팔 수 있는 가옥과 전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2절에서 그 부자에게 끄떼마따가 많았다고 할 때 그것은 가옥 내지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끄떼마따’는 용례상 가옥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문맥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게 한다. 

맺음말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하여 재물이나 재산이라고 해석되지만,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러한 소수의 의견은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므로 오히려 주해자들이 흔히 빠지는 경향성을 극복하고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주해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문맥을 통하여 검증된다.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문맥에 맞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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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한기총과 함께 죽을 것인가, 개혁하여 함께 살 것인가?”

한국기독교는 1960년대 이후 30여 년간 계속된 개발독재시대에 급성장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시대의 물량주의와 성장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도 그러한 물량주의 성장의 한계와 폐해를 깊이 인식하여 보다 인간적인 사회, 지속가능한 성장을 모색하였으나, 슬프게도 지금 그러한 시도들이 수구기득권세력에 의해 속속 좌초되는 뼈아픈 경험을 하고 있다. 같은 기독교인 입장에서 가슴 아프지만 그 중심에 한국기독교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지금 한국교회가 끝을 찾기 힘들만큼 추락하고 있다.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2004년 한국인 종교의식’에 따르면 비종교인들이 느끼는 각 종교에 대한 호감도는 불교(37.4%), 가톨릭(17%)인데 비하여 개신교는 12. 3%에 불과했다. 또 2005년 ‘한국교회미래를준비하는모임’ 조사에서 종교 지도자의 자질우수성을 묻는 질문 역시 개신교(12.0%) 천주교(31.8%) 불교(21.2%)로, 개신교 종교지도자에 대한 비종교인의 불신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2009년 7월에도 <시사저널>이 실시한 한국인 직업인 신뢰도 조사에 의하면, 총 33개 직업군 가운데 목사는 25위를 기록해 비교직종인 신부(11위), 승려(18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하위군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무엇보다 도덕성과 신뢰성이 높아야할 종교와 그 지도자들이 신뢰를 얻지 못할 때 얻게 되는 당연한 결과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돈도 많고, 큰 교회들도 우뚝우뚝 솟아 있으나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신뢰를 잃고 민심이 떠난 종교는 곧 허물어져버릴 건물일 뿐이다(마 23:37~24:2).

한기총은 삼일절에도 버젓이 성조기를 들고 친미를 소리 높여 외치는 집회의 주관하고, 종교교육을 내세워 사학기득권을 지키려 앞장섰고, 기독교계의 이명박 후보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교묘한 지원을 일삼고, 작년 촛불정국에서 국민들의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굳건한 지지를 표명하는 등 대통령 탈선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랜드 사태와 같은 비정규직 문제나 용산참사 같은 인권유린 상황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는 양면성과 권력지향성을 보여 왔다.

그럴 때마다 한국교회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역사의식도 없고, 시대정신도 모르는 종교기득권자들처럼 조롱을 받아야만 했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기득권의 종교인 것처럼 매도되고, 예수가 부자와 권력자들의 옹호자인 것처럼 욕하는 소리들을 듣기란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가?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별명은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지키시는 분(신 10:18, 14:29, 시 146:9, 렘 22:7)이며, 예수의 별명은 보잘 것 없는 자들의 친구(눅 7:34)였다. 그래서 처음 교회는 약한 자, 가난한 자들의 독무대였다(행 4:32~35). 그들 자신이 힘도, 돈도, 배경도 없는 자들이었기에 그런 사람들의 사정을 대변할 수 있었다(약 2:5, 6).

보수나 진보, 좌파나 우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수구와 기득권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며, 사회의 죄악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한기총 개혁에 나선다. 한기총의 잘못된 행태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기독단체 및 시민들이 힘을 합쳐 ‘한기총 개혁을 위한 기독인네트워크’(가칭)를 만들었고, 지난 12월 28일 “한기총의 신학적/역사적 실체를 묻다”는 제목으로 한기총 진단토론회를 가졌다. 또 다음 날인 12월 29일에는 한기총 대표회장 선출이 열리는 곳 앞에서 “한기총 개혁을 열망하는 기독시민 공동기도회”를 열었다.

우리는 한기총과 새로 선출된 이광선 대표회장 앞으로 한기총의 개혁을 위한 공개서한과 공개입장을 밝혔다. 공개입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기총은 이유여하를 가리지 말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것이 바로 믿는 이들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마 14:16, 신 15:7~11)을 받아, 어떤 정치적 상황변화와 관계없이 대북 인도적 지원만큼은 당장 재개하도록 정부에 건의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2. 한기총은 억울한 자의 한 맺힌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창 4:10, 출 2: 23)을 본받아, 용산참사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나설 것과 구속자를 선처하도록 호소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3. 한기총은 땅도 안식하게 하라하신 하나님의 명령(레 25:4)을 본받아, 온 국토를 무분별하게 파헤치는 잘못된 대형 국책사업들을 재검토하고 정부가 창조질서 보존의 정책을 펼 수 있도록 건의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4. 한기총은 소유권보다 생존권이 우선이라는 성경의 기본정신(신 24:6, 10~22)을 명심하여, 정부, 사회와 교회가 이윤창출과 무조건적 성장보다 고용보장과 확대, 사회복지예산 증액, 가난한 환자의 무상치료에 나서도록 앞장 설 의지가 있으십니까? 

5. 한기총은 적어도 하나님이 무상으로 베푸신 땅의 혜택만큼은 누구나 고루고루 누리도록 하신 지엄한 명령(레 25:23~28, 전 5:9)을 따라, 부동산 투기를 엄단하고 관련세제를 강화하도록 건의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6. 한기총은 과도한 일과 혹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는 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의 해방의지(출 2:23~25, 신 5:14)를 존중하여, 노동자들이 최소한 주1회는 반드시 쉬도록 명문화하고, 성별, 민족, 학력 등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적극 노력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7. 한기총은 하나님의 공직을 맡는데 돈이 오가는 게 얼마나 큰 죄악인지(신 16:19) 통감하여, 한기총 및 교단, 교회 임직선거에 고질적인 금품, 청탁과 대가 등이 오가지 않도록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8. 한기총은 교회가 혈통이나 인간적 친소관계가 아닌 바른 고백(마 16:17~19)과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행 1:21~26)를 통해 세워졌음을 인식하여, 인본주의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교회(목회)세습을 근절할 방안을 지금이라도 마련하시겠습니까? 

2009년 12월 28일 

한기총 개혁을 위한 기독인네트워크 

한국교회는 지금 비대해진 수구기득권 권력기구 한기총과 함께 몰락하느냐, 아니면 잘못된 한기총의 탈선을 막고 예수의 가르침으로 거듭나 함께 살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이 한기총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잘,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바로 우리가 이 겨울에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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