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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1. 막대한 영향력만큼이나 슬픈 한국 기독교

대한민국 헌법은 국교가 인정되지 않는, 종교적 자유국가다. 그러나 고려사회가 불교로 인해, 조선사회가 유교로 인해 그랬듯이, 단언컨대 한국현대사는 기독교로 인해 울고, 웃었다. 근대화와 민족운동, 일제식민시대와 분단과정, 성장과 민주화운동 등 한국현대사 모든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기독교의 존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엄연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10명 가운데 무려 3명이 개신교 장로라는 사실, 그리고 현재 18대 국회의원 중 개신교인의 비율이 우리나라 총인구 대비 개신교인 비율인 18.3%(2005년 통계청)의 두 배가 넘는 무려 39.5%에 달한다는 점으로도 확인된다. 또 가톨릭이나 불교의 움직임에 비해 한국교회나 그 지도자들의 동향은 항상 여론의 초점이 되곤 한다. 한국개신교는 다른 종교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성적인 신도들을 자랑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안티’세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산술적인 비중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밉든 곱든 한국사회와 민족을 위해서라도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살아나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기독교와 교회의 건강성은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저 사회적 평가로만 그러한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하는 자화상 자체도 그렇다. “최근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2004년 한국인 종교의식’에 따르면 비종교인들이 느끼는 각 종교에 대한 호감도는 불교(37.4%), 가톨릭(17%)인데 비하여 개신교는 12. 3%에 불과했다. 또 2005년 ‘한국교회미래를준비하는모임’ 조사에서 종교 지도자의 자질우수성을 묻는 질문 역시 개신교(12.0%) 천주교(31.8%) 불교(21.2%)로, 개신교 종교지도자에 대한 비종교인의 불신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구교형, 사회선교 한 걸음, 164쪽)

올해 2009년 7월 <시사저널>이 실시한 한국인 직업인 신뢰도 조사에서도, 총 33개 직업군 가운데 목사는 25위를 기록해 비교직종인 신부(11위), 승려(18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하위군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 한국 기독교 탈선의 뿌리

사회학적 요인들을 말하기 전에 그것은 한국 기독교와 교회가 예수정신과 복음으로부터 탈선한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매우 권력지향적이고, 성장중심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은 한국교회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개신교는 19세기 말 주로 미국선교사들을 통해 확산되었고, 20세기 초에는 이미 평양 등 서북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강인철에 의하면 1932년 서북지방 개신교인이 전체의 48%를 차지하고, 30년대 말에는 장로교 전체의 60%에 이를 만큼 왕성했다고 한다.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

그러나 일제식민지가 더 이상 ‘순수한 종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충성을 강요하자, 서북중심의 교권세력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에 앞장섰고, 해방이 되도록 자신들의 교권을 지켜갔다. 해방 후 이북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 세력과 기독교는 주일선거문제, 정치적 입장차이 등으로 사사건건 부딪혔고, 남북정부가 들어선 1948년을 전후하여 특히 신앙의 자유를 위해 월남하는 기독교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신학적으로는 보수주의요, 정치적으로는 극단적 반공주의자인 이들은 월남한 이후 남한에서의 적응에 성공하여 이후 한국교회의 주류가 되며, 한국사회에서도 든든한 반공안보정책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런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친일경력의 콤플렉스를 숨기고 이북정권과의 피해의식이 맞물려 더욱 적극적으로 정권에 밀착하였고 친미와 반공주의자가 되어 갔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선교모국이었던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고 그의 후원을 받은 장로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하자 적극적으로 정권을 지지하며 남한 교회와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여 갔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정부요직을 맡았던 개신교인들은 전체의 40%에 육박했을 정도였다고 한다(강인철).

이북 정권은 60-70년대를 거치면서 눈에 보이는 교회들을 없애 버렸고, 이남에서는 대다수의 교회와 지도자들이 독재정권에 침묵하거나 적극 지지해 주었고 그 대가로 당시로서는 아주 예외적인 자유를 누리며 급성장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과 함께 한국교회는 급성장했다. 그것은 강력한 1인 지도자 아래서 ‘손에 잡히는 성장과 부흥’을 주도해 간 박정희 정부의 멘탈리티가, 카리스마적 목회자 아래서 질병과 가난을 벗고 성공한다는 당시 한국교회의 영적 분위기, 메시지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형태는 조금씩 달랐지만 박정희 정권의 아류인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까지 대동소이하게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0여 년 간 철옹성처럼 굳건해 보인 군사독재정권도 경제성장과 중고등교육의 확산과 더불어 사회분위기의 개방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총칼로 마냥 억누를 수만은 없게 되었다. 부마항쟁과 10.26(1979년), 민주화의 봄과 5.18(1980년),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대항쟁(1987년), 대학가의 통일운동과 잇따른 방북(1988~1989년) 등 권위주의 정부도 더 이상 힘만으로는 변해가는 시대분위기를 막아내기 힘들어진다. 이러한 시대변화는 단지 권위주의 정부만의 고충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종교기득권을 유지해오던 주류교회에도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미 6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까지 계속된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과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통일운동을 기독교비주류세력이었던 진보교회 및 목회자들이 앞장서 이끌어가기 시작한 것이 더 큰 위기의식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3. 수구와 기득권 추구로는 한국교회 이끌 수 없다.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의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88선언)은 같은 해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에 상당부분 수용될 만큼 매우 획기적인 방안이었지만, 오히려 주류 한국기독교계는 이 선언에 크게 반발하는 성명들을 잇따라 낼만큼 반발했다. 급기야 1989년 1월 당시 한국교회 얼굴이던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계 원로들의 회동에서 “교회협이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없다”고 발표하며, 새로운 연합기구 결성을 공식화했다.

이어 같은 해 3월 기장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이 더 큰 자극이 되어, 4월 발기총회에 이어 마침내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가 탄생한다. 이러한 한기총의 냉전적 대북인식은 한기총을 출범시키고 이끌었던 초기 주요 인사들이 거의 월남자들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89년 1월 남한산성 회동 참석자 총 10명 중 9명이 월남자였고, 창립준비위원장 한경직 목사를 비롯해, 5대 최훈 목사에 이르기까지 초기 대표회장 중 1대 박맹술 목사만 제외하고는 모두 이북 출신이다(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강인철 참조). 이런 시각을 대변하듯 지금껏 한기총은 특히 대북정책에 관한 한 매우 극단적인 냉전인식을 표출해 왔다.

또한 교회세습이나 목회자 비리, 목회자 납세, 양심적 병역거부, 사학법 문제 등의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서도 한기총은 갈수록 민주화되고 개방돼 가는 사회의식과는 동떨어지게도 매우 개인적이고, 사익 추구적이며, 시장만능주의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한기총이 들어선 후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한국교회의 대 사회적, 정치적 발언은 매우 잦고, 강해졌다.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 집권 이후 한기총은 가장 적극적인 반정부단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필자는 그것을 기독교계와 사회에 대한 기득권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앞서 살펴봤듯이 30년 군사독재정부 시절 정권합리화의 댓가로 온갖 특혜에 길들여져 버린 주류 한국교회는 모든 종교를 다른 종단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상대적인 차별처럼 느꼈고, 개발독재시대 목회스타일을 크게 벗지 못한 교회지도자들의 민주화, 개방화 추세에 대한 거부감은 갈수록 커져갔다. 2000년대 들어와 한국교회 대표적 지도자들이 거듭 정치세력화에 앞장서는 것은 실추된 한국교회 이미지와 영향력을 정치권력 획득을 통해 돌파해 보려는 골육책으로 보인다.

한기총이 그저 보수적 기독교기구라면 얼마든지 좋다.

소중한 가치를 지키려는 태도를 보수라고 정의한다면,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던 선지자들이나 아버지하나님께 순종을 외치셨던 예수님이야말로 원조 보수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한기총은 보수가 아니었다. 같은 땅 북녘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가는데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지 않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하나님은 땅은 사고나 팔지 못하며 그 혜택을 반드시 나누라고 말씀하셨는데, 부동산투기수익을 축복처럼 허용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교회와 목회자 부정에 대한 시사프로그램 방영은 죽기 살기로 막아내면서도 용산참사 희생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은 애써 외면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소유권이나 사유재산제를 하나님의 희년법보다 떠받드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숫자에 대한 자존심과 기득권이다.

이광선 한기총 신임 대표회장이 선출되었다. 나는 좀 순진하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광선 신임회장에 기대를 걸고 싶었다. 그가 사학운영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한 개정사학법을 다시 뒤집기 위해 삭발까지 하면서 앞장섰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나마 교단이나 교계 내에서 비교적 깨끗하고 나름 소신있는 비주류로 알려져 있다기에 기대가 좀 있었다.

그러나 대표회장 선거에서 한기총 소속 각 교단 총회장과 총무들을 무료로 이스라엘 여행 보내주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걸 공약으로 내걸었다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한기총은 어떤 조직이기에 예수님 팔아 헌금을 털어 매관매직하겠다는 소리를 몰래 숨어서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떠들어댈 수 있는지.

이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이름처럼 한기총이 명실상부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연합기구가 되려면 66개 교단, 19개 단체의 막강한 연합체라는 위용을 자랑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성명, 행사 등 모든 활동들이 성경과 기독교세계관에 비추어 어떤 근거를 갖고 있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명예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사사건건 책임지고 답변해야 한다. 정통이니 주류니 보수니 얼버무리지 말고, 정말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것이 지난 20년간 한국교회 대표로 명의를 도용당한 우리에게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임을 한기총은 명심해야 한다.  






구교형목사(성서한국사무총장/ 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 이글은 2009년 12월 28일 한기총 진단토론회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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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10. 1. 9. 00:4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신학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을 준비하며 (2)

지난 필자의 글 '한국교회 개혁은 신학 교육의 변화로부터'에 이어 이번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적 신학 교육의 방향과 정신을 풀어 보고자 한다. 현재의 상황이 어찌 보면 쉽지 않지만, 그 속에서 그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기대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다.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역사를 이룬 느헤미야의 사역처럼 우리도 한국교회의 새로운 재건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신학 교육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만이 아닌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온 백성 중 목회를 전문으로 하는 백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목회를  전문적으로 하기 위한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아닌 백성들은 신학을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인 신학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다.  흔히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도 신학을 배우는 방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을 배우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분을 알아갈수록 그분께 더 깊이 알아가고자 하는 욕구는 늘고, 결국 신학 교육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는,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을 위한 신학 교육도 당연히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이들을 위한 교육을 하지 않는다.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이 목회자 과정만 운영해도 지원자가 많아 수용하기 힘든데, 확실한 수요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교육과정을 만들어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고 이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니다. 또한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에서 수용하기가 여간 거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원칙적으로 신학은 목회자가 해야 하는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가진 신학교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학 교육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일상을 더 풍요롭게 꾸미고 싶어 한다. 느헤미야에 대한 <뉴스앤조이> 기사를 보고 문의하는 분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이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 소양을 구비한 성도들이 하나님나라 구현과 기독교 재구성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신학은 기독교 내에서의 소통만이 아닌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가 수반해야 한다.

신학이  정치학이나 경제학, 사회학 등의 일반 학문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열린 신학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 학문도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에도 자유롭게 소통할 대상으로 여기지 못해 결국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로 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보자. 강의실에서 경제학자와 신학자가 공동으로 연구한 논문을 가지고 강의하고 학생들이 주저없이 학자들에게 질문하는 자유로운 풍경,  신학자가 정치학을 전공하여 신학이 기반된 학문을 하고, 또한 정치학자가 신학을 공부하여 그 깊이를 더하는 광경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도  그 부분에 대한 심화 과정을 이수함으로 더 나은 학문적 체계를 잡는 것은 어떠한가?  우리는 연구를 통해 정치와 경제, 사회와 역사, 문화와 예술, 과학과 기술, 생태와 생명을 다루는 다양한 학문과 겸손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우리 주변에도 이만열 교수님이나 손봉호 교수님 같은 분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와 아울러 신학적 깊이도 갖추고 있음을 본다. 이외에도 기독 운동을 하는 분들 중 여러 분들은 이분들처럼 신학에 바탕을 둔 자신의 전공을 살린 일들을 하고 있음을 본다. 죽어 있는 신학이 아닌 살아 있는 신학이 되려면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가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신학은 성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나누지 못하는 종교는 결국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게 된다. 길에 버려진 소금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 고유의 맛을 내야 한다. 고난당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과 같이 울고, 소외된 자들이 있으면 안아 주며,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는 곳에 찾아가는 것이 예수의 삶이자 신학이다. 성경은 죽은 자들의 경전이 아니라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을 믿는다면 신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으로 이어짐을 알아야 한다. 단지 앉아서 글자에 파묻히는 공부가 아닌, 가슴으로 뜨거워지는 그런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학 교육의 틀은 인프라의 구축이 아닌 컨텐츠가 우선되어야 한다.

신학연구원 설립을 처음으로 주장했을 때 여러 반응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많은 분들은 인적, 물적 인프라에 대한 우려였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신학 교육을 하려는 것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는 수년간 기독청년아카데미 등을 비롯한 아카데미를 벤치마킹하면서  인프라의 구축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준비하며 시간만 허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격 교육이 활성화하고 노트북이나 PDA 하나만 가지면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의 신학 교육은 결국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라 컨텐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신학 교육과 차별화한 신학 교육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강의의 내용으로 수강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년간 변변한 강의실도 없이 여러 교회를 전전하면서도 매학기마다 300명의 수강생이 신청하는 기독청년아카데미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면 결국 그것은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라 컨텐츠의 문제일뿐이다. 또한 느헤미야의 장점은 자신의 분야에서 때묻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연구하는 강사진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헌신이 결국 여러 부분의 단점들을 보완하게 될 것이다.

<뉴스앤조이>에 신학연구원에 관한 첫 기사가 나간 이후 많은 분들의 격려와 문의를 받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신학 캠프 신청이 오는 것을 볼 때에 우리의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일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 다음번에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교육과 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부분을 기술하고자 한다.

고상환 /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 준비위원

* 신학연구원 느헤미야의 교육과정을 미리 맛보는 신학 캠프에 대한 사항은 www.nics.or.kr 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 이글은 기독교인터넷신문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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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차선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라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10. 1. 9. 00:4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이글은 지난 1월 7일 사랑의교회 건축관련 기자회견의

추운 날씨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라는 바울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주일(1월 10일) 열릴 공동의회에 앞서 사랑의교회 측과의 비공개 면담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공동의회 이후에 만날 수 있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이에 교회 측의 대화 의지에 진정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오늘 기자회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교회는 보편적 교회의 한 지체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이웃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소위 대형 교회로서 거의 유일하게 교계와 사회로부터 신뢰와 칭찬을 받아온 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지난 수년간 한국교회 개혁을 아픈 마음과 뜨거운 가슴으로 외쳐 오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원로목사로 섬기고 계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교회가 지금 결정적으로 잘못된 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사랑의교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거나 완벽한 제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이웃 교회가 결정적으로 잘못된 길에 접어들고 있을 때, 이를 만류하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권유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한 지체된 자들의 중요한 책임이라고 믿을 뿐입니다.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부재요 결핍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차선이 최고의 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악의 본질입니다. 차선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최악이 아니라 오히려 차선입니다.

사랑의교회는 지금 다양한 차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몰려드는 성도들을 위한 안전한 건물의 확보, 차세대를 위한 인프라 구축, 규모 확대를 통한 선교, 사회복지, 제자 훈련의 강화, 강남 지역 사람들의 변화 등을 들고 있습니다.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바로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길, 즉 자기 비움과 낮아짐, 그리고 가난과 고난, 죽음을 통한 부활의 길이 설 자리를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득훈 목사. ⓒ뉴스앤조이 백정훈  
 
사랑의교회는 노골적인 기복 신앙을 말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승리주의 신앙을 설파하며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사랑의교회는 반대로 이 땅에서 성공하고 승리함으로 하나님나라를 펼쳐갈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강남 지역의 성공한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와 이념을 갖고 살면서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키겠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설사 교회로 몰려온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세속적 가치와 영역의 확산일 뿐입니다.

이런 슬픈 현실을 어찌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나라와 사랑의교회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부디 저희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지금이라도 돌이켜 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길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박득훈 목사 /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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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삶으로 교회 개혁을 열망한다
교회개혁실천연대 남오성 신임 사무국장과 정운형 전 사무국장 인터뷰

입력 : 2010년 01월 03일 (일) 00:09:28 [조회수 : 346] 김세진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남오성 목사(좌)와 정운형 목사는 인상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 교회 개혁을 하기에 너무 순해 보인다고 하지만 삶에서 개혁을 해온 경험에서 개혁의 힘이 나온다. ⓒ 뉴스앤조이 김세진  
 
말한 대로 살고 사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신뢰할 수 있다. "말과 삶이 나란히 간다면 그것은 철학의 완성이다"는 베네딕트 수도회 조안 치티스터의 말을 교회 개혁 현장에 적용한다면, 개혁을 외치는 말과 삶이 나란히 가야 그것이 개혁의 완성일 것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 전 사무국장 정운형 목사(40)와 현 사무국장 남오성 목사(41)는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시도를 각자의 자리에서 해 왔다. 그렇기에 이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외치는 소리는 공허하지 않다.

정운형 목사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중형 교회의 부목사 자리에서 나와 3년 동안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다시 작은 교회의 부목사로 돌아갔다. 남오성 목사는 세습하라는 교회에서 굳이 나와 교회 개혁의 최전선에 있는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왔다. 권력과 자본이 집중된 교회와 교권을 감시하고 자정하라고 외치는 일은 거친 일에는 틀림없다. 남오성 목사 스스로 개혁연대를 '특공대', '총알받이'라고 부른다. 알면서도 무슨 이득을 보자고 특공대에 자원했을까.

부흥하는 교회에서 떠나고, 세습 유혹 떨치고

정운형 목사는 안정적인 중형 교회의 부목사 자리를 내놓고 나왔다. 교회 회복을 바라는 마음에서다. 담임목사의 전횡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많은데, 정 목사가 맡은 부서는 사람이 많아졌다. 오래 고민하다가 "교회가 엉망인데 혼자 사역을 잘하고 있는 게 개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담임목사는 "개척을 시켜주겠다"며 붙잡았지만 뿌리치고 나왔다. 사임한 후에도 오랜 시간을 기도한 뒤 담임목사를 찾아가 충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교회를 나온 후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가자 정 목사의 어머니는 좋아하지 않으셨다. 중대형 교회에서 안정적으로 사역하기 원하는 어머니의 바람과 다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께 "교회의 허물은 내 아픔과 같고, 그 기도 제목은 곧 어머니의 기도 제목"이라고 설득했다.

남오성 목사는 교회를 세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기까지 갈등이 심했다. 교회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세습해도 문제되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최근에 교회는 남 목사로 인해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남 목사는 개인 구원에 집중하던 교인들의 시각을 사회 참여로 확장시키기 위해 애썼고, 담임목사인 아버지를 계속 설득했다. 목사 아들이라는 이유로 교인들이 남 목사를 잘 따랐다. 남선교회가 장애인을 찾아가고, 청년회가 외국인 노동자를 섬기고,  고난 받은 이들을 위한 성탄 모임 등에 함께하는 것은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지금 교회를 떠나면 그마나 있었던 개혁의 움직임이 도루묵이 될 것 같아서 갈등했다. 반면 마음 한구석엔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를 물려받으면 최소한 평생 굶지 않고 애들 대학 등록금 걱정은 안 하고 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이 깊어져 주변에 신뢰할 수 있는 분에게 조언을 구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도 물었다. 어떤 사람은 가지 말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그런 세습이라면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러 어찌하든 좋다고도 했다.

동일한 처지였던 김장생 박사를 만났는데, "남 목사가 교회를 물려받는 게 이 교회에는 유익할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에는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타격이 있지만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것에는 세습을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남 목사는 망설임 없이 세습을 포기했다.

독단적인 목사, 가식적인 교수가 바로 나

정운형 목사와 남오성 목사가 교회 개혁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생뚱맞은 일이 아니다. 그들 삶의 연장선인 셈이다. 본인이 살았던 대로 한국교회에 말하기 위해서고, 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기도 하다. 하지만 조심스럽기도 하다. 나날이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 개혁연대 7,000인 찾기 프로젝트 전국 투어하면서 지방의 분쟁 교회를 찾아 예배하고 모임하던 사진. 사무실 직원들이 한사코 사양해도 지방에 있는 개혁연대 회원들은 멀리 찾아 왔다며 밥을 사려고 했다. ⓒ 뉴스앤조이 김세진  
 
정운형 목사는 교회 문제를 상담하면서 자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 힘들었다. 독단적, 파행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난 것 같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았고 거듭 채찍질하면서 성찰하려 애썼다.

남오성 목사도 웨신에서 교수로 있을 때, 허위와 가식이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교수가 되니 사람들이 엄청난 권위를 실어줬다. 같은 말을 해도 이전과 다르게 주의 깊게 경청하고 모두 꾸벅 인사했다. 연봉도 괜찮았고 사회의 존경을 받는 자리였다. 어느새 즐기고 있는 자신을 봤다. 그런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기에 교만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에서 추방당하고, 교수직에서 물러났지만

정운형 목사와 남오성 목사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사역하다가 한계에 부딪혔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 목사나 남 목사는 이를 실패라고 생각하기보다 사명이 거기까지려니 생각했다.

정운형 목사는 탈북자를 돕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추방당하면서 깊은 좌절을 경험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부터 탈북자 사역에 관심이 있었기에 교인들과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행을 결심했다. 정 목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20여 명이 함께 모이던 가정 교회가 공안의 단속에 걸렸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이 내국인을 대상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위법이다. 같이 일하던 중국인 전도사가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따귀를 맞고 협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동료 선교사의 이름을 대지는 않았다.

조사 끝에 바로 추방을 당해 공항으로 가는데, 마음이 허탈했다. 1년의 시간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절한 무기력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중국에 가서 탈북자들을 돕겠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를 하실 것이다 하는 마음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기대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하게 쫓겨나면서 마음이 어찌나 절박했던지, 공항까지 동행한 공안에게 마지막으로 전도했다.

당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 목사는 중국에서의 시간을 통해 교회 개혁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에서 초대 교회 형태의 '날복음'을 접했는데 그에 비해 한심하기 그지없는 한국교회의 상황을 봤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은 당장 생존하는 문제로 고민하며 "하루라도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살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교회 건축과 직분자 임직식에서 돈 내는 것 때문에 싸우는 모습이 너무나 한심해 보였다. 그 경험을 하니 개혁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남오성 목사는 사실 교수가 되기엔 조금 부족한 스펙이었다. 박사 과정을 공부하다가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할 수 없이 휴학하고 귀국했기 때문이다. 남 목사는 웨신에서 교수와 기획처장 제의를 받았다. 근본주의였던 웨신을 개혁적으로 바꾸는 일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남 목사가 개혁을 위한 실질적인 일의 진행을 맡았다. 웨신이 개혁연대, 성서한국, 성토모 등과 제휴를 맺고 '기독교 경제학과 사회 윤리' 같은 과목을 개설한 것도 남 목사가 있을 때 일이다.

남 목사는 지난 2월, 3년여 일했던 웨신 교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모두가 선망하는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었지만 남 목사는 홀가분하다고 했다. 교수라는 옷이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옷을 입으면 뒷목이 당기는 듯 불편했다. 학교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이 가식적인 것을 털어버리라고 좋은 자리 주셨나 보다" 하고 마음을 먹었다.

   
 
  ▲ 남오성 사무국장이 '사랑의교회 건축, 어떻게 볼 것인가' 포럼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 뉴스앤조이 유연석  
 
웨신에서의 경험은 남 목사를 교회 개혁의 현장과 연결해 주었고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해 주었다. 연봉이 괜찮고 존경받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싸움이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이 개혁 운동의 교두보가 되었다.

교수 자리에서 나왔다고 남 목사가 신학 교육을 통한 교회 개혁 운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웨신에 있을 때도 활동가였고 지금도 활동가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개혁연대에서도 특히 교육 사업에 힘을 쏟을 생각이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교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인들과 함께 교회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내 좌표가 어느 위치에 있고 내 임무와 교회 임무는 무엇인지를 아는 역사의식이 있으면 문제를 달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 목사는 지금 한국교회가 중세 시대와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둠이 깊기에 희망도 있다. 남 목사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있다"는 말을 인용했다.

교회 분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지만 현장에 있기에 감사

이제 인수인계한 지 한 달여 지났는데 정 목사는 아직 교회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담했던 교회의 이야기가 아직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교회 문제에 관한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왜곡된 구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이 사무국장의 일이다. 하지만 안 좋은 사건을 주의 깊게 들으니 감정이 이입되어 덩달아 힘들다. 그들 문제는 대부분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힘을 얻기도 하지만 힘에 부칠 때도 있다.

어느 날은 너무 지쳐 상담하기 싫은 마음이 생겼다. 힘든 마음을 안고 강남제일교회가 여는 '양들을 위한 음악회'에 참석했다. 분쟁을 겪고 있는 강남제일교회가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다른 교회 교인들을 초대해 위로하는 자리였다. 음악회에 참석한 교인들이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찬양하는데 눈물이 났다. 교회에서 불의가 이기는 것 같아도 감춰진 것들이 밝히 드러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교인들이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교인들은 불의에 동조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무국장으로서는 일을 잘하기 위해 학자의 혀, 듣는 귀, 철면피 같은 얼굴을 달라고 기도했다. 개혁연대에 부임하기 전, 금식 기도를 하면서 마음에 이사야 50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기도를 하라는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도는 곧 하나님의 정의를 잘 설명하고 잘 듣고 어떤 상황에서도 견디는 힘을 달라는 기도였다. 개혁연대 협동 사무국장으로 있는 지금도 그 기도를 하고 있다.

정 목사는 이제 뜨인돌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한다. 담임목사와 교인들이 정 목사에 대한 기대감을 내보이지만 부담스럽다. 그동안 개혁 운동을 하면서 했던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댈 생각을 하니 두렵다. 개혁 운동의 기운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긴장감 있게 매사에 임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단순히 목사라는 이유로 교인들이 교역자를 우대하는 것을 지혜롭게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목사와 교인이 하나님 앞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남 목사는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오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아침에 즐겁게 출근할 수 있을까'와 '저녁에 보람찬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을까'였다. 지난 한 달여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없어졌고, 분쟁 교회 상담이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어렵고 답답한 얘기를 참고 오래 들어주는 것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 목사는 이제 더 이상 <뉴스앤조이>에 실린 교회 문제 기사를 읽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힘이 난다. 눈물 흘리고 답답해하는 대신 직접 개혁 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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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은 신학 교육의 변화로부터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10. 1. 5. 00:0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국교회 개혁은 신학 교육의 변화로부터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을 준비하며 (1)

필자는 대학 시절 선교 단체 활동을 하면서 몇 가지 비전을 세워 보았다. 그중에 하나는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막연한 것이었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신학 공부에 대한 매력이 컸다. 대학에서 다른 학문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신학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도 깊었지만, 그런 기회가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던 중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복음과상황>에 실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의 '성경 연구와 기독교 세계관' 과정 신입생 모집을 보는 순간, 뇌리에는 '이거구나' 하는 강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여러 상황들, 특히 직장과 가족들의 이해가 쉽지 않았지만 입학을 하게 되었고, 2006년부터 2년간 이 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다. 공적인 일로 하루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개근하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너무나 신나고 즐거운 신학 공부였다. 같은 동료 학생들 7명은 학문적 호기심과 그동안의 갈증을 풀어 놓았다. 교수님들이 골머리가 아플 정도의 질문과 열정은 학교의 분위기를 바꿔 놓은 듯하다. 물론 교수님들의 성의 있는 답변과 강의는 많은 변화를 이끌게 되었다. 그야말로 평신도 신학의 가능성을 보여준 시간이었다.

현직 판사, 의사, 경영인, 회사원, 목사, 전직 은행 지점장 등으로 구성된 반은 그야말로 사회에서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신학적 열정은 대학 신입생들과 같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학교가 봉천동에서 용인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더 이상 후배들을 키울 수 없었지만, 2년간의 과정을 통한 변화는 놀라왔다. 신앙적 회의를 느꼈던 현직 판사의 변화, 해외 전문인 선교를 지망하는 치과의사, 그동안 자본주의에 물들었던 전직 은행 지점장님의 변신 등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기독 시민 활동을 하던 나에게는 그 과정을 통해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되었고 신앙적 부흥의 일어났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과정이 학교가 용인으로 이사하고 나서 지원자가 없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점이다.

교회 개혁 운동을 한 지 8년 정도가 지났다. 교회 개혁 운동을 하면서 가장 큰 아쉬움은 교회 개혁 운동의 백그라운드가 되어줄 신학적 배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개 전투식인 교회 개혁의 자료들을 망라하고 교인들을 깨울 신학적인 강의가 필요성이 크다. 특별히 각 아카데미의 활성화로 많은 청년들의 변화는 이어지고 있으나, 특히 청장년층이나 중년층의 욕구를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중세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사회를 견인하지 못하고 하나님나라보다는 자본주의의 나라를 꿈꾸고 맘몬에 종속되어가고 있다. 특히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는 잘못된 신학과 이에 바탕을 둔 잘못된 가르침이 원인이 되고 있다. 공의와 정의보다는 출세와 부흥이 우선시되고 있고 이것이 교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신앙의 목표가 되고 있다. 말로만 하나님을 외치지만 마음은 세상적인 욕심이 우선시되고 있다. 교회는 규모가 크고 교인이 많을수록 큰 소리치고 칭송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이에 대한 신학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을 준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2009년도 명지대학교에서 열린 성서한국 전국대회를 통해서였다. 성서한국대회 강사진들과 얘기를 하던 중 대안적인 신학 교육 기관의 필요성에 대하여 동의하였고, 꾸준한 의견 교환이 이뤄지게 되었다. 2009년 말 기독 활동가들이 이 논의의 중심에 서서 과감히 일을 벌이기로 했고 강사진을 확보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되었다. 다행히 외형도 없고 재정적인 뒷받침을 약속할 수도 없었지만 기꺼이 여러분들이 헌신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평신도들의 신학 공부를 위한 터전이 없어 아쉬웠던 부분부터 채워질 수 있게 되었다.

느헤미야의 과정을 맛볼 수 있는 시범 프로그램인 신학 캠프를 준비한 것도 단순한 신학교 과정이 아닌 새롭게 태동하는 신학연구원의 강사진과 만나 2년 과정의 맛보기를 준비한 것이다. 기존에 수업 방식을 탈피하여 강사진과 생동력 있게 교류하는 시간을 만들고자 한다. 그동안 속으로만 삭혔던 고민과 한들을 풀어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 안에 잘못된 신학과 성경의 해석을 하나하나 고칠 수 있는 첫발을 내딛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상환 /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준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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