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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소개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2. 27. 13:47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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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11) 신약성서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2. 18. 12:3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에 등장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가 과연 토지를 뜻하는지 재물을 가리키는지 알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마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추측하기 위해서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끄떼마’의 용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가 읽은 성서는 신약성서가 아니라 구약성서였으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는 마가복음과 동시대(1세기)에 저술된 헬라어 작품들로 되어 있고, 모두 기독교인들의 작품이므로 이 작품들은 동일한 단어를 비교적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의 ‘끄떼마’의 뜻을 추측하기 위한 보조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끄떼마’는 네 번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0:22을 제외하면 마태복음 19:22, 사도행전 2:45; 5:1에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의 평행본문이다. 즉,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 2:45과 5:1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발생한 일들을 다룬다.

마태복음 19:22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그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역). 

‘끄떼마따’는 ‘끄떼마’의 복수형이다. 마태복음은 다른 곳에서 ‘끄떼마’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를 살펴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9:22의 문맥을 살펴보는 길밖에 없다.

본문에 의하면 젊은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간 이유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떼마따’를 많이 가져서 슬픈 이유는 예수께서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21절).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팔 수 있는 소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는데, 이 젊은이에게는 소유가 매우 많았고 이 말씀대로 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슬퍼하였을 것이다.

‘끄떼마따’가 팔 수 있는 소유라면 그것은 최소한 돈은 아니다. 돈은 파는 것이 아니라, 팔아서 받는 것이다. 팔 수 있는 소유는 돈 이외의 재물인데, 특히 토지이다. 팔아서 돈이 되는 것은 토지이기 때문이다. 귀금속이나 보석도 팔면 돈이 되지만 이러한 것은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팔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아마도 토지를 가리킨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 주어진 맥락은 율법을 지킴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는데(17절), 이 계명들은 특히 10계명 중 5~9계명과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18-19절). “온전하고자 할진대” (즉 이러한 계명들을 온전하게 지키기 원한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젊은이의 질문과 관련된다. 이 질문은 “이 모든 것” 즉 앞에 언급된 계명들을 지켰는데 아직 어떤 점에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지 묻는 것이다. 이 부족함을 채우고 온전하게 계명들을 지키기 위한 방도로 제시된 것이 바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특히 염두에 두어진 계명은 앞에 제시된 계명들 중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게 재물이 많고 이웃이 가난할 때 나의 재물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많은 토지를 가지면 분깃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율법은 토지의 경계표를 이동시키는 것을 금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나의 토지를 넓히고 이웃의 토지를 좁히는 행위, 즉 경계표를 옮기는 행위는 저주를 받을 행위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더더구나 토지를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사도행전 2:45 

또 그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아 그것들을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았다. 여기서 ‘끄떼마따’는 팔아야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최소한 돈이 아니다. 또한 ‘끄떼마따’는 ‘소유’와 구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진 두 가지 뜻 “소유,” “토지” 중에서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4:34-35은 사도행전 2:45과 평행을 이루며 예루살렘 성도들이 판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들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토지나 가옥을 소유한 자들은 누구든지 그것들을 팔아서 그 판 것들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수의 제자들이 판 것은 토지나 가옥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토지나 가옥을 가진 자는 이것들을 팔았고,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가난한 자는 토지나 가옥을 판 값을 나누어받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45에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리킬 수 있는 “토지,” “소유” 중에서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토지를 판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복음 19:21; 마가복음 10:21)고 명하셨는데, 제자들은 토지나 가옥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이 명령을 지킨 것이다. 왜 하필 토지나 가옥을 팔았을까? 예수께서 소유를 팔라고 명하셨을 때 이것들을 팔도록 의도하셨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다. 이 명령을 최초로 들은 사람은 이 명령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제자들이 토지와 가옥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예수께서 원하신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 공동체 속에서는 구약성서가 명하는 토지법이 준행되어 사람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지 않으며, 예수의 토지반환명령이 준행되어 지계표를 넘어 확장한 토지가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진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34-35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교회들의 모델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기를 부정하는 것은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유학시절에 동구권 신학생들이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열심히 분배를 행하다가 결국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체제 속에서 그들이 경험한 가난이 그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읽게 했다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그들의 해석은 예루살렘 교회의 행함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임을 알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행하다가 가난해진다면 그러한 가난을 감수해야 한다. 교회의 목표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의 명령을 따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나 모세의 토지법을 지킨 구약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 소유하는 평균지권사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이러한 성서적인 사회 체제를 공산사회라고 비판하는 것은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사회와 모든 개인이 생산수단을 평등하게 소유하는 성서적 사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또한 공산주의가 싫어서 사도행전 교회를 부정하고 구약의 토지법도 부정하는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성경이나 예수보다 더 높이는 우상숭배적인 태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성경과 예수보다 더 높아져 있다. 그들은 성경과 예수를 지극히 자본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면 예수의 명령마저도 ‘율법’이라고 부르거나 우리와는 관계없는 명령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이다. 마치 소가 농부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기독교는 본래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는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재앙일 뿐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탈을 쓴 바알의 종교일 뿐이다. 소가 풀을 먹지 않고 동물성 사료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리듯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 다른 것을 먹고 살 때에는 광교회병에 걸리게 된다. 소가 풀을 먹고 살아야 하듯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5:1 

그런데 이름이 아나니아인 어떤 남자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끄떼마를 팔았다(사역). 

사도행전 5:1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팔았다고 한다. 이 ‘끄떼마’가 무엇인지는 근접문맥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사도행전 5:1의 직전에는 바나바가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기사가 나온다(4:36-37). 즉 바나바는 사도행전 4:34-35에 언급된 토지나 가옥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바나바는 레위인이었으며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지계표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레위기 25:23-28을 어기어 토지를 (임대하지 않고) 매매하고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내어 놓은 것은 조상이나 자신이 율법을 어긴 잘못을 회개한 것이다. 이러한 바나바의 행동에 이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판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의 행동을 흉내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끄떼마’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토지는 약간의 토지였을 것이다. ‘끄떼마’라는 단어가 단수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넓은 토지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2:45이나 마가복음 10:22; 마태복음 19:22에서처럼 복수형 ‘끄떼마따’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5:2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를 판 값의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음을 언급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아마도 그들이 가진 토지의 일부만을 처분하고 그 값 중에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이 문제되지 않고 토지를 판 값의 일부를 감춘 것이 지적된다(사도행전 5:3).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은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는 부분(기업)을 제외한 토지를 판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업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비판받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업을 초과하는 토지(즉 평균지권이 허용하는 토지가치 이상의 토지 소유, 또는 토지 경계표를 넘어서 확장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문제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토지를 처분하여 일부를 바치고 일부를 숨기는 것은 큰 잘못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의 일부를 팔아 바친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한 것이므로 선행이 아니며, 그들이 판 값 중에 일부를 바치지 않은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므로 악행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사도행전 5:5, 10) 그러한 악행에 대한 벌이었다.

사도행전 5:3에서 베드로는 ‘땅 값’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을 언급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팔았다고 하는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킴을 분명히 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신약성서의 다른 곳들에서 사용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끄떼마’는 이 곳들에서 언제나 토지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이 드러났다.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키지 않음이 명확한 곳은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도 ‘끄떼마’라는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추측하게 한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만이 독특하게 ‘끄떼마’에 토지라는 뜻보다는 재물이나 소유라는 뜻을 담아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기독교인들이 한결같이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의 저자도 이 단어를 그러한 뜻으로 사용하였으리라고 추측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2에 나오는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예수의 명령을 듣고 근심하며 간 그 사람은 재물 중에서도 토지를 많이 가진 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예수의 명령(마가복음 10:21)은 사실상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들이 이 명령을 듣고 근심하게 되어야 이 말씀이 제대로 이해된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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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님께 (뉴스앤조이 기사)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09. 12. 18. 12:23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눈 뜨기를

제 이름은 고세훈입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신도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을 뵌 적은 몇 차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만난 적은 없습니다. '사랑의교회'에 몇 번 가 보기는 했지만, 그곳 교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득 이 시기에 옥 목사님을 수신인으로 편지를 쓰고픈 마음이 계속 저를 붙들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지체의 하나로서 같은 편끼리 투정 부린다 생각하시고, 부디 이 느닷없는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공개편지인 것은 이미 '사랑의교회' 이전 문제가 공론화했고, 또 저로서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형식의 글이 됐습니다.

제게는 벌써 20년도 더 전 미국 유학 시절, 옥 목사님이 쓰신 <나의 고통 누구의 탓인가>를 몇몇과 함께 읽으며 감동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사이는 제 아내가 틀어 놓는 옥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이따금 들으며 옥 목사님의 '신학적' 근황을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한국 교계 안팎의 상황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마음을 울리는 설교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옥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말씀에 갈급한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빗줄기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제 마음속에 옥 목사님께서는 뭇 대형 교회들의 목사님들 중 하나여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 혹은 깊은 신뢰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따금은 옥 목사님께서도 자신의 설교에 대해 자유로움을 못 가지신 것은 아닌지 하는 답답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왠지 바로 핵심을 치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안타까움 같은 것입니다. 혹시 어떤 경계(인의 심정)에 갇혀서 목사님 스스로도 갑갑해 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에 젖어 보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반쪽 진리가 횡행하고 방송 전파에서는 거의 약장수 수준의 '말'들이 설교라는 이름으로 범람하는 세상인지라, 제가 너무 민감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옥한흠 목사 제자 훈련 성공 사례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 제일 먼저 터져

얼마 전에 있었던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가 문득 생각납니다. 두루 알다시피, 신자유주의적 경제 현상의 중심에는 노동 유연화 정책이 있고, 노동 유연화 정책의 가장 보편적인 귀결이 다름 아닌 비정규직의 양산입니다.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노동 인구의 6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이는 이른바 선진국의 2-30%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기업하는 사람들과 기업에 돈을 빌려 준 금융권에게 비정규직이야말로 이윤 확대를 위한 가장 매력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비정규직처럼 항시적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한 국가 복지 수준이 매우 열악합니다. 국민총생산 대비 국가의 복지 관련 지출 또한 선진국의 25%에 불과하니까요. 기업은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국가마저 그들을 내치는 형국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 삶이 거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기독교를 전면에 걸고 출발했던 이랜드라는 기업에서 그 문제가 가장 먼저 터졌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랜드는 기독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기업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영 논리가 압도적인 기업임을, 그것도 다른 보통의 기업들보다 선도적으로 만천하에 보여 주었던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에 투철하여 기업을 운영한다 한들 일반적으론 존경받을 일은 아닐지 모르나 책잡힐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애초에 내걸었으며, 그것도 다름 아닌 비정규직 문제로 일반 기업들에게 '모범'을 보일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지요.

한때 그 기업은 옥 목사님 제자 훈련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혔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이 자신이 경영하는 대형 마트의 매장에서 휴게실을 없애고 기도실을 만들고는, 기도실 벽면 곳곳에 "우리 회사를 더 성장하게 해 주세요", "세후 이익 x% 달성", "총매출 00억 달성" 같은 기도 제목을 내걸었답니다. '기도실'은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를 빙자한 '장사하는 곳'이 돼 버린 것이지요. 심하게 말하면 장사를 위해 기독교가 동원된 것입니다. 그쯤 되면 그것은 기독교 원리를 삶에 적용하는 차원에서의 실패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의 문제입니다.

저는 올해 초인가에 출판된 이랜드 아주머니들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참담한 노동 여건을 책으로나마 접하고는, 계산대 앞 긴 줄에 서서 가끔 불평을 했던 제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느닷없이 이랜드 문제를 거론해서 목사님께 당황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랜드 문제가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 사역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첫 번째 사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저만의 아전인수인지요. 당시 옥 목사님께서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목사님께서 공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실 저로서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 누적된 수순의 자연스런 결과

그러다가 이번에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많은 얘기들이 오갔지요. '사랑의교회' 교인들의 압도적인 다수가 건축 헌금을 작정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것이 일으킨 교계 안팎의 파장에 대한 현 담임목사의 이상한 독려에 관한, 제가 보기엔 기이함을 넘어서 충분히 흉흉하다 할 수도 있는 말들까지 그 목사님 입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혼란케 만들었던 것은 옥 목사님께서 그 모든 일에 대해 보이신 반응이었습니다. 과연 놀라야 할지 아니면 태연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섭섭하실지 모르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애초에 옥 목사님을 저희 쪽에서 오해했든, 아니면 옥 목사님께서 대형 교회에 대한 입장을 스스로 바꾸셨든, 어느 쪽이든 실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도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될수록 빠른 시일 내에, 옥 목사님께서 깊고 명쾌한 입장을 교계 일반을 대상으로 표명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처음 '사랑의교회' 이전 관련 기사를 접했을 때, 저의 심정은 '사랑의교회, 너마저!'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꽤 오랫동안 '사랑의교회'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 하던 일들이 누적돼 오다가 마침내 이번에 교회 이전 문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것이 온 것 아니겠냐는 생각 같은 것이지요. 이런 말씀까지 드리긴 뭐하지만, 얼마 전부터 '사랑의교회'는 무언가 바빠지고, 좋게 말하면 활기를 띠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왠지 그런 변화를 지켜보는 저와 제 주위 많은 사람들은 불안하고 때로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조마조마했습니다. 무엇인가 미덥지 못하고 아슬아슬했습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교회 조직이란 것도 교회의 규모에 맞게 운영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과 공의를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한 교회 공동체의 본래 목적과 별개로, 마치 그 자체가 합리적 목적을 지닌 것처럼 운영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고 말 것입니다. 혹시 이번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교회가 커지면서 수단이 목적을 점차 압도해 가는, 한국교회의 고질적이고 통상적이고도 지속적인 어떤 경향이 마침내 다다른 지점은 아닌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점에서 '사랑의교회'는 다른 대형 교회들과 너무나 닮아 있었고, 이번만은 예외라는 증거를 도무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교인 숫자가 늘어난다고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사랑의교회'가 그간 성취한 것들을 폄하하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 문제라면, 저는 어떤 신학적인 입장을 피력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합니다. 단지 한국 교계가 걸어온 지난날들을 돌아보면서, 수적으로 양적으로 교회인을 양산하는 일이, 다른 쪽에서는, 잘 포착되지는 않지만, 진정한 신앙인들을 뭉텅뭉텅 덜어 내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가 큰 쓰임 받는다? 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어떤 사람들은 큰 교회가 큰 쓰임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말은 '쓰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심'을 무시한 궤변입니다. 교회는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 땅에서 결실을 맺어 나갈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소관을 나의 소관으로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교만이요 곁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구제나 봉사의 문제라면, 기독교에서 소위 이단시하는 많은 단체나 세속적 집단들 가운데도 헌신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진정으로 약자를 돕기 위해 애쓰는 곳은 널려 있습니다. 무릇 자선의 윤리란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포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교회의 이름을 구태여 빌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필요조건일지언정, 진정한 기독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열매로서 그냥 맺어지는 것이며, 모든 열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해서 위로나 자랑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전장에서 정의 아닌 승리가 지고의 가치가 될 때, 맹목적이고 공격적인 애국주의가 판을 치기 쉽습니다. 일부러 조심하고 부단히 경계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사랑과 정의이되, 결코 이 땅에서의 승리를 장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승리케 하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나는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대학에 합격해야 하고, 큰 교회를 건축해서 큰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남은 소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큰 교회는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닙니다.

대형 교회가 큰일을 못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큰 교회니까 큰일을 한다는 말은 큰일을 하기 위해 부자가 돼야 한다는 말처럼 위험한 억지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래 크기를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속성이고, 죄가 부추기는 인간의 경향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만 놔두면 대형화는 거의 자동적으로 더 큰 대형화를 추구합니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현재 영적 상태에 비춰 볼 때 특정 교회의 대형화가 그 교회의 영적 진운을 긍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대형 교회로 나아가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축복이니, 영적 성장이니 하며 자만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개인(의 부)이 그런 것처럼, 교회가 커지면, 자기 의가 덩달아 커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용하시기가 더 어려워지기 쉽습니다. 크기는 영적 상태와 긴밀히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 시절과 큰 교회 시절, 교인들이나 목회자의 영적 상태가 같을 수 없습니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자와 영적 상태가 같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가 부의 문제를 그토록 경고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부의 축적 과정이 영적 과정이듯이, 교회의 크기의 문제는 곧 영적인 문제이기 쉽습니다. 왜 우리는 '부의 기만성'(deceitfulness of riches)(마 13:22)에 관한 예수의 경고를 예배당의 크기에 적용하려는 용기와 지혜를 갖지 못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교인 몰려드는 현실은 재앙

크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기는, 지식이 그렇고 부가 그런 것처럼,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교회가 작고, 지식이 적고, 부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날로 대형화하고, 지식인은 넘치고, 부자들은 많아지는데, 빈곤과 소외, 양극화와 불안은 커져 가고 있습니다. 준비된 교회, 준비된 지식인, 준비된 부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말했듯이 세 살배기에게 억지로 살을 찌운다 해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건강한 유아라는 점을 반증해 줄 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재앙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지식을 쌓고 부자가 되는 것이 그 개인에게 재앙인 것과 꼭 같습니다. 그때의 부와 지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방치하신 것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서 교회 건물이 감당하지 못할 즈음, 오히려 교회는 이미 그때부터 발전 방향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양적인 외양에 취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물량적 성장 자체가 목적이 돼서 복음은 이미 상실돼 있기가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규모 자체가 중요해질 때, 그때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 교회는 넓은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자기 진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큰 기독교 기업을 일으키고, 큰 교회 건물을 건축해서, 큰일을 하겠다는 것은 철저하게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목사님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방 족속에처럼 왕을 허락하신 것은,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인간의 사악함과 고집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체념하고 방치하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악의 번성과 횡행을 이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세속의 역사에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그랬고, 심지어는 도적떼의 수괴들도 구름떼 같은 추종자를 거느렸던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양지에 앉아 승자의 편에서 강한 자를 거들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리화했던 예들은 역사에서 넘쳐납니다.

사람의 눈에 성공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며, 그것이 교회와 관련될 때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에 적당히 얼버무려 접목하면, 쾌감은 몇 배로 늘어납니다. 세상적 욕구도 은근히 충족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뤘다는 뿌듯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교회 안의 보통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심리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포퓰리즘의 위험성

목사님, 사람을 너무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의견이 어찌어찌 만들어졌다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치환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 의견이 차선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도출되는 과정이 또한 정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소 극단적이고 지나친 비유일수도 있겠습니다만, 히틀러의 집권과 만행 배후에는 수많은 기독교인을 포함한 멀쩡한 독일 중산층이 열렬한 지지가 있었습니다. 그간 한국교회는 그것이 세습이든 교회 건축이든 교인들의 다수 의사를 앞세워 정당화해 왔습니다.

포퓰리즘은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것은 오히려 대형 교회일수록 편만한 게 현실입니다. 포퓰리즘이 문제인 것은 어떤 결정이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거나,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따르는 부작용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 있습니다. 포퓰리즘은 그것이 대중의 욕구를 수단으로 지도자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다는 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는 대중의 의사와 욕구를 조작하려는 (때로는 지도자 자신도 스스로 합리화하는) 술수가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국가든 교회이든 구성원이 깨어 있을수록 포퓰리즘은 힘겨운 전략이 되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목회자 개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한국적 상황에서, 일반 교인들의 개입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은 대형 교회일수록, 그런 일을 기대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대형 교회에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일에 소극적이거나 나아가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기 쉬우며,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교회의 크기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식의 문제 제기 자체를 불순한 것으로 불쾌해 합니다. 목회자의 할 일은 교인들을 늘 깨어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회자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약해지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레 차단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도 살고 교회도 사는 길일 것입니다.

'사랑의교회'가 건축 문제를 결정할 때, 대형 교회가 스스로 빠질 수 있는 이런 위험을 충분히 고려하여, 가능하면 보수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는지 궁금합니다. 이 궁핍한 시대에 그런 어마어마한 결정 앞에서 교인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토론의 기회를 부여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며 최선을 다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명실상부한 민주적 과정을 거치기 위해 교인들의 적극적 관심을 유발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는지 진정 궁금합니다. 그런 과정이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왜곡된 상태에서 도출된 합의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 만들어진 '억압적 합의'일 뿐입니다.

전간 시절 영국의 유명한 정치학자이며 노동당 정치인이었던 해럴드 라스키는 "누구나 빵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아무도 케이크를 먹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노동자들 앞에 설 때마다 매번 자신이 부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말로 연설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이론에 투철하게 살았던 비기독인이었습니다. 저는 라스키의 태도가 반드시 우리가 따라야 할 준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교회에 만연된 불평등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급진적'(radical) 통찰을 떠올립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의 소리로 교회 '안'을 깨우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 있다면, 정말 모골이 송연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더 뻔뻔스럽게 불의와 타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일을 일상적으로 반복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기커녕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강변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를 말로써 부인하는 일을 단죄하는 데는 재빠르지만, 행동으로써 일상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일에는 관용이 넘치거나 무감각합니다. 교회가 마땅히 맡겨진 책무를 소홀히 할 때, 이단과 반쪽 진리가 판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상도 타기하는 세습과 대형화를 탐한다 한들, 이제 별로 놀랄 일도 아닐지 모릅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이제 세상은 교회를 향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너무도 다르지 않거나(거룩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지요), 아니면 그 악행에서 세상을 오히려 앞서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하는 일에 무관심합니다. 교회는 그들의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끼리끼리의 모임이요, 예수 이름을 입에 달고 훈계를 일삼는 가소로운 집단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밀알은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란 썩지 않는 웅장한 건물과 허공에 새길 명성을 위해 혈안이 된 집단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의 예배당은 이 땅을 잠시 스쳐 가는 이방인들이 모여 주를 고백하는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거주할 부동의 부동산의 중요성을 앞장서서 일깨우는 진원지가 바로 교회일지도 모릅니다. 그 거창한 건물로 어떤 거창한 일을 할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잃어버린 사랑의교회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사랑의교회' 문제는 단순히 새 예배당을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마음을 한없이 짓누르는 것은 그것이 어쩌면 사소한 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교회'가 혹시 이미 슬픔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진 않았는지, 두렵습니다. 예수는 죄에 휘둘리는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이 깃든 깊은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슬픔이 마르면 남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 슬픔을 아는 자가 잠 못 이룰 때, 어리석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셨다며 자신의 태평한 잠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통곡하셨습니다. 과연 오늘의 상황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점은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통곡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덕담을 건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랑의교회'가 새 건물을 짓고 다시 한번 도약하겠다는 데 축하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요, 목사님. 한편 생각해 보면, 악이 도처에 편만한데, 축복의 말을 또 하나 첨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에 대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일이야말로 한국의 기득 계층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대형' 매체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 해 오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별 문제 없이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잘 돼 가고 있다고 국민의 눈과 판단력을 가리는 일을 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럴수록 교회 안팎에서 불의는 더 만연하고 약자들의 고통은 갈수록 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양지만을 자꾸 비추자는 것이 어쩐지 문제를 회피하거나 은폐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셨을 겁니다. 목사님, 부디 작금의 일련의 상황들이 '사랑의교회'가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대해 마침내 눈을 뜨고, 목사님의 사역에는 일대 쇄신의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고세훈 /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개혁연대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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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쳐라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12. 15. 10:3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복음과상황 창간 18주년 기념예배 설교] 에스겔 2:1-7/ 예레미야 5:30-31

이만열 장로 (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명예교수)




복상 창간 기념예배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에 저는 에스겔서의 이 대목을 영문성경(NIV)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이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7절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You must speak my words to them, whether they listen or fail to listen, for they are rebellious. 이날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좀처럼 영감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도, 오늘 설교의 제목은 바로 이 대목의 본문에서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바빌로니아의 그발 하수가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기 백성을 향해, 이 반역하는 무리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내용이 5절에도 보입니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외치는 자를 말할 것입니다. 4절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자손은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왜 이 성경말씀을 오늘 말씀으로 택했는가 하면 오늘날의 세대가, 에스겔의 시대와 같이 목이 곧고 너무 뻔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사회도 꼭 같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씀이 불필요한 세대같이 보입니다. 때문에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상 진정한 말씀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흔히 들려지는 말씀에 대해, 듣지도 않고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낙심하고 있을 때에 이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갔던 때였던 만큼 오늘 세대보다 더 뻔뻔하고 소망이 없던 시대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 뻔뻔한 사람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치라고 했습니다. 그런 뻔뻔하고 절망적인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代言하는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세대가 뻔뻔하고 목이 곧다고 한다면, 어디에서 그렇습니까. 먼저 교회가 그렇습니다. 대형교회가 목회세습을 하면서 종교적인 권력, 지위, 명예 그리고 재부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세습에 저항하거나 개혁하려는 운동이 잠시 보인 적이 있지요. 중세 천주교회가 교황이나 교권자들로 인한 부패 때문에 이를 막아보려고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했듯이, 한국 교회에도 이런 특단적인 조치가 주어져야만 세습의 폐단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요? 대형교회의 세습과 그 운영은 거의 필연적으로 부정직하고 부패한 사건들을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반성이 없을 뿐아니라 이제는 이를 지적하는 소리조차 거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형교회 세습 문제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다 나타나고 있지만, 보수교회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보수가 종교계나 정치계를 막론하고 그 건전한 가치관을 상실했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며, 여기에서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무자격 목회자들의 양산이나 목회자들의 상식을 벗어난 일탈행위는 이제 일일이 지적할 겨를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는가 물을 정도로 한국 교회의 변질은, 과거 한 때 한국사회에 소망이 되었던 그 이상으로,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인가 하는 정의도 필요합니다만, 적어도 오늘날 같이 대형교회를 지향하면서 자본주의적 경쟁주의식으로 교회성장을 지향하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기독교인이고 국무총리, 대통령실장, 교과부장관과 국토해양부 장관 등 많은 공직자들이 기독교인이고 국회의원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어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계층은 물론 인구의 20%내외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 인원배분으로 본다면 가히 기독교국가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의 확립은 요원하고 오히려 기독교적인 세계관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사회 또한 각종 선각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吾不關焉, 들은 시늉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건이 터져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자의 입을 틀어막고 위협을 가하며, 글로써 외치는 자를 옥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국정최고책임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요 날마다 하나님께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제 도대체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가, 기독교인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어떻게 정치권과 사회를 대하고 있습니까. 자기 약점이 많고 보니 우선 이렇게 양의 탈을 쓴 정권에 대해서 우선 비판할 능력이나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정권의 행태나 우리 사회의 비기독교적인 점에 대해서 추호도 거스리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러할진대 다른 언론들의 곡학아세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을 말하고 계도할 수 있겠습니까.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남쪽 유다의 여호사밧왕 시대와 같이 미가야 같은 사람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그 당시의 400명의 거짓 예언자처럼 떼지어 외치는 아첨소리만 있는 것 같습니다. 4백명의 목소리처럼 승리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지만, 패배와 유리방황을 외치는 한 사람 미가야의 초라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천상의 회의에서 ‘예언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어 호리게 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거짓말 하는 영’을 마음 속에 넣었기 때문일까요.

대학교수들로부터 시작된 시국선언에도, 각계의 외침에도 전혀 무신경하게 대하는 이 정치 사회가 과연 기독교인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같은 시국선언에 대한 반응이라는 게 고작, 전체 대학교수가 얼만데, 전체 국민이 얼만데 그 따위 숫자가 외친 들 대수로운가 하는 비아냥 뿐입니다. 아합왕을 지지해준 ‘400명’의 예언자들처럼 거대한 언론들이 자기 뒤를 봐주고 있다고 뱃장입니다. 그래서 ‘먹통정권’이란 별명까지 붙여주는 안타까운 상황에까지 이르렀지만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400명은 하나님의 진실한 대변자 미가야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이 모두 400명의 소리처럼 열창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진실한 예언자 미가야 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시대를 향해 외쳐야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에스겔서를 읽기 전에 예레미야서를 읽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참으로 특이한 예언자입니다. 모두들 자기 민족의 희망적인 미래를 강조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민족의 비극적인 장래를 가감없이 외쳤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유독 “너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구절이 많이 나오는 성경이라고 느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조국 유다와 자기 민족을 향해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자긴들 어찌 그 말을 원해서 했겠습니까. 조국과 민족을 저주하는 그런 말을 어떻게 자기 입으로 흔쾌히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하니 하는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런 불리한 말이 “나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읽은 예레미야 5장의 말씀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합니다만 5장의 1절 말씀은 오늘 이 시대를 두고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유다 왕국은 이집트에 원군을 청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랬을까요? 예레미야는 국방의 요체가 동맹군을 끌어들이는 데에 있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실천함에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걸 오늘날 식으로 번안한다면, 국방의 요체가 동맹국과의 굳건한 동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돌보며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의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의 질서를 실현함에서 안보의 원리를 찾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반핵반김의 안보원리를 추동하는 중추세력이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 교회라고 할 때, 이들의 이념과 지향이 든든한 안보자체이신 하나님 신앙의 토대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거리에서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았던 前例를 따라서 한국 교회는 안보의 요체를 정의와 진리의 실천에서 설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유다의 지배층이 국방의 요체를 이집트와의 동맹에서 구했듯이, 한국 교회도 유다의 지배층처럼 잘못된 안보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그 시대를 꿰뚫는 예언자적 혜안은 5장 30절과 31절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 부류를 한꺼번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제사장 그리고 그런 선지자와 제사장을 용납하는 백성들입니다. 저는 제사장들이 권력으로 다스린다는 말을 잘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형교회와 최근 이곳 저곳에서 불거지는, 교권화해가는 교단정치의 현상들을 보면서 제사장들의 권력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는 것은 비단 아합시대에 미가야 선지자와 대결했던 400여명의 선지자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소위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까. 뻔히 보이는 사실도 뒤집어서 말하는 사실들이 바로 거짓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근 감리교단을 비롯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에서는 제사장의 권력화의 현상의 적라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교단 정치는 물론이고 연합체의 정치행태 또한 제사장의 권력화의 상징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거짓 선지자와 권력을 휘두르는 제사장을 보면서 그것을 좋게 여기는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들에 대해서 깨어있다면 어떻게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거짓과 권력 앞에서 무방비상태인 백성들이 존재하는 한, 거짓 선지자들과 권력을 남용하는 제사장들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와 권력을 남용하는 제사장들게 실망한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깨어있는 민중, 각성하는 백성을 기다렸던 것일까요.

<복음과상황>은 지금부터 18년전인 1991년에 창간되었습니다. 그 때 한국의 복음주의권은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시대에 깨어있는 행동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정리되고 있습니다만, 정교분리의 잘못된 권유와 이분법적인 신앙행태에 기인하여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가 거의 봉쇄되었습니다. 젊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진리에 대한 무기력증에 내팽개친채 안타까워했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주의권의 젊은이들은 진보권 젊은이들의 지향과 행동을 보면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무렵 로잔언약이 소개되었고, 그 로잔언약을 비빌 언덕으로 하여 젊고 개혁적인 젊은이들이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비록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작은 숫자였지만, 이를 계기로 사회참여를 위한 지향을 복음주의권 나름대로 정립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복음과상황>이 간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헌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복음주의권의 사회참여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 <복음과상황>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진보주의권의 이론과 주장, 행동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뜻을 함께 하지 못한 복음주의권이 <복음과상황>에 귀를 기울이면서 약하게나마 행동화의 기틀을 마련해 갔던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복음과상황>은 복음주의권 젊은이들에게 시대를 깨우치는 광야의 소리와도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환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진보주의권 젊은이들의 주장과 운동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이론과 행동은 이제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차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때에 <복음과상황>은 아직도 그 생명을 유지하면서 사명완수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리가 없는 시대가 아니고 창간 당시와는 달리 소리가 너무 많은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때에도 외치는 소리가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소리가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듣던 듣지 않던 외치라고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3장에 보면 외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언명했습니다. 아니 외치지 않아 멸망하게 된 사람들의 피값을 외치지 않은 자들에게서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장 18-21절을 보십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이런 말씀으로 명령하고 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외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창간 당시와 모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세계사의 변화는 물론이고 독자층들도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변화에 따라 우리의 소리도 좀 더 정제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복음과상황>이 더 분명한 소리를 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8절 말씀에,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복상은 그 동안 시대에 조응하는 분명한 소리를 발했는지, 그리고 변화하는 독자층이 이해할 수 있는 소리를 발했는지, 오늘 이 시점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아서도 복상이 존속할 필요가 있다면, <복음과상황>이라는 제목에 알맞게, ‘상황’이라는 시대 변화를 통찰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진행 방향에 알맞는 ‘복음’의 원리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의 다른 의미 없는 소리들처럼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를 새롭게 다짐하는 데에 창간 18주년을 기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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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복음과상황기사)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2. 15. 09: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개원, 원장 박득훈 목사를 만나다

   
▲ 신학연구원‘느헤미야’의 원장으로 내정된 박득훈 목사(언덕교회). ⓒ복음과상황 이종연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성서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권 활동가와 신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학연구원 느헤미야’가 그것.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개혁을 열망하며 뜻을 모아 온 이들은 지난 11월 중순 첫 모임을 갖고 느헤미야와 같은 진정한 개혁가를 양성하는 대안신학교의 장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신학을 기반으로 학제 간 연구를 통해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 목표다. 이곳에서는 목회자, 평신도라는 틀을 벗어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배울 수 있다. 복음주의권 신학 풍토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느헤미야’의 원장으로 내정된 박득훈 목사(언덕교회)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복음주의권 신학 교육 기관이 나오는 것이라고 봐도 되나요

예민한 질문이네요.(웃음) 요즘 ‘열린’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열린 복음주의’라고 하면 어떨까요. 복음주의의 전통과 기반을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끊임없이 진리에 대해 열린 추구를 하는 것이죠.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신학연구와 교육’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2000여 년 기독교 역사상 신학은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어요. 존경하는 루터나 칼뱅의 신학조차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거든요. 아무리 훌륭한 신학적 전통이라도 역사 발전과 함께 하나님의 성경적 계시의 이해가 깊어지기 때문에 수정될 여지가 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 복음주의’라는 것입니다.

‘열린 복음주의’와 성경은 어떤 관계인가요

복음주의의 핵심 슬로건 중 하나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의 자명성이 진지한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배제한 것이 아니었죠. 또한 어느 시대, 누가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했는가 하는 것은 열려 있는 질문이죠. 역사가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성경의 본뜻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신학은 발전되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열린 복음주의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고 새로운 사상이면 뭐든지 받아들이겠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어떤 해석 혹은 신학적 입장이 성경 본연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지 치열하게 탐구하면서 성경이 현재 복음주의 전통에 수정을 요구한다는 확신이 들면 얼마든지 수정할 용의가 있다는 점에서 이해해 주면 좋겠네요.

한국의 신학교가 말씀하신 부분을 지향하지 않았다고 보시나요

굳이 우리만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에 깊이 공감하는 신학자들과 기독운동가들이 ‘느헤미야’에 다양한 역할로 집결하게 되었다는 점에 그 독특성이 있다고 봅니다. 런던 바이블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전공분야가 서로 다르지만 신학교수들의 중심을 관통하는 일관적인 흐름이 있다는 것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회 정의에 대한 열망을 발견했을 때, 저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죠. 중요한 신학적 이슈와 관련해서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하거나 강조점이 다른 교수들에게 배울 때, 학생들은 과연 누가 옳은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가 일반 신학교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신학연구원을 만들게 된 배경부터 남다릅니다. 대안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신학연구원을 만들도록 자극한 사람이 기독운동가들이었어요. 이 점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출발점 자체가 신학자와 성도의 합작품 아닙니까. 아마 이것이 앞으로 우리 연구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봅니다. 신학자 중심주의, 사제 중심주의가 아니라 신학자․목회자․성도가 함께 연구원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는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비전과 사명이 새롭다고 할 수 있어요. 비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 사회 그리고 자연 등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나라를 구현해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 즉 목회자 중심의 교계를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함께 일하는 기독공동체로 전환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사명은 첫째,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교육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하여 성도를 위계적으로 차별하지 않고, 목회자 성도와 비목회자 성도가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함께 신학을 공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둘째,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입니다. 신학적 기반 위에서 학제 간 연구를 하려는 거죠. 신학과 일반 학문을 단순히 병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역동적으로 스며들게 하는 연구를 할 것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아야만 세상에 나가서 호소력 있는, 영향력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가령,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기독교적 언어와 일반적 언어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흑인인권운동에 대한 충분한 지지를 교회와 사회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거든요. 학제 간 연구란 바로 그런 실천적 인물 양성에 목적이 있음을 의미해요. 단순히 지적 엘리트를 길러 내려는 것이 아니에요. 일반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실현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을 키울 겁니다.

셋째로,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을 품고 그 비전과 가치에 따라 한국교회와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수 있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자도를 구현해나갈 수 있는 사람 말이죠.

하지만 강사진은 신학자 혹은 교수 아닌가요

현재로선 사실이지만 그렇게 우려는 하지 않아요. 언젠가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가 시민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자적 소양을 갖고 있는 운동가, 운동가적 소양을 갖고 있는 학자, 시민운동을 지지해 주는 후원자’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연구원 강사진은 말하자면 기독 운동가적 소양을 갖춘 신학자들입니다. 그분들은 학제 간 연구에 익숙한 분들이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학교를 만들어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 중엔 신학적 소양과 기독교적 영성을 잘 갖춘 기독 운동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학교 강의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도 강사진에 포함해서 공동으로 강의하고 연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거예요.

교회와 사회를 변혁시켜나가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 교육 목표라고 하셨는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교회와 사회에 깊이 침투해 있는 맘몬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맘몬에 친화적인 모든 것들을 혁파하는 데 그 일차적 목표가 있습니다. 덩치가 커져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맘몬의 가치와 전략이 교회와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덩치를 키우는 데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데 있어요.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가치대로 살아갈 때 덩치가 커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무능력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강압적으로 세상의 역사를 이끌지 않으십니다. 기다리고 상처를 받고 고통을 입으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규모를 확대하려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돼요. 오늘 신학교나 교회가 병든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덩치가 커져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맘몬의 논리에 속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따라 교회와 세상을 변혁해나가는 것은 우선 맘몬의 논리의 기만성과 위험성을 폭로하고 배격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나라를 펼쳐가는 진정한 힘은 ‘작은 밀알의 생명력’에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밀알로 땅에 떨어져 썩어 죽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역동적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맘몬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 세속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어떻게 변혁 가능하다고 보시는지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죠. 우선 세속 사회의 변혁자로 살아가려면 맘몬의 가치와 하나님나라 가치가 강력하게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견뎌 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 가면 그걸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요. 갈등 속에서 사는 게 힘들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없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충돌 속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참아 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경로를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형편과 은사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크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맘몬과 하나님이 일상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일터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일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혜롭게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맘몬의 질서와 타협하고 기다려야 하기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변질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며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일터를 박차고 나와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일터의 구조와 틀을 바꾸는 법을 만드는 정치인 혹은 시민운동가가 될 수도 있고 비록 근본적인 제도와 법을 바꿀 수는 없지만 틈새에서 대안적 일터를 스스로 만들어 갈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이런 길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구원받을 이의 특징 중 하나로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를 언급하고 있어요. ‘느헤미야’에서 이런 사람을 키워 내고 싶습니다. 외로운 광야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언덕이든,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영광임을 확신하고 그 길로 가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깊은 영성이거든요. ‘느헤미야’는 그런 영성을 길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신학의 양극화를 해소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으로 예상하지는 않나요

그럴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신학계나 교계의 주류가 되려는 의지나 욕망이 없습니다. 외로움을 각오하고 광야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며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데 초점이 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에 대해 크게 마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만의 특징을 구현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이들의 열정과 눈물 그리고 헌신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일으켜 주셔야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신학연구원의 실질적 운영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이 깊고 인격이 탁월한 실천적 지도자였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할 뿐 아니라 사회ㆍ경제적 개혁, 그리고 영적 갱신을 주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사장이며 신학자였던 에스라와 아름답게 동역을 하였던 느헤미야. 신학연구원 ‘느헤미야’의 노고와 기도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아름답게 변혁해 나갈 이들이 배출될 것을 기대한다. 

글 사진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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