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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복음과상황기사)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2. 15. 09: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개원, 원장 박득훈 목사를 만나다

   
▲ 신학연구원‘느헤미야’의 원장으로 내정된 박득훈 목사(언덕교회). ⓒ복음과상황 이종연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성서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권 활동가와 신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학연구원 느헤미야’가 그것.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개혁을 열망하며 뜻을 모아 온 이들은 지난 11월 중순 첫 모임을 갖고 느헤미야와 같은 진정한 개혁가를 양성하는 대안신학교의 장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신학을 기반으로 학제 간 연구를 통해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 목표다. 이곳에서는 목회자, 평신도라는 틀을 벗어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배울 수 있다. 복음주의권 신학 풍토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느헤미야’의 원장으로 내정된 박득훈 목사(언덕교회)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복음주의권 신학 교육 기관이 나오는 것이라고 봐도 되나요

예민한 질문이네요.(웃음) 요즘 ‘열린’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열린 복음주의’라고 하면 어떨까요. 복음주의의 전통과 기반을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끊임없이 진리에 대해 열린 추구를 하는 것이죠.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신학연구와 교육’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2000여 년 기독교 역사상 신학은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어요. 존경하는 루터나 칼뱅의 신학조차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거든요. 아무리 훌륭한 신학적 전통이라도 역사 발전과 함께 하나님의 성경적 계시의 이해가 깊어지기 때문에 수정될 여지가 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 복음주의’라는 것입니다.

‘열린 복음주의’와 성경은 어떤 관계인가요

복음주의의 핵심 슬로건 중 하나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의 자명성이 진지한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배제한 것이 아니었죠. 또한 어느 시대, 누가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했는가 하는 것은 열려 있는 질문이죠. 역사가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성경의 본뜻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신학은 발전되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열린 복음주의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고 새로운 사상이면 뭐든지 받아들이겠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어떤 해석 혹은 신학적 입장이 성경 본연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지 치열하게 탐구하면서 성경이 현재 복음주의 전통에 수정을 요구한다는 확신이 들면 얼마든지 수정할 용의가 있다는 점에서 이해해 주면 좋겠네요.

한국의 신학교가 말씀하신 부분을 지향하지 않았다고 보시나요

굳이 우리만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에 깊이 공감하는 신학자들과 기독운동가들이 ‘느헤미야’에 다양한 역할로 집결하게 되었다는 점에 그 독특성이 있다고 봅니다. 런던 바이블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전공분야가 서로 다르지만 신학교수들의 중심을 관통하는 일관적인 흐름이 있다는 것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회 정의에 대한 열망을 발견했을 때, 저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죠. 중요한 신학적 이슈와 관련해서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하거나 강조점이 다른 교수들에게 배울 때, 학생들은 과연 누가 옳은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가 일반 신학교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신학연구원을 만들게 된 배경부터 남다릅니다. 대안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신학연구원을 만들도록 자극한 사람이 기독운동가들이었어요. 이 점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출발점 자체가 신학자와 성도의 합작품 아닙니까. 아마 이것이 앞으로 우리 연구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봅니다. 신학자 중심주의, 사제 중심주의가 아니라 신학자․목회자․성도가 함께 연구원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는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비전과 사명이 새롭다고 할 수 있어요. 비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 사회 그리고 자연 등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나라를 구현해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 즉 목회자 중심의 교계를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함께 일하는 기독공동체로 전환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사명은 첫째,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교육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하여 성도를 위계적으로 차별하지 않고, 목회자 성도와 비목회자 성도가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함께 신학을 공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둘째,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입니다. 신학적 기반 위에서 학제 간 연구를 하려는 거죠. 신학과 일반 학문을 단순히 병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역동적으로 스며들게 하는 연구를 할 것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아야만 세상에 나가서 호소력 있는, 영향력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가령,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기독교적 언어와 일반적 언어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흑인인권운동에 대한 충분한 지지를 교회와 사회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거든요. 학제 간 연구란 바로 그런 실천적 인물 양성에 목적이 있음을 의미해요. 단순히 지적 엘리트를 길러 내려는 것이 아니에요. 일반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실현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을 키울 겁니다.

셋째로,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을 품고 그 비전과 가치에 따라 한국교회와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수 있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자도를 구현해나갈 수 있는 사람 말이죠.

하지만 강사진은 신학자 혹은 교수 아닌가요

현재로선 사실이지만 그렇게 우려는 하지 않아요. 언젠가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가 시민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자적 소양을 갖고 있는 운동가, 운동가적 소양을 갖고 있는 학자, 시민운동을 지지해 주는 후원자’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연구원 강사진은 말하자면 기독 운동가적 소양을 갖춘 신학자들입니다. 그분들은 학제 간 연구에 익숙한 분들이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학교를 만들어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 중엔 신학적 소양과 기독교적 영성을 잘 갖춘 기독 운동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학교 강의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도 강사진에 포함해서 공동으로 강의하고 연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거예요.

교회와 사회를 변혁시켜나가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 교육 목표라고 하셨는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교회와 사회에 깊이 침투해 있는 맘몬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맘몬에 친화적인 모든 것들을 혁파하는 데 그 일차적 목표가 있습니다. 덩치가 커져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맘몬의 가치와 전략이 교회와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덩치를 키우는 데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데 있어요.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가치대로 살아갈 때 덩치가 커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무능력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강압적으로 세상의 역사를 이끌지 않으십니다. 기다리고 상처를 받고 고통을 입으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규모를 확대하려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돼요. 오늘 신학교나 교회가 병든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덩치가 커져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맘몬의 논리에 속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따라 교회와 세상을 변혁해나가는 것은 우선 맘몬의 논리의 기만성과 위험성을 폭로하고 배격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나라를 펼쳐가는 진정한 힘은 ‘작은 밀알의 생명력’에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밀알로 땅에 떨어져 썩어 죽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역동적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맘몬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 세속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어떻게 변혁 가능하다고 보시는지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죠. 우선 세속 사회의 변혁자로 살아가려면 맘몬의 가치와 하나님나라 가치가 강력하게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견뎌 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 가면 그걸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요. 갈등 속에서 사는 게 힘들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없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충돌 속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참아 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경로를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형편과 은사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크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맘몬과 하나님이 일상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일터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일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혜롭게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맘몬의 질서와 타협하고 기다려야 하기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변질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며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일터를 박차고 나와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일터의 구조와 틀을 바꾸는 법을 만드는 정치인 혹은 시민운동가가 될 수도 있고 비록 근본적인 제도와 법을 바꿀 수는 없지만 틈새에서 대안적 일터를 스스로 만들어 갈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이런 길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구원받을 이의 특징 중 하나로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를 언급하고 있어요. ‘느헤미야’에서 이런 사람을 키워 내고 싶습니다. 외로운 광야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언덕이든,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영광임을 확신하고 그 길로 가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깊은 영성이거든요. ‘느헤미야’는 그런 영성을 길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신학의 양극화를 해소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으로 예상하지는 않나요

그럴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신학계나 교계의 주류가 되려는 의지나 욕망이 없습니다. 외로움을 각오하고 광야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며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데 초점이 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에 대해 크게 마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만의 특징을 구현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이들의 열정과 눈물 그리고 헌신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일으켜 주셔야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신학연구원의 실질적 운영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이 깊고 인격이 탁월한 실천적 지도자였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할 뿐 아니라 사회ㆍ경제적 개혁, 그리고 영적 갱신을 주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사장이며 신학자였던 에스라와 아름답게 동역을 하였던 느헤미야. 신학연구원 ‘느헤미야’의 노고와 기도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아름답게 변혁해 나갈 이들이 배출될 것을 기대한다. 

글 사진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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