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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8)성경번역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9. 18. 11:08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글 번역 성경들과 ‘토지’

마가복음 10:22은 ‘토지,’ ‘소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담고 있다. 이 단어가 ‘토지’나 ‘소유지’를 뜻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명하신 이유를 깨달으며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끄떼마’의 복수형)를 토지를 뜻하는 것으로 읽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끄떼마’가 기본적으로 토지를 뜻하는 단어라는 것은 간단한 헬라어 사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읽을 때에는 ‘끄떼마’가 토지를 뜻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성경번역자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을 뜻하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마가복음 10:22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후에 헬라어로 마가복음 10:22을 읽어도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의 뜻으로 이해하게 된다. 성경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지는 번역 성경들이 오히려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한글 번역성경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개정).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그러나 그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은 ‘재물’이나 ‘재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본문을 의역한다. “이 말씀을 듣자 그 사람은 무척 근심스런 얼굴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대단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글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마가복음10:21-22이 토지와 관련됨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로 번역한 한글 번역성경들 중에는 사도행전 5:1에서 동일한 단어(단수형, ‘끄떼마’)를 ‘땅’으로 번역한 성경들이 있다. 바로 공동번역 및 공동번역개정판,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이다.

그런데 아니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을 판 다음(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삽비라와 의논하고 을 팔아(현대인의 성경).

아나니아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삽비라도 자기들의 일부분을 팔았습니다(쉬운 성경).

이 번역성경들을 읽는 독자들은 아나니아가 판 ‘땅’이 마가복음 10:22의 ‘재물,’ ‘재산’과 동일한 단어의 번역임을 알 수 없기에 이러한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이 둘을 연결 지을 수 없다. 개역이나 개역개정판, 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을 읽는 독자들의 경우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이 번역본들은 사도행전 5:1의 ‘끄떼마’를 ‘소유’라고 번역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개정).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를 팔아서(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이 번역본들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되었기에 두 본문 뒤에 동일한 헬라어 ‘끄떼마’가 있음을 알기 어렵다. 물론 ‘소유’는 ‘재산,’ ‘재물’과 동의어이므로 두 본문을 서로 연결할 수 있지만 사도행전 5:1에서 ‘소유’가 토지를 가리키는 것을 파악하기는 쉬워도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도행전 5:1에서 ‘땅’대신 ‘소유’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해도 이것이 결국 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문맥 때문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땅을 판 금액에 관하여 언급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은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재산’으로 번역한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습니다.” 사도행전 5:1에서는 문맥상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곧 알 수 있게 되지만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가 언급되었음을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서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외국어 번역 성경들과 ‘토지’

외국어 번역 성경들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의 번역에 토지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선 영어번역본들을 살펴보면 킹 제임스 역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possession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NIV는 ‘wealth’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본들도 ‘Güter’(재물), ‘Vermögen’(부) 등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여, 토지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없게 한다. 불어 번역본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biens’(재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므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한 네덜란드어 번역본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 또한,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때 율법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마가복음 10:21의 말씀이 구약의 토지법을 배경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헬라어 본문으로 읽어도 그 속에 토지가 언급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이다. 번역 성경을 읽은 사람은 원어로 성경을 읽을 때 번역 성경에서 파악한 의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성경 번역은 헬라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성경의 의미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지만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역할도 한다. 모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은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이 소유나 재물을 뜻하는 단어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한 이유는 이 헬라어 단어가 토지를 뜻할 수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DRA(The Douay-Rheims American Edition, 1899)는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land’로 번역하였다. 독일어 성경들 중에서, EIN(Einheitsübersetzung, 1980)은 ‘Grundstück’(토지)을, LUT(Revidierte Lutherbibel, 1984)‘Acker’(농토)를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불어성경 중에는 BFC(1997)가 ‘terrain’(토지)을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네덜란드어성경 중에서 LEI(Leidse Vertaling, 1912/1994)‘akker’(농토)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들 번역본들은 동일한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마가복음 10:22에서는 재물을 뜻하는 말로 번역하였다. 그들이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킬 가능성을 알면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는 ‘끄떼마’를 ‘토지’로 번역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번역자들 역시 그들이 읽은 성경 번역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 번역과 기독교 세계관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구절은 마가복음 10:21-22과 그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9:21-22이다. 마태복음 19:22에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처럼 헬라어 ‘끄떼마따’가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의 경우에는 토지를 뜻하는 번역어를 사용한 번역본이 없을까?

개역과 개역개정판은 마태복음 19:22에서 ‘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판, 표준새번역, 쉬운 성경은 ‘재산’을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우리말 성경은 이곳에서도 “그는 굉장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의역한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possessions’를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ASV, DBY, DRA, ESV, GNV, KJV, NAB, NKJ, NLT, NRS, RSV, RWB, WEB, YLT), ‘property’를 번역어로 사용한 역본들도 있다(BBE, NAS, NAU). NIV와 NJB는 ‘wealth’를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성경들도 마태복음 19:22에서 ‘Güter’(재물)나 ‘Vermögen’(부)을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불어 성경번역본들은 ‘biens’(재물)을, 네덜란드어 성경번역본들은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번역어로 택하였다. 이처럼 마태복음 19:22에서도 성경 번역자들은 ‘끄떼마따’를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번역 성경들의 상황이 이러하므로, 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빠져버린 번역 성경을 읽는 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와 관련된 경제 윤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구약의 토지법을 존중하는 입장의 교회들은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레위기 25:23 말씀과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신명기 27:17 말씀에 입각하여 대토지소유의 비윤리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들의 규범성을 무시하는 교회들은 토지를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이 시대의 정신에 따라 생각하며 대토지소유가 정당한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성경 번역은 그 번역을 읽는 기독교의 모습의 밑그림을 그린다. 토지를 재물과 혼동한 번역 성경을 가진 기독교는 지주와 자본가를 혼동하는 기독교가 된다. 그리하여 자본가만이 아니라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한 소유권자로 간주하는 실수를 범하거나, 대지주만이 아니라 자본가까지 비윤리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자본가와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면, 대지주와 자본가를 함께 묶어서 비윤리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사회주의이다. 성경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도록 무의식적으로 강요받아왔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입장을 택하였고, 자본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을 택하곤 하였다.

생산수단을 모두 국유화하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와 자본을 모두 국가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지만, 성경(구약)은 토지와 자본 등의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도록 한다. 자본주의자들은 개인이 토지마저도 무한히 많이 소유해도 된다고 여기지만 성경(신명기 27:17)은 토지를 제한적으로 일정 분량만 소유하도록 명한다. 성경이 그려주는 사회의 모습은 분명히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성경의 토지법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길과도 다르다. 중국에서는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국민에게 불평등하게 임대해 주지만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소유하도록 한다. 헨리조지의 토지가치세의 경우에도 이를 실행하면 모든 사유지에 지대에 해당하는 세를 부과하여 결국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나누어 소유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소유한 것은 임대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므로 지대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게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헨리조지가 제안한 토지가치세를 적용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성경의 토지법을 적용하면 모든 국민이 평등한 토지권을 누리게 되고,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국토를 소유하게 되며, 토지를 많이 가진 사람들은 권리이상으로 가진 부분에 대한 세를 국가에 내게 되고 국가는 이를 사회 복지를 위해 사용하게 된다.

성경의 한 단어의 번역이 부정확할 때 성경으로 세상을 보는 눈은 크게 왜곡될 수 있다. 물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부분적인 부정확함이 교정되기도 하지만, 부정확한 부분들이 모여서 부정확한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교회가 세상의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인식하고 바른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확한 성경 번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세계관을 성경적으로 교정하려면 기독교인들이 읽는 번역 성경을 바르게 교정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성경을 번역할 때나 번역된 성경을 교정할 때, 이미 번역된 성경들이 미치는 영향을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우리는 번역 성경을 전보다 좀더 정확하게 개정할 수 있다.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고, 한 걸음에 천리 길을 갈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단번에 완벽한 번역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여 이러한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오히려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원망하는 게으른 종(마태복음 25:24-25)처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세상에서 살 수 없지만 점점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좀더 나은 번역 성경을 만들 수 있기에 우리는 끝없는 개정작업을 통해 좀더 원어와 원문을 잘 반영하는 번역성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 번역 성경을 좀더 정확하게 개정하는 작업은 기독교 세계관을 교정하는 작업이며, 또한 교회를 회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초 작업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성경은 4대강 사업을 뭐라 말할까?

 22일 오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자연 사랑 기도회’ 이름으로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모임을 가졌고, 이만의 환경부 장관이 4대강 사업에 대해 특강을 하였습니다. 환경부 장관이 교회 장로님이시니 기독교인들 앞에 나선 것이겠지요. 특히 이날 한나라당 이경재의원은 ‘4대강정비 사업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녹색사업이며,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축사를 하였습니다. 

 4대강정비 사업이 ‘살아있는 강을 죽이는 환경파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장로라는 이유로 많은 한국 교회가 노골적으로 지지하며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개신교 목사라는 사실이 참으로 부끄럽고, 국민 앞에 송구할 뿐입니다.

 4대강사업을 지지하는 많은 목사들처럼 과연 하나님도 4대강정비가 창조 원리 회복이라 지지하실까요?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해 성경이 뭐라 말하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4대강의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이기에 성경적 용어들이 사용되고 기사 내용이 길어짐을  이해바랍니다. )

  성경은 강이 흘러야한다고 말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강을 ‘강 살리기’ 라고 주장합니다. 4대강 사업이 정말 강 살리기라면 현재 4대강 물길을 막고 있는 '하구둑'을 열어야합니다. 우리나라 강은 강줄기마다 물을 확보한다며 하구둑을 막아 강과 바다가 함께 죽어가고 있습니다. 

             

낙동강을 가로막은 하구둑입니다.  

좌측의 낙동강과 우측의 바다를 가로막은 하구둑으로 인해 강물은 더이상 흐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정부가 밝힌 4대강정비 사업 계획을 보니, 낙동강 하구둑 곁에 또 하나의 하구둑을 건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지금 있는 하구둑을 열어야 강과 바다가 살아나는데, 또 하나의 둑을 쌓는다니 과연 그게 강 살리기일까요?   

 언론에 보도된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 중 낙동강 하구둑 추가 조감도입니다.

좌측 녹색 화살표가 지금 있는 하구둑이고, 오른쪽 빨간 하구둑이 새로 건설될 하구둑입니다.

 성경에 강물을 가로막은 하구둑을 잘못이라 이야기하고 있다면 믿어지시나요?
구약성경 에스겔서 47장 9절‘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야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성경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야 바닷물도 살아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학적인 사실입니다. 강의 유기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야 바다 물고기들도 건강해지고 강도 맑음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 하류에 둑을 쌓아 강물의 흐름을 차단하면, 강의 영양분이 바다에 흘러들지 못해 바다도 연약해지고, 바다로 흘러가지 못한 유기물질로 인해 강도 썩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 문제는 바로 물길이 막힌 것에 있습니다.

 

하구둑은 반성경적 환경파괴사업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연어는 바다에서 살다가 알을 낳으러 강으로 거슬러 올라옵니다. 연어와는 반대로 뱀장어는 강에 살다가 알을 낳을 때는 바다로 내려갑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역은 다양한 수중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그런데 하구둑을 쌓아 강의 흐름을 막으면 이런 생태환경이 파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강물의 흐름을 막는 것은 반성경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의 흐름을 막은 하구둑은 반생명적, 반성경적입니다.

 강 하류에 둑을 쌓아 강물의 흐름을 차단 한 결과, 영양 부족염분 과다로 바닷물이 죽어가는 현상을 전 세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전체 어획량 중 80%가 대륙붕에서 잡힙니다. 많은 물고기들은 강어귀에서 흘러나온 영양 물질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강 하구의 물길을 막으면, 해양어업 생산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일강 하구는 1만8000톤에 이르던 정어리 어획량이 강 물길을 막은 후, 1000톤 이하로 떨어졌고, 새우 어획량도 2/3로 감소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플로리다 주 남부에서는 물길 차단 후 어획량이 42% 수준으로 떨어졌고, 샌프란시코 만에서도 청어와 농어의 산란 장소가 4/5가 사라졌습니다. 스네이크 강의 코호연어는 멸종되었습니다. 강줄기가 막힌 후 어업이 아예 폐업 상태에 이르는 곳도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낙동강 하류도 하구둑을 막은 후 많은 환경영향이 발생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강을 살리는 첫 번째 길은 강물의 흐름을 차단한 하구둑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나 4대강정비 사업은 반대로 하구둑을 더 만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강 살리기’와는 거꾸로 가는 4대강사업이 분명합니다.

 

4대강 사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합니다.

 이만의 환경부 장관은 22일 특강에서 4대강 사업은 ‘강 밑바닥을 파고, 제방을 높이고, 하폭을 늘려 물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4대강 정비 사업 계획에 낙동강에 8개의 보를 세운다고 밝혔습니다. 이틀 전엔 낙동강에 건설 예정인 2개의 보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10개의 보가 세워지는 낙동강! 과연 수중 생태계가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낙동강에 수량을 확보하기 위해 10개의 보가 세워지면, 약 30km마다 보가 설치되는 꼴입니다. 이렇게 되면 낙동강은 강이 아니라 ‘낙동 저수지’가 되는 것이지요.

 4대강정비 사업의 가장 큰 목적은 수량을 확보하는 것이라는데, 강의 생태계는 수량에 있지 않습니다. 강의 생명은 여울과 소가 반복되며 굽이굽이 휘어 도는 강줄기의 다양한 환경에 있습니다. 그래야만 강 생태계의 다양성과 건강성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를 만들어 강을 저수지로 만들면 여울을 터전으로 삼는 대한민국 토종 어류들은 다 사라지고, 붕어와 잉어 등이 호소형 어류만 남게 됩니다. 특히 강이 저수지화 되면 호소성 외래종인 '불루길'과 '베스'가 번성하게 되어 토종 물고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낚시꾼들이 잡아 강가에 버려 놓은 포악한 외래어종인 '베스'의 모습입니다. 

강의 여울이 사라지고 저수지화되면 호소형 외래 어류인 불루길과 베스가 번성하게됩니다. 

토종 어류가 사라지고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강의 생명은 여울에 있습니다.

 여울은 강의 생명입니다.

여울은 강물에 산소를 공급하는 하나님이 만드신 천연정수기입니다.

그런데 4대강 사업은 이런 천연 정수기를 파괴하는 반성경적 사업입니다. 여울은 산소가 많고 물이 맑기 때문에 희귀물고기들은 여울에 살아갑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에만 선물로 주신 희귀어류들의 보금자리가 바로 이 여울입니다.   

 여울은 강에 산소를 공급하는 강의 허파요, 천연정수기입니다.

'쉬리'라는 영화로 인해 20세기말의 출세어가 된 '쉬리' 입니다. 여울에 살아갑니다.

상어의 모습을 닯았다하여 '돌상어'라 부르는 녀석입니다. 여울에 살아갑니다.  

여울 근처 돌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새코미꾸리'입니다. 이 녀석은 자갈이 은신처입니다.

 여울은 모든 물고기들이 알을 낳는 산란장입니다. 천연기념물 어름치는 여울이 시작되는 바로 윗 지점에 알을 낳고 돌로 산란탑을 쌓습니다. 여울 주변 잔잔한 자갈 밑에는 꺽지와 쉬리, 돌고기 등의 물고기들이 알을 낳습니다. 팔둑만한 누치와 쏘가리도 여울 근처에 알을 낳습니다. 수심이 깊은 곳에 살아가는 잉어와 붕어도 물이 얕은 곳의 수초에 알을 낳습니다.  

 

천연기념물 제259호인 '어름치'가 입으로 자갈을 물어와 쌓은 산랍탑입니다.

붉은 색 동그라미 안이 어름치가 돌을 물어다 쌓은 산란탑입니다. 원밖에 돌과 색깔이 다릅니다. 

어름치가 산란탑을 쌓는 곳은 무릅 높이 정도의 여울입니다.

물 깊이가 제 무릅 아래임을 보여줍니다.

어름치는 여울이 없으면 산란하지 못합니다.  

 여울 근처 잔잔한 돌 밑에 붙여놓은 꺽지 알입니다.

꺽지는 은신처로 사용할 자갈이 없으면 알을 놓지 못합니다.

 알 주변에서 알을 지키고 있는 꺽지 입니다. 

 

강바닥을 파고 제방을 쌓아 수심을 깊게 하는 4대강 사업은 물고기들의 터전을 파괴하는 반생명적 사업입니다. 모래와 자갈을 준설하는 4대강 사업은 물고기뿐만 아니라 강을 터전으로 삼는 새들과 기타 여러 생명들의 터전을 파괴합니다.
 
꼬마물떼새는 물가 얕은 모래.자갈 밭에 둥지를 만듭니다. 꼬마물떼새의 알과 알에서 깨어난 새끼의 깃털이 모래자갈을 닮아 저절로 위장되기 때문에 강가를 터전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꼬마물떼새는 모래와 자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강가 자갈 위에 둥지를 만들고 알을 낳은 꼬마물떼새 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꼬마물떼새 새끼가 모래밭에 숨어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모래와 새끼의 깃털이 똑같아 적의 위험으로 부터 위장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꼬마물데새는 모래.자갈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솥뚜껑을 닮은 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 물 속에 살아가는 자라는 강가 양지바른 모래 둔덕에 알을 낳습니다. 모래 속에서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부화된 새끼 자라들은 강물 속으로 찾아옵니다. 강가에 모래둔덕이 없으면 자라는 산란을 할 수 없습니다.  

 모래밭 보금자리에서 깨어난 새끼 자라가 강물을 찾아가다 풀밭에 걸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준설을 하는 4대강 사업이 진행되면 자라와 꼬마물떼새와 같이 강가에 모래와 자갈밭을 터전으로 삼는 생명들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여울과 소가 반복되고, 모래와 자갈이 어울린 강은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생명의 보금자리입니다. 이 정부와 기독교인들은 4대강 사업이 창조세계 회복을 말하면서 생명의 여울을 파괴하고, 모래와 자갈을 다 파헤치려하고 있습니다.   

'철새'들의 경우 4대강사업과 어떤 관계일까요? 철새들은 잠수하는 잠수형오리와 잠수하지 못하고 수초와 갯지렁이들을 먹는 수면성오리로 구분됩니다.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철새들의 94%가 물이 얕은 곳을 좋아하는 수면성 오리입니다. 4대강에 준설하고 보를 만들어 수심 깊은 저수지가 되면 철새들에게 치명타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 멸종위기종인 노랑부리저어새가 얕은 물가에서 사냥하고 있습니다.

노랑부리저어새는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4대강사업은 노랑부리저어새를 쫓아내는 공사입니다.

 환경부 장관님, 세계적 멸종위기종인 노랑부리저어새와 두루미가 수영하는 것 보셨나요? 

환경부 장관님, 이틀전 특강에서 '모르면서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무지의 폭력이 너무 심하다' 라고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장관님, 4대강을 반대하는 것이 무지의 폭력이라고요? 4대강사업이 뭇 생명에 가할 폭력이 얼마나 심각할지 생각은 한번 해보셨나요?  4대강 사업은 폭력을 넘어 생명파괴입니다.

 환경부 장관님, 4대강 사업이 어떻게 하나님 창조 질서 회복에 도움이 되는지 제 기사에 대한 반론 기사를 써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장관님이 바쁘시면 환경이 전공인 그 많은 환경부 직원을 시켜서 쓴 기사라도 대 환영입니다. 4대강사업이 왜 창조질서 회복인지 교회 장로님인 환경부 장관님의 기사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로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이율배반적인 기독교인들

 성경은 창세기 1장1절‘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과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경은 맨 처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또 구약 창세기 6장엔 우리가 잘 아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이 땅의 생명들을 '보존'하고 '유전'케 하라 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홍수가 끝난 후 하나님은 노아에게 새 언약을 주시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생명과의 언약임을 6번이나 반복 강조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사명은 이 땅의 생명들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잘 보존하고 유전케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고 계심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강을 죽이는 것이 창조세계를 회복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영광의 훼손은 죄악입니다.   

대교부 바실리우스는 아름다운 자연을 일컬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합창이요, 즐겁게 이어지는 춤”이라 하였습니다. 구약 시편104편31절“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찌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할찌로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생명들이 잘 보존되어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을 맑게 회복함으로써 생명을 끊임없이 태어나게 하는 '여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영원히 지속되게 하는 거룩한 성소요, 오늘도 생명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 창조 사역의 동역자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여울을 파괴하는 4대강정비 사업'하나님 영광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강에 손을 대는 것은 이 땅에 무수한 생명을 파괴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영광의 단절을 일컬어 곧 ‘죄’라 말합니다.  

신약성경 골로새서 3장 5절“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4대강 정비사업은 창조주 하나님이 가장 중요시하는 '생명의 관점'이 아니라 '경제', 곧 '돈'이라는 '탐심의 산물'입니다. 이는 ‘생명의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잘못, 곧 '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사실 4대강 사업은 경제의 이름으로 행해지면서도 경제성이 없음을 다 잘 아는 사실이지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경제'를 살리는 '돈의 신'이 아니라, 생명을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생명의 신'입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광야의 미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돼지 떼를 희생시키셨습니다. 경제와 돈보다 생명을 중요시하신 것이지요.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그 직분이 목사라 할지라도 생명보다 경제를 우선시하는 자는 탐심의 마귀에 사로잡힌 자에 불과합니다. 오래전 중세 시대 교회가 어둠에 있었듯, 오늘 한국 개신교는 돈과 성공이라는 거짓 신을 섬기는 어둠에 있습니다. 요즘 기독교가 개독교라 욕을 먹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개독교라 부르는 세상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불리게끔 행동하는 기독교인이 문제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세상을 밝히는 빛과 소금이 되라 말씀하였건만, 오히려 개독교라 손가락질 당하는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저도 개독교인이 아닌지 부끄러운 제 삶과 신앙을 돌아봅니다.  

생명파괴 4대강 사업을 지지하는 기독교인은 회개해야합니다. 

지난 해 12월16일, 뉴라이트 대표인 김00 목사는 방송에 출연해 ‘내년엔 대운하 첫 삽을 떠야한다’고 거침없이 주장 했습니다. 또 강남 사랑의 교회 오00 목사는 ‘대운하가 이뤄지면 강원도 골짜기 까지 소통이 된다’며 대운하를 찬성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였습니다.  

이틀 전 6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4대강 사업을 위해 환경부 장관과 목사들과 기독교인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저들이 간절히 기도한 신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다 창조주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23장 13절~39절에 예수님은 스스로 열심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 있으라” 라는 저주의 독설을 무려 6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심지어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저주까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으라고 저주를 퍼부은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제사장들에 의해 하나님 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의 탐심과 욕망이 신앙의 탈을 쓴 것에 불과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성경에 창조주 하나님은 생명의 보존을 원하십니다. 생명의 파괴를 가져오는 4대강 정비 사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입니다. 그동안 대운하와 4대강사업을 지지해온 목사와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참 신앙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동안의 무지와 잘못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탐욕의 우상을 섬기는 신앙인에 불과함을 증명할 뿐입니다.  

생명 파괴의 4대강 정비 사업, 당장 중지해야합니다.

 성경은 생명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다양성’ 이 잘 보존되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강''죽음의 저수지' 로 만드는 4대강 정비사업은 생명파괴의 죄악입니다. 강의 생명을 파괴하는 4대강 정비 사업, 당장 중지해야합니다.

 2주전 강남 대치동의 한 장로교회에서 이 내용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설교를 끝내고 내려오자 한 부목사가 내게 다가와 잡혀갈려고 강남에서 그런 설교를 하냐고 놀람과 의아함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얼마전에도 모 교단 대표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서도 이 같은 내용의 설교를 당당히 했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작은 생명 하나도 사랑하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따라가겠노라'라며 목사된 제가 반 생명적 4대강 사업에 침묵할 수없는 이유입니다. 앞으로 진행될 4대강 사업으로 포크레인의 바퀴아래 무참히 죽어갈 뭇 생명들을 생각하니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네티즌 여러분, 제가 기독교인라 죄송합니다. 목사라 더더욱 죄송하며 사죄드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을 보존하고 유전하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티즌 여러분, 기독교와 개독교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주시길 간곡히 간청합니다.  

 모래와 자갈을 파내는 4대강 정비사업은 이 작은 생명들의 죽음을 부릅니다.

국민 여러분, 죽음 앞에 선 이 작은 생명의 외침이 들리시나요?

생명 파괴 4대강 정비 사업!

이제 죽음의 굿판을 거두어야 할 때입니다.  

(출처) http://blog.daum.net/cbs5012/12337456 









        최병성목사 
          환경운동가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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