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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 4)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6. 24. 10: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부유함 자체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다(마가복음 10:19). 즉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답하신다. 질문한 사람은 이것을 다 지켰다고 대답한다(마가복음 10:20). 이에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신다(21절).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

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가?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부유함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잘 지킨 자에게 주시는 복일 수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명기 28:2-6).

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부유한 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선행의 결과일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의 복으로서의 부는 자녀, 토지의 소산, 가축 등의 복이다. 따라서 부유함 자체는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증거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킨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부의 소유 자체를 문제 삼았다고 볼 수 없다.

토지 과다 소유가 문제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그에게 단지 소유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22절에 등장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서 ‘재물’이라고 번역된 말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끄떼마’는 재물 중에서 특별히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잠언 23:10은 지계표를 옮기지 말고 고아들의 밭(‘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끄떼마)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에 나오는 ‘사데’(땅)의 번역어이다. 70인역 잠언 31:16에도 ‘끄떼마’가 사용되는데, 여기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케렘’(포도원)의 번역어이다. 호세아 2:17에서도 ‘끄떼마’는 히브리어 ‘케렘’(포도원)의 번역어이다. 사도행전 5:1에서도 ‘끄떼마’는 땅을 가리킨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끄떼마)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사도행전 5:1-4).

‘끄떼마’라는 헬라어는 ‘토지’로 번역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번역은 문맥상 정당하기도 하다. 21절은 율법 지킴에 있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는데, 토지가 많은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토지를 일정한 분량, 즉 기업으로 물려받은 분량이상으로 소유하지 못하게 규정한다. 레위기 25:23은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다만 임대만 허용함으로써 토지소유의 집중을 막고자 한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23). 임대는 희년까지만 할 수 있었고 희년이 되면 원소유주가 다시 토지의 소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위기 25:28). 하나님께서는 토지 소유의 경계를 옮기는 것을 금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으로 소유지를 넓히는 것을 금하셨다. “그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토지의 소산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복일 수 있지만(신명기 28:11),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어기고 있는 상태이다. 스스로 영구매매를 하거나 지계표를 옮기지 않았고 조상들이 그렇게 한 것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 책임을 면하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량이상의 토지, 즉 본래 이웃의 것이었던 토지를 처분해야 하고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들이 가난해진 중요한 원인이 그들의 삶의 터전인 토지를 빼앗긴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토지와 함께 자본이 중요한 경제 변수인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구약성경의 토지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토지법은 토지를 잃어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하여 결국 노예가 되는 것을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법제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변함이 없고 농경 사회에서나 공업 사회에서나 정보 사회에서나 변함없다. 또한 오늘날 토지(특히 도시 속의 토지)는 불로소득의 중요한 원인이며 토지 투기는 이웃에게 많은 피해를 준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과 예수의 가르침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율법을 지킴에 있어 부족한 것은 바로 토지의 과다 보유였다. 그러므로 그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처분해야하는 것은 토지였다. 따라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은 곧 “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예수께서 팔라고 명하신 것은 바로 토지였다.

개역성경에는 ‘네 있는 것을 다 팔아’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 번역에 해당하는 본문은 그저 ‘네 가진 것을 팔아’로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호사’는 “모든 것” 등으로 번역되더라도 예외 없는 모든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마가복음 3:28에서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에서 ‘모든’은 헬라어 ‘호사’의 번역어인데, 이것은 예외 없는 ‘모든’을 뜻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3:29은 곧 바로 예외를 언급한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기업으로 받은 토지는 구약 성경에 의하면 팔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팔아야 하는 재물로부터 예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까지 팔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라고 명하시면서 율법을 어기고 토지를 전부 팔라고 명령하셨을 리 없다. 팔아야 하는 것은 고유한 토지 경계표를 넘어서 빼앗은 이웃의 토지이다. 이것은 율법이 허용하지 않는 불법거래를 통해서 획득한 토지이거나 임대한 토지를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고 계속 점유한 토지이다. 예수께서는 이것들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계표를 옮겨가며 남의 토지를 점령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신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미가 2:2-4).

토지를 넓히는 자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재앙은 그들이 땅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남의 땅을 빼앗았으니 이제 남에게 땅을 빼앗기는 것이다. 동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빼앗아 넓힌 이스라엘의 대토지소유주들의 땅은 이 말씀대로 빼앗겼다. 그들의 땅은 결국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로마에게 빼앗겼다. 나라를 잃고 땅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빼앗긴 땅에는 자유도 풍요도 없이 슬픈 노래만 남을 뿐이다. 빼앗긴 땅에는 봄이 올지라도 그것은 남의 봄이다. 빼앗긴 땅에는 가을이 올지라도 그것은 빼앗긴 가을이다. 정복자들에게 토지의 소산을 빼앗기는 가을이다. 토지를 빼앗기어 토지의 소산도 빼앗기고 그 땅에서 흘린 땀방울까지 빼앗기는 가을이다.

제자의 조건

예수께서는 동족의 토지를 빼앗아 지계표를 옮기고 땅을 넓힌 사람에게도 사랑을 표현하셨다. 단지 그가 다른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초청하시기까지 하셨다. 그에게 기회를 주신다. 그 토지들을 정리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가르침은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가 근심하며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본래 더 철저하다. 그것은 불법 소유지의 포기 정도가 아니라 목숨의 포기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자기를 포기하는 것은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죽으러가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매달려 처형당할 십자가를 가리킨다. 또한 십자가는 영광스런 죽음이 아니라 수치스런 죽음의 형틀이었다. 그것은 로마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죄수들이 로마 권력에 의해 멸시당하는 고통과 수치의 사형 도구였다.

예수를 따르는 조건은 생존의 포기이다. 즉 죽을 각오이다. 그것도 죄수로 죽을 각오이다. 보통 죄수도 아니고 반로마 정치범으로 죽을 각오이다. 반로마 무장투쟁을 한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오해 받고 죽을 각오이다. 지계표를 옮기며 불법적으로 확장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명령에 근심하며 떠나는 자가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겠는가?

예수를 따르는 조건, 즉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준행되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사도행전 2:45). 여기서 ‘재산’이라는 단어는 토지를 가리키는 헬라어 ‘끄떼마’의 번역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행위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른 실천이었다. 사도행전 4:34-35은 좀더 명확하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토지를 모두 처분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므로 그들이 판 것은 지계표를 넘어 확장한 토지였을 것이다. 바나바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 토지를 처분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 4:36-37). 구약에 의하면 레위인은 토지를 가질 수 없었고 다만 집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인 바나바는 구약에 따라 토지를 처분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는 그 자체로 오늘날의 교회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유효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모델이 아니라고 하며 거부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조건은 12명의 사도들을 위한 조건이 아니었고, 모든 제자를 위한 조건이었다. 그것은 교회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기준이 강조되는 교회는 없어졌다. 그와 함께 기독교의 위대함도 사라지고 말았다. 위대함이 사라진 기독교를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기독교의 위대함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예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조건을 회복하면 위대한 기독교는 회복될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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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2)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넘어서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5. 21. 12:2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성서와 사회

예수를 믿는 우리의 신앙이 어찌하여 삶 속에서 힘을 잃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분리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의 분리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신앙과 삶이 종종 분리되어 왔다. 그리하여 성서와 사회도 분리되어 왔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신앙생활이 사회 속에서의 삶과 무관하였다. 성경을 연구하며 성경에서 깨달은 만큼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사회 정의를 세우는 실천에까지 쉽게 나아갈 수 없었다. 성경에서 사회 정의 운동을 위한 토대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종 발생했다. 그들의 사회 참여는 성경이 명하는 규범에 따르기보다는 시대가 요청하는 필요에 따라 일어나곤 했다. 그리하여 성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나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사회와 관계없는 책으로 여겨지곤 했다.

성서가 사회와 분리되면, 성서는 그저 종교적인 책으로 남게 된다. 성서가 종교 영역을 다루는 책으로 제한되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고백도 예수의 왕 되심에 대한 신앙 고백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성서가 사회 문제에 대한 지침을 주는 책이 되지 않는 한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은 그저 말뿐이게 된다.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이 참으로 진실되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메시지를 사회에도 적용해야 한다.

그리스인들의 삶 속에서 왜 성서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었을까? 왜, 정의감이 충만한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서 없이 행동해야 했을까? 왜, 성경을 사랑하는 신실한 기독인들이 성경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비전을 얻지 못하였을까?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안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기는 경우에는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이를 사회 문제에 적용하지 못한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거룩한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을 개인의 종교적 삶을 위한 책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위대한 성경을 이렇게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약 성경과 기독교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교회가 사회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이다. 믿음과 행함이 연결되어도 성서와 사회가 분리된다면 행함은 교회 속에서의 종교적 행위로 제한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힘을 잃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하려면 우선 그러한 분리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의 원인은 성서 안에서 구약을 삶의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시작한다. 한국 교회들은 구약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며 구약 성경의 형식적 권위를 존중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구약 성경의 형식적인 권위는 인정하면서 실제적 권위는 부정하는 셈이다. 구약 성경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처럼 물러나게 된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되면 왜 성서와 사회가 서로 분리되는가? 구약 성경에 사회와 관련된 법들이 많기 때문이고 이러한 법들과 관련된 선지자들의 선포가 많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될 경우에는 이러한 법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에 적용되지 못하게 된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를 위한 원리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잘 알아도 그러한 내용들이 폐지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구약 성경은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이 사회와 분리된 상태에서 신약 성경만을 사회와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 가진 사회적 차원을 전제하고 이것을 기초로 영적인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고 신약 성경을 읽으면 사회적이면서 영적인 신약 성경은 단지 개인적이면서 영적인 것으로 오해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구약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삶의 기준이라고 고백하지만, 동시에 구약 성경의 규범적인 효력은 폐지되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구약 성경 39권의 삶의 기준으로서의 효력을 믿지 않고 있다. 신구약성경 66권 전체가 삶의 기준이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동시에 신약시대에는 구약의 법들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이러한 모순이 위대한 구약 성경의 빛이 사회 속에 비치는 것을 가리고 말았고, 구약 성경을 맛 잃은 소금처럼 만들고 말았다.

구약 성경의 율법 조항이 폐지되어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적용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교회의 삶 속에 제멋대로 적용하는 것은 또 하나의 모순이다. 교회 생활에 구약 성경을 적용할 때에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며 적용한다. 그리하여 구약 성경은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나 헌금을 강조할 때, 목사의 권위를 강조할 때 이용된다. 구약의 제사는 헌금으로, 제사장은 목사로, 성전은 예배당으로 연속되는 것처럼 적용한다. 사회를 향한 구약 성경의 메시지는 무시하면서 교회를 위해서는 마음껏 이용한다. 이것은 성경을 믿는 태도가 아니라 이용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태도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성전 제사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예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므로 구약 성경의 제사법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헌금을 만들어 내며 이를 설득하기 위하여 구약의 다양한 제사들을 언급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폐지된 제사법들을 적용하는 한편 폐지되지 않은 계명들은 율법 폐지를 외치며 지키지 않는다. 십계명은 신약 시대에 계속 지켜져야 한다는 데에도 대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일요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전통마저도 점점 사라지면서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이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십계명을 무시하면서 제사법은 적용하려고 하는 모순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엄연히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다른 율법 조항들이 존중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예배당 건축이나 헌금과 관련하여 이용할 수 있는 율법들은 열심히 강조되고 적용된다. 한국 교회에선 십일조법도 열심히 지켜지고 있다.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십일조법이 지켜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안식일법은 헌금과 관련되지 않지만 십일조법은 헌금과 관련되기 때문은 아닌가?

물론 필자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율법 폐지론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십일조만은 예외라고 하며 열심히 지키는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폐지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십일조를 폐지하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니라”(마태복음 23:23).

십일조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바리새파 비판은 더군다나 폐지되지 않았다. 십일조를 드리지만 더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비판되어야 마땅하다. 율법에 담긴 공의를 내어버린 반율법주의는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렸다. 어찌하여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리면서 덜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담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내어버리고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아닌가?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신 율법의 효력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인정하신 율법은 신약 시대에도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더 철저하게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신약 시대에도 지켜져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과 제사장,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십일조법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이 사라진 현대에도 지켜져야 한다면,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지켜져야 마땅하다.

예수와 율법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셨는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율법을 버리고 폐하는 자들을 비판하신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부여잡고 있다”(마가복음 7:8). “너희들은 너희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부수고 있구나!”(마가복음 7:9). “너희들은 너희들이 전수받은 너희의 전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마가복음 7:1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신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율법을 잘못 적용하여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전통을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5:17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으셨고 완성하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9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키도록 가르칠 것을 권장한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구약에 명령된 율법을 신약 시대에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며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는 율법의 일부로서 토지법이 담겨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레위기 25: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토지는 단지 임대될 수 있을 뿐 매매될 수 없었다. 이것은 율법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19을 토지법과 관련시켜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토지법을 폐지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또한 토지법을 지키며 이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토지법을 신약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토지법을 폐지하셨다는 증거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한 증거가 없는 한 우리는 구약의 율법들을 지키려는 시도와 노력을 존중해야 한다. 폐지된 흔적도 없고 지키라고 명해진 증거도 없는 율법 조항들은 열심히 지켜지는 것이 안전하다. 적어도 그러한 율법 조항들을 열심히 지키려는 사람들을 신율주의자라고 부르며 정죄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켜야 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낭패를 당하기보다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을 지키는 불편을 겪는 것이 더 안전하다.

율법 조항들 중에서 예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율법들은 신약 시대에도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 예수께서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이 율법의 일부라는 이유로 거부된다면 이는 예수를 믿지 않는 태도이다. 율법폐지론이라는 신학적 입장이 중요한가, 예수의 가르침이 중요한가? 율법폐지론은 신학자들의 가설이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메시아의 명령이다. 인간의 가설을 따를 것인가,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인간의 신학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이 폐지된 흔적이 없다면 그것을 지키려는 운동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폐지론에 은연중에 빠져 있다. 토지법이 폐지된 증거가 없다는 소극적인 논리로 그들이 토지법을 존중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 율법폐지론에 빠진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예수께서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만일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 과연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는가? 예수께서 토지법에 관하여 어떠한 태도를 보이셨는지 알려주는 본문이 복음서에서 발견된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17-31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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