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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 3) 구원과 율법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6. 5. 09:3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영생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토지 문제에 관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살피기 위하여 우선 영생에 관하여 다루어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토지 문제는 영생에 관한 관심과 관련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장에서 22절과 30절은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이것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다.

토지와 관련된 경제 윤리적 문제는 마가복음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의 일부가 아니라 영생과 관련된 신앙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토지 문제는 교회의 사회 참여 문제나 기독교 경제학의 맥락에서 다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제자도의 문제와, 영생을 얻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진다.

마가복음 10:17-31은 영생에 관한 한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생을 얻는다’는 표현은 원어를 직역하면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다”고 번역된다. ‘상속받는다’는 용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후(민수기 26:55) 각 가족이 상속받은 것은 토지였다. 토지는 각 가족에 속하여 상속되었다. 그것을 매매하여 소유권을 이전할 수 없었다(레위기 25:23). 이러한 ‘상속’ 개념을 배경으로 ‘영생을 상속받는다’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소유로 확실하게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영생’이란 무엇을 가리킬까?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이 ‘영생’이란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용례를 살펴야 한다. 마가복음 9:45에는 ‘영생’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여기서 ‘영생’은 ‘지옥’의 반대말로 쓰였는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동의어로 등장한다.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9:45).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9:47).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마가복음 10:23에도 나온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상속받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표현과 같은 뜻을 가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마가복음 10:25-26은 이를 명확히 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이를 구원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구원 얻는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영생을 상속받는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들이다. 그렇다면, 영생을 상속 받는 길에 관한 질문은 곧 구원을 얻는 길에 관한 질문이다. 영생에 관하여 좀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다니엘 12:2을 읽어보아야 한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여기서 ‘영생’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받을 수 있는 상태이다. 즉, 영생이란 부활 후에 얻을 수 있는 복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단지 현세에서 누리는 복된 상태 이상의 종말론적 구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러한 미래적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구원의 길

종말론적인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관한 질문에 예수께서는 무어라고 답하시는가? 예수께서는 “네가 계명을 안다”고 답하신다. 이것은 문맥상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질문한 사람은 그렇게 알아듣고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마태복음 19:17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명확하게 진술한다. 이 말씀에 예수의 구원론이 담겨 있다.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

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결론은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야고보서 2:26은 이것을 명확히 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4은 행함이 없는 믿음, 즉 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함을 수사의문문의 형태로 주장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런데 행함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함, 즉 계명을 지키는 행함이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믿음을 행함과 무관한 지식적 믿음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믿음에 관하여 야고보서 2:19은 말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임을 믿는 믿음, 예수는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믿음은 귀신들도 가진 지식적 믿음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순종적 믿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다. 믿음 없이 행위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행위 없는 죽은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도 없다.

어떠한 행함인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그렇지만 행함이란 어떠한 행함을 말하는가? 구원의 조건을 논할 때 막연하게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대체 어떤 행함이란 말인가? 행함도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의 본질적 필요조건으로서의 행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행함이다. 우리의 행함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면 그 행함은 믿음의 행함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대로 행하면 그 행함은 믿음이 없는 행함이다. 행함 자체를 미화할 수 없다. 죽은 믿음이 문제가 되듯이 죽은 행함도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것인가? 각자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어 행동할 것인가? 물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알려주셨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관한 지침을 제공해 준다. 그 지침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율법을 배제할 수 없다. 율법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질문 받으셨을 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율법 조항들은 주로 십계명에 담긴 계명들이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처럼 예수께서 제공하신 행함의 기준은 계명들이다.

행위 구원 교리가 틀렸다고 할지라도 행함은 강조해야 하고, 율법주의는 틀렸다고 할지라도 율법은 강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구원과 관련하여 명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의 기능이 예수로 대체된 신약 시대에 율법의 역할이 상대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십계명을 제외하고 율법이 모두 폐지되었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십계명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십계명에 포함된 안식일 계명은 어찌하여 지키지 않는가? 참으로 십계명 외의 모든 법이 폐지되었다면 왜 십일조법은 열심히 지키는가? 무엇이 폐지되고 폐지되지 않았는지 인간의 편리에 따라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5:17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완성함으로써 율법을 폐지하러 오셨다고 해석할 것인가? 제사법에 관하여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계명이 폐지되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마태복음 5:19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우리는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현대사회 속에서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킬 수 없더라도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버릴 수 없다. 명확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담은 구약 성경을 버리고 단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겠다고 하는 것이나 자신의 직관이나 도덕적 감정에 의지하는 태도나 단지 합리적 계산에 의존하는 것은 모두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내어야 하고 그 뜻을 적용해야 한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적용할 때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런데 율법 없는 행함은 죽은 행함이다. 행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율법을 떠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열심히 행하는 행함이라면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행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특히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들과 신약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의 새 계명들과 관련될 때 구원과 관계된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갈라디아서 5:6).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이다. 성경은 행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강조되는 행함은 성령께 순종하는 행함이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라디아서 5:16).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성취하는 삶이다(갈라디아 5:23).

행함 없는 믿음의 강조도 율법 없는 행함의 강조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생의 길과는 무관하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길에 관한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신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태복음 19:17).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예수의 말씀을 행위 구원이라면서 배격하고 율법주의라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과연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인가? 예수를 믿음이 없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교리에 관한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교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서 계명들을 어기고 살인하고 간음하며 도적질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자유가 하나님께 있지만 구원하지 않으실 권리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신다면 우리가 이신칭의 교리를 근거로 하나님께 부당하다고 따질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리를 용서해 주실 의무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법칙이 아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도 법칙이 아니라 구속사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신칭의 교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교리적 법칙 속에 가두면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을 제한하게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한 성도가 드리는 겸허한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예수와 토지법 2)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넘어서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5. 21. 12:2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성서와 사회

예수를 믿는 우리의 신앙이 어찌하여 삶 속에서 힘을 잃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분리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의 분리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신앙과 삶이 종종 분리되어 왔다. 그리하여 성서와 사회도 분리되어 왔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신앙생활이 사회 속에서의 삶과 무관하였다. 성경을 연구하며 성경에서 깨달은 만큼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사회 정의를 세우는 실천에까지 쉽게 나아갈 수 없었다. 성경에서 사회 정의 운동을 위한 토대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종 발생했다. 그들의 사회 참여는 성경이 명하는 규범에 따르기보다는 시대가 요청하는 필요에 따라 일어나곤 했다. 그리하여 성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나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사회와 관계없는 책으로 여겨지곤 했다.

성서가 사회와 분리되면, 성서는 그저 종교적인 책으로 남게 된다. 성서가 종교 영역을 다루는 책으로 제한되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고백도 예수의 왕 되심에 대한 신앙 고백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성서가 사회 문제에 대한 지침을 주는 책이 되지 않는 한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은 그저 말뿐이게 된다.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이 참으로 진실되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메시지를 사회에도 적용해야 한다.

그리스인들의 삶 속에서 왜 성서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었을까? 왜, 정의감이 충만한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서 없이 행동해야 했을까? 왜, 성경을 사랑하는 신실한 기독인들이 성경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비전을 얻지 못하였을까?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안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기는 경우에는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이를 사회 문제에 적용하지 못한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거룩한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을 개인의 종교적 삶을 위한 책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위대한 성경을 이렇게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약 성경과 기독교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교회가 사회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이다. 믿음과 행함이 연결되어도 성서와 사회가 분리된다면 행함은 교회 속에서의 종교적 행위로 제한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힘을 잃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하려면 우선 그러한 분리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의 원인은 성서 안에서 구약을 삶의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시작한다. 한국 교회들은 구약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며 구약 성경의 형식적 권위를 존중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구약 성경의 형식적인 권위는 인정하면서 실제적 권위는 부정하는 셈이다. 구약 성경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처럼 물러나게 된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되면 왜 성서와 사회가 서로 분리되는가? 구약 성경에 사회와 관련된 법들이 많기 때문이고 이러한 법들과 관련된 선지자들의 선포가 많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될 경우에는 이러한 법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에 적용되지 못하게 된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를 위한 원리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잘 알아도 그러한 내용들이 폐지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구약 성경은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이 사회와 분리된 상태에서 신약 성경만을 사회와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 가진 사회적 차원을 전제하고 이것을 기초로 영적인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고 신약 성경을 읽으면 사회적이면서 영적인 신약 성경은 단지 개인적이면서 영적인 것으로 오해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구약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삶의 기준이라고 고백하지만, 동시에 구약 성경의 규범적인 효력은 폐지되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구약 성경 39권의 삶의 기준으로서의 효력을 믿지 않고 있다. 신구약성경 66권 전체가 삶의 기준이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동시에 신약시대에는 구약의 법들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이러한 모순이 위대한 구약 성경의 빛이 사회 속에 비치는 것을 가리고 말았고, 구약 성경을 맛 잃은 소금처럼 만들고 말았다.

구약 성경의 율법 조항이 폐지되어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적용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교회의 삶 속에 제멋대로 적용하는 것은 또 하나의 모순이다. 교회 생활에 구약 성경을 적용할 때에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며 적용한다. 그리하여 구약 성경은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나 헌금을 강조할 때, 목사의 권위를 강조할 때 이용된다. 구약의 제사는 헌금으로, 제사장은 목사로, 성전은 예배당으로 연속되는 것처럼 적용한다. 사회를 향한 구약 성경의 메시지는 무시하면서 교회를 위해서는 마음껏 이용한다. 이것은 성경을 믿는 태도가 아니라 이용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태도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성전 제사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예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므로 구약 성경의 제사법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헌금을 만들어 내며 이를 설득하기 위하여 구약의 다양한 제사들을 언급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폐지된 제사법들을 적용하는 한편 폐지되지 않은 계명들은 율법 폐지를 외치며 지키지 않는다. 십계명은 신약 시대에 계속 지켜져야 한다는 데에도 대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일요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전통마저도 점점 사라지면서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이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십계명을 무시하면서 제사법은 적용하려고 하는 모순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엄연히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다른 율법 조항들이 존중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예배당 건축이나 헌금과 관련하여 이용할 수 있는 율법들은 열심히 강조되고 적용된다. 한국 교회에선 십일조법도 열심히 지켜지고 있다.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십일조법이 지켜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안식일법은 헌금과 관련되지 않지만 십일조법은 헌금과 관련되기 때문은 아닌가?

물론 필자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율법 폐지론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십일조만은 예외라고 하며 열심히 지키는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폐지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십일조를 폐지하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니라”(마태복음 23:23).

십일조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바리새파 비판은 더군다나 폐지되지 않았다. 십일조를 드리지만 더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비판되어야 마땅하다. 율법에 담긴 공의를 내어버린 반율법주의는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렸다. 어찌하여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리면서 덜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담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내어버리고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아닌가?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신 율법의 효력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인정하신 율법은 신약 시대에도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더 철저하게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신약 시대에도 지켜져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과 제사장,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십일조법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이 사라진 현대에도 지켜져야 한다면,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지켜져야 마땅하다.

예수와 율법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셨는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율법을 버리고 폐하는 자들을 비판하신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부여잡고 있다”(마가복음 7:8). “너희들은 너희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부수고 있구나!”(마가복음 7:9). “너희들은 너희들이 전수받은 너희의 전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마가복음 7:1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신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율법을 잘못 적용하여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전통을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5:17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으셨고 완성하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9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키도록 가르칠 것을 권장한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구약에 명령된 율법을 신약 시대에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며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는 율법의 일부로서 토지법이 담겨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레위기 25: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토지는 단지 임대될 수 있을 뿐 매매될 수 없었다. 이것은 율법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19을 토지법과 관련시켜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토지법을 폐지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또한 토지법을 지키며 이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토지법을 신약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토지법을 폐지하셨다는 증거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한 증거가 없는 한 우리는 구약의 율법들을 지키려는 시도와 노력을 존중해야 한다. 폐지된 흔적도 없고 지키라고 명해진 증거도 없는 율법 조항들은 열심히 지켜지는 것이 안전하다. 적어도 그러한 율법 조항들을 열심히 지키려는 사람들을 신율주의자라고 부르며 정죄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켜야 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낭패를 당하기보다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을 지키는 불편을 겪는 것이 더 안전하다.

율법 조항들 중에서 예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율법들은 신약 시대에도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 예수께서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이 율법의 일부라는 이유로 거부된다면 이는 예수를 믿지 않는 태도이다. 율법폐지론이라는 신학적 입장이 중요한가, 예수의 가르침이 중요한가? 율법폐지론은 신학자들의 가설이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메시아의 명령이다. 인간의 가설을 따를 것인가,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인간의 신학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이 폐지된 흔적이 없다면 그것을 지키려는 운동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폐지론에 은연중에 빠져 있다. 토지법이 폐지된 증거가 없다는 소극적인 논리로 그들이 토지법을 존중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 율법폐지론에 빠진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예수께서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만일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 과연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는가? 예수께서 토지법에 관하여 어떠한 태도를 보이셨는지 알려주는 본문이 복음서에서 발견된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17-31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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