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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이만열교수'에 해당되는 글 2

  1. 2009.12.15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쳐라
  2. 2009.05.11 한국교회 타락 주범, 맘몬신앙과 기복주의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쳐라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12. 15. 10:3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복음과상황 창간 18주년 기념예배 설교] 에스겔 2:1-7/ 예레미야 5:30-31

이만열 장로 (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명예교수)




복상 창간 기념예배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에 저는 에스겔서의 이 대목을 영문성경(NIV)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이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7절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You must speak my words to them, whether they listen or fail to listen, for they are rebellious. 이날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좀처럼 영감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도, 오늘 설교의 제목은 바로 이 대목의 본문에서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바빌로니아의 그발 하수가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기 백성을 향해, 이 반역하는 무리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내용이 5절에도 보입니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외치는 자를 말할 것입니다. 4절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자손은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왜 이 성경말씀을 오늘 말씀으로 택했는가 하면 오늘날의 세대가, 에스겔의 시대와 같이 목이 곧고 너무 뻔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사회도 꼭 같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씀이 불필요한 세대같이 보입니다. 때문에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상 진정한 말씀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흔히 들려지는 말씀에 대해, 듣지도 않고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낙심하고 있을 때에 이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갔던 때였던 만큼 오늘 세대보다 더 뻔뻔하고 소망이 없던 시대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 뻔뻔한 사람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치라고 했습니다. 그런 뻔뻔하고 절망적인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代言하는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세대가 뻔뻔하고 목이 곧다고 한다면, 어디에서 그렇습니까. 먼저 교회가 그렇습니다. 대형교회가 목회세습을 하면서 종교적인 권력, 지위, 명예 그리고 재부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세습에 저항하거나 개혁하려는 운동이 잠시 보인 적이 있지요. 중세 천주교회가 교황이나 교권자들로 인한 부패 때문에 이를 막아보려고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했듯이, 한국 교회에도 이런 특단적인 조치가 주어져야만 세습의 폐단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요? 대형교회의 세습과 그 운영은 거의 필연적으로 부정직하고 부패한 사건들을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반성이 없을 뿐아니라 이제는 이를 지적하는 소리조차 거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형교회 세습 문제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다 나타나고 있지만, 보수교회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보수가 종교계나 정치계를 막론하고 그 건전한 가치관을 상실했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며, 여기에서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무자격 목회자들의 양산이나 목회자들의 상식을 벗어난 일탈행위는 이제 일일이 지적할 겨를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는가 물을 정도로 한국 교회의 변질은, 과거 한 때 한국사회에 소망이 되었던 그 이상으로,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인가 하는 정의도 필요합니다만, 적어도 오늘날 같이 대형교회를 지향하면서 자본주의적 경쟁주의식으로 교회성장을 지향하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기독교인이고 국무총리, 대통령실장, 교과부장관과 국토해양부 장관 등 많은 공직자들이 기독교인이고 국회의원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어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계층은 물론 인구의 20%내외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 인원배분으로 본다면 가히 기독교국가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의 확립은 요원하고 오히려 기독교적인 세계관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사회 또한 각종 선각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吾不關焉, 들은 시늉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건이 터져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자의 입을 틀어막고 위협을 가하며, 글로써 외치는 자를 옥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국정최고책임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요 날마다 하나님께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제 도대체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가, 기독교인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어떻게 정치권과 사회를 대하고 있습니까. 자기 약점이 많고 보니 우선 이렇게 양의 탈을 쓴 정권에 대해서 우선 비판할 능력이나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정권의 행태나 우리 사회의 비기독교적인 점에 대해서 추호도 거스리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러할진대 다른 언론들의 곡학아세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을 말하고 계도할 수 있겠습니까.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남쪽 유다의 여호사밧왕 시대와 같이 미가야 같은 사람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그 당시의 400명의 거짓 예언자처럼 떼지어 외치는 아첨소리만 있는 것 같습니다. 4백명의 목소리처럼 승리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지만, 패배와 유리방황을 외치는 한 사람 미가야의 초라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천상의 회의에서 ‘예언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어 호리게 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거짓말 하는 영’을 마음 속에 넣었기 때문일까요.

대학교수들로부터 시작된 시국선언에도, 각계의 외침에도 전혀 무신경하게 대하는 이 정치 사회가 과연 기독교인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같은 시국선언에 대한 반응이라는 게 고작, 전체 대학교수가 얼만데, 전체 국민이 얼만데 그 따위 숫자가 외친 들 대수로운가 하는 비아냥 뿐입니다. 아합왕을 지지해준 ‘400명’의 예언자들처럼 거대한 언론들이 자기 뒤를 봐주고 있다고 뱃장입니다. 그래서 ‘먹통정권’이란 별명까지 붙여주는 안타까운 상황에까지 이르렀지만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400명은 하나님의 진실한 대변자 미가야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이 모두 400명의 소리처럼 열창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진실한 예언자 미가야 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시대를 향해 외쳐야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에스겔서를 읽기 전에 예레미야서를 읽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참으로 특이한 예언자입니다. 모두들 자기 민족의 희망적인 미래를 강조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민족의 비극적인 장래를 가감없이 외쳤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유독 “너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구절이 많이 나오는 성경이라고 느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조국 유다와 자기 민족을 향해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자긴들 어찌 그 말을 원해서 했겠습니까. 조국과 민족을 저주하는 그런 말을 어떻게 자기 입으로 흔쾌히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하니 하는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런 불리한 말이 “나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읽은 예레미야 5장의 말씀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합니다만 5장의 1절 말씀은 오늘 이 시대를 두고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유다 왕국은 이집트에 원군을 청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랬을까요? 예레미야는 국방의 요체가 동맹군을 끌어들이는 데에 있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실천함에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걸 오늘날 식으로 번안한다면, 국방의 요체가 동맹국과의 굳건한 동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돌보며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의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의 질서를 실현함에서 안보의 원리를 찾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반핵반김의 안보원리를 추동하는 중추세력이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 교회라고 할 때, 이들의 이념과 지향이 든든한 안보자체이신 하나님 신앙의 토대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거리에서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았던 前例를 따라서 한국 교회는 안보의 요체를 정의와 진리의 실천에서 설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유다의 지배층이 국방의 요체를 이집트와의 동맹에서 구했듯이, 한국 교회도 유다의 지배층처럼 잘못된 안보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그 시대를 꿰뚫는 예언자적 혜안은 5장 30절과 31절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 부류를 한꺼번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제사장 그리고 그런 선지자와 제사장을 용납하는 백성들입니다. 저는 제사장들이 권력으로 다스린다는 말을 잘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형교회와 최근 이곳 저곳에서 불거지는, 교권화해가는 교단정치의 현상들을 보면서 제사장들의 권력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는 것은 비단 아합시대에 미가야 선지자와 대결했던 400여명의 선지자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소위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까. 뻔히 보이는 사실도 뒤집어서 말하는 사실들이 바로 거짓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근 감리교단을 비롯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에서는 제사장의 권력화의 현상의 적라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교단 정치는 물론이고 연합체의 정치행태 또한 제사장의 권력화의 상징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거짓 선지자와 권력을 휘두르는 제사장을 보면서 그것을 좋게 여기는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들에 대해서 깨어있다면 어떻게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거짓과 권력 앞에서 무방비상태인 백성들이 존재하는 한, 거짓 선지자들과 권력을 남용하는 제사장들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와 권력을 남용하는 제사장들게 실망한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깨어있는 민중, 각성하는 백성을 기다렸던 것일까요.

<복음과상황>은 지금부터 18년전인 1991년에 창간되었습니다. 그 때 한국의 복음주의권은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시대에 깨어있는 행동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정리되고 있습니다만, 정교분리의 잘못된 권유와 이분법적인 신앙행태에 기인하여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가 거의 봉쇄되었습니다. 젊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진리에 대한 무기력증에 내팽개친채 안타까워했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주의권의 젊은이들은 진보권 젊은이들의 지향과 행동을 보면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무렵 로잔언약이 소개되었고, 그 로잔언약을 비빌 언덕으로 하여 젊고 개혁적인 젊은이들이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비록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작은 숫자였지만, 이를 계기로 사회참여를 위한 지향을 복음주의권 나름대로 정립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복음과상황>이 간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헌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복음주의권의 사회참여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 <복음과상황>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진보주의권의 이론과 주장, 행동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뜻을 함께 하지 못한 복음주의권이 <복음과상황>에 귀를 기울이면서 약하게나마 행동화의 기틀을 마련해 갔던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복음과상황>은 복음주의권 젊은이들에게 시대를 깨우치는 광야의 소리와도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환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진보주의권 젊은이들의 주장과 운동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이론과 행동은 이제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차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때에 <복음과상황>은 아직도 그 생명을 유지하면서 사명완수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리가 없는 시대가 아니고 창간 당시와는 달리 소리가 너무 많은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때에도 외치는 소리가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소리가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듣던 듣지 않던 외치라고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3장에 보면 외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언명했습니다. 아니 외치지 않아 멸망하게 된 사람들의 피값을 외치지 않은 자들에게서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장 18-21절을 보십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이런 말씀으로 명령하고 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외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창간 당시와 모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세계사의 변화는 물론이고 독자층들도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변화에 따라 우리의 소리도 좀 더 정제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복음과상황>이 더 분명한 소리를 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8절 말씀에,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복상은 그 동안 시대에 조응하는 분명한 소리를 발했는지, 그리고 변화하는 독자층이 이해할 수 있는 소리를 발했는지, 오늘 이 시점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아서도 복상이 존속할 필요가 있다면, <복음과상황>이라는 제목에 알맞게, ‘상황’이라는 시대 변화를 통찰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진행 방향에 알맞는 ‘복음’의 원리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의 다른 의미 없는 소리들처럼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를 새롭게 다짐하는 데에 창간 18주년을 기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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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타락 주범, 맘몬신앙과 기복주의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09. 5. 11. 01:0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2년 11월,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고 희망의 닻을 올린 교회개혁실천연대가 2008년 정기총회를 갖는 이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교회 개혁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무모하고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며 또 가시적인 성과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인간의 무력함과 전망의 어두움 등을 고려한다면 눈물 흘리고 낙심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이 운동의 필요를 아시고 이날까지 이끌어주신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용기주심에 거듭 감사하면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는 19세기 말에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한국 수용과 함께 성립됐습니다. 그 동안 한말의 고난과 일제하의 역경,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성장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에 힘입어 1980년대 말까지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선교100주년이 되던 1980년대 중반에 한국 그리스도교인 수는 한국 인구의 25%, 4분의 1이라는 숫자로 제시됐습니다. 그 동안 군부정권 하에서 한국 그리스도교 진보진영이 인권과 민주화에 힘쓰며 군부정권과 대결하는 동안, 그 다른 축인 보수진영에서는 전도와 선교에 힘써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스스로를 위안해왔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동안 많은 혼선과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나 상가에는 교회가 난립하고 교회 간판이 행인들의 눈을 어지럽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성장 자체가 목표처럼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말씀에 입각한 교회 상이나 십자가와 부활이 기초가 되었던 초대 교회 중심 메시지 같은 것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오로지 성장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법도 정당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교단의 난립은 교회의 직제와 권징을 어지럽혔고 무자격 목회자의 양산은 교회의 영적 수준은 물론 종교인으로서 도덕성마저 떨어뜨렸습니다. 신자들은 늘어났다고 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인지, 그저 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에 적을 걸어두고 행세하는 그런 존재들인지조차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성장하는 동안 많은 부작용 나타나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신앙 행태가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살아있는 이 세상과 죽어서가는 저 세상의 정도로 이분화 되던 신앙 행태가 점차 삶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과 실천,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세속과 성역 등을 구분하면서 믿음은 실천과 분리됐습니다. 신앙생활이 예배와 전도와 선교 등으로 국한되면서 우리의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문제는 믿음의 영역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치부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의 영역에서는 세속인과 다름이 없었고, 오직 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는 정도였습니다. 인구의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요, 사회의 지도자 그룹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더 높아지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의 그리스도교적인 변화와 개혁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을 무렵, 한국 사회에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잘 살아보세’운동이 한참 일어나고 세속적인 물신주의가 팽배해지고 있었습니다. ‘잘 살아보세’ 운동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을 무렵, 거기에 발맞추기나 한 듯 한국교회에는 이상한 복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요한3서 2절의 말씀에 입각했다고는 하나, 그것을 시대조류에 잘 적용하여 예수 믿는 복을 받으면 돈 잘 벌고 건강하게 된다는 복 사상이 유포되어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을 현혹하기 시작했습니다. 복 사상의 강조는 바로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기복사상과도 짝짜꿍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진정한 복은 한국교회 속에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기복사상으로 둔갑한 사이비 그리스도교가 팽배될 때,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지성들은 스스로를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걸어놓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예언자적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고에 한국교회의 주류적 흐름인 보수 교회에서는 누구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를 내부적으로 가장 타락시키는 요인은 바로 이 기복신앙이요 황금만능주의이며 이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바알신앙이요 맘몬이즘입니다. 

한국교회 지성인들은 기복주의를 왜 바알신앙으로 규정했을까요.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에게 가장 경계하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바알입니다. 출애굽도상의 이스라엘인들은 순례자의 길을 걷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곳에 고정된 벽돌집 대신 때마다 옮겨야 할 천막이 있었고, 곡간에 저축해 둔 곡식 대신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40여 년의 광야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때마다 가장 유혹받은 것이 바로 "우리는 언제쯤이면 천막 아닌 벽돌집을 짓고 매일 받아먹어야 하는 만나 대신 몇 달 몇 년씩의 곡식을 창고에 쌓아놓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화려한 벽돌집에다 창고에 듬뿍 쌓아놓은 곡식을 담보해 주는 신이 바로 바알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역경과 고난 속에 헤매며, 바로 그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는 그런 유혹들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잘 살아보세' 운동과 교회 성장, 대형 교회의 출현과 함께 이런 유혹이 심화 확대되었던 것은 한국교회의 불행이었습니다. 여의도의 모 교회를 비롯해서 강남·북에 있는 대형 교회가 바로 그런 바알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40년간 출애굽의 길 같바이 순례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먼저 그 행리(行李)를 가볍게 하고 저 순례자가 걸어야 할 고독의 길, 가난을 실천하고 영성을 회복하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1907년 대각성운동 이래 예언자적인 외침과 회개운동 그리고 개혁 운동을 나름대로 전개해 왔습니다만 이제는 한계에 부딪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난해의 아프간 사태를 계기로 반 그리스도교적인 정서는 봇물을 이루어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반 그리스도교적인 기치를 내걸고 투쟁의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과거 소수적인 위치, 약자의 위치였다고 생각하던 그리스도교는 이제 더 이상 약자도 소수자도 아닙니다.

사학법 재개정 과정에서 나타난 교회 지도자들의 삭발 사건은 그리스도교적인 방법이 아닌, 힘으로 밀어붙여 문제를 해결하려한 대표적 사건의 하나였습니다. 이와 함께 대형 교회들에서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목회 직 세습행태와 목회자 납세문제 등도, 한국 그리스도인이 NGO 후원금의 70%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자랑할 만한 추산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교를 비난하는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단군상 파괴 행위에서 보여준 무모한 행동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과 역사에 그렇게 둔감하냐는, 한국 지성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다 차기 정부의 대통령은 다시 대형 교회 장로로서 그 인맥이 벌써 한국 정치에 준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교유착의 가능성이 보이는 차기 정부의 행적 여하에 따라서는 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또 어떻게 비판 혹은 비난받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개혁을 가속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개혁을 시급히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개혁연대의 사명은 더욱 분명해지고 그 사명은 더욱 지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혁연대, 그동안 많은 노력 해왔다'

그동안 개혁연대는 만 6년이 채 되지 않는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며칠 전 받아본 2006년도 사역보고서와 2007년도 사역보고서는 그런 노력의 놀라운 과정과 결과들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운동은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한국교회를 향한 애정 어린 근심과 예언자적 통찰력과 역사의식, 그리고 동지적 연대가 그 토대를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큰 뜻을 갖고 있더라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1335명의 관심회원과 168명의 정회원 그리고 이들을 묶어서 행동과 실천으로 옮기는 동력 역할을 감당하신 38명의 집행위원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경하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한국교회의 소위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이나 소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지금까지 거의 수행하지 못하는 이 일들을 더 겸손하게 감당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격려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면 특히 난세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았고 그들이 당시의 종교계를 주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시대라고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엘리야는 그 시대에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이들과 대결했을 정도로 갈멜산에서 외로운 투쟁을 했습니다. 북왕국 아합 왕과 남왕국 여호사밧 왕이 군사행동을 위한 정치적인 판단을 요청했을 때 시대에 영합하는 400명의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거짓선지자들이었습니다. 오직 미가야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라고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어려운 때에라도 하나님은 아합 치하의 궁중 관리 오바댜를 통해 50명씩 100명의 하나님의 종들을 숨겨놓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 시대의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그런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서 더 활기차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시대의 한국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저는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왜 예언자들의 회개운동을 통해서보다는 오히려 재앙과 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종종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의 세속화와 교회 지도자의 부패, 그리스도인의 타락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점을 넘어서게 될 때 우리 사회도 언젠가는 과거 많은 시대가 당했던 그런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근심스런 전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불교적 기반 위에 있던 고려가 성리학에 입각한 조선으로 변화하기 전에 고려 사회에는 불교 승려들의 심각한 타락행위와 불교사찰의 온갖 세속화된 모습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거울삼아 보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실천에 앞장 서 왔던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에게 축하의 말씀과 함께 한 번 더 제 간절한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칫 여기서 한국교회의 목 곧음과 우리의 약함을 이유로 혹은 핑계 삼아 지금까지 계속해왔던 이 일을 중단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맙시다. 이 선한 일에 대한 우리의 부족과 나약함과 심지어 절망의 인식이 오히려 하나님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시작하셨다는 확실한 보증이 있을 때까지는 이 작은 연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힘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한 것보다는 더 큰 역사를 한국교회사에 남겨줄 것으로 또한 확신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워'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더욱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귀한 사명에 충성하는 신앙의 동지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이 글은 2009년 교회개혁실천연대 정기총회에서 이만열교수(숙명여대명예교수)의 설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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