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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의 모습 

마가복음 10:17-22에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토지를 포기하는 교회이다. 대토지 소유를 포기한 자들만이 소속되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교회이다. 평균이상의 토지가치 소유를 포기하지 않고 교회로 들어 온 자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징계를 받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이 교회에 소속하고 싶을 경우에 심히 슬퍼하며 근심하게 된다. 그들은 토지를 택하든지 예수를 택하든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0:21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이러한 교회를 이루도록 뜻하셨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음을 사도행전 2:43-47은 보여준다. 이러한 교회에는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으며,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표적과 기사가 사라지고 있으며,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부동산 투기를 할 때 교회도 부동산 투기를 하였기 때문이며, 세상 사람들이 토지를 탐할 때, 교인들도 토지를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물을 좋아하고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가 하나님의 것임을 잊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주신 토지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레위기 25:23)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웃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토지 투기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교회가 받는 벌은 성령께서 떠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표적도 기사도 사랑도 기쁨도 없으며, 오직 불신과 부패와 탐욕과 투쟁이 남을 뿐이다. 세상은 이러한 교회를 미워하게 되고 그러한 교회는 결국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다.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는 세상과 같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른 교회이다. 세상이 토지를 탐할 때, 토지를 버리는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은 어둡지만 교회는 밝아야 한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희생적이어야 하며, 밤이 깊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별빛처럼 정결해야 한다. 교회는 밤 같은 세상 속에서 함께 밤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동화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의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동화된다면 세상이 교회로 나아올 이유를 잃게 될 것이다. 교회는 결코 세상처럼 되어선 안 된다. 잠시 살기 위해 세상처럼 된 교회는 영원히 죽게 될 것이며, 고난을 받더라도 세상처럼 되지 않은 교회는 잠시 죽는 것 같으나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한국의 미래 

하나님은 지계표를 옮겨가며 남의 토지를 점령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셨다(미가 2:2-4).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남의 토지를 빼앗는 자들이 받는 벌은 그들의 땅이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동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빼앗아 넓힌 이스라엘의 대토지소유주들의 땅은 결국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로마에 빼앗겼다. 결국 나라를 잃고 땅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빼앗긴 땅에는 자유도 풍요도 없이 슬픈 애가만 남을 뿐이다. 빼앗긴 땅에는 과연 봄이 오는가? 봄이 와도 그 봄은 동일한 봄이 아니고 가을이 와도 그것은 동일한 가을이 아니다. 봄은 정복자들을 위해 고단히 일해야 하는 봄이며 가을은 정복자들에게 열매를 빼앗기는 가을이다.

한국이 부동산 투기 세력에 의해 멍들고 있을 때,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땅인 간도와 우리 민족의 역사인 고구려사와 고조선사를 빼앗고 있었다. 이제 중국은 유사시에 북한의 토지 전체를 차지하려고 넘보고 있으며, 일본은 독도를 침탈하려고 애쓰고 있다. 한국에서 국민이 국토에 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할 때에는 미가서의 예언대로 한국은 주변 나라에 의하여 그 영토를 빼앗기는 벌을 받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공의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며 온 국민이 국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된다면, 이 땅을 노리는 나라들이 오히려 지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받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웃의 토지를 소유하려는 야욕을 실행에 옮기려는 자들에 관하여 구약성서는 선언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한 나라의 영토 경계를 지키는 일은 한 나라 속의 토지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 나라 속에 이웃의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투기 세력들이 많이 있으면 그 나라의 영토 경계표도 이웃 나라에 의해 옮겨질 위험에 처한다. 로마가 망한 것은 자영농들의 토지 경계표들이 무너지고 대토지소유제가 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가 각각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망한 것도 토지 경계표가 옮겨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토지법이 무시되고 대토지소유제가 도입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에도 토지경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많으면 대한민국의 영토 경계표도 옮겨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 자신의 땅을 한 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누가 한국의 영토를 수호하려고 외적과 싸우겠는가? 그러므로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는 법과, 토지가 전 국민에게 골고루 소유될 수 있는 정책은 조국의 영토 수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 나라의 국방력은 곧 그 나라의 경제력에 비례하며, 나라의 경제력은 산업의 경쟁력에 비례하여 발전한다. 그러나 자본이 산업기술에 투자되는 대신 토지에 투기되는 나라에는 산업의 경쟁력이 생길 수 없다. 그러한 나라는 거품으로 인해 경제규모가 성장하는 듯하지만 그 거품이 꺼지는 날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품 경제를 키우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국가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이다. 따라서 이것은 영토를 수호할 힘을 잃게 하는 매국적인 정책이다. 조국의 영토의 경계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지키려면 부동산 투기 세력으로부터 이 땅을 보호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따라서 모든 국민은 국가의 영토에 관한 평등한 주권을 가진다. 이러한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진 나라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계제국 로마도 그러했으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마저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멸망했다. 대한민국의 영토 주권을 무너뜨리려 하는 이웃나라의 야욕 앞에 우리가 저항력을 키우는 길은 조국의 영토의 주권을 모든 국민이 누리는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국민이 가질 수 있는 평균치 이상의 토지가치 소유에 대해서는 적절한 과세가 이루어져야 한다. 토지의 경계표를 옮긴 사람들이 세금으로 대가를 치러야 국가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고 영토를 수호하는 재원도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애국자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고귀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예수를 따르는 자의 신성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국민의 약 1%가 민유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전체가구의 반가량이 한 조각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은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소수의 부자들이 전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1세기 로마제국의 상황과 유사하며,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킨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과 유사하다. 이처럼 토지 경계표를 무너뜨린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 오시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토지와 부동산을 많이 가진 자들이 세금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시면 무어라 하실까?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부동산 투기에 열심인 자들을 보면 무어라 하실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토지가 필요하여 보유하려거든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지재원으로 사용하도록 하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맺음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을 환영할 사람들이 교회로 모일 수 있고, 이 예수의 말씀에 슬퍼하여 예수를 떠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면 한국교회에는 미래가 있다. 또한 그러한 교회가 있는 사회에도 미래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암담한 것은 한국 사회에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빛을 잃고 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암담하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지만 그 정신은 이미 죽지는 않았는가? 죽은 시체와 같이 되어버린 교회들이 썩는 냄새가 세상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많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반대하고 있다.

이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이 아니면 이러한 교회에는 소망이 없다. “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교회는 나사로처럼 살 것이지만, 이를 거역하는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게 될 것이다. 예수냐, 토지냐의 선택은 교회에게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이다. 기독교는 토지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예수 없이 살 수 없다.

재물과 권력을 얻었지만 예수를 버린 기독교의 앞날은 불을 본 듯 분명하다. 그것은 멸망이다. 그러한 교회는 오히려 세상에 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 그러나 교회의 멸망은 세상이 기뻐할 일이 아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무엇으로 세상을 비추고 무엇으로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할 것인가? 구한말과 비슷한 시기를 맞이한 지금 이 민족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그 복음을 체화한 참된 교회가 필요하다. 그러한 교회들이 하나둘 늘어나지 않고 돈과 성장과 권력만을 좋아하는 교회만 늘어난다면 한국 기독교와 이 민족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이 사회에 남은 마지막 소망이다.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신음하며 기다리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교회의 등장이다. 이러한 교회가 등장하여 세상을 비추기를 온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이 한국을 가득 채울 때 한국은 동방의 찬란한 등불로 깨어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공의로운 나라가 될 것이다.

토지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교회가 앞장서서 따를 때, 한국 사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디자인한 노예 없는 사회, 헨리 조지가 꿈꾸던 토지가치세 복지사회, 손문이 소망하던 평균지권 사회, 자신의 토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산상수훈의 삶을 살려고 한 톨스토이가 염원하던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강대국들이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애국가 가사처럼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우하시는 나라가 될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명기 28:1, 7).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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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4)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6. 24. 10: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부유함 자체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다(마가복음 10:19). 즉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답하신다. 질문한 사람은 이것을 다 지켰다고 대답한다(마가복음 10:20). 이에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신다(21절).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

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가?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부유함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잘 지킨 자에게 주시는 복일 수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명기 28:2-6).

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부유한 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선행의 결과일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의 복으로서의 부는 자녀, 토지의 소산, 가축 등의 복이다. 따라서 부유함 자체는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증거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킨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부의 소유 자체를 문제 삼았다고 볼 수 없다.

토지 과다 소유가 문제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그에게 단지 소유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22절에 등장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서 ‘재물’이라고 번역된 말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끄떼마’는 재물 중에서 특별히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잠언 23:10은 지계표를 옮기지 말고 고아들의 밭(‘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끄떼마)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에 나오는 ‘사데’(땅)의 번역어이다. 70인역 잠언 31:16에도 ‘끄떼마’가 사용되는데, 여기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케렘’(포도원)의 번역어이다. 호세아 2:17에서도 ‘끄떼마’는 히브리어 ‘케렘’(포도원)의 번역어이다. 사도행전 5:1에서도 ‘끄떼마’는 땅을 가리킨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끄떼마)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사도행전 5:1-4).

‘끄떼마’라는 헬라어는 ‘토지’로 번역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번역은 문맥상 정당하기도 하다. 21절은 율법 지킴에 있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는데, 토지가 많은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토지를 일정한 분량, 즉 기업으로 물려받은 분량이상으로 소유하지 못하게 규정한다. 레위기 25:23은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다만 임대만 허용함으로써 토지소유의 집중을 막고자 한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23). 임대는 희년까지만 할 수 있었고 희년이 되면 원소유주가 다시 토지의 소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위기 25:28). 하나님께서는 토지 소유의 경계를 옮기는 것을 금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으로 소유지를 넓히는 것을 금하셨다. “그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토지의 소산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복일 수 있지만(신명기 28:11),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어기고 있는 상태이다. 스스로 영구매매를 하거나 지계표를 옮기지 않았고 조상들이 그렇게 한 것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 책임을 면하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량이상의 토지, 즉 본래 이웃의 것이었던 토지를 처분해야 하고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들이 가난해진 중요한 원인이 그들의 삶의 터전인 토지를 빼앗긴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토지와 함께 자본이 중요한 경제 변수인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구약성경의 토지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토지법은 토지를 잃어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하여 결국 노예가 되는 것을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법제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변함이 없고 농경 사회에서나 공업 사회에서나 정보 사회에서나 변함없다. 또한 오늘날 토지(특히 도시 속의 토지)는 불로소득의 중요한 원인이며 토지 투기는 이웃에게 많은 피해를 준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과 예수의 가르침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율법을 지킴에 있어 부족한 것은 바로 토지의 과다 보유였다. 그러므로 그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처분해야하는 것은 토지였다. 따라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은 곧 “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예수께서 팔라고 명하신 것은 바로 토지였다.

개역성경에는 ‘네 있는 것을 다 팔아’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 번역에 해당하는 본문은 그저 ‘네 가진 것을 팔아’로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호사’는 “모든 것” 등으로 번역되더라도 예외 없는 모든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마가복음 3:28에서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에서 ‘모든’은 헬라어 ‘호사’의 번역어인데, 이것은 예외 없는 ‘모든’을 뜻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3:29은 곧 바로 예외를 언급한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기업으로 받은 토지는 구약 성경에 의하면 팔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팔아야 하는 재물로부터 예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까지 팔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라고 명하시면서 율법을 어기고 토지를 전부 팔라고 명령하셨을 리 없다. 팔아야 하는 것은 고유한 토지 경계표를 넘어서 빼앗은 이웃의 토지이다. 이것은 율법이 허용하지 않는 불법거래를 통해서 획득한 토지이거나 임대한 토지를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고 계속 점유한 토지이다. 예수께서는 이것들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계표를 옮겨가며 남의 토지를 점령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신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미가 2:2-4).

토지를 넓히는 자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재앙은 그들이 땅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남의 땅을 빼앗았으니 이제 남에게 땅을 빼앗기는 것이다. 동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빼앗아 넓힌 이스라엘의 대토지소유주들의 땅은 이 말씀대로 빼앗겼다. 그들의 땅은 결국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로마에게 빼앗겼다. 나라를 잃고 땅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빼앗긴 땅에는 자유도 풍요도 없이 슬픈 노래만 남을 뿐이다. 빼앗긴 땅에는 봄이 올지라도 그것은 남의 봄이다. 빼앗긴 땅에는 가을이 올지라도 그것은 빼앗긴 가을이다. 정복자들에게 토지의 소산을 빼앗기는 가을이다. 토지를 빼앗기어 토지의 소산도 빼앗기고 그 땅에서 흘린 땀방울까지 빼앗기는 가을이다.

제자의 조건

예수께서는 동족의 토지를 빼앗아 지계표를 옮기고 땅을 넓힌 사람에게도 사랑을 표현하셨다. 단지 그가 다른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초청하시기까지 하셨다. 그에게 기회를 주신다. 그 토지들을 정리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가르침은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가 근심하며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본래 더 철저하다. 그것은 불법 소유지의 포기 정도가 아니라 목숨의 포기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자기를 포기하는 것은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죽으러가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매달려 처형당할 십자가를 가리킨다. 또한 십자가는 영광스런 죽음이 아니라 수치스런 죽음의 형틀이었다. 그것은 로마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죄수들이 로마 권력에 의해 멸시당하는 고통과 수치의 사형 도구였다.

예수를 따르는 조건은 생존의 포기이다. 즉 죽을 각오이다. 그것도 죄수로 죽을 각오이다. 보통 죄수도 아니고 반로마 정치범으로 죽을 각오이다. 반로마 무장투쟁을 한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오해 받고 죽을 각오이다. 지계표를 옮기며 불법적으로 확장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명령에 근심하며 떠나는 자가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겠는가?

예수를 따르는 조건, 즉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준행되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사도행전 2:45). 여기서 ‘재산’이라는 단어는 토지를 가리키는 헬라어 ‘끄떼마’의 번역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행위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른 실천이었다. 사도행전 4:34-35은 좀더 명확하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토지를 모두 처분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므로 그들이 판 것은 지계표를 넘어 확장한 토지였을 것이다. 바나바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 토지를 처분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 4:36-37). 구약에 의하면 레위인은 토지를 가질 수 없었고 다만 집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인 바나바는 구약에 따라 토지를 처분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는 그 자체로 오늘날의 교회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유효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모델이 아니라고 하며 거부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조건은 12명의 사도들을 위한 조건이 아니었고, 모든 제자를 위한 조건이었다. 그것은 교회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기준이 강조되는 교회는 없어졌다. 그와 함께 기독교의 위대함도 사라지고 말았다. 위대함이 사라진 기독교를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기독교의 위대함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예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조건을 회복하면 위대한 기독교는 회복될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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