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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1. 자살. 죽고 싶어 죽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 유명인들의 자살이 많아지면서, 자살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기 원한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도덕과 논리 이전에 정말 최악의 결과다. 너무 손쉬운 훈계처럼 결코 자살하는 당사자가 죽기를 좋아했기 때문도 아니고, 목숨을 경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정말 죽고 싶어 죽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2. 자살을 개인화시키지 말라.

자살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밑바탕에는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만 보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나 자살은 결코 개인의 일이 아니다. 확신컨대 모든 자살은 사회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살은 반드시 그 사회적 의미를 물어야 한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전태일의 분신까지 말할 수 있겠지만, 최근의 기억만으로 충분하다. 작년 10월 톱 탈랜트 최진실씨가 자살했다. 죽기 전 그는 동료 안재환 죽음의 원인제공자로 잘못 알려져 근거 없이 시달려 왔다. 물론 잘못된 루머를 퍼뜨린 사람은 진즉 잡혀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미 유포된 거짓들은 억측과 함께 숨겨진 진실처럼 커져만 갔고, 가능한 한 큰 파장만을 원하는 황색언론들은 한편에서는 최진실의 억울함을, 돌아서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식의 자가발전을 유도했다. 나는 확신컨대 만약 최진실이 죽지 않았다면 그런 식의 이중플레이는 지금도 계속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최진실의 죽음은 개인적 불행만이 아니다.

올해 3월에 자살한 장자연씨 사건은 더욱 허망하다. 그녀는 연예인 성상납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면서, 그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여기저기 큰소리들만 많았지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았고 ‘꽃보다 남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정치권도, 언론도, 심지어 동료들도 그저 개인적 불행으로만 기억하고 싶어 했다. 흔히 하는 말로, ‘죽은 놈만 불쌍하다.’ 죽음을 통한 호소조차 통하지 않으면 죽을 사람들은 더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장자연의 죽음도 그저 개인적 불행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좀 더 복잡하다. 정치적 지형이 급격히 나뉘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냐, 어떤 주장을 했느냐에 따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갈려 버리기에 처음부터 지지와 반대 이상을 넘어서기 참 힘들다. 그래도 고민해 보자.

지난 5월 목숨을 끊은 화물연대 광주지부장 박종태씨를 기억하는가?

풀리지 않는 비정규직제와 최저임금문제를 갖고 씨름하다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죽음을 보면서, 그가 살고 싶었던 세상도 알지 못하는 우리가 너무 쉽게 ‘자살은 죄다’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죽기 며칠 전 그는 유언처럼 10년을 같이 산 아내에게 이렇게 글을 남겼다.

“…잘 나가지도 못한 나에게 당신은 항상 힘이 되고 의지할 등받이였어. 못 먹고 못 입고 맘편히 나들이 한번 못가는 재미없는 10년 결혼 생활 견뎌줘서 고맙고 미안해.…항상 미안하다고 하면서 또 미안하다고 해야 할거 같애.…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나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사랑하는 수진씨 그럼 안녕…자기가 세상에서 최고야. 죽음의 문턱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당신은 나의 생애 최고의 여자요 친구였어. 박종태란 못난 남편을 빨리 잊어.…애들한테 말하고 싶은 게 진짜 많은데...시골에서 살고 싶었어. 나 진짜 농장하고 싶었거든.…”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과 가족들도 걱정했다.

“잘 놀아 주지도 못해 아빠가 안들어 오는 게 좋다며 장모님을 더 찾는 정하가 아예 아빠를 영영 잊어버릴까 두려워.…아빠가 없어 심심하다는 예쁜 혜주가 학교에서 기죽고 살지나 않을까 두려워. 항상 어머니 이상으로 미운 동생 뒷바라지 했던 누님이 쓰러지지 않을까, 큰형과 형수님이 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돼서 두려워.…혜주, 정하가 눈에 밟혀 뭐라고 애기하지? 정하야, 혜주야 아빠가 없더라도 기죽지 말고 엄마가 울지 않게 늘 엄마 곁에 있어야 한다. 엄마가 건강도 좋지 않은데 힘들지 않게 엄마 보살펴 줘야 된다. 항상 그랬지만 혜주하고 정하는 든든한 내 아이들이자 친구야.”

이렇게도 살고 싶었던 그에게 우리가 그저 “자살은 죄다. 생명을 존중하라”고 값싼 도덕적 훈계 따위나 날린다면 그게 어디 종교가 할 일인가? 한편에서는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는 ‘열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는 무지하게 살고 싶었다. 그것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백번 양보해 그의 정치적 견해가 부족해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해도 우리는 그저 ‘자살은 죄다’는 식의 빈껍데기 소리만 던져놓고 끝나서는 안 된다.

결국 전직 대통령까지 목숨을 끊었다.

나는 아직도 그의 5년 재임기간을 전부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친노든 반노든 중요한 것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선호도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전직 대통령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에 빠지게 되었는가하는 점이다. 또 이번 사태가 정말 정치적 타살이라고 볼 수 있다면 같은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우리사회는 어떻게 고쳐야할 것인지 깊이 고심해야 한다. 더구나 재임 중에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노 전 대통령이 죽은 후 이토록 추앙받는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결코 적지 않은 사회적, 신학적 숙제들이다.

그리고 강희남 목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게 결코 아니다. 자살할 작정을 한 사람은 어떻게든 일단 뜯어말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두고서는 그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남은 자들의 의무다. 그들이 살고 싶었고, 만들고 싶었던, 결국 목숨과 바꾸고 말았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는 1/10, 1/100도 모르면서, 얄팍한 도덕적 훈계나 율법주의적 신앙적 단정으로 개인화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미화할 생각도, 그들의 선택을 추앙할 생각도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왜 우리는 마땅히 살아 있어야 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지 못했는가이다. 그래서 남은 우리들은 함부로 그들을 정죄할 수 없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도 자기 생명 아까운 줄 몰라서, 생명을 경시해서 자살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경박한 교훈은 더 이상 하지 말자.

3. 그래도 산 사람의 생명은 지켜야 한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숨을 끊는 방법은 택하지 맙시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이 척박한 우리 노동현실과 서민들의 삶을 고발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80년대 수많은 젊은이들의 분신으로 이 땅의 민주화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최근에도 계속되는 희생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이제 정말 그만 돼야 한다.

80년대 거듭된 젊은이들의 희생을 목도하며 문익환 목사가 절규하였듯이 우리도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고 호소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부끄럽다. 그만큼 열심히 살아오지도 않았고, 목숨 걸고 헌신할 각오도 부족하기에 지극히 부끄럽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호소하자.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살인은 죄다. 그런 면에서 자기 목숨을 죽이는 자살도 살인이니 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틀린 점을 지적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뭔가 아쉽다.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창백한 훈계로 죽을 뻔 할 사람을 살릴 것 같지도 않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정말 죽음을 막고 싶다면 섣부른 훈계가 아니라, 머리 숙여 깊이 참회하고 눈물로 호소해야할 것이다. 세상 어떤 이들의 생명도 순교자나 열사라는 칭호, 그리고 정통신학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등에 쓸 모 없어 가는 자살 논란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강희남 목사의 죽음이 뒤따르자 예상대로 한국교회에는 때 아닌 자살논쟁이 한창 뜨겁다. 이러한 논쟁들은 단지 교회 울타리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 밖 세계에까지 펴졌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싸우는 시어미보다 말린다고 나타났지만, 더 미운 짓만 하는 시누이’처럼 보이는 것 같다. 죽을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없음은 물론, 죽은 사람은 욕보이고, 남은 유가족들에게는 염장을 지른다. 진정성이 보이지도 않는다.

우선, 자살은 죄인가 아닌가?

죄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두 다 죄’(롬 14:23/공동번역)라는 의미에서의 죄다. 그들의 죄가 더 나은 믿음이 아닌 비극적 표현으로 끝맺었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줄기차게 살아있기만 한, 그러면서도 단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신앙적 우월성을 누리려는 죄를 범하고 있다.

‘자살은 죄’라는 정죄함은 진지한 신학적 주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살하지 않은 나는 상대적 의인이라는 교만이 숨어있는 위선적 언어다.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죽은 그들을 훈계할 아무런 도덕적, 신학적 우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눅 13:1~4).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단지 질기게 살아남았다는 것이 무슨 자랑인가? 자살하지 않았다고 의인이 결코 아니다. 자살하지 않은 우리가 하등의 의로울 게 없다는 말이다.

둘째, 자살하면 지옥 가는가?

나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이 나도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지옥 가는 죄의 부류를 규정짓는 권세를 갖기 시작했는가? 성경에는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표현이 도무지 없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보면서 내린 내 결론은 이렇다. ‘살인은 큰 죄이고 자살도 살인이므로, 자살하면 지옥 간다.’ ‘가룟 유다를 포함해 성경에서 자살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큰 죄인들이었고, 그 결과 자살했기에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과 같다.’는 식의 목회자들의 자의적 해석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전해 들은 기독교인들의 입소문이 덧붙여져 이젠 마치 확실한 성경의 가르침처럼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살을 막기 위한 예방조처로서 과장을 부렸을 것이라는 이해도 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많은 경우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서도 지옥 운운하는 것을 볼 때는 저주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건 마치 ‘술, 담배를 하면 죄냐, 아니냐?’라는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술, 담배하면 가장 타락한 신자인 것처럼 여기고, 반대로 그것만 하지 않으면 마치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처럼 인정해 주는 엇나간 한국교회 윤리 수준을 보여주는 것과 흡사하다.

‘자살하면 지옥 가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면 자살하지 않으면 천국 가는가?’ 이것은 ‘내가 어떤 선행을 하면 천국 가는가?’(마 19:16)와 똑같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자주 자기 구원에 관해서는 무조건적인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행위의 문제로 착각하곤 한다. 거짓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고한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수고하는 데는 조금의 관심도 없으면서, 우리끼리만 생명을 존중하고 숭고한척 훈계하는 행위는 분명 위선이다.

5. 현학적 논쟁이 아닌 사람 살리는 능력을 기르는 기독교윤리여야 한다.

자살논란을 보면서 내가 정말 아쉬운 것은 생명을 살리려는 안타까운 진심은 별로 묻어나지 않은 채, 막연한 신학논쟁과 일방적 정죄만 난무하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우리 기독교윤리가 너무 얄팍하고, 일 터진 뒤 탁상공론이나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자주 받는다. 자살, 안락사 등은 사실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이미 죽겠다고 결심한 소수의 사람들을 뜯어 말리는 문제에는 이토록 관심이 많으면서도, 정작 조금의 관심만 있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는 너무도 무관심하다.

죽을병이 아닌데도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죽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강남 부자들의 회식비 정도도 안 되는 전세값이 없어 거리에서 전전하다가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 온갖 분쟁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학살당하는 무고한 어린이들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용산에서 원통하게 희생된 철거민 5명이 죽은 지 벌써 5달이 가깝지만, 아직 보상은 커녕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교회가 이들의 허망한 죽음에 대한 공분을 느끼고, 그 개선을 위해 개인화된 자살이나 안락사 문제만큼 열정을 보일 때 우리의 논쟁은 허망하지 않고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기독교윤리는 이미 죽은 사람 앞에 두고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이 계속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자살논쟁은 자칫 우리가 함께 붙잡아야할 사회적 책임은 손쉽게 떨어버리고, 문제를 온통 개인의 책임으로만 던져 놓는 말장난이 되기 쉽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 한국교회는 혼전순결운동을 열심히 벌이고 있다. 이는 성경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건강한 가정과 책임 있는 출산을 위해서도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건 아직 문제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갈수록 개방적 성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 개인적 혼전순결운동만으로는 뜻밖에 낙태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미 뜻하지 않은 임신(미성년, 강간 등)은 일어났는데, 일방적 정죄분위기만 존재하는 기독교 문화에서 기독교인이 출산을 생각한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문둥병자가 되는 것과 같은 차별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윤리는 아직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사람들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윤리가 아닌, 이미 문제가 터져 죽을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우선 살리는 윤리로 거듭나야 한다.

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지켰던 안식일 문제를 갖고 바리새인들과 죽기로 싸웠을까? 안식일 법을 비롯한 모든 율법은 본래 타락 이후 온갖 불의, 탈취, 억압이 세상에 난무하지만, 아름다웠던 창조의 그 날(출 31:14-17)과 해방절의 은혜(신 5:12-15)를 기억하면서 적어도 그 날만큼은 사회적 불의를 풀고 구속의 은혜를 함께 맛보는 공동체적 축제일이었다(신 16:9~17).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회기득권층이 된 종교지도자들은 자유와 해방에는 관심이 없고, 갈수록 더 복잡하고 어려운 율법조항들을 만들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일반백성들이 개인적으로 그 조항들을 얼마나 지키는지 감시하며 손쉽게 정죄를 일삼았다. 결국 안식일 규례는 본래의 법정신처럼 자유와 은혜, 공동체적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살리는 날’이 아니라, 더 속박되고, 더 배고픈 ‘죽이는 날’이 된 것이다(마 12:1~14). 주님이 사랑했던 백성들은 불편하고, 위선적인 종교기득권층만 호사를 누리는 안식일. 예수님께 그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불의한 제도였다. 지금 우리도, 우리가 그토록 자부하는 보수신학, 정통신앙이 서민들의 살 의지를 더 꺾고, 억압과 탈취에 눈이 먼 기득권자들을 더 격려하는 ‘죽이는 윤리’가 되지 않도록 깊이 고민해야 한다.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의인이라던 욥도 결국 믿음으로 이겨 실행해 옮기지는 않았지만 정말 죽고 싶었다(욥 3장). 자살자들이 속출하는 우리시대가 참 슬프다. 개인의 실존적 고민에 의한 것이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든 사실 나는 자살현상이 걱정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든 뜯어 말려야하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죄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유가족을 위로하고 그와 같은 비극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세상을 개혁해 나가는 게 주님이 바라시는 남은 자들의 몫이 아닐까? 우리가, 그리고 한국교회가 살아남은 자의 몫을 생각하면서 좀 더 겸손해지면 좋겠다.







구교형 목사 
(성서한국사무총장/교회개혁실천연대집행위원/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 이 글은 뉴스앤조이, 뉴스파워 등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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