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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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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10. 1. 9. 00:4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신학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을 준비하며 (2)

지난 필자의 글 '한국교회 개혁은 신학 교육의 변화로부터'에 이어 이번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적 신학 교육의 방향과 정신을 풀어 보고자 한다. 현재의 상황이 어찌 보면 쉽지 않지만, 그 속에서 그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기대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다.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역사를 이룬 느헤미야의 사역처럼 우리도 한국교회의 새로운 재건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신학 교육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만이 아닌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온 백성 중 목회를 전문으로 하는 백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목회를  전문적으로 하기 위한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아닌 백성들은 신학을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인 신학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다.  흔히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도 신학을 배우는 방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을 배우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분을 알아갈수록 그분께 더 깊이 알아가고자 하는 욕구는 늘고, 결국 신학 교육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는,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을 위한 신학 교육도 당연히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이들을 위한 교육을 하지 않는다.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이 목회자 과정만 운영해도 지원자가 많아 수용하기 힘든데, 확실한 수요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교육과정을 만들어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고 이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니다. 또한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에서 수용하기가 여간 거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원칙적으로 신학은 목회자가 해야 하는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가진 신학교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학 교육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일상을 더 풍요롭게 꾸미고 싶어 한다. 느헤미야에 대한 <뉴스앤조이> 기사를 보고 문의하는 분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이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 소양을 구비한 성도들이 하나님나라 구현과 기독교 재구성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신학은 기독교 내에서의 소통만이 아닌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가 수반해야 한다.

신학이  정치학이나 경제학, 사회학 등의 일반 학문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열린 신학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 학문도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에도 자유롭게 소통할 대상으로 여기지 못해 결국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로 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보자. 강의실에서 경제학자와 신학자가 공동으로 연구한 논문을 가지고 강의하고 학생들이 주저없이 학자들에게 질문하는 자유로운 풍경,  신학자가 정치학을 전공하여 신학이 기반된 학문을 하고, 또한 정치학자가 신학을 공부하여 그 깊이를 더하는 광경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도  그 부분에 대한 심화 과정을 이수함으로 더 나은 학문적 체계를 잡는 것은 어떠한가?  우리는 연구를 통해 정치와 경제, 사회와 역사, 문화와 예술, 과학과 기술, 생태와 생명을 다루는 다양한 학문과 겸손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우리 주변에도 이만열 교수님이나 손봉호 교수님 같은 분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와 아울러 신학적 깊이도 갖추고 있음을 본다. 이외에도 기독 운동을 하는 분들 중 여러 분들은 이분들처럼 신학에 바탕을 둔 자신의 전공을 살린 일들을 하고 있음을 본다. 죽어 있는 신학이 아닌 살아 있는 신학이 되려면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가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신학은 성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나누지 못하는 종교는 결국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게 된다. 길에 버려진 소금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 고유의 맛을 내야 한다. 고난당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과 같이 울고, 소외된 자들이 있으면 안아 주며,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는 곳에 찾아가는 것이 예수의 삶이자 신학이다. 성경은 죽은 자들의 경전이 아니라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을 믿는다면 신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으로 이어짐을 알아야 한다. 단지 앉아서 글자에 파묻히는 공부가 아닌, 가슴으로 뜨거워지는 그런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학 교육의 틀은 인프라의 구축이 아닌 컨텐츠가 우선되어야 한다.

신학연구원 설립을 처음으로 주장했을 때 여러 반응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많은 분들은 인적, 물적 인프라에 대한 우려였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신학 교육을 하려는 것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는 수년간 기독청년아카데미 등을 비롯한 아카데미를 벤치마킹하면서  인프라의 구축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준비하며 시간만 허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격 교육이 활성화하고 노트북이나 PDA 하나만 가지면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의 신학 교육은 결국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라 컨텐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신학 교육과 차별화한 신학 교육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강의의 내용으로 수강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년간 변변한 강의실도 없이 여러 교회를 전전하면서도 매학기마다 300명의 수강생이 신청하는 기독청년아카데미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면 결국 그것은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라 컨텐츠의 문제일뿐이다. 또한 느헤미야의 장점은 자신의 분야에서 때묻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연구하는 강사진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헌신이 결국 여러 부분의 단점들을 보완하게 될 것이다.

<뉴스앤조이>에 신학연구원에 관한 첫 기사가 나간 이후 많은 분들의 격려와 문의를 받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신학 캠프 신청이 오는 것을 볼 때에 우리의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일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 다음번에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교육과 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부분을 기술하고자 한다.

고상환 /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 준비위원

* 신학연구원 느헤미야의 교육과정을 미리 맛보는 신학 캠프에 대한 사항은 www.nics.or.kr 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 이글은 기독교인터넷신문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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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은 신학 교육의 변화로부터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10. 1. 5. 00:0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국교회 개혁은 신학 교육의 변화로부터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을 준비하며 (1)

필자는 대학 시절 선교 단체 활동을 하면서 몇 가지 비전을 세워 보았다. 그중에 하나는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막연한 것이었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신학 공부에 대한 매력이 컸다. 대학에서 다른 학문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신학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도 깊었지만, 그런 기회가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던 중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복음과상황>에 실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의 '성경 연구와 기독교 세계관' 과정 신입생 모집을 보는 순간, 뇌리에는 '이거구나' 하는 강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여러 상황들, 특히 직장과 가족들의 이해가 쉽지 않았지만 입학을 하게 되었고, 2006년부터 2년간 이 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다. 공적인 일로 하루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개근하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너무나 신나고 즐거운 신학 공부였다. 같은 동료 학생들 7명은 학문적 호기심과 그동안의 갈증을 풀어 놓았다. 교수님들이 골머리가 아플 정도의 질문과 열정은 학교의 분위기를 바꿔 놓은 듯하다. 물론 교수님들의 성의 있는 답변과 강의는 많은 변화를 이끌게 되었다. 그야말로 평신도 신학의 가능성을 보여준 시간이었다.

현직 판사, 의사, 경영인, 회사원, 목사, 전직 은행 지점장 등으로 구성된 반은 그야말로 사회에서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신학적 열정은 대학 신입생들과 같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학교가 봉천동에서 용인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더 이상 후배들을 키울 수 없었지만, 2년간의 과정을 통한 변화는 놀라왔다. 신앙적 회의를 느꼈던 현직 판사의 변화, 해외 전문인 선교를 지망하는 치과의사, 그동안 자본주의에 물들었던 전직 은행 지점장님의 변신 등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기독 시민 활동을 하던 나에게는 그 과정을 통해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되었고 신앙적 부흥의 일어났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과정이 학교가 용인으로 이사하고 나서 지원자가 없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점이다.

교회 개혁 운동을 한 지 8년 정도가 지났다. 교회 개혁 운동을 하면서 가장 큰 아쉬움은 교회 개혁 운동의 백그라운드가 되어줄 신학적 배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개 전투식인 교회 개혁의 자료들을 망라하고 교인들을 깨울 신학적인 강의가 필요성이 크다. 특별히 각 아카데미의 활성화로 많은 청년들의 변화는 이어지고 있으나, 특히 청장년층이나 중년층의 욕구를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중세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사회를 견인하지 못하고 하나님나라보다는 자본주의의 나라를 꿈꾸고 맘몬에 종속되어가고 있다. 특히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는 잘못된 신학과 이에 바탕을 둔 잘못된 가르침이 원인이 되고 있다. 공의와 정의보다는 출세와 부흥이 우선시되고 있고 이것이 교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신앙의 목표가 되고 있다. 말로만 하나님을 외치지만 마음은 세상적인 욕심이 우선시되고 있다. 교회는 규모가 크고 교인이 많을수록 큰 소리치고 칭송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이에 대한 신학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을 준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2009년도 명지대학교에서 열린 성서한국 전국대회를 통해서였다. 성서한국대회 강사진들과 얘기를 하던 중 대안적인 신학 교육 기관의 필요성에 대하여 동의하였고, 꾸준한 의견 교환이 이뤄지게 되었다. 2009년 말 기독 활동가들이 이 논의의 중심에 서서 과감히 일을 벌이기로 했고 강사진을 확보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되었다. 다행히 외형도 없고 재정적인 뒷받침을 약속할 수도 없었지만 기꺼이 여러분들이 헌신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평신도들의 신학 공부를 위한 터전이 없어 아쉬웠던 부분부터 채워질 수 있게 되었다.

느헤미야의 과정을 맛볼 수 있는 시범 프로그램인 신학 캠프를 준비한 것도 단순한 신학교 과정이 아닌 새롭게 태동하는 신학연구원의 강사진과 만나 2년 과정의 맛보기를 준비한 것이다. 기존에 수업 방식을 탈피하여 강사진과 생동력 있게 교류하는 시간을 만들고자 한다. 그동안 속으로만 삭혔던 고민과 한들을 풀어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 안에 잘못된 신학과 성경의 해석을 하나하나 고칠 수 있는 첫발을 내딛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상환 /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준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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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신학캠프2010 소개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2. 27. 13:47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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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복음과상황기사)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2. 15. 09: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개원, 원장 박득훈 목사를 만나다

   
▲ 신학연구원‘느헤미야’의 원장으로 내정된 박득훈 목사(언덕교회). ⓒ복음과상황 이종연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성서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권 활동가와 신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학연구원 느헤미야’가 그것.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개혁을 열망하며 뜻을 모아 온 이들은 지난 11월 중순 첫 모임을 갖고 느헤미야와 같은 진정한 개혁가를 양성하는 대안신학교의 장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신학을 기반으로 학제 간 연구를 통해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 목표다. 이곳에서는 목회자, 평신도라는 틀을 벗어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배울 수 있다. 복음주의권 신학 풍토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느헤미야’의 원장으로 내정된 박득훈 목사(언덕교회)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복음주의권 신학 교육 기관이 나오는 것이라고 봐도 되나요

예민한 질문이네요.(웃음) 요즘 ‘열린’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열린 복음주의’라고 하면 어떨까요. 복음주의의 전통과 기반을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끊임없이 진리에 대해 열린 추구를 하는 것이죠.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신학연구와 교육’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2000여 년 기독교 역사상 신학은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어요. 존경하는 루터나 칼뱅의 신학조차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거든요. 아무리 훌륭한 신학적 전통이라도 역사 발전과 함께 하나님의 성경적 계시의 이해가 깊어지기 때문에 수정될 여지가 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 복음주의’라는 것입니다.

‘열린 복음주의’와 성경은 어떤 관계인가요

복음주의의 핵심 슬로건 중 하나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의 자명성이 진지한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배제한 것이 아니었죠. 또한 어느 시대, 누가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했는가 하는 것은 열려 있는 질문이죠. 역사가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성경의 본뜻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신학은 발전되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열린 복음주의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고 새로운 사상이면 뭐든지 받아들이겠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어떤 해석 혹은 신학적 입장이 성경 본연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지 치열하게 탐구하면서 성경이 현재 복음주의 전통에 수정을 요구한다는 확신이 들면 얼마든지 수정할 용의가 있다는 점에서 이해해 주면 좋겠네요.

한국의 신학교가 말씀하신 부분을 지향하지 않았다고 보시나요

굳이 우리만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에 깊이 공감하는 신학자들과 기독운동가들이 ‘느헤미야’에 다양한 역할로 집결하게 되었다는 점에 그 독특성이 있다고 봅니다. 런던 바이블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전공분야가 서로 다르지만 신학교수들의 중심을 관통하는 일관적인 흐름이 있다는 것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회 정의에 대한 열망을 발견했을 때, 저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죠. 중요한 신학적 이슈와 관련해서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하거나 강조점이 다른 교수들에게 배울 때, 학생들은 과연 누가 옳은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가 일반 신학교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신학연구원을 만들게 된 배경부터 남다릅니다. 대안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신학연구원을 만들도록 자극한 사람이 기독운동가들이었어요. 이 점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출발점 자체가 신학자와 성도의 합작품 아닙니까. 아마 이것이 앞으로 우리 연구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봅니다. 신학자 중심주의, 사제 중심주의가 아니라 신학자․목회자․성도가 함께 연구원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는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비전과 사명이 새롭다고 할 수 있어요. 비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 사회 그리고 자연 등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나라를 구현해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 즉 목회자 중심의 교계를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함께 일하는 기독공동체로 전환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사명은 첫째,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교육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하여 성도를 위계적으로 차별하지 않고, 목회자 성도와 비목회자 성도가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함께 신학을 공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둘째,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입니다. 신학적 기반 위에서 학제 간 연구를 하려는 거죠. 신학과 일반 학문을 단순히 병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역동적으로 스며들게 하는 연구를 할 것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아야만 세상에 나가서 호소력 있는, 영향력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가령,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기독교적 언어와 일반적 언어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흑인인권운동에 대한 충분한 지지를 교회와 사회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거든요. 학제 간 연구란 바로 그런 실천적 인물 양성에 목적이 있음을 의미해요. 단순히 지적 엘리트를 길러 내려는 것이 아니에요. 일반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실현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을 키울 겁니다.

셋째로,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을 품고 그 비전과 가치에 따라 한국교회와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수 있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자도를 구현해나갈 수 있는 사람 말이죠.

하지만 강사진은 신학자 혹은 교수 아닌가요

현재로선 사실이지만 그렇게 우려는 하지 않아요. 언젠가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가 시민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자적 소양을 갖고 있는 운동가, 운동가적 소양을 갖고 있는 학자, 시민운동을 지지해 주는 후원자’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연구원 강사진은 말하자면 기독 운동가적 소양을 갖춘 신학자들입니다. 그분들은 학제 간 연구에 익숙한 분들이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학교를 만들어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 중엔 신학적 소양과 기독교적 영성을 잘 갖춘 기독 운동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학교 강의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도 강사진에 포함해서 공동으로 강의하고 연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거예요.

교회와 사회를 변혁시켜나가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 교육 목표라고 하셨는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교회와 사회에 깊이 침투해 있는 맘몬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맘몬에 친화적인 모든 것들을 혁파하는 데 그 일차적 목표가 있습니다. 덩치가 커져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맘몬의 가치와 전략이 교회와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덩치를 키우는 데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데 있어요.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가치대로 살아갈 때 덩치가 커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무능력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강압적으로 세상의 역사를 이끌지 않으십니다. 기다리고 상처를 받고 고통을 입으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규모를 확대하려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돼요. 오늘 신학교나 교회가 병든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덩치가 커져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맘몬의 논리에 속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따라 교회와 세상을 변혁해나가는 것은 우선 맘몬의 논리의 기만성과 위험성을 폭로하고 배격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나라를 펼쳐가는 진정한 힘은 ‘작은 밀알의 생명력’에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밀알로 땅에 떨어져 썩어 죽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역동적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맘몬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 세속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어떻게 변혁 가능하다고 보시는지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죠. 우선 세속 사회의 변혁자로 살아가려면 맘몬의 가치와 하나님나라 가치가 강력하게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견뎌 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 가면 그걸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요. 갈등 속에서 사는 게 힘들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없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충돌 속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참아 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경로를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형편과 은사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크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맘몬과 하나님이 일상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일터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일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혜롭게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맘몬의 질서와 타협하고 기다려야 하기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변질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며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일터를 박차고 나와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일터의 구조와 틀을 바꾸는 법을 만드는 정치인 혹은 시민운동가가 될 수도 있고 비록 근본적인 제도와 법을 바꿀 수는 없지만 틈새에서 대안적 일터를 스스로 만들어 갈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이런 길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구원받을 이의 특징 중 하나로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를 언급하고 있어요. ‘느헤미야’에서 이런 사람을 키워 내고 싶습니다. 외로운 광야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언덕이든,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영광임을 확신하고 그 길로 가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깊은 영성이거든요. ‘느헤미야’는 그런 영성을 길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신학의 양극화를 해소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으로 예상하지는 않나요

그럴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신학계나 교계의 주류가 되려는 의지나 욕망이 없습니다. 외로움을 각오하고 광야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며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데 초점이 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에 대해 크게 마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만의 특징을 구현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이들의 열정과 눈물 그리고 헌신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일으켜 주셔야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신학연구원의 실질적 운영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이 깊고 인격이 탁월한 실천적 지도자였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할 뿐 아니라 사회ㆍ경제적 개혁, 그리고 영적 갱신을 주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사장이며 신학자였던 에스라와 아름답게 동역을 하였던 느헤미야. 신학연구원 ‘느헤미야’의 노고와 기도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아름답게 변혁해 나갈 이들이 배출될 것을 기대한다. 

글 사진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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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실천연대 사경회 2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1. 30. 11:3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일시 : 2009년 11월 16일 장소 : 교회 다움 강사 : 정준경 목사 (뜨인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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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실천연대 사경회 동영상1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1. 30. 11:2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일시 : 2009년 11월 16일 장소 : 교회 다움 강사 : 정준경목사(뜨인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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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살다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9. 18. 18:3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거짓신앙에서 벗어나기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도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누가복음 3:7-14


제가 몇 분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이상림씨, 윤용현씨, 양회성씨, 이성수씨, 한대성씨. 들어본 적 있습니까? 전재숙씨, 유명숙씨, 김영덕씨, 권명숙씨, 신숙자씨.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앞서 불러드린 분들은 용산 참사로 숨진 철거민들입니다. 나중에 불러드린 분들은 그 분들의 아내죠. 그들은 지금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남편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이름이 여러분의 신앙과 나의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이해하는 성서한국운동은 바로 그런 질문에 바른 해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한국운동은 사회의 모든 영역이 성서의 토대위에 아름답게 세워진 한국을 의미합니다. 성서한국의 비전은 일제시대 양정 고등학교 교사였던 김교신 선생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은 그에게 조선이었죠. 하여 그는 성서조선의 비전을 품고 1927년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저는 창간사의 마지막 대목을 읽으면 여전히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성서조선>창간사 중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는 1942년에 폐간 당했습니다. 그러나 성서한국이란 화두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서한국을 이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회심’입니다. 회심의 깊은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나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1:15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역사 한 가운데로 뚫고 들어왔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는 아름다운 실재가 강력한 힘으로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것입니다. 회심이란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맞닥뜨리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된 삶으로부터 총체적으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펼쳐주신, 열어주신 새로운 삶의 세계로 과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죠. 두 가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아직 믿음은 없는 것 같지만 회개하는 순간에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했던 나의 삶에 대한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 없이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세례요한의 설교를 통해 회개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두 가지 질문을 갖고 생각하겠습니다. 누가 회개가 필요한가?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1.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7-9)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그런 사람에게만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왔던 사람, 성경을 잘 아는 사람, 주일 예배를 잘 지키는 사람, 헌금도 적당히 잘 내는 사람, 저처럼 설교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가장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본문 말씀 7절에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어떻게 세례를 받고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한테 “독사의 자식들아!” 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세례요한은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진정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심판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례요한이 세례를 준다. 그 세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길래 세례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왜 그들은 형식적으로 세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죠. 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8) 회개에 알 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거죠.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안전하다. 완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적당히 종교적 형식만 잘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나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오랫동안 찌들어 있었습니다. 무늬만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삶의 내용은 없었습니다. 짝퉁 물건을 명품 가방에 집어넣은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니 그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회개가 필요합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기준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삽니다. 겉으로 볼 때 무척 경건하지요. 성경읽기, 신앙서적 읽기, 기도하기, 헌금 및 십일조 드리기, 주일성수하기, 전도하기 등. 아주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신앙의 알맹이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돌들로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회개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렇게 쉽게 세상을 향해 ‘불신지옥’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말은 우리들 자신에게 먼저 돌려야 할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얼마 전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서 직업군 33개를 놓고 신뢰도 조사를 했습니다. 1등이 어떤 직업일까요? 소방관입니다. 2등은 간호사, 3등은 환경미화원입니다. 개신교 목사는 몇 등쯤 될까요? 25등입니다. 신부님은 11등, 승려는 18등. 꼴찌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언젠가 지하철 전동차에서 ‘어느 소방관의 기도’라는 짤막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A. W. Linn이라는 소방관이 직접 지은 기도시라고 하더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가 업무의 부름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시여/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나이와 상관없이/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너무 늦기 전에/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언제나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어/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저는 제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기 원하며/최선을 다해/저의 모든 이웃을 지키며/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길 원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저의 목숨을 잃어야만 한다면/부디 당신의 보호의 손길로/저의 자녀들과 아내를 축복하여 주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삶으로 실천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목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목사가 그럴 것이라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방관을 더 신뢰합니다. 그래서 소방관의 직업 신뢰도가 1등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회개가 필요합니까, 누가 먼저 회개하길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실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전도할 때 이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뜨뜻미지근합니다. 돌같이 굳어졌습니다. 느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아픔에 대한 눈물이 없습니다. 억울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도 같이 울어줄 줄을 모릅니다. 한참 시국선언이 진행될 때였습니다. 지난 6월 9일 젊은 작가들의 선언문에 담긴 한 대목이 제 가슴을 때렸습니다.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교회가 먼저 해야 할 말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가냘픈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교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주님이 쫓겨나서 너무 속상해서 ‘내가 다시 너와 있고 싶다. 들어가고 싶다. 문을 열어다오. 제발 문 좀 열어다오. 내가 너희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 불붙는 사랑을, 진리의 말씀을 너희들과 나누고 싶다. 너희들과 식사를 하듯 가깝게 교통하면서 나의 나라를 이 세상에 펼쳐가고 싶다. 문을 좀 열어다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누가 필요한 것입니까? 회개는 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우리 한국교회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에 대해 ‘95%는 참 괜찮은데 5%가 문제다’ 라고 변호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리석은 변명입니다. 잘못된 5%가 바로 교회지도층이라면 그들을 지도층으로 세운 95%도 역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좋은 점이 많이 있어보여도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이건 아니다’ 짚으신 것이 있으면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니고 있던 점검표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점검표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스스로 성적을 매겼습니다. ‘A+++입니다! 절기 잘 지키잖아요. 두 손 벌려 기도하잖아요. 십일조 잘 하잖아요. 절기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모이는데요!’ 그러나 하나님의 점검표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 가운데 있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진실로 안아주고 있느냐. 과부를 돌아봐주고 있느냐. 고아를 돌아봐주고 있느냐. 땅 잃은 사람을 돌아봐주고 있느냐. 외국에서 흘러들어와 힘겹게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감싸주고 있느냐?’ 우리가 스스로 만든 점검표에 따른 점수가 아무리 높은들 하나님 앞에선 휴지조각일 뿐입니다. 변명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입을 닫고 무릎을 꿇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일까요?

2. 진정한 회개(8, 10-14)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진정한 회개란 회개에 걸맞은 좋은 열매를 잘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점검표에 맞지 않는 삶을 구체적으로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도(道)를 따르는 사람들’로 불렸는데요(행 9:2; 19:9, 23; 22:4; 24:14, 22). 이는 기독교를 ‘道’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짐 월리스가 <회심>이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뭔가 살아가는 법이 우리와는 다르구나!’ 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경우 사람들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놀라운 삶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을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짐 월리스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는 전도할 때 야박하게 전도할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이야, 믿고 살래, 안 믿고 죽을래. 왜 이렇게 협박하는 전도를 할까? 그것은 그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삶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전도는 초대 교회처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나! 멋지다. 그 비밀이 어디 있나,’ 묻고 싶어져야 합니다. 그때 ‘아, 내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얼마나 멋지고 감동적이겠습니까? 그러나 보여줄 감동적 삶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진 않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다보니 ‘안 믿으면 죽어! 지옥 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삶 전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회개하면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이고 수직적인 만남을 떠 올립니다. 이웃 문제, 사회문제는 부차적인 단계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첫 순간부터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의 빛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용산에서 5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살았는데 하나님,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잘 된 것입니까?’ 물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묻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세례요한이 요구하는 회개의 실례를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무리들의 예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의 준엄한 경고에 가슴이 찔린 무리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이에 그는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답합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내가 지닌 것 중 남는 것으로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한 벌을 나눠 주어 그와 같이 나도 한 벌로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김규항 씨는 <예수전>에서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이렇게 설파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이른바 ‘나눔’에 대한 우리의 알량하고 가식적인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부모들은 제 아이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욕망을 ‘부자가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우라’는 식으로 우회하여 표현하곤 하는 것이다. …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지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 (109-110 쪽)

그러므로 그가 잘 말한 것처럼 진정한 나눔이란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깊이 파고들어온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소비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기복신앙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석훈 씨는 <괴물의 탄생>에서 설날이 되면 서로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형편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인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한국경제의 위대한 선택이라고 부르고 싶고’ 그 말을 아예 ‘마음속에서 지우는 순간, 그것을 대전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들부터 앞장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사랑해야 합니까? 절대로 기독교가 금욕주의를 가르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이 그 유일한 이유입니다. 지구촌에는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이 15억에 이르는데, 먹는 물을 하루에 몇 번씩 길어 오느라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우리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세상은 냉혹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필요한 소비에 자원을 동원하는 만큼, 지구촌의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갈 자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부에 대한 태도만 바로 잡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짐 월리스가 <회심>에서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마 6:21)’ 는 예수님의 말씀을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보물도 있다’ 로 바꿔서 이해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올바른 곳에 있는 한, 우리가 얼마나 많이 쓰느냐 혹은 우리가 얼마나 축적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데 총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자발적 가난 혹은 복음적 가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누리는 부의 양을 주려 소박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진실로 하나님나라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사적재산권에 대한 왜곡된 사고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희년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까워서 혹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원주인에게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입니까, 어긴 것입니까? 어긴 것입니다. 우리는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너무 자본주의식으로 해석합니다. ‘내가 땀 흘려 번 것은 내 꺼야! 내가 스스로 내어 주기 전에 그것을 누구도 건드리면 절대 안 돼! 그건 도적질이야!’ 그러나 ‘무엇이 도적질인가’ 하는 것은, 중미의 경제학자이며 신학자인 힌켈러머트(F. J. Hinkelammert)가 잘 밝힌 것처럼, 특정 사회가 인간의 삶과 권리 그리고 사회에 대하여 어떤 이상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누스(R. Gnuse)도 잘 지적한 것처럼, 성경이 보장해주는 사적재산권이란 부를 무한대로 축적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일원은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원을 소유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 도덕성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별도의 차원 즉 인격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한 사회가 이런 저런 그럴 듯한 사유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도적질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희년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눅 4:16-21).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선포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런대 그 전통이 왜 사라졌습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격되어 세속권력을 얻게 된 데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이 없는데 내가 여유분의 먹을 것을 갖고 있으면 그것이 도적질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진실한 관심을 잃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는데 매몰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자본주의식 사적재산권을 지키는데 앞장서는 대표적인 세력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선 소비주의와 기복신앙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우리의 잘못된 의식과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나눔의 정신을 몸에 익혀 소박한 삶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보호하기 원하시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고 있는 세상의 불의한 제도를 변혁시켜나가는 일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맺음말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며 조심해야할 두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멋진 길을 가고 있다’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우상입니다. 부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로 이 함정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제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직접 찾아가셨고, 부자들은 자기에게 찾아오게 하셨다’ 성경의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를 신랄하게 책망하시고 냉혹한 요구를 하셨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회개의 길은 걸어가면서 이 주님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함정은 절망입니다. 노동가요 중 ‘길 그 끝에 서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섰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 온 것처럼/ 눈앞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먼저 간 사람들의 빛을 따라 온 것처럼/이제 우리가 스스로 빛이 될 차례야…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새길 만한 노래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종종 길 끝에 서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기억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바른 길을 걸어온 증거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야말로 바로 길 끝에 서 계셨던 분임을 기억합시다. 그 순간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 끝에서 기꺼이 죽음의 잔을 삼키셨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셨음을 아셨습니다. 죽음으로 우리 앞에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 다 끝난 곳에서 정호승이 노래한 것처럼 스스로 ‘봄 길’이 되셨습니다. 이 주님을 늘 믿고 사모하면서 힘들다고 결코 뒤돌아서지 맙시다. 변절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서 꼭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부둥켜안고 울고 웃고 춤출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박득훈 목사 : 언덕교회 담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공동대표 
                 통일시대평화누리 공동대표

* 이 글은 2009년 성서한국전국대회 저녁집회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요약 : 오수경간사(학원복음화협의회)

:

1. 자살. 죽고 싶어 죽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 유명인들의 자살이 많아지면서, 자살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기 원한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도덕과 논리 이전에 정말 최악의 결과다. 너무 손쉬운 훈계처럼 결코 자살하는 당사자가 죽기를 좋아했기 때문도 아니고, 목숨을 경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정말 죽고 싶어 죽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2. 자살을 개인화시키지 말라.

자살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밑바탕에는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만 보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나 자살은 결코 개인의 일이 아니다. 확신컨대 모든 자살은 사회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살은 반드시 그 사회적 의미를 물어야 한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전태일의 분신까지 말할 수 있겠지만, 최근의 기억만으로 충분하다. 작년 10월 톱 탈랜트 최진실씨가 자살했다. 죽기 전 그는 동료 안재환 죽음의 원인제공자로 잘못 알려져 근거 없이 시달려 왔다. 물론 잘못된 루머를 퍼뜨린 사람은 진즉 잡혀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미 유포된 거짓들은 억측과 함께 숨겨진 진실처럼 커져만 갔고, 가능한 한 큰 파장만을 원하는 황색언론들은 한편에서는 최진실의 억울함을, 돌아서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식의 자가발전을 유도했다. 나는 확신컨대 만약 최진실이 죽지 않았다면 그런 식의 이중플레이는 지금도 계속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최진실의 죽음은 개인적 불행만이 아니다.

올해 3월에 자살한 장자연씨 사건은 더욱 허망하다. 그녀는 연예인 성상납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면서, 그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여기저기 큰소리들만 많았지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았고 ‘꽃보다 남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정치권도, 언론도, 심지어 동료들도 그저 개인적 불행으로만 기억하고 싶어 했다. 흔히 하는 말로, ‘죽은 놈만 불쌍하다.’ 죽음을 통한 호소조차 통하지 않으면 죽을 사람들은 더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장자연의 죽음도 그저 개인적 불행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좀 더 복잡하다. 정치적 지형이 급격히 나뉘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냐, 어떤 주장을 했느냐에 따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갈려 버리기에 처음부터 지지와 반대 이상을 넘어서기 참 힘들다. 그래도 고민해 보자.

지난 5월 목숨을 끊은 화물연대 광주지부장 박종태씨를 기억하는가?

풀리지 않는 비정규직제와 최저임금문제를 갖고 씨름하다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죽음을 보면서, 그가 살고 싶었던 세상도 알지 못하는 우리가 너무 쉽게 ‘자살은 죄다’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죽기 며칠 전 그는 유언처럼 10년을 같이 산 아내에게 이렇게 글을 남겼다.

“…잘 나가지도 못한 나에게 당신은 항상 힘이 되고 의지할 등받이였어. 못 먹고 못 입고 맘편히 나들이 한번 못가는 재미없는 10년 결혼 생활 견뎌줘서 고맙고 미안해.…항상 미안하다고 하면서 또 미안하다고 해야 할거 같애.…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나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사랑하는 수진씨 그럼 안녕…자기가 세상에서 최고야. 죽음의 문턱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당신은 나의 생애 최고의 여자요 친구였어. 박종태란 못난 남편을 빨리 잊어.…애들한테 말하고 싶은 게 진짜 많은데...시골에서 살고 싶었어. 나 진짜 농장하고 싶었거든.…”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과 가족들도 걱정했다.

“잘 놀아 주지도 못해 아빠가 안들어 오는 게 좋다며 장모님을 더 찾는 정하가 아예 아빠를 영영 잊어버릴까 두려워.…아빠가 없어 심심하다는 예쁜 혜주가 학교에서 기죽고 살지나 않을까 두려워. 항상 어머니 이상으로 미운 동생 뒷바라지 했던 누님이 쓰러지지 않을까, 큰형과 형수님이 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돼서 두려워.…혜주, 정하가 눈에 밟혀 뭐라고 애기하지? 정하야, 혜주야 아빠가 없더라도 기죽지 말고 엄마가 울지 않게 늘 엄마 곁에 있어야 한다. 엄마가 건강도 좋지 않은데 힘들지 않게 엄마 보살펴 줘야 된다. 항상 그랬지만 혜주하고 정하는 든든한 내 아이들이자 친구야.”

이렇게도 살고 싶었던 그에게 우리가 그저 “자살은 죄다. 생명을 존중하라”고 값싼 도덕적 훈계 따위나 날린다면 그게 어디 종교가 할 일인가? 한편에서는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는 ‘열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는 무지하게 살고 싶었다. 그것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백번 양보해 그의 정치적 견해가 부족해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해도 우리는 그저 ‘자살은 죄다’는 식의 빈껍데기 소리만 던져놓고 끝나서는 안 된다.

결국 전직 대통령까지 목숨을 끊었다.

나는 아직도 그의 5년 재임기간을 전부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친노든 반노든 중요한 것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선호도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전직 대통령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에 빠지게 되었는가하는 점이다. 또 이번 사태가 정말 정치적 타살이라고 볼 수 있다면 같은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우리사회는 어떻게 고쳐야할 것인지 깊이 고심해야 한다. 더구나 재임 중에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노 전 대통령이 죽은 후 이토록 추앙받는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결코 적지 않은 사회적, 신학적 숙제들이다.

그리고 강희남 목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게 결코 아니다. 자살할 작정을 한 사람은 어떻게든 일단 뜯어말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두고서는 그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남은 자들의 의무다. 그들이 살고 싶었고, 만들고 싶었던, 결국 목숨과 바꾸고 말았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는 1/10, 1/100도 모르면서, 얄팍한 도덕적 훈계나 율법주의적 신앙적 단정으로 개인화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미화할 생각도, 그들의 선택을 추앙할 생각도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왜 우리는 마땅히 살아 있어야 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지 못했는가이다. 그래서 남은 우리들은 함부로 그들을 정죄할 수 없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도 자기 생명 아까운 줄 몰라서, 생명을 경시해서 자살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경박한 교훈은 더 이상 하지 말자.

3. 그래도 산 사람의 생명은 지켜야 한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숨을 끊는 방법은 택하지 맙시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이 척박한 우리 노동현실과 서민들의 삶을 고발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80년대 수많은 젊은이들의 분신으로 이 땅의 민주화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최근에도 계속되는 희생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이제 정말 그만 돼야 한다.

80년대 거듭된 젊은이들의 희생을 목도하며 문익환 목사가 절규하였듯이 우리도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고 호소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부끄럽다. 그만큼 열심히 살아오지도 않았고, 목숨 걸고 헌신할 각오도 부족하기에 지극히 부끄럽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호소하자.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살인은 죄다. 그런 면에서 자기 목숨을 죽이는 자살도 살인이니 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틀린 점을 지적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뭔가 아쉽다.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창백한 훈계로 죽을 뻔 할 사람을 살릴 것 같지도 않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정말 죽음을 막고 싶다면 섣부른 훈계가 아니라, 머리 숙여 깊이 참회하고 눈물로 호소해야할 것이다. 세상 어떤 이들의 생명도 순교자나 열사라는 칭호, 그리고 정통신학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등에 쓸 모 없어 가는 자살 논란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강희남 목사의 죽음이 뒤따르자 예상대로 한국교회에는 때 아닌 자살논쟁이 한창 뜨겁다. 이러한 논쟁들은 단지 교회 울타리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 밖 세계에까지 펴졌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싸우는 시어미보다 말린다고 나타났지만, 더 미운 짓만 하는 시누이’처럼 보이는 것 같다. 죽을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없음은 물론, 죽은 사람은 욕보이고, 남은 유가족들에게는 염장을 지른다. 진정성이 보이지도 않는다.

우선, 자살은 죄인가 아닌가?

죄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두 다 죄’(롬 14:23/공동번역)라는 의미에서의 죄다. 그들의 죄가 더 나은 믿음이 아닌 비극적 표현으로 끝맺었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줄기차게 살아있기만 한, 그러면서도 단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신앙적 우월성을 누리려는 죄를 범하고 있다.

‘자살은 죄’라는 정죄함은 진지한 신학적 주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살하지 않은 나는 상대적 의인이라는 교만이 숨어있는 위선적 언어다.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죽은 그들을 훈계할 아무런 도덕적, 신학적 우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눅 13:1~4).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단지 질기게 살아남았다는 것이 무슨 자랑인가? 자살하지 않았다고 의인이 결코 아니다. 자살하지 않은 우리가 하등의 의로울 게 없다는 말이다.

둘째, 자살하면 지옥 가는가?

나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이 나도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지옥 가는 죄의 부류를 규정짓는 권세를 갖기 시작했는가? 성경에는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표현이 도무지 없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보면서 내린 내 결론은 이렇다. ‘살인은 큰 죄이고 자살도 살인이므로, 자살하면 지옥 간다.’ ‘가룟 유다를 포함해 성경에서 자살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큰 죄인들이었고, 그 결과 자살했기에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과 같다.’는 식의 목회자들의 자의적 해석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전해 들은 기독교인들의 입소문이 덧붙여져 이젠 마치 확실한 성경의 가르침처럼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살을 막기 위한 예방조처로서 과장을 부렸을 것이라는 이해도 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많은 경우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서도 지옥 운운하는 것을 볼 때는 저주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건 마치 ‘술, 담배를 하면 죄냐, 아니냐?’라는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술, 담배하면 가장 타락한 신자인 것처럼 여기고, 반대로 그것만 하지 않으면 마치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처럼 인정해 주는 엇나간 한국교회 윤리 수준을 보여주는 것과 흡사하다.

‘자살하면 지옥 가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면 자살하지 않으면 천국 가는가?’ 이것은 ‘내가 어떤 선행을 하면 천국 가는가?’(마 19:16)와 똑같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자주 자기 구원에 관해서는 무조건적인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행위의 문제로 착각하곤 한다. 거짓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고한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수고하는 데는 조금의 관심도 없으면서, 우리끼리만 생명을 존중하고 숭고한척 훈계하는 행위는 분명 위선이다.

5. 현학적 논쟁이 아닌 사람 살리는 능력을 기르는 기독교윤리여야 한다.

자살논란을 보면서 내가 정말 아쉬운 것은 생명을 살리려는 안타까운 진심은 별로 묻어나지 않은 채, 막연한 신학논쟁과 일방적 정죄만 난무하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우리 기독교윤리가 너무 얄팍하고, 일 터진 뒤 탁상공론이나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자주 받는다. 자살, 안락사 등은 사실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이미 죽겠다고 결심한 소수의 사람들을 뜯어 말리는 문제에는 이토록 관심이 많으면서도, 정작 조금의 관심만 있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는 너무도 무관심하다.

죽을병이 아닌데도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죽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강남 부자들의 회식비 정도도 안 되는 전세값이 없어 거리에서 전전하다가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 온갖 분쟁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학살당하는 무고한 어린이들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용산에서 원통하게 희생된 철거민 5명이 죽은 지 벌써 5달이 가깝지만, 아직 보상은 커녕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교회가 이들의 허망한 죽음에 대한 공분을 느끼고, 그 개선을 위해 개인화된 자살이나 안락사 문제만큼 열정을 보일 때 우리의 논쟁은 허망하지 않고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기독교윤리는 이미 죽은 사람 앞에 두고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이 계속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자살논쟁은 자칫 우리가 함께 붙잡아야할 사회적 책임은 손쉽게 떨어버리고, 문제를 온통 개인의 책임으로만 던져 놓는 말장난이 되기 쉽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 한국교회는 혼전순결운동을 열심히 벌이고 있다. 이는 성경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건강한 가정과 책임 있는 출산을 위해서도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건 아직 문제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갈수록 개방적 성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 개인적 혼전순결운동만으로는 뜻밖에 낙태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미 뜻하지 않은 임신(미성년, 강간 등)은 일어났는데, 일방적 정죄분위기만 존재하는 기독교 문화에서 기독교인이 출산을 생각한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문둥병자가 되는 것과 같은 차별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윤리는 아직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사람들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윤리가 아닌, 이미 문제가 터져 죽을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우선 살리는 윤리로 거듭나야 한다.

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지켰던 안식일 문제를 갖고 바리새인들과 죽기로 싸웠을까? 안식일 법을 비롯한 모든 율법은 본래 타락 이후 온갖 불의, 탈취, 억압이 세상에 난무하지만, 아름다웠던 창조의 그 날(출 31:14-17)과 해방절의 은혜(신 5:12-15)를 기억하면서 적어도 그 날만큼은 사회적 불의를 풀고 구속의 은혜를 함께 맛보는 공동체적 축제일이었다(신 16:9~17).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회기득권층이 된 종교지도자들은 자유와 해방에는 관심이 없고, 갈수록 더 복잡하고 어려운 율법조항들을 만들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일반백성들이 개인적으로 그 조항들을 얼마나 지키는지 감시하며 손쉽게 정죄를 일삼았다. 결국 안식일 규례는 본래의 법정신처럼 자유와 은혜, 공동체적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살리는 날’이 아니라, 더 속박되고, 더 배고픈 ‘죽이는 날’이 된 것이다(마 12:1~14). 주님이 사랑했던 백성들은 불편하고, 위선적인 종교기득권층만 호사를 누리는 안식일. 예수님께 그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불의한 제도였다. 지금 우리도, 우리가 그토록 자부하는 보수신학, 정통신앙이 서민들의 살 의지를 더 꺾고, 억압과 탈취에 눈이 먼 기득권자들을 더 격려하는 ‘죽이는 윤리’가 되지 않도록 깊이 고민해야 한다.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의인이라던 욥도 결국 믿음으로 이겨 실행해 옮기지는 않았지만 정말 죽고 싶었다(욥 3장). 자살자들이 속출하는 우리시대가 참 슬프다. 개인의 실존적 고민에 의한 것이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든 사실 나는 자살현상이 걱정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든 뜯어 말려야하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죄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유가족을 위로하고 그와 같은 비극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세상을 개혁해 나가는 게 주님이 바라시는 남은 자들의 몫이 아닐까? 우리가, 그리고 한국교회가 살아남은 자의 몫을 생각하면서 좀 더 겸손해지면 좋겠다.







구교형 목사 
(성서한국사무총장/교회개혁실천연대집행위원/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 이 글은 뉴스앤조이, 뉴스파워 등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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