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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의 모습 

마가복음 10:17-22에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토지를 포기하는 교회이다. 대토지 소유를 포기한 자들만이 소속되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교회이다. 평균이상의 토지가치 소유를 포기하지 않고 교회로 들어 온 자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징계를 받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이 교회에 소속하고 싶을 경우에 심히 슬퍼하며 근심하게 된다. 그들은 토지를 택하든지 예수를 택하든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0:21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이러한 교회를 이루도록 뜻하셨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음을 사도행전 2:43-47은 보여준다. 이러한 교회에는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으며,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표적과 기사가 사라지고 있으며,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부동산 투기를 할 때 교회도 부동산 투기를 하였기 때문이며, 세상 사람들이 토지를 탐할 때, 교인들도 토지를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물을 좋아하고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가 하나님의 것임을 잊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주신 토지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레위기 25:23)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웃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토지 투기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교회가 받는 벌은 성령께서 떠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표적도 기사도 사랑도 기쁨도 없으며, 오직 불신과 부패와 탐욕과 투쟁이 남을 뿐이다. 세상은 이러한 교회를 미워하게 되고 그러한 교회는 결국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다.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는 세상과 같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른 교회이다. 세상이 토지를 탐할 때, 토지를 버리는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은 어둡지만 교회는 밝아야 한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희생적이어야 하며, 밤이 깊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별빛처럼 정결해야 한다. 교회는 밤 같은 세상 속에서 함께 밤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동화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의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동화된다면 세상이 교회로 나아올 이유를 잃게 될 것이다. 교회는 결코 세상처럼 되어선 안 된다. 잠시 살기 위해 세상처럼 된 교회는 영원히 죽게 될 것이며, 고난을 받더라도 세상처럼 되지 않은 교회는 잠시 죽는 것 같으나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한국의 미래 

하나님은 지계표를 옮겨가며 남의 토지를 점령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셨다(미가 2:2-4).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남의 토지를 빼앗는 자들이 받는 벌은 그들의 땅이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동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빼앗아 넓힌 이스라엘의 대토지소유주들의 땅은 결국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로마에 빼앗겼다. 결국 나라를 잃고 땅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빼앗긴 땅에는 자유도 풍요도 없이 슬픈 애가만 남을 뿐이다. 빼앗긴 땅에는 과연 봄이 오는가? 봄이 와도 그 봄은 동일한 봄이 아니고 가을이 와도 그것은 동일한 가을이 아니다. 봄은 정복자들을 위해 고단히 일해야 하는 봄이며 가을은 정복자들에게 열매를 빼앗기는 가을이다.

한국이 부동산 투기 세력에 의해 멍들고 있을 때,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땅인 간도와 우리 민족의 역사인 고구려사와 고조선사를 빼앗고 있었다. 이제 중국은 유사시에 북한의 토지 전체를 차지하려고 넘보고 있으며, 일본은 독도를 침탈하려고 애쓰고 있다. 한국에서 국민이 국토에 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할 때에는 미가서의 예언대로 한국은 주변 나라에 의하여 그 영토를 빼앗기는 벌을 받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공의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며 온 국민이 국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된다면, 이 땅을 노리는 나라들이 오히려 지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받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웃의 토지를 소유하려는 야욕을 실행에 옮기려는 자들에 관하여 구약성서는 선언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한 나라의 영토 경계를 지키는 일은 한 나라 속의 토지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 나라 속에 이웃의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투기 세력들이 많이 있으면 그 나라의 영토 경계표도 이웃 나라에 의해 옮겨질 위험에 처한다. 로마가 망한 것은 자영농들의 토지 경계표들이 무너지고 대토지소유제가 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가 각각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망한 것도 토지 경계표가 옮겨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토지법이 무시되고 대토지소유제가 도입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에도 토지경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많으면 대한민국의 영토 경계표도 옮겨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 자신의 땅을 한 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누가 한국의 영토를 수호하려고 외적과 싸우겠는가? 그러므로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는 법과, 토지가 전 국민에게 골고루 소유될 수 있는 정책은 조국의 영토 수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 나라의 국방력은 곧 그 나라의 경제력에 비례하며, 나라의 경제력은 산업의 경쟁력에 비례하여 발전한다. 그러나 자본이 산업기술에 투자되는 대신 토지에 투기되는 나라에는 산업의 경쟁력이 생길 수 없다. 그러한 나라는 거품으로 인해 경제규모가 성장하는 듯하지만 그 거품이 꺼지는 날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품 경제를 키우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국가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이다. 따라서 이것은 영토를 수호할 힘을 잃게 하는 매국적인 정책이다. 조국의 영토의 경계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지키려면 부동산 투기 세력으로부터 이 땅을 보호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따라서 모든 국민은 국가의 영토에 관한 평등한 주권을 가진다. 이러한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진 나라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계제국 로마도 그러했으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마저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멸망했다. 대한민국의 영토 주권을 무너뜨리려 하는 이웃나라의 야욕 앞에 우리가 저항력을 키우는 길은 조국의 영토의 주권을 모든 국민이 누리는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국민이 가질 수 있는 평균치 이상의 토지가치 소유에 대해서는 적절한 과세가 이루어져야 한다. 토지의 경계표를 옮긴 사람들이 세금으로 대가를 치러야 국가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고 영토를 수호하는 재원도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애국자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고귀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예수를 따르는 자의 신성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국민의 약 1%가 민유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전체가구의 반가량이 한 조각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은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소수의 부자들이 전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1세기 로마제국의 상황과 유사하며,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킨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과 유사하다. 이처럼 토지 경계표를 무너뜨린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 오시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토지와 부동산을 많이 가진 자들이 세금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시면 무어라 하실까?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부동산 투기에 열심인 자들을 보면 무어라 하실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토지가 필요하여 보유하려거든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지재원으로 사용하도록 하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맺음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을 환영할 사람들이 교회로 모일 수 있고, 이 예수의 말씀에 슬퍼하여 예수를 떠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면 한국교회에는 미래가 있다. 또한 그러한 교회가 있는 사회에도 미래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암담한 것은 한국 사회에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빛을 잃고 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암담하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지만 그 정신은 이미 죽지는 않았는가? 죽은 시체와 같이 되어버린 교회들이 썩는 냄새가 세상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많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반대하고 있다.

이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이 아니면 이러한 교회에는 소망이 없다. “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교회는 나사로처럼 살 것이지만, 이를 거역하는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게 될 것이다. 예수냐, 토지냐의 선택은 교회에게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이다. 기독교는 토지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예수 없이 살 수 없다.

재물과 권력을 얻었지만 예수를 버린 기독교의 앞날은 불을 본 듯 분명하다. 그것은 멸망이다. 그러한 교회는 오히려 세상에 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 그러나 교회의 멸망은 세상이 기뻐할 일이 아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무엇으로 세상을 비추고 무엇으로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할 것인가? 구한말과 비슷한 시기를 맞이한 지금 이 민족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그 복음을 체화한 참된 교회가 필요하다. 그러한 교회들이 하나둘 늘어나지 않고 돈과 성장과 권력만을 좋아하는 교회만 늘어난다면 한국 기독교와 이 민족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이 사회에 남은 마지막 소망이다.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신음하며 기다리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교회의 등장이다. 이러한 교회가 등장하여 세상을 비추기를 온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이 한국을 가득 채울 때 한국은 동방의 찬란한 등불로 깨어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공의로운 나라가 될 것이다.

토지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교회가 앞장서서 따를 때, 한국 사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디자인한 노예 없는 사회, 헨리 조지가 꿈꾸던 토지가치세 복지사회, 손문이 소망하던 평균지권 사회, 자신의 토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산상수훈의 삶을 살려고 한 톨스토이가 염원하던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강대국들이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애국가 가사처럼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우하시는 나라가 될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명기 28:1, 7).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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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14) 역사적 예수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3. 30. 11:5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전승자들은 전통을 보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승 과정에는 전승자의 경향성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전승자의 경향성은 전통에 담긴 내용에 적용된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고 전승자의 신학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17-22은 본래의 전승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일 수도 있고, 마가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여 재해석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0:17-22에 담겨진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과연 역사적 예수께서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주신 내용을 그대로 담은 것일까? 

설명가능성 원리로 본 마가복음 10:21-22 

사도행전 2:45과 4:34-35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5:1-11에는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숨기고 바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벌을 받아 죽는 이야기가 기록된다. 누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일부러 창작하였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누가는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 마가복음 10:22을 부에 관한 것으로 바꾸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23). 이처럼 토지에 관한 마가복음 본문을 부 일반에 관한 것으로 변경한 누가가 토지에 관한 이야기를 창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바치지 않아서 벌을 받아 죽게 되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어려움은 이 이야기의 진정성의 표지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일을 행한 이유는 그들이 믿고 따른 예수의 가르침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내용이 있을 때 설명이 잘된다. 그러므로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한 마가복음 10:21-22의 내용은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유대교에의 비유사성 

토지의 소유가 소수에게 편중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린 사회를 배경으로 볼 때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마가복음 10:21)은 매우 적합하다. 이것은 그 시대에 마땅히 선포되어야할 메시지였다. 또한 이러한 메시지는 당시 유대인 권력자들이 싫어할 메시지였으므로 예수께서 그를 죽일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당하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그의 죽음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이므로 역사적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가의 전승경향성에의 비유사성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난해구절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2:5-7은 예수께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 용서를 하심을 기록하며, 마가복음 6:48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물 위를 걷는 일을 행하심을 기록한다. 마가복음 14:62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될 것과 하늘 구름을 타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듣기엔 신성모독으로 들렸다(마가복음 14:64). 그러므로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 이야기를 창작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마가 10:18은 역사적 진정성 때문에 보존되어 왔고, 그리하여 마가도 이것을 보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22에 사용된 ‘끄떼마따’(토지)는 과연 마가가 창작한 흔적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누가복음의 ‘쁠루시오스’(부유한)가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는가? ‘끄떼마’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단지 4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1번 사용된다. 한편 형용사 ‘쁠루시오스’는 신약성서에서 28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2번 사용된다. 70인역(외경제외)에서는 ‘끄떼마’가 7번, ‘플루시오스’가 31번 사용된다. 그러므로 ‘끄떼마’는 ‘쁠루시오스’보다 덜 친숙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더 친숙한 ‘쁠루시오스’(부유한)를 ‘끄떼마’(토지)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혹시, ‘끄떼마’(토지)가 아니라 ‘크레마’(재물)이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을까? ‘크레마’라는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10번 사용되었고, 신약성서에서 6번 (마가복음에서는 1번)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7번, 신약성서에서 4번 사용된 단어인 ‘끄떼마’보다는 더 친숙한 단어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크레마’를 일부러 상대적으로 덜 친숙한 ‘끄떼마’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마가가 10:22을 창작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만일 창작하였다면 마가는 그가 다른 곳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끄떼마’보다는 9번이나 사용한 ‘아그로스’(전토)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공관복음서 전승경향성에서 비유사성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예수는 “왜 나를 선하다고 부르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답한다(18절). 예수의 신성을 믿은 초대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일부러 만들어 내었을 리는 없다. 초대 교회의 전승 경향성은 마태복음에 반영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평행구절(19:17)에서 “왜 나에게 선함에 관하여 말하느냐? 오직 한분이 선한 분이시다.”라고 표현을 바꿈으로써 예수를 선하다고 부른 것을 부정하는 마가복음의 표현을 피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마태복음의 저자도 고치고 싶어 한 마가복음 10:18의 내용과 표현을 창작하였을 리 없다.

마가복음 10:19의 ‘사취하지 말라’는 마태복음(19:19)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절(18:20)에서 생략된다. 이것은 이것이 십계명에 속한 계명이 아니므로 십계명에 속한 계명들을 언급하는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일부러 십계명 목록의 중간에 십계명 중에 하나가 아닌 ‘사취하지 말라’를 추가하였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1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곧 이어 그 사람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지적되고(21절), 그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근심하여 떠나감이 묘사된다(22절). 결국 이렇게 행할 사람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때 예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의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져 생략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는 기록을 일부러 창작하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마가복음 10:21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네가 온전하려고 한다면”이라고 바꾼다.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는 마가복음의 신학이 너무 과격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고 믿고(마태복음 5:17) 이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5:19) 마태복음 저자에게마저도 과격하다고 여겨진 예수의 가르침이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마가복음 10:22도 전승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기보다는 역사적 진정성에 토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검증된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의 일치 

마가복음 10:17-22에 나타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토지제도를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면모이므로 이러한 면모에 일치하는 (많은 토지를 가진 자는 토지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는) 마가복음 10:21의 예수의 가르침도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0:9은 창세기 2:24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데,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10:9의 내용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증거는 우선 이 말씀이 많은 독립 자료들에 의해 지원받는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0-11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나누이지 말고, - 나누일지라도 재혼하지 않고 지내거나 남편과 재결합하라, - 남편은 아내를 이혼시키지 말라.” 이 말씀은 이혼을 금하는 점에서 이혼(법적 이혼) 내지 별거(사실상의 이혼)를 금하는 마가복음 10:9(“하나님께서 합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게 하라”)의 말씀의 내용과 일치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는 마가복음이 기록되기 전이었을 것이므로 고린도전서의 증거는 마가복음 10:9-12의 진정성을 지지한다.

예수 당시 유대교에 이혼을 완전히 금한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의 말씀은 당시 유대교에 의하여 쉽게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예수께서 미움을 받아 박해를 당할 수 있게 된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7:15은 믿지 않는 자가 이혼하고자 하면 이혼하라고 권하는데, 이것은 이방 기독교인의 경우에 배우자가 불신자일 경우 이혼이 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마가복음 10:9의 말씀이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9은 초기의 이방 기독교의 산물일 수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므로 마가복음 10:9은 마가의 창작이 아닐 것이다.

마태복음 19:9은 마가복음 10:11에 “음행으로 인하지 않고는”이라는 예외 조항을 추가한다. 이것은 마가복음 10:11이 너무 엄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배우자가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상황에서도 이혼을 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너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저자는 이러한 예외 조항을 추가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매우 철저한 유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마태복음에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마가복음 10:11이 마가나 초대 교회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가복음 10:9은 배우자를 이혼시키고 재혼한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부합한다. 세례 요한이 이러한 결합을 비판하고 죽임을 당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셨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마가복음 10:9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주어질 수 있는 말씀이다. 또한, 마가복음 10:9은 남편이 아내를 마음껏 이혼시킬 수 있었던 (불공평한) 당시 상황 속에서 주어질 수 있었던 말씀이다. 그러므로 당시 역사적 배경도 이 말씀의 진정성을 지원한다.

구약의 정신을 철저히 적용하는 마가복음 10:9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마가복음 10:17-22도 나타난 구약이 토지법의 정신이 철저하게 적용하므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회 배경에의 적합성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에서는 전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하는 귀족들이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통치 영역의 절반 이상의 땅을 소유하였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예를 들어 하르솜(Charson)의 아들 엘르아잘은 아버지로부터 1,000 개의 마을들을 상속받았다고 한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사도행전 4:36-37은 레위인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사도들에게 내어놓는다고 기록한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구약의 토지법이 어겨지고 있던 당시 사회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사람과 같이 십계명을 지키되 토지법은 어기는 유대인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미 토지의 균형적인 소유가 깨어진 사회 속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는 구약성서의 토지법을 어기고 있는 것에 관한 가책을 갖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가책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마가복음 10:20, 22은 당시 배경에 잘 들어맞는다.

맺음말 

마가복음 10:17-22은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 즉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본문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한 증거들을 검토해 볼 때, 이것은 마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예수를 믿든지 역사적 예수를 믿든지 예수를 따르고자 하면 토지에 관한 무한한 권리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를 포기하기는커녕 부동산에 대한 세금마저 내기 싫어하는 모습은 예수를 따르는 바른 모습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중에는 대토지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토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일 수 없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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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토지’로 번역하면 문맥에 맞는다는 것은 ‘재산’대신 ‘토지’를 번역어로 선택하기 위해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재산” 또는 “재물”이라는 의미도 마가복음 10:22의 문맥에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여 더 문맥에 잘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즉, ‘토지’란 번역을 선택하는 충분한 이유는 다른 번역 가능성들보다 ‘토지’란 번역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이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한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을 때, 강조점은 “팔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쪽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과 관련된다. 율법의 정신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은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명기 15:9-11).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러한 구약의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명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진 것을 팔라”는 예수의 말씀 앞에 부자가 항의 한 마디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율법이 허용하는 유동성 재산까지 처분하라고 하시는 것을 너무하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자는 왜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 하는지 예수께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가 갑자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그에게 단지 유동성 재산만 많았을 경우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많이 가진 것이 토지였을 때에는 그의 행동이 잘 설명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것은 명백하게 율법에 위배되기에 토지를 팔아서 처분하고 이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지적을 원칙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의 명령을 실천하느냐 못하느냐 인데 그는 토지에 관련된 율법의 요구를 적용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23절처럼 재물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까? 

그런데, 23절에는 재물, 부, 돈 등을 뜻하는 ‘크레마’의 복수형 ‘크레마따’가 등장한다. 23절 문맥도 ‘크레마따’가 토지를 뜻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크레마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반응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24절). 이로 미루어 보아 ‘크레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하는 구약의 토지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놀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3절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이 되려면 ‘크레마따’가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가리켜야 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 있었다.

물론 23절부터 재물에 관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토대하여 22절까지에서 다루어진 내용도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예수는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에게 그의 재물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을 수도 있다. 그가 재물을 포기하기 힘들어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보고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지적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읽을 경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으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일까? 물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율법 정신을 염두에 둘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28-29절에서 토지와 가옥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가고 유동성 재산이 이 목록에서 빠져 있는 것은 23절의 ‘재물’(크레마따)마저도 특별히 가옥과 토지를 염두에 둔 것이며, 25절의 ‘부자’도 토지를 많이 가진 부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과연 토지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을까? 

예수께 나아온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20절). 이러한 대답을 듣고 예수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구약성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법인 토지법을 어길 수 있었을까?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지킨다고 한 것은 18-19절에 언급된 계명들이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속여 취하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다. 이 사람은 이 계명들에 토지법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하였을 수도 있다.

토지법을 어긴 것은 도둑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토지법을 어겼다면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토지법을 어긴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을 수 있다.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대토지 소유가 도둑질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은 문맥상 앞에서 언급한 계명 또는 구약성서에 담긴 율법을 실천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킬 때 토지법까지도 잘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신 것(21절)도 그가 율법을 모두 잘 지켰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을 지킴에 헌신한 정도를 일단 인정해 주시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헌신을 하도록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에게만 사랑을 표현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 외에는 흠 없이 율법을 지킨 이 사람에게 얼마든지 사랑을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이다. 또한 사랑을 표현하시면서도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우도록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다.  

마가복음 10:17-31의 흐름 속에서의 토지와 재물 

마가복음 10:22에는 ‘끄떼마따’가 사용되고 23절에는 ‘크레마따’가 사용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는 토지를 다른 하나는 재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은 과연 본문을 일관성 있게 읽는 것인가? 22절의 ‘끄떼마따’를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하려면 이러한 의문도 해소하여야 한다.

23절에 ‘크레마따’를 사용한 것은 마가복음의 서사의 흐름 속에서 예기하지 못한 전환을 통해 놀라움을 자아내는 문학적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영생을 얻는 길을 율법, 특히 십계명에 관련시킨 후 십계명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부자에게 토지법을 지켜야 함을 지적하여 그를 놀라게 한다. 이어서 토지만이 아니라 부 일반의 소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토지법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제자들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침내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는 절망으로 제자들을 몰아간다(26절). 이 절망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에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이러한 절망 후에 반전이 도래한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7절). 이러한 흐름 속에서 22절은 “토지”에 관하여 23절은 “재물”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일관성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극적 효과를 낳는 문학적 기법으로 볼 수 있다.

28-31절의 말씀은 27절에 도입된 반전에 이어지는 위로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신다(27절). 그리하여 반드시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전토를 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29-30절). 여기서 재물 일반에 관한 가르침은 가옥, 전토 등의 부동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가족이 추가적으로 다루어진다. 복음에 반응하여 가옥이나 전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어놓고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마가복음의 독자들 중에는 이미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물한다. 

왜 좀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다면, 마가는 왜 더 명확한 용어대신에 이처럼 애매한 용어를 선택하였을까?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였다면 마가는 22절에서 얼마든지 30절에서처럼 ‘아그루스’(전토)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끄떼마따’처럼 토지나 재물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 애매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가가 이 단어를 “재물”이란 뜻으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만 ‘끄떼마따’는 우리에게 명확하지 않을 뿐이며, 마가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언제나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 그러므로 1세기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단어는 명확하게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볼 수 있다.

22절에 ‘아그루스’대신 ‘끄떼마따’가 쓰인 것은 23절에 등장하는 ‘크레마따’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운율을 위한 고려였을 수도 있고, 토지를 다루는 22절에서 재물을 다루는 23절로 매끄럽게 넘어가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토지를 가리키려면 22절에서 다른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는 설명은 이 단어가 “재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설명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재물”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이라, 문맥에 맞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따라 ‘끄떼마따’를 “재물”보다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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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12) 마가복음 10:22의 주해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2. 23. 16:5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친숙한 주해 

번역 성경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주석서를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보다는 “재물”을 접하게 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마가복음 10:22에 쓰인 헬라어 단어 ‘끄떼마따’가 “재산”이나 “재물”의 뜻을 가진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건드리(R. H. Gundry)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그 어원인 ‘끄따오마이’(획득하다) 동사에 관련시켜 “획득물”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획득물’은 물론 문맥에 따라 토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좀더 넓은 의미로 쓰여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재산’이란 단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네덜란드의 판 이어설(B. M. F. van Iersel)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도나휴와 해링턴(J. R. Donahue & D. J. Harrington)이나 에반스(C. A. Evans)의 이해도 동일하다. 후커(M. D. Hooker)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부”(wealth)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독일학자 그닐카(J. Gnilka)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소유”란 뜻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사본 필사자들이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듯이 성경주해자들도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많은 주해자들이 마가복음 10:22를 해석할 때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누가복음 18:23의 영향일 수 있다. 

“그 사람은 끄떼마따를 많이 소유하였으므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가복음 10:22, 사역).

그 사람은 큰 부자였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슬퍼하였다”(누가복음 18:23, 사역). 

사본학에서 친숙한 읽기가 원래의 읽기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듯이 주석학에서도 친숙한 주해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왜곡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본문을 주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서 본문을 주해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안경으로 본문을 보며 본문을 자신에게 친숙한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해자들의 경향을 벗어나려면 덜 친숙한 주해를 선택해야 한다. 많은 주해자들이 동의하는 친숙한 주해를 따르는 것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일 수는 있으나 학문적으로 바르지는 않다. 본문 주해에 있어서도 진리의 길은 좁아서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원문을 복원할 때 기계적으로 사본의 수를 따라가는 것이 위험하듯이 본문을 주해할 때 무조건 학자들의 수를 따라가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대신 독자들의 반응을 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덜 친숙한 주해 

주석가들 가운데에는 동료 주석가들이 빠져 있는 경향성을 벗어나 낯선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제안을 엉뚱한 소수 의견이라고 간주하지 말고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성경 주석가들은 언제나 주관적 경향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본문 연구를 통하여 독자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경향성을 극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반적인 경향성을 벗어나는 주해는 낯선 제안이며 한동안 소수 의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주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해를 하면서 주관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지만, 주관성을 많이 극복한 주해는 본문의 의미를 많이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없다면 주해 작업은 애초부터 무의미할 것이다. 개인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자들의 주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빠지는 공통적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창조적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에드워즈(J. R. Edwards)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또는 “소유지”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지적하면서 이 단어가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밝히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우트레흐트 대학 교수였던 발욘(J. M. S. Baljon)은 이미 20세기 초에 ‘끄떼마따’가 재물을 가리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이 단어가 특히 소유지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런데 테일러(V. Taylor)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소유지”를 가리키며, 따라서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그 사람은 지주임이 밝혀진다고 주장하였다. 레인(W. L. Lane)과 스웨테(H. B. Swete)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고 간주한다. 독일에서 페쉬(R. Pesch)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소유를 가리킨다고 간주하였고, 만(C. S. Mann)도 이 구절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중에서 특히 토지와 관련된다고 본다. 성서번역학자들 중에는 브랫처(R. G. Bratcher)와 나이다(E. A. Nida)가 ‘끄떼마따’가 일반적으로는 재산을, 특수하게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문화권에 따라 농장’이나 ‘가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해는 흔히 접하게 되는 주해들과 달리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해는 번역 성경의 영향을 받거나 통설의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학문적인 통찰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비유사한 예수의 모습을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영향에 의하며 채색된 모습이라고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예수의 모습이 전승된 이유는 그것이 진짜 예수의 모습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 원리는 주석학에도 다음과 같이 응용될 수 있다. 즉 주석학자들의 경향성에 상반된 주해는 성경저자의 의도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문맥을 통한 검증 

위에 제시한 주석학자들의 제안은 참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므로 참된 본문의 뜻을 드러내는 주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은 증거의 제시 없이 단지 주장된 것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과연 “토지”를 뜻할 수 있는 지는 단지 주장될 것이 아니라 검증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뜻은 그 문맥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할 때 문맥에 더욱 잘 맞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주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리는 문맥이다. 주해는 문맥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 나가는 학문적 작업이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가 가진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1절). 즉, 그가 슬퍼한 이유는 포기해야 하는 끄떼마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문맥에서 ‘끄떼마따’는 토지일 수도 있고 다른 유동성 재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팔아야만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토지나 집일 가능성이 높다. 유동성 재산, 즉 돈이나 보물이라면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의미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께서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명령할 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신 데에 있다(21절).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임이 19-20절을 살펴보면 곧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기에, 부족한 것은 율법 지킴과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끄떼마따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이유는 율법 준수와 관련되어 있다.

도대체 끄떼마따가 무엇이기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게 되는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율법은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을 따른 사람은 토지를 많이 가질 수 없었다. 소유지의 경계를 나타내는 토지 경계표를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자신의 토지와 이웃의 토지의 경계표를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이웃의 토지를 영구적으로 구입할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넓힐 수 없음을 뜻한다. 레위기의 토지법에 의하면 토지를 영구 매매하면 안 되고(레위기 25:23), 희년 때까지 임대할 수 있을 뿐이다(레위기 25:14-16, 28). 희년이 되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토지 경계표는 옮겨지지 않게 된다.

대토지 소유를 금하는 율법 조항은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레위기 25:23).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배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민수기 32장; 여호수아 13장 이하) 마땅히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땅을 많이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아합 왕의 땅과 교환하기를 거부한 것은(열왕기상 21:3) 이러한 토지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나봇의 시대에도 토지법은 나봇처럼 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었다. 아합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나봇의 거절 앞에 어찌할 수 없어 근심한 것은(열왕기상 21:4) 그 역시 토지법을 쉽사리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 여인 이세벨이나 이 토지법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토지법이 점점 더 어겨지게 되었고, 드디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마저도 토지법을 지키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토지법을 따르면 토지를 많이 가지게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많이” 가짐으로써 율법을 어기게 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토지였을 것이다. 조상이 율법을 어기고 취한 토지를 물려받아 소유하고 있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해도 그가 그러한 토지를 돌려줄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9절에서 버림의 목록에 ‘전토,’ ‘집’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지 않는 증거이다. 29-30절은 가옥이나 전토, 가족을 포기한 자가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21절은 가진 것들을 포기한 자가 하늘에서 보화를 받는다고 약속한다. 따라서 29-30절은 21절과 평행된다.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며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가질 것이다(21절, 사역).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 전토를 버린 자들 중에 ...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아무도 없다(29-30절, 사역). 

그리하여 21절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해진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이 언급하는 가옥, 가족, 전토에 평행된다. 그러므로 21절의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의 목록 중에서 팔 수 있는 가옥과 전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2절에서 그 부자에게 끄떼마따가 많았다고 할 때 그것은 가옥 내지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끄떼마따’는 용례상 가옥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문맥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게 한다. 

맺음말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하여 재물이나 재산이라고 해석되지만,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러한 소수의 의견은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므로 오히려 주해자들이 흔히 빠지는 경향성을 극복하고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주해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문맥을 통하여 검증된다.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문맥에 맞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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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11) 신약성서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2. 18. 12:3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에 등장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가 과연 토지를 뜻하는지 재물을 가리키는지 알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마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추측하기 위해서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끄떼마’의 용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가 읽은 성서는 신약성서가 아니라 구약성서였으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는 마가복음과 동시대(1세기)에 저술된 헬라어 작품들로 되어 있고, 모두 기독교인들의 작품이므로 이 작품들은 동일한 단어를 비교적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의 ‘끄떼마’의 뜻을 추측하기 위한 보조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끄떼마’는 네 번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0:22을 제외하면 마태복음 19:22, 사도행전 2:45; 5:1에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의 평행본문이다. 즉,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 2:45과 5:1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발생한 일들을 다룬다.

마태복음 19:22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그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역). 

‘끄떼마따’는 ‘끄떼마’의 복수형이다. 마태복음은 다른 곳에서 ‘끄떼마’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를 살펴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9:22의 문맥을 살펴보는 길밖에 없다.

본문에 의하면 젊은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간 이유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떼마따’를 많이 가져서 슬픈 이유는 예수께서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21절).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팔 수 있는 소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는데, 이 젊은이에게는 소유가 매우 많았고 이 말씀대로 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슬퍼하였을 것이다.

‘끄떼마따’가 팔 수 있는 소유라면 그것은 최소한 돈은 아니다. 돈은 파는 것이 아니라, 팔아서 받는 것이다. 팔 수 있는 소유는 돈 이외의 재물인데, 특히 토지이다. 팔아서 돈이 되는 것은 토지이기 때문이다. 귀금속이나 보석도 팔면 돈이 되지만 이러한 것은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팔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아마도 토지를 가리킨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 주어진 맥락은 율법을 지킴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는데(17절), 이 계명들은 특히 10계명 중 5~9계명과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18-19절). “온전하고자 할진대” (즉 이러한 계명들을 온전하게 지키기 원한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젊은이의 질문과 관련된다. 이 질문은 “이 모든 것” 즉 앞에 언급된 계명들을 지켰는데 아직 어떤 점에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지 묻는 것이다. 이 부족함을 채우고 온전하게 계명들을 지키기 위한 방도로 제시된 것이 바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특히 염두에 두어진 계명은 앞에 제시된 계명들 중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게 재물이 많고 이웃이 가난할 때 나의 재물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많은 토지를 가지면 분깃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율법은 토지의 경계표를 이동시키는 것을 금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나의 토지를 넓히고 이웃의 토지를 좁히는 행위, 즉 경계표를 옮기는 행위는 저주를 받을 행위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더더구나 토지를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사도행전 2:45 

또 그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아 그것들을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았다. 여기서 ‘끄떼마따’는 팔아야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최소한 돈이 아니다. 또한 ‘끄떼마따’는 ‘소유’와 구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진 두 가지 뜻 “소유,” “토지” 중에서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4:34-35은 사도행전 2:45과 평행을 이루며 예루살렘 성도들이 판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들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토지나 가옥을 소유한 자들은 누구든지 그것들을 팔아서 그 판 것들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수의 제자들이 판 것은 토지나 가옥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토지나 가옥을 가진 자는 이것들을 팔았고,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가난한 자는 토지나 가옥을 판 값을 나누어받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45에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리킬 수 있는 “토지,” “소유” 중에서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토지를 판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복음 19:21; 마가복음 10:21)고 명하셨는데, 제자들은 토지나 가옥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이 명령을 지킨 것이다. 왜 하필 토지나 가옥을 팔았을까? 예수께서 소유를 팔라고 명하셨을 때 이것들을 팔도록 의도하셨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다. 이 명령을 최초로 들은 사람은 이 명령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제자들이 토지와 가옥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예수께서 원하신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 공동체 속에서는 구약성서가 명하는 토지법이 준행되어 사람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지 않으며, 예수의 토지반환명령이 준행되어 지계표를 넘어 확장한 토지가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진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34-35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교회들의 모델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기를 부정하는 것은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유학시절에 동구권 신학생들이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열심히 분배를 행하다가 결국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체제 속에서 그들이 경험한 가난이 그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읽게 했다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그들의 해석은 예루살렘 교회의 행함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임을 알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행하다가 가난해진다면 그러한 가난을 감수해야 한다. 교회의 목표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의 명령을 따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나 모세의 토지법을 지킨 구약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 소유하는 평균지권사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이러한 성서적인 사회 체제를 공산사회라고 비판하는 것은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사회와 모든 개인이 생산수단을 평등하게 소유하는 성서적 사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또한 공산주의가 싫어서 사도행전 교회를 부정하고 구약의 토지법도 부정하는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성경이나 예수보다 더 높이는 우상숭배적인 태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성경과 예수보다 더 높아져 있다. 그들은 성경과 예수를 지극히 자본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면 예수의 명령마저도 ‘율법’이라고 부르거나 우리와는 관계없는 명령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이다. 마치 소가 농부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기독교는 본래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는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재앙일 뿐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탈을 쓴 바알의 종교일 뿐이다. 소가 풀을 먹지 않고 동물성 사료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리듯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 다른 것을 먹고 살 때에는 광교회병에 걸리게 된다. 소가 풀을 먹고 살아야 하듯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5:1 

그런데 이름이 아나니아인 어떤 남자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끄떼마를 팔았다(사역). 

사도행전 5:1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팔았다고 한다. 이 ‘끄떼마’가 무엇인지는 근접문맥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사도행전 5:1의 직전에는 바나바가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기사가 나온다(4:36-37). 즉 바나바는 사도행전 4:34-35에 언급된 토지나 가옥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바나바는 레위인이었으며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지계표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레위기 25:23-28을 어기어 토지를 (임대하지 않고) 매매하고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내어 놓은 것은 조상이나 자신이 율법을 어긴 잘못을 회개한 것이다. 이러한 바나바의 행동에 이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판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의 행동을 흉내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끄떼마’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토지는 약간의 토지였을 것이다. ‘끄떼마’라는 단어가 단수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넓은 토지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2:45이나 마가복음 10:22; 마태복음 19:22에서처럼 복수형 ‘끄떼마따’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5:2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를 판 값의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음을 언급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아마도 그들이 가진 토지의 일부만을 처분하고 그 값 중에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이 문제되지 않고 토지를 판 값의 일부를 감춘 것이 지적된다(사도행전 5:3).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은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는 부분(기업)을 제외한 토지를 판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업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비판받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업을 초과하는 토지(즉 평균지권이 허용하는 토지가치 이상의 토지 소유, 또는 토지 경계표를 넘어서 확장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문제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토지를 처분하여 일부를 바치고 일부를 숨기는 것은 큰 잘못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의 일부를 팔아 바친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한 것이므로 선행이 아니며, 그들이 판 값 중에 일부를 바치지 않은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므로 악행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사도행전 5:5, 10) 그러한 악행에 대한 벌이었다.

사도행전 5:3에서 베드로는 ‘땅 값’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을 언급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팔았다고 하는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킴을 분명히 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신약성서의 다른 곳들에서 사용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끄떼마’는 이 곳들에서 언제나 토지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이 드러났다.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키지 않음이 명확한 곳은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도 ‘끄떼마’라는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추측하게 한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만이 독특하게 ‘끄떼마’에 토지라는 뜻보다는 재물이나 소유라는 뜻을 담아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기독교인들이 한결같이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의 저자도 이 단어를 그러한 뜻으로 사용하였으리라고 추측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2에 나오는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예수의 명령을 듣고 근심하며 간 그 사람은 재물 중에서도 토지를 많이 가진 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예수의 명령(마가복음 10:21)은 사실상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들이 이 명령을 듣고 근심하게 되어야 이 말씀이 제대로 이해된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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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10) 구약 70인역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1. 24. 14:3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단어의 뜻과 용례

한 단어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의 용례를 관찰하여야 한다. 특히 동일한 저자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하여야 한다. 한 단어는 불변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사용자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의미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마가복음의 저자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하여야 한다. 사전을 보고 이 단어의 뜻이 ‘토지’라고 하거나 ‘재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것이다. 사전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아니라 저자의 용례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끄떼마’는 마가복음에서는 10:22에 한 번 등장한다. 또한 마가복음의 저자가 쓴 작품이 마가복음 이외에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으므로 마가복음의 저자가 ‘끄떼마’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였는지 관찰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 차선책은 마가복음의 저자가 읽었던 문헌들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가 읽었던 문헌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번역인 70인역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 인용된 구약본문들이 70인역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이 구약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부분들을 관찰해 보면(1:2, 3; 7:6-7, 10; 10:19; 11:17; 12:10-11, 19, 26, 29, 30, 31, 32, 36), 이 부분에 사용된 206 단어 중에 178 단어가 70인역과 그 형태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비교를 위하여 편의상 네스틀레-알란트 27판의 마가복음 본문과 A. Rahlfs가 편집한 Septuaginta,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35]의 본문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86.4 %의 일치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에 입각하여 마가복음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70인역에서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가 70인역을 인용하였다면 이것은 그가 평소에 70인역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70인역에 사용된 헬라어 용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끄떼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 단어가 70인역에서 가지는 의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70인역에서 ‘끄떼마’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관찰하여 그 단어가 마가복음에서 어떠한 뜻을 가질 수 있는지 추측할 수 있다.

70인역과 끄떼마

70인역에서 ‘끄떼마’는 잠언 12:27; 23:10; 31:16; 욥기 20:29; 27:13; 호세아 2:17; 요엘 1:11에서 사용되었다. ‘끄떼마’의 뜻은 우선 히브리어 구약 성경과 비교하여 파악될 수 있다. 70인역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70인역의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성경 본문과 동일한 본문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70인역의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성경 본문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본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성경 본문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70인역 번역자들이 그들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에 어떠한 뜻으로 사용하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히브리어 본문으로는 맛소라 본문을 담은 BHS 본문을 편의상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70인역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구약 본문과 BHS 본문이 서로 동일하다고 간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70인역을 읽는 독자들이 70인역을 읽으면서 히브리어 성경과 비교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70인역의 독자의 하나로서의 마가복음 저자도 70인역에 사용된 ‘끄떼마’의 의미를 히브리어 성경과 비교하여 파악하기 보다는 70인역의 자체 문맥 속에서 파악하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끄떼마’가 사용된 70인역의 문맥이 이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70인역에 담긴 ‘끄떼마’의 의미가 아니라 70인역의 독자로서의 마가가 사용한 ‘끄떼마’의 의미를 찾는 것이 목적이므로 70인역 문맥의 관찰은 더더구나 중요하다.

잠언 23:10

70인역 잠언 23:10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성경 잠언 23:10의 ‘사데’(토지)에 해당한다. 70인역 잠언 23:10의 번역자는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생각하였기에 토지를 뜻하는 ‘사데’를 ‘끄떼마’로 번역하였을 것이다.

또한, 70인역 잠언 23:10의 독자는 문맥을 통해서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70인역 잠언 23:10은 다음과 같다.

영원한 경계들을 변경시키지 말고

고아의 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

여기에서 ‘끄떼마’는 ‘경계’(호리아)에 평행된다. ‘영원한 경계’란 조상대대로 기업으로 내려오는 토지의 경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토지의 경계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7:17을 배경으로 한다. 70인역 신명기 27:17은 이웃의 ‘경계’(호리아)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토지의 경계를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희년이 되면 토지가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레위기 25장의 토지법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70인역을 읽는 독자들은 잠언 23:10에서 ‘끄떼마’를 토지의 경계를 뜻하는 ‘호리아’와 관련시켜서 재물이 아니라 토지를 뜻하는 말로 이해하게 될 수 있다. 또한 ‘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는 표현은 ‘끄떼마’가 재물이 아니라 토지를 가리킴을 분명하게 해 준다. 마가복음의 저자도 70인역을 읽었다면 ‘끄떼마’의 의미를 그렇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잠언 31:16

잠언 31:16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케렘’(포도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재물보다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잠언 31:16의 70인역 문맥도 ‘끄떼마’가 토지라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려준다. 70인역 잠언 31:16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농토를 보고 구입한 후에 그녀의 손의 열매로부터 끄떼마에 심었다.

농토를 구입한 후에 끄떼마에 심었다면 ‘끄떼마’는 농토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호세아 2:17

70인역 호세아 2:17에서 ‘끄떼마따’는 히브리어 본문의 ‘케렘’(포도원)에 대응한다. 따라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70인역 자체의 문맥도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께서 ‘끄떼마따’를 주신다는 맥락이다(“내가 그에게 끄떼마따를 줄 것이다”). 출애굽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가나안 땅이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요엘 1:11

요엘 1:11에서 ‘끄떼마따’는 히브리어 본문의 ‘코르밈’(포도원들)에 해당한다. 또한 70인역 요엘 1:11은 “추수를 망쳤기 때문에 끄떼마따를 위하여 슬퍼하라”는 내용이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추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농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욥기 20:29

욥기 20:29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나할라’(기업, 분깃)에 해당한다. ‘나할라’는 일차적으로 상속 재산을 가리키는데 상속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토지였다(민 26:53; 33:54; 신 4:21; 수 11:23; 13:6; 시 105:11; 겔 47:14; 48:29 참조). 그러므로 이 단어에 대응하는 ‘끄떼마’는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 70인역 욥기 20:29의 문맥 내에서 보면 ‘끄떼마’는 ‘분깃’에 평행된다.

이것은 불경건한 사람이 주로부터 받는 분깃이며

감찰자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소유들 가운데 끄떼마이다.

‘분깃’은 이스라엘 각 집이 분배받은 분깃(몫)으로서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민 18:20; 수 14:4; 18:5). 그런데, 욥기 20:29에서 ‘끄떼마’는 하나님의 보응을 가리키기 위해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유적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속 재산으로서의 토지를 가리키는 1차적 의미를 토대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욥기 20:29에서의 ‘끄떼마’의 용례는 이 단어가 1차적으로 토지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음을 알려준다.

욥기 27:13

욥기 27:13에서도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나할라’(기업, inheritance)에 대응한다. 또한 70인역 문맥에서 ‘끄떼마’는 ‘분깃’에 평행된다.

이것은 불경건한 사람이 주로부터 받는 분깃이며,

전능자로부터 권력자들에게 끄떼마가 임할 것이다.

여기서 ‘끄떼마’는 이스라엘 각 집이 분배받은 분깃으로서의 토지를 염두에 두고 쓰였다. 물론 근접 문맥 속에서 이 단어는 비유적 의미(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보응)를 가진다. 그렇지만 비유되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서의 토지에 비유되었다. 이러한 비유는 ‘끄떼마’가 1차적으로 토지를 가리킬 때 가능하다.

맺음말

70인역에서 사용된 ‘끄떼마’라는 단어는 대개 토지를 가리키거나 토지라는 구체적 개념을 기초로 형성된 추상적 개념을 가진다. 70인역에서 ‘끄떼마’가 토지를 의미하지 않는 본문은 잠언 12:27뿐이다. 잠언 12:27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혼’(부)에 대응하고 문맥상으로도 ‘토지’를 뜻한다고 볼 근거가 없으므로 부(wealth)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끄떼마’가 70인역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토지를 가리킨다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70인역을 읽으면서 ‘끄떼마’가 토지를 뜻하는 단어임을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마가복음을 기록하며 ‘끄떼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도 이 단어에 “토지”라는 뜻을 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라는 단어의 의미를 해석할 때, 우리는 마가복음의 독자들이 이 단어를 “재물”을 뜻한다고 간주해온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마가복음의 저자가 이 단어를 사용하며 의도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토지”라는 의미의 정당성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독자들의 함성에 의해 묻혀진 저자의 세미한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독자들은 저자가 아무리 작은 소리로 말한다고 할지라도 저자가 말하기 시작하면 침묵하여야 한다. 저자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수천년의 거리에 떨어진 우리가 분간할 수 없을 때에는 저자에게 확성기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70인역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위하여 그러한 확성기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재물’인지 ‘토지’인지 분간되지 않던 세미한 음성이 70인역이라는 확성기를 통과할 때 ‘토지’라고 크게 들려지게 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예수와토지법9)사본학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0. 19. 15: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과 사본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라는 헬라어를 담고 있으며 이것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모든 사본들이 일치하여 이 헬라어 단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저술하여 출판한 이후에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을 필사를 하여 전수할 때, 모든 필사자들이 마가복음의 원문을 있는 그대로 필사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필사자들에 의하여 마가복음 본문이 필사되어 전수되는 가운데 어떤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의 본문을 변경하였다. 그렇게 변경된 본문은 또 다른 필사자들에 의하여 필사되어 전수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 사본들을 비교하여 원래의 본문을 복원하는 작업을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하는데, 편의상 이를 사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많은 사본들에 ‘끄떼마따 뽈라,’ 즉 ‘넓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 담겨 있지만, 서방 사본들에는 다른 표현들이 발견된다.

(1) 끄떼마따 뽈라 나머지 사본들

(2) 뽈라 크레마따베자사본, 고대 라틴어 역본

(3)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 클레멘트

베자 사본과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서방 사본들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대 라틴어 역본들이 로마제국의 서방 지역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은 칼빈의 제자인 베자가 소장하고 있다가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 기증한 사본으로서 지금 켐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에는 마가복음 10:22에서 ‘뽈라 크레마따’ 또는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많은 재산’이라고 번역된다. ‘크레마따’는 ‘크레마’의 복수형이며, ‘크레마’는 ‘재산,’ ‘부,’ ‘돈’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37에서 ‘크레마’는 토지를 팔고 받은 돈을 가리킨다.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값’이라고 번역하였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다니엘 11:28도 ‘크레마’가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많은 ‘크레마’를 가지고 그의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가 아니라 돈이나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

만일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가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면 이것은 ‘토지’로 번역되기보다는 ‘재산’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끄떼마따’가 원래 마가복음 10:22에 담겨 있지 않았다면 ‘토지’라는 번역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에서 ‘재산’이 옳은 번역인지 ‘토지’가 옳은 번역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와 대부분의 사본들에 담긴 ‘끄떼마따’ 중에서 어느 것이 마가복음이 원래 가진 표현인지 검토하여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마가복음 인용에는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많은 재산과 전토)라고 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 중에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은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을 가진다. 이것은 위의 (3)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이것은 아마도 (2)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2)의 ‘크레마따’는 토지를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필사자들은 ‘까이 아그루스’(~와 전토)를 추가하여 토지가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3)은 (2)의 ‘뽈라 크레마따’(많은 재산)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그것의 기원인 (2)를 지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서방 사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본들은 (1) 즉 ‘끄떼마따 뽈라’를 지원한다. 더구나 고대 라틴어 역본들 중에 일부(f, q)는 마가복음 10:22에서 divitias(부) multas(큰)라는 표현을 가지는데 이것은 (1)의 어순에 일치하므로 (1)을 지원한다. 많은 사본들에서 (1)이 발견된다고 (1)이 원래 마가복음 10:22에 있던 표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1)을 담은 많은 사본들 중에는 매우 오래된(4 세기) 사본이면서 우수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들이 있으므로 (1)이 원래의 것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본들도 언제나 원문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증거를 좀더 수집해야 한다.

마태복음 19:22의 영향인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인가?

마태복음 19:22에는 마가복음 10:22와 유사한 본문이 발견된다. 동일한 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인데, 마태복음 19:22도 ‘끄떼마따 뽈라’란 표현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1) 즉 ‘끄떼마따 뽈라’가 마태복음의 영향에 의하여 발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한 변화를 사본학자들은 조화(harmoniz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원래부터 마가복음에 일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마가복음을 마태복음 저자가 자료로 사용하였다는 가설(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가능성을 더더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설에 입각하면 마태복음의 ‘끄떼마따 뽈라’는 마가복음의 ‘끄떼마따 뽈라’에서 그대로 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마가복음과 본래부터 일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많은 곳에서 문자적 일치를 보이므로 이곳에서도 그러한 일치가 본래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이 마태복음 19:22의 표현과 동일한 표현이라는 이유만으로 (1)은 마태복음의 영향을 받아 조화된 것이라고 단정하여 이것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 아니라고 판단할 개연성이 없다. 더구나 (2)의 ‘크레마따’가 바로 다음 절(막 10:23)에 나오는 ‘크레마따’의 영향으로 동일하게 변화된 결과일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1)이 마태복음 10:22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은 (2)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다.

마가복음의 문체가 주는 증거

성경의 각권은 저자에 따라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책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사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듯이 성경도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다. 마가복음이 가지는 독특한 문체도 성경의 인성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은 ‘뽈라’(많은)라는 단어가 명사를 꾸며주기 위해 사용될 경우에 언제나 예외 없이 그것이 수식하는 명사 뒤에 위치시킨다(1:34; 4:2; 6:13; 7:4, 13).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세 가지 표현들 중에서 이러한 마가복음의 문체에 일치하는 표현은 (1)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성경 독자의 경향성

(1)이 마가복음 10:22에 담긴 원래적 표현이라면 이것은 ‘넓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번역 성경들이 한결같이 ‘많은 재산’에 해당하는 번역만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가복음 10:22의 번역자들은 (1)을 원문으로 택하였어도 그 의미를 (2)처럼 이해하여 번역하였다. (1)을 원문으로 택한 네스틀레-알란트 27판이나 UBS 4판의 본문을 눈앞에 두고 번역자들이 이를 (2)처럼 번역한 것은 (1)을 담은 원본이나 사본을 눈앞에 두고 필사자들이 이것을 (2)로 고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필사자들의 경향성과 번역자들의 경향성은 서로 일치하기도 한다.

필사자나 번역자나 모두 성경 독자의 일종이므로 이들은 서로 유사한 경향성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어떠한 경향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대의 필사자들의 경향성을 살펴봄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필사자들이 어떤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변경시켰는가를 관찰해 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그 구절을 어떻게 곡해할 수 있는 지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추측을 토대로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성을 조심하며 본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비유사성의 원리와 성경 본문 이해

독자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을 저자의 의도대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고의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곡해하기도 한다.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의미를 곡해하는 독자들의 경향성을 극복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독자들의 경향성은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필사자들의 본문 변경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일단 독자들의 경향성이 파악되면 “비유사성 원리”를 통해서 본문의 본래적 의미 파악을 시도할 수 있다. “비유사성 원리”(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되는 방법론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 발생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원리이다. 초대교회의 전승 경향에 유사한 예수 전승의 경우에는 그 역사적 진정성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초대교회는 그 경향성에 유사한 예수의 말씀을 왜곡함 없이 전승하였을 것이지만, 그 경향성에 유사하지 않은 말씀은 때로 그 경향성에 맞게 소화하여 전승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가능성이지만 이 가능성 때문에 초대교회의 경향성에 유사한 전승들은 그 진정성이 의심될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경향성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들은 초대교회가 지어낸 전승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비일치하는)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론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비유사성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는 성경의 독자들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비유사한 해석을 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독자들의 주관성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다. 비유사성의 원리에 따르면, 사본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마가복음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마가복음 해석은 독자의 주관성에 의해 왜곡된 본문 해석일 가능성이 비교적 낮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마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지는 마가복음의 용례와 문맥에 맞는지 검토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비유사성 원리는 성경 이해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지만 이해된 내용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방법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필사자들이 “토지”를 가리킬 수 있는 ‘끄떼마따’를 “재물”을 뜻하는 ‘크레마따’로 바꾸어 읽은 것은 오늘날의 성경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경향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고한다. 비유사성 원리를 따라 이러한 경향성을 조심하면서 그 경향성에 역행하여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읽으면 이것은 “토지”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본문 이해가 과연 정확한지는 용례와 문맥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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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7)교회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9. 7. 16:17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교회와 토지

마가복음 10:29-30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주택이나 가족, 토지를 포기한 자에게 백 배의 주택과 가족, 토지가 주어질 것을 약속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마치 한 알의 씨앗이 100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마가복음 4:8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가 되었느니라.”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싹이 터서 100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마치 이처럼 한 채의 집을 포기하면 100 채의 집을 얻게 되고, 한 평의 땅을 포기할 때 100 평의 땅을 얻게 된다. 한 사람의 가족을 포기할 때에는 100 명의 가족을 얻게 된다. 부활 이후가 아니라 현세에 그렇게 된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그런데 이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가능해 지는 기적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야말로 한 알의 씨앗이 100 배의 결실을 맺는 기적의 장소이다.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가? 교회는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므로 교회에서 이러한 기적이 이루어진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자식(‘떼끄논’)이라고 부르고,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로마서 16:13). 초기 기독교인들은 서로 형제, 자매라 불렀다. 이처럼 ‘어머니,’ ‘형제,’ ‘자매’라고 부른 것은 서로 서로를 가족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를 믿기 위해 가족과 결별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인 교회에서 100 배의 가족을 얻는다.

포기되는 목록 중에서 ‘자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어른에게도 사용될 수 있는 ‘떼끄논’이다.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빠이디온’이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복음을 핑계로 부모의 의무를 회피하지는 말아야 함을 암시한다. 포기될 수 있는 목록에서 ‘아내’가 빠진 것도 복음을 핑계로 이혼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과 일관성 있게 연결된다.

100 배 받는 목록 속에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며 사람 중에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는 전통적인 아버지가 없어야 함을 암시한다(마태복음 23:9 참조).

가족은 재산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가족을 100 배 얻을 때, 재산도 100 배 얻게 된다. 따라서 집이나 토지도 100 배 얻게 된다. 교회가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라면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가옥이나 토지는 그들 모두의 소유처럼 여겨진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집과 가족을 떠난 선교사들은 선교 여행 때 가는 곳마다 기독교인 형제들에 의하여 집들을 제공받으며 결과적으로 많은 집들을 소유함이나 다름없게 된다.

가옥과 토지를 100 배나 얻게 되는 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사도행전 4:32). 이러한 교회에 소속한 사람은 그 교회의 성도들의 재산을 모두 공유하므로 재산을 100 배 이상 얻게 된다. 단 이러한 교회에 소속하기 위해서 (여분의) 토지나 가옥이 있는 자들은 이것을 포기해야 했다.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사도행전 4:34-35). 토지를 제대로 포기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결국 죽음을 당한다(사도행전 5장). 그러나 집과 토지를 포기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공유되는 모든 재산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가옥과 토지를 포기한 자가 현세에서 100 배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은 교회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가옥이나 토지를 포기한 자는 교회를 통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교회는 그러한 가옥과 토지를 공동재산으로 관리하여 가난한 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소유를 포기한 사람도 교회가 관리하는 모든 재산들을 공유하며 사용할 수 있게 되어 포기한 재산의 100 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교회들은 성도들이 포기한 것의 100 배를 얻게 하는 공동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그들이 포기한 것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포기한 자들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집을 포기한 자들에게 집이 되어 주고 전토를 포기한 자들이 일할 수 있는 전토를 제공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전체 교회가 그렇게 될 수 없을 경우에는 최소한 교회 속에 그러한 공동체를 두어야 한다.

교회에는 예배당이 필요하고 교육관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생활관이나 숙소들이 필요하다. 그곳에는 집 없는 사람, 복음전도자, 은퇴한 선교사 등이 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숙소들이 많이 생겨나서 집이 없는 자들과 복음을 위하여 집을 버린 자들이 세계 어디를 가든지 자기 집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토지나 가옥을 교회에 내어 놓은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마땅히 현세에서도 100 배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내세의 구원과 함께 현세에서 약속받은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그것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는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나야 하며, 교회들 사이에서도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나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예수를 믿고 그의 계명을 따르기 위하여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전토를 떠나고 포기한 자는 현세에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100 배나 보상받을 것이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21절)이 지켜지는 교회에서는 또한 복음을 믿다가 가족의 버림을 받고 상속받을 집과 토지도 잃어 가난하게 된 자들 역시 교회에서 형제들, 자매들, 어머니들, 자녀들을 100 배나 만날 것이며 집과 토지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교회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는 더더구나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교회이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교회가 예수께서 기대하신 교회이다. 우리는 현실의 교회를 예수께서 기대하시고 원하신 교회의 모습으로 바꾸어야 한다.

부자들을 위한 복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이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을 수혜자로 하는 듯하지만 실은 부자들을 가장 큰 수혜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예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마가복음 10:30), 현세에서도 토지와 가옥, 가족을 100 배나 더 받을 수 있기에 가장 큰 수혜자들이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가르침은 토지를 많이 가짐으로 율법을 어긴 자들이 죄를 사함 받을 뿐 아니라 현세에 100 배의 토지를 더 얻을 수 있고 또한 내세에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이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가난한 자들이 들으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부자들이 포기하는 토지로부터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100 배의 재산을 얻을 기대도 할 수 없다. 그들이 영생을 얻을 것을 확신하고자 한다면 많은 재산을 모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아주 기쁜 소식은 아니다. 그들이 언제 재물을 모으고 토지를 마련하겠는가? 언제 율법이 허락하는 평균지권의 분량 이상의 토지를 마련하여 그것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한 채의 가옥도 없는 그들이 언제 여러 채의 집을 마련하여 남는 집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는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사실상 복음이 아니라 절망의 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 오히려 부자들에게 슬픈 소식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을 포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100 배를 남기고 내세에 영생까지 얻는 결과를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손에 든 것을 포기하기 아까와 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깝게만 여겨지는 것은 예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남는 투자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망설이다가 투자를 하지 않게 되고, 그들은 포기하지 못한 재물을 세상에 버려두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때엔 그들이 손에 쥐고 있던 재물마저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된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마가복음 4:25)는 말씀은 토지의 포기의 경우를 잘 반영하는 말씀이다. 복음을 위해 토지를 투자할 믿음이 있는 자는 100 배를 얻고 영생까지 얻게 될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 없는 자는 그 가진 재물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소유하지 못할 토지를 포기하여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다. 예수께서는 토지부자들에게 그러한 길을 열어주셨다. 영원하지 않은 토지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는 길을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이러한 복음을 부자들이 싫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세상에서 포기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가난한 자들이 이 가르침을 싫어할 이유는 있다. 그들은 예수께 항의할 것이다. 빚을 지지 않고 연명하는 것도 힘이 든데 남에게 주라니요? 우리는 언제 빚을 면하고 돈을 벌어 땅까지 사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이는 복음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을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먼저 받아들였듯이, 부자들을 위한 복음은 부자들에 의해 먼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 의해 먼저 받아들여진다. 마가복음 10:31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여기서 ‘먼저 된 자’는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권력의 서열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다. 마가복음 6:21에서 이 단어는 “권력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9:35에서도 ‘먼저 된 자’는 ‘종’에 대조되어 쓰였으므로 섬김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마가복음 10:44에서 ‘먼저 된 자’는 ‘노예’(둘로스)에 대조되어 쓰여서 주권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31에서도 ‘먼저 된 자’는 권력자, 주인, 높은 자 등을 가리키며, 부에 관하여 이야기되고 있는 문맥상 부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자들이 나중 된다는 것은 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중에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그들은 “나중 된 자”들이다.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에 대조되었고 ‘먼저 된 자’는 부자를 가리키므로 ‘나중 된 자’는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 가난한 자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다.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서 쓰인 ‘먼저 될 자’는 ‘나중 되고’에 대조되어 시간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 10:31은 부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나중에 받아들이게 되고,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이게 됨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부자가 구원받는 길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을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인다. 가난한 자들은 이 가르침으로부터 직접 얻는 것이 없는데도 이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부자들은 이 가르침의 가장 큰 수혜자인데 이 가르침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물질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된다. 문제는 이때 발생한다. 가난할 때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부자가 된 후에는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 이제 그가 가난할 때 받아들인 복음을 따라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만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

부자가 된 후에 복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복음을 변질시켜서 믿는 사람들도 생긴다. 부자들에게 토지를 포기하라고 주신 말씀을 흐려버린다. 부는 물론이고 토지나 가옥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괜찮다고 성경이 가르친다고 왜곡한다. 나아가 토지와 가옥을 많이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대적한다. 이렇게 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복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 못지않게 악한 것이다.

교회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수적인 성장의 기반을 다지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면 교회를 부자친화적으로 변질시키고 복음도 물질친화적으로 변질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참으로 부자들을 위한 복음을 이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못주는 복음으로 전락시킨다. 재물친화적인 복음의 수혜자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자도 아니다. 그 속에서 부자들은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며, 가난한 자들은 무시당하여 실족한다. 그러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마저도 수혜자는 아니다. 심판 때에 그들이 받을 벌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복음을 왜곡하는가?

우리는 복음을 믿고 복을 받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을 피할 필요는 없으며 벌어서 남에게 주기위하여 부자가 되려고 힘쓰면 좋다. 그러나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고 복음을 부자들이 받아들이기 좋게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복음을 그렇게 변질시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게 된다. 부자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복음은 더 이상 부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복음이다.

세상이 바뀌고 그리스도인들이 부자들이 되어도 복음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교회의 편의를 위해서나 우리의 기분을 위해 그것을 바꾸면 안 된다. 교회성장을 위해 복음을 변질시키는 죄, 토지를 포기하기 싫어서 복음을 변질시키는 죄, 이 죄는 복음을 따르지 않는 죄보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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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예수께서는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마가복음에서 구원의 확신에 관련한 예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29-30이다.

이 본문은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되는지 알려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마가복음에서 ‘영생을 얻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과 동의어이며(마가복음 9:45-4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다’는 표현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25-26). 그러므로 이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반드시 받는 지 알려주는 본문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배운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당혹해 할 것이다. 집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리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 의문은 다분히 흑백논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에 관해 말하지 않고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즉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 중에도 구원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마치 합격의 확신이 없는 수험생 중에 합격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있는 자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와 복음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다. 예수를 참으로 믿지 않으면서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포기를 못하는 사람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말로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며 신앙생활을 할 경우에 우리는 늘 입시생처럼 불안하지만, 구원을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시험에 합격하고 입학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쁘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하게 만들기도 한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에게 방종과 죄의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러한 구원의 확신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을 보고 초신자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날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조롱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도의 문은 막힐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아무리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더라도 나의 구원의 확신으로 남이 구원받는 길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먹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헛된 구원의 확신은 일찌감치 없애는 것이 좋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교리는 무슨 죄를 지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한국교회에서 왜곡, 과장되어 가르쳐졌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아무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으로부터 탈락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었다. 결국 잘못된 구원의 확신은 많은 교인들이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차라리 구원의 확신 없이 구원의 길을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지 분명히 알려준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가 그들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믿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의 믿음이 거짓 믿음일 수는 없다. 예수와 복음을 선택하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사람에게는 그가 포기한 것보다 더 큰 보상이 기다린다. 그것은 구원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버림의 의미

그런데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라고 할 때, ‘버린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과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버린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마가복음 10:28에서도 사용되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할 때, 그는 재물을 가진 자가 구원 받기 어렵다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물을 버렸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하였는가? 베드로는 예수를 따를 때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마가복음 1:18).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마가복음 1:20). 그렇지만 그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린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른 후에도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마가복음 1:29). 그러므로 ‘버리다’는 말은 소유의 포기로 이해할 수 없다.

‘버리다’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허락하다”(1:34; 5:37; 7:12, 27; 10:14; 11:6, 16), “용서하다”(2:5, 7, 9, 10; 3:28; 4:12; 11:25[2회]), “거절하다”(5:19; 7:8), “남기다”(12:19, 20, 22; 15:37), “남아있다”(13:2),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14:6; 15:36)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러한 의미는 마가복음 10:28의 문맥에 맞지 않는다.

이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떠나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1에서 이 동사는 열병이 떠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4:36; 8:13; 12:12; 14:50에서 이 동사는 사람들을 떠나가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34에서 이 동사는 집을 떠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18에서는 그물을 관리하기를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20에서 이 동사는 아버지 세베대를 돕는 것을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0:28의 문맥은 마가복음 1:18, 20을 연상시키는 문맥이므로 ‘버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문맥상으로나 마가복음의 용례상으로나 “떠나다”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실제로 소유를 버린 것이 아니므로, ‘버림’은 순회 사역 기간 동안 가족이나 소유를 떠나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마가복음 10:28)라는 베드로의 말은 “우리가 모든 것을 떠났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열두 제자들은 재물과 가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따라다니며 복음 사역을 하기 위하여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떠났다.

그런데,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릴 때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의 말씀(29-30절)에서도 ‘버리다’는 단어를 “떠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문맥은 이러한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들이 이것들을 100배나 받을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은 ‘버리다’는 단어가 단지 내버려 두고 떠난다는 뜻에서 더 나아가 소유의 포기와 관련됨을 암시한다. 집, 가족, 토지를 100배나 더 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믿음의 가족을 100배나 얻고 많은 집과 토지를 공동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버리다’는 단어도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공동소유로 내어놓는다’는 뜻으로 또는 ‘그 혜택을 독점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집, 가족, 토지의 버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마가복음 10:21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가르침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족의 버림은 가족을 떠남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집이나 토지의 버림은 단지 떠남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의 경우에도 기업의 분량에 해당하는 토지나 가옥까지 포기하라는 것은 아님을 베드로와 안드레의 경우에 여전히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마가복음 1:29).

‘버림’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최소한 떠남을 뜻하고 공동소유 내지 소유포기를 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버림’이 어떻게 이해되든지 간에 가족이나 집, 토지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은 동일하다.

버림의 이유: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다. 그런데, 이 때 한 가지 단서가 있다. 무엇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토지를 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그런데,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가 무슨 뜻인가?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가옥,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다는 뜻일 수 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예수는 소유(문맥상 토지)의 포기를 명하셨기 때문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복음을 위하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집, 가족, 또는 토지’의 “포기”는 그것들을 “떠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도 여행을 하고 계신 예수를 따라 나서려면 집과 가족과 전토를 떠나야 한다. 그래야 전도 여행을 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가옥,’ ‘가족’이 포기의 내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문맥에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포기’가 마가복음의 용례상, ‘떠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지원한다(위 참조).

집과 가족을 떠나 전도 여행하는 복음 전도자들에게 예수께서는 100배의 집과 가족을 약속하신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30절). 그들에게는 가는 곳마다 거할 곳이 생기고 그들을 보살펴 주는 믿음의 가족이 생긴다. 물론 그들은 전도 여행 과정에서 고난도 받을 것이다. “박해를 겸하여 받고”(30절).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구원이 확실히 약속된다.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30절).

그런데, 버림의 목록에서 ‘아내’가 빠져 있는 것은 ‘버림’이 문자 그대로의 ‘버림’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누가복음에서처럼 ‘아내’가 버릴 목록에 포함된 전승이 본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누가복음 18:29). 그러나 마가복음의 문맥에서는 ‘아내’가 빠진 것을 고려하여 본문을 해석하여야 한다. 아내를 버리는 것, 즉 이혼을 금하는 예수의 가르침(마가복음 10:9, 11)의 일관성이 여기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버림’이 잠시 떠나는 것이었다면 유독 ‘아내’만을 떠나야 하는 목록에서 뺐을 리 없다. 예수의 12제자들이 아내를 동반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며 사역을 하였다고 볼 수도 없기에, ‘버림’은 단지 ‘떠남’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 가족, 토지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율법이 허락하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들)이나 토지의 소유를 포기하고, 복음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들과 결별하는 것을 뜻한다. 다만 아내는 복음 전파의 삶을 원하지 않더라도 이혼시킬 수 없다. 그녀가 함께 살기 원하는 한 이혼시키지 말아야 한다(고린도전서 7:12-13 참조). 복음을 따르는 것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그러나 복음 자체가 이혼을 금하기 때문에 버릴 수 있는 목록에서 ‘아내’(또는 ‘남편’)는 제외된다.

본문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예수와 복음을 믿기 때문에 가정에서부터 쫓겨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가옥, 토지 등의 상속자로서 권리를 함께 상실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구원을 약속하신다. 세상에서 기업을 잃은 그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신다. 그러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된다.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크나큰 위로와 소망이다. 그에게 구원의 확신마저 없다면 너무도 비참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고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죄를 지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이 없는 자들에게 마가복음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확신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토지의 포기와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누가 가질 수 있는가?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하여 집이나 가족, 토지를 포기한 사람은 마가복음 10:30에 토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축적한 가옥이나 토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정설을 믿은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하여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하였다. 부의 축적에 성공하는 것이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 증거라고 여긴 칼빈주의자들은 열심히 일하여 벌고 절약하여 씀으로써 부를 축적하여 자본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부의 축적이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축적된 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과 토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부의 축적을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본 칼빈주의자들의 근검절약은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렇다면 부의 포기를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보는 예수주의자들은 새로운 경제체제를 태동시키지 않을까? 근검절약하며 부를 축적하되 부동산투기 등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축적된 부를 지속적으로 포기하여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만드는 예수경제체제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토지를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토지에서 나그네가 쉼을 얻을 때,

그는 낙원에 예수와 함께 거할 곳을 얻을 것입니다.

가옥을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집에 가난한 자들이 깃들일 때,

하늘의 도성에 그를 위한 집이 마련될 것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족에게마저 버림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지만

영원한 것을 얻는 그에게 복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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