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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매력적인 차선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라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10. 1. 9. 00:4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이글은 지난 1월 7일 사랑의교회 건축관련 기자회견의

추운 날씨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라는 바울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주일(1월 10일) 열릴 공동의회에 앞서 사랑의교회 측과의 비공개 면담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공동의회 이후에 만날 수 있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이에 교회 측의 대화 의지에 진정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오늘 기자회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교회는 보편적 교회의 한 지체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이웃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소위 대형 교회로서 거의 유일하게 교계와 사회로부터 신뢰와 칭찬을 받아온 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지난 수년간 한국교회 개혁을 아픈 마음과 뜨거운 가슴으로 외쳐 오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원로목사로 섬기고 계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교회가 지금 결정적으로 잘못된 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사랑의교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거나 완벽한 제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이웃 교회가 결정적으로 잘못된 길에 접어들고 있을 때, 이를 만류하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권유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한 지체된 자들의 중요한 책임이라고 믿을 뿐입니다.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부재요 결핍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차선이 최고의 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악의 본질입니다. 차선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최악이 아니라 오히려 차선입니다.

사랑의교회는 지금 다양한 차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몰려드는 성도들을 위한 안전한 건물의 확보, 차세대를 위한 인프라 구축, 규모 확대를 통한 선교, 사회복지, 제자 훈련의 강화, 강남 지역 사람들의 변화 등을 들고 있습니다.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바로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길, 즉 자기 비움과 낮아짐, 그리고 가난과 고난, 죽음을 통한 부활의 길이 설 자리를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득훈 목사. ⓒ뉴스앤조이 백정훈  
 
사랑의교회는 노골적인 기복 신앙을 말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승리주의 신앙을 설파하며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사랑의교회는 반대로 이 땅에서 성공하고 승리함으로 하나님나라를 펼쳐갈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강남 지역의 성공한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와 이념을 갖고 살면서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키겠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설사 교회로 몰려온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세속적 가치와 영역의 확산일 뿐입니다.

이런 슬픈 현실을 어찌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나라와 사랑의교회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부디 저희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지금이라도 돌이켜 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길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박득훈 목사 /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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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님께 (뉴스앤조이 기사)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09. 12. 18. 12:23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눈 뜨기를

제 이름은 고세훈입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신도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을 뵌 적은 몇 차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만난 적은 없습니다. '사랑의교회'에 몇 번 가 보기는 했지만, 그곳 교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득 이 시기에 옥 목사님을 수신인으로 편지를 쓰고픈 마음이 계속 저를 붙들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지체의 하나로서 같은 편끼리 투정 부린다 생각하시고, 부디 이 느닷없는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공개편지인 것은 이미 '사랑의교회' 이전 문제가 공론화했고, 또 저로서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형식의 글이 됐습니다.

제게는 벌써 20년도 더 전 미국 유학 시절, 옥 목사님이 쓰신 <나의 고통 누구의 탓인가>를 몇몇과 함께 읽으며 감동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사이는 제 아내가 틀어 놓는 옥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이따금 들으며 옥 목사님의 '신학적' 근황을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한국 교계 안팎의 상황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마음을 울리는 설교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옥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말씀에 갈급한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빗줄기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제 마음속에 옥 목사님께서는 뭇 대형 교회들의 목사님들 중 하나여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 혹은 깊은 신뢰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따금은 옥 목사님께서도 자신의 설교에 대해 자유로움을 못 가지신 것은 아닌지 하는 답답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왠지 바로 핵심을 치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안타까움 같은 것입니다. 혹시 어떤 경계(인의 심정)에 갇혀서 목사님 스스로도 갑갑해 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에 젖어 보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반쪽 진리가 횡행하고 방송 전파에서는 거의 약장수 수준의 '말'들이 설교라는 이름으로 범람하는 세상인지라, 제가 너무 민감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옥한흠 목사 제자 훈련 성공 사례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 제일 먼저 터져

얼마 전에 있었던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가 문득 생각납니다. 두루 알다시피, 신자유주의적 경제 현상의 중심에는 노동 유연화 정책이 있고, 노동 유연화 정책의 가장 보편적인 귀결이 다름 아닌 비정규직의 양산입니다.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노동 인구의 6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이는 이른바 선진국의 2-30%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기업하는 사람들과 기업에 돈을 빌려 준 금융권에게 비정규직이야말로 이윤 확대를 위한 가장 매력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비정규직처럼 항시적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한 국가 복지 수준이 매우 열악합니다. 국민총생산 대비 국가의 복지 관련 지출 또한 선진국의 25%에 불과하니까요. 기업은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국가마저 그들을 내치는 형국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 삶이 거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기독교를 전면에 걸고 출발했던 이랜드라는 기업에서 그 문제가 가장 먼저 터졌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랜드는 기독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기업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영 논리가 압도적인 기업임을, 그것도 다른 보통의 기업들보다 선도적으로 만천하에 보여 주었던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에 투철하여 기업을 운영한다 한들 일반적으론 존경받을 일은 아닐지 모르나 책잡힐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애초에 내걸었으며, 그것도 다름 아닌 비정규직 문제로 일반 기업들에게 '모범'을 보일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지요.

한때 그 기업은 옥 목사님 제자 훈련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혔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이 자신이 경영하는 대형 마트의 매장에서 휴게실을 없애고 기도실을 만들고는, 기도실 벽면 곳곳에 "우리 회사를 더 성장하게 해 주세요", "세후 이익 x% 달성", "총매출 00억 달성" 같은 기도 제목을 내걸었답니다. '기도실'은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를 빙자한 '장사하는 곳'이 돼 버린 것이지요. 심하게 말하면 장사를 위해 기독교가 동원된 것입니다. 그쯤 되면 그것은 기독교 원리를 삶에 적용하는 차원에서의 실패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의 문제입니다.

저는 올해 초인가에 출판된 이랜드 아주머니들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참담한 노동 여건을 책으로나마 접하고는, 계산대 앞 긴 줄에 서서 가끔 불평을 했던 제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느닷없이 이랜드 문제를 거론해서 목사님께 당황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랜드 문제가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 사역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첫 번째 사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저만의 아전인수인지요. 당시 옥 목사님께서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목사님께서 공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실 저로서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 누적된 수순의 자연스런 결과

그러다가 이번에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많은 얘기들이 오갔지요. '사랑의교회' 교인들의 압도적인 다수가 건축 헌금을 작정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것이 일으킨 교계 안팎의 파장에 대한 현 담임목사의 이상한 독려에 관한, 제가 보기엔 기이함을 넘어서 충분히 흉흉하다 할 수도 있는 말들까지 그 목사님 입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혼란케 만들었던 것은 옥 목사님께서 그 모든 일에 대해 보이신 반응이었습니다. 과연 놀라야 할지 아니면 태연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섭섭하실지 모르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애초에 옥 목사님을 저희 쪽에서 오해했든, 아니면 옥 목사님께서 대형 교회에 대한 입장을 스스로 바꾸셨든, 어느 쪽이든 실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도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될수록 빠른 시일 내에, 옥 목사님께서 깊고 명쾌한 입장을 교계 일반을 대상으로 표명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처음 '사랑의교회' 이전 관련 기사를 접했을 때, 저의 심정은 '사랑의교회, 너마저!'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꽤 오랫동안 '사랑의교회'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 하던 일들이 누적돼 오다가 마침내 이번에 교회 이전 문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것이 온 것 아니겠냐는 생각 같은 것이지요. 이런 말씀까지 드리긴 뭐하지만, 얼마 전부터 '사랑의교회'는 무언가 바빠지고, 좋게 말하면 활기를 띠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왠지 그런 변화를 지켜보는 저와 제 주위 많은 사람들은 불안하고 때로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조마조마했습니다. 무엇인가 미덥지 못하고 아슬아슬했습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교회 조직이란 것도 교회의 규모에 맞게 운영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과 공의를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한 교회 공동체의 본래 목적과 별개로, 마치 그 자체가 합리적 목적을 지닌 것처럼 운영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고 말 것입니다. 혹시 이번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교회가 커지면서 수단이 목적을 점차 압도해 가는, 한국교회의 고질적이고 통상적이고도 지속적인 어떤 경향이 마침내 다다른 지점은 아닌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점에서 '사랑의교회'는 다른 대형 교회들과 너무나 닮아 있었고, 이번만은 예외라는 증거를 도무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교인 숫자가 늘어난다고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사랑의교회'가 그간 성취한 것들을 폄하하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 문제라면, 저는 어떤 신학적인 입장을 피력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합니다. 단지 한국 교계가 걸어온 지난날들을 돌아보면서, 수적으로 양적으로 교회인을 양산하는 일이, 다른 쪽에서는, 잘 포착되지는 않지만, 진정한 신앙인들을 뭉텅뭉텅 덜어 내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가 큰 쓰임 받는다? 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어떤 사람들은 큰 교회가 큰 쓰임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말은 '쓰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심'을 무시한 궤변입니다. 교회는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 땅에서 결실을 맺어 나갈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소관을 나의 소관으로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교만이요 곁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구제나 봉사의 문제라면, 기독교에서 소위 이단시하는 많은 단체나 세속적 집단들 가운데도 헌신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진정으로 약자를 돕기 위해 애쓰는 곳은 널려 있습니다. 무릇 자선의 윤리란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포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교회의 이름을 구태여 빌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필요조건일지언정, 진정한 기독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열매로서 그냥 맺어지는 것이며, 모든 열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해서 위로나 자랑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전장에서 정의 아닌 승리가 지고의 가치가 될 때, 맹목적이고 공격적인 애국주의가 판을 치기 쉽습니다. 일부러 조심하고 부단히 경계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사랑과 정의이되, 결코 이 땅에서의 승리를 장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승리케 하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나는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대학에 합격해야 하고, 큰 교회를 건축해서 큰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남은 소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큰 교회는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닙니다.

대형 교회가 큰일을 못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큰 교회니까 큰일을 한다는 말은 큰일을 하기 위해 부자가 돼야 한다는 말처럼 위험한 억지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래 크기를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속성이고, 죄가 부추기는 인간의 경향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만 놔두면 대형화는 거의 자동적으로 더 큰 대형화를 추구합니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현재 영적 상태에 비춰 볼 때 특정 교회의 대형화가 그 교회의 영적 진운을 긍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대형 교회로 나아가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축복이니, 영적 성장이니 하며 자만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개인(의 부)이 그런 것처럼, 교회가 커지면, 자기 의가 덩달아 커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용하시기가 더 어려워지기 쉽습니다. 크기는 영적 상태와 긴밀히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 시절과 큰 교회 시절, 교인들이나 목회자의 영적 상태가 같을 수 없습니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자와 영적 상태가 같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가 부의 문제를 그토록 경고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부의 축적 과정이 영적 과정이듯이, 교회의 크기의 문제는 곧 영적인 문제이기 쉽습니다. 왜 우리는 '부의 기만성'(deceitfulness of riches)(마 13:22)에 관한 예수의 경고를 예배당의 크기에 적용하려는 용기와 지혜를 갖지 못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교인 몰려드는 현실은 재앙

크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기는, 지식이 그렇고 부가 그런 것처럼,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교회가 작고, 지식이 적고, 부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날로 대형화하고, 지식인은 넘치고, 부자들은 많아지는데, 빈곤과 소외, 양극화와 불안은 커져 가고 있습니다. 준비된 교회, 준비된 지식인, 준비된 부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말했듯이 세 살배기에게 억지로 살을 찌운다 해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건강한 유아라는 점을 반증해 줄 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재앙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지식을 쌓고 부자가 되는 것이 그 개인에게 재앙인 것과 꼭 같습니다. 그때의 부와 지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방치하신 것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서 교회 건물이 감당하지 못할 즈음, 오히려 교회는 이미 그때부터 발전 방향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양적인 외양에 취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물량적 성장 자체가 목적이 돼서 복음은 이미 상실돼 있기가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규모 자체가 중요해질 때, 그때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 교회는 넓은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자기 진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큰 기독교 기업을 일으키고, 큰 교회 건물을 건축해서, 큰일을 하겠다는 것은 철저하게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목사님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방 족속에처럼 왕을 허락하신 것은,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인간의 사악함과 고집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체념하고 방치하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악의 번성과 횡행을 이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세속의 역사에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그랬고, 심지어는 도적떼의 수괴들도 구름떼 같은 추종자를 거느렸던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양지에 앉아 승자의 편에서 강한 자를 거들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리화했던 예들은 역사에서 넘쳐납니다.

사람의 눈에 성공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며, 그것이 교회와 관련될 때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에 적당히 얼버무려 접목하면, 쾌감은 몇 배로 늘어납니다. 세상적 욕구도 은근히 충족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뤘다는 뿌듯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교회 안의 보통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심리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포퓰리즘의 위험성

목사님, 사람을 너무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의견이 어찌어찌 만들어졌다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치환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 의견이 차선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도출되는 과정이 또한 정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소 극단적이고 지나친 비유일수도 있겠습니다만, 히틀러의 집권과 만행 배후에는 수많은 기독교인을 포함한 멀쩡한 독일 중산층이 열렬한 지지가 있었습니다. 그간 한국교회는 그것이 세습이든 교회 건축이든 교인들의 다수 의사를 앞세워 정당화해 왔습니다.

포퓰리즘은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것은 오히려 대형 교회일수록 편만한 게 현실입니다. 포퓰리즘이 문제인 것은 어떤 결정이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거나,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따르는 부작용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 있습니다. 포퓰리즘은 그것이 대중의 욕구를 수단으로 지도자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다는 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는 대중의 의사와 욕구를 조작하려는 (때로는 지도자 자신도 스스로 합리화하는) 술수가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국가든 교회이든 구성원이 깨어 있을수록 포퓰리즘은 힘겨운 전략이 되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목회자 개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한국적 상황에서, 일반 교인들의 개입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은 대형 교회일수록, 그런 일을 기대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대형 교회에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일에 소극적이거나 나아가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기 쉬우며,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교회의 크기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식의 문제 제기 자체를 불순한 것으로 불쾌해 합니다. 목회자의 할 일은 교인들을 늘 깨어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회자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약해지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레 차단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도 살고 교회도 사는 길일 것입니다.

'사랑의교회'가 건축 문제를 결정할 때, 대형 교회가 스스로 빠질 수 있는 이런 위험을 충분히 고려하여, 가능하면 보수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는지 궁금합니다. 이 궁핍한 시대에 그런 어마어마한 결정 앞에서 교인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토론의 기회를 부여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며 최선을 다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명실상부한 민주적 과정을 거치기 위해 교인들의 적극적 관심을 유발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는지 진정 궁금합니다. 그런 과정이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왜곡된 상태에서 도출된 합의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 만들어진 '억압적 합의'일 뿐입니다.

전간 시절 영국의 유명한 정치학자이며 노동당 정치인이었던 해럴드 라스키는 "누구나 빵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아무도 케이크를 먹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노동자들 앞에 설 때마다 매번 자신이 부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말로 연설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이론에 투철하게 살았던 비기독인이었습니다. 저는 라스키의 태도가 반드시 우리가 따라야 할 준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교회에 만연된 불평등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급진적'(radical) 통찰을 떠올립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의 소리로 교회 '안'을 깨우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 있다면, 정말 모골이 송연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더 뻔뻔스럽게 불의와 타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일을 일상적으로 반복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기커녕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강변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를 말로써 부인하는 일을 단죄하는 데는 재빠르지만, 행동으로써 일상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일에는 관용이 넘치거나 무감각합니다. 교회가 마땅히 맡겨진 책무를 소홀히 할 때, 이단과 반쪽 진리가 판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상도 타기하는 세습과 대형화를 탐한다 한들, 이제 별로 놀랄 일도 아닐지 모릅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이제 세상은 교회를 향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너무도 다르지 않거나(거룩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지요), 아니면 그 악행에서 세상을 오히려 앞서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하는 일에 무관심합니다. 교회는 그들의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끼리끼리의 모임이요, 예수 이름을 입에 달고 훈계를 일삼는 가소로운 집단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밀알은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란 썩지 않는 웅장한 건물과 허공에 새길 명성을 위해 혈안이 된 집단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의 예배당은 이 땅을 잠시 스쳐 가는 이방인들이 모여 주를 고백하는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거주할 부동의 부동산의 중요성을 앞장서서 일깨우는 진원지가 바로 교회일지도 모릅니다. 그 거창한 건물로 어떤 거창한 일을 할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잃어버린 사랑의교회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사랑의교회' 문제는 단순히 새 예배당을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마음을 한없이 짓누르는 것은 그것이 어쩌면 사소한 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교회'가 혹시 이미 슬픔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진 않았는지, 두렵습니다. 예수는 죄에 휘둘리는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이 깃든 깊은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슬픔이 마르면 남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 슬픔을 아는 자가 잠 못 이룰 때, 어리석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셨다며 자신의 태평한 잠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통곡하셨습니다. 과연 오늘의 상황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점은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통곡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덕담을 건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랑의교회'가 새 건물을 짓고 다시 한번 도약하겠다는 데 축하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요, 목사님. 한편 생각해 보면, 악이 도처에 편만한데, 축복의 말을 또 하나 첨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에 대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일이야말로 한국의 기득 계층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대형' 매체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 해 오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별 문제 없이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잘 돼 가고 있다고 국민의 눈과 판단력을 가리는 일을 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럴수록 교회 안팎에서 불의는 더 만연하고 약자들의 고통은 갈수록 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양지만을 자꾸 비추자는 것이 어쩐지 문제를 회피하거나 은폐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셨을 겁니다. 목사님, 부디 작금의 일련의 상황들이 '사랑의교회'가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대해 마침내 눈을 뜨고, 목사님의 사역에는 일대 쇄신의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고세훈 /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개혁연대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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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목사 VS '울고싶은'교인들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09. 9. 7. 17:0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주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평소에 이름을 듣지 못했던 부흥강사가 온다길래
여러 교회를 다니는 부흥강사라길래
나름대로 호기심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설교를 들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
어려서부터 부흥회에 자주 참석했던 나로서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설교가 이어졌다.
물론 나의 마음 밭이 좋지 못하여 그런지는 모르지만
편견을 가지지 않고 들어본 결과 1970~80년대에서나 통했을 구태의연한 설교가 이어졌다.
돈 많이 헌금해라, 전도하지 않으려면 그만큼의 헌금을 해라,
매시간 감사헌금 하면 축복기도 할 것이다… 등 설교의 핵심은 단순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어려워도 헌금하면 그것이 복이다…
돈과 복으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심지어는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고 성도는 몸인데,
목사는 목과 같으니 머리와 목을 연결하고 지탱하는 목사를 잘 섬겨야 한다는
듣기에 ‘낯부끄러운’ 전형적인 설교가 이어졌다.
설교 중간 중간에는 우스개 소리와 반말들이 양념과 같이 반복되었다.
또한 교인들에게 아멘을 재촉하는 멘트가 이어졌고 박수도 독려했다.

최근 들은 설교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꽉 찬
그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한국교회의 ‘부흥사 세대’가 쇠퇴한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그 잔재는 남아있는 것 같다.

2-3일 부흥회 인도에 수백만 원의 강사비가 오고 가고,
그것도 모자라 감사헌금을 강요하는 형태의 부흥회.
비성경적이거나 자기중심적 성경 해석의 언어로 교인들을 현혹하는 부흥회가
아직도 중소형 교회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부흥강사를 호텔에서 숙식을 시키고 심지어 속옷까지 챙기는 사례들이 있다는
현실을 많은 교인들은 모른채, 자격미달의 설교들을 듣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소망하는 나에게 이번 부흥회는 큰 충격을 주었다.
복음을 전하기 보다는 ‘복’과 ‘성공’만을 주입하려는 그들의 모습과
그것을 교회의 부흥이나 목사의 입지강화를 위해 쓰는 교회들의 한심한 모습과
그런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며 ‘아멘’으로 동조하는
많은 교인들의 낮은 의식 수준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나 또한 그 자리에 끝가지 있었다는 사실이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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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타락 주범, 맘몬신앙과 기복주의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09. 5. 11. 01:0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2년 11월,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고 희망의 닻을 올린 교회개혁실천연대가 2008년 정기총회를 갖는 이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교회 개혁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무모하고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며 또 가시적인 성과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인간의 무력함과 전망의 어두움 등을 고려한다면 눈물 흘리고 낙심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이 운동의 필요를 아시고 이날까지 이끌어주신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용기주심에 거듭 감사하면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는 19세기 말에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한국 수용과 함께 성립됐습니다. 그 동안 한말의 고난과 일제하의 역경,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성장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에 힘입어 1980년대 말까지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선교100주년이 되던 1980년대 중반에 한국 그리스도교인 수는 한국 인구의 25%, 4분의 1이라는 숫자로 제시됐습니다. 그 동안 군부정권 하에서 한국 그리스도교 진보진영이 인권과 민주화에 힘쓰며 군부정권과 대결하는 동안, 그 다른 축인 보수진영에서는 전도와 선교에 힘써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스스로를 위안해왔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동안 많은 혼선과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나 상가에는 교회가 난립하고 교회 간판이 행인들의 눈을 어지럽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성장 자체가 목표처럼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말씀에 입각한 교회 상이나 십자가와 부활이 기초가 되었던 초대 교회 중심 메시지 같은 것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오로지 성장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법도 정당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교단의 난립은 교회의 직제와 권징을 어지럽혔고 무자격 목회자의 양산은 교회의 영적 수준은 물론 종교인으로서 도덕성마저 떨어뜨렸습니다. 신자들은 늘어났다고 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인지, 그저 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에 적을 걸어두고 행세하는 그런 존재들인지조차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성장하는 동안 많은 부작용 나타나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신앙 행태가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살아있는 이 세상과 죽어서가는 저 세상의 정도로 이분화 되던 신앙 행태가 점차 삶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과 실천,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세속과 성역 등을 구분하면서 믿음은 실천과 분리됐습니다. 신앙생활이 예배와 전도와 선교 등으로 국한되면서 우리의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문제는 믿음의 영역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치부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의 영역에서는 세속인과 다름이 없었고, 오직 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는 정도였습니다. 인구의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요, 사회의 지도자 그룹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더 높아지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의 그리스도교적인 변화와 개혁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을 무렵, 한국 사회에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잘 살아보세’운동이 한참 일어나고 세속적인 물신주의가 팽배해지고 있었습니다. ‘잘 살아보세’ 운동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을 무렵, 거기에 발맞추기나 한 듯 한국교회에는 이상한 복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요한3서 2절의 말씀에 입각했다고는 하나, 그것을 시대조류에 잘 적용하여 예수 믿는 복을 받으면 돈 잘 벌고 건강하게 된다는 복 사상이 유포되어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을 현혹하기 시작했습니다. 복 사상의 강조는 바로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기복사상과도 짝짜꿍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진정한 복은 한국교회 속에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기복사상으로 둔갑한 사이비 그리스도교가 팽배될 때,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지성들은 스스로를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걸어놓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예언자적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고에 한국교회의 주류적 흐름인 보수 교회에서는 누구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를 내부적으로 가장 타락시키는 요인은 바로 이 기복신앙이요 황금만능주의이며 이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바알신앙이요 맘몬이즘입니다. 

한국교회 지성인들은 기복주의를 왜 바알신앙으로 규정했을까요.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에게 가장 경계하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바알입니다. 출애굽도상의 이스라엘인들은 순례자의 길을 걷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곳에 고정된 벽돌집 대신 때마다 옮겨야 할 천막이 있었고, 곡간에 저축해 둔 곡식 대신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40여 년의 광야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때마다 가장 유혹받은 것이 바로 "우리는 언제쯤이면 천막 아닌 벽돌집을 짓고 매일 받아먹어야 하는 만나 대신 몇 달 몇 년씩의 곡식을 창고에 쌓아놓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화려한 벽돌집에다 창고에 듬뿍 쌓아놓은 곡식을 담보해 주는 신이 바로 바알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역경과 고난 속에 헤매며, 바로 그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는 그런 유혹들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잘 살아보세' 운동과 교회 성장, 대형 교회의 출현과 함께 이런 유혹이 심화 확대되었던 것은 한국교회의 불행이었습니다. 여의도의 모 교회를 비롯해서 강남·북에 있는 대형 교회가 바로 그런 바알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40년간 출애굽의 길 같바이 순례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먼저 그 행리(行李)를 가볍게 하고 저 순례자가 걸어야 할 고독의 길, 가난을 실천하고 영성을 회복하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1907년 대각성운동 이래 예언자적인 외침과 회개운동 그리고 개혁 운동을 나름대로 전개해 왔습니다만 이제는 한계에 부딪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난해의 아프간 사태를 계기로 반 그리스도교적인 정서는 봇물을 이루어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반 그리스도교적인 기치를 내걸고 투쟁의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과거 소수적인 위치, 약자의 위치였다고 생각하던 그리스도교는 이제 더 이상 약자도 소수자도 아닙니다.

사학법 재개정 과정에서 나타난 교회 지도자들의 삭발 사건은 그리스도교적인 방법이 아닌, 힘으로 밀어붙여 문제를 해결하려한 대표적 사건의 하나였습니다. 이와 함께 대형 교회들에서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목회 직 세습행태와 목회자 납세문제 등도, 한국 그리스도인이 NGO 후원금의 70%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자랑할 만한 추산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교를 비난하는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단군상 파괴 행위에서 보여준 무모한 행동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과 역사에 그렇게 둔감하냐는, 한국 지성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다 차기 정부의 대통령은 다시 대형 교회 장로로서 그 인맥이 벌써 한국 정치에 준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교유착의 가능성이 보이는 차기 정부의 행적 여하에 따라서는 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또 어떻게 비판 혹은 비난받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개혁을 가속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개혁을 시급히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개혁연대의 사명은 더욱 분명해지고 그 사명은 더욱 지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혁연대, 그동안 많은 노력 해왔다'

그동안 개혁연대는 만 6년이 채 되지 않는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며칠 전 받아본 2006년도 사역보고서와 2007년도 사역보고서는 그런 노력의 놀라운 과정과 결과들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운동은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한국교회를 향한 애정 어린 근심과 예언자적 통찰력과 역사의식, 그리고 동지적 연대가 그 토대를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큰 뜻을 갖고 있더라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1335명의 관심회원과 168명의 정회원 그리고 이들을 묶어서 행동과 실천으로 옮기는 동력 역할을 감당하신 38명의 집행위원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경하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한국교회의 소위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이나 소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지금까지 거의 수행하지 못하는 이 일들을 더 겸손하게 감당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격려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면 특히 난세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았고 그들이 당시의 종교계를 주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시대라고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엘리야는 그 시대에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이들과 대결했을 정도로 갈멜산에서 외로운 투쟁을 했습니다. 북왕국 아합 왕과 남왕국 여호사밧 왕이 군사행동을 위한 정치적인 판단을 요청했을 때 시대에 영합하는 400명의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거짓선지자들이었습니다. 오직 미가야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라고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어려운 때에라도 하나님은 아합 치하의 궁중 관리 오바댜를 통해 50명씩 100명의 하나님의 종들을 숨겨놓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 시대의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그런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서 더 활기차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시대의 한국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저는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왜 예언자들의 회개운동을 통해서보다는 오히려 재앙과 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종종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의 세속화와 교회 지도자의 부패, 그리스도인의 타락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점을 넘어서게 될 때 우리 사회도 언젠가는 과거 많은 시대가 당했던 그런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근심스런 전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불교적 기반 위에 있던 고려가 성리학에 입각한 조선으로 변화하기 전에 고려 사회에는 불교 승려들의 심각한 타락행위와 불교사찰의 온갖 세속화된 모습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거울삼아 보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실천에 앞장 서 왔던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에게 축하의 말씀과 함께 한 번 더 제 간절한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칫 여기서 한국교회의 목 곧음과 우리의 약함을 이유로 혹은 핑계 삼아 지금까지 계속해왔던 이 일을 중단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맙시다. 이 선한 일에 대한 우리의 부족과 나약함과 심지어 절망의 인식이 오히려 하나님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시작하셨다는 확실한 보증이 있을 때까지는 이 작은 연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힘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한 것보다는 더 큰 역사를 한국교회사에 남겨줄 것으로 또한 확신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워'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더욱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귀한 사명에 충성하는 신앙의 동지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이 글은 2009년 교회개혁실천연대 정기총회에서 이만열교수(숙명여대명예교수)의 설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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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이 주인되는 교회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09. 5. 11. 00:4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우리 교회는 돈 많은 장로가 없어"
"그러니 돈 많은 장로도 좀 필요한 것 같아"  흔히 교회에서 오가는 얘기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는 돈 많은 장로가 필수적인 것인양 당연시되어왔다.
어제 들은 모 교회에서는 주일날 식사 대접을 장로님들부터 돌아가며 하도록 했다는 모 교회 목사의 얘기가 들려왔다. 과연 그게 정상적인 방법일까? 교회 예산에서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까지 준조세처럼 장로들에게 떠맡기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맘몬이 주인되고 맘몬이 지배하는 교회
이제는 얘기하는 것조차 민망한 부분들이 많다. 결혼식 주례서고 몇십만원의 사례비를 챙기는 목사, 고작 일년의 한두번 대심방이랍시고 다니면서 감사헌금을 챙기는 목사, 그것도 모자라 장례식 집례하고 사례비까지 받는 목사 등 어느 정도 교회에서는 흔한 얘기가 되어버렸다. 헌신예배 드리고 사례비를 사양하는 목사님의 모습이 미담이 되버린 한국교회의 모습은 과연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있는지 의문시 되어가고 있다. 담임목사가 그러니 당연히 부교역자들까지 그것에 젖어버렸고 교인들은 자신의 집에 심방오는 것까지 부담스러운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맘몬의 서열화
노회에 나가면 교회의 교인수와 비례하는 것이 헌금의 액수이고 이것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일단 교회 규모에 맞는 상회비라는 것이 강제적으로 부여되고 그에 따른 교회의 비중이 결정되어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괜한 서열에 의해 매겨지게 된다. 그 규모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면 괜히 기분 나쁘고 불쾌한 기분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 당연히 작은 교회들은 자신들끼리 뭉쳐 패거리를 만들어 큰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을 상대하고 왕따시키기도 한다. 결국 맘몬도 서열화되어 결국 교단의 총대와 임원선거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10억 이상의 총회장 선거자금은 당연한 것이 된지 오래다.

맘몬에 신음하는 교인들
교회에 가서 헌금할 때마다 괜한 주눅이 들게 된다. 이 액수를 누가 알게 될까봐 챙피하기도 하고 돈이 벌리지 않는 달에는 십일조조차도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헌금을 잘 못하게 되면 목소리도 잦아들고 무슨 안수집사나 권사다 장로다 선출할 때만 되면 왠지 모를 스트레스에 허덕인다. 나는 평생 교회에서 그 흔한 안수집사도 못할 처지인가 비관해 보기도 한다, 목사님은 수시로 교회의 사업을 설명하며 자발적인? 헌금을 강요한다. 그래야 꼭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받게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도 같고..
정확하지도 않은 헌금의 숫자는 늘어가고 그렇다고 딱히 어디에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교인들에게는 왠지 부담으로만 늘어간다.

아무래도 맘몬이 주인인 것은 분명하다.
목사님은 설교시간마다 축복받으라고 하고 축복 못 받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처럼 애기한다. 그 축복은 재물에 대한 축복을 말한다. 모집사는 신앙생할을 잘 해서 사업도 잘되고 이번에는 아파트도 차도 바꾸고 교회에도 헌금을 많이 했다는 데,,,평생 정직하게 살아 온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축복은 없고 항상 힘들게 살게 되니 복도 없고.. 유일한 탈출구로만 알았던 교회마저도 맘몬이 주인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분명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 했는데 이것을 어찌 설명하지?

맘몬맞짱 닷컴의 글지기 바실레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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