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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지난 주 공개한 "4대강 사업 본색! 제1탄 - 라인강의 교훈" 편에 이어..
([영상] 4대강 사업 본색! 제1탄- 라인강의 교훈(무한펌질 환영!)

"4대강 사업 본색! 제2탄 - 홍수, 가뭄" 편을 올려드립니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의 이유로 얘기하는 홍수 및 가뭄 예방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지 영상으로 엮어 봤습니다.

이 동영상을 보시고 많은 곳으로 퍼날라주시면 4대강 사업을 막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동영상을 보고 4대강 사업의 문제를 알 수 있도록 함께 동참해주세요!


"4대강 사업 본색!" 시리즈는 앞으로 2~3편 정도 추가로 제작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나올 영상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이 영상은 4대강을 지키기 원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재능기부와
"강은 살아있다"의 저자 최병성 목사님의 도움으로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고화질 영상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Here's a link to '4대강 사업 본색-홍수 가뭄편.wmv'

<관련 포스트>
[영상] 4대강 사업 본색! 제1탄- 라인강의 교훈(무한펌질 환영!)

:
한국 사회의 '맘몬 숭배'가 배태한 '삼성숭배교'
'삼성숭배교'에 맞설 예언자적 지식인이 절실하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돌이킬 수 없는 국토 훼손에 착수했고, 언론 장악 및 검찰과 사법부 장악 시도를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쉼 없이 위협하고 있다. 정부가 사장 및 이사장의 인사권을 통해 공영 방송을 장악한 결과, 공영 방송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모든 기사들을 외면하고 올림픽 경기, 범죄 현장에 대한 도가 넘는 선정적인 취재 및 보도 등에 몰입해 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려 야당과 비판적인 시민들의 전열을 흩트려 놓고 전 국민의 탈정치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 땅의 가난한 시민들을 폭압적으로 다루고도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법이 거의 없다. 태안 앞바다 유조선 충돌로 생업의 터를 잃은 어민들이 부르짖어도, 용산 재개발 지역 주민들에 대한 강압적인 철거 진압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에게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과와 위로의 말을 하지 않는다.

대운하 사업의 추진 가능성이 막히자 4대강 사업으로 이름을 바꾼 참혹한 대토목 공사를 벌이는 정부의 무리하고도 강압적인 일 방식 앞에 양식 있는 국민들은 민주주의 역사가 급격히 후진하고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인다. 그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외골수로 자기 길을 가며 국토를 불가역적으로 훼손해 가는 정부를 보면 탄식과 불안은 깊어 간다.

그러나 이런 명시적인 실정 외에도 이명박 정부가 끼친 더 지속적인 폐해는 몰윤리적 금권숭배, 물신 숭배 풍토를 전 국민적으로 확산시킨 일이다. 경제 성장과 부에 대한 전 국민적 열망을 등에 업고 등장한 이 정부는 한 나라의 근본인 공평과 정의의 토대를 무너뜨릴 기세를 서슴없이 보여 주고 있다.

나라의 근본은 가장 가난하고 약한 국민에 대한 친절과 배려, 돌봄임과 동시에 불법적인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떨치는, 범람하는 권력 계층들을 공명정대함으로 견제하고 감시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OECD 가입국 중 가장 적은 복지 예산을 갖고 있는 주제에 그 작은 복지 예산마저 삭감하고 강한 자 중심의 국가 운영에 전력을 기울인다.

마침내 정부는 지난 연말에 이건희 삼성 회장만을 단독으로 사면했다. 이건희는 여러 가지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지 1년도 안 되어 사면된 것이다. 이건희의 사면에 의혹의 시선을 보낸 국민들에게 그 사면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청와대 당국자는 삼성의 평창올림픽 유치 지원이나 삼성의 세종시 입주 및 투자를 암시적으로 요구하는 논평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삼성이 갖는 경제력을 믿고 정의감과 법적인 형평의 원칙을 아주 손쉽게 내팽개쳐 버렸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삼성은 어떤 가치와도 다툴 수 없는 초월적 신성 구역에 존재하는 일종의 종교적 성소처럼 보인다. 삼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한 국민의 민족정신과 얼의 집결체요, 삼성의 성취는 현대 한 국민의 국가적 성취의 집약물이라는 생각이 많은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삼성이 이룬 모든 것, 그것은 50여 년 전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이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 꿈이었다고 보는 통속적인 국민감정을 호소하여 삼성을 비호한 것이다. 삼성의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한 정부의 사면은 돈만 있으면 정의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국민에게 심어 줌으로써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모순의 괴이함을 전혀 감지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정희식 조국 근대화와 '잘 살아 보세'의 귀착지, 삼성

삼성과 같은 재벌 그룹은 엄격하게 말하면 특정 기업가 가문이 키운 순수 사기업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관치 금융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의 각종 지원과 특혜 속에 성장했다. 그것은 "5,000년 가난을 떨쳐 보자"며 등장한 박정희 군사 정부가 양육한 기업이며 사주 기업가 가문의 창의 경영이나 공세적인 기술 개발로서만 아니라, 온갖 악조건에 저임금을 참고 불리한 노동 여건을 견뎌 가며 일해 준 직원들과 삼성에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 납품하는 하도급 업체들, 중소기업에 속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일어선 기업이기도 하다.

삼성은 결국 우리 조국의 슬픈 근대화 역사에서 태어난 한국민의 정신적 열망의 집약적 외화물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민주주의 가치와 물질적 번영과 부에 대한 추구가 각축하는 전장이었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경제 성장과 번영을 위해 모든 국가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경제적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인 민주주의, 인권, 정의와 평등, 자유와 안식권을 포기했다.

이런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향한 질주는 박정희 군사 정권 이래 권력과 견고한 동맹을 맺어 온 전근대적인 재벌 기업들에 의해 추동되었다. 그 한복판에 삼성이 있다. 삼성은 국민 기업이 아닌 다국적 자본들에 의해 움직이는 다국적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성이 대한민국의 국민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은 기실 알고 보면 4%의 지분을 갖고 있는 창업주 가족들의 출자 순환이라는 독특한 제도와, 얼마 전까지 존치되었던 그룹기획구조본부실이라는 기관의 음험한 기업 공학적 경영을 통해 전체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세습 왕조적인 기업(dynastic enterprise)이다. 세습 왕조라는 틀 때문에 그 내부에서 어떤 비리가 자행되어도 공개적인 비판과 감시를 받지 않으며, 공식 회계 장부에는 드러나지 않는 천문학적 비자금을 운영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망하지 않으려고 삼성은 그 비자금을 갖고 정부 기관, 고위 공무원, 검찰의 기소권, 법관의 판결, 지식인의 날카로운 펜, 언론, 그리고 종교적 양심까지 매수한다. 비자금의 힘으로 사로잡고 아우르고 거느리고 마침내 지배하는 일종의 신적인 영향력을 무소불위로 행사하는 신성한 지휘부로 올라선 것이다.

이 세습 왕조적 재벌 그룹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있다. 삼성물산과 반도체 등 주력 기업을 통해 우리나라 국민 총생산 22%를 담당하는 국가 대표급 기업, 삼성반도체나 전자 제품을 통해 한국의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제고하는 국가 대표급 기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성의 불의와 불법을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세계를 상대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무역으로 외화를 획득하여 국부를 증가시켰고, 한국 경제의 파이를 늘린 선구자적인 기상을 과시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7년 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전 삼성구조본 소속 법무 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의 3대 죄악을 폭로하고 고발했다. 사제단과 김용철이 밝힌 삼성의 죄악은 첫째, 조직적인 비자금 조성과 탈세를 위한 회계 조작, 둘째 용인의 에버랜드 전환 사채 헐값 매수를 통한 경영권 불법 승계 및 법정 증거 조작, 셋째, 정관계·학계·법조계·종교계·언론계를 대상으로 한 로비를 통한 양심 매수 행위다.

정치권은 삼성 비리를 수사하기 위한 특검을 임명했으나, 특검은 도리어 삼성에 면죄부를 주는 지극히 미약한 기소로 종결되었다. 약 2년 이상 끌다가 작년 연말에 이뤄진 삼성 불법 승계 관련 일반 재판도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고, 정부는 급기야 이건희를 작년 성탄절 단독 사면으로 기업 일선에 복귀시켰다. 이건희 복귀는 세종시 기업 유치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에 힘을 써 달라는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이뤄진 거래라는 것이 언론과 시민들의 판단이었다.

삼성은 이른바 떡값 검사 파동에서 밝혀진 것처럼 검찰에 엄청난 양의 돈을 뿌려 장학생들을 키우고 있으며 <중앙일보>를 통해 언론계로부터 오는 간헐적인 공격을 막아 낼 방어진을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철 변호사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고급 호텔 숙박권으로 사람들을 매수하도록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장면도 나온다. 삼성은 한국의 지휘부를 돈으로 매수하여 지배한다.

그 결과 삼성의 가족으로 입적된 사람들은 보편적인 공익이나 대의가 아니라 삼성 기업의 사적 이익에 우선 복무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지휘부·언론·지식인·사법부 모두가 삼성 앞에서는 작아진다. 일반 국민들도 삼성의 경제적 위력이 내뿜는 아우라에 의해 삼성 숭배에 쉽게 빠져든다. 삼성은 도덕·윤리·정의·인권 가치 등을 삼켜버리는 무저갱이며, 부·풍요·국가적 자부심·국가주의의 상징이다.

삼성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담은 <삼성을 생각한다>.

 
 
전 삼성그룹 구조기획본부의 법무 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를 읽어 보면, 삼성 문제가 단지 정치와 경제 영역의 일탈이나 불법이라는 단순한 악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정밀한 신학적 성찰을 요하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삼성의 경영 지휘부는 로마제국의 멸망기에 나타나는 흥청망청한 부패한 귀족들과 달리, 아주 영악하게 깨어 끊임없이 정복지를 찾아 나서는 민첩성과 공격성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

분별력을 잃고 유흥과 쾌락에 탐닉하여 자기 파멸로 치닫는 명백한 악이 아니라, 작은 일에는 선을 도모하면서 더 큰 악을 범하는 교묘하게 위장된 악이다. 스스로도 자기가 하는 일들이 악임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삼성 지휘부는 확신에 차 판사를 30억으로 매수할 생각을 하고 국회의원에게 돈다발을 갖다 줄 생각을 스스럼없이 실행한다. 삼성은 우리나라의 모든 중요한 요소에 자기들의 에이전트(대리자)를 심어 둔 거대한 왕국인 것이다. 대형 법률 회사를 능가하는 300명 이상의 변호사들을 거느리고 국가 정보기관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정보망을 구축한 경제 연구소와 비선 정보 구축 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의식 있는 시민들은 삼성 문제를 알지만 그 위세에 눌려 무력감 속에 방치하거나 외면해 왔다. 삼성의 문제에 문제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김용철 변호사는 이 책을 통해 삼성의 조직적 비리를 폭로하고 삼성이 국민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공개적으로 피력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이건희 일가의 자기 보존을 위한 원색적인 금권 정치 공학에 관한 이야기이며, 무슨 이유인지 삼성의 쟁송을 분별 있게 다룰 능력을 박탈당한 무능한 검찰과 사법부 이야기이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언론의 이야기다. 그는 책에서, 삼성이 이렇게 큰 죄악들에 연루된 기업이면서도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경제라는 물신을 위해 오늘날 모든 가치를 뒤로 미루는 이른바 국민 정서 때문이라고 본다(86쪽). 떡값 검사나 기자들, 학자들도 이런 국민 정서의 뒤에 숨어 삼성 비리를 은닉하거나 모른 체한다고 볼 수 있다. 김용철이 이 책에서 부각시킨 삼성 비리 중 하나는 삼성 왕조의 경영권 세습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증언이다.

이 책이 폭로하는 또 하나의 삼성의 대국민 위장 비리는 <중앙일보>의 삼성 계열 분리 선언 책동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99년에 <중앙일보>는 삼성으로부터 계열 분리하겠다고 대국민 선언을 하지만 그것은 음험한 거짓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앙일보>의 삼성 계열 분리는 위장이었고, <중앙일보> 편집국 내부 정보 보고가 하루 두 차례씩 삼성 구조본에 전달되었다"고 폭로했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또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비판한다. 삼성에서 노조를 설립하면 어떻게 되는지 전 삼성노조 위원장 '김성환'의 고난에 찬 인생 역정이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저자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직원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 공무원의 철저한 매수로 인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왜 삼성은 노조를 무서워할까? 삼성 직원들의 급료가 다른 회사들의 급료보다 월등이 높다는 사실을 보면, 삼성의 노조 포비아의 원인은 임금 협상 때문이 아니라 딴 데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비자금 경영, 불투명 경영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노조는 너무 투명한 공조직이라서 뇌물로 매수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노조가 있다면 이건희가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자기 아들에게 삼성그룹 전체를 넘겨주기 위해 에버랜드 전환 사채 발행을 통한 불법적 경영권 승계 행위를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한 회사의 노조는 단지 임금 협상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라, 기업의 공적인 본질을 지키려는 기업 자체의 자기 검증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성은 자기반성과 점검을 수행할 기관이 없는 윤리와 도덕의 사각지대에서 돈으로 모든 것을 성취해 온 것이다. 삼성은 돈의 신적 위력을 가장 신실하게 신봉하는 물신 숭배교 종단인 것이다. '돈이 충성을 낳는다'는 삼성식 보상 원칙은 종교적 구원론처럼 잘 작동하고 있다. 실적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의 급여를 지급함으로써 삼성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직원들에게 뿌듯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심어 준다. 이것은 삼성 숭배자가 누리는 일종의 유사 구원감인 것이다(참조. 마 6:22~24).

이처럼 돈에 위력에 토대를 둔 삼성의 금권 숭배적 구원관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더러는 삼성 비자금을 한국 기업의 특수 상황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다국적 기업 삼성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비책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비자금은 단지 회장 개인이나 가문의 축재의 일환이 아니라 기업으로서의 자기 존속을 영속화하려는 비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삼성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와중에서 여차하면 몰락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고도의 기업 경영 방식의 일환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삼성의 비자금 의존적인 기업 유지나 확장 노선이 그 안에 엄청난 반기업적 불의와 죄악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건희가 운용한다고 알려진 비자금 4조 5,000억 원은 대부분 사원들과 직원들에게 돌아가야 할 임금, 주주들에게 돌아가야 할 배당금, 고객들이 맡겨 둔 보험금 등에서 갈취한 자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자금은 횡령과 배임을 통해 생긴 돈인 셈이다. 엄연히 주식회사인 삼성이 주주들과 사원들을 오랫동안 속인 결과 그렇게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용철의 책에서 밝혀졌듯이, 삼성의 비자금은 불투명하고 어두운 용처를 위해 비축되었던 돈이다. 지식인, 언론인, 공무원, 그리고 법조인의 영혼을 사는 데 뇌물로 사용된 돈이었던 것이다. 전 세계 50위권 대기업이 비자금을 갖고 대한민국의 양심을 매수하고 자기 이익에 복무하도록 역사한다는 사실은 무섭고도 서글픈 일이다. 결론적으로, 김용철은 삼성 비리의 뿌리는 비자금이며 그 비자금의 용처는 인격(영혼) 매수임을 분명하게 밝힌다(346쪽).

대한민국 국민의 물신 숭배가 바로 삼성 숭배교의 발상지

19세기 미국의 기독교 정치 사상가인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자신의 저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전 국민적 존경도 누리는 권력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권력자가 타락한 자라면 국민의 도덕성도 함께 타락한다"고 경고한다. 또한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삼성 이건희를 존경하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민 기업가로 추켜세우며, 엄중한 죄를 짓고 유죄 판결을 받은 지 1년도 안된 사람에게 사면을 단행하는 나라에서는 국민성이 덩달아 급격하게 타락하게 된다. 삼성이 겉으로는 국가 대표급 기업이지만 우리 사회의 근본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지극히 반공동체적인 암적 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명박 정부와 삼성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맘몬 숭배(Mammonism)라는 한 배에서 태어난, 쌍생아(雙生兒)처럼 제휴하여 국민성의 타락을 부추기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돈을 숭배하고 성공과 쾌락을 갈망한다. 삼성과 이명박 정부, 돈을 숭배하고 수단 방법을 불문하며 성공과 쾌락을 타락한 국민들은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당기는 동맹자들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삼성,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은 우리 국민들, 우리 자신들의 타락한 인간성, 뒤틀리고 왜곡된 기독교 신앙을 문제 삼는 행위임이 드러낸다.

돈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경배하는 것이 물신 숭배다. 이 물신 숭배의 근본은 구매력, 욕망 충족력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욕망이다. 돈 숭배는 결국 영적 존재가 자기의 욕망을 신격화하고 무한히 확장하려는 데서 생겨난다. 자기의 안전과 영원한 존속 욕구를 신격화하는 것이다. 삼성 자체가 비자금을 비축하는 이유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안정 욕구의 신격화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물신 숭배는 조직이나 기업의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원천이다. 한 기업의 영속적 존속은 비자금에 의해 가능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공평과 정의를 보좌로 삼는 하나님나라와 견고한 동맹을 맺음으로써 성취되지 돈을 통한 권력 매수, 양심 매수를 통해 결코 성취될 수는 없다. 또한 가난과 불편을 견디는 능력이 있다면 '돈 숭배교'에 빠지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8장은 물신 숭배의 본거지인 음녀 바벨론의 멸망을 그리는 묵시록이다. 여기서 두 번씩이나 "무너졌도다"라는 선고를 받은 나라는 큰 성 바벨론이다.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본거지며,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동굴이라고 불린다(2절). 바벨론은 땅의 왕들과 음행하여 정절을 더럽힌 음행의 대가로 받은 부로 땅의 상인들(23절에 따르면 왕족들)을 치부케 했다는 명성을 들었다(3절).

그러나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바 되었다(5절). 음녀 바벨론은 땅의 상인들로부터 온갖 상품을 사들였는데 그 상품 목록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 상품들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었다(12~13절). 사람들의 목숨, 영혼, 인격이 바벨론이 매입한 상품이었다. 이 구절은 바벨론이 인격과 영혼을 매입해 노예 무역을 했다는 말로 이해된다. 동시에 그것은 바벨론 체제에 저항하는 의인들의 목숨을 빼앗는 살상 행위를 함의할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음녀 바벨론 중에서 발견되었다(24절). 바벨론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외치는 선지자들과 성도들을 죽이고 부를 탐하고 축재하고 사치와 번영을 누린 도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성 바벨론을 하나님께서는 파괴시킴으로서 심판하셨다(20절, 계 14:4~5, 8). 음녀 바벨론은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으로서(14:15~18)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대변하는 예언자들과 성도들을 죽여 버림으로써 방해받지 않고 얻은 부로 자기 영화화, 자기 영속화를 꾀하며 땅의 왕들과 견고한 동맹을 이루었으나, 하나님은 홀연히 그 바벨론을 파멸시켜 버렸다. 사람들의 영혼까지 매수하여 노예화하는 음녀 바벨론을 하나님은 처참하게 심판하셨고 파멸의 바다로 집어던지셨다.

이것이 물신 숭배자의 말로다. 물신 숭배의 본거지 음녀 바벨론은 자신이 범한 죄악과 음행의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영원히 번영할 것 같은 부를 손에 넣었으나 홀연히 망한다. 돈의 힘으로 영혼을 사들이고 국가 기관의 양심을 통째로 매수하는 재벌 기업의 불법 행위와, 가난한 자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에 전혀 응답이 없는 불의한 정부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홀연히 망하는 운명이 엄습한다는 것이다.

삼성 숭배 마법 깨울 예언자적 사명자

삼성 숭배의 마법에서 국민을 깨워야 할 사명자로서의 예언자적 지식인의 분발을 기대하며 장 폴 사르트르(<지식인을 위한 변명>)와 에드워드 사이드(<권력과 지식인>)에 따르면, 지식인의 핵심 조건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거부하는 비판 정신이다. 특히 사이드는 지성인은 언제나 자신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분명하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절대적으로 권력에 흡수 고용되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하며, 어떤 권력이나 권위라도 그들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 만큼 독립적이고 비판적으로 행동할 것을 주장한다.

   
 
 

▲ 김회권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사이드는 지성인들은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적·인종적·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며, 보편적 진리를 확산하기 위하여 특정 인간들을 특권적으로 우대하는 안이한 확신들을 초월하기 위해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의 사명을 수행할 용기는 인간 스스로에게서 연원될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을 경험한 지식인들만이 이런 의미의 고독한 그러나 보편적인 지식인의 기개를 획득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점차로 기업체, 국가 기관, 정당 등의 권력에 고용된 유기적인 지식인들로 가득 차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주장을 각종 논리와 통계와 전통적 지혜의 이름으로 주창하고 있다. 이런 지식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지식인의 구원은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영적 개안을 의미하며,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계급, 국가적 기업적 특권으로부터의 창조적 탈출을 통해 보편적인 진리를 설파하는 사명인으로 거듭나는 경험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 폐쇄적이고 자기 복무적인 삼성 같은 조직체들로 가득 차 있다. 당파적 이익을 초월하는 진리를 말하는 의인들이 씨가 말라가고 있다. 모두 다 정신적으로 삼성 지향적인 기생적인 인간형으로 변질되어 간다. 물신 숭배적 자기 조직 존숭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무한 증식적 자기 확장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지식인이 더없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런 예언자적 지식인은 삼성에서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국가 기관에서도, 다른 기업체들에서도, 그리고 세속화되어 짠맛을 잃어버린 교회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김회권 / <복음과상황> 발행인,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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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시대 평화누리에서 4대강을 죽이는 4대강 사업의 실체를 알리기위한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올리는 동영상은 제1탄 라인강의 교훈 편입니다. 동영상은 계속해서 만들어져서 곧 2탄, 3탄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이 동영상을 보시고 많은 곳으로 퍼날라주시면 4대강 사업을 막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동영상을 보고 4대강 사업의 문제를 알 수 있도록 함께 동참해주세요!



고화질 영상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Here's a link to '라인강 교훈.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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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대통령이 믿는 건 돈의 신 '맘몬'
 난, 4대강에 생명의 십자가 세운다"
[인터뷰] <강은 살아있다> 펴낸 최병성 탐사보도 전문 시민기자
10.03.08 10:25 ㅣ최종 업데이트 10.03.08 10:55 김병기 (minifat) / 권우성 (kws21) / 홍현진 (hong698)
  
최병성 목사.
ⓒ 권우성
최병성

그는 지난 2년여간 틈만 나면 배낭을 메고 4대강으로 향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그리고 전국 곳곳에 산재한 저수지 등 물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번 출장 때마다 3000여컷 이상의 사진을 찍어 그의 외장하드엔 10만여컷 이상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의 커다란 책장도 강과 물의 생태계에 대한 책과 논문 등으로 빼곡이 채워져 있다. 최근 그는 <강은 살아있다>(황소걸음 출간)를 펴냈다. 발로 쓴 대한민국 4대강 사업 재앙 보고서다. 

전업기자도 흉내내기 힘든 4대강 사업에 대한 탐사보도 시민저널리즘의 전형이다. 최병성(47) 시민기자는 목사다. '장로 대통령'은 4대강에 불도저와 굴착기를 총집결시키고 진두지휘하고 있는데, '목사 시민기자'는 온몸을 던져서 이를 막고 있다. 아이러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지난 4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최 목사는 "이명박 대통령이 믿고 있는 것은 돈의 신인 맘몬"이라고 규정했다. 왜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가 펴낸 263쪽의 책 속에 그 이유가 담겨있다.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대국민 사기극"  

"이명박 대통령이 꿈꾸는 4대강의 비전은 여의도와 잠실 앞의 한강입니다. 손도 발도 담글 수 없고 사람과 강이 단절된 그 곳. 얼마전 <조선일보> 기사도 언급했듯이 4급수입니다. 성직자가 순화된 말을 써야하지만, 사실 '똥물'입니다." 

최 목사에게 4대강 사업을 한마디로 규정해달라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더 험한 표현이 되돌아왔다. 

"국토와 국민, 그리고 생명에 대한 국가권력의 테러입니다. 그럼에도 혈세를 써가면서 강을 살린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니,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대국민 사기극입니다." 

그는 이어 "이명박 장로님이 펼쳐보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되어 있고 이 땅의 생명을 보존하고 유전케하라는 게 기독교에서 믿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생명을 단절시키고 파괴하는 4대강 사업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맘몬의 뜻"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외국의 강 살리기와 '이명박표 강살리기'의 차이점을 물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을 통해 기후 이상에 대비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이 맞다면 독일 등 선진국은 이미 150년, 200년 전에 강을 콘크리트 수로로 만들어 기후 이상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100여 년이 지나면서 지하수가 고갈되고 홍수가 났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수로를 다 뜯어내고 모래톱과 여울을 만들어 원래의 강으로 복원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이명박표 강살리기는 1-2세기 전에 선진국에서 했던 실패를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녹색 뉴딜'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며 강살리기 사업을 통해 일자리도 만들고 지역경제도 살리겠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는 이같은 주장에 대해서도 "당장 들통날 거짓말"이라고 단언했다.  

"4대강 사업 현장에 가보세요. 굴착기과 중장비만 있습니다. 또 사업비 22조 원 중 5조7천억 원이 준설비용입니다. 요즘 삽으로 준설하는 데가 있습니까? 파이프 흡입 기계로 준설하는 데, 사람이 없어도 그냥 돌아갑니다.  

최근 한강 이포교 공사현장에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경비가 쫓아왔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다리에 경비를 세워놓고 사진을 못 찍게하더라고요. 불편한 진실을 가리려고 고용한 경비, 이게 4대강 사업이 창출한 일자리입니다." 

그는 이어 "부자감세로 인해 지자체 교부금이 몇조 원씩 삭감돼 올 7-8월 이후로는 공무원들 월급 줄 돈도 없는 상황인데 4대강 사업에만 세금을 쏟아붓고 있다"면서 "지역의 중장비업체들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덤핑을 해서 참여하고 있고, 큰 몫을 챙기는 곳은 턴키방식으로 수주한 서울의 대형 건설업체들뿐"이라고 말했다. 

전체 하천의 1% 공사로 홍수 예방하겠다고?  

  
최병성 목사.
ⓒ 권우성
최병성

그는 또한 "4대강 마스터플랜에 적시된 사라지는 농경지, 그러니까 강변의 채소 경작지와 보(사실상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는 농경지가 5천7백만평에 달한다"면서 "여기에서 쫓겨난 많은 농민들이 무직자나 거리의 부랑자가 될 것이고, 이로인해 채소류 가격이 폭등하면 국민들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는 4대강 사업을 통해 물부족을 해결하고 홍수를 예방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 목사는 이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일축했다.  

"정부 논리를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4대강 사업 공사구간은 634km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하천의 길이는 64만km입니다. 전체 하천의 1% 구간을 공사해서 홍수를 예방하겠다는 것은 말장난입니다. 게다가 공사구간인 4대강의 경우 홍수가 나지 않습니다. 홍수는 지천과 샛강에서 납니다.  

우리나라 하천법상 최상위계획인 수자원종합장기계획에는 '대한민국은 더 이상 물부족 국가가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치수장과 정수장의 가동률은 설계 용량의 50% 미만입니다. 그만큼 물이 남아돌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이 부족한 곳은 수도공급률이 40% 미만인 섬지역과 산간지역인데, 4대강에 모아놓은 물을 섬과 산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최 목사가 가장 크게 우려하는 바는 식수대란이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녹색은 녹조류가 똥처럼 떠다니는 죽음의 녹색"이라면서 '공사중'과 '공사완료 후'의 식수 대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최근 함안보 등에서 발견된 오니토에 대해 정부는 수질오염이 아니기에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준설의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1차적으로 파이프로 강바닥을 준설할 때 탁수가 일어납니다. 대대적으로 준설을 하면 오니토에서 나온 치명적인 성분들이 강물로 퍼져가겠지요.  

또 우리나라 수중 준설의 경우 모래만 뽑아내는 게 아닙니다. 70% 이상이 물입니다. 오니토와 섞인 중금속 물을 침사지에서 거른 뒤에 다시 강물로 내보내야 하는데 낙동강만해도 4.4억톤을 준설합니다. 이명박 정권 3년, 아니 그 이후 정권 5년동안에도 그 많은 모래를 침전시킬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 공사 현장을 갔는 데, 침전지가 5평 미만이에요. 황당한 일이지요. 금강쪽 현장에 갔는데 거기에는 침사지도 없어요. 이게 현실입니다." 

10조 원 들여서 수질개선하고 2조8천억 들여 식수원 다른 데로 옮긴다? 

그는 이어 "정부는 수량이 풍부하면 물이 희석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물이 깨끗해진다고 말하고 있는데, 물이 정체되면 수질이 악화될 뿐 아니라 대청댐의 경우 비가 온 뒤에 녹조가 가장 심하다"면서 "농경지에서 흘러든 농약과 도로 등에서의 오염 물질이 다 강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낙동강에 10조 원 이상을 들여서 수질을 개선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2조8천억 원을 들여서 낙동강의 식수원을 남강댐과 지리산댐으로 옮기겠다고 말하고 있다"면서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강이 살아나는데 왜 취수원을 옮겨야하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국민이 낸 혈세 22조원 만 쏟아부으면 4대강 정비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업비 22조원에 포함되지 않는 돈으로 밝혀진 것을 한번 얘기해볼까요? 소수력 발전 2200억 원이 제외됐습니다. 또 농지보상비를 1조2천억 원으로 잡았는데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4대강 준설로 인해 강바닥에 묻혀있는 도시가스 관로를 이전해야 합니다. 다리밑까지 준설을 해야 하는데 다리가 흔들리니까 안전공사를 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부산역에 갔더니 부스를 만들고 4대강 사업 홍보책자를 주고 있더군요." 

그는 "미국 플로리다의 키시미강(Kissimmee River)은 10억불을 들여서 운하로 만들었는 데 지금은 100억불을 들여서 원상복구하고 있다"면서 "키시미강 복원을 한 자료에는 10억불의 10배인 100억불을 들여서 공사를 하지만 원래의 자연으로 되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고 적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살아있는 4대강을 22조 원을 들여서 죽인다면 후손들이 이를 복원하는 데에는 220조원을 들여도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을 영영 복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최 목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람들에게 기억이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됐으면 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인데 인터넷에서는 '쥐XX'라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권위를 상실한 대통령, 목사로서 안타깝습니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이 대통령 스스로 일개 건설사의 사장이 아니라 전국민의 소통을 책임지고 있는 국민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4대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제가 나서서라도 기념비를 세워드리겠습니다." 

최 목사가 지난 2년간 발품을 팔면서 강에 대한 애정을 녹여낸 책의 출판기념회는 오후 6시30분에 서울 중구 정동의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 홀에서 열린다.   

"생태박물관 지켜낼 수만 있다면…"

쓰레기 시멘트 박사가 '4대강 박사'된 까닭

 

  
▲ 최병성 목사의 책 표지
강은 살아있다

"이 책 한권으로 열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최병성 목사의 말이다. 그는 "지금 많은 사람들은 4대강 사업에 대해 막연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이 책을 보면 구체적으로 엄청난 재앙임을 알 수 있다"면서 "이 책을 이웃에게 선물하는 것 자체가 4대강 사업을 막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보면 작심하고 책 장사에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계산은 저잣거리의 셈법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99년도에 서강 싸움할 때 배웠어요. 누군가 한 사람으로 인해서 살아있는 생태박물관인 강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손해는 중요한 게 아니지요. 강의 보존가치는 죽어있을 때보다 수천배, 수만배가 넘는겁니다. 저는 그걸 10년전에 터득했습니다." 

하지만 목사인 그 역시 생활인이다. 없는 살림에 돈과 시간을 거의 4대강 싸움에 바치는 남편의 모습이 부인에게는 곱지않게 보일 수도 있다. 

"이틀, 삼일에 해야 할 일을 하루에 몰아서 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열심히 부인을 섬기고 있습니다. 집사람은 돈에 대해 초탈해 있습니다. 내가 청량리 588에서 걸인들이랑 함께 사는 모습에 반해서 결혼을 했으니까요." 

그는 "어떤 사람들은 왜 목사가 교회에 있지 않고 4대강 싸움을 벌이고 있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전 이게 목사가 해야할 일이라고 대답한다"면서 "지금의 활동은 4대강 곳곳에 십자가를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년에는 교회에 가고 싶은데 만날 돈만 내라는 교회가 싫은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한편 그는 일반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쓰레기 시멘트 박사'로 유명하다. 그는 블로거 활동을 통해 폐타이어와 철 쓰레기 등 산업 폐기물을 섞어 만든 '쓰레기 시멘트'의 유해성을 알렸고, 시멘트 업계가 권리침해 신고를 하면서 블로그 글이 삭제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최병성 목사의 게시물을 삭제한 조치는 잘못된 것"이라며 최 목사의 손을 들어줬다. 방통심의위의 게시물 삭제가 행정 행위라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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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한기총과 함께 죽을 것인가, 개혁하여 함께 살 것인가?”

한국기독교는 1960년대 이후 30여 년간 계속된 개발독재시대에 급성장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시대의 물량주의와 성장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도 그러한 물량주의 성장의 한계와 폐해를 깊이 인식하여 보다 인간적인 사회, 지속가능한 성장을 모색하였으나, 슬프게도 지금 그러한 시도들이 수구기득권세력에 의해 속속 좌초되는 뼈아픈 경험을 하고 있다. 같은 기독교인 입장에서 가슴 아프지만 그 중심에 한국기독교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지금 한국교회가 끝을 찾기 힘들만큼 추락하고 있다.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2004년 한국인 종교의식’에 따르면 비종교인들이 느끼는 각 종교에 대한 호감도는 불교(37.4%), 가톨릭(17%)인데 비하여 개신교는 12. 3%에 불과했다. 또 2005년 ‘한국교회미래를준비하는모임’ 조사에서 종교 지도자의 자질우수성을 묻는 질문 역시 개신교(12.0%) 천주교(31.8%) 불교(21.2%)로, 개신교 종교지도자에 대한 비종교인의 불신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2009년 7월에도 <시사저널>이 실시한 한국인 직업인 신뢰도 조사에 의하면, 총 33개 직업군 가운데 목사는 25위를 기록해 비교직종인 신부(11위), 승려(18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하위군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무엇보다 도덕성과 신뢰성이 높아야할 종교와 그 지도자들이 신뢰를 얻지 못할 때 얻게 되는 당연한 결과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돈도 많고, 큰 교회들도 우뚝우뚝 솟아 있으나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신뢰를 잃고 민심이 떠난 종교는 곧 허물어져버릴 건물일 뿐이다(마 23:37~24:2).

한기총은 삼일절에도 버젓이 성조기를 들고 친미를 소리 높여 외치는 집회의 주관하고, 종교교육을 내세워 사학기득권을 지키려 앞장섰고, 기독교계의 이명박 후보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교묘한 지원을 일삼고, 작년 촛불정국에서 국민들의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굳건한 지지를 표명하는 등 대통령 탈선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랜드 사태와 같은 비정규직 문제나 용산참사 같은 인권유린 상황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는 양면성과 권력지향성을 보여 왔다.

그럴 때마다 한국교회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역사의식도 없고, 시대정신도 모르는 종교기득권자들처럼 조롱을 받아야만 했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기득권의 종교인 것처럼 매도되고, 예수가 부자와 권력자들의 옹호자인 것처럼 욕하는 소리들을 듣기란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가?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별명은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지키시는 분(신 10:18, 14:29, 시 146:9, 렘 22:7)이며, 예수의 별명은 보잘 것 없는 자들의 친구(눅 7:34)였다. 그래서 처음 교회는 약한 자, 가난한 자들의 독무대였다(행 4:32~35). 그들 자신이 힘도, 돈도, 배경도 없는 자들이었기에 그런 사람들의 사정을 대변할 수 있었다(약 2:5, 6).

보수나 진보, 좌파나 우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수구와 기득권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며, 사회의 죄악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한기총 개혁에 나선다. 한기총의 잘못된 행태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기독단체 및 시민들이 힘을 합쳐 ‘한기총 개혁을 위한 기독인네트워크’(가칭)를 만들었고, 지난 12월 28일 “한기총의 신학적/역사적 실체를 묻다”는 제목으로 한기총 진단토론회를 가졌다. 또 다음 날인 12월 29일에는 한기총 대표회장 선출이 열리는 곳 앞에서 “한기총 개혁을 열망하는 기독시민 공동기도회”를 열었다.

우리는 한기총과 새로 선출된 이광선 대표회장 앞으로 한기총의 개혁을 위한 공개서한과 공개입장을 밝혔다. 공개입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기총은 이유여하를 가리지 말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것이 바로 믿는 이들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마 14:16, 신 15:7~11)을 받아, 어떤 정치적 상황변화와 관계없이 대북 인도적 지원만큼은 당장 재개하도록 정부에 건의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2. 한기총은 억울한 자의 한 맺힌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창 4:10, 출 2: 23)을 본받아, 용산참사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나설 것과 구속자를 선처하도록 호소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3. 한기총은 땅도 안식하게 하라하신 하나님의 명령(레 25:4)을 본받아, 온 국토를 무분별하게 파헤치는 잘못된 대형 국책사업들을 재검토하고 정부가 창조질서 보존의 정책을 펼 수 있도록 건의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4. 한기총은 소유권보다 생존권이 우선이라는 성경의 기본정신(신 24:6, 10~22)을 명심하여, 정부, 사회와 교회가 이윤창출과 무조건적 성장보다 고용보장과 확대, 사회복지예산 증액, 가난한 환자의 무상치료에 나서도록 앞장 설 의지가 있으십니까? 

5. 한기총은 적어도 하나님이 무상으로 베푸신 땅의 혜택만큼은 누구나 고루고루 누리도록 하신 지엄한 명령(레 25:23~28, 전 5:9)을 따라, 부동산 투기를 엄단하고 관련세제를 강화하도록 건의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6. 한기총은 과도한 일과 혹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는 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의 해방의지(출 2:23~25, 신 5:14)를 존중하여, 노동자들이 최소한 주1회는 반드시 쉬도록 명문화하고, 성별, 민족, 학력 등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적극 노력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7. 한기총은 하나님의 공직을 맡는데 돈이 오가는 게 얼마나 큰 죄악인지(신 16:19) 통감하여, 한기총 및 교단, 교회 임직선거에 고질적인 금품, 청탁과 대가 등이 오가지 않도록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8. 한기총은 교회가 혈통이나 인간적 친소관계가 아닌 바른 고백(마 16:17~19)과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행 1:21~26)를 통해 세워졌음을 인식하여, 인본주의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교회(목회)세습을 근절할 방안을 지금이라도 마련하시겠습니까? 

2009년 12월 28일 

한기총 개혁을 위한 기독인네트워크 

한국교회는 지금 비대해진 수구기득권 권력기구 한기총과 함께 몰락하느냐, 아니면 잘못된 한기총의 탈선을 막고 예수의 가르침으로 거듭나 함께 살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이 한기총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잘,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바로 우리가 이 겨울에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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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대한 영향력만큼이나 슬픈 한국 기독교

대한민국 헌법은 국교가 인정되지 않는, 종교적 자유국가다. 그러나 고려사회가 불교로 인해, 조선사회가 유교로 인해 그랬듯이, 단언컨대 한국현대사는 기독교로 인해 울고, 웃었다. 근대화와 민족운동, 일제식민시대와 분단과정, 성장과 민주화운동 등 한국현대사 모든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기독교의 존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엄연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10명 가운데 무려 3명이 개신교 장로라는 사실, 그리고 현재 18대 국회의원 중 개신교인의 비율이 우리나라 총인구 대비 개신교인 비율인 18.3%(2005년 통계청)의 두 배가 넘는 무려 39.5%에 달한다는 점으로도 확인된다. 또 가톨릭이나 불교의 움직임에 비해 한국교회나 그 지도자들의 동향은 항상 여론의 초점이 되곤 한다. 한국개신교는 다른 종교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성적인 신도들을 자랑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안티’세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산술적인 비중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밉든 곱든 한국사회와 민족을 위해서라도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살아나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기독교와 교회의 건강성은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저 사회적 평가로만 그러한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하는 자화상 자체도 그렇다. “최근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2004년 한국인 종교의식’에 따르면 비종교인들이 느끼는 각 종교에 대한 호감도는 불교(37.4%), 가톨릭(17%)인데 비하여 개신교는 12. 3%에 불과했다. 또 2005년 ‘한국교회미래를준비하는모임’ 조사에서 종교 지도자의 자질우수성을 묻는 질문 역시 개신교(12.0%) 천주교(31.8%) 불교(21.2%)로, 개신교 종교지도자에 대한 비종교인의 불신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구교형, 사회선교 한 걸음, 164쪽)

올해 2009년 7월 <시사저널>이 실시한 한국인 직업인 신뢰도 조사에서도, 총 33개 직업군 가운데 목사는 25위를 기록해 비교직종인 신부(11위), 승려(18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하위군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 한국 기독교 탈선의 뿌리

사회학적 요인들을 말하기 전에 그것은 한국 기독교와 교회가 예수정신과 복음으로부터 탈선한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매우 권력지향적이고, 성장중심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은 한국교회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개신교는 19세기 말 주로 미국선교사들을 통해 확산되었고, 20세기 초에는 이미 평양 등 서북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강인철에 의하면 1932년 서북지방 개신교인이 전체의 48%를 차지하고, 30년대 말에는 장로교 전체의 60%에 이를 만큼 왕성했다고 한다.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

그러나 일제식민지가 더 이상 ‘순수한 종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충성을 강요하자, 서북중심의 교권세력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에 앞장섰고, 해방이 되도록 자신들의 교권을 지켜갔다. 해방 후 이북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 세력과 기독교는 주일선거문제, 정치적 입장차이 등으로 사사건건 부딪혔고, 남북정부가 들어선 1948년을 전후하여 특히 신앙의 자유를 위해 월남하는 기독교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신학적으로는 보수주의요, 정치적으로는 극단적 반공주의자인 이들은 월남한 이후 남한에서의 적응에 성공하여 이후 한국교회의 주류가 되며, 한국사회에서도 든든한 반공안보정책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런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친일경력의 콤플렉스를 숨기고 이북정권과의 피해의식이 맞물려 더욱 적극적으로 정권에 밀착하였고 친미와 반공주의자가 되어 갔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선교모국이었던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고 그의 후원을 받은 장로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하자 적극적으로 정권을 지지하며 남한 교회와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여 갔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정부요직을 맡았던 개신교인들은 전체의 40%에 육박했을 정도였다고 한다(강인철).

이북 정권은 60-70년대를 거치면서 눈에 보이는 교회들을 없애 버렸고, 이남에서는 대다수의 교회와 지도자들이 독재정권에 침묵하거나 적극 지지해 주었고 그 대가로 당시로서는 아주 예외적인 자유를 누리며 급성장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과 함께 한국교회는 급성장했다. 그것은 강력한 1인 지도자 아래서 ‘손에 잡히는 성장과 부흥’을 주도해 간 박정희 정부의 멘탈리티가, 카리스마적 목회자 아래서 질병과 가난을 벗고 성공한다는 당시 한국교회의 영적 분위기, 메시지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형태는 조금씩 달랐지만 박정희 정권의 아류인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까지 대동소이하게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0여 년 간 철옹성처럼 굳건해 보인 군사독재정권도 경제성장과 중고등교육의 확산과 더불어 사회분위기의 개방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총칼로 마냥 억누를 수만은 없게 되었다. 부마항쟁과 10.26(1979년), 민주화의 봄과 5.18(1980년),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대항쟁(1987년), 대학가의 통일운동과 잇따른 방북(1988~1989년) 등 권위주의 정부도 더 이상 힘만으로는 변해가는 시대분위기를 막아내기 힘들어진다. 이러한 시대변화는 단지 권위주의 정부만의 고충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종교기득권을 유지해오던 주류교회에도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미 6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까지 계속된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과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통일운동을 기독교비주류세력이었던 진보교회 및 목회자들이 앞장서 이끌어가기 시작한 것이 더 큰 위기의식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3. 수구와 기득권 추구로는 한국교회 이끌 수 없다.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의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88선언)은 같은 해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에 상당부분 수용될 만큼 매우 획기적인 방안이었지만, 오히려 주류 한국기독교계는 이 선언에 크게 반발하는 성명들을 잇따라 낼만큼 반발했다. 급기야 1989년 1월 당시 한국교회 얼굴이던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계 원로들의 회동에서 “교회협이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없다”고 발표하며, 새로운 연합기구 결성을 공식화했다.

이어 같은 해 3월 기장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이 더 큰 자극이 되어, 4월 발기총회에 이어 마침내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가 탄생한다. 이러한 한기총의 냉전적 대북인식은 한기총을 출범시키고 이끌었던 초기 주요 인사들이 거의 월남자들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89년 1월 남한산성 회동 참석자 총 10명 중 9명이 월남자였고, 창립준비위원장 한경직 목사를 비롯해, 5대 최훈 목사에 이르기까지 초기 대표회장 중 1대 박맹술 목사만 제외하고는 모두 이북 출신이다(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강인철 참조). 이런 시각을 대변하듯 지금껏 한기총은 특히 대북정책에 관한 한 매우 극단적인 냉전인식을 표출해 왔다.

또한 교회세습이나 목회자 비리, 목회자 납세, 양심적 병역거부, 사학법 문제 등의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서도 한기총은 갈수록 민주화되고 개방돼 가는 사회의식과는 동떨어지게도 매우 개인적이고, 사익 추구적이며, 시장만능주의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한기총이 들어선 후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한국교회의 대 사회적, 정치적 발언은 매우 잦고, 강해졌다.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 집권 이후 한기총은 가장 적극적인 반정부단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필자는 그것을 기독교계와 사회에 대한 기득권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앞서 살펴봤듯이 30년 군사독재정부 시절 정권합리화의 댓가로 온갖 특혜에 길들여져 버린 주류 한국교회는 모든 종교를 다른 종단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상대적인 차별처럼 느꼈고, 개발독재시대 목회스타일을 크게 벗지 못한 교회지도자들의 민주화, 개방화 추세에 대한 거부감은 갈수록 커져갔다. 2000년대 들어와 한국교회 대표적 지도자들이 거듭 정치세력화에 앞장서는 것은 실추된 한국교회 이미지와 영향력을 정치권력 획득을 통해 돌파해 보려는 골육책으로 보인다.

한기총이 그저 보수적 기독교기구라면 얼마든지 좋다.

소중한 가치를 지키려는 태도를 보수라고 정의한다면,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던 선지자들이나 아버지하나님께 순종을 외치셨던 예수님이야말로 원조 보수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한기총은 보수가 아니었다. 같은 땅 북녘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가는데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지 않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하나님은 땅은 사고나 팔지 못하며 그 혜택을 반드시 나누라고 말씀하셨는데, 부동산투기수익을 축복처럼 허용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교회와 목회자 부정에 대한 시사프로그램 방영은 죽기 살기로 막아내면서도 용산참사 희생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은 애써 외면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소유권이나 사유재산제를 하나님의 희년법보다 떠받드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숫자에 대한 자존심과 기득권이다.

이광선 한기총 신임 대표회장이 선출되었다. 나는 좀 순진하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광선 신임회장에 기대를 걸고 싶었다. 그가 사학운영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한 개정사학법을 다시 뒤집기 위해 삭발까지 하면서 앞장섰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나마 교단이나 교계 내에서 비교적 깨끗하고 나름 소신있는 비주류로 알려져 있다기에 기대가 좀 있었다.

그러나 대표회장 선거에서 한기총 소속 각 교단 총회장과 총무들을 무료로 이스라엘 여행 보내주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걸 공약으로 내걸었다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한기총은 어떤 조직이기에 예수님 팔아 헌금을 털어 매관매직하겠다는 소리를 몰래 숨어서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떠들어댈 수 있는지.

이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이름처럼 한기총이 명실상부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연합기구가 되려면 66개 교단, 19개 단체의 막강한 연합체라는 위용을 자랑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성명, 행사 등 모든 활동들이 성경과 기독교세계관에 비추어 어떤 근거를 갖고 있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명예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사사건건 책임지고 답변해야 한다. 정통이니 주류니 보수니 얼버무리지 말고, 정말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것이 지난 20년간 한국교회 대표로 명의를 도용당한 우리에게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임을 한기총은 명심해야 한다.  






구교형목사(성서한국사무총장/ 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 이글은 2009년 12월 28일 한기총 진단토론회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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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차선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라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10. 1. 9. 00:4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이글은 지난 1월 7일 사랑의교회 건축관련 기자회견의

추운 날씨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라는 바울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주일(1월 10일) 열릴 공동의회에 앞서 사랑의교회 측과의 비공개 면담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공동의회 이후에 만날 수 있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이에 교회 측의 대화 의지에 진정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오늘 기자회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교회는 보편적 교회의 한 지체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이웃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소위 대형 교회로서 거의 유일하게 교계와 사회로부터 신뢰와 칭찬을 받아온 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지난 수년간 한국교회 개혁을 아픈 마음과 뜨거운 가슴으로 외쳐 오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원로목사로 섬기고 계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교회가 지금 결정적으로 잘못된 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사랑의교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거나 완벽한 제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이웃 교회가 결정적으로 잘못된 길에 접어들고 있을 때, 이를 만류하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권유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한 지체된 자들의 중요한 책임이라고 믿을 뿐입니다.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부재요 결핍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차선이 최고의 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악의 본질입니다. 차선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최악이 아니라 오히려 차선입니다.

사랑의교회는 지금 다양한 차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몰려드는 성도들을 위한 안전한 건물의 확보, 차세대를 위한 인프라 구축, 규모 확대를 통한 선교, 사회복지, 제자 훈련의 강화, 강남 지역 사람들의 변화 등을 들고 있습니다.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바로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길, 즉 자기 비움과 낮아짐, 그리고 가난과 고난, 죽음을 통한 부활의 길이 설 자리를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득훈 목사. ⓒ뉴스앤조이 백정훈  
 
사랑의교회는 노골적인 기복 신앙을 말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승리주의 신앙을 설파하며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사랑의교회는 반대로 이 땅에서 성공하고 승리함으로 하나님나라를 펼쳐갈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강남 지역의 성공한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와 이념을 갖고 살면서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키겠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설사 교회로 몰려온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세속적 가치와 영역의 확산일 뿐입니다.

이런 슬픈 현실을 어찌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나라와 사랑의교회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부디 저희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지금이라도 돌이켜 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길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박득훈 목사 /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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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님께 (뉴스앤조이 기사)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09. 12. 18. 12:23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눈 뜨기를

제 이름은 고세훈입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신도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을 뵌 적은 몇 차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만난 적은 없습니다. '사랑의교회'에 몇 번 가 보기는 했지만, 그곳 교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득 이 시기에 옥 목사님을 수신인으로 편지를 쓰고픈 마음이 계속 저를 붙들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지체의 하나로서 같은 편끼리 투정 부린다 생각하시고, 부디 이 느닷없는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공개편지인 것은 이미 '사랑의교회' 이전 문제가 공론화했고, 또 저로서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형식의 글이 됐습니다.

제게는 벌써 20년도 더 전 미국 유학 시절, 옥 목사님이 쓰신 <나의 고통 누구의 탓인가>를 몇몇과 함께 읽으며 감동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사이는 제 아내가 틀어 놓는 옥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이따금 들으며 옥 목사님의 '신학적' 근황을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한국 교계 안팎의 상황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마음을 울리는 설교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옥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말씀에 갈급한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빗줄기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제 마음속에 옥 목사님께서는 뭇 대형 교회들의 목사님들 중 하나여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 혹은 깊은 신뢰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따금은 옥 목사님께서도 자신의 설교에 대해 자유로움을 못 가지신 것은 아닌지 하는 답답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왠지 바로 핵심을 치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안타까움 같은 것입니다. 혹시 어떤 경계(인의 심정)에 갇혀서 목사님 스스로도 갑갑해 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에 젖어 보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반쪽 진리가 횡행하고 방송 전파에서는 거의 약장수 수준의 '말'들이 설교라는 이름으로 범람하는 세상인지라, 제가 너무 민감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옥한흠 목사 제자 훈련 성공 사례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 제일 먼저 터져

얼마 전에 있었던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가 문득 생각납니다. 두루 알다시피, 신자유주의적 경제 현상의 중심에는 노동 유연화 정책이 있고, 노동 유연화 정책의 가장 보편적인 귀결이 다름 아닌 비정규직의 양산입니다.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노동 인구의 6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이는 이른바 선진국의 2-30%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기업하는 사람들과 기업에 돈을 빌려 준 금융권에게 비정규직이야말로 이윤 확대를 위한 가장 매력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비정규직처럼 항시적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한 국가 복지 수준이 매우 열악합니다. 국민총생산 대비 국가의 복지 관련 지출 또한 선진국의 25%에 불과하니까요. 기업은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국가마저 그들을 내치는 형국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 삶이 거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기독교를 전면에 걸고 출발했던 이랜드라는 기업에서 그 문제가 가장 먼저 터졌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랜드는 기독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기업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영 논리가 압도적인 기업임을, 그것도 다른 보통의 기업들보다 선도적으로 만천하에 보여 주었던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에 투철하여 기업을 운영한다 한들 일반적으론 존경받을 일은 아닐지 모르나 책잡힐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애초에 내걸었으며, 그것도 다름 아닌 비정규직 문제로 일반 기업들에게 '모범'을 보일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지요.

한때 그 기업은 옥 목사님 제자 훈련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혔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이 자신이 경영하는 대형 마트의 매장에서 휴게실을 없애고 기도실을 만들고는, 기도실 벽면 곳곳에 "우리 회사를 더 성장하게 해 주세요", "세후 이익 x% 달성", "총매출 00억 달성" 같은 기도 제목을 내걸었답니다. '기도실'은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를 빙자한 '장사하는 곳'이 돼 버린 것이지요. 심하게 말하면 장사를 위해 기독교가 동원된 것입니다. 그쯤 되면 그것은 기독교 원리를 삶에 적용하는 차원에서의 실패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의 문제입니다.

저는 올해 초인가에 출판된 이랜드 아주머니들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참담한 노동 여건을 책으로나마 접하고는, 계산대 앞 긴 줄에 서서 가끔 불평을 했던 제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느닷없이 이랜드 문제를 거론해서 목사님께 당황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랜드 문제가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 사역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첫 번째 사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저만의 아전인수인지요. 당시 옥 목사님께서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목사님께서 공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실 저로서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 누적된 수순의 자연스런 결과

그러다가 이번에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많은 얘기들이 오갔지요. '사랑의교회' 교인들의 압도적인 다수가 건축 헌금을 작정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것이 일으킨 교계 안팎의 파장에 대한 현 담임목사의 이상한 독려에 관한, 제가 보기엔 기이함을 넘어서 충분히 흉흉하다 할 수도 있는 말들까지 그 목사님 입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혼란케 만들었던 것은 옥 목사님께서 그 모든 일에 대해 보이신 반응이었습니다. 과연 놀라야 할지 아니면 태연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섭섭하실지 모르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애초에 옥 목사님을 저희 쪽에서 오해했든, 아니면 옥 목사님께서 대형 교회에 대한 입장을 스스로 바꾸셨든, 어느 쪽이든 실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도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될수록 빠른 시일 내에, 옥 목사님께서 깊고 명쾌한 입장을 교계 일반을 대상으로 표명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처음 '사랑의교회' 이전 관련 기사를 접했을 때, 저의 심정은 '사랑의교회, 너마저!'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꽤 오랫동안 '사랑의교회'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 하던 일들이 누적돼 오다가 마침내 이번에 교회 이전 문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것이 온 것 아니겠냐는 생각 같은 것이지요. 이런 말씀까지 드리긴 뭐하지만, 얼마 전부터 '사랑의교회'는 무언가 바빠지고, 좋게 말하면 활기를 띠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왠지 그런 변화를 지켜보는 저와 제 주위 많은 사람들은 불안하고 때로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조마조마했습니다. 무엇인가 미덥지 못하고 아슬아슬했습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교회 조직이란 것도 교회의 규모에 맞게 운영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과 공의를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한 교회 공동체의 본래 목적과 별개로, 마치 그 자체가 합리적 목적을 지닌 것처럼 운영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고 말 것입니다. 혹시 이번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교회가 커지면서 수단이 목적을 점차 압도해 가는, 한국교회의 고질적이고 통상적이고도 지속적인 어떤 경향이 마침내 다다른 지점은 아닌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점에서 '사랑의교회'는 다른 대형 교회들과 너무나 닮아 있었고, 이번만은 예외라는 증거를 도무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교인 숫자가 늘어난다고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사랑의교회'가 그간 성취한 것들을 폄하하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 문제라면, 저는 어떤 신학적인 입장을 피력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합니다. 단지 한국 교계가 걸어온 지난날들을 돌아보면서, 수적으로 양적으로 교회인을 양산하는 일이, 다른 쪽에서는, 잘 포착되지는 않지만, 진정한 신앙인들을 뭉텅뭉텅 덜어 내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가 큰 쓰임 받는다? 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어떤 사람들은 큰 교회가 큰 쓰임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말은 '쓰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심'을 무시한 궤변입니다. 교회는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 땅에서 결실을 맺어 나갈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소관을 나의 소관으로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교만이요 곁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구제나 봉사의 문제라면, 기독교에서 소위 이단시하는 많은 단체나 세속적 집단들 가운데도 헌신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진정으로 약자를 돕기 위해 애쓰는 곳은 널려 있습니다. 무릇 자선의 윤리란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포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교회의 이름을 구태여 빌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필요조건일지언정, 진정한 기독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열매로서 그냥 맺어지는 것이며, 모든 열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해서 위로나 자랑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전장에서 정의 아닌 승리가 지고의 가치가 될 때, 맹목적이고 공격적인 애국주의가 판을 치기 쉽습니다. 일부러 조심하고 부단히 경계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사랑과 정의이되, 결코 이 땅에서의 승리를 장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승리케 하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나는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대학에 합격해야 하고, 큰 교회를 건축해서 큰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남은 소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큰 교회는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닙니다.

대형 교회가 큰일을 못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큰 교회니까 큰일을 한다는 말은 큰일을 하기 위해 부자가 돼야 한다는 말처럼 위험한 억지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래 크기를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속성이고, 죄가 부추기는 인간의 경향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만 놔두면 대형화는 거의 자동적으로 더 큰 대형화를 추구합니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현재 영적 상태에 비춰 볼 때 특정 교회의 대형화가 그 교회의 영적 진운을 긍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대형 교회로 나아가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축복이니, 영적 성장이니 하며 자만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개인(의 부)이 그런 것처럼, 교회가 커지면, 자기 의가 덩달아 커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용하시기가 더 어려워지기 쉽습니다. 크기는 영적 상태와 긴밀히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 시절과 큰 교회 시절, 교인들이나 목회자의 영적 상태가 같을 수 없습니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자와 영적 상태가 같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가 부의 문제를 그토록 경고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부의 축적 과정이 영적 과정이듯이, 교회의 크기의 문제는 곧 영적인 문제이기 쉽습니다. 왜 우리는 '부의 기만성'(deceitfulness of riches)(마 13:22)에 관한 예수의 경고를 예배당의 크기에 적용하려는 용기와 지혜를 갖지 못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교인 몰려드는 현실은 재앙

크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기는, 지식이 그렇고 부가 그런 것처럼,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교회가 작고, 지식이 적고, 부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날로 대형화하고, 지식인은 넘치고, 부자들은 많아지는데, 빈곤과 소외, 양극화와 불안은 커져 가고 있습니다. 준비된 교회, 준비된 지식인, 준비된 부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말했듯이 세 살배기에게 억지로 살을 찌운다 해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건강한 유아라는 점을 반증해 줄 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재앙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지식을 쌓고 부자가 되는 것이 그 개인에게 재앙인 것과 꼭 같습니다. 그때의 부와 지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방치하신 것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서 교회 건물이 감당하지 못할 즈음, 오히려 교회는 이미 그때부터 발전 방향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양적인 외양에 취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물량적 성장 자체가 목적이 돼서 복음은 이미 상실돼 있기가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규모 자체가 중요해질 때, 그때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 교회는 넓은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자기 진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큰 기독교 기업을 일으키고, 큰 교회 건물을 건축해서, 큰일을 하겠다는 것은 철저하게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목사님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방 족속에처럼 왕을 허락하신 것은,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인간의 사악함과 고집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체념하고 방치하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악의 번성과 횡행을 이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세속의 역사에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그랬고, 심지어는 도적떼의 수괴들도 구름떼 같은 추종자를 거느렸던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양지에 앉아 승자의 편에서 강한 자를 거들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리화했던 예들은 역사에서 넘쳐납니다.

사람의 눈에 성공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며, 그것이 교회와 관련될 때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에 적당히 얼버무려 접목하면, 쾌감은 몇 배로 늘어납니다. 세상적 욕구도 은근히 충족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뤘다는 뿌듯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교회 안의 보통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심리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포퓰리즘의 위험성

목사님, 사람을 너무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의견이 어찌어찌 만들어졌다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치환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 의견이 차선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도출되는 과정이 또한 정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소 극단적이고 지나친 비유일수도 있겠습니다만, 히틀러의 집권과 만행 배후에는 수많은 기독교인을 포함한 멀쩡한 독일 중산층이 열렬한 지지가 있었습니다. 그간 한국교회는 그것이 세습이든 교회 건축이든 교인들의 다수 의사를 앞세워 정당화해 왔습니다.

포퓰리즘은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것은 오히려 대형 교회일수록 편만한 게 현실입니다. 포퓰리즘이 문제인 것은 어떤 결정이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거나,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따르는 부작용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 있습니다. 포퓰리즘은 그것이 대중의 욕구를 수단으로 지도자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다는 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는 대중의 의사와 욕구를 조작하려는 (때로는 지도자 자신도 스스로 합리화하는) 술수가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국가든 교회이든 구성원이 깨어 있을수록 포퓰리즘은 힘겨운 전략이 되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목회자 개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한국적 상황에서, 일반 교인들의 개입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은 대형 교회일수록, 그런 일을 기대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대형 교회에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일에 소극적이거나 나아가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기 쉬우며,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교회의 크기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식의 문제 제기 자체를 불순한 것으로 불쾌해 합니다. 목회자의 할 일은 교인들을 늘 깨어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회자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약해지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레 차단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도 살고 교회도 사는 길일 것입니다.

'사랑의교회'가 건축 문제를 결정할 때, 대형 교회가 스스로 빠질 수 있는 이런 위험을 충분히 고려하여, 가능하면 보수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는지 궁금합니다. 이 궁핍한 시대에 그런 어마어마한 결정 앞에서 교인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토론의 기회를 부여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며 최선을 다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명실상부한 민주적 과정을 거치기 위해 교인들의 적극적 관심을 유발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는지 진정 궁금합니다. 그런 과정이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왜곡된 상태에서 도출된 합의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 만들어진 '억압적 합의'일 뿐입니다.

전간 시절 영국의 유명한 정치학자이며 노동당 정치인이었던 해럴드 라스키는 "누구나 빵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아무도 케이크를 먹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노동자들 앞에 설 때마다 매번 자신이 부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말로 연설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이론에 투철하게 살았던 비기독인이었습니다. 저는 라스키의 태도가 반드시 우리가 따라야 할 준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교회에 만연된 불평등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급진적'(radical) 통찰을 떠올립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의 소리로 교회 '안'을 깨우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 있다면, 정말 모골이 송연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더 뻔뻔스럽게 불의와 타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일을 일상적으로 반복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기커녕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강변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를 말로써 부인하는 일을 단죄하는 데는 재빠르지만, 행동으로써 일상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일에는 관용이 넘치거나 무감각합니다. 교회가 마땅히 맡겨진 책무를 소홀히 할 때, 이단과 반쪽 진리가 판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상도 타기하는 세습과 대형화를 탐한다 한들, 이제 별로 놀랄 일도 아닐지 모릅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이제 세상은 교회를 향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너무도 다르지 않거나(거룩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지요), 아니면 그 악행에서 세상을 오히려 앞서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하는 일에 무관심합니다. 교회는 그들의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끼리끼리의 모임이요, 예수 이름을 입에 달고 훈계를 일삼는 가소로운 집단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밀알은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란 썩지 않는 웅장한 건물과 허공에 새길 명성을 위해 혈안이 된 집단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의 예배당은 이 땅을 잠시 스쳐 가는 이방인들이 모여 주를 고백하는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거주할 부동의 부동산의 중요성을 앞장서서 일깨우는 진원지가 바로 교회일지도 모릅니다. 그 거창한 건물로 어떤 거창한 일을 할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잃어버린 사랑의교회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사랑의교회' 문제는 단순히 새 예배당을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마음을 한없이 짓누르는 것은 그것이 어쩌면 사소한 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교회'가 혹시 이미 슬픔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진 않았는지, 두렵습니다. 예수는 죄에 휘둘리는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이 깃든 깊은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슬픔이 마르면 남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 슬픔을 아는 자가 잠 못 이룰 때, 어리석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셨다며 자신의 태평한 잠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통곡하셨습니다. 과연 오늘의 상황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점은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통곡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덕담을 건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랑의교회'가 새 건물을 짓고 다시 한번 도약하겠다는 데 축하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요, 목사님. 한편 생각해 보면, 악이 도처에 편만한데, 축복의 말을 또 하나 첨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에 대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일이야말로 한국의 기득 계층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대형' 매체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 해 오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별 문제 없이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잘 돼 가고 있다고 국민의 눈과 판단력을 가리는 일을 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럴수록 교회 안팎에서 불의는 더 만연하고 약자들의 고통은 갈수록 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양지만을 자꾸 비추자는 것이 어쩐지 문제를 회피하거나 은폐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셨을 겁니다. 목사님, 부디 작금의 일련의 상황들이 '사랑의교회'가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대해 마침내 눈을 뜨고, 목사님의 사역에는 일대 쇄신의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고세훈 /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개혁연대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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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쳐라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12. 15. 10:3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복음과상황 창간 18주년 기념예배 설교] 에스겔 2:1-7/ 예레미야 5:30-31

이만열 장로 (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명예교수)




복상 창간 기념예배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에 저는 에스겔서의 이 대목을 영문성경(NIV)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이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7절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You must speak my words to them, whether they listen or fail to listen, for they are rebellious. 이날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좀처럼 영감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도, 오늘 설교의 제목은 바로 이 대목의 본문에서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바빌로니아의 그발 하수가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기 백성을 향해, 이 반역하는 무리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내용이 5절에도 보입니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외치는 자를 말할 것입니다. 4절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자손은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왜 이 성경말씀을 오늘 말씀으로 택했는가 하면 오늘날의 세대가, 에스겔의 시대와 같이 목이 곧고 너무 뻔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사회도 꼭 같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씀이 불필요한 세대같이 보입니다. 때문에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상 진정한 말씀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흔히 들려지는 말씀에 대해, 듣지도 않고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낙심하고 있을 때에 이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갔던 때였던 만큼 오늘 세대보다 더 뻔뻔하고 소망이 없던 시대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 뻔뻔한 사람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치라고 했습니다. 그런 뻔뻔하고 절망적인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代言하는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세대가 뻔뻔하고 목이 곧다고 한다면, 어디에서 그렇습니까. 먼저 교회가 그렇습니다. 대형교회가 목회세습을 하면서 종교적인 권력, 지위, 명예 그리고 재부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세습에 저항하거나 개혁하려는 운동이 잠시 보인 적이 있지요. 중세 천주교회가 교황이나 교권자들로 인한 부패 때문에 이를 막아보려고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했듯이, 한국 교회에도 이런 특단적인 조치가 주어져야만 세습의 폐단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요? 대형교회의 세습과 그 운영은 거의 필연적으로 부정직하고 부패한 사건들을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반성이 없을 뿐아니라 이제는 이를 지적하는 소리조차 거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형교회 세습 문제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다 나타나고 있지만, 보수교회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보수가 종교계나 정치계를 막론하고 그 건전한 가치관을 상실했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며, 여기에서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무자격 목회자들의 양산이나 목회자들의 상식을 벗어난 일탈행위는 이제 일일이 지적할 겨를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는가 물을 정도로 한국 교회의 변질은, 과거 한 때 한국사회에 소망이 되었던 그 이상으로,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인가 하는 정의도 필요합니다만, 적어도 오늘날 같이 대형교회를 지향하면서 자본주의적 경쟁주의식으로 교회성장을 지향하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기독교인이고 국무총리, 대통령실장, 교과부장관과 국토해양부 장관 등 많은 공직자들이 기독교인이고 국회의원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어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계층은 물론 인구의 20%내외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 인원배분으로 본다면 가히 기독교국가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의 확립은 요원하고 오히려 기독교적인 세계관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사회 또한 각종 선각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吾不關焉, 들은 시늉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건이 터져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자의 입을 틀어막고 위협을 가하며, 글로써 외치는 자를 옥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국정최고책임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요 날마다 하나님께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제 도대체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가, 기독교인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어떻게 정치권과 사회를 대하고 있습니까. 자기 약점이 많고 보니 우선 이렇게 양의 탈을 쓴 정권에 대해서 우선 비판할 능력이나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정권의 행태나 우리 사회의 비기독교적인 점에 대해서 추호도 거스리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러할진대 다른 언론들의 곡학아세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을 말하고 계도할 수 있겠습니까.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남쪽 유다의 여호사밧왕 시대와 같이 미가야 같은 사람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그 당시의 400명의 거짓 예언자처럼 떼지어 외치는 아첨소리만 있는 것 같습니다. 4백명의 목소리처럼 승리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지만, 패배와 유리방황을 외치는 한 사람 미가야의 초라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천상의 회의에서 ‘예언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어 호리게 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거짓말 하는 영’을 마음 속에 넣었기 때문일까요.

대학교수들로부터 시작된 시국선언에도, 각계의 외침에도 전혀 무신경하게 대하는 이 정치 사회가 과연 기독교인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같은 시국선언에 대한 반응이라는 게 고작, 전체 대학교수가 얼만데, 전체 국민이 얼만데 그 따위 숫자가 외친 들 대수로운가 하는 비아냥 뿐입니다. 아합왕을 지지해준 ‘400명’의 예언자들처럼 거대한 언론들이 자기 뒤를 봐주고 있다고 뱃장입니다. 그래서 ‘먹통정권’이란 별명까지 붙여주는 안타까운 상황에까지 이르렀지만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400명은 하나님의 진실한 대변자 미가야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이 모두 400명의 소리처럼 열창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진실한 예언자 미가야 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시대를 향해 외쳐야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에스겔서를 읽기 전에 예레미야서를 읽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참으로 특이한 예언자입니다. 모두들 자기 민족의 희망적인 미래를 강조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민족의 비극적인 장래를 가감없이 외쳤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유독 “너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구절이 많이 나오는 성경이라고 느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조국 유다와 자기 민족을 향해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자긴들 어찌 그 말을 원해서 했겠습니까. 조국과 민족을 저주하는 그런 말을 어떻게 자기 입으로 흔쾌히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하니 하는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런 불리한 말이 “나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읽은 예레미야 5장의 말씀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합니다만 5장의 1절 말씀은 오늘 이 시대를 두고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유다 왕국은 이집트에 원군을 청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랬을까요? 예레미야는 국방의 요체가 동맹군을 끌어들이는 데에 있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실천함에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걸 오늘날 식으로 번안한다면, 국방의 요체가 동맹국과의 굳건한 동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돌보며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의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의 질서를 실현함에서 안보의 원리를 찾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반핵반김의 안보원리를 추동하는 중추세력이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 교회라고 할 때, 이들의 이념과 지향이 든든한 안보자체이신 하나님 신앙의 토대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거리에서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았던 前例를 따라서 한국 교회는 안보의 요체를 정의와 진리의 실천에서 설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유다의 지배층이 국방의 요체를 이집트와의 동맹에서 구했듯이, 한국 교회도 유다의 지배층처럼 잘못된 안보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그 시대를 꿰뚫는 예언자적 혜안은 5장 30절과 31절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 부류를 한꺼번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제사장 그리고 그런 선지자와 제사장을 용납하는 백성들입니다. 저는 제사장들이 권력으로 다스린다는 말을 잘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형교회와 최근 이곳 저곳에서 불거지는, 교권화해가는 교단정치의 현상들을 보면서 제사장들의 권력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는 것은 비단 아합시대에 미가야 선지자와 대결했던 400여명의 선지자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소위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까. 뻔히 보이는 사실도 뒤집어서 말하는 사실들이 바로 거짓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근 감리교단을 비롯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에서는 제사장의 권력화의 현상의 적라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교단 정치는 물론이고 연합체의 정치행태 또한 제사장의 권력화의 상징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거짓 선지자와 권력을 휘두르는 제사장을 보면서 그것을 좋게 여기는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들에 대해서 깨어있다면 어떻게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거짓과 권력 앞에서 무방비상태인 백성들이 존재하는 한, 거짓 선지자들과 권력을 남용하는 제사장들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와 권력을 남용하는 제사장들게 실망한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깨어있는 민중, 각성하는 백성을 기다렸던 것일까요.

<복음과상황>은 지금부터 18년전인 1991년에 창간되었습니다. 그 때 한국의 복음주의권은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시대에 깨어있는 행동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정리되고 있습니다만, 정교분리의 잘못된 권유와 이분법적인 신앙행태에 기인하여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가 거의 봉쇄되었습니다. 젊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진리에 대한 무기력증에 내팽개친채 안타까워했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주의권의 젊은이들은 진보권 젊은이들의 지향과 행동을 보면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무렵 로잔언약이 소개되었고, 그 로잔언약을 비빌 언덕으로 하여 젊고 개혁적인 젊은이들이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비록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작은 숫자였지만, 이를 계기로 사회참여를 위한 지향을 복음주의권 나름대로 정립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복음과상황>이 간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헌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복음주의권의 사회참여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 <복음과상황>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진보주의권의 이론과 주장, 행동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뜻을 함께 하지 못한 복음주의권이 <복음과상황>에 귀를 기울이면서 약하게나마 행동화의 기틀을 마련해 갔던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복음과상황>은 복음주의권 젊은이들에게 시대를 깨우치는 광야의 소리와도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환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진보주의권 젊은이들의 주장과 운동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이론과 행동은 이제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차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때에 <복음과상황>은 아직도 그 생명을 유지하면서 사명완수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리가 없는 시대가 아니고 창간 당시와는 달리 소리가 너무 많은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때에도 외치는 소리가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소리가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듣던 듣지 않던 외치라고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3장에 보면 외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언명했습니다. 아니 외치지 않아 멸망하게 된 사람들의 피값을 외치지 않은 자들에게서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장 18-21절을 보십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이런 말씀으로 명령하고 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외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창간 당시와 모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세계사의 변화는 물론이고 독자층들도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변화에 따라 우리의 소리도 좀 더 정제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복음과상황>이 더 분명한 소리를 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8절 말씀에,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복상은 그 동안 시대에 조응하는 분명한 소리를 발했는지, 그리고 변화하는 독자층이 이해할 수 있는 소리를 발했는지, 오늘 이 시점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아서도 복상이 존속할 필요가 있다면, <복음과상황>이라는 제목에 알맞게, ‘상황’이라는 시대 변화를 통찰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진행 방향에 알맞는 ‘복음’의 원리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의 다른 의미 없는 소리들처럼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를 새롭게 다짐하는 데에 창간 18주년을 기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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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는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12. 7. 14:43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정부부처 제자리 찾아주기③-통일부 편 

“통일부는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사진) 통일부앞에서 1인 시위중인 김종환목사(통일시대평화누리 전 사무국장)

통일부 홈페이지를 보면 자신들의 임무를 “통일부는 통일 및 남북대화․교류․협력․인도지원에 관한 정책의 수립, 통일교육․홍보, 그 밖에 통일에 관한 사무를 관장합니다.”라고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

요약하면 통일부는 통일과 그 기반 마련을 위해 남북대화와 협력에 힘을 기울이라고 만든 정부조직이며, 통일부 공무원들은 그 일을 하라고 월급을 받는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와 지난 2년 가까이 통일부는 자신의 존립근거를 잊고 세월만 보내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통일부 장관은 통일과 남북화해를 어떻게든 저지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백번 양보해서 올해 초까지는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사건, 북한의 로켓 발사, 6자회담 탈퇴 등 긴장요소들이 많았기에 적극적 조처를 취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올해 봄을 지나면서는 거의 일방적이라고 할 만큼 북한당국의 관계개선 의지가 두드러졌다. 피랍어부 석방, 현정은 현대회장 방북에 이은 금강산, 개성공단 재개의사,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고위급 인사 조문, 추석 남북이산가족 상봉, 6자회담 복귀 의사 등 작정하고 쏟아내는 것 같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그 때마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이 “약간의 변화는 감지되나, 아직은 근본적인 변화라고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도적 지원도 아직은 때가 아니고, 개성공단도, 금강산관광도 착수할 때가 아니며, 남북정상회담도 노력할 이유도 없고, 이산가족상봉 계획도 없다. 그러면 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농림부가 농촌경제가 회생할 전망이 없으니 당장 할 일이 없다거나, 교과부가 입시문제 해결의 근본적 전망이 보이지 않아 당분간 기다리겠다고 한다면 그런 망발이 어디 있을까? 남북간 근본문제 해결되지 않아 대화할 수 없다면 도대체 통일부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러니 없애야 한다. 

물론 그동안 현 장관도 한 일이 있긴 있다. 지난 9월 북한 황강댐 방류 사태 당시 아직 분명한 증거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의 방류는 의도를 가지고 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혀, 이후 정부의 강경대응을 이끌었다. 그는 민간의 인도적 지원만이라도 허가해 달라는 요청에 ‘인도적 지원은 언제든 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지만, 아직 북한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증거가 없어, 조사 중’이라고 말한다. 국제기구, 민간구호단체들조차 다 인정하는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을 정작 주무부서인 통일부가 여전히 조사만 하고 있다면 그런 통일부가 무슨 필요 있는가? 최근 민간단체들이 인도적 대북지원 협의를 위해 북측 민화협을 만나려던 계획도 통일부의 압력으로 불허되었다고 한다.

작년 통계를 보니 정관의 연봉은 각종 수당 등을 모두 합하면 1억 3239만원이다. 이 돈이면 5명 이상의 도시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는 고액연봉이다.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남북대화 위해 강연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에게 이렇게 큰돈을 지출하느니, 차라리 통일부장관을 해임하고 그 돈으로 정부가 말끝마다 외치는 일자리 창출 위해 애쓰는 게 옳지 않은가?  

상황이 이런데도 내년도 통일부는 26% 대폭된 예산안을 국회에 보고했다. “대북 쌀 지원 등에 사용되는 남북협력기금 출연금은 3500억원으로 예년과 같은 수준으로 동결됐지만, 통일부에서 사용하는 일반 예산은 1527억6500만원으로 전년 대비 25.7%나 급증했다.”(이근우 기자, 매일경제신문 09. 11. 13)

제대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쌓아 놓는 남북협력기금은 그조차 동결한 상태에서 통일부 일반예산만 잔뜩 인상해 놓았다. 2008년만 해도 남북협력기금 실제 사용액은 총 예산의 20%가 조금 넘는 수준으로 역대 최저다. 통일부가 가장 중요한 남북관계개선 여건 조성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증거다.

새 정부 들어 정부조직개편 한다며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폐지될 위기에 처했던 통일부를 국민들이 살려놓았더니 할 일은 안 하고, 근본적(?) 상황변화만 기다리고 있다. 사실 현인택 장관 스스로도 인수위 시절 통일부 폐지를 주장했던 인물이니, 하는 일이 없는 통일부 폐지 주장은 사실상 내 주장이 아니라, 현인택 씨의 소신 아닌가? 도대체 경력이나 소신이나 활동 모든 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친하다는 것 말고 하는 일이 없는 현 장관이 물러나든지, 남북관계개선을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할 의지가 없다면 통일부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국민의 아까운 혈세를 이제 그만 낭비해야 한다.









구교형목사(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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