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1. 막대한 영향력만큼이나 슬픈 한국 기독교

대한민국 헌법은 국교가 인정되지 않는, 종교적 자유국가다. 그러나 고려사회가 불교로 인해, 조선사회가 유교로 인해 그랬듯이, 단언컨대 한국현대사는 기독교로 인해 울고, 웃었다. 근대화와 민족운동, 일제식민시대와 분단과정, 성장과 민주화운동 등 한국현대사 모든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기독교의 존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엄연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10명 가운데 무려 3명이 개신교 장로라는 사실, 그리고 현재 18대 국회의원 중 개신교인의 비율이 우리나라 총인구 대비 개신교인 비율인 18.3%(2005년 통계청)의 두 배가 넘는 무려 39.5%에 달한다는 점으로도 확인된다. 또 가톨릭이나 불교의 움직임에 비해 한국교회나 그 지도자들의 동향은 항상 여론의 초점이 되곤 한다. 한국개신교는 다른 종교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성적인 신도들을 자랑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안티’세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산술적인 비중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밉든 곱든 한국사회와 민족을 위해서라도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살아나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기독교와 교회의 건강성은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저 사회적 평가로만 그러한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하는 자화상 자체도 그렇다. “최근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2004년 한국인 종교의식’에 따르면 비종교인들이 느끼는 각 종교에 대한 호감도는 불교(37.4%), 가톨릭(17%)인데 비하여 개신교는 12. 3%에 불과했다. 또 2005년 ‘한국교회미래를준비하는모임’ 조사에서 종교 지도자의 자질우수성을 묻는 질문 역시 개신교(12.0%) 천주교(31.8%) 불교(21.2%)로, 개신교 종교지도자에 대한 비종교인의 불신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구교형, 사회선교 한 걸음, 164쪽)

올해 2009년 7월 <시사저널>이 실시한 한국인 직업인 신뢰도 조사에서도, 총 33개 직업군 가운데 목사는 25위를 기록해 비교직종인 신부(11위), 승려(18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하위군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 한국 기독교 탈선의 뿌리

사회학적 요인들을 말하기 전에 그것은 한국 기독교와 교회가 예수정신과 복음으로부터 탈선한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매우 권력지향적이고, 성장중심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은 한국교회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개신교는 19세기 말 주로 미국선교사들을 통해 확산되었고, 20세기 초에는 이미 평양 등 서북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강인철에 의하면 1932년 서북지방 개신교인이 전체의 48%를 차지하고, 30년대 말에는 장로교 전체의 60%에 이를 만큼 왕성했다고 한다.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

그러나 일제식민지가 더 이상 ‘순수한 종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충성을 강요하자, 서북중심의 교권세력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에 앞장섰고, 해방이 되도록 자신들의 교권을 지켜갔다. 해방 후 이북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 세력과 기독교는 주일선거문제, 정치적 입장차이 등으로 사사건건 부딪혔고, 남북정부가 들어선 1948년을 전후하여 특히 신앙의 자유를 위해 월남하는 기독교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신학적으로는 보수주의요, 정치적으로는 극단적 반공주의자인 이들은 월남한 이후 남한에서의 적응에 성공하여 이후 한국교회의 주류가 되며, 한국사회에서도 든든한 반공안보정책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런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친일경력의 콤플렉스를 숨기고 이북정권과의 피해의식이 맞물려 더욱 적극적으로 정권에 밀착하였고 친미와 반공주의자가 되어 갔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선교모국이었던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고 그의 후원을 받은 장로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하자 적극적으로 정권을 지지하며 남한 교회와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여 갔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정부요직을 맡았던 개신교인들은 전체의 40%에 육박했을 정도였다고 한다(강인철).

이북 정권은 60-70년대를 거치면서 눈에 보이는 교회들을 없애 버렸고, 이남에서는 대다수의 교회와 지도자들이 독재정권에 침묵하거나 적극 지지해 주었고 그 대가로 당시로서는 아주 예외적인 자유를 누리며 급성장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과 함께 한국교회는 급성장했다. 그것은 강력한 1인 지도자 아래서 ‘손에 잡히는 성장과 부흥’을 주도해 간 박정희 정부의 멘탈리티가, 카리스마적 목회자 아래서 질병과 가난을 벗고 성공한다는 당시 한국교회의 영적 분위기, 메시지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형태는 조금씩 달랐지만 박정희 정권의 아류인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까지 대동소이하게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0여 년 간 철옹성처럼 굳건해 보인 군사독재정권도 경제성장과 중고등교육의 확산과 더불어 사회분위기의 개방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총칼로 마냥 억누를 수만은 없게 되었다. 부마항쟁과 10.26(1979년), 민주화의 봄과 5.18(1980년),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대항쟁(1987년), 대학가의 통일운동과 잇따른 방북(1988~1989년) 등 권위주의 정부도 더 이상 힘만으로는 변해가는 시대분위기를 막아내기 힘들어진다. 이러한 시대변화는 단지 권위주의 정부만의 고충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종교기득권을 유지해오던 주류교회에도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미 6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까지 계속된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과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통일운동을 기독교비주류세력이었던 진보교회 및 목회자들이 앞장서 이끌어가기 시작한 것이 더 큰 위기의식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3. 수구와 기득권 추구로는 한국교회 이끌 수 없다.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의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88선언)은 같은 해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에 상당부분 수용될 만큼 매우 획기적인 방안이었지만, 오히려 주류 한국기독교계는 이 선언에 크게 반발하는 성명들을 잇따라 낼만큼 반발했다. 급기야 1989년 1월 당시 한국교회 얼굴이던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계 원로들의 회동에서 “교회협이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없다”고 발표하며, 새로운 연합기구 결성을 공식화했다.

이어 같은 해 3월 기장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이 더 큰 자극이 되어, 4월 발기총회에 이어 마침내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가 탄생한다. 이러한 한기총의 냉전적 대북인식은 한기총을 출범시키고 이끌었던 초기 주요 인사들이 거의 월남자들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89년 1월 남한산성 회동 참석자 총 10명 중 9명이 월남자였고, 창립준비위원장 한경직 목사를 비롯해, 5대 최훈 목사에 이르기까지 초기 대표회장 중 1대 박맹술 목사만 제외하고는 모두 이북 출신이다(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강인철 참조). 이런 시각을 대변하듯 지금껏 한기총은 특히 대북정책에 관한 한 매우 극단적인 냉전인식을 표출해 왔다.

또한 교회세습이나 목회자 비리, 목회자 납세, 양심적 병역거부, 사학법 문제 등의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서도 한기총은 갈수록 민주화되고 개방돼 가는 사회의식과는 동떨어지게도 매우 개인적이고, 사익 추구적이며, 시장만능주의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한기총이 들어선 후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한국교회의 대 사회적, 정치적 발언은 매우 잦고, 강해졌다.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 집권 이후 한기총은 가장 적극적인 반정부단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필자는 그것을 기독교계와 사회에 대한 기득권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앞서 살펴봤듯이 30년 군사독재정부 시절 정권합리화의 댓가로 온갖 특혜에 길들여져 버린 주류 한국교회는 모든 종교를 다른 종단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상대적인 차별처럼 느꼈고, 개발독재시대 목회스타일을 크게 벗지 못한 교회지도자들의 민주화, 개방화 추세에 대한 거부감은 갈수록 커져갔다. 2000년대 들어와 한국교회 대표적 지도자들이 거듭 정치세력화에 앞장서는 것은 실추된 한국교회 이미지와 영향력을 정치권력 획득을 통해 돌파해 보려는 골육책으로 보인다.

한기총이 그저 보수적 기독교기구라면 얼마든지 좋다.

소중한 가치를 지키려는 태도를 보수라고 정의한다면,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던 선지자들이나 아버지하나님께 순종을 외치셨던 예수님이야말로 원조 보수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한기총은 보수가 아니었다. 같은 땅 북녘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가는데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지 않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하나님은 땅은 사고나 팔지 못하며 그 혜택을 반드시 나누라고 말씀하셨는데, 부동산투기수익을 축복처럼 허용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교회와 목회자 부정에 대한 시사프로그램 방영은 죽기 살기로 막아내면서도 용산참사 희생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은 애써 외면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소유권이나 사유재산제를 하나님의 희년법보다 떠받드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숫자에 대한 자존심과 기득권이다.

이광선 한기총 신임 대표회장이 선출되었다. 나는 좀 순진하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광선 신임회장에 기대를 걸고 싶었다. 그가 사학운영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한 개정사학법을 다시 뒤집기 위해 삭발까지 하면서 앞장섰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나마 교단이나 교계 내에서 비교적 깨끗하고 나름 소신있는 비주류로 알려져 있다기에 기대가 좀 있었다.

그러나 대표회장 선거에서 한기총 소속 각 교단 총회장과 총무들을 무료로 이스라엘 여행 보내주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걸 공약으로 내걸었다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한기총은 어떤 조직이기에 예수님 팔아 헌금을 털어 매관매직하겠다는 소리를 몰래 숨어서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떠들어댈 수 있는지.

이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이름처럼 한기총이 명실상부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연합기구가 되려면 66개 교단, 19개 단체의 막강한 연합체라는 위용을 자랑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성명, 행사 등 모든 활동들이 성경과 기독교세계관에 비추어 어떤 근거를 갖고 있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명예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사사건건 책임지고 답변해야 한다. 정통이니 주류니 보수니 얼버무리지 말고, 정말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것이 지난 20년간 한국교회 대표로 명의를 도용당한 우리에게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임을 한기총은 명심해야 한다.  






구교형목사(성서한국사무총장/ 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 이글은 2009년 12월 28일 한기총 진단토론회 발제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