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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 14) 역사적 예수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3. 30. 11:5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전승자들은 전통을 보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승 과정에는 전승자의 경향성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전승자의 경향성은 전통에 담긴 내용에 적용된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고 전승자의 신학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17-22은 본래의 전승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일 수도 있고, 마가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여 재해석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0:17-22에 담겨진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과연 역사적 예수께서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주신 내용을 그대로 담은 것일까? 

설명가능성 원리로 본 마가복음 10:21-22 

사도행전 2:45과 4:34-35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5:1-11에는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숨기고 바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벌을 받아 죽는 이야기가 기록된다. 누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일부러 창작하였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누가는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 마가복음 10:22을 부에 관한 것으로 바꾸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23). 이처럼 토지에 관한 마가복음 본문을 부 일반에 관한 것으로 변경한 누가가 토지에 관한 이야기를 창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바치지 않아서 벌을 받아 죽게 되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어려움은 이 이야기의 진정성의 표지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일을 행한 이유는 그들이 믿고 따른 예수의 가르침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내용이 있을 때 설명이 잘된다. 그러므로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한 마가복음 10:21-22의 내용은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유대교에의 비유사성 

토지의 소유가 소수에게 편중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린 사회를 배경으로 볼 때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마가복음 10:21)은 매우 적합하다. 이것은 그 시대에 마땅히 선포되어야할 메시지였다. 또한 이러한 메시지는 당시 유대인 권력자들이 싫어할 메시지였으므로 예수께서 그를 죽일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당하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그의 죽음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이므로 역사적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가의 전승경향성에의 비유사성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난해구절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2:5-7은 예수께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 용서를 하심을 기록하며, 마가복음 6:48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물 위를 걷는 일을 행하심을 기록한다. 마가복음 14:62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될 것과 하늘 구름을 타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듣기엔 신성모독으로 들렸다(마가복음 14:64). 그러므로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 이야기를 창작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마가 10:18은 역사적 진정성 때문에 보존되어 왔고, 그리하여 마가도 이것을 보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22에 사용된 ‘끄떼마따’(토지)는 과연 마가가 창작한 흔적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누가복음의 ‘쁠루시오스’(부유한)가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는가? ‘끄떼마’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단지 4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1번 사용된다. 한편 형용사 ‘쁠루시오스’는 신약성서에서 28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2번 사용된다. 70인역(외경제외)에서는 ‘끄떼마’가 7번, ‘플루시오스’가 31번 사용된다. 그러므로 ‘끄떼마’는 ‘쁠루시오스’보다 덜 친숙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더 친숙한 ‘쁠루시오스’(부유한)를 ‘끄떼마’(토지)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혹시, ‘끄떼마’(토지)가 아니라 ‘크레마’(재물)이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을까? ‘크레마’라는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10번 사용되었고, 신약성서에서 6번 (마가복음에서는 1번)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7번, 신약성서에서 4번 사용된 단어인 ‘끄떼마’보다는 더 친숙한 단어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크레마’를 일부러 상대적으로 덜 친숙한 ‘끄떼마’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마가가 10:22을 창작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만일 창작하였다면 마가는 그가 다른 곳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끄떼마’보다는 9번이나 사용한 ‘아그로스’(전토)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공관복음서 전승경향성에서 비유사성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예수는 “왜 나를 선하다고 부르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답한다(18절). 예수의 신성을 믿은 초대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일부러 만들어 내었을 리는 없다. 초대 교회의 전승 경향성은 마태복음에 반영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평행구절(19:17)에서 “왜 나에게 선함에 관하여 말하느냐? 오직 한분이 선한 분이시다.”라고 표현을 바꿈으로써 예수를 선하다고 부른 것을 부정하는 마가복음의 표현을 피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마태복음의 저자도 고치고 싶어 한 마가복음 10:18의 내용과 표현을 창작하였을 리 없다.

마가복음 10:19의 ‘사취하지 말라’는 마태복음(19:19)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절(18:20)에서 생략된다. 이것은 이것이 십계명에 속한 계명이 아니므로 십계명에 속한 계명들을 언급하는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일부러 십계명 목록의 중간에 십계명 중에 하나가 아닌 ‘사취하지 말라’를 추가하였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1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곧 이어 그 사람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지적되고(21절), 그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근심하여 떠나감이 묘사된다(22절). 결국 이렇게 행할 사람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때 예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의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져 생략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는 기록을 일부러 창작하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마가복음 10:21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네가 온전하려고 한다면”이라고 바꾼다.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는 마가복음의 신학이 너무 과격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고 믿고(마태복음 5:17) 이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5:19) 마태복음 저자에게마저도 과격하다고 여겨진 예수의 가르침이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마가복음 10:22도 전승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기보다는 역사적 진정성에 토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검증된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의 일치 

마가복음 10:17-22에 나타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토지제도를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면모이므로 이러한 면모에 일치하는 (많은 토지를 가진 자는 토지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는) 마가복음 10:21의 예수의 가르침도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0:9은 창세기 2:24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데,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10:9의 내용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증거는 우선 이 말씀이 많은 독립 자료들에 의해 지원받는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0-11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나누이지 말고, - 나누일지라도 재혼하지 않고 지내거나 남편과 재결합하라, - 남편은 아내를 이혼시키지 말라.” 이 말씀은 이혼을 금하는 점에서 이혼(법적 이혼) 내지 별거(사실상의 이혼)를 금하는 마가복음 10:9(“하나님께서 합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게 하라”)의 말씀의 내용과 일치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는 마가복음이 기록되기 전이었을 것이므로 고린도전서의 증거는 마가복음 10:9-12의 진정성을 지지한다.

예수 당시 유대교에 이혼을 완전히 금한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의 말씀은 당시 유대교에 의하여 쉽게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예수께서 미움을 받아 박해를 당할 수 있게 된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7:15은 믿지 않는 자가 이혼하고자 하면 이혼하라고 권하는데, 이것은 이방 기독교인의 경우에 배우자가 불신자일 경우 이혼이 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마가복음 10:9의 말씀이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9은 초기의 이방 기독교의 산물일 수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므로 마가복음 10:9은 마가의 창작이 아닐 것이다.

마태복음 19:9은 마가복음 10:11에 “음행으로 인하지 않고는”이라는 예외 조항을 추가한다. 이것은 마가복음 10:11이 너무 엄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배우자가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상황에서도 이혼을 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너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저자는 이러한 예외 조항을 추가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매우 철저한 유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마태복음에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마가복음 10:11이 마가나 초대 교회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가복음 10:9은 배우자를 이혼시키고 재혼한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부합한다. 세례 요한이 이러한 결합을 비판하고 죽임을 당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셨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마가복음 10:9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주어질 수 있는 말씀이다. 또한, 마가복음 10:9은 남편이 아내를 마음껏 이혼시킬 수 있었던 (불공평한) 당시 상황 속에서 주어질 수 있었던 말씀이다. 그러므로 당시 역사적 배경도 이 말씀의 진정성을 지원한다.

구약의 정신을 철저히 적용하는 마가복음 10:9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마가복음 10:17-22도 나타난 구약이 토지법의 정신이 철저하게 적용하므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회 배경에의 적합성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에서는 전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하는 귀족들이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통치 영역의 절반 이상의 땅을 소유하였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예를 들어 하르솜(Charson)의 아들 엘르아잘은 아버지로부터 1,000 개의 마을들을 상속받았다고 한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사도행전 4:36-37은 레위인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사도들에게 내어놓는다고 기록한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구약의 토지법이 어겨지고 있던 당시 사회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사람과 같이 십계명을 지키되 토지법은 어기는 유대인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미 토지의 균형적인 소유가 깨어진 사회 속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는 구약성서의 토지법을 어기고 있는 것에 관한 가책을 갖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가책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마가복음 10:20, 22은 당시 배경에 잘 들어맞는다.

맺음말 

마가복음 10:17-22은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 즉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본문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한 증거들을 검토해 볼 때, 이것은 마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예수를 믿든지 역사적 예수를 믿든지 예수를 따르고자 하면 토지에 관한 무한한 권리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를 포기하기는커녕 부동산에 대한 세금마저 내기 싫어하는 모습은 예수를 따르는 바른 모습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중에는 대토지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토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일 수 없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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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토지’로 번역하면 문맥에 맞는다는 것은 ‘재산’대신 ‘토지’를 번역어로 선택하기 위해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재산” 또는 “재물”이라는 의미도 마가복음 10:22의 문맥에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여 더 문맥에 잘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즉, ‘토지’란 번역을 선택하는 충분한 이유는 다른 번역 가능성들보다 ‘토지’란 번역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이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한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을 때, 강조점은 “팔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쪽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과 관련된다. 율법의 정신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은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명기 15:9-11).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러한 구약의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명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진 것을 팔라”는 예수의 말씀 앞에 부자가 항의 한 마디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율법이 허용하는 유동성 재산까지 처분하라고 하시는 것을 너무하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자는 왜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 하는지 예수께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가 갑자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그에게 단지 유동성 재산만 많았을 경우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많이 가진 것이 토지였을 때에는 그의 행동이 잘 설명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것은 명백하게 율법에 위배되기에 토지를 팔아서 처분하고 이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지적을 원칙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의 명령을 실천하느냐 못하느냐 인데 그는 토지에 관련된 율법의 요구를 적용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23절처럼 재물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까? 

그런데, 23절에는 재물, 부, 돈 등을 뜻하는 ‘크레마’의 복수형 ‘크레마따’가 등장한다. 23절 문맥도 ‘크레마따’가 토지를 뜻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크레마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반응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24절). 이로 미루어 보아 ‘크레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하는 구약의 토지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놀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3절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이 되려면 ‘크레마따’가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가리켜야 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 있었다.

물론 23절부터 재물에 관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토대하여 22절까지에서 다루어진 내용도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예수는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에게 그의 재물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을 수도 있다. 그가 재물을 포기하기 힘들어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보고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지적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읽을 경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으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일까? 물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율법 정신을 염두에 둘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28-29절에서 토지와 가옥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가고 유동성 재산이 이 목록에서 빠져 있는 것은 23절의 ‘재물’(크레마따)마저도 특별히 가옥과 토지를 염두에 둔 것이며, 25절의 ‘부자’도 토지를 많이 가진 부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과연 토지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을까? 

예수께 나아온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20절). 이러한 대답을 듣고 예수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구약성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법인 토지법을 어길 수 있었을까?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지킨다고 한 것은 18-19절에 언급된 계명들이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속여 취하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다. 이 사람은 이 계명들에 토지법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하였을 수도 있다.

토지법을 어긴 것은 도둑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토지법을 어겼다면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토지법을 어긴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을 수 있다.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대토지 소유가 도둑질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은 문맥상 앞에서 언급한 계명 또는 구약성서에 담긴 율법을 실천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킬 때 토지법까지도 잘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신 것(21절)도 그가 율법을 모두 잘 지켰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을 지킴에 헌신한 정도를 일단 인정해 주시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헌신을 하도록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에게만 사랑을 표현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 외에는 흠 없이 율법을 지킨 이 사람에게 얼마든지 사랑을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이다. 또한 사랑을 표현하시면서도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우도록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다.  

마가복음 10:17-31의 흐름 속에서의 토지와 재물 

마가복음 10:22에는 ‘끄떼마따’가 사용되고 23절에는 ‘크레마따’가 사용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는 토지를 다른 하나는 재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은 과연 본문을 일관성 있게 읽는 것인가? 22절의 ‘끄떼마따’를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하려면 이러한 의문도 해소하여야 한다.

23절에 ‘크레마따’를 사용한 것은 마가복음의 서사의 흐름 속에서 예기하지 못한 전환을 통해 놀라움을 자아내는 문학적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영생을 얻는 길을 율법, 특히 십계명에 관련시킨 후 십계명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부자에게 토지법을 지켜야 함을 지적하여 그를 놀라게 한다. 이어서 토지만이 아니라 부 일반의 소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토지법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제자들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침내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는 절망으로 제자들을 몰아간다(26절). 이 절망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에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이러한 절망 후에 반전이 도래한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7절). 이러한 흐름 속에서 22절은 “토지”에 관하여 23절은 “재물”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일관성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극적 효과를 낳는 문학적 기법으로 볼 수 있다.

28-31절의 말씀은 27절에 도입된 반전에 이어지는 위로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신다(27절). 그리하여 반드시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전토를 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29-30절). 여기서 재물 일반에 관한 가르침은 가옥, 전토 등의 부동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가족이 추가적으로 다루어진다. 복음에 반응하여 가옥이나 전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어놓고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마가복음의 독자들 중에는 이미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물한다. 

왜 좀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다면, 마가는 왜 더 명확한 용어대신에 이처럼 애매한 용어를 선택하였을까?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였다면 마가는 22절에서 얼마든지 30절에서처럼 ‘아그루스’(전토)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끄떼마따’처럼 토지나 재물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 애매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가가 이 단어를 “재물”이란 뜻으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만 ‘끄떼마따’는 우리에게 명확하지 않을 뿐이며, 마가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언제나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 그러므로 1세기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단어는 명확하게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볼 수 있다.

22절에 ‘아그루스’대신 ‘끄떼마따’가 쓰인 것은 23절에 등장하는 ‘크레마따’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운율을 위한 고려였을 수도 있고, 토지를 다루는 22절에서 재물을 다루는 23절로 매끄럽게 넘어가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토지를 가리키려면 22절에서 다른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는 설명은 이 단어가 “재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설명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재물”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이라, 문맥에 맞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따라 ‘끄떼마따’를 “재물”보다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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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토지법9)사본학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0. 19. 15: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과 사본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라는 헬라어를 담고 있으며 이것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모든 사본들이 일치하여 이 헬라어 단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저술하여 출판한 이후에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을 필사를 하여 전수할 때, 모든 필사자들이 마가복음의 원문을 있는 그대로 필사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필사자들에 의하여 마가복음 본문이 필사되어 전수되는 가운데 어떤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의 본문을 변경하였다. 그렇게 변경된 본문은 또 다른 필사자들에 의하여 필사되어 전수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 사본들을 비교하여 원래의 본문을 복원하는 작업을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하는데, 편의상 이를 사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많은 사본들에 ‘끄떼마따 뽈라,’ 즉 ‘넓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 담겨 있지만, 서방 사본들에는 다른 표현들이 발견된다.

(1) 끄떼마따 뽈라 나머지 사본들

(2) 뽈라 크레마따베자사본, 고대 라틴어 역본

(3)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 클레멘트

베자 사본과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서방 사본들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대 라틴어 역본들이 로마제국의 서방 지역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은 칼빈의 제자인 베자가 소장하고 있다가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 기증한 사본으로서 지금 켐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에는 마가복음 10:22에서 ‘뽈라 크레마따’ 또는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많은 재산’이라고 번역된다. ‘크레마따’는 ‘크레마’의 복수형이며, ‘크레마’는 ‘재산,’ ‘부,’ ‘돈’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37에서 ‘크레마’는 토지를 팔고 받은 돈을 가리킨다.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값’이라고 번역하였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다니엘 11:28도 ‘크레마’가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많은 ‘크레마’를 가지고 그의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가 아니라 돈이나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

만일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가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면 이것은 ‘토지’로 번역되기보다는 ‘재산’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끄떼마따’가 원래 마가복음 10:22에 담겨 있지 않았다면 ‘토지’라는 번역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에서 ‘재산’이 옳은 번역인지 ‘토지’가 옳은 번역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와 대부분의 사본들에 담긴 ‘끄떼마따’ 중에서 어느 것이 마가복음이 원래 가진 표현인지 검토하여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마가복음 인용에는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많은 재산과 전토)라고 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 중에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은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을 가진다. 이것은 위의 (3)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이것은 아마도 (2)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2)의 ‘크레마따’는 토지를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필사자들은 ‘까이 아그루스’(~와 전토)를 추가하여 토지가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3)은 (2)의 ‘뽈라 크레마따’(많은 재산)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그것의 기원인 (2)를 지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서방 사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본들은 (1) 즉 ‘끄떼마따 뽈라’를 지원한다. 더구나 고대 라틴어 역본들 중에 일부(f, q)는 마가복음 10:22에서 divitias(부) multas(큰)라는 표현을 가지는데 이것은 (1)의 어순에 일치하므로 (1)을 지원한다. 많은 사본들에서 (1)이 발견된다고 (1)이 원래 마가복음 10:22에 있던 표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1)을 담은 많은 사본들 중에는 매우 오래된(4 세기) 사본이면서 우수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들이 있으므로 (1)이 원래의 것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본들도 언제나 원문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증거를 좀더 수집해야 한다.

마태복음 19:22의 영향인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인가?

마태복음 19:22에는 마가복음 10:22와 유사한 본문이 발견된다. 동일한 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인데, 마태복음 19:22도 ‘끄떼마따 뽈라’란 표현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1) 즉 ‘끄떼마따 뽈라’가 마태복음의 영향에 의하여 발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한 변화를 사본학자들은 조화(harmoniz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원래부터 마가복음에 일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마가복음을 마태복음 저자가 자료로 사용하였다는 가설(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가능성을 더더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설에 입각하면 마태복음의 ‘끄떼마따 뽈라’는 마가복음의 ‘끄떼마따 뽈라’에서 그대로 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마가복음과 본래부터 일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많은 곳에서 문자적 일치를 보이므로 이곳에서도 그러한 일치가 본래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이 마태복음 19:22의 표현과 동일한 표현이라는 이유만으로 (1)은 마태복음의 영향을 받아 조화된 것이라고 단정하여 이것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 아니라고 판단할 개연성이 없다. 더구나 (2)의 ‘크레마따’가 바로 다음 절(막 10:23)에 나오는 ‘크레마따’의 영향으로 동일하게 변화된 결과일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1)이 마태복음 10:22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은 (2)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다.

마가복음의 문체가 주는 증거

성경의 각권은 저자에 따라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책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사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듯이 성경도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다. 마가복음이 가지는 독특한 문체도 성경의 인성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은 ‘뽈라’(많은)라는 단어가 명사를 꾸며주기 위해 사용될 경우에 언제나 예외 없이 그것이 수식하는 명사 뒤에 위치시킨다(1:34; 4:2; 6:13; 7:4, 13).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세 가지 표현들 중에서 이러한 마가복음의 문체에 일치하는 표현은 (1)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성경 독자의 경향성

(1)이 마가복음 10:22에 담긴 원래적 표현이라면 이것은 ‘넓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번역 성경들이 한결같이 ‘많은 재산’에 해당하는 번역만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가복음 10:22의 번역자들은 (1)을 원문으로 택하였어도 그 의미를 (2)처럼 이해하여 번역하였다. (1)을 원문으로 택한 네스틀레-알란트 27판이나 UBS 4판의 본문을 눈앞에 두고 번역자들이 이를 (2)처럼 번역한 것은 (1)을 담은 원본이나 사본을 눈앞에 두고 필사자들이 이것을 (2)로 고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필사자들의 경향성과 번역자들의 경향성은 서로 일치하기도 한다.

필사자나 번역자나 모두 성경 독자의 일종이므로 이들은 서로 유사한 경향성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어떠한 경향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대의 필사자들의 경향성을 살펴봄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필사자들이 어떤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변경시켰는가를 관찰해 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그 구절을 어떻게 곡해할 수 있는 지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추측을 토대로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성을 조심하며 본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비유사성의 원리와 성경 본문 이해

독자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을 저자의 의도대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고의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곡해하기도 한다.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의미를 곡해하는 독자들의 경향성을 극복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독자들의 경향성은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필사자들의 본문 변경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일단 독자들의 경향성이 파악되면 “비유사성 원리”를 통해서 본문의 본래적 의미 파악을 시도할 수 있다. “비유사성 원리”(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되는 방법론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 발생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원리이다. 초대교회의 전승 경향에 유사한 예수 전승의 경우에는 그 역사적 진정성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초대교회는 그 경향성에 유사한 예수의 말씀을 왜곡함 없이 전승하였을 것이지만, 그 경향성에 유사하지 않은 말씀은 때로 그 경향성에 맞게 소화하여 전승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가능성이지만 이 가능성 때문에 초대교회의 경향성에 유사한 전승들은 그 진정성이 의심될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경향성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들은 초대교회가 지어낸 전승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비일치하는)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론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비유사성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는 성경의 독자들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비유사한 해석을 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독자들의 주관성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다. 비유사성의 원리에 따르면, 사본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마가복음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마가복음 해석은 독자의 주관성에 의해 왜곡된 본문 해석일 가능성이 비교적 낮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마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지는 마가복음의 용례와 문맥에 맞는지 검토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비유사성 원리는 성경 이해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지만 이해된 내용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방법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필사자들이 “토지”를 가리킬 수 있는 ‘끄떼마따’를 “재물”을 뜻하는 ‘크레마따’로 바꾸어 읽은 것은 오늘날의 성경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경향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고한다. 비유사성 원리를 따라 이러한 경향성을 조심하면서 그 경향성에 역행하여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읽으면 이것은 “토지”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본문 이해가 과연 정확한지는 용례와 문맥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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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예수께서는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마가복음에서 구원의 확신에 관련한 예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29-30이다.

이 본문은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되는지 알려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마가복음에서 ‘영생을 얻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과 동의어이며(마가복음 9:45-4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다’는 표현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25-26). 그러므로 이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반드시 받는 지 알려주는 본문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배운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당혹해 할 것이다. 집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리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 의문은 다분히 흑백논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에 관해 말하지 않고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즉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 중에도 구원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마치 합격의 확신이 없는 수험생 중에 합격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있는 자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와 복음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다. 예수를 참으로 믿지 않으면서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포기를 못하는 사람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말로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며 신앙생활을 할 경우에 우리는 늘 입시생처럼 불안하지만, 구원을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시험에 합격하고 입학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쁘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하게 만들기도 한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에게 방종과 죄의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러한 구원의 확신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을 보고 초신자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날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조롱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도의 문은 막힐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아무리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더라도 나의 구원의 확신으로 남이 구원받는 길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먹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헛된 구원의 확신은 일찌감치 없애는 것이 좋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교리는 무슨 죄를 지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한국교회에서 왜곡, 과장되어 가르쳐졌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아무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으로부터 탈락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었다. 결국 잘못된 구원의 확신은 많은 교인들이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차라리 구원의 확신 없이 구원의 길을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지 분명히 알려준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가 그들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믿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의 믿음이 거짓 믿음일 수는 없다. 예수와 복음을 선택하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사람에게는 그가 포기한 것보다 더 큰 보상이 기다린다. 그것은 구원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버림의 의미

그런데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라고 할 때, ‘버린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과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버린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마가복음 10:28에서도 사용되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할 때, 그는 재물을 가진 자가 구원 받기 어렵다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물을 버렸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하였는가? 베드로는 예수를 따를 때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마가복음 1:18).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마가복음 1:20). 그렇지만 그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린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른 후에도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마가복음 1:29). 그러므로 ‘버리다’는 말은 소유의 포기로 이해할 수 없다.

‘버리다’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허락하다”(1:34; 5:37; 7:12, 27; 10:14; 11:6, 16), “용서하다”(2:5, 7, 9, 10; 3:28; 4:12; 11:25[2회]), “거절하다”(5:19; 7:8), “남기다”(12:19, 20, 22; 15:37), “남아있다”(13:2),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14:6; 15:36)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러한 의미는 마가복음 10:28의 문맥에 맞지 않는다.

이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떠나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1에서 이 동사는 열병이 떠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4:36; 8:13; 12:12; 14:50에서 이 동사는 사람들을 떠나가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34에서 이 동사는 집을 떠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18에서는 그물을 관리하기를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20에서 이 동사는 아버지 세베대를 돕는 것을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0:28의 문맥은 마가복음 1:18, 20을 연상시키는 문맥이므로 ‘버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문맥상으로나 마가복음의 용례상으로나 “떠나다”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실제로 소유를 버린 것이 아니므로, ‘버림’은 순회 사역 기간 동안 가족이나 소유를 떠나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마가복음 10:28)라는 베드로의 말은 “우리가 모든 것을 떠났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열두 제자들은 재물과 가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따라다니며 복음 사역을 하기 위하여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떠났다.

그런데,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릴 때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의 말씀(29-30절)에서도 ‘버리다’는 단어를 “떠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문맥은 이러한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들이 이것들을 100배나 받을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은 ‘버리다’는 단어가 단지 내버려 두고 떠난다는 뜻에서 더 나아가 소유의 포기와 관련됨을 암시한다. 집, 가족, 토지를 100배나 더 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믿음의 가족을 100배나 얻고 많은 집과 토지를 공동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버리다’는 단어도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공동소유로 내어놓는다’는 뜻으로 또는 ‘그 혜택을 독점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집, 가족, 토지의 버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마가복음 10:21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가르침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족의 버림은 가족을 떠남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집이나 토지의 버림은 단지 떠남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의 경우에도 기업의 분량에 해당하는 토지나 가옥까지 포기하라는 것은 아님을 베드로와 안드레의 경우에 여전히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마가복음 1:29).

‘버림’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최소한 떠남을 뜻하고 공동소유 내지 소유포기를 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버림’이 어떻게 이해되든지 간에 가족이나 집, 토지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은 동일하다.

버림의 이유: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다. 그런데, 이 때 한 가지 단서가 있다. 무엇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토지를 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그런데,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가 무슨 뜻인가?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가옥,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다는 뜻일 수 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예수는 소유(문맥상 토지)의 포기를 명하셨기 때문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복음을 위하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집, 가족, 또는 토지’의 “포기”는 그것들을 “떠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도 여행을 하고 계신 예수를 따라 나서려면 집과 가족과 전토를 떠나야 한다. 그래야 전도 여행을 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가옥,’ ‘가족’이 포기의 내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문맥에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포기’가 마가복음의 용례상, ‘떠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지원한다(위 참조).

집과 가족을 떠나 전도 여행하는 복음 전도자들에게 예수께서는 100배의 집과 가족을 약속하신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30절). 그들에게는 가는 곳마다 거할 곳이 생기고 그들을 보살펴 주는 믿음의 가족이 생긴다. 물론 그들은 전도 여행 과정에서 고난도 받을 것이다. “박해를 겸하여 받고”(30절).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구원이 확실히 약속된다.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30절).

그런데, 버림의 목록에서 ‘아내’가 빠져 있는 것은 ‘버림’이 문자 그대로의 ‘버림’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누가복음에서처럼 ‘아내’가 버릴 목록에 포함된 전승이 본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누가복음 18:29). 그러나 마가복음의 문맥에서는 ‘아내’가 빠진 것을 고려하여 본문을 해석하여야 한다. 아내를 버리는 것, 즉 이혼을 금하는 예수의 가르침(마가복음 10:9, 11)의 일관성이 여기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버림’이 잠시 떠나는 것이었다면 유독 ‘아내’만을 떠나야 하는 목록에서 뺐을 리 없다. 예수의 12제자들이 아내를 동반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며 사역을 하였다고 볼 수도 없기에, ‘버림’은 단지 ‘떠남’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 가족, 토지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율법이 허락하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들)이나 토지의 소유를 포기하고, 복음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들과 결별하는 것을 뜻한다. 다만 아내는 복음 전파의 삶을 원하지 않더라도 이혼시킬 수 없다. 그녀가 함께 살기 원하는 한 이혼시키지 말아야 한다(고린도전서 7:12-13 참조). 복음을 따르는 것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그러나 복음 자체가 이혼을 금하기 때문에 버릴 수 있는 목록에서 ‘아내’(또는 ‘남편’)는 제외된다.

본문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예수와 복음을 믿기 때문에 가정에서부터 쫓겨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가옥, 토지 등의 상속자로서 권리를 함께 상실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구원을 약속하신다. 세상에서 기업을 잃은 그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신다. 그러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된다.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크나큰 위로와 소망이다. 그에게 구원의 확신마저 없다면 너무도 비참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고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죄를 지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이 없는 자들에게 마가복음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확신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토지의 포기와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누가 가질 수 있는가?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하여 집이나 가족, 토지를 포기한 사람은 마가복음 10:30에 토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축적한 가옥이나 토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정설을 믿은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하여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하였다. 부의 축적에 성공하는 것이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 증거라고 여긴 칼빈주의자들은 열심히 일하여 벌고 절약하여 씀으로써 부를 축적하여 자본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부의 축적이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축적된 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과 토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부의 축적을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본 칼빈주의자들의 근검절약은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렇다면 부의 포기를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보는 예수주의자들은 새로운 경제체제를 태동시키지 않을까? 근검절약하며 부를 축적하되 부동산투기 등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축적된 부를 지속적으로 포기하여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만드는 예수경제체제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토지를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토지에서 나그네가 쉼을 얻을 때,

그는 낙원에 예수와 함께 거할 곳을 얻을 것입니다.

가옥을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집에 가난한 자들이 깃들일 때,

하늘의 도성에 그를 위한 집이 마련될 것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족에게마저 버림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지만

영원한 것을 얻는 그에게 복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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