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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재물에 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토지’로 번역하면 문맥에 맞는다는 것은 ‘재산’대신 ‘토지’를 번역어로 선택하기 위해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재산” 또는 “재물”이라는 의미도 마가복음 10:22의 문맥에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여 더 문맥에 잘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즉, ‘토지’란 번역을 선택하는 충분한 이유는 다른 번역 가능성들보다 ‘토지’란 번역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이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한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을 때, 강조점은 “팔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쪽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과 관련된다. 율법의 정신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은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명기 15:9-11).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러한 구약의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명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진 것을 팔라”는 예수의 말씀 앞에 부자가 항의 한 마디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율법이 허용하는 유동성 재산까지 처분하라고 하시는 것을 너무하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자는 왜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 하는지 예수께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가 갑자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그에게 단지 유동성 재산만 많았을 경우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많이 가진 것이 토지였을 때에는 그의 행동이 잘 설명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것은 명백하게 율법에 위배되기에 토지를 팔아서 처분하고 이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지적을 원칙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의 명령을 실천하느냐 못하느냐 인데 그는 토지에 관련된 율법의 요구를 적용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23절처럼 재물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까? 

그런데, 23절에는 재물, 부, 돈 등을 뜻하는 ‘크레마’의 복수형 ‘크레마따’가 등장한다. 23절 문맥도 ‘크레마따’가 토지를 뜻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크레마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반응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24절). 이로 미루어 보아 ‘크레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하는 구약의 토지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놀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3절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이 되려면 ‘크레마따’가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가리켜야 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 있었다.

물론 23절부터 재물에 관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토대하여 22절까지에서 다루어진 내용도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예수는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에게 그의 재물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을 수도 있다. 그가 재물을 포기하기 힘들어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보고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지적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읽을 경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으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일까? 물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율법 정신을 염두에 둘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28-29절에서 토지와 가옥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가고 유동성 재산이 이 목록에서 빠져 있는 것은 23절의 ‘재물’(크레마따)마저도 특별히 가옥과 토지를 염두에 둔 것이며, 25절의 ‘부자’도 토지를 많이 가진 부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과연 토지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을까? 

예수께 나아온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20절). 이러한 대답을 듣고 예수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구약성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법인 토지법을 어길 수 있었을까?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지킨다고 한 것은 18-19절에 언급된 계명들이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속여 취하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다. 이 사람은 이 계명들에 토지법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하였을 수도 있다.

토지법을 어긴 것은 도둑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토지법을 어겼다면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토지법을 어긴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을 수 있다.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대토지 소유가 도둑질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은 문맥상 앞에서 언급한 계명 또는 구약성서에 담긴 율법을 실천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킬 때 토지법까지도 잘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신 것(21절)도 그가 율법을 모두 잘 지켰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을 지킴에 헌신한 정도를 일단 인정해 주시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헌신을 하도록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에게만 사랑을 표현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 외에는 흠 없이 율법을 지킨 이 사람에게 얼마든지 사랑을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이다. 또한 사랑을 표현하시면서도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우도록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다.  

마가복음 10:17-31의 흐름 속에서의 토지와 재물 

마가복음 10:22에는 ‘끄떼마따’가 사용되고 23절에는 ‘크레마따’가 사용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는 토지를 다른 하나는 재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은 과연 본문을 일관성 있게 읽는 것인가? 22절의 ‘끄떼마따’를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하려면 이러한 의문도 해소하여야 한다.

23절에 ‘크레마따’를 사용한 것은 마가복음의 서사의 흐름 속에서 예기하지 못한 전환을 통해 놀라움을 자아내는 문학적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영생을 얻는 길을 율법, 특히 십계명에 관련시킨 후 십계명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부자에게 토지법을 지켜야 함을 지적하여 그를 놀라게 한다. 이어서 토지만이 아니라 부 일반의 소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토지법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제자들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침내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는 절망으로 제자들을 몰아간다(26절). 이 절망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에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이러한 절망 후에 반전이 도래한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7절). 이러한 흐름 속에서 22절은 “토지”에 관하여 23절은 “재물”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일관성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극적 효과를 낳는 문학적 기법으로 볼 수 있다.

28-31절의 말씀은 27절에 도입된 반전에 이어지는 위로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신다(27절). 그리하여 반드시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전토를 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29-30절). 여기서 재물 일반에 관한 가르침은 가옥, 전토 등의 부동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가족이 추가적으로 다루어진다. 복음에 반응하여 가옥이나 전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어놓고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마가복음의 독자들 중에는 이미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물한다. 

왜 좀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다면, 마가는 왜 더 명확한 용어대신에 이처럼 애매한 용어를 선택하였을까?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였다면 마가는 22절에서 얼마든지 30절에서처럼 ‘아그루스’(전토)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끄떼마따’처럼 토지나 재물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 애매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가가 이 단어를 “재물”이란 뜻으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만 ‘끄떼마따’는 우리에게 명확하지 않을 뿐이며, 마가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언제나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 그러므로 1세기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단어는 명확하게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볼 수 있다.

22절에 ‘아그루스’대신 ‘끄떼마따’가 쓰인 것은 23절에 등장하는 ‘크레마따’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운율을 위한 고려였을 수도 있고, 토지를 다루는 22절에서 재물을 다루는 23절로 매끄럽게 넘어가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토지를 가리키려면 22절에서 다른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는 설명은 이 단어가 “재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설명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재물”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이라, 문맥에 맞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따라 ‘끄떼마따’를 “재물”보다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예수와 토지법12) 마가복음 10:22의 주해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2. 23. 16:5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친숙한 주해 

번역 성경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주석서를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보다는 “재물”을 접하게 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마가복음 10:22에 쓰인 헬라어 단어 ‘끄떼마따’가 “재산”이나 “재물”의 뜻을 가진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건드리(R. H. Gundry)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그 어원인 ‘끄따오마이’(획득하다) 동사에 관련시켜 “획득물”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획득물’은 물론 문맥에 따라 토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좀더 넓은 의미로 쓰여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재산’이란 단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네덜란드의 판 이어설(B. M. F. van Iersel)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도나휴와 해링턴(J. R. Donahue & D. J. Harrington)이나 에반스(C. A. Evans)의 이해도 동일하다. 후커(M. D. Hooker)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부”(wealth)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독일학자 그닐카(J. Gnilka)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소유”란 뜻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사본 필사자들이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듯이 성경주해자들도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많은 주해자들이 마가복음 10:22를 해석할 때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누가복음 18:23의 영향일 수 있다. 

“그 사람은 끄떼마따를 많이 소유하였으므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가복음 10:22, 사역).

그 사람은 큰 부자였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슬퍼하였다”(누가복음 18:23, 사역). 

사본학에서 친숙한 읽기가 원래의 읽기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듯이 주석학에서도 친숙한 주해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왜곡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본문을 주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서 본문을 주해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안경으로 본문을 보며 본문을 자신에게 친숙한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해자들의 경향을 벗어나려면 덜 친숙한 주해를 선택해야 한다. 많은 주해자들이 동의하는 친숙한 주해를 따르는 것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일 수는 있으나 학문적으로 바르지는 않다. 본문 주해에 있어서도 진리의 길은 좁아서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원문을 복원할 때 기계적으로 사본의 수를 따라가는 것이 위험하듯이 본문을 주해할 때 무조건 학자들의 수를 따라가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대신 독자들의 반응을 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덜 친숙한 주해 

주석가들 가운데에는 동료 주석가들이 빠져 있는 경향성을 벗어나 낯선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제안을 엉뚱한 소수 의견이라고 간주하지 말고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성경 주석가들은 언제나 주관적 경향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본문 연구를 통하여 독자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경향성을 극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반적인 경향성을 벗어나는 주해는 낯선 제안이며 한동안 소수 의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주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해를 하면서 주관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지만, 주관성을 많이 극복한 주해는 본문의 의미를 많이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없다면 주해 작업은 애초부터 무의미할 것이다. 개인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자들의 주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빠지는 공통적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창조적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에드워즈(J. R. Edwards)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또는 “소유지”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지적하면서 이 단어가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밝히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우트레흐트 대학 교수였던 발욘(J. M. S. Baljon)은 이미 20세기 초에 ‘끄떼마따’가 재물을 가리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이 단어가 특히 소유지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런데 테일러(V. Taylor)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소유지”를 가리키며, 따라서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그 사람은 지주임이 밝혀진다고 주장하였다. 레인(W. L. Lane)과 스웨테(H. B. Swete)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고 간주한다. 독일에서 페쉬(R. Pesch)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소유를 가리킨다고 간주하였고, 만(C. S. Mann)도 이 구절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중에서 특히 토지와 관련된다고 본다. 성서번역학자들 중에는 브랫처(R. G. Bratcher)와 나이다(E. A. Nida)가 ‘끄떼마따’가 일반적으로는 재산을, 특수하게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문화권에 따라 농장’이나 ‘가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해는 흔히 접하게 되는 주해들과 달리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해는 번역 성경의 영향을 받거나 통설의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학문적인 통찰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비유사한 예수의 모습을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영향에 의하며 채색된 모습이라고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예수의 모습이 전승된 이유는 그것이 진짜 예수의 모습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 원리는 주석학에도 다음과 같이 응용될 수 있다. 즉 주석학자들의 경향성에 상반된 주해는 성경저자의 의도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문맥을 통한 검증 

위에 제시한 주석학자들의 제안은 참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므로 참된 본문의 뜻을 드러내는 주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은 증거의 제시 없이 단지 주장된 것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과연 “토지”를 뜻할 수 있는 지는 단지 주장될 것이 아니라 검증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뜻은 그 문맥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할 때 문맥에 더욱 잘 맞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주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리는 문맥이다. 주해는 문맥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 나가는 학문적 작업이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가 가진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1절). 즉, 그가 슬퍼한 이유는 포기해야 하는 끄떼마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문맥에서 ‘끄떼마따’는 토지일 수도 있고 다른 유동성 재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팔아야만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토지나 집일 가능성이 높다. 유동성 재산, 즉 돈이나 보물이라면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의미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께서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명령할 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신 데에 있다(21절).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임이 19-20절을 살펴보면 곧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기에, 부족한 것은 율법 지킴과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끄떼마따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이유는 율법 준수와 관련되어 있다.

도대체 끄떼마따가 무엇이기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게 되는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율법은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을 따른 사람은 토지를 많이 가질 수 없었다. 소유지의 경계를 나타내는 토지 경계표를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자신의 토지와 이웃의 토지의 경계표를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이웃의 토지를 영구적으로 구입할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넓힐 수 없음을 뜻한다. 레위기의 토지법에 의하면 토지를 영구 매매하면 안 되고(레위기 25:23), 희년 때까지 임대할 수 있을 뿐이다(레위기 25:14-16, 28). 희년이 되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토지 경계표는 옮겨지지 않게 된다.

대토지 소유를 금하는 율법 조항은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레위기 25:23).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배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민수기 32장; 여호수아 13장 이하) 마땅히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땅을 많이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아합 왕의 땅과 교환하기를 거부한 것은(열왕기상 21:3) 이러한 토지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나봇의 시대에도 토지법은 나봇처럼 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었다. 아합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나봇의 거절 앞에 어찌할 수 없어 근심한 것은(열왕기상 21:4) 그 역시 토지법을 쉽사리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 여인 이세벨이나 이 토지법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토지법이 점점 더 어겨지게 되었고, 드디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마저도 토지법을 지키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토지법을 따르면 토지를 많이 가지게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많이” 가짐으로써 율법을 어기게 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토지였을 것이다. 조상이 율법을 어기고 취한 토지를 물려받아 소유하고 있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해도 그가 그러한 토지를 돌려줄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9절에서 버림의 목록에 ‘전토,’ ‘집’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지 않는 증거이다. 29-30절은 가옥이나 전토, 가족을 포기한 자가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21절은 가진 것들을 포기한 자가 하늘에서 보화를 받는다고 약속한다. 따라서 29-30절은 21절과 평행된다.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며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가질 것이다(21절, 사역).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 전토를 버린 자들 중에 ...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아무도 없다(29-30절, 사역). 

그리하여 21절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해진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이 언급하는 가옥, 가족, 전토에 평행된다. 그러므로 21절의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의 목록 중에서 팔 수 있는 가옥과 전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2절에서 그 부자에게 끄떼마따가 많았다고 할 때 그것은 가옥 내지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끄떼마따’는 용례상 가옥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문맥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게 한다. 

맺음말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하여 재물이나 재산이라고 해석되지만,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러한 소수의 의견은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므로 오히려 주해자들이 흔히 빠지는 경향성을 극복하고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주해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문맥을 통하여 검증된다.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문맥에 맞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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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10) 구약 70인역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1. 24. 14:3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단어의 뜻과 용례

한 단어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의 용례를 관찰하여야 한다. 특히 동일한 저자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하여야 한다. 한 단어는 불변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사용자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의미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마가복음의 저자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하여야 한다. 사전을 보고 이 단어의 뜻이 ‘토지’라고 하거나 ‘재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것이다. 사전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아니라 저자의 용례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끄떼마’는 마가복음에서는 10:22에 한 번 등장한다. 또한 마가복음의 저자가 쓴 작품이 마가복음 이외에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으므로 마가복음의 저자가 ‘끄떼마’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였는지 관찰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 차선책은 마가복음의 저자가 읽었던 문헌들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가 읽었던 문헌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번역인 70인역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 인용된 구약본문들이 70인역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이 구약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부분들을 관찰해 보면(1:2, 3; 7:6-7, 10; 10:19; 11:17; 12:10-11, 19, 26, 29, 30, 31, 32, 36), 이 부분에 사용된 206 단어 중에 178 단어가 70인역과 그 형태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비교를 위하여 편의상 네스틀레-알란트 27판의 마가복음 본문과 A. Rahlfs가 편집한 Septuaginta,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35]의 본문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86.4 %의 일치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에 입각하여 마가복음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70인역에서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가 70인역을 인용하였다면 이것은 그가 평소에 70인역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70인역에 사용된 헬라어 용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끄떼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 단어가 70인역에서 가지는 의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70인역에서 ‘끄떼마’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관찰하여 그 단어가 마가복음에서 어떠한 뜻을 가질 수 있는지 추측할 수 있다.

70인역과 끄떼마

70인역에서 ‘끄떼마’는 잠언 12:27; 23:10; 31:16; 욥기 20:29; 27:13; 호세아 2:17; 요엘 1:11에서 사용되었다. ‘끄떼마’의 뜻은 우선 히브리어 구약 성경과 비교하여 파악될 수 있다. 70인역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70인역의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성경 본문과 동일한 본문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70인역의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성경 본문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본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성경 본문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70인역 번역자들이 그들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에 어떠한 뜻으로 사용하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히브리어 본문으로는 맛소라 본문을 담은 BHS 본문을 편의상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70인역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구약 본문과 BHS 본문이 서로 동일하다고 간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70인역을 읽는 독자들이 70인역을 읽으면서 히브리어 성경과 비교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70인역의 독자의 하나로서의 마가복음 저자도 70인역에 사용된 ‘끄떼마’의 의미를 히브리어 성경과 비교하여 파악하기 보다는 70인역의 자체 문맥 속에서 파악하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끄떼마’가 사용된 70인역의 문맥이 이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70인역에 담긴 ‘끄떼마’의 의미가 아니라 70인역의 독자로서의 마가가 사용한 ‘끄떼마’의 의미를 찾는 것이 목적이므로 70인역 문맥의 관찰은 더더구나 중요하다.

잠언 23:10

70인역 잠언 23:10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성경 잠언 23:10의 ‘사데’(토지)에 해당한다. 70인역 잠언 23:10의 번역자는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생각하였기에 토지를 뜻하는 ‘사데’를 ‘끄떼마’로 번역하였을 것이다.

또한, 70인역 잠언 23:10의 독자는 문맥을 통해서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70인역 잠언 23:10은 다음과 같다.

영원한 경계들을 변경시키지 말고

고아의 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

여기에서 ‘끄떼마’는 ‘경계’(호리아)에 평행된다. ‘영원한 경계’란 조상대대로 기업으로 내려오는 토지의 경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토지의 경계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7:17을 배경으로 한다. 70인역 신명기 27:17은 이웃의 ‘경계’(호리아)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토지의 경계를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희년이 되면 토지가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레위기 25장의 토지법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70인역을 읽는 독자들은 잠언 23:10에서 ‘끄떼마’를 토지의 경계를 뜻하는 ‘호리아’와 관련시켜서 재물이 아니라 토지를 뜻하는 말로 이해하게 될 수 있다. 또한 ‘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는 표현은 ‘끄떼마’가 재물이 아니라 토지를 가리킴을 분명하게 해 준다. 마가복음의 저자도 70인역을 읽었다면 ‘끄떼마’의 의미를 그렇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잠언 31:16

잠언 31:16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케렘’(포도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재물보다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잠언 31:16의 70인역 문맥도 ‘끄떼마’가 토지라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려준다. 70인역 잠언 31:16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농토를 보고 구입한 후에 그녀의 손의 열매로부터 끄떼마에 심었다.

농토를 구입한 후에 끄떼마에 심었다면 ‘끄떼마’는 농토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호세아 2:17

70인역 호세아 2:17에서 ‘끄떼마따’는 히브리어 본문의 ‘케렘’(포도원)에 대응한다. 따라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70인역 자체의 문맥도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께서 ‘끄떼마따’를 주신다는 맥락이다(“내가 그에게 끄떼마따를 줄 것이다”). 출애굽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가나안 땅이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요엘 1:11

요엘 1:11에서 ‘끄떼마따’는 히브리어 본문의 ‘코르밈’(포도원들)에 해당한다. 또한 70인역 요엘 1:11은 “추수를 망쳤기 때문에 끄떼마따를 위하여 슬퍼하라”는 내용이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추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농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욥기 20:29

욥기 20:29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나할라’(기업, 분깃)에 해당한다. ‘나할라’는 일차적으로 상속 재산을 가리키는데 상속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토지였다(민 26:53; 33:54; 신 4:21; 수 11:23; 13:6; 시 105:11; 겔 47:14; 48:29 참조). 그러므로 이 단어에 대응하는 ‘끄떼마’는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 70인역 욥기 20:29의 문맥 내에서 보면 ‘끄떼마’는 ‘분깃’에 평행된다.

이것은 불경건한 사람이 주로부터 받는 분깃이며

감찰자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소유들 가운데 끄떼마이다.

‘분깃’은 이스라엘 각 집이 분배받은 분깃(몫)으로서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민 18:20; 수 14:4; 18:5). 그런데, 욥기 20:29에서 ‘끄떼마’는 하나님의 보응을 가리키기 위해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유적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속 재산으로서의 토지를 가리키는 1차적 의미를 토대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욥기 20:29에서의 ‘끄떼마’의 용례는 이 단어가 1차적으로 토지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음을 알려준다.

욥기 27:13

욥기 27:13에서도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나할라’(기업, inheritance)에 대응한다. 또한 70인역 문맥에서 ‘끄떼마’는 ‘분깃’에 평행된다.

이것은 불경건한 사람이 주로부터 받는 분깃이며,

전능자로부터 권력자들에게 끄떼마가 임할 것이다.

여기서 ‘끄떼마’는 이스라엘 각 집이 분배받은 분깃으로서의 토지를 염두에 두고 쓰였다. 물론 근접 문맥 속에서 이 단어는 비유적 의미(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보응)를 가진다. 그렇지만 비유되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서의 토지에 비유되었다. 이러한 비유는 ‘끄떼마’가 1차적으로 토지를 가리킬 때 가능하다.

맺음말

70인역에서 사용된 ‘끄떼마’라는 단어는 대개 토지를 가리키거나 토지라는 구체적 개념을 기초로 형성된 추상적 개념을 가진다. 70인역에서 ‘끄떼마’가 토지를 의미하지 않는 본문은 잠언 12:27뿐이다. 잠언 12:27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혼’(부)에 대응하고 문맥상으로도 ‘토지’를 뜻한다고 볼 근거가 없으므로 부(wealth)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끄떼마’가 70인역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토지를 가리킨다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70인역을 읽으면서 ‘끄떼마’가 토지를 뜻하는 단어임을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마가복음을 기록하며 ‘끄떼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도 이 단어에 “토지”라는 뜻을 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라는 단어의 의미를 해석할 때, 우리는 마가복음의 독자들이 이 단어를 “재물”을 뜻한다고 간주해온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마가복음의 저자가 이 단어를 사용하며 의도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토지”라는 의미의 정당성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독자들의 함성에 의해 묻혀진 저자의 세미한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독자들은 저자가 아무리 작은 소리로 말한다고 할지라도 저자가 말하기 시작하면 침묵하여야 한다. 저자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수천년의 거리에 떨어진 우리가 분간할 수 없을 때에는 저자에게 확성기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70인역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위하여 그러한 확성기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재물’인지 ‘토지’인지 분간되지 않던 세미한 음성이 70인역이라는 확성기를 통과할 때 ‘토지’라고 크게 들려지게 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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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토지법9)사본학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0. 19. 15: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과 사본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라는 헬라어를 담고 있으며 이것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모든 사본들이 일치하여 이 헬라어 단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저술하여 출판한 이후에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을 필사를 하여 전수할 때, 모든 필사자들이 마가복음의 원문을 있는 그대로 필사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필사자들에 의하여 마가복음 본문이 필사되어 전수되는 가운데 어떤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의 본문을 변경하였다. 그렇게 변경된 본문은 또 다른 필사자들에 의하여 필사되어 전수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 사본들을 비교하여 원래의 본문을 복원하는 작업을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하는데, 편의상 이를 사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많은 사본들에 ‘끄떼마따 뽈라,’ 즉 ‘넓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 담겨 있지만, 서방 사본들에는 다른 표현들이 발견된다.

(1) 끄떼마따 뽈라 나머지 사본들

(2) 뽈라 크레마따베자사본, 고대 라틴어 역본

(3)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 클레멘트

베자 사본과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서방 사본들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대 라틴어 역본들이 로마제국의 서방 지역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은 칼빈의 제자인 베자가 소장하고 있다가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 기증한 사본으로서 지금 켐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에는 마가복음 10:22에서 ‘뽈라 크레마따’ 또는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많은 재산’이라고 번역된다. ‘크레마따’는 ‘크레마’의 복수형이며, ‘크레마’는 ‘재산,’ ‘부,’ ‘돈’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37에서 ‘크레마’는 토지를 팔고 받은 돈을 가리킨다.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값’이라고 번역하였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다니엘 11:28도 ‘크레마’가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많은 ‘크레마’를 가지고 그의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가 아니라 돈이나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

만일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가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면 이것은 ‘토지’로 번역되기보다는 ‘재산’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끄떼마따’가 원래 마가복음 10:22에 담겨 있지 않았다면 ‘토지’라는 번역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에서 ‘재산’이 옳은 번역인지 ‘토지’가 옳은 번역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와 대부분의 사본들에 담긴 ‘끄떼마따’ 중에서 어느 것이 마가복음이 원래 가진 표현인지 검토하여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마가복음 인용에는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많은 재산과 전토)라고 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 중에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은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을 가진다. 이것은 위의 (3)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이것은 아마도 (2)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2)의 ‘크레마따’는 토지를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필사자들은 ‘까이 아그루스’(~와 전토)를 추가하여 토지가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3)은 (2)의 ‘뽈라 크레마따’(많은 재산)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그것의 기원인 (2)를 지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서방 사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본들은 (1) 즉 ‘끄떼마따 뽈라’를 지원한다. 더구나 고대 라틴어 역본들 중에 일부(f, q)는 마가복음 10:22에서 divitias(부) multas(큰)라는 표현을 가지는데 이것은 (1)의 어순에 일치하므로 (1)을 지원한다. 많은 사본들에서 (1)이 발견된다고 (1)이 원래 마가복음 10:22에 있던 표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1)을 담은 많은 사본들 중에는 매우 오래된(4 세기) 사본이면서 우수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들이 있으므로 (1)이 원래의 것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본들도 언제나 원문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증거를 좀더 수집해야 한다.

마태복음 19:22의 영향인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인가?

마태복음 19:22에는 마가복음 10:22와 유사한 본문이 발견된다. 동일한 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인데, 마태복음 19:22도 ‘끄떼마따 뽈라’란 표현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1) 즉 ‘끄떼마따 뽈라’가 마태복음의 영향에 의하여 발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한 변화를 사본학자들은 조화(harmoniz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원래부터 마가복음에 일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마가복음을 마태복음 저자가 자료로 사용하였다는 가설(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가능성을 더더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설에 입각하면 마태복음의 ‘끄떼마따 뽈라’는 마가복음의 ‘끄떼마따 뽈라’에서 그대로 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마가복음과 본래부터 일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많은 곳에서 문자적 일치를 보이므로 이곳에서도 그러한 일치가 본래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이 마태복음 19:22의 표현과 동일한 표현이라는 이유만으로 (1)은 마태복음의 영향을 받아 조화된 것이라고 단정하여 이것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 아니라고 판단할 개연성이 없다. 더구나 (2)의 ‘크레마따’가 바로 다음 절(막 10:23)에 나오는 ‘크레마따’의 영향으로 동일하게 변화된 결과일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1)이 마태복음 10:22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은 (2)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다.

마가복음의 문체가 주는 증거

성경의 각권은 저자에 따라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책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사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듯이 성경도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다. 마가복음이 가지는 독특한 문체도 성경의 인성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은 ‘뽈라’(많은)라는 단어가 명사를 꾸며주기 위해 사용될 경우에 언제나 예외 없이 그것이 수식하는 명사 뒤에 위치시킨다(1:34; 4:2; 6:13; 7:4, 13).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세 가지 표현들 중에서 이러한 마가복음의 문체에 일치하는 표현은 (1)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성경 독자의 경향성

(1)이 마가복음 10:22에 담긴 원래적 표현이라면 이것은 ‘넓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번역 성경들이 한결같이 ‘많은 재산’에 해당하는 번역만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가복음 10:22의 번역자들은 (1)을 원문으로 택하였어도 그 의미를 (2)처럼 이해하여 번역하였다. (1)을 원문으로 택한 네스틀레-알란트 27판이나 UBS 4판의 본문을 눈앞에 두고 번역자들이 이를 (2)처럼 번역한 것은 (1)을 담은 원본이나 사본을 눈앞에 두고 필사자들이 이것을 (2)로 고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필사자들의 경향성과 번역자들의 경향성은 서로 일치하기도 한다.

필사자나 번역자나 모두 성경 독자의 일종이므로 이들은 서로 유사한 경향성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어떠한 경향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대의 필사자들의 경향성을 살펴봄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필사자들이 어떤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변경시켰는가를 관찰해 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그 구절을 어떻게 곡해할 수 있는 지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추측을 토대로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성을 조심하며 본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비유사성의 원리와 성경 본문 이해

독자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을 저자의 의도대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고의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곡해하기도 한다.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의미를 곡해하는 독자들의 경향성을 극복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독자들의 경향성은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필사자들의 본문 변경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일단 독자들의 경향성이 파악되면 “비유사성 원리”를 통해서 본문의 본래적 의미 파악을 시도할 수 있다. “비유사성 원리”(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되는 방법론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 발생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원리이다. 초대교회의 전승 경향에 유사한 예수 전승의 경우에는 그 역사적 진정성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초대교회는 그 경향성에 유사한 예수의 말씀을 왜곡함 없이 전승하였을 것이지만, 그 경향성에 유사하지 않은 말씀은 때로 그 경향성에 맞게 소화하여 전승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가능성이지만 이 가능성 때문에 초대교회의 경향성에 유사한 전승들은 그 진정성이 의심될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경향성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들은 초대교회가 지어낸 전승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비일치하는)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론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비유사성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는 성경의 독자들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비유사한 해석을 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독자들의 주관성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다. 비유사성의 원리에 따르면, 사본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마가복음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마가복음 해석은 독자의 주관성에 의해 왜곡된 본문 해석일 가능성이 비교적 낮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마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지는 마가복음의 용례와 문맥에 맞는지 검토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비유사성 원리는 성경 이해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지만 이해된 내용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방법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필사자들이 “토지”를 가리킬 수 있는 ‘끄떼마따’를 “재물”을 뜻하는 ‘크레마따’로 바꾸어 읽은 것은 오늘날의 성경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경향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고한다. 비유사성 원리를 따라 이러한 경향성을 조심하면서 그 경향성에 역행하여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읽으면 이것은 “토지”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본문 이해가 과연 정확한지는 용례와 문맥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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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8)성경번역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9. 18. 11:08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글 번역 성경들과 ‘토지’

마가복음 10:22은 ‘토지,’ ‘소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담고 있다. 이 단어가 ‘토지’나 ‘소유지’를 뜻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명하신 이유를 깨달으며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끄떼마’의 복수형)를 토지를 뜻하는 것으로 읽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끄떼마’가 기본적으로 토지를 뜻하는 단어라는 것은 간단한 헬라어 사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읽을 때에는 ‘끄떼마’가 토지를 뜻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성경번역자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을 뜻하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마가복음 10:22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후에 헬라어로 마가복음 10:22을 읽어도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의 뜻으로 이해하게 된다. 성경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지는 번역 성경들이 오히려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한글 번역성경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개정).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그러나 그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은 ‘재물’이나 ‘재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본문을 의역한다. “이 말씀을 듣자 그 사람은 무척 근심스런 얼굴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대단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글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마가복음10:21-22이 토지와 관련됨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로 번역한 한글 번역성경들 중에는 사도행전 5:1에서 동일한 단어(단수형, ‘끄떼마’)를 ‘땅’으로 번역한 성경들이 있다. 바로 공동번역 및 공동번역개정판,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이다.

그런데 아니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을 판 다음(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삽비라와 의논하고 을 팔아(현대인의 성경).

아나니아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삽비라도 자기들의 일부분을 팔았습니다(쉬운 성경).

이 번역성경들을 읽는 독자들은 아나니아가 판 ‘땅’이 마가복음 10:22의 ‘재물,’ ‘재산’과 동일한 단어의 번역임을 알 수 없기에 이러한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이 둘을 연결 지을 수 없다. 개역이나 개역개정판, 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을 읽는 독자들의 경우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이 번역본들은 사도행전 5:1의 ‘끄떼마’를 ‘소유’라고 번역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개정).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를 팔아서(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이 번역본들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되었기에 두 본문 뒤에 동일한 헬라어 ‘끄떼마’가 있음을 알기 어렵다. 물론 ‘소유’는 ‘재산,’ ‘재물’과 동의어이므로 두 본문을 서로 연결할 수 있지만 사도행전 5:1에서 ‘소유’가 토지를 가리키는 것을 파악하기는 쉬워도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도행전 5:1에서 ‘땅’대신 ‘소유’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해도 이것이 결국 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문맥 때문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땅을 판 금액에 관하여 언급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은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재산’으로 번역한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습니다.” 사도행전 5:1에서는 문맥상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곧 알 수 있게 되지만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가 언급되었음을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서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외국어 번역 성경들과 ‘토지’

외국어 번역 성경들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의 번역에 토지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선 영어번역본들을 살펴보면 킹 제임스 역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possession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NIV는 ‘wealth’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본들도 ‘Güter’(재물), ‘Vermögen’(부) 등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여, 토지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없게 한다. 불어 번역본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biens’(재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므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한 네덜란드어 번역본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 또한,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때 율법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마가복음 10:21의 말씀이 구약의 토지법을 배경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헬라어 본문으로 읽어도 그 속에 토지가 언급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이다. 번역 성경을 읽은 사람은 원어로 성경을 읽을 때 번역 성경에서 파악한 의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성경 번역은 헬라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성경의 의미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지만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역할도 한다. 모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은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이 소유나 재물을 뜻하는 단어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한 이유는 이 헬라어 단어가 토지를 뜻할 수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DRA(The Douay-Rheims American Edition, 1899)는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land’로 번역하였다. 독일어 성경들 중에서, EIN(Einheitsübersetzung, 1980)은 ‘Grundstück’(토지)을, LUT(Revidierte Lutherbibel, 1984)‘Acker’(농토)를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불어성경 중에는 BFC(1997)가 ‘terrain’(토지)을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네덜란드어성경 중에서 LEI(Leidse Vertaling, 1912/1994)‘akker’(농토)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들 번역본들은 동일한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마가복음 10:22에서는 재물을 뜻하는 말로 번역하였다. 그들이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킬 가능성을 알면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는 ‘끄떼마’를 ‘토지’로 번역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번역자들 역시 그들이 읽은 성경 번역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 번역과 기독교 세계관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구절은 마가복음 10:21-22과 그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9:21-22이다. 마태복음 19:22에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처럼 헬라어 ‘끄떼마따’가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의 경우에는 토지를 뜻하는 번역어를 사용한 번역본이 없을까?

개역과 개역개정판은 마태복음 19:22에서 ‘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판, 표준새번역, 쉬운 성경은 ‘재산’을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우리말 성경은 이곳에서도 “그는 굉장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의역한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possessions’를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ASV, DBY, DRA, ESV, GNV, KJV, NAB, NKJ, NLT, NRS, RSV, RWB, WEB, YLT), ‘property’를 번역어로 사용한 역본들도 있다(BBE, NAS, NAU). NIV와 NJB는 ‘wealth’를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성경들도 마태복음 19:22에서 ‘Güter’(재물)나 ‘Vermögen’(부)을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불어 성경번역본들은 ‘biens’(재물)을, 네덜란드어 성경번역본들은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번역어로 택하였다. 이처럼 마태복음 19:22에서도 성경 번역자들은 ‘끄떼마따’를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번역 성경들의 상황이 이러하므로, 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빠져버린 번역 성경을 읽는 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와 관련된 경제 윤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구약의 토지법을 존중하는 입장의 교회들은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레위기 25:23 말씀과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신명기 27:17 말씀에 입각하여 대토지소유의 비윤리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들의 규범성을 무시하는 교회들은 토지를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이 시대의 정신에 따라 생각하며 대토지소유가 정당한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성경 번역은 그 번역을 읽는 기독교의 모습의 밑그림을 그린다. 토지를 재물과 혼동한 번역 성경을 가진 기독교는 지주와 자본가를 혼동하는 기독교가 된다. 그리하여 자본가만이 아니라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한 소유권자로 간주하는 실수를 범하거나, 대지주만이 아니라 자본가까지 비윤리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자본가와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면, 대지주와 자본가를 함께 묶어서 비윤리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사회주의이다. 성경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도록 무의식적으로 강요받아왔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입장을 택하였고, 자본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을 택하곤 하였다.

생산수단을 모두 국유화하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와 자본을 모두 국가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지만, 성경(구약)은 토지와 자본 등의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도록 한다. 자본주의자들은 개인이 토지마저도 무한히 많이 소유해도 된다고 여기지만 성경(신명기 27:17)은 토지를 제한적으로 일정 분량만 소유하도록 명한다. 성경이 그려주는 사회의 모습은 분명히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성경의 토지법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길과도 다르다. 중국에서는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국민에게 불평등하게 임대해 주지만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소유하도록 한다. 헨리조지의 토지가치세의 경우에도 이를 실행하면 모든 사유지에 지대에 해당하는 세를 부과하여 결국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나누어 소유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소유한 것은 임대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므로 지대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게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헨리조지가 제안한 토지가치세를 적용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성경의 토지법을 적용하면 모든 국민이 평등한 토지권을 누리게 되고,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국토를 소유하게 되며, 토지를 많이 가진 사람들은 권리이상으로 가진 부분에 대한 세를 국가에 내게 되고 국가는 이를 사회 복지를 위해 사용하게 된다.

성경의 한 단어의 번역이 부정확할 때 성경으로 세상을 보는 눈은 크게 왜곡될 수 있다. 물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부분적인 부정확함이 교정되기도 하지만, 부정확한 부분들이 모여서 부정확한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교회가 세상의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인식하고 바른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확한 성경 번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세계관을 성경적으로 교정하려면 기독교인들이 읽는 번역 성경을 바르게 교정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성경을 번역할 때나 번역된 성경을 교정할 때, 이미 번역된 성경들이 미치는 영향을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우리는 번역 성경을 전보다 좀더 정확하게 개정할 수 있다.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고, 한 걸음에 천리 길을 갈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단번에 완벽한 번역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여 이러한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오히려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원망하는 게으른 종(마태복음 25:24-25)처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세상에서 살 수 없지만 점점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좀더 나은 번역 성경을 만들 수 있기에 우리는 끝없는 개정작업을 통해 좀더 원어와 원문을 잘 반영하는 번역성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 번역 성경을 좀더 정확하게 개정하는 작업은 기독교 세계관을 교정하는 작업이며, 또한 교회를 회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초 작업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예수와토지법5)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7. 9. 10: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재물에 관한 구원론적 평가

마가복음 10:23에서 우리는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얻는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여기서 ‘재물’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원어는 ‘크레마’이다. 이 단어는 단지 토지만이 아니라 유동성 재산도 가리킨다. 70인역 다니엘 11:28에서 ‘크레마’는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킨다. “그가 많은 재산(크레마)을 가지고 그의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일 수는 없다. 사도행전 4:37에서도 ‘크레마’는 토지를 팔아 받은 돈을 가리킨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크레마)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러한 용례를 통하여 볼 때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0:23에서도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다.

마가복음에서 ‘크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곳은 오직 마가복음 10:23 뿐이므로 마가복음의 용례로 마가복음 10:23의 ‘크레마’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고 검증할 길은 없다. 그렇지만 마가복음 10:23의 문맥을 통하여 이 단어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를 가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24절)은 ‘크레마’의 뜻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만일 ‘크레마’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은 율법(레위기 25:23; 신명기 27:17)을 어긴 자들이므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은 ‘크레마’가 토지가 아닌 (토지의 소산으로서의) 재물을 가리킴을 암시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데, 재물은 많이 소유해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율법이 문제 삼지 않는 것까지 예수께서는 문제 삼으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물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도덕적으로 불의하다고 평가하지 않으셨다. 세상에는 깨끗한 부자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모든 부자들을 비윤리적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내리신 평가는 구원론적 평가이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 받는다”는 뜻을 가진 표현임을 26절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말씀을 제자들은 “구원받기 힘들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많이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즉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본문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맥을 통하여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자의 경우처럼 율법을 어기면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깨끗한 부자가 존재하기 어려운 만큼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부자의 경우에도 또 하나의 장애물이 존재한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신다(21절). 불의한 재물의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재물을 사용하기 원하실 것이다. 깨끗하게 재물을 모은 부자들 중에서도 재물을 사랑의 실천에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최소한 부자들이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지키기 어려운 만큼 부자들이 구원받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의 불가능성

사람이 구원받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함을 25절은 지적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랍비문헌들은 불가능의 이미지로서 코끼리가 바늘귀로 나간다는 비유를 쓴다. 동일한 이미지를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동물인 낙타는 자연스런 선택이다. 25절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26절: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은 25절의 비유가 구원의 불가능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음을 보여 준다.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으로서 나귀가 짐을 내리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이었다면 제자들이 놀라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였을 이유가 없다. 또한 바늘귀라는 예루살렘 성문이 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예수께서 당시에 존재하지 않은 성문을 언급하셨을 리 없다. 그러므로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의 바늘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불가능한 것보다 어려운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은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부가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로 여겨진 문화 속에서는 부자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받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은 부자들에게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그러한 복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불가능할 것인가? 26절은 이러한 생각의 결론을 보여준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제자들의 이러한 결론을 예수께서는 긍정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27절).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예수께서는 부자는 구원받기 힘들지만 가난한 자들은 구원받기 쉽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부자가 구원받기 힘들면 가난한 자들은 더더구나 구원받기 힘들다는 생각을 전제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 불가능하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도 부자들처럼 구원받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부자들은 21절 말씀대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의한 부자가 불의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줄 때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진다면(21절), 깨끗한 부자가 깨끗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줄 때 더더구나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그들이 언제 많은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구원받기도 역시 힘들다.

예수께서는 부유함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셨다. 예수께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신 것은 단지 토지만이 아니다. 율법의 견지에서 보면 토지를 과다 보유한 지주는 악하고 재화를 많이 보유한 자본가는 선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깨끗한 부자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렇지만 부자에 관한 예수의 평가는 부자를 가난한 자와 대조시키면서 부자를 심판하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관점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선언함으로써 가난한 자도 구원받기 어려움을 암시한다.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기 어려움을 깨닫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

예수께서는 구원의 불가능성을 지적하시면서 가르침을 끝맺지 않으신다. 구원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예수께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조시키지 않으시고,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신다. 하나님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모두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익숙한 구원론으로 환원하면 안 된다. 27절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음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시는지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왜 부자에게 불가능한 지 살펴야 한다. 구원이 부자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토지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간 익명의 부자와 관련이 있다. 그는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포기하기 힘들어 고민하였다. 그렇다면 합법적으로 소유한 재물을 포기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재물의 포기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는 명령과 관련된다. 이 명령은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즉,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가진 명령이므로 구원론적 함의를 지닌다.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산의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땀 흘려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는 더더구나 구원이 약속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랑을 명하신다.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명하신다. 이것은 인간에게 심히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심으로써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사랑은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므로(갈라디아서 5:6)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궁극적인 조건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고 말해야 옳다.

재물과 제자도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으셨다. 다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지 가르치셨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악하지 않다.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도 악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우리의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남에게 주기 위하여 열심히 벌어야 한다.

재산을 축적하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 아니라 축적된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다. 근면검소하게 생활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축적된 자본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근심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근심할 때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가난에 처한 사람에게 부유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부유한 자들이 가진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가난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재물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토지 투기를 통해 재물을 축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며 근검하게 재물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깨끗하게 경제활동을 하여 깨끗한 부를 모아야 한다. 우리의 경제활동은 또한 신앙생활이다. 우리는 더러운 부를 많이 모으는 것보다 깨끗한 부를 적게 모으는 쪽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모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예수 제자의 길일 뿐 아니라,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기도 하다. 구원받은 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걸어가야 할 길이므로 그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함부로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기준에 미달된 사람들을 은혜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 은혜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여 이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들을 심판하실 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의 하나님은 또한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참된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변화시켜 참된 제자의 길을 가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삶의 변화시키어 바른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구원은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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