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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쳐라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12. 15. 10:3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복음과상황 창간 18주년 기념예배 설교] 에스겔 2:1-7/ 예레미야 5:30-31

이만열 장로 (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명예교수)




복상 창간 기념예배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에 저는 에스겔서의 이 대목을 영문성경(NIV)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이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7절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You must speak my words to them, whether they listen or fail to listen, for they are rebellious. 이날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좀처럼 영감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도, 오늘 설교의 제목은 바로 이 대목의 본문에서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바빌로니아의 그발 하수가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기 백성을 향해, 이 반역하는 무리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내용이 5절에도 보입니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외치는 자를 말할 것입니다. 4절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자손은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왜 이 성경말씀을 오늘 말씀으로 택했는가 하면 오늘날의 세대가, 에스겔의 시대와 같이 목이 곧고 너무 뻔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사회도 꼭 같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씀이 불필요한 세대같이 보입니다. 때문에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상 진정한 말씀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흔히 들려지는 말씀에 대해, 듣지도 않고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낙심하고 있을 때에 이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갔던 때였던 만큼 오늘 세대보다 더 뻔뻔하고 소망이 없던 시대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 뻔뻔한 사람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치라고 했습니다. 그런 뻔뻔하고 절망적인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代言하는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세대가 뻔뻔하고 목이 곧다고 한다면, 어디에서 그렇습니까. 먼저 교회가 그렇습니다. 대형교회가 목회세습을 하면서 종교적인 권력, 지위, 명예 그리고 재부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세습에 저항하거나 개혁하려는 운동이 잠시 보인 적이 있지요. 중세 천주교회가 교황이나 교권자들로 인한 부패 때문에 이를 막아보려고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했듯이, 한국 교회에도 이런 특단적인 조치가 주어져야만 세습의 폐단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요? 대형교회의 세습과 그 운영은 거의 필연적으로 부정직하고 부패한 사건들을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반성이 없을 뿐아니라 이제는 이를 지적하는 소리조차 거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형교회 세습 문제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다 나타나고 있지만, 보수교회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보수가 종교계나 정치계를 막론하고 그 건전한 가치관을 상실했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며, 여기에서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무자격 목회자들의 양산이나 목회자들의 상식을 벗어난 일탈행위는 이제 일일이 지적할 겨를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는가 물을 정도로 한국 교회의 변질은, 과거 한 때 한국사회에 소망이 되었던 그 이상으로,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인가 하는 정의도 필요합니다만, 적어도 오늘날 같이 대형교회를 지향하면서 자본주의적 경쟁주의식으로 교회성장을 지향하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기독교인이고 국무총리, 대통령실장, 교과부장관과 국토해양부 장관 등 많은 공직자들이 기독교인이고 국회의원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어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계층은 물론 인구의 20%내외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 인원배분으로 본다면 가히 기독교국가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의 확립은 요원하고 오히려 기독교적인 세계관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사회 또한 각종 선각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吾不關焉, 들은 시늉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건이 터져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자의 입을 틀어막고 위협을 가하며, 글로써 외치는 자를 옥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국정최고책임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요 날마다 하나님께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제 도대체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가, 기독교인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어떻게 정치권과 사회를 대하고 있습니까. 자기 약점이 많고 보니 우선 이렇게 양의 탈을 쓴 정권에 대해서 우선 비판할 능력이나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정권의 행태나 우리 사회의 비기독교적인 점에 대해서 추호도 거스리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러할진대 다른 언론들의 곡학아세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을 말하고 계도할 수 있겠습니까.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남쪽 유다의 여호사밧왕 시대와 같이 미가야 같은 사람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그 당시의 400명의 거짓 예언자처럼 떼지어 외치는 아첨소리만 있는 것 같습니다. 4백명의 목소리처럼 승리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지만, 패배와 유리방황을 외치는 한 사람 미가야의 초라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천상의 회의에서 ‘예언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어 호리게 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거짓말 하는 영’을 마음 속에 넣었기 때문일까요.

대학교수들로부터 시작된 시국선언에도, 각계의 외침에도 전혀 무신경하게 대하는 이 정치 사회가 과연 기독교인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같은 시국선언에 대한 반응이라는 게 고작, 전체 대학교수가 얼만데, 전체 국민이 얼만데 그 따위 숫자가 외친 들 대수로운가 하는 비아냥 뿐입니다. 아합왕을 지지해준 ‘400명’의 예언자들처럼 거대한 언론들이 자기 뒤를 봐주고 있다고 뱃장입니다. 그래서 ‘먹통정권’이란 별명까지 붙여주는 안타까운 상황에까지 이르렀지만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400명은 하나님의 진실한 대변자 미가야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이 모두 400명의 소리처럼 열창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진실한 예언자 미가야 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시대를 향해 외쳐야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에스겔서를 읽기 전에 예레미야서를 읽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참으로 특이한 예언자입니다. 모두들 자기 민족의 희망적인 미래를 강조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민족의 비극적인 장래를 가감없이 외쳤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유독 “너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구절이 많이 나오는 성경이라고 느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조국 유다와 자기 민족을 향해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자긴들 어찌 그 말을 원해서 했겠습니까. 조국과 민족을 저주하는 그런 말을 어떻게 자기 입으로 흔쾌히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하니 하는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런 불리한 말이 “나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읽은 예레미야 5장의 말씀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합니다만 5장의 1절 말씀은 오늘 이 시대를 두고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유다 왕국은 이집트에 원군을 청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랬을까요? 예레미야는 국방의 요체가 동맹군을 끌어들이는 데에 있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실천함에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걸 오늘날 식으로 번안한다면, 국방의 요체가 동맹국과의 굳건한 동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돌보며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의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의 질서를 실현함에서 안보의 원리를 찾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반핵반김의 안보원리를 추동하는 중추세력이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 교회라고 할 때, 이들의 이념과 지향이 든든한 안보자체이신 하나님 신앙의 토대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거리에서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았던 前例를 따라서 한국 교회는 안보의 요체를 정의와 진리의 실천에서 설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유다의 지배층이 국방의 요체를 이집트와의 동맹에서 구했듯이, 한국 교회도 유다의 지배층처럼 잘못된 안보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그 시대를 꿰뚫는 예언자적 혜안은 5장 30절과 31절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 부류를 한꺼번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제사장 그리고 그런 선지자와 제사장을 용납하는 백성들입니다. 저는 제사장들이 권력으로 다스린다는 말을 잘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형교회와 최근 이곳 저곳에서 불거지는, 교권화해가는 교단정치의 현상들을 보면서 제사장들의 권력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는 것은 비단 아합시대에 미가야 선지자와 대결했던 400여명의 선지자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소위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까. 뻔히 보이는 사실도 뒤집어서 말하는 사실들이 바로 거짓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근 감리교단을 비롯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에서는 제사장의 권력화의 현상의 적라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교단 정치는 물론이고 연합체의 정치행태 또한 제사장의 권력화의 상징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거짓 선지자와 권력을 휘두르는 제사장을 보면서 그것을 좋게 여기는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들에 대해서 깨어있다면 어떻게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거짓과 권력 앞에서 무방비상태인 백성들이 존재하는 한, 거짓 선지자들과 권력을 남용하는 제사장들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와 권력을 남용하는 제사장들게 실망한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깨어있는 민중, 각성하는 백성을 기다렸던 것일까요.

<복음과상황>은 지금부터 18년전인 1991년에 창간되었습니다. 그 때 한국의 복음주의권은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시대에 깨어있는 행동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정리되고 있습니다만, 정교분리의 잘못된 권유와 이분법적인 신앙행태에 기인하여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가 거의 봉쇄되었습니다. 젊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진리에 대한 무기력증에 내팽개친채 안타까워했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주의권의 젊은이들은 진보권 젊은이들의 지향과 행동을 보면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무렵 로잔언약이 소개되었고, 그 로잔언약을 비빌 언덕으로 하여 젊고 개혁적인 젊은이들이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비록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작은 숫자였지만, 이를 계기로 사회참여를 위한 지향을 복음주의권 나름대로 정립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복음과상황>이 간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헌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복음주의권의 사회참여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 <복음과상황>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진보주의권의 이론과 주장, 행동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뜻을 함께 하지 못한 복음주의권이 <복음과상황>에 귀를 기울이면서 약하게나마 행동화의 기틀을 마련해 갔던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복음과상황>은 복음주의권 젊은이들에게 시대를 깨우치는 광야의 소리와도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환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진보주의권 젊은이들의 주장과 운동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이론과 행동은 이제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차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때에 <복음과상황>은 아직도 그 생명을 유지하면서 사명완수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리가 없는 시대가 아니고 창간 당시와는 달리 소리가 너무 많은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때에도 외치는 소리가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소리가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듣던 듣지 않던 외치라고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3장에 보면 외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언명했습니다. 아니 외치지 않아 멸망하게 된 사람들의 피값을 외치지 않은 자들에게서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장 18-21절을 보십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이런 말씀으로 명령하고 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외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창간 당시와 모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세계사의 변화는 물론이고 독자층들도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변화에 따라 우리의 소리도 좀 더 정제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복음과상황>이 더 분명한 소리를 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8절 말씀에,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복상은 그 동안 시대에 조응하는 분명한 소리를 발했는지, 그리고 변화하는 독자층이 이해할 수 있는 소리를 발했는지, 오늘 이 시점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아서도 복상이 존속할 필요가 있다면, <복음과상황>이라는 제목에 알맞게, ‘상황’이라는 시대 변화를 통찰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진행 방향에 알맞는 ‘복음’의 원리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의 다른 의미 없는 소리들처럼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를 새롭게 다짐하는 데에 창간 18주년을 기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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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는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12. 7. 14:43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정부부처 제자리 찾아주기③-통일부 편 

“통일부는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사진) 통일부앞에서 1인 시위중인 김종환목사(통일시대평화누리 전 사무국장)

통일부 홈페이지를 보면 자신들의 임무를 “통일부는 통일 및 남북대화․교류․협력․인도지원에 관한 정책의 수립, 통일교육․홍보, 그 밖에 통일에 관한 사무를 관장합니다.”라고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

요약하면 통일부는 통일과 그 기반 마련을 위해 남북대화와 협력에 힘을 기울이라고 만든 정부조직이며, 통일부 공무원들은 그 일을 하라고 월급을 받는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와 지난 2년 가까이 통일부는 자신의 존립근거를 잊고 세월만 보내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통일부 장관은 통일과 남북화해를 어떻게든 저지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백번 양보해서 올해 초까지는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사건, 북한의 로켓 발사, 6자회담 탈퇴 등 긴장요소들이 많았기에 적극적 조처를 취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올해 봄을 지나면서는 거의 일방적이라고 할 만큼 북한당국의 관계개선 의지가 두드러졌다. 피랍어부 석방, 현정은 현대회장 방북에 이은 금강산, 개성공단 재개의사,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고위급 인사 조문, 추석 남북이산가족 상봉, 6자회담 복귀 의사 등 작정하고 쏟아내는 것 같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그 때마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이 “약간의 변화는 감지되나, 아직은 근본적인 변화라고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도적 지원도 아직은 때가 아니고, 개성공단도, 금강산관광도 착수할 때가 아니며, 남북정상회담도 노력할 이유도 없고, 이산가족상봉 계획도 없다. 그러면 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농림부가 농촌경제가 회생할 전망이 없으니 당장 할 일이 없다거나, 교과부가 입시문제 해결의 근본적 전망이 보이지 않아 당분간 기다리겠다고 한다면 그런 망발이 어디 있을까? 남북간 근본문제 해결되지 않아 대화할 수 없다면 도대체 통일부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러니 없애야 한다. 

물론 그동안 현 장관도 한 일이 있긴 있다. 지난 9월 북한 황강댐 방류 사태 당시 아직 분명한 증거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의 방류는 의도를 가지고 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혀, 이후 정부의 강경대응을 이끌었다. 그는 민간의 인도적 지원만이라도 허가해 달라는 요청에 ‘인도적 지원은 언제든 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지만, 아직 북한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증거가 없어, 조사 중’이라고 말한다. 국제기구, 민간구호단체들조차 다 인정하는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을 정작 주무부서인 통일부가 여전히 조사만 하고 있다면 그런 통일부가 무슨 필요 있는가? 최근 민간단체들이 인도적 대북지원 협의를 위해 북측 민화협을 만나려던 계획도 통일부의 압력으로 불허되었다고 한다.

작년 통계를 보니 정관의 연봉은 각종 수당 등을 모두 합하면 1억 3239만원이다. 이 돈이면 5명 이상의 도시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는 고액연봉이다.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남북대화 위해 강연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에게 이렇게 큰돈을 지출하느니, 차라리 통일부장관을 해임하고 그 돈으로 정부가 말끝마다 외치는 일자리 창출 위해 애쓰는 게 옳지 않은가?  

상황이 이런데도 내년도 통일부는 26% 대폭된 예산안을 국회에 보고했다. “대북 쌀 지원 등에 사용되는 남북협력기금 출연금은 3500억원으로 예년과 같은 수준으로 동결됐지만, 통일부에서 사용하는 일반 예산은 1527억6500만원으로 전년 대비 25.7%나 급증했다.”(이근우 기자, 매일경제신문 09. 11. 13)

제대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쌓아 놓는 남북협력기금은 그조차 동결한 상태에서 통일부 일반예산만 잔뜩 인상해 놓았다. 2008년만 해도 남북협력기금 실제 사용액은 총 예산의 20%가 조금 넘는 수준으로 역대 최저다. 통일부가 가장 중요한 남북관계개선 여건 조성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증거다.

새 정부 들어 정부조직개편 한다며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폐지될 위기에 처했던 통일부를 국민들이 살려놓았더니 할 일은 안 하고, 근본적(?) 상황변화만 기다리고 있다. 사실 현인택 장관 스스로도 인수위 시절 통일부 폐지를 주장했던 인물이니, 하는 일이 없는 통일부 폐지 주장은 사실상 내 주장이 아니라, 현인택 씨의 소신 아닌가? 도대체 경력이나 소신이나 활동 모든 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친하다는 것 말고 하는 일이 없는 현 장관이 물러나든지, 남북관계개선을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할 의지가 없다면 통일부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국민의 아까운 혈세를 이제 그만 낭비해야 한다.









구교형목사(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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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부처 제자리 찾아주기②-국토해양부 편 

“국토해양부는 소신대로 국토파괴부로 개명하라”

 


                                         (국토해양부 앞에서 1인 시위하는 정운형 통일시대평화누리 회원)

                                             
공자는 세상을 바로 잡는 중요한 원리로 정명(正名)을 말하였다. 다시 말해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수록 바른 이름을 붙여줘, 뜻을 바로 잡아야한다는 것이다. 국토해양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국토부의 임무․사명․존재이유’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우리와 우리 후손이 살아갈 풍요롭고 아름다운 국토를 조성하고, 5대양 6대주로 뻗어나가는 경쟁력 있는 교통물류체계를 구축하여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국토해양부가 되자”

‘풍요롭고 아름다운 국토’ 그것은 단지 더 많은 길을 뚫고, 편의시설을 많이 만들고, 전국 구석구석마다 불로 밝혀 대는 것만이 아니다. 지나친 생활의 불편은 덜어야겠지만, 오히려 지나쳐 모자람만 못한 곳은 자연스럽게 놓아두는 것이 더 지혜로운 국토관리다. 더구나 스스로의 규정처럼 이 국토가 단지 우리 뿐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땅이라면 ‘지속가능한 개발’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국토부에는 그런 개념들이 애당초 없다.

산골 오지에 이르기까지 시멘트로 흙을 덮어버리고, 멀쩡한 숲은 밀어 잔디심고 인공 연못을 만들어 놓고는 녹지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제는 인공구조물을 뜯어 자연하천을 복원하는 게 대세임에도 멀쩡한 자연하천에 억지로 시멘트 칠을 하면서도 강 살리기라고 선전을 해댄다.

대통령과 정부기관들은 말끝마다 “법을 지키라”고 국민들을 가르치려고 들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형정편의와 일시적 효과를 위해 온갖 탈법과 변칙을 일삼고 있다. 그 중심에 국토부가 있다. 앞서 살펴본 온 무분별한 그린벨트 해제, 수도권 막개발, 4대강 죽이기 사업 등 국토파괴공작들은 모두 대통령의 지시아래 국토부 장관이 실행하고, 환경부 장관이 설거지하는 세트플레이다. 국토부는 국토가 마치 자기 집 뒷마당처럼 언제든 제 맘대로 파헤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듯 전횡을 일삼고 있다.

정부의 역점사업인 보금자리주택 개발을 위해 국토부는 그린벨트 환경평가 등급을 근거 없이 낮춰 조정하였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는 막대한 예산을 숨기기 위해 일부사업을 법적 근거도 없이 수자원공사에 떠넘겨 버렸다. 또 지금까지는 그린벨트 막개발을 막기 위해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일부 공기업과 지방공사에게만 허용하던 그린벨트 해제지역 개발사업을 준정부기관, 금융 공기업 등에도 허용하여 무분별한 막개발을 부추겼다.

그러니 이름을 제대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토를 파괴하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알고 불철주야 열심히 일한다면, 그 존재의의에 맞게 ‘국토파괴부’라고 불러야 옳은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제 이름을 찾아주는 것은 바른 판단과 삶의 기본이다. 바른 이름을 갖지 못하면 국민들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공자는 세상을 바로 잡는 중요한 원리로 정명(正名)을 말하였다. 다시 말해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수록 바른 이름을 붙여줘, 뜻을 바로 잡아야한다는 것이다. 국토해양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국토부의 임무․사명․존재이유’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우리와 우리 후손이 살아갈 풍요롭고 아름다운 국토를 조성하고, 5대양 6대주로 뻗어나가는 경쟁력 있는 교통물류체계를 구축하여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국토해양부가 되자”

‘풍요롭고 아름다운 국토’ 그것은 단지 더 많은 길을 뚫고, 편의시설을 많이 만들고, 전국 구석구석마다 불로 밝혀 대는 것만이 아니다. 지나친 생활의 불편은 덜어야겠지만, 오히려 지나쳐 모자람만 못한 곳은 자연스럽게 놓아두는 것이 더 지혜로운 국토관리다. 더구나 스스로의 규정처럼 이 국토가 단지 우리 뿐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땅이라면 ‘지속가능한 개발’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국토부에는 그런 개념들이 애당초 없다.

산골 오지에 이르기까지 시멘트로 흙을 덮어버리고, 멀쩡한 숲은 밀어 잔디심고 인공 연못을 만들어 놓고는 녹지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제는 인공구조물을 뜯어 자연하천을 복원하는 게 대세임에도 멀쩡한 자연하천에 억지로 시멘트 칠을 하면서도 강 살리기라고 선전을 해댄다.

대통령과 정부기관들은 말끝마다 “법을 지키라”고 국민들을 가르치려고 들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형정편의와 일시적 효과를 위해 온갖 탈법과 변칙을 일삼고 있다. 그 중심에 국토부가 있다. 앞서 살펴본 온 무분별한 그린벨트 해제, 수도권 막개발, 4대강 죽이기 사업 등 국토파괴공작들은 모두 대통령의 지시아래 국토부 장관이 실행하고, 환경부 장관이 설거지하는 세트플레이다. 국토부는 국토가 마치 자기 집 뒷마당처럼 언제든 제 맘대로 파헤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듯 전횡을 일삼고 있다.

정부의 역점사업인 보금자리주택 개발을 위해 국토부는 그린벨트 환경평가 등급을 근거 없이 낮춰 조정하였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는 막대한 예산을 숨기기 위해 일부사업을 법적 근거도 없이 수자원공사에 떠넘겨 버렸다. 또 지금까지는 그린벨트 막개발을 막기 위해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일부 공기업과 지방공사에게만 허용하던 그린벨트 해제지역 개발사업을 준정부기관, 금융 공기업 등에도 허용하여 무분별한 막개발을 부추겼다.

그러니 이름을 제대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토를 파괴하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알고 불철주야 열심히 일한다면, 그 존재의의에 맞게 ‘국토파괴부’라고 불러야 옳은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제 이름을 찾아주는 것은 바른 판단과 삶의 기본이다. 바른 이름을 갖지 못하면 국민들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공자는 세상을 바로 잡는 중요한 원리로 정명(正名)을 말하였다. 다시 말해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수록 바른 이름을 붙여줘, 뜻을 바로 잡아야한다는 것이다. 국토해양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국토부의 임무․사명․존재이유’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우리와 우리 후손이 살아갈 풍요롭고 아름다운 국토를 조성하고, 5대양 6대주로 뻗어나가는 경쟁력 있는 교통물류체계를 구축하여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국토해양부가 되자”

‘풍요롭고 아름다운 국토’ 그것은 단지 더 많은 길을 뚫고, 편의시설을 많이 만들고, 전국 구석구석마다 불로 밝혀 대는 것만이 아니다. 지나친 생활의 불편은 덜어야겠지만, 오히려 지나쳐 모자람만 못한 곳은 자연스럽게 놓아두는 것이 더 지혜로운 국토관리다. 더구나 스스로의 규정처럼 이 국토가 단지 우리 뿐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땅이라면 ‘지속가능한 개발’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국토부에는 그런 개념들이 애당초 없다.

산골 오지에 이르기까지 시멘트로 흙을 덮어버리고, 멀쩡한 숲은 밀어 잔디심고 인공 연못을 만들어 놓고는 녹지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제는 인공구조물을 뜯어 자연하천을 복원하는 게 대세임에도 멀쩡한 자연하천에 억지로 시멘트 칠을 하면서도 강 살리기라고 선전을 해댄다.

대통령과 정부기관들은 말끝마다 “법을 지키라”고 국민들을 가르치려고 들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형정편의와 일시적 효과를 위해 온갖 탈법과 변칙을 일삼고 있다. 그 중심에 국토부가 있다. 앞서 살펴본 온 무분별한 그린벨트 해제, 수도권 막개발, 4대강 죽이기 사업 등 국토파괴공작들은 모두 대통령의 지시아래 국토부 장관이 실행하고, 환경부 장관이 설거지하는 세트플레이다. 국토부는 국토가 마치 자기 집 뒷마당처럼 언제든 제 맘대로 파헤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듯 전횡을 일삼고 있다.

정부의 역점사업인 보금자리주택 개발을 위해 국토부는 그린벨트 환경평가 등급을 근거 없이 낮춰 조정하였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는 막대한 예산을 숨기기 위해 일부사업을 법적 근거도 없이 수자원공사에 떠넘겨 버렸다. 또 지금까지는 그린벨트 막개발을 막기 위해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일부 공기업과 지방공사에게만 허용하던 그린벨트 해제지역 개발사업을 준정부기관, 금융 공기업 등에도 허용하여 무분별한 막개발을 부추겼다.

그러니 이름을 제대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토를 파괴하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알고 불철주야 열심히 일한다면, 그 존재의의에 맞게 ‘국토파괴부’라고 불러야 옳은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제 이름을 찾아주는 것은 바른 판단과 삶의 기본이다. 바른 이름을 갖지 못하면 국민들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구교형목사(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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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를 폐지하라!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11. 28. 22:5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정부부처 제자리 찾아주기①-환경부 편 

   


요즘 많은 공무원들이 제 정신이 아니다. 부처를 만든 제 일은 하지 않고 국민의 혈세는 함부로 낭비하고 있다. 용인시, 성남시를 비롯해 많은 자치 단체장들은 서민복지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공관, 청사만 크게 짓고 있다. 하나같이 인공적 토목공사에만 목숨을 걸고 있다. 또 일부 정부부처는 존재할 이유가 없을 만큼 고유의 기능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그들에게 새삼 존재이유를 물어야 한다.

 “환경부는 있어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우리나라 정부부처 중에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단지 정치인들 사이에 전리품 나누기 정도의 흥정대상으로 전락한 부서들이 있다. 지금껏 농림부, 여성부, 그리고 환경부 등이 자주 그래왔다. 특히 그 장관들은 해당 분야 전문성이나 업무수행능력 같은 것에 큰 관계없이 계파나누기나 지역배려 차원에서 적당히 입각시켜주는 흥정대상으로 이용된 적이 많다.

그러다보니 장관들도 자신의 주무부처 입장을 대변하려하기보다는 적당히 웃어른(?)의 심기를 살핀다든지 정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맞춰 도움(?)을 주는 정권합리화 담당부서처럼 변하곤 했다. 이러한 경향에 어느 정권에서든 항상 빠지지 않는 부서가 바로 환경부다. 무엇보다 현 정부의 불문율이 ‘성장’ ‘친기업 규제완화’이다보니 환경부는 어느 때보다 바빠졌다. 그런데 환경부가 환경을 보존하는데 바쁜 게 아니라, 정부의 환경파괴 의지를 합리화 해주는데 바쁜 것이다.

 무엇보다 현 정부 개발의지의 가장 만만한 대상은 늘 그린벨트다. 서민주택사정을 부동산투기 근절과 실수요자 중심의 대책으로 풀기보다는 실증적 통계와도 맞지 않게 늘 공급만 늘리는 것으로 풀려고 한다. 그 때 써먹을 만병통치약이 바로 그린벨트다. 그런데 그린벨트 해제에는 엄격한 요건이 따라 붙기에 환경부는 그걸 무력화시켜달라는 정부의 민원(?)을 떠맡게 된다.

수도권에 대규모 신도시 택지를 개발한다는 정부의지에 밀려, 환경부는 허용되지 않는 1~2등급 땅도 해제, 허가해 주었다. 현 정부 중점공약사항인 보금자리 주택지 공급을 위해서도 환경부는 원칙을 허문 환경평가에 앞장섰다. 무엇보다 4대강 사업에 대한 환경부의 태도는 무소신이라기 보다는 환경파괴 합리화에 목숨을 건듯 하다. 통상 4계절 모두에 걸쳐 최소 1년 이상 걸리는 사전환경성 검토와 환경영향평가를 본류만도 1,300km가 넘는 광대한 4대강은 겨우 4~5개월 만에 다 끝내 버렸다. 날림도 이런 날림이 없다. 환경부는 이번에 환경파괴 합리화에 정말 큰 공을 세웠다. 이만의 현 장관은 부끄러운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환경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그 ‘설립목적/임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정부조직법 제40조 (환경부) 환경부장관은 자연환경 및 생활환경의 보전과 환경오염방지에 관한 사무를 장리(掌理)한다.'에 규정된 바와 같이 각종 환경오염으로부터 우리 국토를 보전하여 국민들이 보다 쾌적한 자연,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 삶의 질을 향상하고, 나아가 지구환경보전에 기여하여 하나뿐인 지구를 보전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치목적과는 다르게 환경부는 실제 자연환경 보존과 국민 삶의 질 향상에 도움주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시적 개발이익과 정권적 필요를 정당화해주는 역기능마저 감당하고 있다. 정부 내 많은 부처들이 함께 공유해야할 통일성은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다른 부처, 심지어는 청와대와의 긴장을 각오하고서라도 자기 부처가 있어야할 존재이유를 거스르는 정책이 있다면 맞서야 한다. 그게 바로 그 부처 공무원들에게 국민이 월급을 주는 이유다.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도 없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있음으로 해서 환경파괴를 합리화시켜준다면 무익(無益)이 아니라 백해(百害)다. 

할 일을 하지 않는 환경부장관에게 1억이 넘는 연봉에 * 국유 철도 선박 항공기 무료 이용, * 외국 출장시 1등석 이용, * 골프장 사실상 ‘회원 대우’, * 외국 출장시 해당 공관원 영접 등 막대한 대우를 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환경부는 마땅히 없어져야 하며, 자격 없는 이만의 장관은 마땅히 사퇴해야 한다.









구교형목사(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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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약 1:15)는 말씀처럼 우리 인간들의 돈과 물질적 번영에 대한 욕심이 점점 커져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고, 결국 하나님이 지으신 소중한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육식선호로 인해 반(反)성경적 공장식 사육장을 운영한 것은 우리 인간들인데, 그로 인한 조류독감(AI)이 일어났다고 죄 없는 오리와 닭을 수 백 만 마리나 산채로 묻어버렸습니다. 쏟아져 들어오는 고기수요에 맞추겠다고 수 만 마리의 소들을 한 곳에서 사육하고, 빠른 발육을 촉진하기 위해 풀 먹고 살아야할 그들에게 동족을 갈아 만든 동물성사료를 먹입니다. 창조질서에 역행한 인간의 무자비한 탐욕에 소들이 어찌 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광우병입니다. 소가 무슨 죄입니까, 하나님!

이제 올해는 돼지랍니다.

이번에도 수천, 수만 마리를 한 곳에 합사하는 기업형 축산사육이 문제입니다. 돼지 폐에 기생하던 바이러스가 서로에게 전염되었고 콧물, 침, 호흡기 등을 통해 드디어 인간들에게까지 찾아왔습니다. 신종플루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탐욕에 대한 회심은 없이, 그저 주사 맞고 손발만 깨끗이 씻으면 된다고 거짓평안을 늘어놓습니다. 이번에도 죄는 인간이 지어놓고, 엉뚱하게 돼지들이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해마다 새로운 변종 전염병들이 창궐하는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우연과 운으로 돌리고 삶을 바꿀 생각은 하지도 않습니다. 

다양한 여론조사들마다 국민의 60~70%가 반대한다는데도 ‘4대강 죽이기 사업’은 결국 착공되었습니다. 골마다 서식하는 생태가 다르고 수심의 높낮이에 따라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간다는 건 상식인데도, 총 1,400km가 넘는 강들을 3~6m 깊이로 일정하게 규격화하면서도 생태계를 보호한다고 합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게 당연한 상식인데도 4대강 곳곳에 모두 20개의 보를 쌓고, 주변은 콘크리트로 막아 거대한 수족관을 만들면서도 수질을 살리겠답니다. 이제는 쌓았던 콘크리트 구조물도 다 허물고 다시 생태적 자연하천을 만드는 게 대세인 판에, 멀쩡한 자연하천에 인공장벽을 쌓으면서도 녹색사업이라고 거짓말을 해대고 있습니다. 

 

                             경인운하 막개발현장(사진제공 : 최병성)  

너무나도 슬픈 것은 바로 이 황당무계하고 반성경적인 생태죽이기 사업이 장로 대통령의 고집과 역시 기독교인인 국토부 장관의 충성심, 게다가 집사 국무총리와 장로인 환경부 장관의 무소신이 함께 어우러져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더욱 기가 막히고 슬픈 것은 적지 않은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성장, 번영의 신화에 빠져 이러한 시대정신을 축복하며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맘몬주의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존중하고 ‘사람이 밥보다 말씀으로 산다’(마 4:4)는 것을 전해야할 교회가 귀가 막히고, 눈이 막히고, 정신이 막혀 하나님보다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패함을 막지 못하는 쓸모없는 소금이 되어 ‘개독교’니 ‘먹사’니 하는 소리들을 들으며, 세상에서 짓밟히고 있습니다(마 5:13). 이미 우리는 죄의 대가를 달게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죄 많고 무지몽매한 한국교회라도 그냥 버리지 마시고, 다시 고쳐 주소서.

이제라도 기독교가 제정신을 차리고, 주께서 일곱 번이나 보시기에 좋다고 감탄하셨던(창 1:4, 10, 12, 18, 21, 25, 31) 하나님의 작품인 이 피조세계를 존중하며 당장의 편의를 위해 마음대로 자르고, 뽑고, 뚫고, 시멘트로 발라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판자집에 모여앉아 힘겹게 하루를 살아가는 서민을 거리로 내쫓지 않게 하시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투기목적으로 사둔 땅과 집을 성령의 은혜로 팔아 나누게 하소서(행 4:33~35). 이제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소유권보다 생존권이 우선(신 24:6, 10~22)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외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주께서 복주신대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하나님나라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며, 다시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게 하소서(마 5:16).

하나님, 당신을 위하여 이 기도를 꼭 들어주옵소서. 

죄인을 불쌍히 여겨 새사람 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교형 목사 
(성서한국사무총장/교회개혁실천연대집행위원/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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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엄기영 MBC 사장에게 보내는 편지 

이명박 정권에 의해 지난해 8월 '강제해임'을 당했던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최근 비슷한 위기에 처해있는 엄기영 MBC 사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오마이뉴스>에 공개되는 이 글은 정연주 전 사장이 강제해임을 당한 후 처음으로 쓰는 칼럼이다. <편집자말>

엄기영 사장께 드립니다.  

참,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으로 뵌 게 지난해 봄으로 기억됩니다. 방송사 출신 중 국회의원에 당선된 몇몇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면서 방송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자리였지요. 그때를 잠시 되돌아보니,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유난히도 방송, 신문 등 언론계 출신들이 대통령 후보 특보나 국회의원 후보로 많이 뛰어들었지요. 그들 가운데 한나라당에 들어간 언론계 출신들이 지난번 미디어 관련법 난장판 때 보니, 맹활약을 하더군요.

 그날 아침식사 자리 때, 엄 사장이 거의 줄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이 담배 피우면서 "이렇게 담배 많이 태우면 앵커할 때 목소리 관리는 어떻게 했어요?"라고 제가 묻자, 당신은 그냥 사람 좋게 웃기만 했습니다. 아마 지금은 담배를 더 많이 태우시겠지요. 건강 챙기셔야 하는데…. 저도 14년간 끊었던 담배를 2004년 8월, KBS 개혁한다면서 팀제 도입하고, 지역국 7개 폐쇄할 때 다시 피우게 되었습니다. 개혁, 참 힘듭디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까닭  

  
MBC 엄기영 사장
ⓒ MBC
엄기영

오늘, 엄 사장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은 당신이 처해 있는 지금의 상황, 당신이 가슴 저미게 느낄 고뇌와 고통, 북풍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외로움을 제가 지난해 비슷한 처지에서 절실하게 경험한 터여서, 그 고뇌와 고통,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당신이 받고 있는 천근 무게의 사퇴와 해임 압박, 그 방면에서는 제가 선배니까요.  

저는 사퇴 압박을 꽤나 오랫동안 받았습니다. 2003년 4월말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집중 포격을 가했지요. 그것도 5년여 내내. 조중동의 공격은 참 집요했습니다. 언젠가 사장 재임 시 어느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하러 온 기자가 기사 검색을 해보았더니, 조중동에서 기사, 해설, 칼럼, 사설을 통틀어 가장 지독하게 욕을 많이 얻어먹고 있는 인물이 1위 노무현 대통령, 2위 정연주였다면서 "선배님, 오래 사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되어 겪어 보니 언론의 가장 기본인 사실 보도를 하지 않습디다. 그러니 누리꾼들로부터 "조중동이 신문이면, 우리 집 두루마리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다"라는 조롱을 받는 것 같습니다. 직접 당해 보면 그 실체가 확연하게 보이지요. 

한나라당의 공격은 차라리 단조로웠습니다. KBS 결산 때나 국정감사 때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가 "책임지고 물러나라"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 단골메뉴에 "물러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이다.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책임이다", 뭐 그런 식의 단골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사퇴, 해임 압박은 2007년 말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그 강도를 달리했습니다. 그 과정의 자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역사에 증언을 할 것입니다만, 참 험한 꼴 많이 겪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라는 최시중 방통위 위원장은 당시 KBS 김금수 이사장을 만나기만 하면 '정연주 때문에 못해먹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퇴 압박을 가했다고 전해들었고, 감사원, 검찰, 국세청, 이사회 등이 총동원되어서 정연주 참수 작전을 했습니다.

 원칙이 나를 버티게 했습니다

 최시중 방통위원장, 이분 요즘 보면, '방통' 위원장 자리를 '송대령' 자리로 착각하는 것 같아요. 마구 칼을 휘두르고 있어요. KBS는 색깔 없는 방송으로 만들겠다, MBC의 정명을 찾아주겠다, EBS를 어디 하고 합치겠다, 뭐 이런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지요. 이 정권의 오만함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 남소연
최시중

이런 오만에는 반드시 국민의 심판이 뒤따릅니다. 국민을 바보로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오만한 짓을 주저 없이 함부로 하는지. 이분을 볼 때마다 조선왕조 때 참수형을 집행한 '망나니'가 떠오릅니다. 무모함입니다. 칼을 마구 휘두르면서 사람 목을 자르잖아요? 그에게는 이처럼 오만에 더하여 무모함까지 있습니다. 정권이 무한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오만하고 무모할까 심히 걱정이 됩니다. 이 정권은 이제 3년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 게다가 레임덕이다, 대선 국면이다 어쩌고 하면 3년도 채 남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그런 온갖 모욕과 핍박, 인신공격을 당하면서도 내 발로 걸어나가지 않고 '해임'이라는 강제수단으로 저들이 나를 쫓아낼 때까지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아주 단순하게도 원칙의 문제였습니다.

 공영방송 KBS에는 정치적 독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 정치적 독립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바탕은 공영방송 KBS 사장의 임기 보장이라고 저는 아주 단순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자유, 민주, 인권, 평화, 평등을 위해 온갖 희생과 고난을 치르면서 성취한 것 중 하나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게 내게 부여된 역사적, 사회적 책무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을 저는 역사의 축복으로까지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아무한테나,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해임'에 이르기까지 온갖 무리한 짓을 다한 이 정권의 폭력성과 야만성이 여지없이 폭로되었으니까요. 신태섭 교수 해임의 무죄 판결, 저의 배임혐의 1심 무죄판결은 이 정권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확인시켜준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 기회를 준 것은 분명 역사의 축복이며, 그런 것을 통해 역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엄 사장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들고, 온갖 모욕과 비난과 인신공격이 당신에게 가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이 바로 MBC 사장이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역사 앞에서 감당해야 하는 책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역사의 축복으로 받아들입시오.  

엄기영 사장은 나보다 좋은 조건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저보다 훨씬 '좋은 조건' 속에 놓여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노동조합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저는 3년 8개월 동안 적대적인 노조의 저주와 해괴망칙한 인신공격을 당했습니다. 회사 주변은 온통 저주와 증오의 글귀로 가득찬 만장이 펄럭였습니다. <조선일보> 사설을 그대로 인용한 노조 성명서도 있었고, KBS 사랑한다며 지켜주겠다는 촛불시민들을 구박하고 험담을 퍼부은 집단이었습니다. 밖에서 휘몰아쳐 오는 핍박과 압박도 힘에 벅찬데, 내부에서 이렇게 나오니,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MBC 노조는 그런 악다구니 저주와 증오를 당신에게 쏟아 붓기는커녕, 지켜주겠다고,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나오니, 그렇다면 정말 해볼 만한 싸움 아닙니까.  

게다가 MBC는 감사원 감사 대상이 아니니, 감사원 망나니들이 거짓, 왜곡 감사로 골탕 먹이는 짓을 할 수도 없구요. 그리고 MBC는 세금 소송문제가 없어서, 무슨 배임죄니 뭐니 그런 것으로 순식간에 중범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엄 사장 당신은 나보다 엄청 '좋은 조건'에 있다는 말이 무리한 얘기는 아니겠지요.  

다만 지금 하는 것으로 보니, 김우룡 이사장이 지휘하는 방문진 이사회가 그 모든 총대를 대신 메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김우룡 이사장, 이분이 지난해 1월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희한한 이야기를 했지요. 당시 한나라당 몫으로 국회에서 추천되어 방송위원회 위원 신분이었던 그는 "편파방송의 책임자인 정연주 사장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한 뒤 "정 사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변화를 가늠할 수 없는, 판을 뒤엎는 초강수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가 되었지요. 그의 말대로 진짜 판을 뒤엎은 초강수가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통위, KBS 이사회 등이 총동원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분이니, 이제 자기가 이사장이 된 MBC에서 온갖 초강수를 두려고 하겠지요. 벌써 초강수를 두겠다고 공언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KBS 사장 재임시절 회사에 1,892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로 불구속 기소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정연주

방문진 이사회에서 온갖 인간적인 모멸과 비난, 겁박이 있을 겁니다. 저는 지난해 KBS 이사회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용히 제 지갑을 꺼냈습니다. 그 수첩에는 구약성서 시편 23편이 붙어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나는 이 시편을 이사회 자리에서 혼자 읽고 또 읽고 하였습니다. 내 귓전으로 '무능경영, 편파방송' 등을 격하게 토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어도, 그 소리는 귓전을 그냥 스쳤을 뿐, 내 마음과 가슴은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로 가득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종교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믿어와 익숙해진 방식과 의식이 기독교 쪽이어서 그 방식과 의식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 특히 거대교회는 예수를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들이지, 예수의 참 제자들은 아닙니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여호와' 대신 우리의 가장 소박한 민간신앙인 조상의 영혼일 수도 있으며, 불교의 붓다일 수도, 이슬람의 알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야 무엇이었건, 마음의 평화를 찾는 길이 필요합니다. 방문진 이사회에서 인간적인 모욕과 비난이 있으면, 엄 사장 당신도 이 시편을 또는 당신 방식의 잠언을 읽으면서 그들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되십시오.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당신의 모습이나 인품이 신사여서, 이런저런 모멸에 '에이 더러운 것, 나쁜 사람들, 그냥 떠나자', 그렇게 할지도 몰라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던지고 나면, 후배들은 어찌 되며, 방송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는 MBC는 어떻게 되며,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최소한 저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포클레인으로 당신을 강제로 들어낼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의연하게 버티셔야 합니다.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많은 벗들이 당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리하리라 확신합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씩 웃으면서, 그리고 한국 방송 앵커의 상징적 존재로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말이지요.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시 한편 보내드립니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입니다. KBS 신입사원 연수 때 첫 강의를 하고 난 뒤 그들에게 들려주었던 시입니다.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도 읽으면서 힘내라고 많이 권유하고 있습니다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추신: 괜한 편지를 써서 부담을 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아끼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있는 MBC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이런 무례를 한 것이니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외로워하지 마세요. 담쟁이 수천 개가 당신과 함께 한 뼘씩 저 절망의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내가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나? 난 그 분과 개인적 관계를 말할 만큼 대단한 민주투사도, 화려한 경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 김대중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그 자체로 한국현대사요,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큰 선물이라는 것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죽음을 담담하게 맞고 있는 국민 분위기를 보며, ‘김대중을 이렇게 빨리 잊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안 된다. 그를 이렇게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그를 쉽게 잊으면 우리는 더 성숙할 수 없다.

86세라면 물론 그는 천수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단지 나이나 화려한 경력만으로 간단히 지나쳐버릴 수 없는 우리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Ⅰ.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단언컨대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1924년 생으로 일제와 해방, 분단과 전쟁, 군부독재시대와 경제성장 등 한국현대사의 모든 사건들을 지나오면서 우리시대가 겪고 이겨내야만 했던 모든 모순점들과 가장 격렬하게, 가장 대표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1. 김대중은 평생 빨갱이의 천형(天刑/천벌처럼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기성세대에게 ‘김대중은 곧 빨갱이’의 대명사다. 그가 40대 기수론으로 돌풍을 일으키던 70년대에도 그랬고,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때의 죄목도 그랬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빨갱이였다. 결국 목숨을 걸고 민족화해를 위해 마지막 헌신을 다하려는 순간까지 그는 끝내 ‘역시 빨갱이’ 소릴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기본모순이 바로 분단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의 일생 최대의 싸움으로 여겼다. 대한민국, 한민족이 발전하기 위해서 극복해야할 중요한 과제들이 많지만 분단과 냉전의 빨갱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없었다. 점잖게 법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종교의 문제까지 갈 것도 없다. 삶의 과제요, 생존의 문제다. 이걸 극복 못하면 우리민족은 도대체 발전할 수가 없다. 사람 구실을 못한다.

그래서 정치인 김대중은 87년 민주화가 한 단계 발전한 이후부터는 다른 어떤 주요과제들보다 거의 전적으로 민족화해, 평화와 통일문제에 집중했다. 대통령 김대중의 5년은 거의 남북관계 개선에 집중되었고, 퇴임 이후 남은 모든 여생도 이 과제만을 위해 끝까지 매달렸다.

1997년 10월 당시 대선 주요후보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사상검증토론회”라는 전무후무한 코메디가 TV를 통해 장장 7시간동안이나 생중계되었다. 이 코메디는 발행부수도 얼마 되지 않는 <한국논단>이라는 잡지가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토론회였다. 이 자리에서 극우인사인 발행인 이도형은 “귀순한 황장엽씨는 ‘김정일이 김대중 총재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를 설득해 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도 했는데, 이 역시 TV를 통해 고스란히 방영되었다. 사실 김대중은 보수주의 대중정치가다. 그의 사상은 시대모순을 극복하려는 상식을 반영할 뿐, 조금도 급진적이지 않다. 그러나 정적들에게 정치인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훨씬 급진적인 다른 많은 인물들보다 더 위험한 빨갱이로 남아야했다. 그는 우리시대를 위해 그런 수모를 겪었다. 

2. 김대중은 평생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또 다 안다. 우리사회, 특히 기성세대에게 ‘전라도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양친 모두 경기도 출신이시고, 역시 서울에서 출생한 나도 잘 안다. 어려서부터 나도 어른들끼리 “전라도사람은 절대 믿지 마라.”고 하시는 말씀을 자주 듣고 자랐다. 그런 호남 따돌리기가 상당히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내려왔으며, 특히 박정희시대 이후 한국현대사에 크게 증폭되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지만 나도 그렇게 알고 자랐다.

‘빨갱이에 전라도’ 이 정도면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냐’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사회에서는 완전 매장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고향이 전라도라서 그가 당한 시련보다, 김대중이 ‘빨갱이에 전라도’였기에 전라도 사람들이 우리사회에서 더 가혹한 차별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전라도사람들은 자신들이 우리사회에서 받는 차별이 가혹할수록 더더욱 김대중에 매달려왔고, 그럴수록 전라도와 김대중은 우리사회에서 더욱 더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전라도와 김대중은 이미 한국현대사에서 ‘괜히 밉고, 싫은 종자들’이었으며, 대한민국 안에서 또 다른 나라가 되어 갔다.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안고 있는 김대중은 무슨 짓을 다해서도 결코 경상도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충청도 김종필과 정책연합을 해서야만 드디어 40년 한을 풀고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김대중은 평생 학벌 없는 고졸 출신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우리사회에서 제법 큰 소리쯤 칠 수 있기 위해 갖춰야할 기본조건 중에 출생의 비밀로서 TK(대구-경북)가 있다면, 학력으로는 KS(경기고-서울대)가 있다. 그가 정치를 하려하든, 기업을 하려하든, 법조계의 주요인사가 되려하든 TK와 KS는 출세의 기본조건이었다. 하물며 대통령이 되려하는 자가 TK는 물론 KS와도 관계가 없다면 그는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TK는커녕 ‘전라도사람’에다가, KS는커녕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상고출신이었다. 우리사회에 ‘내로라’하는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경력의 대통령 밑에서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굴욕이요, 치욕이다. 정치인 김대중은 육사도, 경기고도, 서울대도 아닌 천출로서 학력중심의 여론주도층들의 멸시와 적대를 항상 당해야 했다. ‘못 배웠다’는 손가락질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었고, 항상 공부했지만, 한번 학력이 영원한 이름표로 따라붙는 우리사회에서 그런 노력은 더욱 경멸을 당했다.

사실 1924년생인 그의 연령대에서 고졸은 대단한 고학력이다. 당시에 대학까지 나왔다는 것은 서민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큰 특혜였다. 1934년생인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중퇴하셨고, 60세가 넘어서도 몇 번씩이나 검정고시를 생각해 보기까지 하셨다. 가난했던 장인의 강압으로 끝내 대학을 포기해야했던 아내는 4녀 끝에 귀한 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한 나보다 열 배는 똑똑하지만, 고졸 학력 때문에 지금도 사이버대학의 미련을 갖고 산다.

그 시대에 사실상 저학력도 아닌 그가 우리사회에 지도층인물이 되기 위해 치려야했던 학벌의 검증은 그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이처럼 김대중은 우리 어머니시대를 대표하여 수모를 겪었다. 

바로 이러한 한국현대사, 한국사회, 우리시대를 잘 알기에 이 모든 모순들을 조금이라도 절감하는 사람들에게 김대중은 민주화의 코드였고, 시대발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1997년 마침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리는 죽도록 기뻤던 것이다.

그의 의미를 조금 알았기에 민주투사도 아닌 내게도 김대중은 특별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3당 야합의 배신 속에 외톨이로 출마한 92년 대선을 앞둔 서울교대 유세현장의 김대중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바꿉시다”는 구호를 들었을 때 나는 마구 눈물이 솟았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찍기 위해’ 첫 아이 몸조리 위해 친정에 가 있던 아내는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귀가했고, 관절염으로 걷지도 못하던 어머니는 업혀서까지 투표장에 가서 기도하며 한 표를 찍었다. 성서한국대회로 분주했던 나는 이번에 일어나시기만 하면 동료들과 함께 꼭 직접 찾아뵙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는데, 기다려지지 않은 시간이 한없이 아쉽기만 하다. 

Ⅱ. 김대중은 참된 신앙인이다.

자신있게 나는 그가 참된 신앙인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만약 참된 신앙의 힘이 없었다면 그런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가톨릭 신자다. 그러나 그저 종교 난에 ‘가톨릭’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정도의 형식적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공사석의 많은 기회를 통해 자신의 삶과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고, 그 말은 그의 일관된 진정성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가장 무섭게 그를 죽이려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용서하고 사면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값싼 정치적 제스처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는 신앙의 힘으로 이미 용서했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민족화해의 기본 틀인 햇볕정책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 21)는 말씀을 믿는 믿음과 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햇볕정책의 공동입안자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피스메이커, 임동원’ 참조).

지난 6월 2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즘 밤에 잘 때 내 아내와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생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습니다. 걱정이 많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제가 최대한 일할 수 있도록 저희 내외를 도와주십시오.' (뒤는 생략)”

우리 시대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유명목사, 부흥사들이 수없이 많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참 신앙인이 얼마나 될까?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길을 믿었기에 그렇게 살았다.

그런 면에서 조금 앞서 간 노무현은 김대중의 정치적 자식임이 틀림없었다. 그 역시 부산상고 출신으로 못 배운(?) 천형을 안고 살아왔으며, ‘사람은 똑똑한 데 하필 전라도 당으로 나와서’ 고향에서조차 번번이 낙선해야 했다. 결국 경상도 사람인데도 전라도의 지지를 안고 당선되는 감동을 이루었지만, 경상도로부터는 끝끝내 ‘배신자’로 남아야 했다. 또한 사상적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 내내 ‘좌빨’(좌파-빨갱이)의 낙인을 벗지 못했다.

결국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온 우리 앞에서 김대중의 자식인 노무현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고, 젊은 아들을 먼저 앞세워 가슴에 묻은 늙은 아버지도 겨우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아들 뒤를 이은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김대중은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큰 선물이다” 

내가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나? 난 그 분과 개인적 관계를 말할 만큼 대단한 민주투사도, 화려한 경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 김대중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그 자체로 한국현대사요,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큰 선물이라는 것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죽음을 담담하게 맞고 있는 국민 분위기를 보며, ‘김대중을 이렇게 빨리 잊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안 된다. 그를 이렇게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그를 쉽게 잊으면 우리는 더 성숙할 수 없다.

86세라면 물론 그는 천수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단지 나이나 화려한 경력만으로 간단히 지나쳐버릴 수 없는 우리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Ⅰ.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단언컨대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1924년 생으로 일제와 해방, 분단과 전쟁, 군부독재시대와 경제성장 등 한국현대사의 모든 사건들을 지나오면서 우리시대가 겪고 이겨내야만 했던 모든 모순점들과 가장 격렬하게, 가장 대표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1. 김대중은 평생 빨갱이의 천형(天刑/천벌처럼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기성세대에게 ‘김대중은 곧 빨갱이’의 대명사다. 그가 40대 기수론으로 돌풍을 일으키던 70년대에도 그랬고,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때의 죄목도 그랬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빨갱이였다. 결국 목숨을 걸고 민족화해를 위해 마지막 헌신을 다하려는 순간까지 그는 끝내 ‘역시 빨갱이’ 소릴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기본모순이 바로 분단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의 일생 최대의 싸움으로 여겼다. 대한민국, 한민족이 발전하기 위해서 극복해야할 중요한 과제들이 많지만 분단과 냉전의 빨갱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없었다. 점잖게 법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종교의 문제까지 갈 것도 없다. 삶의 과제요, 생존의 문제다. 이걸 극복 못하면 우리민족은 도대체 발전할 수가 없다. 사람 구실을 못한다.

그래서 정치인 김대중은 87년 민주화가 한 단계 발전한 이후부터는 다른 어떤 주요과제들보다 거의 전적으로 민족화해, 평화와 통일문제에 집중했다. 대통령 김대중의 5년은 거의 남북관계 개선에 집중되었고, 퇴임 이후 남은 모든 여생도 이 과제만을 위해 끝까지 매달렸다.

1997년 10월 당시 대선 주요후보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사상검증토론회”라는 전무후무한 코메디가 TV를 통해 장장 7시간동안이나 생중계되었다. 이 코메디는 발행부수도 얼마 되지 않는 <한국논단>이라는 잡지가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토론회였다. 이 자리에서 극우인사인 발행인 이도형은 “귀순한 황장엽씨는 ‘김정일이 김대중 총재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를 설득해 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도 했는데, 이 역시 TV를 통해 고스란히 방영되었다. 사실 김대중은 보수주의 대중정치가다. 그의 사상은 시대모순을 극복하려는 상식을 반영할 뿐, 조금도 급진적이지 않다. 그러나 정적들에게 정치인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훨씬 급진적인 다른 많은 인물들보다 더 위험한 빨갱이로 남아야했다. 그는 우리시대를 위해 그런 수모를 겪었다. 

2. 김대중은 평생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또 다 안다. 우리사회, 특히 기성세대에게 ‘전라도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양친 모두 경기도 출신이시고, 역시 서울에서 출생한 나도 잘 안다. 어려서부터 나도 어른들끼리 “전라도사람은 절대 믿지 마라.”고 하시는 말씀을 자주 듣고 자랐다. 그런 호남 따돌리기가 상당히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내려왔으며, 특히 박정희시대 이후 한국현대사에 크게 증폭되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지만 나도 그렇게 알고 자랐다.

‘빨갱이에 전라도’ 이 정도면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냐’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사회에서는 완전 매장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고향이 전라도라서 그가 당한 시련보다, 김대중이 ‘빨갱이에 전라도’였기에 전라도 사람들이 우리사회에서 더 가혹한 차별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전라도사람들은 자신들이 우리사회에서 받는 차별이 가혹할수록 더더욱 김대중에 매달려왔고, 그럴수록 전라도와 김대중은 우리사회에서 더욱 더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전라도와 김대중은 이미 한국현대사에서 ‘괜히 밉고, 싫은 종자들’이었으며, 대한민국 안에서 또 다른 나라가 되어 갔다.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안고 있는 김대중은 무슨 짓을 다해서도 결코 경상도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충청도 김종필과 정책연합을 해서야만 드디어 40년 한을 풀고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김대중은 평생 학벌 없는 고졸 출신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우리사회에서 제법 큰 소리쯤 칠 수 있기 위해 갖춰야할 기본조건 중에 출생의 비밀로서 TK(대구-경북)가 있다면, 학력으로는 KS(경기고-서울대)가 있다. 그가 정치를 하려하든, 기업을 하려하든, 법조계의 주요인사가 되려하든 TK와 KS는 출세의 기본조건이었다. 하물며 대통령이 되려하는 자가 TK는 물론 KS와도 관계가 없다면 그는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TK는커녕 ‘전라도사람’에다가, KS는커녕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상고출신이었다. 우리사회에 ‘내로라’하는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경력의 대통령 밑에서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굴욕이요, 치욕이다. 정치인 김대중은 육사도, 경기고도, 서울대도 아닌 천출로서 학력중심의 여론주도층들의 멸시와 적대를 항상 당해야 했다. ‘못 배웠다’는 손가락질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었고, 항상 공부했지만, 한번 학력이 영원한 이름표로 따라붙는 우리사회에서 그런 노력은 더욱 경멸을 당했다.

사실 1924년생인 그의 연령대에서 고졸은 대단한 고학력이다. 당시에 대학까지 나왔다는 것은 서민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큰 특혜였다. 1934년생인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중퇴하셨고, 60세가 넘어서도 몇 번씩이나 검정고시를 생각해 보기까지 하셨다. 가난했던 장인의 강압으로 끝내 대학을 포기해야했던 아내는 4녀 끝에 귀한 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한 나보다 열 배는 똑똑하지만, 고졸 학력 때문에 지금도 사이버대학의 미련을 갖고 산다.

그 시대에 사실상 저학력도 아닌 그가 우리사회에 지도층인물이 되기 위해 치려야했던 학벌의 검증은 그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이처럼 김대중은 우리 어머니시대를 대표하여 수모를 겪었다. 

바로 이러한 한국현대사, 한국사회, 우리시대를 잘 알기에 이 모든 모순들을 조금이라도 절감하는 사람들에게 김대중은 민주화의 코드였고, 시대발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1997년 마침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리는 죽도록 기뻤던 것이다.

그의 의미를 조금 알았기에 민주투사도 아닌 내게도 김대중은 특별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3당 야합의 배신 속에 외톨이로 출마한 92년 대선을 앞둔 서울교대 유세현장의 김대중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바꿉시다”는 구호를 들었을 때 나는 마구 눈물이 솟았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찍기 위해’ 첫 아이 몸조리 위해 친정에 가 있던 아내는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귀가했고, 관절염으로 걷지도 못하던 어머니는 업혀서까지 투표장에 가서 기도하며 한 표를 찍었다. 성서한국대회로 분주했던 나는 이번에 일어나시기만 하면 동료들과 함께 꼭 직접 찾아뵙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는데, 기다려지지 않은 시간이 한없이 아쉽기만 하다. 

Ⅱ. 김대중은 참된 신앙인이다.

자신있게 나는 그가 참된 신앙인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만약 참된 신앙의 힘이 없었다면 그런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가톨릭 신자다. 그러나 그저 종교 난에 ‘가톨릭’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정도의 형식적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공사석의 많은 기회를 통해 자신의 삶과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고, 그 말은 그의 일관된 진정성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가장 무섭게 그를 죽이려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용서하고 사면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값싼 정치적 제스처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는 신앙의 힘으로 이미 용서했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민족화해의 기본 틀인 햇볕정책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 21)는 말씀을 믿는 믿음과 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햇볕정책의 공동입안자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피스메이커, 임동원’ 참조).

지난 6월 2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즘 밤에 잘 때 내 아내와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생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습니다. 걱정이 많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제가 최대한 일할 수 있도록 저희 내외를 도와주십시오.' (뒤는 생략)”

우리 시대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유명목사, 부흥사들이 수없이 많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참 신앙인이 얼마나 될까?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길을 믿었기에 그렇게 살았다. 

그런 면에서 조금 앞서 간 노무현은 김대중의 정치적 자식임이 틀림없었다. 그 역시 부산상고 출신으로 못 배운(?) 천형을 안고 살아왔으며, ‘사람은 똑똑한 데 하필 전라도 당으로 나와서’ 고향에서조차 번번이 낙선해야 했다. 결국 경상도 사람인데도 전라도의 지지를 안고 당선되는 감동을 이루었지만, 경상도로부터는 끝끝내 ‘배신자’로 남아야 했다. 또한 사상적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 내내 ‘좌빨’(좌파-빨갱이)의 낙인을 벗지 못했다.

결국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온 우리 앞에서 김대중의 자식인 노무현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고, 젊은 아들을 먼저 앞세워 가슴에 묻은 늙은 아버지도 겨우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아들 뒤를 이은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정말 이명박과 그의 정신적 배후인 김진홍을 용서하기 힘들다. 그러나 김대중이 전두환을 용서했듯이 나도 이명박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려 한다. 이명박의 실패를 그냥 두기에는 우리민족의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자. 그리고 뉴라이트를 반드시 이겨내자.

지난 10년의 성과를 이어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의 공동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아까운 시간들을 욕설과 저주, 전쟁의 위협 속에 보내야하는 지금 현실을 생각하고, 그 분이 할 수 있었던 남은 일들을 생각하면 김대중을 이대로 보내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운다고 돌아올 수 없는 김대중을 벌써 보낸다는 게 너무 한스럽다.

흔히 ‘고인의 유지를 받들자’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정말 김대중의 못다한 일을 해야 한다. 특히 죽음을 통해 끊어졌던 남북의 관계회복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잘 살려낼 수 있도록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뿐 아니라, 우리가 정신차려 노력해야 한다.

어머니가 김구 선생님과 한 때를 겹쳐 사셨다는 게 가끔 신화처럼 느껴졌다. 이젠 내가 한 때나마 큰 인물 김대중과 함께 겹쳐 살았다는 사실이 자부심으로 남을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쉽게 잊기에는 큰 인물 김대중이 너무 아깝고, 그의 역할이 너무 그리운 시대다.

그런 면에서 정말 이명박과 그의 정신적 배후인 김진홍을 용서하기 힘들다. 그러나 김대중이 전두환을 용서했듯이 나도 이명박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려 한다. 이명박의 실패를 그냥 두기에는 우리민족의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자. 그리고 뉴라이트를 반드시 이겨내자.

지난 10년의 성과를 이어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의 공동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아까운 시간들을 욕설과 저주, 전쟁의 위협 속에 보내야하는 지금 현실을 생각하고, 그 분이 할 수 있었던 남은 일들을 생각하면 김대중을 이대로 보내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운다고 돌아올 수 없는 김대중을 벌써 보낸다는 게 너무 한스럽다.

흔히 ‘고인의 유지를 받들자’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정말 김대중의 못다한 일을 해야 한다. 특히 죽음을 통해 끊어졌던 남북의 관계회복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잘 살려낼 수 있도록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뿐 아니라, 우리가 정신차려 노력해야 한다.

어머니가 김구 선생님과 한 때를 겹쳐 사셨다는 게 가끔 신화처럼 느껴졌다. 이젠 내가 한 때나마 큰 인물 김대중과 함께 겹쳐 살았다는 사실이 자부심으로 남을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쉽게 잊기에는 큰 인물 김대중이 너무 아깝고, 그의 역할이 너무 그리운 시대다.









구교형 목사 
(성서한국사무총장/교회개혁실천연대집행위원/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 이글은 복음과 상황 9월호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지 말라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7. 24. 10:1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미디어법이 아수라장 속에서 통과됐다. 미디어법을 날치기로 통과하려는 여당의 속셈은 딴 데 있는 것이 분명하다. ⓒ뉴스앤조이 백정훈  

미디어법이 국회에서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통과됐다. 아수라장 속에서 여당인 한나라당끼리 치른 회의였다. 회의 진행 중 투표 종결을 선언하고서도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서둘러 재투표했다. 여기에 대리 투표 의혹을 사는 행동도 벌여 난장판, 아니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토록 꼴불견으로 미디어법을 날치기로 통과하려는 여당의 속셈은 딴 데 있는 것이 분명하다.

보수 언론과 재벌 봐주기를 통한 장기 집권하려는 꿍꿍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문제는 '여기에 국민들이 속아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편을 갈라 개혁 진보 세력을 말살하려는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서민이 겪는 고통을 힘으로 밀어붙여 잠재우려는 억압적·반민주적 정치 선언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 미디어법을 포함한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정책으로 갈등과 대립이 심각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누리고 싶어 한다. 개인적으로 평안을 원하고 가정에도 화목이 필요하다.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 정치가 없고,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 철학도 없다. 그러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거나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 내 마음을 울리는 성경 말씀은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 하나이다"(시131:1)는 음성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었다. 왕은 교만과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위치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이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비참하게 종말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무리한 성취욕에 사로잡힌 교만한 마음속에는 참된 평화가 없다는 것이다. 사울 왕이 헛된 영광을 향해 달려가다가 자신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이는 미치광이로 변한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겸손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은 물론 자연환경과도 소통하고 힘을 합하는 것이다.

얼마 전 젊은이들과 함께 오랜만에 산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높이가 840M쯤 된다는 것만 알고 산을 정복하려고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경사가 심하고 등산로도 매우 좁았다. 한 시간쯤 오르고 나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청년들과 보조를 맞추려니 더더욱 힘이 들었다. 숨은 차고 다리는 풀어지고 온몸이 무거워져 고개를 있는 대로 숙이고 걸었다. 순간 산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산 중턱에 있는 내가 이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었다. 웅장한 자연 앞에 온몸을 축 늘어뜨린 초라한 나에게 산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잘난 척하며 목소리 높이더니 너 별것 아니지?" 순간 산을 정복하겠다는 마음보다 산에게 나를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산과 내가 하나가 되어 오르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나무며 바위며 좁은 길들이 기진맥진한 나를 받쳐주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상에 올랐다. 정복했다는 마음이 아니라 산에게 항복하고 감사하는 순간이었다. 나이 들고 체력이 약해져서 항복했다기보다 산과 하나가 되는 마음을 품었기에 겸손하게 올랐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요소는 탐욕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다.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조급하고 불안하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과도 갈등을 빚기 쉽다. 자기 능력으로 미치지 못할 큰일만 이루려다보면 무리하게 되고 더 나아가 거짓말까지 하게 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거짓말도 쉽게 용납한다. 어리석고, 멍청해 보이는 거짓말도 통용되는 이유는 그것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용산참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못해 아려온다. 개발 정책을 무리하게 진행하려다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경찰이 무리하게 진압해 5명이나 죽었는데도, 사실을 은폐하고 국민을 속이고 있다.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대운하를 추진하다 국민 반대에 부딪히자 '4대 강 살리기'라며 국민을 속이고 있다. 이제 언론도 시장에 맡겨야 한다며 공영 방송을 재벌에게 내주고 있다. 쌍용자동차 파업와 비정규직이 처한 문제때문에 노동자들과 서민이 불안에 떨고 울부짖어도,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아무 문제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없다면 진지하게 포기해야 할 허망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도전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포기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 겸손히 대화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소통이 단절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인간은 본래 지속적으로 교제하여 원활한 소통을 이루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속적인 소통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수많은 문제들을 낳았다.

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대통령은 헛된 영광에 사로잡힌 것을 회개하고 국민들과 진실한 소통으로 화평을 이루기 바란다. 교회도 성장에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막혀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하지 말고 겸손해지기를 기도한다. 교회부터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내가 섬기고 있는 함께여는교회에서 먼저 겸손히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고, 성도들과 진실하게 소통하고 힘을 모아 화평을 이루는 일에 힘써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방인성목사 (함께여는교회 목사)

*이글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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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9일은 맘몬 승리의 날?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6. 1. 16:2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5. 29

 1. 맘몬과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한 사람의 장례
                                
경남 김해의 자그만한 봉화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자란 한 사람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한 나라의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다른 대통령들과는 달리 맘몬과 타협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어서도 권력이나 재물을 쌓으려 하지 아니하였기에 항상 가난하였고 자식들의 유학비까지 빌려서 대주어야 했다. 그의 부인도 중졸이라는 학력으로 남편에 대한 내조외에는 모르고 살던 전통적인 여인이었다. 물론 처가집도 좌익 분자로 몰려 있었기에 처가집 덕을 볼 수도 없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걸맞지 않은 그의 행동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자초했다. 격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 학력 등은 재임기간 내내 야당과 언론에  의해 비판받았고. 과연 그가 권력을 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무차별한 공격이 가해졌다.
이에 못지 않게 맘몬의 유혹은 그와 그의 측근들을 괴롭혔다. 그의 주변 인물들은 그 유혹에 넘어가 철창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그의 측근들에게 항상 미안해 해야만 했다. 자신이 돈이 없어 주변 사람들이 고생하던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맘몬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에게 끊임없이 유혹하였고, 다른 경로를 통해 누명을 뒤집어씌웠다. 이미 맘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당연히 그도 그 유혹에 넘어갔으리라 짐작하며 비난했다. "돈에는 장사없다고"

결국 그는 죽음을 통해 맘몬과의 투쟁을 마감지었다. "나는 적어도 그렇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이 시대의 비주류로 살면서 주변 사람들 한번 돈을 쥐어져 보지도 않던 바보, 노무현 그는 결국 맘몬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맘몬은 지금도 우리에게 결콘 만만한 적이 아님을 그는 우리에게 보여줬다.

 2. 맘몬에게 면죄부를 주다.
 
한 재벌은 그의 장남에게 그룹을 상속하기위해 주식을 헐값으로 발행하여 경영권을 승계하였다. 끊임없는 사람들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이 날 재벌의 편을 들어주었다. 결국 이것은 적법한 경영권 승계라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 것이다. 그는 역시 돈이라는 권력으로  힘을 앞세워 이 문제를 매듭짓게 되었다. 그의 직원들은 그 과정에서 약간의 고생은 하였지만 평생 부를 누를 수 있는 토대를 일구었다. 결국 맘몬이 못 이기는 것은 없나 보다. 그들은 판사도, 검사도, 다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꿈대로 이루었다. 부의 영속적 승계를 합법적으로 이룰 수 있다는 신기원을 이루었다. 부자 이건희는 이 세상에서그의 분신인 이재용을 위한 왕국을 건설했다.

P.S. 2009. 5. 29 한사람은 한줌의 재가 되어 떠났지만, 수백만명의 조문과 환송을 받으며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부의 세습을 이루었지만 수많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고상환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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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비극을 이젠 끝내야 합니다.

맘몬주의???/정치와 사회현상 | 2009. 5. 23. 15:2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함석헌 선생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마치 이사야서의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 양’처럼 세계평화를 위한 화목제물로서의 무고한 고난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36년 동안의 일제폭압을 견뎌 해방을 맞았지만 뜻하지 않은 분단, 3년 동안의 동족간 전쟁과 잿더미. 그리고 지난 60여 년 간 남과 북은 나름대로 경제발전과 국가토대 마련에 성공한 듯 보이지만 독재와 인권말살, 깊어가는 양극화, 극도의 기근 속에 빛을 바래왔습니다.

무엇보다 반세기를 훨씬 넘는 민족분단의 비극을 끝내고자 협력과 화해의 토대를 놓아갔으나, 겨우 1년여 만에 다 무위로 돌리고 남과 북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대립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민족의 운명을 당사자들끼리의 대화로 풀어가지 못하고,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맡겨둘 처지로 다시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음(訃音)을 듣습니다. 이것은 단지 노 전 대통령 일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아직도 제 길을 찾지 못한 한국현대사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민족적 부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잘먹고, 더 부자되자’는 맘몬주의 앞에서 생명의 가치도, 약자의 외침도, 생태계의 소중함도 다 잊고 살아가려는 우리사회에 고하는 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낙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못나고도, 기구하기 짝이 없는 한국사의 비극을 이젠 끝내고, 하나님나라의 청사진을 담은 새로운 통일조국의 역사를 써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못났지만 우리 그리스도 제자들의 수고와 희생을 통해 진행되어야 합니다. 모세, 다니엘, 느헤미야, 바울처럼 우리 민족, 시대와 역사를 품고 지금 기도로 하나님의 힘있는 개입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느 1:6)

  <기도제목>

1.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정부가 물신주의와 편의주의적 국정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국가와 민족의 바른 이정표를 만들어가게 하소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선정부가 체제수호와 자존심 유지보다 백성들의 생존과 민족화해를 위해 정권의 명운을 걸게 하소서.

  2. 일제, 분단, 전쟁과 냉전, 독재와 억압, 빈곤과 기근, 생태계 파괴 등 한국현대사 비극의 고리를 이제 끊고, 하나님나라의 공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의 멋진 통일조국의 청사진을 만들게 하시고,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이에 투신하게 하소서.

구교형 (성서한국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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