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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재물에 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토지’로 번역하면 문맥에 맞는다는 것은 ‘재산’대신 ‘토지’를 번역어로 선택하기 위해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재산” 또는 “재물”이라는 의미도 마가복음 10:22의 문맥에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여 더 문맥에 잘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즉, ‘토지’란 번역을 선택하는 충분한 이유는 다른 번역 가능성들보다 ‘토지’란 번역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이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한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을 때, 강조점은 “팔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쪽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과 관련된다. 율법의 정신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은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명기 15:9-11).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러한 구약의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명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진 것을 팔라”는 예수의 말씀 앞에 부자가 항의 한 마디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율법이 허용하는 유동성 재산까지 처분하라고 하시는 것을 너무하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자는 왜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 하는지 예수께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가 갑자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그에게 단지 유동성 재산만 많았을 경우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많이 가진 것이 토지였을 때에는 그의 행동이 잘 설명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것은 명백하게 율법에 위배되기에 토지를 팔아서 처분하고 이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지적을 원칙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의 명령을 실천하느냐 못하느냐 인데 그는 토지에 관련된 율법의 요구를 적용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23절처럼 재물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까? 

그런데, 23절에는 재물, 부, 돈 등을 뜻하는 ‘크레마’의 복수형 ‘크레마따’가 등장한다. 23절 문맥도 ‘크레마따’가 토지를 뜻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크레마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반응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24절). 이로 미루어 보아 ‘크레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하는 구약의 토지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놀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3절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이 되려면 ‘크레마따’가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가리켜야 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 있었다.

물론 23절부터 재물에 관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토대하여 22절까지에서 다루어진 내용도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예수는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에게 그의 재물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을 수도 있다. 그가 재물을 포기하기 힘들어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보고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지적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읽을 경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으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일까? 물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율법 정신을 염두에 둘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28-29절에서 토지와 가옥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가고 유동성 재산이 이 목록에서 빠져 있는 것은 23절의 ‘재물’(크레마따)마저도 특별히 가옥과 토지를 염두에 둔 것이며, 25절의 ‘부자’도 토지를 많이 가진 부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과연 토지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을까? 

예수께 나아온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20절). 이러한 대답을 듣고 예수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구약성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법인 토지법을 어길 수 있었을까?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지킨다고 한 것은 18-19절에 언급된 계명들이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속여 취하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다. 이 사람은 이 계명들에 토지법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하였을 수도 있다.

토지법을 어긴 것은 도둑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토지법을 어겼다면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토지법을 어긴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을 수 있다.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대토지 소유가 도둑질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은 문맥상 앞에서 언급한 계명 또는 구약성서에 담긴 율법을 실천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킬 때 토지법까지도 잘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신 것(21절)도 그가 율법을 모두 잘 지켰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을 지킴에 헌신한 정도를 일단 인정해 주시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헌신을 하도록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에게만 사랑을 표현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 외에는 흠 없이 율법을 지킨 이 사람에게 얼마든지 사랑을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이다. 또한 사랑을 표현하시면서도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우도록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다.  

마가복음 10:17-31의 흐름 속에서의 토지와 재물 

마가복음 10:22에는 ‘끄떼마따’가 사용되고 23절에는 ‘크레마따’가 사용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는 토지를 다른 하나는 재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은 과연 본문을 일관성 있게 읽는 것인가? 22절의 ‘끄떼마따’를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하려면 이러한 의문도 해소하여야 한다.

23절에 ‘크레마따’를 사용한 것은 마가복음의 서사의 흐름 속에서 예기하지 못한 전환을 통해 놀라움을 자아내는 문학적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영생을 얻는 길을 율법, 특히 십계명에 관련시킨 후 십계명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부자에게 토지법을 지켜야 함을 지적하여 그를 놀라게 한다. 이어서 토지만이 아니라 부 일반의 소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토지법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제자들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침내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는 절망으로 제자들을 몰아간다(26절). 이 절망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에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이러한 절망 후에 반전이 도래한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7절). 이러한 흐름 속에서 22절은 “토지”에 관하여 23절은 “재물”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일관성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극적 효과를 낳는 문학적 기법으로 볼 수 있다.

28-31절의 말씀은 27절에 도입된 반전에 이어지는 위로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신다(27절). 그리하여 반드시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전토를 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29-30절). 여기서 재물 일반에 관한 가르침은 가옥, 전토 등의 부동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가족이 추가적으로 다루어진다. 복음에 반응하여 가옥이나 전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어놓고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마가복음의 독자들 중에는 이미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물한다. 

왜 좀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다면, 마가는 왜 더 명확한 용어대신에 이처럼 애매한 용어를 선택하였을까?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였다면 마가는 22절에서 얼마든지 30절에서처럼 ‘아그루스’(전토)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끄떼마따’처럼 토지나 재물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 애매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가가 이 단어를 “재물”이란 뜻으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만 ‘끄떼마따’는 우리에게 명확하지 않을 뿐이며, 마가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언제나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 그러므로 1세기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단어는 명확하게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볼 수 있다.

22절에 ‘아그루스’대신 ‘끄떼마따’가 쓰인 것은 23절에 등장하는 ‘크레마따’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운율을 위한 고려였을 수도 있고, 토지를 다루는 22절에서 재물을 다루는 23절로 매끄럽게 넘어가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토지를 가리키려면 22절에서 다른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는 설명은 이 단어가 “재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설명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재물”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이라, 문맥에 맞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따라 ‘끄떼마따’를 “재물”보다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예수와 토지법12) 마가복음 10:22의 주해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2. 23. 16:5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친숙한 주해 

번역 성경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주석서를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보다는 “재물”을 접하게 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마가복음 10:22에 쓰인 헬라어 단어 ‘끄떼마따’가 “재산”이나 “재물”의 뜻을 가진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건드리(R. H. Gundry)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그 어원인 ‘끄따오마이’(획득하다) 동사에 관련시켜 “획득물”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획득물’은 물론 문맥에 따라 토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좀더 넓은 의미로 쓰여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재산’이란 단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네덜란드의 판 이어설(B. M. F. van Iersel)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도나휴와 해링턴(J. R. Donahue & D. J. Harrington)이나 에반스(C. A. Evans)의 이해도 동일하다. 후커(M. D. Hooker)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부”(wealth)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독일학자 그닐카(J. Gnilka)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소유”란 뜻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사본 필사자들이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듯이 성경주해자들도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많은 주해자들이 마가복음 10:22를 해석할 때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누가복음 18:23의 영향일 수 있다. 

“그 사람은 끄떼마따를 많이 소유하였으므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가복음 10:22, 사역).

그 사람은 큰 부자였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슬퍼하였다”(누가복음 18:23, 사역). 

사본학에서 친숙한 읽기가 원래의 읽기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듯이 주석학에서도 친숙한 주해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왜곡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본문을 주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서 본문을 주해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안경으로 본문을 보며 본문을 자신에게 친숙한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해자들의 경향을 벗어나려면 덜 친숙한 주해를 선택해야 한다. 많은 주해자들이 동의하는 친숙한 주해를 따르는 것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일 수는 있으나 학문적으로 바르지는 않다. 본문 주해에 있어서도 진리의 길은 좁아서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원문을 복원할 때 기계적으로 사본의 수를 따라가는 것이 위험하듯이 본문을 주해할 때 무조건 학자들의 수를 따라가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대신 독자들의 반응을 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덜 친숙한 주해 

주석가들 가운데에는 동료 주석가들이 빠져 있는 경향성을 벗어나 낯선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제안을 엉뚱한 소수 의견이라고 간주하지 말고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성경 주석가들은 언제나 주관적 경향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본문 연구를 통하여 독자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경향성을 극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반적인 경향성을 벗어나는 주해는 낯선 제안이며 한동안 소수 의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주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해를 하면서 주관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지만, 주관성을 많이 극복한 주해는 본문의 의미를 많이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없다면 주해 작업은 애초부터 무의미할 것이다. 개인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자들의 주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빠지는 공통적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창조적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에드워즈(J. R. Edwards)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또는 “소유지”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지적하면서 이 단어가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밝히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우트레흐트 대학 교수였던 발욘(J. M. S. Baljon)은 이미 20세기 초에 ‘끄떼마따’가 재물을 가리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이 단어가 특히 소유지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런데 테일러(V. Taylor)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소유지”를 가리키며, 따라서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그 사람은 지주임이 밝혀진다고 주장하였다. 레인(W. L. Lane)과 스웨테(H. B. Swete)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고 간주한다. 독일에서 페쉬(R. Pesch)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소유를 가리킨다고 간주하였고, 만(C. S. Mann)도 이 구절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중에서 특히 토지와 관련된다고 본다. 성서번역학자들 중에는 브랫처(R. G. Bratcher)와 나이다(E. A. Nida)가 ‘끄떼마따’가 일반적으로는 재산을, 특수하게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문화권에 따라 농장’이나 ‘가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해는 흔히 접하게 되는 주해들과 달리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해는 번역 성경의 영향을 받거나 통설의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학문적인 통찰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비유사한 예수의 모습을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영향에 의하며 채색된 모습이라고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예수의 모습이 전승된 이유는 그것이 진짜 예수의 모습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 원리는 주석학에도 다음과 같이 응용될 수 있다. 즉 주석학자들의 경향성에 상반된 주해는 성경저자의 의도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문맥을 통한 검증 

위에 제시한 주석학자들의 제안은 참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므로 참된 본문의 뜻을 드러내는 주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은 증거의 제시 없이 단지 주장된 것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과연 “토지”를 뜻할 수 있는 지는 단지 주장될 것이 아니라 검증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뜻은 그 문맥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할 때 문맥에 더욱 잘 맞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주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리는 문맥이다. 주해는 문맥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 나가는 학문적 작업이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가 가진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1절). 즉, 그가 슬퍼한 이유는 포기해야 하는 끄떼마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문맥에서 ‘끄떼마따’는 토지일 수도 있고 다른 유동성 재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팔아야만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토지나 집일 가능성이 높다. 유동성 재산, 즉 돈이나 보물이라면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의미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께서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명령할 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신 데에 있다(21절).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임이 19-20절을 살펴보면 곧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기에, 부족한 것은 율법 지킴과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끄떼마따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이유는 율법 준수와 관련되어 있다.

도대체 끄떼마따가 무엇이기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게 되는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율법은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을 따른 사람은 토지를 많이 가질 수 없었다. 소유지의 경계를 나타내는 토지 경계표를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자신의 토지와 이웃의 토지의 경계표를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이웃의 토지를 영구적으로 구입할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넓힐 수 없음을 뜻한다. 레위기의 토지법에 의하면 토지를 영구 매매하면 안 되고(레위기 25:23), 희년 때까지 임대할 수 있을 뿐이다(레위기 25:14-16, 28). 희년이 되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토지 경계표는 옮겨지지 않게 된다.

대토지 소유를 금하는 율법 조항은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레위기 25:23).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배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민수기 32장; 여호수아 13장 이하) 마땅히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땅을 많이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아합 왕의 땅과 교환하기를 거부한 것은(열왕기상 21:3) 이러한 토지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나봇의 시대에도 토지법은 나봇처럼 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었다. 아합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나봇의 거절 앞에 어찌할 수 없어 근심한 것은(열왕기상 21:4) 그 역시 토지법을 쉽사리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 여인 이세벨이나 이 토지법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토지법이 점점 더 어겨지게 되었고, 드디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마저도 토지법을 지키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토지법을 따르면 토지를 많이 가지게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많이” 가짐으로써 율법을 어기게 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토지였을 것이다. 조상이 율법을 어기고 취한 토지를 물려받아 소유하고 있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해도 그가 그러한 토지를 돌려줄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9절에서 버림의 목록에 ‘전토,’ ‘집’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지 않는 증거이다. 29-30절은 가옥이나 전토, 가족을 포기한 자가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21절은 가진 것들을 포기한 자가 하늘에서 보화를 받는다고 약속한다. 따라서 29-30절은 21절과 평행된다.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며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가질 것이다(21절, 사역).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 전토를 버린 자들 중에 ...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아무도 없다(29-30절, 사역). 

그리하여 21절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해진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이 언급하는 가옥, 가족, 전토에 평행된다. 그러므로 21절의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의 목록 중에서 팔 수 있는 가옥과 전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2절에서 그 부자에게 끄떼마따가 많았다고 할 때 그것은 가옥 내지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끄떼마따’는 용례상 가옥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문맥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게 한다. 

맺음말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하여 재물이나 재산이라고 해석되지만,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러한 소수의 의견은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므로 오히려 주해자들이 흔히 빠지는 경향성을 극복하고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주해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문맥을 통하여 검증된다.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문맥에 맞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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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11) 신약성서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2. 18. 12:3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에 등장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가 과연 토지를 뜻하는지 재물을 가리키는지 알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마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추측하기 위해서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끄떼마’의 용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가 읽은 성서는 신약성서가 아니라 구약성서였으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는 마가복음과 동시대(1세기)에 저술된 헬라어 작품들로 되어 있고, 모두 기독교인들의 작품이므로 이 작품들은 동일한 단어를 비교적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의 ‘끄떼마’의 뜻을 추측하기 위한 보조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끄떼마’는 네 번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0:22을 제외하면 마태복음 19:22, 사도행전 2:45; 5:1에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의 평행본문이다. 즉,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 2:45과 5:1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발생한 일들을 다룬다.

마태복음 19:22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그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역). 

‘끄떼마따’는 ‘끄떼마’의 복수형이다. 마태복음은 다른 곳에서 ‘끄떼마’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를 살펴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9:22의 문맥을 살펴보는 길밖에 없다.

본문에 의하면 젊은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간 이유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떼마따’를 많이 가져서 슬픈 이유는 예수께서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21절).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팔 수 있는 소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는데, 이 젊은이에게는 소유가 매우 많았고 이 말씀대로 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슬퍼하였을 것이다.

‘끄떼마따’가 팔 수 있는 소유라면 그것은 최소한 돈은 아니다. 돈은 파는 것이 아니라, 팔아서 받는 것이다. 팔 수 있는 소유는 돈 이외의 재물인데, 특히 토지이다. 팔아서 돈이 되는 것은 토지이기 때문이다. 귀금속이나 보석도 팔면 돈이 되지만 이러한 것은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팔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아마도 토지를 가리킨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 주어진 맥락은 율법을 지킴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는데(17절), 이 계명들은 특히 10계명 중 5~9계명과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18-19절). “온전하고자 할진대” (즉 이러한 계명들을 온전하게 지키기 원한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젊은이의 질문과 관련된다. 이 질문은 “이 모든 것” 즉 앞에 언급된 계명들을 지켰는데 아직 어떤 점에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지 묻는 것이다. 이 부족함을 채우고 온전하게 계명들을 지키기 위한 방도로 제시된 것이 바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특히 염두에 두어진 계명은 앞에 제시된 계명들 중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게 재물이 많고 이웃이 가난할 때 나의 재물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많은 토지를 가지면 분깃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율법은 토지의 경계표를 이동시키는 것을 금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나의 토지를 넓히고 이웃의 토지를 좁히는 행위, 즉 경계표를 옮기는 행위는 저주를 받을 행위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더더구나 토지를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사도행전 2:45 

또 그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아 그것들을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았다. 여기서 ‘끄떼마따’는 팔아야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최소한 돈이 아니다. 또한 ‘끄떼마따’는 ‘소유’와 구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진 두 가지 뜻 “소유,” “토지” 중에서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4:34-35은 사도행전 2:45과 평행을 이루며 예루살렘 성도들이 판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들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토지나 가옥을 소유한 자들은 누구든지 그것들을 팔아서 그 판 것들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수의 제자들이 판 것은 토지나 가옥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토지나 가옥을 가진 자는 이것들을 팔았고,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가난한 자는 토지나 가옥을 판 값을 나누어받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45에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리킬 수 있는 “토지,” “소유” 중에서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토지를 판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복음 19:21; 마가복음 10:21)고 명하셨는데, 제자들은 토지나 가옥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이 명령을 지킨 것이다. 왜 하필 토지나 가옥을 팔았을까? 예수께서 소유를 팔라고 명하셨을 때 이것들을 팔도록 의도하셨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다. 이 명령을 최초로 들은 사람은 이 명령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제자들이 토지와 가옥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예수께서 원하신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 공동체 속에서는 구약성서가 명하는 토지법이 준행되어 사람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지 않으며, 예수의 토지반환명령이 준행되어 지계표를 넘어 확장한 토지가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진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34-35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교회들의 모델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기를 부정하는 것은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유학시절에 동구권 신학생들이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열심히 분배를 행하다가 결국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체제 속에서 그들이 경험한 가난이 그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읽게 했다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그들의 해석은 예루살렘 교회의 행함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임을 알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행하다가 가난해진다면 그러한 가난을 감수해야 한다. 교회의 목표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의 명령을 따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나 모세의 토지법을 지킨 구약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 소유하는 평균지권사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이러한 성서적인 사회 체제를 공산사회라고 비판하는 것은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사회와 모든 개인이 생산수단을 평등하게 소유하는 성서적 사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또한 공산주의가 싫어서 사도행전 교회를 부정하고 구약의 토지법도 부정하는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성경이나 예수보다 더 높이는 우상숭배적인 태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성경과 예수보다 더 높아져 있다. 그들은 성경과 예수를 지극히 자본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면 예수의 명령마저도 ‘율법’이라고 부르거나 우리와는 관계없는 명령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이다. 마치 소가 농부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기독교는 본래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는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재앙일 뿐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탈을 쓴 바알의 종교일 뿐이다. 소가 풀을 먹지 않고 동물성 사료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리듯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 다른 것을 먹고 살 때에는 광교회병에 걸리게 된다. 소가 풀을 먹고 살아야 하듯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5:1 

그런데 이름이 아나니아인 어떤 남자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끄떼마를 팔았다(사역). 

사도행전 5:1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팔았다고 한다. 이 ‘끄떼마’가 무엇인지는 근접문맥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사도행전 5:1의 직전에는 바나바가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기사가 나온다(4:36-37). 즉 바나바는 사도행전 4:34-35에 언급된 토지나 가옥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바나바는 레위인이었으며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지계표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레위기 25:23-28을 어기어 토지를 (임대하지 않고) 매매하고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내어 놓은 것은 조상이나 자신이 율법을 어긴 잘못을 회개한 것이다. 이러한 바나바의 행동에 이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판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의 행동을 흉내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끄떼마’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토지는 약간의 토지였을 것이다. ‘끄떼마’라는 단어가 단수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넓은 토지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2:45이나 마가복음 10:22; 마태복음 19:22에서처럼 복수형 ‘끄떼마따’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5:2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를 판 값의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음을 언급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아마도 그들이 가진 토지의 일부만을 처분하고 그 값 중에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이 문제되지 않고 토지를 판 값의 일부를 감춘 것이 지적된다(사도행전 5:3).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은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는 부분(기업)을 제외한 토지를 판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업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비판받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업을 초과하는 토지(즉 평균지권이 허용하는 토지가치 이상의 토지 소유, 또는 토지 경계표를 넘어서 확장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문제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토지를 처분하여 일부를 바치고 일부를 숨기는 것은 큰 잘못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의 일부를 팔아 바친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한 것이므로 선행이 아니며, 그들이 판 값 중에 일부를 바치지 않은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므로 악행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사도행전 5:5, 10) 그러한 악행에 대한 벌이었다.

사도행전 5:3에서 베드로는 ‘땅 값’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을 언급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팔았다고 하는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킴을 분명히 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신약성서의 다른 곳들에서 사용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끄떼마’는 이 곳들에서 언제나 토지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이 드러났다.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키지 않음이 명확한 곳은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도 ‘끄떼마’라는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추측하게 한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만이 독특하게 ‘끄떼마’에 토지라는 뜻보다는 재물이나 소유라는 뜻을 담아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기독교인들이 한결같이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의 저자도 이 단어를 그러한 뜻으로 사용하였으리라고 추측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2에 나오는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예수의 명령을 듣고 근심하며 간 그 사람은 재물 중에서도 토지를 많이 가진 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예수의 명령(마가복음 10:21)은 사실상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들이 이 명령을 듣고 근심하게 되어야 이 말씀이 제대로 이해된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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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8)성경번역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9. 18. 11:08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글 번역 성경들과 ‘토지’

마가복음 10:22은 ‘토지,’ ‘소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담고 있다. 이 단어가 ‘토지’나 ‘소유지’를 뜻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명하신 이유를 깨달으며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끄떼마’의 복수형)를 토지를 뜻하는 것으로 읽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끄떼마’가 기본적으로 토지를 뜻하는 단어라는 것은 간단한 헬라어 사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읽을 때에는 ‘끄떼마’가 토지를 뜻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성경번역자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을 뜻하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마가복음 10:22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후에 헬라어로 마가복음 10:22을 읽어도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의 뜻으로 이해하게 된다. 성경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지는 번역 성경들이 오히려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한글 번역성경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개정).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그러나 그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은 ‘재물’이나 ‘재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본문을 의역한다. “이 말씀을 듣자 그 사람은 무척 근심스런 얼굴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대단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글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마가복음10:21-22이 토지와 관련됨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로 번역한 한글 번역성경들 중에는 사도행전 5:1에서 동일한 단어(단수형, ‘끄떼마’)를 ‘땅’으로 번역한 성경들이 있다. 바로 공동번역 및 공동번역개정판,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이다.

그런데 아니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을 판 다음(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삽비라와 의논하고 을 팔아(현대인의 성경).

아나니아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삽비라도 자기들의 일부분을 팔았습니다(쉬운 성경).

이 번역성경들을 읽는 독자들은 아나니아가 판 ‘땅’이 마가복음 10:22의 ‘재물,’ ‘재산’과 동일한 단어의 번역임을 알 수 없기에 이러한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이 둘을 연결 지을 수 없다. 개역이나 개역개정판, 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을 읽는 독자들의 경우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이 번역본들은 사도행전 5:1의 ‘끄떼마’를 ‘소유’라고 번역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개정).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를 팔아서(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이 번역본들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되었기에 두 본문 뒤에 동일한 헬라어 ‘끄떼마’가 있음을 알기 어렵다. 물론 ‘소유’는 ‘재산,’ ‘재물’과 동의어이므로 두 본문을 서로 연결할 수 있지만 사도행전 5:1에서 ‘소유’가 토지를 가리키는 것을 파악하기는 쉬워도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도행전 5:1에서 ‘땅’대신 ‘소유’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해도 이것이 결국 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문맥 때문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땅을 판 금액에 관하여 언급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은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재산’으로 번역한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습니다.” 사도행전 5:1에서는 문맥상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곧 알 수 있게 되지만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가 언급되었음을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서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외국어 번역 성경들과 ‘토지’

외국어 번역 성경들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의 번역에 토지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선 영어번역본들을 살펴보면 킹 제임스 역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possession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NIV는 ‘wealth’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본들도 ‘Güter’(재물), ‘Vermögen’(부) 등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여, 토지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없게 한다. 불어 번역본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biens’(재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므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한 네덜란드어 번역본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 또한,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때 율법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마가복음 10:21의 말씀이 구약의 토지법을 배경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헬라어 본문으로 읽어도 그 속에 토지가 언급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이다. 번역 성경을 읽은 사람은 원어로 성경을 읽을 때 번역 성경에서 파악한 의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성경 번역은 헬라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성경의 의미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지만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역할도 한다. 모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은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이 소유나 재물을 뜻하는 단어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한 이유는 이 헬라어 단어가 토지를 뜻할 수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DRA(The Douay-Rheims American Edition, 1899)는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land’로 번역하였다. 독일어 성경들 중에서, EIN(Einheitsübersetzung, 1980)은 ‘Grundstück’(토지)을, LUT(Revidierte Lutherbibel, 1984)‘Acker’(농토)를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불어성경 중에는 BFC(1997)가 ‘terrain’(토지)을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네덜란드어성경 중에서 LEI(Leidse Vertaling, 1912/1994)‘akker’(농토)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들 번역본들은 동일한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마가복음 10:22에서는 재물을 뜻하는 말로 번역하였다. 그들이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킬 가능성을 알면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는 ‘끄떼마’를 ‘토지’로 번역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번역자들 역시 그들이 읽은 성경 번역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 번역과 기독교 세계관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구절은 마가복음 10:21-22과 그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9:21-22이다. 마태복음 19:22에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처럼 헬라어 ‘끄떼마따’가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의 경우에는 토지를 뜻하는 번역어를 사용한 번역본이 없을까?

개역과 개역개정판은 마태복음 19:22에서 ‘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판, 표준새번역, 쉬운 성경은 ‘재산’을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우리말 성경은 이곳에서도 “그는 굉장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의역한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possessions’를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ASV, DBY, DRA, ESV, GNV, KJV, NAB, NKJ, NLT, NRS, RSV, RWB, WEB, YLT), ‘property’를 번역어로 사용한 역본들도 있다(BBE, NAS, NAU). NIV와 NJB는 ‘wealth’를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성경들도 마태복음 19:22에서 ‘Güter’(재물)나 ‘Vermögen’(부)을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불어 성경번역본들은 ‘biens’(재물)을, 네덜란드어 성경번역본들은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번역어로 택하였다. 이처럼 마태복음 19:22에서도 성경 번역자들은 ‘끄떼마따’를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번역 성경들의 상황이 이러하므로, 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빠져버린 번역 성경을 읽는 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와 관련된 경제 윤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구약의 토지법을 존중하는 입장의 교회들은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레위기 25:23 말씀과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신명기 27:17 말씀에 입각하여 대토지소유의 비윤리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들의 규범성을 무시하는 교회들은 토지를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이 시대의 정신에 따라 생각하며 대토지소유가 정당한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성경 번역은 그 번역을 읽는 기독교의 모습의 밑그림을 그린다. 토지를 재물과 혼동한 번역 성경을 가진 기독교는 지주와 자본가를 혼동하는 기독교가 된다. 그리하여 자본가만이 아니라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한 소유권자로 간주하는 실수를 범하거나, 대지주만이 아니라 자본가까지 비윤리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자본가와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면, 대지주와 자본가를 함께 묶어서 비윤리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사회주의이다. 성경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도록 무의식적으로 강요받아왔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입장을 택하였고, 자본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을 택하곤 하였다.

생산수단을 모두 국유화하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와 자본을 모두 국가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지만, 성경(구약)은 토지와 자본 등의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도록 한다. 자본주의자들은 개인이 토지마저도 무한히 많이 소유해도 된다고 여기지만 성경(신명기 27:17)은 토지를 제한적으로 일정 분량만 소유하도록 명한다. 성경이 그려주는 사회의 모습은 분명히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성경의 토지법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길과도 다르다. 중국에서는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국민에게 불평등하게 임대해 주지만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소유하도록 한다. 헨리조지의 토지가치세의 경우에도 이를 실행하면 모든 사유지에 지대에 해당하는 세를 부과하여 결국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나누어 소유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소유한 것은 임대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므로 지대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게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헨리조지가 제안한 토지가치세를 적용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성경의 토지법을 적용하면 모든 국민이 평등한 토지권을 누리게 되고,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국토를 소유하게 되며, 토지를 많이 가진 사람들은 권리이상으로 가진 부분에 대한 세를 국가에 내게 되고 국가는 이를 사회 복지를 위해 사용하게 된다.

성경의 한 단어의 번역이 부정확할 때 성경으로 세상을 보는 눈은 크게 왜곡될 수 있다. 물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부분적인 부정확함이 교정되기도 하지만, 부정확한 부분들이 모여서 부정확한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교회가 세상의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인식하고 바른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확한 성경 번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세계관을 성경적으로 교정하려면 기독교인들이 읽는 번역 성경을 바르게 교정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성경을 번역할 때나 번역된 성경을 교정할 때, 이미 번역된 성경들이 미치는 영향을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우리는 번역 성경을 전보다 좀더 정확하게 개정할 수 있다.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고, 한 걸음에 천리 길을 갈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단번에 완벽한 번역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여 이러한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오히려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원망하는 게으른 종(마태복음 25:24-25)처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세상에서 살 수 없지만 점점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좀더 나은 번역 성경을 만들 수 있기에 우리는 끝없는 개정작업을 통해 좀더 원어와 원문을 잘 반영하는 번역성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 번역 성경을 좀더 정확하게 개정하는 작업은 기독교 세계관을 교정하는 작업이며, 또한 교회를 회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초 작업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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