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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 11) 신약성서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2. 18. 12:3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에 등장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가 과연 토지를 뜻하는지 재물을 가리키는지 알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마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추측하기 위해서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끄떼마’의 용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가 읽은 성서는 신약성서가 아니라 구약성서였으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는 마가복음과 동시대(1세기)에 저술된 헬라어 작품들로 되어 있고, 모두 기독교인들의 작품이므로 이 작품들은 동일한 단어를 비교적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의 ‘끄떼마’의 뜻을 추측하기 위한 보조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끄떼마’는 네 번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0:22을 제외하면 마태복음 19:22, 사도행전 2:45; 5:1에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의 평행본문이다. 즉,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 2:45과 5:1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발생한 일들을 다룬다.

마태복음 19:22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그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역). 

‘끄떼마따’는 ‘끄떼마’의 복수형이다. 마태복음은 다른 곳에서 ‘끄떼마’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를 살펴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9:22의 문맥을 살펴보는 길밖에 없다.

본문에 의하면 젊은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간 이유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떼마따’를 많이 가져서 슬픈 이유는 예수께서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21절).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팔 수 있는 소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는데, 이 젊은이에게는 소유가 매우 많았고 이 말씀대로 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슬퍼하였을 것이다.

‘끄떼마따’가 팔 수 있는 소유라면 그것은 최소한 돈은 아니다. 돈은 파는 것이 아니라, 팔아서 받는 것이다. 팔 수 있는 소유는 돈 이외의 재물인데, 특히 토지이다. 팔아서 돈이 되는 것은 토지이기 때문이다. 귀금속이나 보석도 팔면 돈이 되지만 이러한 것은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팔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아마도 토지를 가리킨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 주어진 맥락은 율법을 지킴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는데(17절), 이 계명들은 특히 10계명 중 5~9계명과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18-19절). “온전하고자 할진대” (즉 이러한 계명들을 온전하게 지키기 원한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젊은이의 질문과 관련된다. 이 질문은 “이 모든 것” 즉 앞에 언급된 계명들을 지켰는데 아직 어떤 점에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지 묻는 것이다. 이 부족함을 채우고 온전하게 계명들을 지키기 위한 방도로 제시된 것이 바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특히 염두에 두어진 계명은 앞에 제시된 계명들 중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게 재물이 많고 이웃이 가난할 때 나의 재물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많은 토지를 가지면 분깃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율법은 토지의 경계표를 이동시키는 것을 금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나의 토지를 넓히고 이웃의 토지를 좁히는 행위, 즉 경계표를 옮기는 행위는 저주를 받을 행위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더더구나 토지를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사도행전 2:45 

또 그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아 그것들을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았다. 여기서 ‘끄떼마따’는 팔아야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최소한 돈이 아니다. 또한 ‘끄떼마따’는 ‘소유’와 구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진 두 가지 뜻 “소유,” “토지” 중에서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4:34-35은 사도행전 2:45과 평행을 이루며 예루살렘 성도들이 판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들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토지나 가옥을 소유한 자들은 누구든지 그것들을 팔아서 그 판 것들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수의 제자들이 판 것은 토지나 가옥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토지나 가옥을 가진 자는 이것들을 팔았고,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가난한 자는 토지나 가옥을 판 값을 나누어받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45에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리킬 수 있는 “토지,” “소유” 중에서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토지를 판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복음 19:21; 마가복음 10:21)고 명하셨는데, 제자들은 토지나 가옥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이 명령을 지킨 것이다. 왜 하필 토지나 가옥을 팔았을까? 예수께서 소유를 팔라고 명하셨을 때 이것들을 팔도록 의도하셨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다. 이 명령을 최초로 들은 사람은 이 명령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제자들이 토지와 가옥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예수께서 원하신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 공동체 속에서는 구약성서가 명하는 토지법이 준행되어 사람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지 않으며, 예수의 토지반환명령이 준행되어 지계표를 넘어 확장한 토지가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진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34-35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교회들의 모델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기를 부정하는 것은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유학시절에 동구권 신학생들이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열심히 분배를 행하다가 결국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체제 속에서 그들이 경험한 가난이 그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읽게 했다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그들의 해석은 예루살렘 교회의 행함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임을 알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행하다가 가난해진다면 그러한 가난을 감수해야 한다. 교회의 목표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의 명령을 따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나 모세의 토지법을 지킨 구약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 소유하는 평균지권사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이러한 성서적인 사회 체제를 공산사회라고 비판하는 것은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사회와 모든 개인이 생산수단을 평등하게 소유하는 성서적 사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또한 공산주의가 싫어서 사도행전 교회를 부정하고 구약의 토지법도 부정하는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성경이나 예수보다 더 높이는 우상숭배적인 태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성경과 예수보다 더 높아져 있다. 그들은 성경과 예수를 지극히 자본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면 예수의 명령마저도 ‘율법’이라고 부르거나 우리와는 관계없는 명령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이다. 마치 소가 농부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기독교는 본래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는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재앙일 뿐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탈을 쓴 바알의 종교일 뿐이다. 소가 풀을 먹지 않고 동물성 사료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리듯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 다른 것을 먹고 살 때에는 광교회병에 걸리게 된다. 소가 풀을 먹고 살아야 하듯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5:1 

그런데 이름이 아나니아인 어떤 남자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끄떼마를 팔았다(사역). 

사도행전 5:1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팔았다고 한다. 이 ‘끄떼마’가 무엇인지는 근접문맥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사도행전 5:1의 직전에는 바나바가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기사가 나온다(4:36-37). 즉 바나바는 사도행전 4:34-35에 언급된 토지나 가옥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바나바는 레위인이었으며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지계표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레위기 25:23-28을 어기어 토지를 (임대하지 않고) 매매하고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내어 놓은 것은 조상이나 자신이 율법을 어긴 잘못을 회개한 것이다. 이러한 바나바의 행동에 이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판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의 행동을 흉내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끄떼마’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토지는 약간의 토지였을 것이다. ‘끄떼마’라는 단어가 단수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넓은 토지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2:45이나 마가복음 10:22; 마태복음 19:22에서처럼 복수형 ‘끄떼마따’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5:2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를 판 값의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음을 언급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아마도 그들이 가진 토지의 일부만을 처분하고 그 값 중에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이 문제되지 않고 토지를 판 값의 일부를 감춘 것이 지적된다(사도행전 5:3).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은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는 부분(기업)을 제외한 토지를 판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업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비판받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업을 초과하는 토지(즉 평균지권이 허용하는 토지가치 이상의 토지 소유, 또는 토지 경계표를 넘어서 확장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문제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토지를 처분하여 일부를 바치고 일부를 숨기는 것은 큰 잘못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의 일부를 팔아 바친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한 것이므로 선행이 아니며, 그들이 판 값 중에 일부를 바치지 않은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므로 악행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사도행전 5:5, 10) 그러한 악행에 대한 벌이었다.

사도행전 5:3에서 베드로는 ‘땅 값’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을 언급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팔았다고 하는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킴을 분명히 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신약성서의 다른 곳들에서 사용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끄떼마’는 이 곳들에서 언제나 토지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이 드러났다.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키지 않음이 명확한 곳은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도 ‘끄떼마’라는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추측하게 한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만이 독특하게 ‘끄떼마’에 토지라는 뜻보다는 재물이나 소유라는 뜻을 담아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기독교인들이 한결같이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의 저자도 이 단어를 그러한 뜻으로 사용하였으리라고 추측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2에 나오는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예수의 명령을 듣고 근심하며 간 그 사람은 재물 중에서도 토지를 많이 가진 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예수의 명령(마가복음 10:21)은 사실상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들이 이 명령을 듣고 근심하게 되어야 이 말씀이 제대로 이해된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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