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

지난 주 공개한 "4대강 사업 본색! 제1탄 - 라인강의 교훈" 편에 이어..
([영상] 4대강 사업 본색! 제1탄- 라인강의 교훈(무한펌질 환영!)

"4대강 사업 본색! 제2탄 - 홍수, 가뭄" 편을 올려드립니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의 이유로 얘기하는 홍수 및 가뭄 예방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지 영상으로 엮어 봤습니다.

이 동영상을 보시고 많은 곳으로 퍼날라주시면 4대강 사업을 막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동영상을 보고 4대강 사업의 문제를 알 수 있도록 함께 동참해주세요!


"4대강 사업 본색!" 시리즈는 앞으로 2~3편 정도 추가로 제작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나올 영상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이 영상은 4대강을 지키기 원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재능기부와
"강은 살아있다"의 저자 최병성 목사님의 도움으로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고화질 영상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Here's a link to '4대강 사업 본색-홍수 가뭄편.wmv'

<관련 포스트>
[영상] 4대강 사업 본색! 제1탄- 라인강의 교훈(무한펌질 환영!)

:
한국 사회의 '맘몬 숭배'가 배태한 '삼성숭배교'
'삼성숭배교'에 맞설 예언자적 지식인이 절실하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돌이킬 수 없는 국토 훼손에 착수했고, 언론 장악 및 검찰과 사법부 장악 시도를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쉼 없이 위협하고 있다. 정부가 사장 및 이사장의 인사권을 통해 공영 방송을 장악한 결과, 공영 방송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모든 기사들을 외면하고 올림픽 경기, 범죄 현장에 대한 도가 넘는 선정적인 취재 및 보도 등에 몰입해 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려 야당과 비판적인 시민들의 전열을 흩트려 놓고 전 국민의 탈정치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 땅의 가난한 시민들을 폭압적으로 다루고도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법이 거의 없다. 태안 앞바다 유조선 충돌로 생업의 터를 잃은 어민들이 부르짖어도, 용산 재개발 지역 주민들에 대한 강압적인 철거 진압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에게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과와 위로의 말을 하지 않는다.

대운하 사업의 추진 가능성이 막히자 4대강 사업으로 이름을 바꾼 참혹한 대토목 공사를 벌이는 정부의 무리하고도 강압적인 일 방식 앞에 양식 있는 국민들은 민주주의 역사가 급격히 후진하고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인다. 그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외골수로 자기 길을 가며 국토를 불가역적으로 훼손해 가는 정부를 보면 탄식과 불안은 깊어 간다.

그러나 이런 명시적인 실정 외에도 이명박 정부가 끼친 더 지속적인 폐해는 몰윤리적 금권숭배, 물신 숭배 풍토를 전 국민적으로 확산시킨 일이다. 경제 성장과 부에 대한 전 국민적 열망을 등에 업고 등장한 이 정부는 한 나라의 근본인 공평과 정의의 토대를 무너뜨릴 기세를 서슴없이 보여 주고 있다.

나라의 근본은 가장 가난하고 약한 국민에 대한 친절과 배려, 돌봄임과 동시에 불법적인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떨치는, 범람하는 권력 계층들을 공명정대함으로 견제하고 감시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OECD 가입국 중 가장 적은 복지 예산을 갖고 있는 주제에 그 작은 복지 예산마저 삭감하고 강한 자 중심의 국가 운영에 전력을 기울인다.

마침내 정부는 지난 연말에 이건희 삼성 회장만을 단독으로 사면했다. 이건희는 여러 가지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지 1년도 안 되어 사면된 것이다. 이건희의 사면에 의혹의 시선을 보낸 국민들에게 그 사면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청와대 당국자는 삼성의 평창올림픽 유치 지원이나 삼성의 세종시 입주 및 투자를 암시적으로 요구하는 논평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삼성이 갖는 경제력을 믿고 정의감과 법적인 형평의 원칙을 아주 손쉽게 내팽개쳐 버렸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삼성은 어떤 가치와도 다툴 수 없는 초월적 신성 구역에 존재하는 일종의 종교적 성소처럼 보인다. 삼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한 국민의 민족정신과 얼의 집결체요, 삼성의 성취는 현대 한 국민의 국가적 성취의 집약물이라는 생각이 많은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삼성이 이룬 모든 것, 그것은 50여 년 전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이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 꿈이었다고 보는 통속적인 국민감정을 호소하여 삼성을 비호한 것이다. 삼성의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한 정부의 사면은 돈만 있으면 정의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국민에게 심어 줌으로써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모순의 괴이함을 전혀 감지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정희식 조국 근대화와 '잘 살아 보세'의 귀착지, 삼성

삼성과 같은 재벌 그룹은 엄격하게 말하면 특정 기업가 가문이 키운 순수 사기업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관치 금융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의 각종 지원과 특혜 속에 성장했다. 그것은 "5,000년 가난을 떨쳐 보자"며 등장한 박정희 군사 정부가 양육한 기업이며 사주 기업가 가문의 창의 경영이나 공세적인 기술 개발로서만 아니라, 온갖 악조건에 저임금을 참고 불리한 노동 여건을 견뎌 가며 일해 준 직원들과 삼성에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 납품하는 하도급 업체들, 중소기업에 속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일어선 기업이기도 하다.

삼성은 결국 우리 조국의 슬픈 근대화 역사에서 태어난 한국민의 정신적 열망의 집약적 외화물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민주주의 가치와 물질적 번영과 부에 대한 추구가 각축하는 전장이었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경제 성장과 번영을 위해 모든 국가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경제적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인 민주주의, 인권, 정의와 평등, 자유와 안식권을 포기했다.

이런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향한 질주는 박정희 군사 정권 이래 권력과 견고한 동맹을 맺어 온 전근대적인 재벌 기업들에 의해 추동되었다. 그 한복판에 삼성이 있다. 삼성은 국민 기업이 아닌 다국적 자본들에 의해 움직이는 다국적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성이 대한민국의 국민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은 기실 알고 보면 4%의 지분을 갖고 있는 창업주 가족들의 출자 순환이라는 독특한 제도와, 얼마 전까지 존치되었던 그룹기획구조본부실이라는 기관의 음험한 기업 공학적 경영을 통해 전체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세습 왕조적인 기업(dynastic enterprise)이다. 세습 왕조라는 틀 때문에 그 내부에서 어떤 비리가 자행되어도 공개적인 비판과 감시를 받지 않으며, 공식 회계 장부에는 드러나지 않는 천문학적 비자금을 운영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망하지 않으려고 삼성은 그 비자금을 갖고 정부 기관, 고위 공무원, 검찰의 기소권, 법관의 판결, 지식인의 날카로운 펜, 언론, 그리고 종교적 양심까지 매수한다. 비자금의 힘으로 사로잡고 아우르고 거느리고 마침내 지배하는 일종의 신적인 영향력을 무소불위로 행사하는 신성한 지휘부로 올라선 것이다.

이 세습 왕조적 재벌 그룹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있다. 삼성물산과 반도체 등 주력 기업을 통해 우리나라 국민 총생산 22%를 담당하는 국가 대표급 기업, 삼성반도체나 전자 제품을 통해 한국의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제고하는 국가 대표급 기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성의 불의와 불법을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세계를 상대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무역으로 외화를 획득하여 국부를 증가시켰고, 한국 경제의 파이를 늘린 선구자적인 기상을 과시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7년 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전 삼성구조본 소속 법무 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의 3대 죄악을 폭로하고 고발했다. 사제단과 김용철이 밝힌 삼성의 죄악은 첫째, 조직적인 비자금 조성과 탈세를 위한 회계 조작, 둘째 용인의 에버랜드 전환 사채 헐값 매수를 통한 경영권 불법 승계 및 법정 증거 조작, 셋째, 정관계·학계·법조계·종교계·언론계를 대상으로 한 로비를 통한 양심 매수 행위다.

정치권은 삼성 비리를 수사하기 위한 특검을 임명했으나, 특검은 도리어 삼성에 면죄부를 주는 지극히 미약한 기소로 종결되었다. 약 2년 이상 끌다가 작년 연말에 이뤄진 삼성 불법 승계 관련 일반 재판도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고, 정부는 급기야 이건희를 작년 성탄절 단독 사면으로 기업 일선에 복귀시켰다. 이건희 복귀는 세종시 기업 유치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에 힘을 써 달라는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이뤄진 거래라는 것이 언론과 시민들의 판단이었다.

삼성은 이른바 떡값 검사 파동에서 밝혀진 것처럼 검찰에 엄청난 양의 돈을 뿌려 장학생들을 키우고 있으며 <중앙일보>를 통해 언론계로부터 오는 간헐적인 공격을 막아 낼 방어진을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철 변호사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고급 호텔 숙박권으로 사람들을 매수하도록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장면도 나온다. 삼성은 한국의 지휘부를 돈으로 매수하여 지배한다.

그 결과 삼성의 가족으로 입적된 사람들은 보편적인 공익이나 대의가 아니라 삼성 기업의 사적 이익에 우선 복무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지휘부·언론·지식인·사법부 모두가 삼성 앞에서는 작아진다. 일반 국민들도 삼성의 경제적 위력이 내뿜는 아우라에 의해 삼성 숭배에 쉽게 빠져든다. 삼성은 도덕·윤리·정의·인권 가치 등을 삼켜버리는 무저갱이며, 부·풍요·국가적 자부심·국가주의의 상징이다.

삼성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담은 <삼성을 생각한다>.

 
 
전 삼성그룹 구조기획본부의 법무 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를 읽어 보면, 삼성 문제가 단지 정치와 경제 영역의 일탈이나 불법이라는 단순한 악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정밀한 신학적 성찰을 요하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삼성의 경영 지휘부는 로마제국의 멸망기에 나타나는 흥청망청한 부패한 귀족들과 달리, 아주 영악하게 깨어 끊임없이 정복지를 찾아 나서는 민첩성과 공격성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

분별력을 잃고 유흥과 쾌락에 탐닉하여 자기 파멸로 치닫는 명백한 악이 아니라, 작은 일에는 선을 도모하면서 더 큰 악을 범하는 교묘하게 위장된 악이다. 스스로도 자기가 하는 일들이 악임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삼성 지휘부는 확신에 차 판사를 30억으로 매수할 생각을 하고 국회의원에게 돈다발을 갖다 줄 생각을 스스럼없이 실행한다. 삼성은 우리나라의 모든 중요한 요소에 자기들의 에이전트(대리자)를 심어 둔 거대한 왕국인 것이다. 대형 법률 회사를 능가하는 300명 이상의 변호사들을 거느리고 국가 정보기관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정보망을 구축한 경제 연구소와 비선 정보 구축 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의식 있는 시민들은 삼성 문제를 알지만 그 위세에 눌려 무력감 속에 방치하거나 외면해 왔다. 삼성의 문제에 문제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김용철 변호사는 이 책을 통해 삼성의 조직적 비리를 폭로하고 삼성이 국민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공개적으로 피력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이건희 일가의 자기 보존을 위한 원색적인 금권 정치 공학에 관한 이야기이며, 무슨 이유인지 삼성의 쟁송을 분별 있게 다룰 능력을 박탈당한 무능한 검찰과 사법부 이야기이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언론의 이야기다. 그는 책에서, 삼성이 이렇게 큰 죄악들에 연루된 기업이면서도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경제라는 물신을 위해 오늘날 모든 가치를 뒤로 미루는 이른바 국민 정서 때문이라고 본다(86쪽). 떡값 검사나 기자들, 학자들도 이런 국민 정서의 뒤에 숨어 삼성 비리를 은닉하거나 모른 체한다고 볼 수 있다. 김용철이 이 책에서 부각시킨 삼성 비리 중 하나는 삼성 왕조의 경영권 세습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증언이다.

이 책이 폭로하는 또 하나의 삼성의 대국민 위장 비리는 <중앙일보>의 삼성 계열 분리 선언 책동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99년에 <중앙일보>는 삼성으로부터 계열 분리하겠다고 대국민 선언을 하지만 그것은 음험한 거짓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앙일보>의 삼성 계열 분리는 위장이었고, <중앙일보> 편집국 내부 정보 보고가 하루 두 차례씩 삼성 구조본에 전달되었다"고 폭로했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또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비판한다. 삼성에서 노조를 설립하면 어떻게 되는지 전 삼성노조 위원장 '김성환'의 고난에 찬 인생 역정이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저자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직원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 공무원의 철저한 매수로 인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왜 삼성은 노조를 무서워할까? 삼성 직원들의 급료가 다른 회사들의 급료보다 월등이 높다는 사실을 보면, 삼성의 노조 포비아의 원인은 임금 협상 때문이 아니라 딴 데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비자금 경영, 불투명 경영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노조는 너무 투명한 공조직이라서 뇌물로 매수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노조가 있다면 이건희가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자기 아들에게 삼성그룹 전체를 넘겨주기 위해 에버랜드 전환 사채 발행을 통한 불법적 경영권 승계 행위를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한 회사의 노조는 단지 임금 협상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라, 기업의 공적인 본질을 지키려는 기업 자체의 자기 검증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성은 자기반성과 점검을 수행할 기관이 없는 윤리와 도덕의 사각지대에서 돈으로 모든 것을 성취해 온 것이다. 삼성은 돈의 신적 위력을 가장 신실하게 신봉하는 물신 숭배교 종단인 것이다. '돈이 충성을 낳는다'는 삼성식 보상 원칙은 종교적 구원론처럼 잘 작동하고 있다. 실적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의 급여를 지급함으로써 삼성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직원들에게 뿌듯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심어 준다. 이것은 삼성 숭배자가 누리는 일종의 유사 구원감인 것이다(참조. 마 6:22~24).

이처럼 돈에 위력에 토대를 둔 삼성의 금권 숭배적 구원관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더러는 삼성 비자금을 한국 기업의 특수 상황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다국적 기업 삼성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비책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비자금은 단지 회장 개인이나 가문의 축재의 일환이 아니라 기업으로서의 자기 존속을 영속화하려는 비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삼성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와중에서 여차하면 몰락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고도의 기업 경영 방식의 일환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삼성의 비자금 의존적인 기업 유지나 확장 노선이 그 안에 엄청난 반기업적 불의와 죄악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건희가 운용한다고 알려진 비자금 4조 5,000억 원은 대부분 사원들과 직원들에게 돌아가야 할 임금, 주주들에게 돌아가야 할 배당금, 고객들이 맡겨 둔 보험금 등에서 갈취한 자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자금은 횡령과 배임을 통해 생긴 돈인 셈이다. 엄연히 주식회사인 삼성이 주주들과 사원들을 오랫동안 속인 결과 그렇게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용철의 책에서 밝혀졌듯이, 삼성의 비자금은 불투명하고 어두운 용처를 위해 비축되었던 돈이다. 지식인, 언론인, 공무원, 그리고 법조인의 영혼을 사는 데 뇌물로 사용된 돈이었던 것이다. 전 세계 50위권 대기업이 비자금을 갖고 대한민국의 양심을 매수하고 자기 이익에 복무하도록 역사한다는 사실은 무섭고도 서글픈 일이다. 결론적으로, 김용철은 삼성 비리의 뿌리는 비자금이며 그 비자금의 용처는 인격(영혼) 매수임을 분명하게 밝힌다(346쪽).

대한민국 국민의 물신 숭배가 바로 삼성 숭배교의 발상지

19세기 미국의 기독교 정치 사상가인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자신의 저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전 국민적 존경도 누리는 권력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권력자가 타락한 자라면 국민의 도덕성도 함께 타락한다"고 경고한다. 또한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삼성 이건희를 존경하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민 기업가로 추켜세우며, 엄중한 죄를 짓고 유죄 판결을 받은 지 1년도 안된 사람에게 사면을 단행하는 나라에서는 국민성이 덩달아 급격하게 타락하게 된다. 삼성이 겉으로는 국가 대표급 기업이지만 우리 사회의 근본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지극히 반공동체적인 암적 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명박 정부와 삼성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맘몬 숭배(Mammonism)라는 한 배에서 태어난, 쌍생아(雙生兒)처럼 제휴하여 국민성의 타락을 부추기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돈을 숭배하고 성공과 쾌락을 갈망한다. 삼성과 이명박 정부, 돈을 숭배하고 수단 방법을 불문하며 성공과 쾌락을 타락한 국민들은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당기는 동맹자들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삼성,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은 우리 국민들, 우리 자신들의 타락한 인간성, 뒤틀리고 왜곡된 기독교 신앙을 문제 삼는 행위임이 드러낸다.

돈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경배하는 것이 물신 숭배다. 이 물신 숭배의 근본은 구매력, 욕망 충족력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욕망이다. 돈 숭배는 결국 영적 존재가 자기의 욕망을 신격화하고 무한히 확장하려는 데서 생겨난다. 자기의 안전과 영원한 존속 욕구를 신격화하는 것이다. 삼성 자체가 비자금을 비축하는 이유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안정 욕구의 신격화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물신 숭배는 조직이나 기업의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원천이다. 한 기업의 영속적 존속은 비자금에 의해 가능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공평과 정의를 보좌로 삼는 하나님나라와 견고한 동맹을 맺음으로써 성취되지 돈을 통한 권력 매수, 양심 매수를 통해 결코 성취될 수는 없다. 또한 가난과 불편을 견디는 능력이 있다면 '돈 숭배교'에 빠지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8장은 물신 숭배의 본거지인 음녀 바벨론의 멸망을 그리는 묵시록이다. 여기서 두 번씩이나 "무너졌도다"라는 선고를 받은 나라는 큰 성 바벨론이다.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본거지며,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동굴이라고 불린다(2절). 바벨론은 땅의 왕들과 음행하여 정절을 더럽힌 음행의 대가로 받은 부로 땅의 상인들(23절에 따르면 왕족들)을 치부케 했다는 명성을 들었다(3절).

그러나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바 되었다(5절). 음녀 바벨론은 땅의 상인들로부터 온갖 상품을 사들였는데 그 상품 목록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 상품들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었다(12~13절). 사람들의 목숨, 영혼, 인격이 바벨론이 매입한 상품이었다. 이 구절은 바벨론이 인격과 영혼을 매입해 노예 무역을 했다는 말로 이해된다. 동시에 그것은 바벨론 체제에 저항하는 의인들의 목숨을 빼앗는 살상 행위를 함의할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음녀 바벨론 중에서 발견되었다(24절). 바벨론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외치는 선지자들과 성도들을 죽이고 부를 탐하고 축재하고 사치와 번영을 누린 도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성 바벨론을 하나님께서는 파괴시킴으로서 심판하셨다(20절, 계 14:4~5, 8). 음녀 바벨론은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으로서(14:15~18)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대변하는 예언자들과 성도들을 죽여 버림으로써 방해받지 않고 얻은 부로 자기 영화화, 자기 영속화를 꾀하며 땅의 왕들과 견고한 동맹을 이루었으나, 하나님은 홀연히 그 바벨론을 파멸시켜 버렸다. 사람들의 영혼까지 매수하여 노예화하는 음녀 바벨론을 하나님은 처참하게 심판하셨고 파멸의 바다로 집어던지셨다.

이것이 물신 숭배자의 말로다. 물신 숭배의 본거지 음녀 바벨론은 자신이 범한 죄악과 음행의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영원히 번영할 것 같은 부를 손에 넣었으나 홀연히 망한다. 돈의 힘으로 영혼을 사들이고 국가 기관의 양심을 통째로 매수하는 재벌 기업의 불법 행위와, 가난한 자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에 전혀 응답이 없는 불의한 정부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홀연히 망하는 운명이 엄습한다는 것이다.

삼성 숭배 마법 깨울 예언자적 사명자

삼성 숭배의 마법에서 국민을 깨워야 할 사명자로서의 예언자적 지식인의 분발을 기대하며 장 폴 사르트르(<지식인을 위한 변명>)와 에드워드 사이드(<권력과 지식인>)에 따르면, 지식인의 핵심 조건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거부하는 비판 정신이다. 특히 사이드는 지성인은 언제나 자신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분명하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절대적으로 권력에 흡수 고용되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하며, 어떤 권력이나 권위라도 그들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 만큼 독립적이고 비판적으로 행동할 것을 주장한다.

   
 
 

▲ 김회권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사이드는 지성인들은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적·인종적·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며, 보편적 진리를 확산하기 위하여 특정 인간들을 특권적으로 우대하는 안이한 확신들을 초월하기 위해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의 사명을 수행할 용기는 인간 스스로에게서 연원될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을 경험한 지식인들만이 이런 의미의 고독한 그러나 보편적인 지식인의 기개를 획득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점차로 기업체, 국가 기관, 정당 등의 권력에 고용된 유기적인 지식인들로 가득 차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주장을 각종 논리와 통계와 전통적 지혜의 이름으로 주창하고 있다. 이런 지식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지식인의 구원은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영적 개안을 의미하며,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계급, 국가적 기업적 특권으로부터의 창조적 탈출을 통해 보편적인 진리를 설파하는 사명인으로 거듭나는 경험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 폐쇄적이고 자기 복무적인 삼성 같은 조직체들로 가득 차 있다. 당파적 이익을 초월하는 진리를 말하는 의인들이 씨가 말라가고 있다. 모두 다 정신적으로 삼성 지향적인 기생적인 인간형으로 변질되어 간다. 물신 숭배적 자기 조직 존숭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무한 증식적 자기 확장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지식인이 더없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런 예언자적 지식인은 삼성에서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국가 기관에서도, 다른 기업체들에서도, 그리고 세속화되어 짠맛을 잃어버린 교회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김회권 / <복음과상황> 발행인,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의 모습 

마가복음 10:17-22에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토지를 포기하는 교회이다. 대토지 소유를 포기한 자들만이 소속되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교회이다. 평균이상의 토지가치 소유를 포기하지 않고 교회로 들어 온 자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징계를 받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이 교회에 소속하고 싶을 경우에 심히 슬퍼하며 근심하게 된다. 그들은 토지를 택하든지 예수를 택하든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0:21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이러한 교회를 이루도록 뜻하셨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음을 사도행전 2:43-47은 보여준다. 이러한 교회에는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으며,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표적과 기사가 사라지고 있으며,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부동산 투기를 할 때 교회도 부동산 투기를 하였기 때문이며, 세상 사람들이 토지를 탐할 때, 교인들도 토지를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물을 좋아하고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가 하나님의 것임을 잊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주신 토지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레위기 25:23)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웃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토지 투기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교회가 받는 벌은 성령께서 떠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표적도 기사도 사랑도 기쁨도 없으며, 오직 불신과 부패와 탐욕과 투쟁이 남을 뿐이다. 세상은 이러한 교회를 미워하게 되고 그러한 교회는 결국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다.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는 세상과 같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른 교회이다. 세상이 토지를 탐할 때, 토지를 버리는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은 어둡지만 교회는 밝아야 한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희생적이어야 하며, 밤이 깊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별빛처럼 정결해야 한다. 교회는 밤 같은 세상 속에서 함께 밤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동화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의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동화된다면 세상이 교회로 나아올 이유를 잃게 될 것이다. 교회는 결코 세상처럼 되어선 안 된다. 잠시 살기 위해 세상처럼 된 교회는 영원히 죽게 될 것이며, 고난을 받더라도 세상처럼 되지 않은 교회는 잠시 죽는 것 같으나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한국의 미래 

하나님은 지계표를 옮겨가며 남의 토지를 점령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셨다(미가 2:2-4).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남의 토지를 빼앗는 자들이 받는 벌은 그들의 땅이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동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빼앗아 넓힌 이스라엘의 대토지소유주들의 땅은 결국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로마에 빼앗겼다. 결국 나라를 잃고 땅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빼앗긴 땅에는 자유도 풍요도 없이 슬픈 애가만 남을 뿐이다. 빼앗긴 땅에는 과연 봄이 오는가? 봄이 와도 그 봄은 동일한 봄이 아니고 가을이 와도 그것은 동일한 가을이 아니다. 봄은 정복자들을 위해 고단히 일해야 하는 봄이며 가을은 정복자들에게 열매를 빼앗기는 가을이다.

한국이 부동산 투기 세력에 의해 멍들고 있을 때,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땅인 간도와 우리 민족의 역사인 고구려사와 고조선사를 빼앗고 있었다. 이제 중국은 유사시에 북한의 토지 전체를 차지하려고 넘보고 있으며, 일본은 독도를 침탈하려고 애쓰고 있다. 한국에서 국민이 국토에 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할 때에는 미가서의 예언대로 한국은 주변 나라에 의하여 그 영토를 빼앗기는 벌을 받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공의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며 온 국민이 국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된다면, 이 땅을 노리는 나라들이 오히려 지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받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웃의 토지를 소유하려는 야욕을 실행에 옮기려는 자들에 관하여 구약성서는 선언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한 나라의 영토 경계를 지키는 일은 한 나라 속의 토지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 나라 속에 이웃의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투기 세력들이 많이 있으면 그 나라의 영토 경계표도 이웃 나라에 의해 옮겨질 위험에 처한다. 로마가 망한 것은 자영농들의 토지 경계표들이 무너지고 대토지소유제가 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가 각각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망한 것도 토지 경계표가 옮겨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토지법이 무시되고 대토지소유제가 도입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에도 토지경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많으면 대한민국의 영토 경계표도 옮겨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 자신의 땅을 한 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누가 한국의 영토를 수호하려고 외적과 싸우겠는가? 그러므로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는 법과, 토지가 전 국민에게 골고루 소유될 수 있는 정책은 조국의 영토 수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 나라의 국방력은 곧 그 나라의 경제력에 비례하며, 나라의 경제력은 산업의 경쟁력에 비례하여 발전한다. 그러나 자본이 산업기술에 투자되는 대신 토지에 투기되는 나라에는 산업의 경쟁력이 생길 수 없다. 그러한 나라는 거품으로 인해 경제규모가 성장하는 듯하지만 그 거품이 꺼지는 날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품 경제를 키우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국가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이다. 따라서 이것은 영토를 수호할 힘을 잃게 하는 매국적인 정책이다. 조국의 영토의 경계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지키려면 부동산 투기 세력으로부터 이 땅을 보호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따라서 모든 국민은 국가의 영토에 관한 평등한 주권을 가진다. 이러한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진 나라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계제국 로마도 그러했으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마저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멸망했다. 대한민국의 영토 주권을 무너뜨리려 하는 이웃나라의 야욕 앞에 우리가 저항력을 키우는 길은 조국의 영토의 주권을 모든 국민이 누리는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국민이 가질 수 있는 평균치 이상의 토지가치 소유에 대해서는 적절한 과세가 이루어져야 한다. 토지의 경계표를 옮긴 사람들이 세금으로 대가를 치러야 국가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고 영토를 수호하는 재원도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애국자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고귀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예수를 따르는 자의 신성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국민의 약 1%가 민유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전체가구의 반가량이 한 조각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은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소수의 부자들이 전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1세기 로마제국의 상황과 유사하며,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킨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과 유사하다. 이처럼 토지 경계표를 무너뜨린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 오시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토지와 부동산을 많이 가진 자들이 세금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시면 무어라 하실까?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부동산 투기에 열심인 자들을 보면 무어라 하실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토지가 필요하여 보유하려거든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지재원으로 사용하도록 하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맺음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을 환영할 사람들이 교회로 모일 수 있고, 이 예수의 말씀에 슬퍼하여 예수를 떠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면 한국교회에는 미래가 있다. 또한 그러한 교회가 있는 사회에도 미래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암담한 것은 한국 사회에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빛을 잃고 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암담하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지만 그 정신은 이미 죽지는 않았는가? 죽은 시체와 같이 되어버린 교회들이 썩는 냄새가 세상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많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반대하고 있다.

이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이 아니면 이러한 교회에는 소망이 없다. “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교회는 나사로처럼 살 것이지만, 이를 거역하는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게 될 것이다. 예수냐, 토지냐의 선택은 교회에게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이다. 기독교는 토지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예수 없이 살 수 없다.

재물과 권력을 얻었지만 예수를 버린 기독교의 앞날은 불을 본 듯 분명하다. 그것은 멸망이다. 그러한 교회는 오히려 세상에 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 그러나 교회의 멸망은 세상이 기뻐할 일이 아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무엇으로 세상을 비추고 무엇으로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할 것인가? 구한말과 비슷한 시기를 맞이한 지금 이 민족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그 복음을 체화한 참된 교회가 필요하다. 그러한 교회들이 하나둘 늘어나지 않고 돈과 성장과 권력만을 좋아하는 교회만 늘어난다면 한국 기독교와 이 민족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이 사회에 남은 마지막 소망이다.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신음하며 기다리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교회의 등장이다. 이러한 교회가 등장하여 세상을 비추기를 온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이 한국을 가득 채울 때 한국은 동방의 찬란한 등불로 깨어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공의로운 나라가 될 것이다.

토지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교회가 앞장서서 따를 때, 한국 사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디자인한 노예 없는 사회, 헨리 조지가 꿈꾸던 토지가치세 복지사회, 손문이 소망하던 평균지권 사회, 자신의 토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산상수훈의 삶을 살려고 한 톨스토이가 염원하던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강대국들이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애국가 가사처럼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우하시는 나라가 될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명기 28:1, 7).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통일시대 평화누리에서 4대강을 죽이는 4대강 사업의 실체를 알리기위한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올리는 동영상은 제1탄 라인강의 교훈 편입니다. 동영상은 계속해서 만들어져서 곧 2탄, 3탄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이 동영상을 보시고 많은 곳으로 퍼날라주시면 4대강 사업을 막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동영상을 보고 4대강 사업의 문제를 알 수 있도록 함께 동참해주세요!



고화질 영상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Here's a link to '라인강 교훈.WMV'

:

(예수와 토지법 14) 역사적 예수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3. 30. 11:5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전승자들은 전통을 보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승 과정에는 전승자의 경향성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전승자의 경향성은 전통에 담긴 내용에 적용된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고 전승자의 신학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17-22은 본래의 전승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일 수도 있고, 마가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여 재해석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0:17-22에 담겨진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과연 역사적 예수께서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주신 내용을 그대로 담은 것일까? 

설명가능성 원리로 본 마가복음 10:21-22 

사도행전 2:45과 4:34-35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5:1-11에는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숨기고 바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벌을 받아 죽는 이야기가 기록된다. 누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일부러 창작하였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누가는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 마가복음 10:22을 부에 관한 것으로 바꾸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23). 이처럼 토지에 관한 마가복음 본문을 부 일반에 관한 것으로 변경한 누가가 토지에 관한 이야기를 창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바치지 않아서 벌을 받아 죽게 되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어려움은 이 이야기의 진정성의 표지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일을 행한 이유는 그들이 믿고 따른 예수의 가르침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내용이 있을 때 설명이 잘된다. 그러므로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한 마가복음 10:21-22의 내용은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유대교에의 비유사성 

토지의 소유가 소수에게 편중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린 사회를 배경으로 볼 때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마가복음 10:21)은 매우 적합하다. 이것은 그 시대에 마땅히 선포되어야할 메시지였다. 또한 이러한 메시지는 당시 유대인 권력자들이 싫어할 메시지였으므로 예수께서 그를 죽일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당하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그의 죽음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이므로 역사적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가의 전승경향성에의 비유사성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난해구절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2:5-7은 예수께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 용서를 하심을 기록하며, 마가복음 6:48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물 위를 걷는 일을 행하심을 기록한다. 마가복음 14:62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될 것과 하늘 구름을 타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듣기엔 신성모독으로 들렸다(마가복음 14:64). 그러므로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 이야기를 창작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마가 10:18은 역사적 진정성 때문에 보존되어 왔고, 그리하여 마가도 이것을 보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22에 사용된 ‘끄떼마따’(토지)는 과연 마가가 창작한 흔적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누가복음의 ‘쁠루시오스’(부유한)가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는가? ‘끄떼마’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단지 4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1번 사용된다. 한편 형용사 ‘쁠루시오스’는 신약성서에서 28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2번 사용된다. 70인역(외경제외)에서는 ‘끄떼마’가 7번, ‘플루시오스’가 31번 사용된다. 그러므로 ‘끄떼마’는 ‘쁠루시오스’보다 덜 친숙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더 친숙한 ‘쁠루시오스’(부유한)를 ‘끄떼마’(토지)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혹시, ‘끄떼마’(토지)가 아니라 ‘크레마’(재물)이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을까? ‘크레마’라는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10번 사용되었고, 신약성서에서 6번 (마가복음에서는 1번)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7번, 신약성서에서 4번 사용된 단어인 ‘끄떼마’보다는 더 친숙한 단어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크레마’를 일부러 상대적으로 덜 친숙한 ‘끄떼마’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마가가 10:22을 창작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만일 창작하였다면 마가는 그가 다른 곳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끄떼마’보다는 9번이나 사용한 ‘아그로스’(전토)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공관복음서 전승경향성에서 비유사성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예수는 “왜 나를 선하다고 부르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답한다(18절). 예수의 신성을 믿은 초대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일부러 만들어 내었을 리는 없다. 초대 교회의 전승 경향성은 마태복음에 반영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평행구절(19:17)에서 “왜 나에게 선함에 관하여 말하느냐? 오직 한분이 선한 분이시다.”라고 표현을 바꿈으로써 예수를 선하다고 부른 것을 부정하는 마가복음의 표현을 피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마태복음의 저자도 고치고 싶어 한 마가복음 10:18의 내용과 표현을 창작하였을 리 없다.

마가복음 10:19의 ‘사취하지 말라’는 마태복음(19:19)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절(18:20)에서 생략된다. 이것은 이것이 십계명에 속한 계명이 아니므로 십계명에 속한 계명들을 언급하는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일부러 십계명 목록의 중간에 십계명 중에 하나가 아닌 ‘사취하지 말라’를 추가하였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1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곧 이어 그 사람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지적되고(21절), 그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근심하여 떠나감이 묘사된다(22절). 결국 이렇게 행할 사람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때 예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의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져 생략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는 기록을 일부러 창작하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마가복음 10:21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네가 온전하려고 한다면”이라고 바꾼다.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는 마가복음의 신학이 너무 과격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고 믿고(마태복음 5:17) 이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5:19) 마태복음 저자에게마저도 과격하다고 여겨진 예수의 가르침이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마가복음 10:22도 전승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기보다는 역사적 진정성에 토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검증된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의 일치 

마가복음 10:17-22에 나타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토지제도를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면모이므로 이러한 면모에 일치하는 (많은 토지를 가진 자는 토지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는) 마가복음 10:21의 예수의 가르침도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0:9은 창세기 2:24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데,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10:9의 내용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증거는 우선 이 말씀이 많은 독립 자료들에 의해 지원받는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0-11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나누이지 말고, - 나누일지라도 재혼하지 않고 지내거나 남편과 재결합하라, - 남편은 아내를 이혼시키지 말라.” 이 말씀은 이혼을 금하는 점에서 이혼(법적 이혼) 내지 별거(사실상의 이혼)를 금하는 마가복음 10:9(“하나님께서 합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게 하라”)의 말씀의 내용과 일치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는 마가복음이 기록되기 전이었을 것이므로 고린도전서의 증거는 마가복음 10:9-12의 진정성을 지지한다.

예수 당시 유대교에 이혼을 완전히 금한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의 말씀은 당시 유대교에 의하여 쉽게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예수께서 미움을 받아 박해를 당할 수 있게 된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7:15은 믿지 않는 자가 이혼하고자 하면 이혼하라고 권하는데, 이것은 이방 기독교인의 경우에 배우자가 불신자일 경우 이혼이 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마가복음 10:9의 말씀이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9은 초기의 이방 기독교의 산물일 수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므로 마가복음 10:9은 마가의 창작이 아닐 것이다.

마태복음 19:9은 마가복음 10:11에 “음행으로 인하지 않고는”이라는 예외 조항을 추가한다. 이것은 마가복음 10:11이 너무 엄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배우자가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상황에서도 이혼을 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너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저자는 이러한 예외 조항을 추가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매우 철저한 유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마태복음에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마가복음 10:11이 마가나 초대 교회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가복음 10:9은 배우자를 이혼시키고 재혼한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부합한다. 세례 요한이 이러한 결합을 비판하고 죽임을 당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셨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마가복음 10:9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주어질 수 있는 말씀이다. 또한, 마가복음 10:9은 남편이 아내를 마음껏 이혼시킬 수 있었던 (불공평한) 당시 상황 속에서 주어질 수 있었던 말씀이다. 그러므로 당시 역사적 배경도 이 말씀의 진정성을 지원한다.

구약의 정신을 철저히 적용하는 마가복음 10:9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마가복음 10:17-22도 나타난 구약이 토지법의 정신이 철저하게 적용하므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회 배경에의 적합성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에서는 전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하는 귀족들이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통치 영역의 절반 이상의 땅을 소유하였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예를 들어 하르솜(Charson)의 아들 엘르아잘은 아버지로부터 1,000 개의 마을들을 상속받았다고 한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사도행전 4:36-37은 레위인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사도들에게 내어놓는다고 기록한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구약의 토지법이 어겨지고 있던 당시 사회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사람과 같이 십계명을 지키되 토지법은 어기는 유대인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미 토지의 균형적인 소유가 깨어진 사회 속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는 구약성서의 토지법을 어기고 있는 것에 관한 가책을 갖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가책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마가복음 10:20, 22은 당시 배경에 잘 들어맞는다.

맺음말 

마가복음 10:17-22은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 즉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본문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한 증거들을 검토해 볼 때, 이것은 마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예수를 믿든지 역사적 예수를 믿든지 예수를 따르고자 하면 토지에 관한 무한한 권리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를 포기하기는커녕 부동산에 대한 세금마저 내기 싫어하는 모습은 예수를 따르는 바른 모습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중에는 대토지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토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일 수 없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장로 대통령이 믿는 건 돈의 신 '맘몬'
 난, 4대강에 생명의 십자가 세운다"
[인터뷰] <강은 살아있다> 펴낸 최병성 탐사보도 전문 시민기자
10.03.08 10:25 ㅣ최종 업데이트 10.03.08 10:55 김병기 (minifat) / 권우성 (kws21) / 홍현진 (hong698)
  
최병성 목사.
ⓒ 권우성
최병성

그는 지난 2년여간 틈만 나면 배낭을 메고 4대강으로 향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그리고 전국 곳곳에 산재한 저수지 등 물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번 출장 때마다 3000여컷 이상의 사진을 찍어 그의 외장하드엔 10만여컷 이상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의 커다란 책장도 강과 물의 생태계에 대한 책과 논문 등으로 빼곡이 채워져 있다. 최근 그는 <강은 살아있다>(황소걸음 출간)를 펴냈다. 발로 쓴 대한민국 4대강 사업 재앙 보고서다. 

전업기자도 흉내내기 힘든 4대강 사업에 대한 탐사보도 시민저널리즘의 전형이다. 최병성(47) 시민기자는 목사다. '장로 대통령'은 4대강에 불도저와 굴착기를 총집결시키고 진두지휘하고 있는데, '목사 시민기자'는 온몸을 던져서 이를 막고 있다. 아이러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지난 4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최 목사는 "이명박 대통령이 믿고 있는 것은 돈의 신인 맘몬"이라고 규정했다. 왜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가 펴낸 263쪽의 책 속에 그 이유가 담겨있다.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대국민 사기극"  

"이명박 대통령이 꿈꾸는 4대강의 비전은 여의도와 잠실 앞의 한강입니다. 손도 발도 담글 수 없고 사람과 강이 단절된 그 곳. 얼마전 <조선일보> 기사도 언급했듯이 4급수입니다. 성직자가 순화된 말을 써야하지만, 사실 '똥물'입니다." 

최 목사에게 4대강 사업을 한마디로 규정해달라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더 험한 표현이 되돌아왔다. 

"국토와 국민, 그리고 생명에 대한 국가권력의 테러입니다. 그럼에도 혈세를 써가면서 강을 살린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니,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대국민 사기극입니다." 

그는 이어 "이명박 장로님이 펼쳐보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되어 있고 이 땅의 생명을 보존하고 유전케하라는 게 기독교에서 믿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생명을 단절시키고 파괴하는 4대강 사업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맘몬의 뜻"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외국의 강 살리기와 '이명박표 강살리기'의 차이점을 물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을 통해 기후 이상에 대비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이 맞다면 독일 등 선진국은 이미 150년, 200년 전에 강을 콘크리트 수로로 만들어 기후 이상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100여 년이 지나면서 지하수가 고갈되고 홍수가 났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수로를 다 뜯어내고 모래톱과 여울을 만들어 원래의 강으로 복원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이명박표 강살리기는 1-2세기 전에 선진국에서 했던 실패를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녹색 뉴딜'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며 강살리기 사업을 통해 일자리도 만들고 지역경제도 살리겠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는 이같은 주장에 대해서도 "당장 들통날 거짓말"이라고 단언했다.  

"4대강 사업 현장에 가보세요. 굴착기과 중장비만 있습니다. 또 사업비 22조 원 중 5조7천억 원이 준설비용입니다. 요즘 삽으로 준설하는 데가 있습니까? 파이프 흡입 기계로 준설하는 데, 사람이 없어도 그냥 돌아갑니다.  

최근 한강 이포교 공사현장에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경비가 쫓아왔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다리에 경비를 세워놓고 사진을 못 찍게하더라고요. 불편한 진실을 가리려고 고용한 경비, 이게 4대강 사업이 창출한 일자리입니다." 

그는 이어 "부자감세로 인해 지자체 교부금이 몇조 원씩 삭감돼 올 7-8월 이후로는 공무원들 월급 줄 돈도 없는 상황인데 4대강 사업에만 세금을 쏟아붓고 있다"면서 "지역의 중장비업체들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덤핑을 해서 참여하고 있고, 큰 몫을 챙기는 곳은 턴키방식으로 수주한 서울의 대형 건설업체들뿐"이라고 말했다. 

전체 하천의 1% 공사로 홍수 예방하겠다고?  

  
최병성 목사.
ⓒ 권우성
최병성

그는 또한 "4대강 마스터플랜에 적시된 사라지는 농경지, 그러니까 강변의 채소 경작지와 보(사실상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는 농경지가 5천7백만평에 달한다"면서 "여기에서 쫓겨난 많은 농민들이 무직자나 거리의 부랑자가 될 것이고, 이로인해 채소류 가격이 폭등하면 국민들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는 4대강 사업을 통해 물부족을 해결하고 홍수를 예방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 목사는 이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일축했다.  

"정부 논리를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4대강 사업 공사구간은 634km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하천의 길이는 64만km입니다. 전체 하천의 1% 구간을 공사해서 홍수를 예방하겠다는 것은 말장난입니다. 게다가 공사구간인 4대강의 경우 홍수가 나지 않습니다. 홍수는 지천과 샛강에서 납니다.  

우리나라 하천법상 최상위계획인 수자원종합장기계획에는 '대한민국은 더 이상 물부족 국가가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치수장과 정수장의 가동률은 설계 용량의 50% 미만입니다. 그만큼 물이 남아돌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이 부족한 곳은 수도공급률이 40% 미만인 섬지역과 산간지역인데, 4대강에 모아놓은 물을 섬과 산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최 목사가 가장 크게 우려하는 바는 식수대란이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녹색은 녹조류가 똥처럼 떠다니는 죽음의 녹색"이라면서 '공사중'과 '공사완료 후'의 식수 대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최근 함안보 등에서 발견된 오니토에 대해 정부는 수질오염이 아니기에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준설의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1차적으로 파이프로 강바닥을 준설할 때 탁수가 일어납니다. 대대적으로 준설을 하면 오니토에서 나온 치명적인 성분들이 강물로 퍼져가겠지요.  

또 우리나라 수중 준설의 경우 모래만 뽑아내는 게 아닙니다. 70% 이상이 물입니다. 오니토와 섞인 중금속 물을 침사지에서 거른 뒤에 다시 강물로 내보내야 하는데 낙동강만해도 4.4억톤을 준설합니다. 이명박 정권 3년, 아니 그 이후 정권 5년동안에도 그 많은 모래를 침전시킬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 공사 현장을 갔는 데, 침전지가 5평 미만이에요. 황당한 일이지요. 금강쪽 현장에 갔는데 거기에는 침사지도 없어요. 이게 현실입니다." 

10조 원 들여서 수질개선하고 2조8천억 들여 식수원 다른 데로 옮긴다? 

그는 이어 "정부는 수량이 풍부하면 물이 희석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물이 깨끗해진다고 말하고 있는데, 물이 정체되면 수질이 악화될 뿐 아니라 대청댐의 경우 비가 온 뒤에 녹조가 가장 심하다"면서 "농경지에서 흘러든 농약과 도로 등에서의 오염 물질이 다 강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낙동강에 10조 원 이상을 들여서 수질을 개선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2조8천억 원을 들여서 낙동강의 식수원을 남강댐과 지리산댐으로 옮기겠다고 말하고 있다"면서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강이 살아나는데 왜 취수원을 옮겨야하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국민이 낸 혈세 22조원 만 쏟아부으면 4대강 정비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업비 22조원에 포함되지 않는 돈으로 밝혀진 것을 한번 얘기해볼까요? 소수력 발전 2200억 원이 제외됐습니다. 또 농지보상비를 1조2천억 원으로 잡았는데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4대강 준설로 인해 강바닥에 묻혀있는 도시가스 관로를 이전해야 합니다. 다리밑까지 준설을 해야 하는데 다리가 흔들리니까 안전공사를 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부산역에 갔더니 부스를 만들고 4대강 사업 홍보책자를 주고 있더군요." 

그는 "미국 플로리다의 키시미강(Kissimmee River)은 10억불을 들여서 운하로 만들었는 데 지금은 100억불을 들여서 원상복구하고 있다"면서 "키시미강 복원을 한 자료에는 10억불의 10배인 100억불을 들여서 공사를 하지만 원래의 자연으로 되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고 적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살아있는 4대강을 22조 원을 들여서 죽인다면 후손들이 이를 복원하는 데에는 220조원을 들여도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을 영영 복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최 목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람들에게 기억이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됐으면 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인데 인터넷에서는 '쥐XX'라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권위를 상실한 대통령, 목사로서 안타깝습니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이 대통령 스스로 일개 건설사의 사장이 아니라 전국민의 소통을 책임지고 있는 국민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4대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제가 나서서라도 기념비를 세워드리겠습니다." 

최 목사가 지난 2년간 발품을 팔면서 강에 대한 애정을 녹여낸 책의 출판기념회는 오후 6시30분에 서울 중구 정동의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 홀에서 열린다.   

"생태박물관 지켜낼 수만 있다면…"

쓰레기 시멘트 박사가 '4대강 박사'된 까닭

 

  
▲ 최병성 목사의 책 표지
강은 살아있다

"이 책 한권으로 열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최병성 목사의 말이다. 그는 "지금 많은 사람들은 4대강 사업에 대해 막연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이 책을 보면 구체적으로 엄청난 재앙임을 알 수 있다"면서 "이 책을 이웃에게 선물하는 것 자체가 4대강 사업을 막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보면 작심하고 책 장사에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계산은 저잣거리의 셈법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99년도에 서강 싸움할 때 배웠어요. 누군가 한 사람으로 인해서 살아있는 생태박물관인 강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손해는 중요한 게 아니지요. 강의 보존가치는 죽어있을 때보다 수천배, 수만배가 넘는겁니다. 저는 그걸 10년전에 터득했습니다." 

하지만 목사인 그 역시 생활인이다. 없는 살림에 돈과 시간을 거의 4대강 싸움에 바치는 남편의 모습이 부인에게는 곱지않게 보일 수도 있다. 

"이틀, 삼일에 해야 할 일을 하루에 몰아서 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열심히 부인을 섬기고 있습니다. 집사람은 돈에 대해 초탈해 있습니다. 내가 청량리 588에서 걸인들이랑 함께 사는 모습에 반해서 결혼을 했으니까요." 

그는 "어떤 사람들은 왜 목사가 교회에 있지 않고 4대강 싸움을 벌이고 있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전 이게 목사가 해야할 일이라고 대답한다"면서 "지금의 활동은 4대강 곳곳에 십자가를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년에는 교회에 가고 싶은데 만날 돈만 내라는 교회가 싫은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한편 그는 일반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쓰레기 시멘트 박사'로 유명하다. 그는 블로거 활동을 통해 폐타이어와 철 쓰레기 등 산업 폐기물을 섞어 만든 '쓰레기 시멘트'의 유해성을 알렸고, 시멘트 업계가 권리침해 신고를 하면서 블로그 글이 삭제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최병성 목사의 게시물을 삭제한 조치는 잘못된 것"이라며 최 목사의 손을 들어줬다. 방통심의위의 게시물 삭제가 행정 행위라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다.


:

재물에 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토지’로 번역하면 문맥에 맞는다는 것은 ‘재산’대신 ‘토지’를 번역어로 선택하기 위해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재산” 또는 “재물”이라는 의미도 마가복음 10:22의 문맥에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여 더 문맥에 잘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즉, ‘토지’란 번역을 선택하는 충분한 이유는 다른 번역 가능성들보다 ‘토지’란 번역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이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한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을 때, 강조점은 “팔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쪽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과 관련된다. 율법의 정신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은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명기 15:9-11).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러한 구약의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명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진 것을 팔라”는 예수의 말씀 앞에 부자가 항의 한 마디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율법이 허용하는 유동성 재산까지 처분하라고 하시는 것을 너무하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자는 왜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 하는지 예수께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가 갑자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그에게 단지 유동성 재산만 많았을 경우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많이 가진 것이 토지였을 때에는 그의 행동이 잘 설명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것은 명백하게 율법에 위배되기에 토지를 팔아서 처분하고 이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지적을 원칙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의 명령을 실천하느냐 못하느냐 인데 그는 토지에 관련된 율법의 요구를 적용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23절처럼 재물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까? 

그런데, 23절에는 재물, 부, 돈 등을 뜻하는 ‘크레마’의 복수형 ‘크레마따’가 등장한다. 23절 문맥도 ‘크레마따’가 토지를 뜻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크레마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반응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24절). 이로 미루어 보아 ‘크레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하는 구약의 토지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놀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3절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이 되려면 ‘크레마따’가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가리켜야 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 있었다.

물론 23절부터 재물에 관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토대하여 22절까지에서 다루어진 내용도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예수는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에게 그의 재물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을 수도 있다. 그가 재물을 포기하기 힘들어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보고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지적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읽을 경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으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일까? 물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율법 정신을 염두에 둘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28-29절에서 토지와 가옥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가고 유동성 재산이 이 목록에서 빠져 있는 것은 23절의 ‘재물’(크레마따)마저도 특별히 가옥과 토지를 염두에 둔 것이며, 25절의 ‘부자’도 토지를 많이 가진 부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과연 토지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을까? 

예수께 나아온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20절). 이러한 대답을 듣고 예수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구약성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법인 토지법을 어길 수 있었을까?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지킨다고 한 것은 18-19절에 언급된 계명들이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속여 취하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다. 이 사람은 이 계명들에 토지법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하였을 수도 있다.

토지법을 어긴 것은 도둑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토지법을 어겼다면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토지법을 어긴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을 수 있다.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대토지 소유가 도둑질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은 문맥상 앞에서 언급한 계명 또는 구약성서에 담긴 율법을 실천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킬 때 토지법까지도 잘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신 것(21절)도 그가 율법을 모두 잘 지켰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을 지킴에 헌신한 정도를 일단 인정해 주시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헌신을 하도록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에게만 사랑을 표현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 외에는 흠 없이 율법을 지킨 이 사람에게 얼마든지 사랑을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이다. 또한 사랑을 표현하시면서도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우도록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다.  

마가복음 10:17-31의 흐름 속에서의 토지와 재물 

마가복음 10:22에는 ‘끄떼마따’가 사용되고 23절에는 ‘크레마따’가 사용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는 토지를 다른 하나는 재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은 과연 본문을 일관성 있게 읽는 것인가? 22절의 ‘끄떼마따’를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하려면 이러한 의문도 해소하여야 한다.

23절에 ‘크레마따’를 사용한 것은 마가복음의 서사의 흐름 속에서 예기하지 못한 전환을 통해 놀라움을 자아내는 문학적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영생을 얻는 길을 율법, 특히 십계명에 관련시킨 후 십계명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부자에게 토지법을 지켜야 함을 지적하여 그를 놀라게 한다. 이어서 토지만이 아니라 부 일반의 소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토지법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제자들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침내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는 절망으로 제자들을 몰아간다(26절). 이 절망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에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이러한 절망 후에 반전이 도래한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7절). 이러한 흐름 속에서 22절은 “토지”에 관하여 23절은 “재물”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일관성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극적 효과를 낳는 문학적 기법으로 볼 수 있다.

28-31절의 말씀은 27절에 도입된 반전에 이어지는 위로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신다(27절). 그리하여 반드시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전토를 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29-30절). 여기서 재물 일반에 관한 가르침은 가옥, 전토 등의 부동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가족이 추가적으로 다루어진다. 복음에 반응하여 가옥이나 전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어놓고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마가복음의 독자들 중에는 이미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물한다. 

왜 좀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다면, 마가는 왜 더 명확한 용어대신에 이처럼 애매한 용어를 선택하였을까?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였다면 마가는 22절에서 얼마든지 30절에서처럼 ‘아그루스’(전토)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끄떼마따’처럼 토지나 재물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 애매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가가 이 단어를 “재물”이란 뜻으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만 ‘끄떼마따’는 우리에게 명확하지 않을 뿐이며, 마가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언제나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 그러므로 1세기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단어는 명확하게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볼 수 있다.

22절에 ‘아그루스’대신 ‘끄떼마따’가 쓰인 것은 23절에 등장하는 ‘크레마따’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운율을 위한 고려였을 수도 있고, 토지를 다루는 22절에서 재물을 다루는 23절로 매끄럽게 넘어가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토지를 가리키려면 22절에서 다른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는 설명은 이 단어가 “재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설명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재물”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이라, 문맥에 맞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따라 ‘끄떼마따’를 “재물”보다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예수와 토지법12) 마가복음 10:22의 주해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2. 23. 16:5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친숙한 주해 

번역 성경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주석서를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보다는 “재물”을 접하게 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마가복음 10:22에 쓰인 헬라어 단어 ‘끄떼마따’가 “재산”이나 “재물”의 뜻을 가진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건드리(R. H. Gundry)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그 어원인 ‘끄따오마이’(획득하다) 동사에 관련시켜 “획득물”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획득물’은 물론 문맥에 따라 토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좀더 넓은 의미로 쓰여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재산’이란 단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네덜란드의 판 이어설(B. M. F. van Iersel)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도나휴와 해링턴(J. R. Donahue & D. J. Harrington)이나 에반스(C. A. Evans)의 이해도 동일하다. 후커(M. D. Hooker)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부”(wealth)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독일학자 그닐카(J. Gnilka)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소유”란 뜻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사본 필사자들이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듯이 성경주해자들도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많은 주해자들이 마가복음 10:22를 해석할 때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누가복음 18:23의 영향일 수 있다. 

“그 사람은 끄떼마따를 많이 소유하였으므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가복음 10:22, 사역).

그 사람은 큰 부자였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슬퍼하였다”(누가복음 18:23, 사역). 

사본학에서 친숙한 읽기가 원래의 읽기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듯이 주석학에서도 친숙한 주해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왜곡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본문을 주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서 본문을 주해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안경으로 본문을 보며 본문을 자신에게 친숙한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해자들의 경향을 벗어나려면 덜 친숙한 주해를 선택해야 한다. 많은 주해자들이 동의하는 친숙한 주해를 따르는 것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일 수는 있으나 학문적으로 바르지는 않다. 본문 주해에 있어서도 진리의 길은 좁아서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원문을 복원할 때 기계적으로 사본의 수를 따라가는 것이 위험하듯이 본문을 주해할 때 무조건 학자들의 수를 따라가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대신 독자들의 반응을 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덜 친숙한 주해 

주석가들 가운데에는 동료 주석가들이 빠져 있는 경향성을 벗어나 낯선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제안을 엉뚱한 소수 의견이라고 간주하지 말고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성경 주석가들은 언제나 주관적 경향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본문 연구를 통하여 독자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경향성을 극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반적인 경향성을 벗어나는 주해는 낯선 제안이며 한동안 소수 의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주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해를 하면서 주관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지만, 주관성을 많이 극복한 주해는 본문의 의미를 많이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없다면 주해 작업은 애초부터 무의미할 것이다. 개인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자들의 주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빠지는 공통적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창조적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에드워즈(J. R. Edwards)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또는 “소유지”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지적하면서 이 단어가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밝히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우트레흐트 대학 교수였던 발욘(J. M. S. Baljon)은 이미 20세기 초에 ‘끄떼마따’가 재물을 가리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이 단어가 특히 소유지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런데 테일러(V. Taylor)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소유지”를 가리키며, 따라서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그 사람은 지주임이 밝혀진다고 주장하였다. 레인(W. L. Lane)과 스웨테(H. B. Swete)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고 간주한다. 독일에서 페쉬(R. Pesch)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소유를 가리킨다고 간주하였고, 만(C. S. Mann)도 이 구절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중에서 특히 토지와 관련된다고 본다. 성서번역학자들 중에는 브랫처(R. G. Bratcher)와 나이다(E. A. Nida)가 ‘끄떼마따’가 일반적으로는 재산을, 특수하게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문화권에 따라 농장’이나 ‘가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해는 흔히 접하게 되는 주해들과 달리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해는 번역 성경의 영향을 받거나 통설의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학문적인 통찰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비유사한 예수의 모습을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영향에 의하며 채색된 모습이라고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예수의 모습이 전승된 이유는 그것이 진짜 예수의 모습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 원리는 주석학에도 다음과 같이 응용될 수 있다. 즉 주석학자들의 경향성에 상반된 주해는 성경저자의 의도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문맥을 통한 검증 

위에 제시한 주석학자들의 제안은 참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므로 참된 본문의 뜻을 드러내는 주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은 증거의 제시 없이 단지 주장된 것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과연 “토지”를 뜻할 수 있는 지는 단지 주장될 것이 아니라 검증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뜻은 그 문맥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할 때 문맥에 더욱 잘 맞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주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리는 문맥이다. 주해는 문맥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 나가는 학문적 작업이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가 가진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1절). 즉, 그가 슬퍼한 이유는 포기해야 하는 끄떼마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문맥에서 ‘끄떼마따’는 토지일 수도 있고 다른 유동성 재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팔아야만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토지나 집일 가능성이 높다. 유동성 재산, 즉 돈이나 보물이라면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의미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께서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명령할 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신 데에 있다(21절).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임이 19-20절을 살펴보면 곧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기에, 부족한 것은 율법 지킴과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끄떼마따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이유는 율법 준수와 관련되어 있다.

도대체 끄떼마따가 무엇이기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게 되는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율법은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을 따른 사람은 토지를 많이 가질 수 없었다. 소유지의 경계를 나타내는 토지 경계표를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자신의 토지와 이웃의 토지의 경계표를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이웃의 토지를 영구적으로 구입할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넓힐 수 없음을 뜻한다. 레위기의 토지법에 의하면 토지를 영구 매매하면 안 되고(레위기 25:23), 희년 때까지 임대할 수 있을 뿐이다(레위기 25:14-16, 28). 희년이 되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토지 경계표는 옮겨지지 않게 된다.

대토지 소유를 금하는 율법 조항은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레위기 25:23).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배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민수기 32장; 여호수아 13장 이하) 마땅히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땅을 많이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아합 왕의 땅과 교환하기를 거부한 것은(열왕기상 21:3) 이러한 토지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나봇의 시대에도 토지법은 나봇처럼 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었다. 아합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나봇의 거절 앞에 어찌할 수 없어 근심한 것은(열왕기상 21:4) 그 역시 토지법을 쉽사리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 여인 이세벨이나 이 토지법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토지법이 점점 더 어겨지게 되었고, 드디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마저도 토지법을 지키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토지법을 따르면 토지를 많이 가지게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많이” 가짐으로써 율법을 어기게 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토지였을 것이다. 조상이 율법을 어기고 취한 토지를 물려받아 소유하고 있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해도 그가 그러한 토지를 돌려줄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9절에서 버림의 목록에 ‘전토,’ ‘집’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지 않는 증거이다. 29-30절은 가옥이나 전토, 가족을 포기한 자가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21절은 가진 것들을 포기한 자가 하늘에서 보화를 받는다고 약속한다. 따라서 29-30절은 21절과 평행된다.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며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가질 것이다(21절, 사역).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 전토를 버린 자들 중에 ...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아무도 없다(29-30절, 사역). 

그리하여 21절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해진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이 언급하는 가옥, 가족, 전토에 평행된다. 그러므로 21절의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의 목록 중에서 팔 수 있는 가옥과 전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2절에서 그 부자에게 끄떼마따가 많았다고 할 때 그것은 가옥 내지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끄떼마따’는 용례상 가옥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문맥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게 한다. 

맺음말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하여 재물이나 재산이라고 해석되지만,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러한 소수의 의견은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므로 오히려 주해자들이 흔히 빠지는 경향성을 극복하고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주해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문맥을 통하여 검증된다.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문맥에 맞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한국교회, 한기총과 함께 죽을 것인가, 개혁하여 함께 살 것인가?”

한국기독교는 1960년대 이후 30여 년간 계속된 개발독재시대에 급성장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시대의 물량주의와 성장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도 그러한 물량주의 성장의 한계와 폐해를 깊이 인식하여 보다 인간적인 사회, 지속가능한 성장을 모색하였으나, 슬프게도 지금 그러한 시도들이 수구기득권세력에 의해 속속 좌초되는 뼈아픈 경험을 하고 있다. 같은 기독교인 입장에서 가슴 아프지만 그 중심에 한국기독교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지금 한국교회가 끝을 찾기 힘들만큼 추락하고 있다.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2004년 한국인 종교의식’에 따르면 비종교인들이 느끼는 각 종교에 대한 호감도는 불교(37.4%), 가톨릭(17%)인데 비하여 개신교는 12. 3%에 불과했다. 또 2005년 ‘한국교회미래를준비하는모임’ 조사에서 종교 지도자의 자질우수성을 묻는 질문 역시 개신교(12.0%) 천주교(31.8%) 불교(21.2%)로, 개신교 종교지도자에 대한 비종교인의 불신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2009년 7월에도 <시사저널>이 실시한 한국인 직업인 신뢰도 조사에 의하면, 총 33개 직업군 가운데 목사는 25위를 기록해 비교직종인 신부(11위), 승려(18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하위군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무엇보다 도덕성과 신뢰성이 높아야할 종교와 그 지도자들이 신뢰를 얻지 못할 때 얻게 되는 당연한 결과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돈도 많고, 큰 교회들도 우뚝우뚝 솟아 있으나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신뢰를 잃고 민심이 떠난 종교는 곧 허물어져버릴 건물일 뿐이다(마 23:37~24:2).

한기총은 삼일절에도 버젓이 성조기를 들고 친미를 소리 높여 외치는 집회의 주관하고, 종교교육을 내세워 사학기득권을 지키려 앞장섰고, 기독교계의 이명박 후보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교묘한 지원을 일삼고, 작년 촛불정국에서 국민들의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굳건한 지지를 표명하는 등 대통령 탈선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랜드 사태와 같은 비정규직 문제나 용산참사 같은 인권유린 상황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는 양면성과 권력지향성을 보여 왔다.

그럴 때마다 한국교회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역사의식도 없고, 시대정신도 모르는 종교기득권자들처럼 조롱을 받아야만 했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기득권의 종교인 것처럼 매도되고, 예수가 부자와 권력자들의 옹호자인 것처럼 욕하는 소리들을 듣기란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가?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별명은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지키시는 분(신 10:18, 14:29, 시 146:9, 렘 22:7)이며, 예수의 별명은 보잘 것 없는 자들의 친구(눅 7:34)였다. 그래서 처음 교회는 약한 자, 가난한 자들의 독무대였다(행 4:32~35). 그들 자신이 힘도, 돈도, 배경도 없는 자들이었기에 그런 사람들의 사정을 대변할 수 있었다(약 2:5, 6).

보수나 진보, 좌파나 우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수구와 기득권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며, 사회의 죄악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한기총 개혁에 나선다. 한기총의 잘못된 행태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기독단체 및 시민들이 힘을 합쳐 ‘한기총 개혁을 위한 기독인네트워크’(가칭)를 만들었고, 지난 12월 28일 “한기총의 신학적/역사적 실체를 묻다”는 제목으로 한기총 진단토론회를 가졌다. 또 다음 날인 12월 29일에는 한기총 대표회장 선출이 열리는 곳 앞에서 “한기총 개혁을 열망하는 기독시민 공동기도회”를 열었다.

우리는 한기총과 새로 선출된 이광선 대표회장 앞으로 한기총의 개혁을 위한 공개서한과 공개입장을 밝혔다. 공개입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기총은 이유여하를 가리지 말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것이 바로 믿는 이들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마 14:16, 신 15:7~11)을 받아, 어떤 정치적 상황변화와 관계없이 대북 인도적 지원만큼은 당장 재개하도록 정부에 건의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2. 한기총은 억울한 자의 한 맺힌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창 4:10, 출 2: 23)을 본받아, 용산참사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나설 것과 구속자를 선처하도록 호소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3. 한기총은 땅도 안식하게 하라하신 하나님의 명령(레 25:4)을 본받아, 온 국토를 무분별하게 파헤치는 잘못된 대형 국책사업들을 재검토하고 정부가 창조질서 보존의 정책을 펼 수 있도록 건의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4. 한기총은 소유권보다 생존권이 우선이라는 성경의 기본정신(신 24:6, 10~22)을 명심하여, 정부, 사회와 교회가 이윤창출과 무조건적 성장보다 고용보장과 확대, 사회복지예산 증액, 가난한 환자의 무상치료에 나서도록 앞장 설 의지가 있으십니까? 

5. 한기총은 적어도 하나님이 무상으로 베푸신 땅의 혜택만큼은 누구나 고루고루 누리도록 하신 지엄한 명령(레 25:23~28, 전 5:9)을 따라, 부동산 투기를 엄단하고 관련세제를 강화하도록 건의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6. 한기총은 과도한 일과 혹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는 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의 해방의지(출 2:23~25, 신 5:14)를 존중하여, 노동자들이 최소한 주1회는 반드시 쉬도록 명문화하고, 성별, 민족, 학력 등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적극 노력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7. 한기총은 하나님의 공직을 맡는데 돈이 오가는 게 얼마나 큰 죄악인지(신 16:19) 통감하여, 한기총 및 교단, 교회 임직선거에 고질적인 금품, 청탁과 대가 등이 오가지 않도록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8. 한기총은 교회가 혈통이나 인간적 친소관계가 아닌 바른 고백(마 16:17~19)과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행 1:21~26)를 통해 세워졌음을 인식하여, 인본주의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교회(목회)세습을 근절할 방안을 지금이라도 마련하시겠습니까? 

2009년 12월 28일 

한기총 개혁을 위한 기독인네트워크 

한국교회는 지금 비대해진 수구기득권 권력기구 한기총과 함께 몰락하느냐, 아니면 잘못된 한기총의 탈선을 막고 예수의 가르침으로 거듭나 함께 살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이 한기총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잘,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바로 우리가 이 겨울에 나선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