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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선교, '방법'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
언덕교회 선교부, 독서 토론·후원 단체 초청 강좌·선교 심포지엄
(이명구 기자)

보통의 한국교회는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서 노력한다. '총동원 주일'이나 '전도 대잔치'라고 이름 붙여진 행사가 봄과 가을마다 있다. 전도 활동을 지원하는 세미나를 하는 교회도 많다.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큰 차이는 없다. 교단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몇 백만 명을 넘기자는 배가 운동을 교단마다 하고 있다.

언덕교회(박득훈 전임목사)는 어린이까지 합쳐도 200명이 채 안 되는 교회다. 교회 크기에 비해서 언덕교회는 유명한 편이다. 작년 MBC '100분 토론'에 박득훈 목사가 패널로 출연한 이후 기독교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언덕교회 홈페이지는 방문자가 폭주해 다운되기도 했다. 방송을 보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이 교회를 방문하고 있다.

언덕교회가 10월 25일 선교 심포지엄을 열었다.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한 '전도 폭발'이나 '전도 전략 세미나' 같이 전략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전도 자체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하고, 인식을 전환하려는 취지였다.

언덕교회 선교부장 이용관 집사는 "막상 '선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는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등식을 생각하기 쉽다. 특히 언덕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은 이런 생각 때문에 언덕교회는 선교에 관심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며, 이런 분들에게 선교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 언덕교회 선교부가 '선교하면 생각나는 것'을 조사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이를 위해서 언덕교회 선교부는 1년에 2회 선교에 관한 책을 선정해 독서 토론회를 한다. 올해 상반기에는 엔도 슈샤쿠의 <침묵>을 함께 읽었고, 후반기에는 짐 월리스의 <회심>을 읽고 공부할 예정이다. 또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청년아카데미,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현대기독교아카데미 등 언덕교회에서 후원하는 사회 선교 단체들이 직접 교회를 찾아와 자기 단체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번 선교 심포지엄도 선교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기 위해서 마련한 것이다.

언덕교회에서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부서는 선교부와 사회복지부이다. 선교부는 특히 사회 선교와 한국교회 현안에 대해 공부하며 교인들의 선교에 대한 인식 전환에 주력한다. 사회복지부는 교회 내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지역 봉사 및 후원에 집중하고 있다.

교회 재정의 상당 부분을 외부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작년까지는 교회 예산의 20~25% 정도를 선교와 사회 복지에 사용했지만, 올해에는 30%까지 늘리기로 결의하고 이를 지켜오고 있다. 매월 마지막 주일 예배를 한 후에 화곡동 교남어린이집, 마포 재가노인복지센터 등을 찾아가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 선교 심포지엄에 참석한 언덕교회 교인들이 집중해서 경청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우리 교회의 선교를 다시 생각한다"
언덕교회, 선교 심포지엄 열고 교회의 선교 활동 고민

"전도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선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지금 하고 있는 방법이 틀린 건 아닐까" 사회자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언덕교회 선교 심포지움은 시작됐다.

언덕교회 교인들은 한국교회의 전도 활동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을 반성하고, 언덕교회의 선교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언덕교회 선교부는 심포지움을 준비하면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128명의 교인들이 설문에 응답했다. 교인들은 언덕교회에 출석하기 전에는 '노방전도'와 '개인 전도', '중보 기도' 등을 위주로 선교 활동을 했지만, 언덕교회에 출석한 이후에는 '기독교 시민 단체 지원'과 '사회봉사 단체 지원 활동', '성경 공부', '공의로운 정치를 위한 참여와 관심' 등의 선교 활동을 주로 했다고 답했다. 또 교인들은 언덕교회가 '해외 선교'나 '복음 전도'보다는 '사회참여'와 '구제·봉사'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선교부는 "교인들의 선교에 대한 인식이 언덕교회에 와서 변했다"고 분석했다.

   
 
  ▲ 박득훈 목사는 복음 전도와 사회 갱신의 선교 개념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한 후 박득훈 담임목사가 '성경이 말하는 선교'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박 목사는 복음 전도를 강조한 좁은 의미의 선교와 사회적 갱신을 강조한 넓은 의미의 선교의 개념을 구분하고, 이 두 가지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선교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 양진일 목사는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교"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이어서 양진일 목사(가향공동체), 송강호 교육원장(개척자들), 정정훈 공동대표(연구 집단 카이로스)가 발제를 했다. 발제자들은 한국교회의 선교 활동에 문제가 있다며 선교에 대한 인식 전환을 주장했다.

양진일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는 이유가 "복음을 살아내는 신앙인과 교회의 부재 때문이다"고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속의 가치에 지배받거나 굴복하지 않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내야 한다. 1차적 선교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교다"고 했다.

   
 
  ▲ 송강호 교육원장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 이웃들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평화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선교"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송강호 교육원장은 "묻지도 않고 가입을 요구하는 보험처럼 복음을 전하는 전도 방식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거품화 현상을 보여준다. 협박하고 겁주는 전도가 아니라, 자유롭게 판단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전해야 한다"고 했다. 또 "예수는 약하고 가난한 자, 억눌린 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역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 이웃들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평화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선교다"고 했다.

   
 
  ▲ 정정훈 공동대표는 "복음은 폭력의 자리가 아니라 약한 자의 자리에 있을 때 제 모습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정정훈 공동대표는 "비기독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변화시켜야 할 존재로만 그들을 대하고 있다. 이미 주류 세력이 되어버린 기독교가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논리로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했다. 이어 "1세기 초대교인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이었다. '만물의 찌꺼기'라고 자신을 고백한 바울처럼 복음은 폭력을 휘두르는 힘의 자리가 아니라, 약한 자의 자리에 있을 때 제 모습을 찾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포기할 수 없다면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발제가 끝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언덕교회 교인 김동규 씨는 발제자들이 선교에 대해 접근할 때 기독교 내부의 자정과 기독교 외부와의 관계로 나누고 있다고 지적하며, 선교에 대한 문제 해결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발제자들은 한국교회의 선교 활동이 내부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으면, 외부적인 모든 사역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박득훈 목사는 "복음 때문에 자기 자신이 변한다면 당연히 외부의 변화를 위해 힘쓸 것이다. 진정 예수를 알고 만났다면, 우리가 밖으로 어떻게 안 나갈 수 있겠는가"라며 선교는 교회의 자기 갱신부터 시작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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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를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은 20일 베트남 국영TV와의 인터뷰에서 "도시 중심의 한강 개발을 통해 서울을 친환경적 도시로 발전시켰던 경험을 토대로 하노이의 홍강도 개발하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게 친환경 한강개발? - 이대통령이 칭찬한 지금의 한강 모습입니다. 과연 친환경인가요? 

                달리는 수상보트에 치어 죽은 물고기가  곳곳에 널려있는 한강 - 이게 친환경이요, 아름다운 한강일까요?

 이대통령은 한강개발을 통해 서울이 친환경도시로 발전하였다고 하였는데, 한강 개발을 통해 서울이 친환경 도시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그 어느 학자로부터 들은바 없습니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한강을 준설하고 콘크리트 제방을 쌓은 전두환 대통령의 한강 개발 사업은 ‘친환경’이 아니라 ‘환경 파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경제발전과 한강 개발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한강 예찬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6월29일 이명박 대통령은 제18차 라디오 연설에서 아래와 같이 한강이 아름답다며 4대강 사업이란 지금의 한강처럼 만드는 것이란 뜻을 밝혔습니다.  

““21C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강을 이대로 둘 수 결코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 만일 한강을 그냥 나두었다면 과연 오늘의 아름다운 한강이 되었을까요?

잠실과 김포에 보를 세우고 수량을 늘리고 오염원을 차단하고 강 주변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한강이 된 것입니다. 요즘의 한강은 모래무지를 비롯해 온갖 물고기들이 잡힌다고 하지 않습니까?”  

 과연 한강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국민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까지 한강을 예찬하는 대통령을 보며, 오늘은 한강의 현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고기가 알도 낳을 수 없는 수로에 불과한 죽음의 한강

 우리는 물이 넘실대는 한강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건 우리의 오해입니다. 한강은 현재, ‘강’이라고 하기 보다는 유람선이 다니는 ‘수로’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한강은 물고기가 알을 낳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강 곳곳에 ‘물고기 인공 산란장’이라는 현수막이 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장면을 보고 여기서 무슨 물고기 실험을 하는가 라고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강은 물고기가 알을 낳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알을 낳을 곳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물고기가 알을 낳도록 만들어준 인공 산란장 모습입니다.
지금의 한강은 물고기가 알도 낳을 수 없는 죽음의 수로에 불과할뿐입니다. 이게 친환경? 아닙니다.

물고기들은 물이 얕은 여울 근처 자갈과 모래, 그리고 수초에 산란을 합니다. 물고기 중에 천연기념물인 어름치는 여울이 시작하는 바로 위 지점의 얕은 강바닥에 알을 낳고 입으로 자갈을 쌓습니다. 이를 산란탑이라 부릅니다. 수심이 깊은 곳을 좋아하는 잉어나 붕어도 수심이 얕은 곳의 자라는 수초에 알을 낳습니다. 그래서 산란철이 되면 한강에 살던 잉어 떼들이 수심이 얕은 안양천과 중랑천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친구가 천연기념물 어름치입니다.  

어름치는 여울이 시작되는 얕은 지점에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준설을 하여 모래와 자갈이 사라지고, 여울이 파괴되면 어름치는 산란을 못합니다.

그런데 준설하는 4대강 개발이 친환경이라고요? 환경파괴일뿐입니다.   

강의 모래를 깊이 준설하여 물로 가득 채운 한강. 물은 많아져 유람선은 다니겠지만 물고기들이 알도 낳을 수 없는 죽음의 수로일 뿐입니다.   

이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요즘의 한강은 모래무지를 비롯해 온갖 물고기들이 잡힌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모래무지’란 물고기가 어떤 물고기일까요? ‘모래무지’란 이름 그대로 모래가 있는 곳에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모래가 없는 곳은 제대로 살 수가 없지요. 모래무지는 모래를 한 움큼 쭈~욱 빨아들여 그 안에 있는 유기물질들을 먹고 모래를 뱉어내는 녀석입니다. 그러니 모래가 없다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이 친구가 그 유명한 모래무지입니다. 보는바와 같이 모래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4대강사업은 모래를 짜~악 파내가는 작업이죠? 모래무지와 물고기들은 살 수 있을까요?

4대강 사업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환경 재앙임을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강 개발은 강에 배를 띄우기 위해 모래를 다 파버린 사업이었습니다. 준설 이후 물고기의 종류가 줄어들고 한강의 생태계가 급속히 나빠졌다는 연구보고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요즘 한강에 모래무지가 보이는 이유는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의 한강 개발 이후 20여년의 시간이 흘러 한강 곳곳에 모래가 쌓이기 시작했고, 홍수 시에 상류에서 떠내려 온 모래무지와 물고기들이 새롭게 형성된 모래밭에서 겨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울시도 인정한 ‘준설은 생태 파괴 재앙’에 불과 

서울시가 직접 한강의 생태계를 조사하여 발간한 ‘한강에서 만나는 새와 물고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극찬한 한강 개발이 얼마나 심각한 생태계 파괴 재앙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울시가 발간한 한강의 새와 물고기 조사 화보집입니다.

 서울시가 이 책을 사서 보라고 권장하는 문서입니다. 분명히 서울시에서 만든 것을 증명합니다.

 서울시는 강의 모래를 준설하면 물고기가 알을 낳을 수 없고, 새들도 둥지 틀 곳이 없어지고, 수질도 나빠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4대강사업의 핵심은 바로 준설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환경파괴죠.  

“.... 강바닥에서 흙을 퍼내 강변에 쌓고 콘크리트를 바르는 개발 방식은 심각한 생태계 파괴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물고기들은 알을 낳을 곳이 없어지고 새들도 둥지를 틀 곳이 없어진 거죠. 수질도 점점 나빠지고.... 그래서 최근에는 한강변을 자연 그대로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준설을 통한 한강 개발을 통해 마치 생태계가 살아나고 수질도 좋아졌다고 말하였고, 그래서 4대강을 준설하고 보를 세워 한강처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위 책에서 보듯, 강바닥을 준설하게 되면 생태계가 망가지고 수질도 악화됨이 정답입니다. 준설하고 보를 세우는 4대강사업은 생명의 강을 파괴하는 환경 재앙에 불과함을 서울시 한강 화보집이 명백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대강사업은 ‘강 살리기’가 아니라 ‘강 죽이기’임이 100% 확실합니다.   

한강 르네상스와 4대강 사업  

이명박 대통령이 칭찬하였던 전두환 대통령의 한강 개발이 우리에게 남겨준 위대한 현장은 곳곳에 시멘트 제방이 무너져가고, 준설로 인해 수심이 깊어져 그 누구도 한강에 발을 담그기 어려운 현실이 바로 오늘의 한강입니다.  

서울시가 발간한  ‘한강에서 만나는 새와 물고기’라는 책에서 “최근에는 한강변을 자연 그대로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와 같이, 요즘 서울시가 한강 르네상스 사업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칭찬한 한강개발의 역작인 생태파괴의 한 부분인 강변 콘크리트 제방을 뜯어내고 원래의 모래밭으로 되돌리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모래밭으로 형성된 원래의 강의 모습이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한강 르네상스 사업으로 한강변 콘크리트를 뜯어내고 모래와 갈대밭으로 강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4대강사업은? 그냥 강을 나두는 것이 더 좋다는 이야기이지요.  

강변 콘크리트를 뜯어내고 많은 돈을 들여 원래의 강변 모래밭을 살려내려는 서울시의 노력에서 그동안의 한강 개발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서울시가 수천억 원의 비용을 들여가며 한강 복원을 노력하고 있지만, 한번 훼손한 자연은 인간이 아무리 돈을 들여 복구한다 할지라도 쉽게 회복되지 못합니다. 강이란 원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발도 담글 수 없는 강을 만드는 4대강 사업  

한강 르네상스 준공식 현장에 옛날 한강 사진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이곳에서 놀라운 사진을 발견하였습니다.  한 여름 많은 사람들이 한강 모래밭에 나와 수영을 즐기고 있는 장면들입니다. 준설하는 한강 개발 이전의 한강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정말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른들로부터 한강에 모래밭이 아름다웠다는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이토록 굉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게 바로 진짜 한강!!!

한강 르네상스 준공식에서 만난 옛날 한강 사진입니다. 이미 작고하신 한영수님의 작품사진입니다.

준설하기 전의 한강은 바로 이렇게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개발이란 이름으로 준설을 한 한강은 더 이상 그 누구도 발조차 담글 수 없는 죽음의 강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래는 위 사진과는 정 반대인 지금의 한강 사진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극찬한 한강 개발은 물을 가득 채운 수로를 만들기는 했지만, 바로 이렇게 그 누구도 강에 발을 담글 수 없게 하는 환경파괴에 불과 했던 것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 - 그 누구도 발을 담글 수 없는 무너지는 한강입니다.

이걸 친환경이라고 주장하는 대통령의 시각은 과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도 이 한강이 친환경으로 보이시나요?   

온 시민이 물놀이를 즐기는 옛날 한강과 그 누구도 발을 담글 수 없는 위험한 한강 중 과연 어느 강이 더 좋은 강으로 보이시나요?  우리 아이들이 맘 놓고 물에 손과 발을 담글 수 있는 강, 바로 이게 살아있는 강의 진짜 모습입니다. 옛날 한강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정부는 4대강 사업으로 수영하기 좋은 물을 만들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뻥입니다. 4대강 강바닥을 준설하고 보를 세우면 물은 썩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부의 주장처럼 4대강사업으로 수영할 만큼 물이 맑아진다고 가정할지라도 아무도 수영할 수 없습니다. 준설하는 4대강사업으로 인해 모든 강이 수심 6m의 깊은 호수로 변했는데, 어떻게 누가 목숨을 담보로 깊은 물에서 수영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4대강사업이 완성되면 4대강은 곳곳에 ‘수영금지’ 팻말이 붙어있게 될 것입니다.  

 낙동강 하구에 세워진 수영금지 팻말입니다.

4대강사업으로 준설하게되면 4대강엔 전부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수영하기 좋은물을 만든다? 참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웃기는 뻥!입니다.  

올해 4대강 현장을 돌아보며 한강과 낙동강 금강의 곳곳에서 물놀이하는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4대강사업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4대강사업으로 수영하기 좋은 물을 만든다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낙동강에서 만난 물놀이하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입니다. 모래밭엔 철새발자국이 선명합니다.

낙동강은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4대강사업은 이 살아있는 강을 죽이는 것입니다.

4대강사업을 하게되면 4대강에선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볼 수 없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몇십년뒤, 지금의 한강르네상스처럼 엄청난 혈세를 들여 다시 복원한다고 난리치겠지요.

4대강을 그냥 나두는 것 - 그게바로 강을 살리는 일입니다.  

요즘 서울시가 수천억을 들여 한강 르네상스란 이름으로 한강의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모래강변을 살려내려 애쓰고 있지만, 강변 놀이터를 만들 수 있을 뿐입니다. 한강에서 사라진 금빛 모래밭이 지금 낙동강엔 곳곳에 펼쳐있습니다. 바로 이게 4대강 사업을 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만약 정부가 4대강사업으로 준설을 하게 되면 4대강은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이 손을 담글 수도 없고, 물고기도 알을 낳을 수 없는 죽음의 수로로 전락하게 될 뿐입니다.  
 
    진짜 4대강 살리기만을 하십시오. 
 

정부는 한강 개발로 서울의 홍수가 사라졌다며 4대강의 준설과 보를 합리화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강 준설로 인해 서울의 홍수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80년대 5공화국의 한강 개발 이후에도 최근까지 서울 저지대의 홍수는 매년 여름 연례행사였음을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최근에야 저지대 배수 시설이 완비되어 홍수를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한강 준설과 홍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한강의 생태계를 죽이는 준설을 하지 않고도 서울의 홍수 예방 방법은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강변 낮은 지대의 제방과 배수 시설을 통해 서울의 홍수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국 도시에서 하천을 준설하지 않고 제방만으로도 홍수를 대비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또 정부는 준설하고 보를 세워 물이 맑아졌다고 국민을 속이고 있으나, 하수종말처리장 등을 통해 오염원을 제거함으로써 하천이 맑아진 것입니다. 국민을 기만하는 이 정부의 거짓말은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합니다.   

 지방의 하수종말처리장 모습입니다.

지금은 시골도 이렇게 하수종말처리장을 통해 오수를 정화하고 있습니다.

한강이 맑아진 것은 준설과 보를 만든 한강개발 때문이 아니라,

오수를 차단하는 하수종말처리장의 보급 때문입니다.  

4대강 죽이기를 추진하는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홍수를 핑계 삼아 4대강 죽이기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 그대로 ‘4대강 살리기’만을 추진하십시오. 강바닥을 준설하고 보를 세우는 것은 명백히 ‘4대강 죽이기’입니다. 준설과 보 건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샛강의 오염원을 차단하고, 생태하천을 만드는 일만을 추진하십시오. 그러면 국가 경제도 살고 4대강도 더 맑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한강에서 달리는 수상보트에 치어 죽어 파리만 득실대는 누치의 처참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있습니다.  4대강사업으로 준설하고 보를 세워 생명의 강을 놀이터로 만들면 4대강의 현실이 바로 이 모습이겠지요.   

준설하고 보를 세운 한강은 생명의 강이 아니라 유람선이 떠다니는 수로에 불과합니다.
물고기가 알도 낳을 수 없는 한강 개발을 모델 삼은 4대강 사업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지금의 4대강 사업은 분명히 생명의 강 죽이기입니다.








        최병성목사 
          환경운동가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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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토지법9)사본학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0. 19. 15: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과 사본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라는 헬라어를 담고 있으며 이것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모든 사본들이 일치하여 이 헬라어 단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저술하여 출판한 이후에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을 필사를 하여 전수할 때, 모든 필사자들이 마가복음의 원문을 있는 그대로 필사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필사자들에 의하여 마가복음 본문이 필사되어 전수되는 가운데 어떤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의 본문을 변경하였다. 그렇게 변경된 본문은 또 다른 필사자들에 의하여 필사되어 전수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 사본들을 비교하여 원래의 본문을 복원하는 작업을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하는데, 편의상 이를 사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많은 사본들에 ‘끄떼마따 뽈라,’ 즉 ‘넓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 담겨 있지만, 서방 사본들에는 다른 표현들이 발견된다.

(1) 끄떼마따 뽈라 나머지 사본들

(2) 뽈라 크레마따베자사본, 고대 라틴어 역본

(3)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 클레멘트

베자 사본과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서방 사본들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대 라틴어 역본들이 로마제국의 서방 지역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은 칼빈의 제자인 베자가 소장하고 있다가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 기증한 사본으로서 지금 켐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에는 마가복음 10:22에서 ‘뽈라 크레마따’ 또는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많은 재산’이라고 번역된다. ‘크레마따’는 ‘크레마’의 복수형이며, ‘크레마’는 ‘재산,’ ‘부,’ ‘돈’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37에서 ‘크레마’는 토지를 팔고 받은 돈을 가리킨다.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값’이라고 번역하였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다니엘 11:28도 ‘크레마’가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많은 ‘크레마’를 가지고 그의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가 아니라 돈이나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

만일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가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면 이것은 ‘토지’로 번역되기보다는 ‘재산’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끄떼마따’가 원래 마가복음 10:22에 담겨 있지 않았다면 ‘토지’라는 번역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에서 ‘재산’이 옳은 번역인지 ‘토지’가 옳은 번역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와 대부분의 사본들에 담긴 ‘끄떼마따’ 중에서 어느 것이 마가복음이 원래 가진 표현인지 검토하여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마가복음 인용에는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많은 재산과 전토)라고 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 중에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은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을 가진다. 이것은 위의 (3)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이것은 아마도 (2)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2)의 ‘크레마따’는 토지를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필사자들은 ‘까이 아그루스’(~와 전토)를 추가하여 토지가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3)은 (2)의 ‘뽈라 크레마따’(많은 재산)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그것의 기원인 (2)를 지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서방 사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본들은 (1) 즉 ‘끄떼마따 뽈라’를 지원한다. 더구나 고대 라틴어 역본들 중에 일부(f, q)는 마가복음 10:22에서 divitias(부) multas(큰)라는 표현을 가지는데 이것은 (1)의 어순에 일치하므로 (1)을 지원한다. 많은 사본들에서 (1)이 발견된다고 (1)이 원래 마가복음 10:22에 있던 표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1)을 담은 많은 사본들 중에는 매우 오래된(4 세기) 사본이면서 우수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들이 있으므로 (1)이 원래의 것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본들도 언제나 원문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증거를 좀더 수집해야 한다.

마태복음 19:22의 영향인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인가?

마태복음 19:22에는 마가복음 10:22와 유사한 본문이 발견된다. 동일한 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인데, 마태복음 19:22도 ‘끄떼마따 뽈라’란 표현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1) 즉 ‘끄떼마따 뽈라’가 마태복음의 영향에 의하여 발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한 변화를 사본학자들은 조화(harmoniz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원래부터 마가복음에 일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마가복음을 마태복음 저자가 자료로 사용하였다는 가설(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가능성을 더더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설에 입각하면 마태복음의 ‘끄떼마따 뽈라’는 마가복음의 ‘끄떼마따 뽈라’에서 그대로 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마가복음과 본래부터 일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많은 곳에서 문자적 일치를 보이므로 이곳에서도 그러한 일치가 본래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이 마태복음 19:22의 표현과 동일한 표현이라는 이유만으로 (1)은 마태복음의 영향을 받아 조화된 것이라고 단정하여 이것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 아니라고 판단할 개연성이 없다. 더구나 (2)의 ‘크레마따’가 바로 다음 절(막 10:23)에 나오는 ‘크레마따’의 영향으로 동일하게 변화된 결과일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1)이 마태복음 10:22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은 (2)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다.

마가복음의 문체가 주는 증거

성경의 각권은 저자에 따라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책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사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듯이 성경도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다. 마가복음이 가지는 독특한 문체도 성경의 인성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은 ‘뽈라’(많은)라는 단어가 명사를 꾸며주기 위해 사용될 경우에 언제나 예외 없이 그것이 수식하는 명사 뒤에 위치시킨다(1:34; 4:2; 6:13; 7:4, 13).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세 가지 표현들 중에서 이러한 마가복음의 문체에 일치하는 표현은 (1)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성경 독자의 경향성

(1)이 마가복음 10:22에 담긴 원래적 표현이라면 이것은 ‘넓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번역 성경들이 한결같이 ‘많은 재산’에 해당하는 번역만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가복음 10:22의 번역자들은 (1)을 원문으로 택하였어도 그 의미를 (2)처럼 이해하여 번역하였다. (1)을 원문으로 택한 네스틀레-알란트 27판이나 UBS 4판의 본문을 눈앞에 두고 번역자들이 이를 (2)처럼 번역한 것은 (1)을 담은 원본이나 사본을 눈앞에 두고 필사자들이 이것을 (2)로 고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필사자들의 경향성과 번역자들의 경향성은 서로 일치하기도 한다.

필사자나 번역자나 모두 성경 독자의 일종이므로 이들은 서로 유사한 경향성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어떠한 경향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대의 필사자들의 경향성을 살펴봄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필사자들이 어떤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변경시켰는가를 관찰해 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그 구절을 어떻게 곡해할 수 있는 지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추측을 토대로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성을 조심하며 본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비유사성의 원리와 성경 본문 이해

독자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을 저자의 의도대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고의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곡해하기도 한다.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의미를 곡해하는 독자들의 경향성을 극복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독자들의 경향성은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필사자들의 본문 변경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일단 독자들의 경향성이 파악되면 “비유사성 원리”를 통해서 본문의 본래적 의미 파악을 시도할 수 있다. “비유사성 원리”(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되는 방법론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 발생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원리이다. 초대교회의 전승 경향에 유사한 예수 전승의 경우에는 그 역사적 진정성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초대교회는 그 경향성에 유사한 예수의 말씀을 왜곡함 없이 전승하였을 것이지만, 그 경향성에 유사하지 않은 말씀은 때로 그 경향성에 맞게 소화하여 전승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가능성이지만 이 가능성 때문에 초대교회의 경향성에 유사한 전승들은 그 진정성이 의심될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경향성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들은 초대교회가 지어낸 전승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비일치하는)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론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비유사성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는 성경의 독자들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비유사한 해석을 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독자들의 주관성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다. 비유사성의 원리에 따르면, 사본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마가복음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마가복음 해석은 독자의 주관성에 의해 왜곡된 본문 해석일 가능성이 비교적 낮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마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지는 마가복음의 용례와 문맥에 맞는지 검토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비유사성 원리는 성경 이해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지만 이해된 내용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방법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필사자들이 “토지”를 가리킬 수 있는 ‘끄떼마따’를 “재물”을 뜻하는 ‘크레마따’로 바꾸어 읽은 것은 오늘날의 성경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경향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고한다. 비유사성 원리를 따라 이러한 경향성을 조심하면서 그 경향성에 역행하여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읽으면 이것은 “토지”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본문 이해가 과연 정확한지는 용례와 문맥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9. 18. 18:3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거짓신앙에서 벗어나기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도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누가복음 3:7-14


제가 몇 분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이상림씨, 윤용현씨, 양회성씨, 이성수씨, 한대성씨. 들어본 적 있습니까? 전재숙씨, 유명숙씨, 김영덕씨, 권명숙씨, 신숙자씨.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앞서 불러드린 분들은 용산 참사로 숨진 철거민들입니다. 나중에 불러드린 분들은 그 분들의 아내죠. 그들은 지금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남편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이름이 여러분의 신앙과 나의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이해하는 성서한국운동은 바로 그런 질문에 바른 해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한국운동은 사회의 모든 영역이 성서의 토대위에 아름답게 세워진 한국을 의미합니다. 성서한국의 비전은 일제시대 양정 고등학교 교사였던 김교신 선생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은 그에게 조선이었죠. 하여 그는 성서조선의 비전을 품고 1927년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저는 창간사의 마지막 대목을 읽으면 여전히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성서조선>창간사 중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는 1942년에 폐간 당했습니다. 그러나 성서한국이란 화두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서한국을 이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회심’입니다. 회심의 깊은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나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1:15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역사 한 가운데로 뚫고 들어왔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는 아름다운 실재가 강력한 힘으로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것입니다. 회심이란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맞닥뜨리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된 삶으로부터 총체적으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펼쳐주신, 열어주신 새로운 삶의 세계로 과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죠. 두 가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아직 믿음은 없는 것 같지만 회개하는 순간에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했던 나의 삶에 대한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 없이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세례요한의 설교를 통해 회개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두 가지 질문을 갖고 생각하겠습니다. 누가 회개가 필요한가?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1.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7-9)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그런 사람에게만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왔던 사람, 성경을 잘 아는 사람, 주일 예배를 잘 지키는 사람, 헌금도 적당히 잘 내는 사람, 저처럼 설교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가장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본문 말씀 7절에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어떻게 세례를 받고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한테 “독사의 자식들아!” 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세례요한은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진정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심판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례요한이 세례를 준다. 그 세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길래 세례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왜 그들은 형식적으로 세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죠. 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8) 회개에 알 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거죠.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안전하다. 완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적당히 종교적 형식만 잘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나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오랫동안 찌들어 있었습니다. 무늬만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삶의 내용은 없었습니다. 짝퉁 물건을 명품 가방에 집어넣은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니 그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회개가 필요합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기준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삽니다. 겉으로 볼 때 무척 경건하지요. 성경읽기, 신앙서적 읽기, 기도하기, 헌금 및 십일조 드리기, 주일성수하기, 전도하기 등. 아주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신앙의 알맹이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돌들로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회개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렇게 쉽게 세상을 향해 ‘불신지옥’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말은 우리들 자신에게 먼저 돌려야 할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얼마 전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서 직업군 33개를 놓고 신뢰도 조사를 했습니다. 1등이 어떤 직업일까요? 소방관입니다. 2등은 간호사, 3등은 환경미화원입니다. 개신교 목사는 몇 등쯤 될까요? 25등입니다. 신부님은 11등, 승려는 18등. 꼴찌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언젠가 지하철 전동차에서 ‘어느 소방관의 기도’라는 짤막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A. W. Linn이라는 소방관이 직접 지은 기도시라고 하더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가 업무의 부름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시여/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나이와 상관없이/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너무 늦기 전에/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언제나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어/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저는 제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기 원하며/최선을 다해/저의 모든 이웃을 지키며/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길 원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저의 목숨을 잃어야만 한다면/부디 당신의 보호의 손길로/저의 자녀들과 아내를 축복하여 주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삶으로 실천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목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목사가 그럴 것이라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방관을 더 신뢰합니다. 그래서 소방관의 직업 신뢰도가 1등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회개가 필요합니까, 누가 먼저 회개하길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실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전도할 때 이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뜨뜻미지근합니다. 돌같이 굳어졌습니다. 느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아픔에 대한 눈물이 없습니다. 억울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도 같이 울어줄 줄을 모릅니다. 한참 시국선언이 진행될 때였습니다. 지난 6월 9일 젊은 작가들의 선언문에 담긴 한 대목이 제 가슴을 때렸습니다.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교회가 먼저 해야 할 말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가냘픈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교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주님이 쫓겨나서 너무 속상해서 ‘내가 다시 너와 있고 싶다. 들어가고 싶다. 문을 열어다오. 제발 문 좀 열어다오. 내가 너희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 불붙는 사랑을, 진리의 말씀을 너희들과 나누고 싶다. 너희들과 식사를 하듯 가깝게 교통하면서 나의 나라를 이 세상에 펼쳐가고 싶다. 문을 좀 열어다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누가 필요한 것입니까? 회개는 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우리 한국교회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에 대해 ‘95%는 참 괜찮은데 5%가 문제다’ 라고 변호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리석은 변명입니다. 잘못된 5%가 바로 교회지도층이라면 그들을 지도층으로 세운 95%도 역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좋은 점이 많이 있어보여도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이건 아니다’ 짚으신 것이 있으면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니고 있던 점검표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점검표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스스로 성적을 매겼습니다. ‘A+++입니다! 절기 잘 지키잖아요. 두 손 벌려 기도하잖아요. 십일조 잘 하잖아요. 절기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모이는데요!’ 그러나 하나님의 점검표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 가운데 있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진실로 안아주고 있느냐. 과부를 돌아봐주고 있느냐. 고아를 돌아봐주고 있느냐. 땅 잃은 사람을 돌아봐주고 있느냐. 외국에서 흘러들어와 힘겹게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감싸주고 있느냐?’ 우리가 스스로 만든 점검표에 따른 점수가 아무리 높은들 하나님 앞에선 휴지조각일 뿐입니다. 변명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입을 닫고 무릎을 꿇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일까요?

2. 진정한 회개(8, 10-14)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진정한 회개란 회개에 걸맞은 좋은 열매를 잘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점검표에 맞지 않는 삶을 구체적으로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도(道)를 따르는 사람들’로 불렸는데요(행 9:2; 19:9, 23; 22:4; 24:14, 22). 이는 기독교를 ‘道’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짐 월리스가 <회심>이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뭔가 살아가는 법이 우리와는 다르구나!’ 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경우 사람들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놀라운 삶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을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짐 월리스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는 전도할 때 야박하게 전도할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이야, 믿고 살래, 안 믿고 죽을래. 왜 이렇게 협박하는 전도를 할까? 그것은 그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삶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전도는 초대 교회처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나! 멋지다. 그 비밀이 어디 있나,’ 묻고 싶어져야 합니다. 그때 ‘아, 내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얼마나 멋지고 감동적이겠습니까? 그러나 보여줄 감동적 삶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진 않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다보니 ‘안 믿으면 죽어! 지옥 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삶 전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회개하면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이고 수직적인 만남을 떠 올립니다. 이웃 문제, 사회문제는 부차적인 단계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첫 순간부터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의 빛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용산에서 5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살았는데 하나님,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잘 된 것입니까?’ 물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묻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세례요한이 요구하는 회개의 실례를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무리들의 예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의 준엄한 경고에 가슴이 찔린 무리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이에 그는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답합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내가 지닌 것 중 남는 것으로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한 벌을 나눠 주어 그와 같이 나도 한 벌로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김규항 씨는 <예수전>에서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이렇게 설파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이른바 ‘나눔’에 대한 우리의 알량하고 가식적인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부모들은 제 아이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욕망을 ‘부자가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우라’는 식으로 우회하여 표현하곤 하는 것이다. …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지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 (109-110 쪽)

그러므로 그가 잘 말한 것처럼 진정한 나눔이란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깊이 파고들어온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소비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기복신앙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석훈 씨는 <괴물의 탄생>에서 설날이 되면 서로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형편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인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한국경제의 위대한 선택이라고 부르고 싶고’ 그 말을 아예 ‘마음속에서 지우는 순간, 그것을 대전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들부터 앞장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사랑해야 합니까? 절대로 기독교가 금욕주의를 가르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이 그 유일한 이유입니다. 지구촌에는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이 15억에 이르는데, 먹는 물을 하루에 몇 번씩 길어 오느라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우리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세상은 냉혹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필요한 소비에 자원을 동원하는 만큼, 지구촌의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갈 자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부에 대한 태도만 바로 잡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짐 월리스가 <회심>에서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마 6:21)’ 는 예수님의 말씀을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보물도 있다’ 로 바꿔서 이해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올바른 곳에 있는 한, 우리가 얼마나 많이 쓰느냐 혹은 우리가 얼마나 축적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데 총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자발적 가난 혹은 복음적 가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누리는 부의 양을 주려 소박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진실로 하나님나라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사적재산권에 대한 왜곡된 사고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희년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까워서 혹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원주인에게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입니까, 어긴 것입니까? 어긴 것입니다. 우리는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너무 자본주의식으로 해석합니다. ‘내가 땀 흘려 번 것은 내 꺼야! 내가 스스로 내어 주기 전에 그것을 누구도 건드리면 절대 안 돼! 그건 도적질이야!’ 그러나 ‘무엇이 도적질인가’ 하는 것은, 중미의 경제학자이며 신학자인 힌켈러머트(F. J. Hinkelammert)가 잘 밝힌 것처럼, 특정 사회가 인간의 삶과 권리 그리고 사회에 대하여 어떤 이상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누스(R. Gnuse)도 잘 지적한 것처럼, 성경이 보장해주는 사적재산권이란 부를 무한대로 축적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일원은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원을 소유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 도덕성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별도의 차원 즉 인격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한 사회가 이런 저런 그럴 듯한 사유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도적질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희년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눅 4:16-21).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선포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런대 그 전통이 왜 사라졌습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격되어 세속권력을 얻게 된 데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이 없는데 내가 여유분의 먹을 것을 갖고 있으면 그것이 도적질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진실한 관심을 잃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는데 매몰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자본주의식 사적재산권을 지키는데 앞장서는 대표적인 세력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선 소비주의와 기복신앙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우리의 잘못된 의식과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나눔의 정신을 몸에 익혀 소박한 삶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보호하기 원하시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고 있는 세상의 불의한 제도를 변혁시켜나가는 일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맺음말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며 조심해야할 두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멋진 길을 가고 있다’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우상입니다. 부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로 이 함정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제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직접 찾아가셨고, 부자들은 자기에게 찾아오게 하셨다’ 성경의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를 신랄하게 책망하시고 냉혹한 요구를 하셨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회개의 길은 걸어가면서 이 주님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함정은 절망입니다. 노동가요 중 ‘길 그 끝에 서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섰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 온 것처럼/ 눈앞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먼저 간 사람들의 빛을 따라 온 것처럼/이제 우리가 스스로 빛이 될 차례야…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새길 만한 노래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종종 길 끝에 서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기억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바른 길을 걸어온 증거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야말로 바로 길 끝에 서 계셨던 분임을 기억합시다. 그 순간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 끝에서 기꺼이 죽음의 잔을 삼키셨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셨음을 아셨습니다. 죽음으로 우리 앞에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 다 끝난 곳에서 정호승이 노래한 것처럼 스스로 ‘봄 길’이 되셨습니다. 이 주님을 늘 믿고 사모하면서 힘들다고 결코 뒤돌아서지 맙시다. 변절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서 꼭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부둥켜안고 울고 웃고 춤출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박득훈 목사 : 언덕교회 담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공동대표 
                 통일시대평화누리 공동대표

* 이 글은 2009년 성서한국전국대회 저녁집회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요약 : 오수경간사(학원복음화협의회)

:

(예수와 토지법8)성경번역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9. 18. 11:08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글 번역 성경들과 ‘토지’

마가복음 10:22은 ‘토지,’ ‘소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담고 있다. 이 단어가 ‘토지’나 ‘소유지’를 뜻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명하신 이유를 깨달으며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끄떼마’의 복수형)를 토지를 뜻하는 것으로 읽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끄떼마’가 기본적으로 토지를 뜻하는 단어라는 것은 간단한 헬라어 사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읽을 때에는 ‘끄떼마’가 토지를 뜻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성경번역자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을 뜻하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마가복음 10:22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후에 헬라어로 마가복음 10:22을 읽어도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의 뜻으로 이해하게 된다. 성경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지는 번역 성경들이 오히려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한글 번역성경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개정).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그러나 그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은 ‘재물’이나 ‘재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본문을 의역한다. “이 말씀을 듣자 그 사람은 무척 근심스런 얼굴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대단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글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마가복음10:21-22이 토지와 관련됨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로 번역한 한글 번역성경들 중에는 사도행전 5:1에서 동일한 단어(단수형, ‘끄떼마’)를 ‘땅’으로 번역한 성경들이 있다. 바로 공동번역 및 공동번역개정판,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이다.

그런데 아니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을 판 다음(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삽비라와 의논하고 을 팔아(현대인의 성경).

아나니아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삽비라도 자기들의 일부분을 팔았습니다(쉬운 성경).

이 번역성경들을 읽는 독자들은 아나니아가 판 ‘땅’이 마가복음 10:22의 ‘재물,’ ‘재산’과 동일한 단어의 번역임을 알 수 없기에 이러한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이 둘을 연결 지을 수 없다. 개역이나 개역개정판, 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을 읽는 독자들의 경우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이 번역본들은 사도행전 5:1의 ‘끄떼마’를 ‘소유’라고 번역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개정).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를 팔아서(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이 번역본들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되었기에 두 본문 뒤에 동일한 헬라어 ‘끄떼마’가 있음을 알기 어렵다. 물론 ‘소유’는 ‘재산,’ ‘재물’과 동의어이므로 두 본문을 서로 연결할 수 있지만 사도행전 5:1에서 ‘소유’가 토지를 가리키는 것을 파악하기는 쉬워도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도행전 5:1에서 ‘땅’대신 ‘소유’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해도 이것이 결국 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문맥 때문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땅을 판 금액에 관하여 언급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은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재산’으로 번역한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습니다.” 사도행전 5:1에서는 문맥상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곧 알 수 있게 되지만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가 언급되었음을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서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외국어 번역 성경들과 ‘토지’

외국어 번역 성경들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의 번역에 토지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선 영어번역본들을 살펴보면 킹 제임스 역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possession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NIV는 ‘wealth’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본들도 ‘Güter’(재물), ‘Vermögen’(부) 등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여, 토지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없게 한다. 불어 번역본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biens’(재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므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한 네덜란드어 번역본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 또한,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때 율법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마가복음 10:21의 말씀이 구약의 토지법을 배경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헬라어 본문으로 읽어도 그 속에 토지가 언급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이다. 번역 성경을 읽은 사람은 원어로 성경을 읽을 때 번역 성경에서 파악한 의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성경 번역은 헬라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성경의 의미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지만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역할도 한다. 모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은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이 소유나 재물을 뜻하는 단어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한 이유는 이 헬라어 단어가 토지를 뜻할 수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DRA(The Douay-Rheims American Edition, 1899)는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land’로 번역하였다. 독일어 성경들 중에서, EIN(Einheitsübersetzung, 1980)은 ‘Grundstück’(토지)을, LUT(Revidierte Lutherbibel, 1984)‘Acker’(농토)를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불어성경 중에는 BFC(1997)가 ‘terrain’(토지)을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네덜란드어성경 중에서 LEI(Leidse Vertaling, 1912/1994)‘akker’(농토)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들 번역본들은 동일한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마가복음 10:22에서는 재물을 뜻하는 말로 번역하였다. 그들이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킬 가능성을 알면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는 ‘끄떼마’를 ‘토지’로 번역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번역자들 역시 그들이 읽은 성경 번역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 번역과 기독교 세계관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구절은 마가복음 10:21-22과 그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9:21-22이다. 마태복음 19:22에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처럼 헬라어 ‘끄떼마따’가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의 경우에는 토지를 뜻하는 번역어를 사용한 번역본이 없을까?

개역과 개역개정판은 마태복음 19:22에서 ‘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판, 표준새번역, 쉬운 성경은 ‘재산’을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우리말 성경은 이곳에서도 “그는 굉장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의역한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possessions’를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ASV, DBY, DRA, ESV, GNV, KJV, NAB, NKJ, NLT, NRS, RSV, RWB, WEB, YLT), ‘property’를 번역어로 사용한 역본들도 있다(BBE, NAS, NAU). NIV와 NJB는 ‘wealth’를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성경들도 마태복음 19:22에서 ‘Güter’(재물)나 ‘Vermögen’(부)을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불어 성경번역본들은 ‘biens’(재물)을, 네덜란드어 성경번역본들은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번역어로 택하였다. 이처럼 마태복음 19:22에서도 성경 번역자들은 ‘끄떼마따’를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번역 성경들의 상황이 이러하므로, 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빠져버린 번역 성경을 읽는 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와 관련된 경제 윤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구약의 토지법을 존중하는 입장의 교회들은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레위기 25:23 말씀과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신명기 27:17 말씀에 입각하여 대토지소유의 비윤리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들의 규범성을 무시하는 교회들은 토지를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이 시대의 정신에 따라 생각하며 대토지소유가 정당한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성경 번역은 그 번역을 읽는 기독교의 모습의 밑그림을 그린다. 토지를 재물과 혼동한 번역 성경을 가진 기독교는 지주와 자본가를 혼동하는 기독교가 된다. 그리하여 자본가만이 아니라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한 소유권자로 간주하는 실수를 범하거나, 대지주만이 아니라 자본가까지 비윤리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자본가와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면, 대지주와 자본가를 함께 묶어서 비윤리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사회주의이다. 성경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도록 무의식적으로 강요받아왔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입장을 택하였고, 자본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을 택하곤 하였다.

생산수단을 모두 국유화하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와 자본을 모두 국가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지만, 성경(구약)은 토지와 자본 등의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도록 한다. 자본주의자들은 개인이 토지마저도 무한히 많이 소유해도 된다고 여기지만 성경(신명기 27:17)은 토지를 제한적으로 일정 분량만 소유하도록 명한다. 성경이 그려주는 사회의 모습은 분명히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성경의 토지법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길과도 다르다. 중국에서는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국민에게 불평등하게 임대해 주지만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소유하도록 한다. 헨리조지의 토지가치세의 경우에도 이를 실행하면 모든 사유지에 지대에 해당하는 세를 부과하여 결국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나누어 소유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소유한 것은 임대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므로 지대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게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헨리조지가 제안한 토지가치세를 적용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성경의 토지법을 적용하면 모든 국민이 평등한 토지권을 누리게 되고,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국토를 소유하게 되며, 토지를 많이 가진 사람들은 권리이상으로 가진 부분에 대한 세를 국가에 내게 되고 국가는 이를 사회 복지를 위해 사용하게 된다.

성경의 한 단어의 번역이 부정확할 때 성경으로 세상을 보는 눈은 크게 왜곡될 수 있다. 물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부분적인 부정확함이 교정되기도 하지만, 부정확한 부분들이 모여서 부정확한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교회가 세상의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인식하고 바른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확한 성경 번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세계관을 성경적으로 교정하려면 기독교인들이 읽는 번역 성경을 바르게 교정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성경을 번역할 때나 번역된 성경을 교정할 때, 이미 번역된 성경들이 미치는 영향을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우리는 번역 성경을 전보다 좀더 정확하게 개정할 수 있다.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고, 한 걸음에 천리 길을 갈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단번에 완벽한 번역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여 이러한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오히려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원망하는 게으른 종(마태복음 25:24-25)처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세상에서 살 수 없지만 점점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좀더 나은 번역 성경을 만들 수 있기에 우리는 끝없는 개정작업을 통해 좀더 원어와 원문을 잘 반영하는 번역성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 번역 성경을 좀더 정확하게 개정하는 작업은 기독교 세계관을 교정하는 작업이며, 또한 교회를 회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초 작업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웃기는' 목사 VS '울고싶은'교인들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09. 9. 7. 17:0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주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평소에 이름을 듣지 못했던 부흥강사가 온다길래
여러 교회를 다니는 부흥강사라길래
나름대로 호기심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설교를 들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
어려서부터 부흥회에 자주 참석했던 나로서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설교가 이어졌다.
물론 나의 마음 밭이 좋지 못하여 그런지는 모르지만
편견을 가지지 않고 들어본 결과 1970~80년대에서나 통했을 구태의연한 설교가 이어졌다.
돈 많이 헌금해라, 전도하지 않으려면 그만큼의 헌금을 해라,
매시간 감사헌금 하면 축복기도 할 것이다… 등 설교의 핵심은 단순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어려워도 헌금하면 그것이 복이다…
돈과 복으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심지어는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고 성도는 몸인데,
목사는 목과 같으니 머리와 목을 연결하고 지탱하는 목사를 잘 섬겨야 한다는
듣기에 ‘낯부끄러운’ 전형적인 설교가 이어졌다.
설교 중간 중간에는 우스개 소리와 반말들이 양념과 같이 반복되었다.
또한 교인들에게 아멘을 재촉하는 멘트가 이어졌고 박수도 독려했다.

최근 들은 설교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꽉 찬
그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한국교회의 ‘부흥사 세대’가 쇠퇴한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그 잔재는 남아있는 것 같다.

2-3일 부흥회 인도에 수백만 원의 강사비가 오고 가고,
그것도 모자라 감사헌금을 강요하는 형태의 부흥회.
비성경적이거나 자기중심적 성경 해석의 언어로 교인들을 현혹하는 부흥회가
아직도 중소형 교회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부흥강사를 호텔에서 숙식을 시키고 심지어 속옷까지 챙기는 사례들이 있다는
현실을 많은 교인들은 모른채, 자격미달의 설교들을 듣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소망하는 나에게 이번 부흥회는 큰 충격을 주었다.
복음을 전하기 보다는 ‘복’과 ‘성공’만을 주입하려는 그들의 모습과
그것을 교회의 부흥이나 목사의 입지강화를 위해 쓰는 교회들의 한심한 모습과
그런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며 ‘아멘’으로 동조하는
많은 교인들의 낮은 의식 수준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나 또한 그 자리에 끝가지 있었다는 사실이 괴롭다.

:

(예수와 토지법7)교회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9. 7. 16:17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교회와 토지

마가복음 10:29-30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주택이나 가족, 토지를 포기한 자에게 백 배의 주택과 가족, 토지가 주어질 것을 약속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마치 한 알의 씨앗이 100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마가복음 4:8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가 되었느니라.”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싹이 터서 100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마치 이처럼 한 채의 집을 포기하면 100 채의 집을 얻게 되고, 한 평의 땅을 포기할 때 100 평의 땅을 얻게 된다. 한 사람의 가족을 포기할 때에는 100 명의 가족을 얻게 된다. 부활 이후가 아니라 현세에 그렇게 된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그런데 이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가능해 지는 기적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야말로 한 알의 씨앗이 100 배의 결실을 맺는 기적의 장소이다.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가? 교회는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므로 교회에서 이러한 기적이 이루어진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자식(‘떼끄논’)이라고 부르고,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로마서 16:13). 초기 기독교인들은 서로 형제, 자매라 불렀다. 이처럼 ‘어머니,’ ‘형제,’ ‘자매’라고 부른 것은 서로 서로를 가족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를 믿기 위해 가족과 결별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인 교회에서 100 배의 가족을 얻는다.

포기되는 목록 중에서 ‘자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어른에게도 사용될 수 있는 ‘떼끄논’이다.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빠이디온’이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복음을 핑계로 부모의 의무를 회피하지는 말아야 함을 암시한다. 포기될 수 있는 목록에서 ‘아내’가 빠진 것도 복음을 핑계로 이혼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과 일관성 있게 연결된다.

100 배 받는 목록 속에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며 사람 중에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는 전통적인 아버지가 없어야 함을 암시한다(마태복음 23:9 참조).

가족은 재산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가족을 100 배 얻을 때, 재산도 100 배 얻게 된다. 따라서 집이나 토지도 100 배 얻게 된다. 교회가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라면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가옥이나 토지는 그들 모두의 소유처럼 여겨진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집과 가족을 떠난 선교사들은 선교 여행 때 가는 곳마다 기독교인 형제들에 의하여 집들을 제공받으며 결과적으로 많은 집들을 소유함이나 다름없게 된다.

가옥과 토지를 100 배나 얻게 되는 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사도행전 4:32). 이러한 교회에 소속한 사람은 그 교회의 성도들의 재산을 모두 공유하므로 재산을 100 배 이상 얻게 된다. 단 이러한 교회에 소속하기 위해서 (여분의) 토지나 가옥이 있는 자들은 이것을 포기해야 했다.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사도행전 4:34-35). 토지를 제대로 포기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결국 죽음을 당한다(사도행전 5장). 그러나 집과 토지를 포기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공유되는 모든 재산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가옥과 토지를 포기한 자가 현세에서 100 배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은 교회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가옥이나 토지를 포기한 자는 교회를 통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교회는 그러한 가옥과 토지를 공동재산으로 관리하여 가난한 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소유를 포기한 사람도 교회가 관리하는 모든 재산들을 공유하며 사용할 수 있게 되어 포기한 재산의 100 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교회들은 성도들이 포기한 것의 100 배를 얻게 하는 공동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그들이 포기한 것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포기한 자들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집을 포기한 자들에게 집이 되어 주고 전토를 포기한 자들이 일할 수 있는 전토를 제공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전체 교회가 그렇게 될 수 없을 경우에는 최소한 교회 속에 그러한 공동체를 두어야 한다.

교회에는 예배당이 필요하고 교육관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생활관이나 숙소들이 필요하다. 그곳에는 집 없는 사람, 복음전도자, 은퇴한 선교사 등이 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숙소들이 많이 생겨나서 집이 없는 자들과 복음을 위하여 집을 버린 자들이 세계 어디를 가든지 자기 집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토지나 가옥을 교회에 내어 놓은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마땅히 현세에서도 100 배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내세의 구원과 함께 현세에서 약속받은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그것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는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나야 하며, 교회들 사이에서도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나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예수를 믿고 그의 계명을 따르기 위하여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전토를 떠나고 포기한 자는 현세에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100 배나 보상받을 것이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21절)이 지켜지는 교회에서는 또한 복음을 믿다가 가족의 버림을 받고 상속받을 집과 토지도 잃어 가난하게 된 자들 역시 교회에서 형제들, 자매들, 어머니들, 자녀들을 100 배나 만날 것이며 집과 토지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교회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는 더더구나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교회이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교회가 예수께서 기대하신 교회이다. 우리는 현실의 교회를 예수께서 기대하시고 원하신 교회의 모습으로 바꾸어야 한다.

부자들을 위한 복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이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을 수혜자로 하는 듯하지만 실은 부자들을 가장 큰 수혜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예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마가복음 10:30), 현세에서도 토지와 가옥, 가족을 100 배나 더 받을 수 있기에 가장 큰 수혜자들이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가르침은 토지를 많이 가짐으로 율법을 어긴 자들이 죄를 사함 받을 뿐 아니라 현세에 100 배의 토지를 더 얻을 수 있고 또한 내세에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이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가난한 자들이 들으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부자들이 포기하는 토지로부터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100 배의 재산을 얻을 기대도 할 수 없다. 그들이 영생을 얻을 것을 확신하고자 한다면 많은 재산을 모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아주 기쁜 소식은 아니다. 그들이 언제 재물을 모으고 토지를 마련하겠는가? 언제 율법이 허락하는 평균지권의 분량 이상의 토지를 마련하여 그것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한 채의 가옥도 없는 그들이 언제 여러 채의 집을 마련하여 남는 집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는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사실상 복음이 아니라 절망의 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 오히려 부자들에게 슬픈 소식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을 포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100 배를 남기고 내세에 영생까지 얻는 결과를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손에 든 것을 포기하기 아까와 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깝게만 여겨지는 것은 예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남는 투자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망설이다가 투자를 하지 않게 되고, 그들은 포기하지 못한 재물을 세상에 버려두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때엔 그들이 손에 쥐고 있던 재물마저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된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마가복음 4:25)는 말씀은 토지의 포기의 경우를 잘 반영하는 말씀이다. 복음을 위해 토지를 투자할 믿음이 있는 자는 100 배를 얻고 영생까지 얻게 될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 없는 자는 그 가진 재물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소유하지 못할 토지를 포기하여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다. 예수께서는 토지부자들에게 그러한 길을 열어주셨다. 영원하지 않은 토지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는 길을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이러한 복음을 부자들이 싫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세상에서 포기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가난한 자들이 이 가르침을 싫어할 이유는 있다. 그들은 예수께 항의할 것이다. 빚을 지지 않고 연명하는 것도 힘이 든데 남에게 주라니요? 우리는 언제 빚을 면하고 돈을 벌어 땅까지 사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이는 복음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을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먼저 받아들였듯이, 부자들을 위한 복음은 부자들에 의해 먼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 의해 먼저 받아들여진다. 마가복음 10:31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여기서 ‘먼저 된 자’는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권력의 서열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다. 마가복음 6:21에서 이 단어는 “권력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9:35에서도 ‘먼저 된 자’는 ‘종’에 대조되어 쓰였으므로 섬김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마가복음 10:44에서 ‘먼저 된 자’는 ‘노예’(둘로스)에 대조되어 쓰여서 주권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31에서도 ‘먼저 된 자’는 권력자, 주인, 높은 자 등을 가리키며, 부에 관하여 이야기되고 있는 문맥상 부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자들이 나중 된다는 것은 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중에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그들은 “나중 된 자”들이다.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에 대조되었고 ‘먼저 된 자’는 부자를 가리키므로 ‘나중 된 자’는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 가난한 자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다.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서 쓰인 ‘먼저 될 자’는 ‘나중 되고’에 대조되어 시간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 10:31은 부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나중에 받아들이게 되고,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이게 됨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부자가 구원받는 길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을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인다. 가난한 자들은 이 가르침으로부터 직접 얻는 것이 없는데도 이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부자들은 이 가르침의 가장 큰 수혜자인데 이 가르침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물질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된다. 문제는 이때 발생한다. 가난할 때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부자가 된 후에는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 이제 그가 가난할 때 받아들인 복음을 따라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만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

부자가 된 후에 복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복음을 변질시켜서 믿는 사람들도 생긴다. 부자들에게 토지를 포기하라고 주신 말씀을 흐려버린다. 부는 물론이고 토지나 가옥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괜찮다고 성경이 가르친다고 왜곡한다. 나아가 토지와 가옥을 많이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대적한다. 이렇게 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복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 못지않게 악한 것이다.

교회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수적인 성장의 기반을 다지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면 교회를 부자친화적으로 변질시키고 복음도 물질친화적으로 변질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참으로 부자들을 위한 복음을 이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못주는 복음으로 전락시킨다. 재물친화적인 복음의 수혜자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자도 아니다. 그 속에서 부자들은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며, 가난한 자들은 무시당하여 실족한다. 그러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마저도 수혜자는 아니다. 심판 때에 그들이 받을 벌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복음을 왜곡하는가?

우리는 복음을 믿고 복을 받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을 피할 필요는 없으며 벌어서 남에게 주기위하여 부자가 되려고 힘쓰면 좋다. 그러나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고 복음을 부자들이 받아들이기 좋게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복음을 그렇게 변질시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게 된다. 부자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복음은 더 이상 부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복음이다.

세상이 바뀌고 그리스도인들이 부자들이 되어도 복음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교회의 편의를 위해서나 우리의 기분을 위해 그것을 바꾸면 안 된다. 교회성장을 위해 복음을 변질시키는 죄, 토지를 포기하기 싫어서 복음을 변질시키는 죄, 이 죄는 복음을 따르지 않는 죄보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엄기영 MBC 사장에게 보내는 편지 

이명박 정권에 의해 지난해 8월 '강제해임'을 당했던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최근 비슷한 위기에 처해있는 엄기영 MBC 사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오마이뉴스>에 공개되는 이 글은 정연주 전 사장이 강제해임을 당한 후 처음으로 쓰는 칼럼이다. <편집자말>

엄기영 사장께 드립니다.  

참,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으로 뵌 게 지난해 봄으로 기억됩니다. 방송사 출신 중 국회의원에 당선된 몇몇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면서 방송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자리였지요. 그때를 잠시 되돌아보니,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유난히도 방송, 신문 등 언론계 출신들이 대통령 후보 특보나 국회의원 후보로 많이 뛰어들었지요. 그들 가운데 한나라당에 들어간 언론계 출신들이 지난번 미디어 관련법 난장판 때 보니, 맹활약을 하더군요.

 그날 아침식사 자리 때, 엄 사장이 거의 줄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이 담배 피우면서 "이렇게 담배 많이 태우면 앵커할 때 목소리 관리는 어떻게 했어요?"라고 제가 묻자, 당신은 그냥 사람 좋게 웃기만 했습니다. 아마 지금은 담배를 더 많이 태우시겠지요. 건강 챙기셔야 하는데…. 저도 14년간 끊었던 담배를 2004년 8월, KBS 개혁한다면서 팀제 도입하고, 지역국 7개 폐쇄할 때 다시 피우게 되었습니다. 개혁, 참 힘듭디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까닭  

  
MBC 엄기영 사장
ⓒ MBC
엄기영

오늘, 엄 사장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은 당신이 처해 있는 지금의 상황, 당신이 가슴 저미게 느낄 고뇌와 고통, 북풍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외로움을 제가 지난해 비슷한 처지에서 절실하게 경험한 터여서, 그 고뇌와 고통,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당신이 받고 있는 천근 무게의 사퇴와 해임 압박, 그 방면에서는 제가 선배니까요.  

저는 사퇴 압박을 꽤나 오랫동안 받았습니다. 2003년 4월말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집중 포격을 가했지요. 그것도 5년여 내내. 조중동의 공격은 참 집요했습니다. 언젠가 사장 재임 시 어느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하러 온 기자가 기사 검색을 해보았더니, 조중동에서 기사, 해설, 칼럼, 사설을 통틀어 가장 지독하게 욕을 많이 얻어먹고 있는 인물이 1위 노무현 대통령, 2위 정연주였다면서 "선배님, 오래 사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되어 겪어 보니 언론의 가장 기본인 사실 보도를 하지 않습디다. 그러니 누리꾼들로부터 "조중동이 신문이면, 우리 집 두루마리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다"라는 조롱을 받는 것 같습니다. 직접 당해 보면 그 실체가 확연하게 보이지요. 

한나라당의 공격은 차라리 단조로웠습니다. KBS 결산 때나 국정감사 때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가 "책임지고 물러나라"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 단골메뉴에 "물러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이다.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책임이다", 뭐 그런 식의 단골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사퇴, 해임 압박은 2007년 말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그 강도를 달리했습니다. 그 과정의 자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역사에 증언을 할 것입니다만, 참 험한 꼴 많이 겪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라는 최시중 방통위 위원장은 당시 KBS 김금수 이사장을 만나기만 하면 '정연주 때문에 못해먹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퇴 압박을 가했다고 전해들었고, 감사원, 검찰, 국세청, 이사회 등이 총동원되어서 정연주 참수 작전을 했습니다.

 원칙이 나를 버티게 했습니다

 최시중 방통위원장, 이분 요즘 보면, '방통' 위원장 자리를 '송대령' 자리로 착각하는 것 같아요. 마구 칼을 휘두르고 있어요. KBS는 색깔 없는 방송으로 만들겠다, MBC의 정명을 찾아주겠다, EBS를 어디 하고 합치겠다, 뭐 이런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지요. 이 정권의 오만함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 남소연
최시중

이런 오만에는 반드시 국민의 심판이 뒤따릅니다. 국민을 바보로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오만한 짓을 주저 없이 함부로 하는지. 이분을 볼 때마다 조선왕조 때 참수형을 집행한 '망나니'가 떠오릅니다. 무모함입니다. 칼을 마구 휘두르면서 사람 목을 자르잖아요? 그에게는 이처럼 오만에 더하여 무모함까지 있습니다. 정권이 무한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오만하고 무모할까 심히 걱정이 됩니다. 이 정권은 이제 3년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 게다가 레임덕이다, 대선 국면이다 어쩌고 하면 3년도 채 남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그런 온갖 모욕과 핍박, 인신공격을 당하면서도 내 발로 걸어나가지 않고 '해임'이라는 강제수단으로 저들이 나를 쫓아낼 때까지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아주 단순하게도 원칙의 문제였습니다.

 공영방송 KBS에는 정치적 독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 정치적 독립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바탕은 공영방송 KBS 사장의 임기 보장이라고 저는 아주 단순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자유, 민주, 인권, 평화, 평등을 위해 온갖 희생과 고난을 치르면서 성취한 것 중 하나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게 내게 부여된 역사적, 사회적 책무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을 저는 역사의 축복으로까지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아무한테나,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해임'에 이르기까지 온갖 무리한 짓을 다한 이 정권의 폭력성과 야만성이 여지없이 폭로되었으니까요. 신태섭 교수 해임의 무죄 판결, 저의 배임혐의 1심 무죄판결은 이 정권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확인시켜준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 기회를 준 것은 분명 역사의 축복이며, 그런 것을 통해 역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엄 사장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들고, 온갖 모욕과 비난과 인신공격이 당신에게 가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이 바로 MBC 사장이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역사 앞에서 감당해야 하는 책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역사의 축복으로 받아들입시오.  

엄기영 사장은 나보다 좋은 조건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저보다 훨씬 '좋은 조건' 속에 놓여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노동조합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저는 3년 8개월 동안 적대적인 노조의 저주와 해괴망칙한 인신공격을 당했습니다. 회사 주변은 온통 저주와 증오의 글귀로 가득찬 만장이 펄럭였습니다. <조선일보> 사설을 그대로 인용한 노조 성명서도 있었고, KBS 사랑한다며 지켜주겠다는 촛불시민들을 구박하고 험담을 퍼부은 집단이었습니다. 밖에서 휘몰아쳐 오는 핍박과 압박도 힘에 벅찬데, 내부에서 이렇게 나오니,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MBC 노조는 그런 악다구니 저주와 증오를 당신에게 쏟아 붓기는커녕, 지켜주겠다고,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나오니, 그렇다면 정말 해볼 만한 싸움 아닙니까.  

게다가 MBC는 감사원 감사 대상이 아니니, 감사원 망나니들이 거짓, 왜곡 감사로 골탕 먹이는 짓을 할 수도 없구요. 그리고 MBC는 세금 소송문제가 없어서, 무슨 배임죄니 뭐니 그런 것으로 순식간에 중범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엄 사장 당신은 나보다 엄청 '좋은 조건'에 있다는 말이 무리한 얘기는 아니겠지요.  

다만 지금 하는 것으로 보니, 김우룡 이사장이 지휘하는 방문진 이사회가 그 모든 총대를 대신 메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김우룡 이사장, 이분이 지난해 1월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희한한 이야기를 했지요. 당시 한나라당 몫으로 국회에서 추천되어 방송위원회 위원 신분이었던 그는 "편파방송의 책임자인 정연주 사장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한 뒤 "정 사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변화를 가늠할 수 없는, 판을 뒤엎는 초강수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가 되었지요. 그의 말대로 진짜 판을 뒤엎은 초강수가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통위, KBS 이사회 등이 총동원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분이니, 이제 자기가 이사장이 된 MBC에서 온갖 초강수를 두려고 하겠지요. 벌써 초강수를 두겠다고 공언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KBS 사장 재임시절 회사에 1,892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로 불구속 기소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정연주

방문진 이사회에서 온갖 인간적인 모멸과 비난, 겁박이 있을 겁니다. 저는 지난해 KBS 이사회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용히 제 지갑을 꺼냈습니다. 그 수첩에는 구약성서 시편 23편이 붙어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나는 이 시편을 이사회 자리에서 혼자 읽고 또 읽고 하였습니다. 내 귓전으로 '무능경영, 편파방송' 등을 격하게 토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어도, 그 소리는 귓전을 그냥 스쳤을 뿐, 내 마음과 가슴은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로 가득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종교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믿어와 익숙해진 방식과 의식이 기독교 쪽이어서 그 방식과 의식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 특히 거대교회는 예수를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들이지, 예수의 참 제자들은 아닙니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여호와' 대신 우리의 가장 소박한 민간신앙인 조상의 영혼일 수도 있으며, 불교의 붓다일 수도, 이슬람의 알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야 무엇이었건, 마음의 평화를 찾는 길이 필요합니다. 방문진 이사회에서 인간적인 모욕과 비난이 있으면, 엄 사장 당신도 이 시편을 또는 당신 방식의 잠언을 읽으면서 그들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되십시오.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당신의 모습이나 인품이 신사여서, 이런저런 모멸에 '에이 더러운 것, 나쁜 사람들, 그냥 떠나자', 그렇게 할지도 몰라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던지고 나면, 후배들은 어찌 되며, 방송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는 MBC는 어떻게 되며,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최소한 저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포클레인으로 당신을 강제로 들어낼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의연하게 버티셔야 합니다.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많은 벗들이 당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리하리라 확신합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씩 웃으면서, 그리고 한국 방송 앵커의 상징적 존재로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말이지요.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시 한편 보내드립니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입니다. KBS 신입사원 연수 때 첫 강의를 하고 난 뒤 그들에게 들려주었던 시입니다.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도 읽으면서 힘내라고 많이 권유하고 있습니다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추신: 괜한 편지를 써서 부담을 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아끼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있는 MBC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이런 무례를 한 것이니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외로워하지 마세요. 담쟁이 수천 개가 당신과 함께 한 뼘씩 저 절망의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내가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나? 난 그 분과 개인적 관계를 말할 만큼 대단한 민주투사도, 화려한 경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 김대중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그 자체로 한국현대사요,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큰 선물이라는 것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죽음을 담담하게 맞고 있는 국민 분위기를 보며, ‘김대중을 이렇게 빨리 잊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안 된다. 그를 이렇게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그를 쉽게 잊으면 우리는 더 성숙할 수 없다.

86세라면 물론 그는 천수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단지 나이나 화려한 경력만으로 간단히 지나쳐버릴 수 없는 우리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Ⅰ.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단언컨대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1924년 생으로 일제와 해방, 분단과 전쟁, 군부독재시대와 경제성장 등 한국현대사의 모든 사건들을 지나오면서 우리시대가 겪고 이겨내야만 했던 모든 모순점들과 가장 격렬하게, 가장 대표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1. 김대중은 평생 빨갱이의 천형(天刑/천벌처럼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기성세대에게 ‘김대중은 곧 빨갱이’의 대명사다. 그가 40대 기수론으로 돌풍을 일으키던 70년대에도 그랬고,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때의 죄목도 그랬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빨갱이였다. 결국 목숨을 걸고 민족화해를 위해 마지막 헌신을 다하려는 순간까지 그는 끝내 ‘역시 빨갱이’ 소릴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기본모순이 바로 분단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의 일생 최대의 싸움으로 여겼다. 대한민국, 한민족이 발전하기 위해서 극복해야할 중요한 과제들이 많지만 분단과 냉전의 빨갱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없었다. 점잖게 법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종교의 문제까지 갈 것도 없다. 삶의 과제요, 생존의 문제다. 이걸 극복 못하면 우리민족은 도대체 발전할 수가 없다. 사람 구실을 못한다.

그래서 정치인 김대중은 87년 민주화가 한 단계 발전한 이후부터는 다른 어떤 주요과제들보다 거의 전적으로 민족화해, 평화와 통일문제에 집중했다. 대통령 김대중의 5년은 거의 남북관계 개선에 집중되었고, 퇴임 이후 남은 모든 여생도 이 과제만을 위해 끝까지 매달렸다.

1997년 10월 당시 대선 주요후보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사상검증토론회”라는 전무후무한 코메디가 TV를 통해 장장 7시간동안이나 생중계되었다. 이 코메디는 발행부수도 얼마 되지 않는 <한국논단>이라는 잡지가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토론회였다. 이 자리에서 극우인사인 발행인 이도형은 “귀순한 황장엽씨는 ‘김정일이 김대중 총재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를 설득해 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도 했는데, 이 역시 TV를 통해 고스란히 방영되었다. 사실 김대중은 보수주의 대중정치가다. 그의 사상은 시대모순을 극복하려는 상식을 반영할 뿐, 조금도 급진적이지 않다. 그러나 정적들에게 정치인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훨씬 급진적인 다른 많은 인물들보다 더 위험한 빨갱이로 남아야했다. 그는 우리시대를 위해 그런 수모를 겪었다. 

2. 김대중은 평생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또 다 안다. 우리사회, 특히 기성세대에게 ‘전라도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양친 모두 경기도 출신이시고, 역시 서울에서 출생한 나도 잘 안다. 어려서부터 나도 어른들끼리 “전라도사람은 절대 믿지 마라.”고 하시는 말씀을 자주 듣고 자랐다. 그런 호남 따돌리기가 상당히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내려왔으며, 특히 박정희시대 이후 한국현대사에 크게 증폭되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지만 나도 그렇게 알고 자랐다.

‘빨갱이에 전라도’ 이 정도면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냐’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사회에서는 완전 매장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고향이 전라도라서 그가 당한 시련보다, 김대중이 ‘빨갱이에 전라도’였기에 전라도 사람들이 우리사회에서 더 가혹한 차별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전라도사람들은 자신들이 우리사회에서 받는 차별이 가혹할수록 더더욱 김대중에 매달려왔고, 그럴수록 전라도와 김대중은 우리사회에서 더욱 더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전라도와 김대중은 이미 한국현대사에서 ‘괜히 밉고, 싫은 종자들’이었으며, 대한민국 안에서 또 다른 나라가 되어 갔다.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안고 있는 김대중은 무슨 짓을 다해서도 결코 경상도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충청도 김종필과 정책연합을 해서야만 드디어 40년 한을 풀고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김대중은 평생 학벌 없는 고졸 출신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우리사회에서 제법 큰 소리쯤 칠 수 있기 위해 갖춰야할 기본조건 중에 출생의 비밀로서 TK(대구-경북)가 있다면, 학력으로는 KS(경기고-서울대)가 있다. 그가 정치를 하려하든, 기업을 하려하든, 법조계의 주요인사가 되려하든 TK와 KS는 출세의 기본조건이었다. 하물며 대통령이 되려하는 자가 TK는 물론 KS와도 관계가 없다면 그는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TK는커녕 ‘전라도사람’에다가, KS는커녕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상고출신이었다. 우리사회에 ‘내로라’하는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경력의 대통령 밑에서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굴욕이요, 치욕이다. 정치인 김대중은 육사도, 경기고도, 서울대도 아닌 천출로서 학력중심의 여론주도층들의 멸시와 적대를 항상 당해야 했다. ‘못 배웠다’는 손가락질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었고, 항상 공부했지만, 한번 학력이 영원한 이름표로 따라붙는 우리사회에서 그런 노력은 더욱 경멸을 당했다.

사실 1924년생인 그의 연령대에서 고졸은 대단한 고학력이다. 당시에 대학까지 나왔다는 것은 서민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큰 특혜였다. 1934년생인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중퇴하셨고, 60세가 넘어서도 몇 번씩이나 검정고시를 생각해 보기까지 하셨다. 가난했던 장인의 강압으로 끝내 대학을 포기해야했던 아내는 4녀 끝에 귀한 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한 나보다 열 배는 똑똑하지만, 고졸 학력 때문에 지금도 사이버대학의 미련을 갖고 산다.

그 시대에 사실상 저학력도 아닌 그가 우리사회에 지도층인물이 되기 위해 치려야했던 학벌의 검증은 그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이처럼 김대중은 우리 어머니시대를 대표하여 수모를 겪었다. 

바로 이러한 한국현대사, 한국사회, 우리시대를 잘 알기에 이 모든 모순들을 조금이라도 절감하는 사람들에게 김대중은 민주화의 코드였고, 시대발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1997년 마침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리는 죽도록 기뻤던 것이다.

그의 의미를 조금 알았기에 민주투사도 아닌 내게도 김대중은 특별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3당 야합의 배신 속에 외톨이로 출마한 92년 대선을 앞둔 서울교대 유세현장의 김대중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바꿉시다”는 구호를 들었을 때 나는 마구 눈물이 솟았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찍기 위해’ 첫 아이 몸조리 위해 친정에 가 있던 아내는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귀가했고, 관절염으로 걷지도 못하던 어머니는 업혀서까지 투표장에 가서 기도하며 한 표를 찍었다. 성서한국대회로 분주했던 나는 이번에 일어나시기만 하면 동료들과 함께 꼭 직접 찾아뵙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는데, 기다려지지 않은 시간이 한없이 아쉽기만 하다. 

Ⅱ. 김대중은 참된 신앙인이다.

자신있게 나는 그가 참된 신앙인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만약 참된 신앙의 힘이 없었다면 그런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가톨릭 신자다. 그러나 그저 종교 난에 ‘가톨릭’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정도의 형식적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공사석의 많은 기회를 통해 자신의 삶과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고, 그 말은 그의 일관된 진정성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가장 무섭게 그를 죽이려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용서하고 사면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값싼 정치적 제스처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는 신앙의 힘으로 이미 용서했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민족화해의 기본 틀인 햇볕정책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 21)는 말씀을 믿는 믿음과 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햇볕정책의 공동입안자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피스메이커, 임동원’ 참조).

지난 6월 2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즘 밤에 잘 때 내 아내와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생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습니다. 걱정이 많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제가 최대한 일할 수 있도록 저희 내외를 도와주십시오.' (뒤는 생략)”

우리 시대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유명목사, 부흥사들이 수없이 많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참 신앙인이 얼마나 될까?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길을 믿었기에 그렇게 살았다.

그런 면에서 조금 앞서 간 노무현은 김대중의 정치적 자식임이 틀림없었다. 그 역시 부산상고 출신으로 못 배운(?) 천형을 안고 살아왔으며, ‘사람은 똑똑한 데 하필 전라도 당으로 나와서’ 고향에서조차 번번이 낙선해야 했다. 결국 경상도 사람인데도 전라도의 지지를 안고 당선되는 감동을 이루었지만, 경상도로부터는 끝끝내 ‘배신자’로 남아야 했다. 또한 사상적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 내내 ‘좌빨’(좌파-빨갱이)의 낙인을 벗지 못했다.

결국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온 우리 앞에서 김대중의 자식인 노무현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고, 젊은 아들을 먼저 앞세워 가슴에 묻은 늙은 아버지도 겨우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아들 뒤를 이은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김대중은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큰 선물이다” 

내가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나? 난 그 분과 개인적 관계를 말할 만큼 대단한 민주투사도, 화려한 경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 김대중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그 자체로 한국현대사요,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큰 선물이라는 것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죽음을 담담하게 맞고 있는 국민 분위기를 보며, ‘김대중을 이렇게 빨리 잊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안 된다. 그를 이렇게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그를 쉽게 잊으면 우리는 더 성숙할 수 없다.

86세라면 물론 그는 천수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단지 나이나 화려한 경력만으로 간단히 지나쳐버릴 수 없는 우리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Ⅰ.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단언컨대 김대중은 한국현대사다. 1924년 생으로 일제와 해방, 분단과 전쟁, 군부독재시대와 경제성장 등 한국현대사의 모든 사건들을 지나오면서 우리시대가 겪고 이겨내야만 했던 모든 모순점들과 가장 격렬하게, 가장 대표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1. 김대중은 평생 빨갱이의 천형(天刑/천벌처럼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기성세대에게 ‘김대중은 곧 빨갱이’의 대명사다. 그가 40대 기수론으로 돌풍을 일으키던 70년대에도 그랬고,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때의 죄목도 그랬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빨갱이였다. 결국 목숨을 걸고 민족화해를 위해 마지막 헌신을 다하려는 순간까지 그는 끝내 ‘역시 빨갱이’ 소릴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기본모순이 바로 분단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의 일생 최대의 싸움으로 여겼다. 대한민국, 한민족이 발전하기 위해서 극복해야할 중요한 과제들이 많지만 분단과 냉전의 빨갱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없었다. 점잖게 법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종교의 문제까지 갈 것도 없다. 삶의 과제요, 생존의 문제다. 이걸 극복 못하면 우리민족은 도대체 발전할 수가 없다. 사람 구실을 못한다.

그래서 정치인 김대중은 87년 민주화가 한 단계 발전한 이후부터는 다른 어떤 주요과제들보다 거의 전적으로 민족화해, 평화와 통일문제에 집중했다. 대통령 김대중의 5년은 거의 남북관계 개선에 집중되었고, 퇴임 이후 남은 모든 여생도 이 과제만을 위해 끝까지 매달렸다.

1997년 10월 당시 대선 주요후보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사상검증토론회”라는 전무후무한 코메디가 TV를 통해 장장 7시간동안이나 생중계되었다. 이 코메디는 발행부수도 얼마 되지 않는 <한국논단>이라는 잡지가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토론회였다. 이 자리에서 극우인사인 발행인 이도형은 “귀순한 황장엽씨는 ‘김정일이 김대중 총재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를 설득해 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도 했는데, 이 역시 TV를 통해 고스란히 방영되었다. 사실 김대중은 보수주의 대중정치가다. 그의 사상은 시대모순을 극복하려는 상식을 반영할 뿐, 조금도 급진적이지 않다. 그러나 정적들에게 정치인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훨씬 급진적인 다른 많은 인물들보다 더 위험한 빨갱이로 남아야했다. 그는 우리시대를 위해 그런 수모를 겪었다. 

2. 김대중은 평생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아는 사람은 또 다 안다. 우리사회, 특히 기성세대에게 ‘전라도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양친 모두 경기도 출신이시고, 역시 서울에서 출생한 나도 잘 안다. 어려서부터 나도 어른들끼리 “전라도사람은 절대 믿지 마라.”고 하시는 말씀을 자주 듣고 자랐다. 그런 호남 따돌리기가 상당히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내려왔으며, 특히 박정희시대 이후 한국현대사에 크게 증폭되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지만 나도 그렇게 알고 자랐다.

‘빨갱이에 전라도’ 이 정도면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냐’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사회에서는 완전 매장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고향이 전라도라서 그가 당한 시련보다, 김대중이 ‘빨갱이에 전라도’였기에 전라도 사람들이 우리사회에서 더 가혹한 차별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전라도사람들은 자신들이 우리사회에서 받는 차별이 가혹할수록 더더욱 김대중에 매달려왔고, 그럴수록 전라도와 김대중은 우리사회에서 더욱 더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전라도와 김대중은 이미 한국현대사에서 ‘괜히 밉고, 싫은 종자들’이었으며, 대한민국 안에서 또 다른 나라가 되어 갔다.

전라도사람의 천형을 안고 있는 김대중은 무슨 짓을 다해서도 결코 경상도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충청도 김종필과 정책연합을 해서야만 드디어 40년 한을 풀고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김대중은 평생 학벌 없는 고졸 출신의 천형을 지고 살았다.

우리사회에서 제법 큰 소리쯤 칠 수 있기 위해 갖춰야할 기본조건 중에 출생의 비밀로서 TK(대구-경북)가 있다면, 학력으로는 KS(경기고-서울대)가 있다. 그가 정치를 하려하든, 기업을 하려하든, 법조계의 주요인사가 되려하든 TK와 KS는 출세의 기본조건이었다. 하물며 대통령이 되려하는 자가 TK는 물론 KS와도 관계가 없다면 그는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TK는커녕 ‘전라도사람’에다가, KS는커녕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상고출신이었다. 우리사회에 ‘내로라’하는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경력의 대통령 밑에서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굴욕이요, 치욕이다. 정치인 김대중은 육사도, 경기고도, 서울대도 아닌 천출로서 학력중심의 여론주도층들의 멸시와 적대를 항상 당해야 했다. ‘못 배웠다’는 손가락질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었고, 항상 공부했지만, 한번 학력이 영원한 이름표로 따라붙는 우리사회에서 그런 노력은 더욱 경멸을 당했다.

사실 1924년생인 그의 연령대에서 고졸은 대단한 고학력이다. 당시에 대학까지 나왔다는 것은 서민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큰 특혜였다. 1934년생인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중퇴하셨고, 60세가 넘어서도 몇 번씩이나 검정고시를 생각해 보기까지 하셨다. 가난했던 장인의 강압으로 끝내 대학을 포기해야했던 아내는 4녀 끝에 귀한 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한 나보다 열 배는 똑똑하지만, 고졸 학력 때문에 지금도 사이버대학의 미련을 갖고 산다.

그 시대에 사실상 저학력도 아닌 그가 우리사회에 지도층인물이 되기 위해 치려야했던 학벌의 검증은 그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이처럼 김대중은 우리 어머니시대를 대표하여 수모를 겪었다. 

바로 이러한 한국현대사, 한국사회, 우리시대를 잘 알기에 이 모든 모순들을 조금이라도 절감하는 사람들에게 김대중은 민주화의 코드였고, 시대발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1997년 마침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리는 죽도록 기뻤던 것이다.

그의 의미를 조금 알았기에 민주투사도 아닌 내게도 김대중은 특별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3당 야합의 배신 속에 외톨이로 출마한 92년 대선을 앞둔 서울교대 유세현장의 김대중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바꿉시다”는 구호를 들었을 때 나는 마구 눈물이 솟았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찍기 위해’ 첫 아이 몸조리 위해 친정에 가 있던 아내는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귀가했고, 관절염으로 걷지도 못하던 어머니는 업혀서까지 투표장에 가서 기도하며 한 표를 찍었다. 성서한국대회로 분주했던 나는 이번에 일어나시기만 하면 동료들과 함께 꼭 직접 찾아뵙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는데, 기다려지지 않은 시간이 한없이 아쉽기만 하다. 

Ⅱ. 김대중은 참된 신앙인이다.

자신있게 나는 그가 참된 신앙인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만약 참된 신앙의 힘이 없었다면 그런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가톨릭 신자다. 그러나 그저 종교 난에 ‘가톨릭’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정도의 형식적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공사석의 많은 기회를 통해 자신의 삶과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고, 그 말은 그의 일관된 진정성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가장 무섭게 그를 죽이려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용서하고 사면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값싼 정치적 제스처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는 신앙의 힘으로 이미 용서했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민족화해의 기본 틀인 햇볕정책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 21)는 말씀을 믿는 믿음과 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햇볕정책의 공동입안자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피스메이커, 임동원’ 참조).

지난 6월 2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즘 밤에 잘 때 내 아내와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생경제와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습니다. 걱정이 많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제가 최대한 일할 수 있도록 저희 내외를 도와주십시오.' (뒤는 생략)”

우리 시대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유명목사, 부흥사들이 수없이 많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참 신앙인이 얼마나 될까?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길을 믿었기에 그렇게 살았다. 

그런 면에서 조금 앞서 간 노무현은 김대중의 정치적 자식임이 틀림없었다. 그 역시 부산상고 출신으로 못 배운(?) 천형을 안고 살아왔으며, ‘사람은 똑똑한 데 하필 전라도 당으로 나와서’ 고향에서조차 번번이 낙선해야 했다. 결국 경상도 사람인데도 전라도의 지지를 안고 당선되는 감동을 이루었지만, 경상도로부터는 끝끝내 ‘배신자’로 남아야 했다. 또한 사상적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 내내 ‘좌빨’(좌파-빨갱이)의 낙인을 벗지 못했다.

결국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온 우리 앞에서 김대중의 자식인 노무현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고, 젊은 아들을 먼저 앞세워 가슴에 묻은 늙은 아버지도 겨우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아들 뒤를 이은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정말 이명박과 그의 정신적 배후인 김진홍을 용서하기 힘들다. 그러나 김대중이 전두환을 용서했듯이 나도 이명박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려 한다. 이명박의 실패를 그냥 두기에는 우리민족의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자. 그리고 뉴라이트를 반드시 이겨내자.

지난 10년의 성과를 이어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의 공동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아까운 시간들을 욕설과 저주, 전쟁의 위협 속에 보내야하는 지금 현실을 생각하고, 그 분이 할 수 있었던 남은 일들을 생각하면 김대중을 이대로 보내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운다고 돌아올 수 없는 김대중을 벌써 보낸다는 게 너무 한스럽다.

흔히 ‘고인의 유지를 받들자’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정말 김대중의 못다한 일을 해야 한다. 특히 죽음을 통해 끊어졌던 남북의 관계회복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잘 살려낼 수 있도록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뿐 아니라, 우리가 정신차려 노력해야 한다.

어머니가 김구 선생님과 한 때를 겹쳐 사셨다는 게 가끔 신화처럼 느껴졌다. 이젠 내가 한 때나마 큰 인물 김대중과 함께 겹쳐 살았다는 사실이 자부심으로 남을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쉽게 잊기에는 큰 인물 김대중이 너무 아깝고, 그의 역할이 너무 그리운 시대다.

그런 면에서 정말 이명박과 그의 정신적 배후인 김진홍을 용서하기 힘들다. 그러나 김대중이 전두환을 용서했듯이 나도 이명박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려 한다. 이명박의 실패를 그냥 두기에는 우리민족의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자. 그리고 뉴라이트를 반드시 이겨내자.

지난 10년의 성과를 이어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의 공동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아까운 시간들을 욕설과 저주, 전쟁의 위협 속에 보내야하는 지금 현실을 생각하고, 그 분이 할 수 있었던 남은 일들을 생각하면 김대중을 이대로 보내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운다고 돌아올 수 없는 김대중을 벌써 보낸다는 게 너무 한스럽다.

흔히 ‘고인의 유지를 받들자’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정말 김대중의 못다한 일을 해야 한다. 특히 죽음을 통해 끊어졌던 남북의 관계회복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잘 살려낼 수 있도록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뿐 아니라, 우리가 정신차려 노력해야 한다.

어머니가 김구 선생님과 한 때를 겹쳐 사셨다는 게 가끔 신화처럼 느껴졌다. 이젠 내가 한 때나마 큰 인물 김대중과 함께 겹쳐 살았다는 사실이 자부심으로 남을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쉽게 잊기에는 큰 인물 김대중이 너무 아깝고, 그의 역할이 너무 그리운 시대다.









구교형 목사 
(성서한국사무총장/교회개혁실천연대집행위원/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 이글은 복음과 상황 9월호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

구원의 확신

예수께서는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마가복음에서 구원의 확신에 관련한 예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29-30이다.

이 본문은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되는지 알려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마가복음에서 ‘영생을 얻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과 동의어이며(마가복음 9:45-4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다’는 표현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25-26). 그러므로 이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반드시 받는 지 알려주는 본문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배운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당혹해 할 것이다. 집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리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 의문은 다분히 흑백논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에 관해 말하지 않고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즉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 중에도 구원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마치 합격의 확신이 없는 수험생 중에 합격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있는 자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와 복음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다. 예수를 참으로 믿지 않으면서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포기를 못하는 사람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말로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며 신앙생활을 할 경우에 우리는 늘 입시생처럼 불안하지만, 구원을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시험에 합격하고 입학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쁘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하게 만들기도 한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에게 방종과 죄의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러한 구원의 확신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을 보고 초신자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날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조롱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도의 문은 막힐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아무리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더라도 나의 구원의 확신으로 남이 구원받는 길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먹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헛된 구원의 확신은 일찌감치 없애는 것이 좋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교리는 무슨 죄를 지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한국교회에서 왜곡, 과장되어 가르쳐졌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아무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으로부터 탈락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었다. 결국 잘못된 구원의 확신은 많은 교인들이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차라리 구원의 확신 없이 구원의 길을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지 분명히 알려준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가 그들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믿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의 믿음이 거짓 믿음일 수는 없다. 예수와 복음을 선택하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사람에게는 그가 포기한 것보다 더 큰 보상이 기다린다. 그것은 구원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버림의 의미

그런데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라고 할 때, ‘버린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과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버린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마가복음 10:28에서도 사용되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할 때, 그는 재물을 가진 자가 구원 받기 어렵다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물을 버렸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하였는가? 베드로는 예수를 따를 때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마가복음 1:18).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마가복음 1:20). 그렇지만 그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린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른 후에도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마가복음 1:29). 그러므로 ‘버리다’는 말은 소유의 포기로 이해할 수 없다.

‘버리다’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허락하다”(1:34; 5:37; 7:12, 27; 10:14; 11:6, 16), “용서하다”(2:5, 7, 9, 10; 3:28; 4:12; 11:25[2회]), “거절하다”(5:19; 7:8), “남기다”(12:19, 20, 22; 15:37), “남아있다”(13:2),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14:6; 15:36)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러한 의미는 마가복음 10:28의 문맥에 맞지 않는다.

이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떠나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1에서 이 동사는 열병이 떠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4:36; 8:13; 12:12; 14:50에서 이 동사는 사람들을 떠나가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34에서 이 동사는 집을 떠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18에서는 그물을 관리하기를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20에서 이 동사는 아버지 세베대를 돕는 것을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0:28의 문맥은 마가복음 1:18, 20을 연상시키는 문맥이므로 ‘버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문맥상으로나 마가복음의 용례상으로나 “떠나다”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실제로 소유를 버린 것이 아니므로, ‘버림’은 순회 사역 기간 동안 가족이나 소유를 떠나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마가복음 10:28)라는 베드로의 말은 “우리가 모든 것을 떠났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열두 제자들은 재물과 가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따라다니며 복음 사역을 하기 위하여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떠났다.

그런데,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릴 때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의 말씀(29-30절)에서도 ‘버리다’는 단어를 “떠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문맥은 이러한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들이 이것들을 100배나 받을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은 ‘버리다’는 단어가 단지 내버려 두고 떠난다는 뜻에서 더 나아가 소유의 포기와 관련됨을 암시한다. 집, 가족, 토지를 100배나 더 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믿음의 가족을 100배나 얻고 많은 집과 토지를 공동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버리다’는 단어도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공동소유로 내어놓는다’는 뜻으로 또는 ‘그 혜택을 독점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집, 가족, 토지의 버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마가복음 10:21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가르침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족의 버림은 가족을 떠남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집이나 토지의 버림은 단지 떠남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의 경우에도 기업의 분량에 해당하는 토지나 가옥까지 포기하라는 것은 아님을 베드로와 안드레의 경우에 여전히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마가복음 1:29).

‘버림’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최소한 떠남을 뜻하고 공동소유 내지 소유포기를 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버림’이 어떻게 이해되든지 간에 가족이나 집, 토지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은 동일하다.

버림의 이유: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다. 그런데, 이 때 한 가지 단서가 있다. 무엇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토지를 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그런데,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가 무슨 뜻인가?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가옥,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다는 뜻일 수 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예수는 소유(문맥상 토지)의 포기를 명하셨기 때문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복음을 위하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집, 가족, 또는 토지’의 “포기”는 그것들을 “떠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도 여행을 하고 계신 예수를 따라 나서려면 집과 가족과 전토를 떠나야 한다. 그래야 전도 여행을 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가옥,’ ‘가족’이 포기의 내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문맥에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포기’가 마가복음의 용례상, ‘떠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지원한다(위 참조).

집과 가족을 떠나 전도 여행하는 복음 전도자들에게 예수께서는 100배의 집과 가족을 약속하신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30절). 그들에게는 가는 곳마다 거할 곳이 생기고 그들을 보살펴 주는 믿음의 가족이 생긴다. 물론 그들은 전도 여행 과정에서 고난도 받을 것이다. “박해를 겸하여 받고”(30절).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구원이 확실히 약속된다.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30절).

그런데, 버림의 목록에서 ‘아내’가 빠져 있는 것은 ‘버림’이 문자 그대로의 ‘버림’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누가복음에서처럼 ‘아내’가 버릴 목록에 포함된 전승이 본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누가복음 18:29). 그러나 마가복음의 문맥에서는 ‘아내’가 빠진 것을 고려하여 본문을 해석하여야 한다. 아내를 버리는 것, 즉 이혼을 금하는 예수의 가르침(마가복음 10:9, 11)의 일관성이 여기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버림’이 잠시 떠나는 것이었다면 유독 ‘아내’만을 떠나야 하는 목록에서 뺐을 리 없다. 예수의 12제자들이 아내를 동반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며 사역을 하였다고 볼 수도 없기에, ‘버림’은 단지 ‘떠남’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 가족, 토지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율법이 허락하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들)이나 토지의 소유를 포기하고, 복음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들과 결별하는 것을 뜻한다. 다만 아내는 복음 전파의 삶을 원하지 않더라도 이혼시킬 수 없다. 그녀가 함께 살기 원하는 한 이혼시키지 말아야 한다(고린도전서 7:12-13 참조). 복음을 따르는 것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그러나 복음 자체가 이혼을 금하기 때문에 버릴 수 있는 목록에서 ‘아내’(또는 ‘남편’)는 제외된다.

본문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예수와 복음을 믿기 때문에 가정에서부터 쫓겨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가옥, 토지 등의 상속자로서 권리를 함께 상실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구원을 약속하신다. 세상에서 기업을 잃은 그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신다. 그러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된다.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크나큰 위로와 소망이다. 그에게 구원의 확신마저 없다면 너무도 비참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고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죄를 지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이 없는 자들에게 마가복음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확신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토지의 포기와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누가 가질 수 있는가?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하여 집이나 가족, 토지를 포기한 사람은 마가복음 10:30에 토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축적한 가옥이나 토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정설을 믿은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하여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하였다. 부의 축적에 성공하는 것이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 증거라고 여긴 칼빈주의자들은 열심히 일하여 벌고 절약하여 씀으로써 부를 축적하여 자본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부의 축적이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축적된 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과 토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부의 축적을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본 칼빈주의자들의 근검절약은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렇다면 부의 포기를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보는 예수주의자들은 새로운 경제체제를 태동시키지 않을까? 근검절약하며 부를 축적하되 부동산투기 등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축적된 부를 지속적으로 포기하여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만드는 예수경제체제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토지를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토지에서 나그네가 쉼을 얻을 때,

그는 낙원에 예수와 함께 거할 곳을 얻을 것입니다.

가옥을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집에 가난한 자들이 깃들일 때,

하늘의 도성에 그를 위한 집이 마련될 것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족에게마저 버림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지만

영원한 것을 얻는 그에게 복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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