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9. 18. 18:3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거짓신앙에서 벗어나기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도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누가복음 3:7-14


제가 몇 분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이상림씨, 윤용현씨, 양회성씨, 이성수씨, 한대성씨. 들어본 적 있습니까? 전재숙씨, 유명숙씨, 김영덕씨, 권명숙씨, 신숙자씨.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앞서 불러드린 분들은 용산 참사로 숨진 철거민들입니다. 나중에 불러드린 분들은 그 분들의 아내죠. 그들은 지금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남편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이름이 여러분의 신앙과 나의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이해하는 성서한국운동은 바로 그런 질문에 바른 해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한국운동은 사회의 모든 영역이 성서의 토대위에 아름답게 세워진 한국을 의미합니다. 성서한국의 비전은 일제시대 양정 고등학교 교사였던 김교신 선생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은 그에게 조선이었죠. 하여 그는 성서조선의 비전을 품고 1927년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저는 창간사의 마지막 대목을 읽으면 여전히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성서조선>창간사 중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는 1942년에 폐간 당했습니다. 그러나 성서한국이란 화두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서한국을 이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회심’입니다. 회심의 깊은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나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1:15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역사 한 가운데로 뚫고 들어왔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는 아름다운 실재가 강력한 힘으로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것입니다. 회심이란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맞닥뜨리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된 삶으로부터 총체적으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펼쳐주신, 열어주신 새로운 삶의 세계로 과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죠. 두 가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아직 믿음은 없는 것 같지만 회개하는 순간에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했던 나의 삶에 대한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 없이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세례요한의 설교를 통해 회개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두 가지 질문을 갖고 생각하겠습니다. 누가 회개가 필요한가?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1.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7-9)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그런 사람에게만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왔던 사람, 성경을 잘 아는 사람, 주일 예배를 잘 지키는 사람, 헌금도 적당히 잘 내는 사람, 저처럼 설교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가장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본문 말씀 7절에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어떻게 세례를 받고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한테 “독사의 자식들아!” 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세례요한은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진정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심판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례요한이 세례를 준다. 그 세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길래 세례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왜 그들은 형식적으로 세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죠. 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8) 회개에 알 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거죠.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안전하다. 완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적당히 종교적 형식만 잘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나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오랫동안 찌들어 있었습니다. 무늬만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삶의 내용은 없었습니다. 짝퉁 물건을 명품 가방에 집어넣은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니 그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회개가 필요합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기준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삽니다. 겉으로 볼 때 무척 경건하지요. 성경읽기, 신앙서적 읽기, 기도하기, 헌금 및 십일조 드리기, 주일성수하기, 전도하기 등. 아주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신앙의 알맹이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돌들로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회개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렇게 쉽게 세상을 향해 ‘불신지옥’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말은 우리들 자신에게 먼저 돌려야 할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얼마 전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서 직업군 33개를 놓고 신뢰도 조사를 했습니다. 1등이 어떤 직업일까요? 소방관입니다. 2등은 간호사, 3등은 환경미화원입니다. 개신교 목사는 몇 등쯤 될까요? 25등입니다. 신부님은 11등, 승려는 18등. 꼴찌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언젠가 지하철 전동차에서 ‘어느 소방관의 기도’라는 짤막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A. W. Linn이라는 소방관이 직접 지은 기도시라고 하더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가 업무의 부름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시여/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나이와 상관없이/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너무 늦기 전에/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언제나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어/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저는 제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기 원하며/최선을 다해/저의 모든 이웃을 지키며/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길 원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저의 목숨을 잃어야만 한다면/부디 당신의 보호의 손길로/저의 자녀들과 아내를 축복하여 주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삶으로 실천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목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목사가 그럴 것이라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방관을 더 신뢰합니다. 그래서 소방관의 직업 신뢰도가 1등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회개가 필요합니까, 누가 먼저 회개하길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실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전도할 때 이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뜨뜻미지근합니다. 돌같이 굳어졌습니다. 느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아픔에 대한 눈물이 없습니다. 억울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도 같이 울어줄 줄을 모릅니다. 한참 시국선언이 진행될 때였습니다. 지난 6월 9일 젊은 작가들의 선언문에 담긴 한 대목이 제 가슴을 때렸습니다.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교회가 먼저 해야 할 말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가냘픈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교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주님이 쫓겨나서 너무 속상해서 ‘내가 다시 너와 있고 싶다. 들어가고 싶다. 문을 열어다오. 제발 문 좀 열어다오. 내가 너희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 불붙는 사랑을, 진리의 말씀을 너희들과 나누고 싶다. 너희들과 식사를 하듯 가깝게 교통하면서 나의 나라를 이 세상에 펼쳐가고 싶다. 문을 좀 열어다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누가 필요한 것입니까? 회개는 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우리 한국교회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에 대해 ‘95%는 참 괜찮은데 5%가 문제다’ 라고 변호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리석은 변명입니다. 잘못된 5%가 바로 교회지도층이라면 그들을 지도층으로 세운 95%도 역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좋은 점이 많이 있어보여도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이건 아니다’ 짚으신 것이 있으면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니고 있던 점검표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점검표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스스로 성적을 매겼습니다. ‘A+++입니다! 절기 잘 지키잖아요. 두 손 벌려 기도하잖아요. 십일조 잘 하잖아요. 절기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모이는데요!’ 그러나 하나님의 점검표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 가운데 있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진실로 안아주고 있느냐. 과부를 돌아봐주고 있느냐. 고아를 돌아봐주고 있느냐. 땅 잃은 사람을 돌아봐주고 있느냐. 외국에서 흘러들어와 힘겹게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감싸주고 있느냐?’ 우리가 스스로 만든 점검표에 따른 점수가 아무리 높은들 하나님 앞에선 휴지조각일 뿐입니다. 변명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입을 닫고 무릎을 꿇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일까요?

2. 진정한 회개(8, 10-14)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진정한 회개란 회개에 걸맞은 좋은 열매를 잘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점검표에 맞지 않는 삶을 구체적으로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도(道)를 따르는 사람들’로 불렸는데요(행 9:2; 19:9, 23; 22:4; 24:14, 22). 이는 기독교를 ‘道’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짐 월리스가 <회심>이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뭔가 살아가는 법이 우리와는 다르구나!’ 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경우 사람들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놀라운 삶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을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짐 월리스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는 전도할 때 야박하게 전도할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이야, 믿고 살래, 안 믿고 죽을래. 왜 이렇게 협박하는 전도를 할까? 그것은 그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삶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전도는 초대 교회처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나! 멋지다. 그 비밀이 어디 있나,’ 묻고 싶어져야 합니다. 그때 ‘아, 내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얼마나 멋지고 감동적이겠습니까? 그러나 보여줄 감동적 삶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진 않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다보니 ‘안 믿으면 죽어! 지옥 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삶 전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회개하면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이고 수직적인 만남을 떠 올립니다. 이웃 문제, 사회문제는 부차적인 단계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첫 순간부터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의 빛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용산에서 5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살았는데 하나님,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잘 된 것입니까?’ 물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묻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세례요한이 요구하는 회개의 실례를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무리들의 예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의 준엄한 경고에 가슴이 찔린 무리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이에 그는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답합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내가 지닌 것 중 남는 것으로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한 벌을 나눠 주어 그와 같이 나도 한 벌로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김규항 씨는 <예수전>에서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이렇게 설파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이른바 ‘나눔’에 대한 우리의 알량하고 가식적인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부모들은 제 아이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욕망을 ‘부자가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우라’는 식으로 우회하여 표현하곤 하는 것이다. …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지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 (109-110 쪽)

그러므로 그가 잘 말한 것처럼 진정한 나눔이란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깊이 파고들어온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소비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기복신앙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석훈 씨는 <괴물의 탄생>에서 설날이 되면 서로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형편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인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한국경제의 위대한 선택이라고 부르고 싶고’ 그 말을 아예 ‘마음속에서 지우는 순간, 그것을 대전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들부터 앞장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사랑해야 합니까? 절대로 기독교가 금욕주의를 가르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이 그 유일한 이유입니다. 지구촌에는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이 15억에 이르는데, 먹는 물을 하루에 몇 번씩 길어 오느라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우리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세상은 냉혹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필요한 소비에 자원을 동원하는 만큼, 지구촌의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갈 자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부에 대한 태도만 바로 잡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짐 월리스가 <회심>에서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마 6:21)’ 는 예수님의 말씀을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보물도 있다’ 로 바꿔서 이해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올바른 곳에 있는 한, 우리가 얼마나 많이 쓰느냐 혹은 우리가 얼마나 축적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데 총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자발적 가난 혹은 복음적 가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누리는 부의 양을 주려 소박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진실로 하나님나라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사적재산권에 대한 왜곡된 사고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희년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까워서 혹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원주인에게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입니까, 어긴 것입니까? 어긴 것입니다. 우리는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너무 자본주의식으로 해석합니다. ‘내가 땀 흘려 번 것은 내 꺼야! 내가 스스로 내어 주기 전에 그것을 누구도 건드리면 절대 안 돼! 그건 도적질이야!’ 그러나 ‘무엇이 도적질인가’ 하는 것은, 중미의 경제학자이며 신학자인 힌켈러머트(F. J. Hinkelammert)가 잘 밝힌 것처럼, 특정 사회가 인간의 삶과 권리 그리고 사회에 대하여 어떤 이상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누스(R. Gnuse)도 잘 지적한 것처럼, 성경이 보장해주는 사적재산권이란 부를 무한대로 축적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일원은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원을 소유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 도덕성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별도의 차원 즉 인격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한 사회가 이런 저런 그럴 듯한 사유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도적질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희년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눅 4:16-21).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선포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런대 그 전통이 왜 사라졌습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격되어 세속권력을 얻게 된 데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이 없는데 내가 여유분의 먹을 것을 갖고 있으면 그것이 도적질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진실한 관심을 잃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는데 매몰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자본주의식 사적재산권을 지키는데 앞장서는 대표적인 세력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선 소비주의와 기복신앙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우리의 잘못된 의식과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나눔의 정신을 몸에 익혀 소박한 삶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보호하기 원하시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고 있는 세상의 불의한 제도를 변혁시켜나가는 일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맺음말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며 조심해야할 두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멋진 길을 가고 있다’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우상입니다. 부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로 이 함정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제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직접 찾아가셨고, 부자들은 자기에게 찾아오게 하셨다’ 성경의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를 신랄하게 책망하시고 냉혹한 요구를 하셨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회개의 길은 걸어가면서 이 주님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함정은 절망입니다. 노동가요 중 ‘길 그 끝에 서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섰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 온 것처럼/ 눈앞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먼저 간 사람들의 빛을 따라 온 것처럼/이제 우리가 스스로 빛이 될 차례야…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새길 만한 노래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종종 길 끝에 서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기억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바른 길을 걸어온 증거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야말로 바로 길 끝에 서 계셨던 분임을 기억합시다. 그 순간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 끝에서 기꺼이 죽음의 잔을 삼키셨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셨음을 아셨습니다. 죽음으로 우리 앞에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 다 끝난 곳에서 정호승이 노래한 것처럼 스스로 ‘봄 길’이 되셨습니다. 이 주님을 늘 믿고 사모하면서 힘들다고 결코 뒤돌아서지 맙시다. 변절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서 꼭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부둥켜안고 울고 웃고 춤출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박득훈 목사 : 언덕교회 담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공동대표 
                 통일시대평화누리 공동대표

* 이 글은 2009년 성서한국전국대회 저녁집회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요약 : 오수경간사(학원복음화협의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