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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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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원하신 교회의 모습 

마가복음 10:17-22에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토지를 포기하는 교회이다. 대토지 소유를 포기한 자들만이 소속되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교회이다. 평균이상의 토지가치 소유를 포기하지 않고 교회로 들어 온 자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징계를 받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이 교회에 소속하고 싶을 경우에 심히 슬퍼하며 근심하게 된다. 그들은 토지를 택하든지 예수를 택하든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0:21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이러한 교회를 이루도록 뜻하셨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음을 사도행전 2:43-47은 보여준다. 이러한 교회에는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으며,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표적과 기사가 사라지고 있으며,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으며, 믿는 자들의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부동산 투기를 할 때 교회도 부동산 투기를 하였기 때문이며, 세상 사람들이 토지를 탐할 때, 교인들도 토지를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물을 좋아하고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가 하나님의 것임을 잊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주신 토지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레위기 25:23)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웃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토지 투기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교회가 받는 벌은 성령께서 떠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표적도 기사도 사랑도 기쁨도 없으며, 오직 불신과 부패와 탐욕과 투쟁이 남을 뿐이다. 세상은 이러한 교회를 미워하게 되고 그러한 교회는 결국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다.

예수께서 원하신 교회는 세상과 같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른 교회이다. 세상이 토지를 탐할 때, 토지를 버리는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은 어둡지만 교회는 밝아야 한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희생적이어야 하며, 밤이 깊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별빛처럼 정결해야 한다. 교회는 밤 같은 세상 속에서 함께 밤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동화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의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동화된다면 세상이 교회로 나아올 이유를 잃게 될 것이다. 교회는 결코 세상처럼 되어선 안 된다. 잠시 살기 위해 세상처럼 된 교회는 영원히 죽게 될 것이며, 고난을 받더라도 세상처럼 되지 않은 교회는 잠시 죽는 것 같으나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한국의 미래 

하나님은 지계표를 옮겨가며 남의 토지를 점령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셨다(미가 2:2-4).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남의 토지를 빼앗는 자들이 받는 벌은 그들의 땅이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동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빼앗아 넓힌 이스라엘의 대토지소유주들의 땅은 결국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로마에 빼앗겼다. 결국 나라를 잃고 땅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빼앗긴 땅에는 자유도 풍요도 없이 슬픈 애가만 남을 뿐이다. 빼앗긴 땅에는 과연 봄이 오는가? 봄이 와도 그 봄은 동일한 봄이 아니고 가을이 와도 그것은 동일한 가을이 아니다. 봄은 정복자들을 위해 고단히 일해야 하는 봄이며 가을은 정복자들에게 열매를 빼앗기는 가을이다.

한국이 부동산 투기 세력에 의해 멍들고 있을 때,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땅인 간도와 우리 민족의 역사인 고구려사와 고조선사를 빼앗고 있었다. 이제 중국은 유사시에 북한의 토지 전체를 차지하려고 넘보고 있으며, 일본은 독도를 침탈하려고 애쓰고 있다. 한국에서 국민이 국토에 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할 때에는 미가서의 예언대로 한국은 주변 나라에 의하여 그 영토를 빼앗기는 벌을 받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공의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며 온 국민이 국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된다면, 이 땅을 노리는 나라들이 오히려 지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받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웃의 토지를 소유하려는 야욕을 실행에 옮기려는 자들에 관하여 구약성서는 선언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한 나라의 영토 경계를 지키는 일은 한 나라 속의 토지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 나라 속에 이웃의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투기 세력들이 많이 있으면 그 나라의 영토 경계표도 이웃 나라에 의해 옮겨질 위험에 처한다. 로마가 망한 것은 자영농들의 토지 경계표들이 무너지고 대토지소유제가 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가 각각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망한 것도 토지 경계표가 옮겨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토지법이 무시되고 대토지소유제가 도입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에도 토지경계표를 옮기는 자들이 많으면 대한민국의 영토 경계표도 옮겨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 자신의 땅을 한 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누가 한국의 영토를 수호하려고 외적과 싸우겠는가? 그러므로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는 법과, 토지가 전 국민에게 골고루 소유될 수 있는 정책은 조국의 영토 수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 나라의 국방력은 곧 그 나라의 경제력에 비례하며, 나라의 경제력은 산업의 경쟁력에 비례하여 발전한다. 그러나 자본이 산업기술에 투자되는 대신 토지에 투기되는 나라에는 산업의 경쟁력이 생길 수 없다. 그러한 나라는 거품으로 인해 경제규모가 성장하는 듯하지만 그 거품이 꺼지는 날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품 경제를 키우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국가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이다. 따라서 이것은 영토를 수호할 힘을 잃게 하는 매국적인 정책이다. 조국의 영토의 경계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지키려면 부동산 투기 세력으로부터 이 땅을 보호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따라서 모든 국민은 국가의 영토에 관한 평등한 주권을 가진다. 이러한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진 나라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계제국 로마도 그러했으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마저 영토 주권의 평등성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멸망했다. 대한민국의 영토 주권을 무너뜨리려 하는 이웃나라의 야욕 앞에 우리가 저항력을 키우는 길은 조국의 영토의 주권을 모든 국민이 누리는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국민이 가질 수 있는 평균치 이상의 토지가치 소유에 대해서는 적절한 과세가 이루어져야 한다. 토지의 경계표를 옮긴 사람들이 세금으로 대가를 치러야 국가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고 영토를 수호하는 재원도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애국자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고귀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예수를 따르는 자의 신성한 의무로 여길 것이다.

국민의 약 1%가 민유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전체가구의 반가량이 한 조각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은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소수의 부자들이 전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1세기 로마제국의 상황과 유사하며,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킨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과 유사하다. 이처럼 토지 경계표를 무너뜨린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 오시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토지와 부동산을 많이 가진 자들이 세금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시면 무어라 하실까?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부동산 투기에 열심인 자들을 보면 무어라 하실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토지가 필요하여 보유하려거든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지재원으로 사용하도록 하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맺음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을 환영할 사람들이 교회로 모일 수 있고, 이 예수의 말씀에 슬퍼하여 예수를 떠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면 한국교회에는 미래가 있다. 또한 그러한 교회가 있는 사회에도 미래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암담한 것은 한국 사회에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빛을 잃고 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암담하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지만 그 정신은 이미 죽지는 않았는가? 죽은 시체와 같이 되어버린 교회들이 썩는 냄새가 세상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많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반대하고 있다.

이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이 아니면 이러한 교회에는 소망이 없다. “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교회는 나사로처럼 살 것이지만, 이를 거역하는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게 될 것이다. 예수냐, 토지냐의 선택은 교회에게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이다. 기독교는 토지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예수 없이 살 수 없다.

재물과 권력을 얻었지만 예수를 버린 기독교의 앞날은 불을 본 듯 분명하다. 그것은 멸망이다. 그러한 교회는 오히려 세상에 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 그러나 교회의 멸망은 세상이 기뻐할 일이 아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무엇으로 세상을 비추고 무엇으로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할 것인가? 구한말과 비슷한 시기를 맞이한 지금 이 민족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그 복음을 체화한 참된 교회가 필요하다. 그러한 교회들이 하나둘 늘어나지 않고 돈과 성장과 권력만을 좋아하는 교회만 늘어난다면 한국 기독교와 이 민족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이 사회에 남은 마지막 소망이다.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신음하며 기다리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교회의 등장이다. 이러한 교회가 등장하여 세상을 비추기를 온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이 한국을 가득 채울 때 한국은 동방의 찬란한 등불로 깨어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공의로운 나라가 될 것이다.

토지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교회가 앞장서서 따를 때, 한국 사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디자인한 노예 없는 사회, 헨리 조지가 꿈꾸던 토지가치세 복지사회, 손문이 소망하던 평균지권 사회, 자신의 토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산상수훈의 삶을 살려고 한 톨스토이가 염원하던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강대국들이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애국가 가사처럼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우하시는 나라가 될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명기 28:1, 7).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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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14) 역사적 예수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3. 30. 11:5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전승자들은 전통을 보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승 과정에는 전승자의 경향성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전승자의 경향성은 전통에 담긴 내용에 적용된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고 전승자의 신학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17-22은 본래의 전승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일 수도 있고, 마가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여 재해석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0:17-22에 담겨진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과연 역사적 예수께서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주신 내용을 그대로 담은 것일까? 

설명가능성 원리로 본 마가복음 10:21-22 

사도행전 2:45과 4:34-35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5:1-11에는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숨기고 바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벌을 받아 죽는 이야기가 기록된다. 누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일부러 창작하였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누가는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 마가복음 10:22을 부에 관한 것으로 바꾸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23). 이처럼 토지에 관한 마가복음 본문을 부 일반에 관한 것으로 변경한 누가가 토지에 관한 이야기를 창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바치지 않아서 벌을 받아 죽게 되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어려움은 이 이야기의 진정성의 표지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일을 행한 이유는 그들이 믿고 따른 예수의 가르침에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내용이 있을 때 설명이 잘된다. 그러므로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한 마가복음 10:21-22의 내용은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유대교에의 비유사성 

토지의 소유가 소수에게 편중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린 사회를 배경으로 볼 때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마가복음 10:21)은 매우 적합하다. 이것은 그 시대에 마땅히 선포되어야할 메시지였다. 또한 이러한 메시지는 당시 유대인 권력자들이 싫어할 메시지였으므로 예수께서 그를 죽일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당하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그의 죽음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이므로 역사적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가의 전승경향성에의 비유사성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난해구절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2:5-7은 예수께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 용서를 하심을 기록하며, 마가복음 6:48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물 위를 걷는 일을 행하심을 기록한다. 마가복음 14:62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될 것과 하늘 구름을 타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듣기엔 신성모독으로 들렸다(마가복음 14:64). 그러므로 마가에게는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대조시키며 선하심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 이야기를 창작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마가 10:18은 역사적 진정성 때문에 보존되어 왔고, 그리하여 마가도 이것을 보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22에 사용된 ‘끄떼마따’(토지)는 과연 마가가 창작한 흔적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누가복음의 ‘쁠루시오스’(부유한)가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는가? ‘끄떼마’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단지 4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1번 사용된다. 한편 형용사 ‘쁠루시오스’는 신약성서에서 28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서 2번 사용된다. 70인역(외경제외)에서는 ‘끄떼마’가 7번, ‘플루시오스’가 31번 사용된다. 그러므로 ‘끄떼마’는 ‘쁠루시오스’보다 덜 친숙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더 친숙한 ‘쁠루시오스’(부유한)를 ‘끄떼마’(토지)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혹시, ‘끄떼마’(토지)가 아니라 ‘크레마’(재물)이 더 오래된 전승의 단계를 반영하지는 않을까? ‘크레마’라는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10번 사용되었고, 신약성서에서 6번 (마가복음에서는 1번)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70인역(외경제외)에서 7번, 신약성서에서 4번 사용된 단어인 ‘끄떼마’보다는 더 친숙한 단어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크레마’를 일부러 상대적으로 덜 친숙한 ‘끄떼마’로 바꾸어 전승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마가가 10:22을 창작하였을 가능성도 낮다. 만일 창작하였다면 마가는 그가 다른 곳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끄떼마’보다는 9번이나 사용한 ‘아그로스’(전토)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공관복음서 전승경향성에서 비유사성 

마가복음 10:18에서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예수는 “왜 나를 선하다고 부르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답한다(18절). 예수의 신성을 믿은 초대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일부러 만들어 내었을 리는 없다. 초대 교회의 전승 경향성은 마태복음에 반영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평행구절(19:17)에서 “왜 나에게 선함에 관하여 말하느냐? 오직 한분이 선한 분이시다.”라고 표현을 바꿈으로써 예수를 선하다고 부른 것을 부정하는 마가복음의 표현을 피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마태복음의 저자도 고치고 싶어 한 마가복음 10:18의 내용과 표현을 창작하였을 리 없다.

마가복음 10:19의 ‘사취하지 말라’는 마태복음(19:19)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절(18:20)에서 생략된다. 이것은 이것이 십계명에 속한 계명이 아니므로 십계명에 속한 계명들을 언급하는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일부러 십계명 목록의 중간에 십계명 중에 하나가 아닌 ‘사취하지 말라’를 추가하였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1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곧 이어 그 사람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지적되고(21절), 그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근심하여 떠나감이 묘사된다(22절). 결국 이렇게 행할 사람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때 예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의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문맥에 맞지 않다고 여겨져 생략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 경향성은 마가가 “예수께서 그를 응시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다.”는 기록을 일부러 창작하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마가복음 10:21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네가 온전하려고 한다면”이라고 바꾼다.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는 마가복음의 신학이 너무 과격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고 믿고(마태복음 5:17) 이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5:19) 마태복음 저자에게마저도 과격하다고 여겨진 예수의 가르침이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마가복음 10:22도 전승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기보다는 역사적 진정성에 토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검증된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의 일치 

마가복음 10:17-22에 나타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토지제도를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면모이므로 이러한 면모에 일치하는 (많은 토지를 가진 자는 토지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는) 마가복음 10:21의 예수의 가르침도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0:9은 창세기 2:24에 담긴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는데,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10:9의 내용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증거는 우선 이 말씀이 많은 독립 자료들에 의해 지원받는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0-11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나누이지 말고, - 나누일지라도 재혼하지 않고 지내거나 남편과 재결합하라, - 남편은 아내를 이혼시키지 말라.” 이 말씀은 이혼을 금하는 점에서 이혼(법적 이혼) 내지 별거(사실상의 이혼)를 금하는 마가복음 10:9(“하나님께서 합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게 하라”)의 말씀의 내용과 일치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는 마가복음이 기록되기 전이었을 것이므로 고린도전서의 증거는 마가복음 10:9-12의 진정성을 지지한다.

예수 당시 유대교에 이혼을 완전히 금한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의 말씀은 당시 유대교에 의하여 쉽게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예수께서 미움을 받아 박해를 당할 수 있게 된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7:15은 믿지 않는 자가 이혼하고자 하면 이혼하라고 권하는데, 이것은 이방 기독교인의 경우에 배우자가 불신자일 경우 이혼이 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마가복음 10:9의 말씀이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9은 초기의 이방 기독교의 산물일 수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방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므로 마가복음 10:9은 마가의 창작이 아닐 것이다.

마태복음 19:9은 마가복음 10:11에 “음행으로 인하지 않고는”이라는 예외 조항을 추가한다. 이것은 마가복음 10:11이 너무 엄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배우자가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상황에서도 이혼을 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너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저자는 이러한 예외 조항을 추가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매우 철저한 유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마태복음에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마가복음 10:11이 마가나 초대 교회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가복음 10:9은 배우자를 이혼시키고 재혼한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부합한다. 세례 요한이 이러한 결합을 비판하고 죽임을 당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셨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마가복음 10:9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주어질 수 있는 말씀이다. 또한, 마가복음 10:9은 남편이 아내를 마음껏 이혼시킬 수 있었던 (불공평한) 당시 상황 속에서 주어질 수 있었던 말씀이다. 그러므로 당시 역사적 배경도 이 말씀의 진정성을 지원한다.

구약의 정신을 철저히 적용하는 마가복음 10:9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마가복음 10:17-22도 나타난 구약이 토지법의 정신이 철저하게 적용하므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회 배경에의 적합성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에서는 전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하는 귀족들이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통치 영역의 절반 이상의 땅을 소유하였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예를 들어 하르솜(Charson)의 아들 엘르아잘은 아버지로부터 1,000 개의 마을들을 상속받았다고 한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사도행전 4:36-37은 레위인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사도들에게 내어놓는다고 기록한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구약의 토지법이 어겨지고 있던 당시 사회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사람과 같이 십계명을 지키되 토지법은 어기는 유대인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미 토지의 균형적인 소유가 깨어진 사회 속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는 구약성서의 토지법을 어기고 있는 것에 관한 가책을 갖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가책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마가복음 10:20, 22은 당시 배경에 잘 들어맞는다.

맺음말 

마가복음 10:17-22은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 즉 대지주에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본문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한 증거들을 검토해 볼 때, 이것은 마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예수를 믿든지 역사적 예수를 믿든지 예수를 따르고자 하면 토지에 관한 무한한 권리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를 포기하기는커녕 부동산에 대한 세금마저 내기 싫어하는 모습은 예수를 따르는 바른 모습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중에는 대토지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토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토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일 수 없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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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토지’로 번역하면 문맥에 맞는다는 것은 ‘재산’대신 ‘토지’를 번역어로 선택하기 위해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재산” 또는 “재물”이라는 의미도 마가복음 10:22의 문맥에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여 더 문맥에 잘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즉, ‘토지’란 번역을 선택하는 충분한 이유는 다른 번역 가능성들보다 ‘토지’란 번역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이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한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을 때, 강조점은 “팔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쪽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과 관련된다. 율법의 정신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은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명기 15:9-11).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러한 구약의 정신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명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진 것을 팔라”는 예수의 말씀 앞에 부자가 항의 한 마디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율법이 허용하는 유동성 재산까지 처분하라고 하시는 것을 너무하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자는 왜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 하는지 예수께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가 갑자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그에게 단지 유동성 재산만 많았을 경우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많이 가진 것이 토지였을 때에는 그의 행동이 잘 설명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것은 명백하게 율법에 위배되기에 토지를 팔아서 처분하고 이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지적을 원칙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의 명령을 실천하느냐 못하느냐 인데 그는 토지에 관련된 율법의 요구를 적용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23절처럼 재물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까? 

그런데, 23절에는 재물, 부, 돈 등을 뜻하는 ‘크레마’의 복수형 ‘크레마따’가 등장한다. 23절 문맥도 ‘크레마따’가 토지를 뜻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크레마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반응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24절). 이로 미루어 보아 ‘크레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하는 구약의 토지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놀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3절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이 되려면 ‘크레마따’가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가리켜야 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 있었다.

물론 23절부터 재물에 관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토대하여 22절까지에서 다루어진 내용도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예수는 토지가 아니라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에게 그의 재물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을 수도 있다. 그가 재물을 포기하기 힘들어 슬퍼하며 돌아간 것을 보고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지적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읽을 경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으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일까? 물론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율법 정신을 염두에 둘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28-29절에서 토지와 가옥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가고 유동성 재산이 이 목록에서 빠져 있는 것은 23절의 ‘재물’(크레마따)마저도 특별히 가옥과 토지를 염두에 둔 것이며, 25절의 ‘부자’도 토지를 많이 가진 부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과연 토지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을까? 

예수께 나아온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20절). 이러한 대답을 듣고 예수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구약성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법인 토지법을 어길 수 있었을까?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지킨다고 한 것은 18-19절에 언급된 계명들이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속여 취하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다. 이 사람은 이 계명들에 토지법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하였을 수도 있다.

토지법을 어긴 것은 도둑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토지법을 어겼다면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토지법을 어긴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을 수 있다.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참으로 부유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었고, 사람들은 부유해지면 토지를 많이 구입하여 소작시켰다. 즉,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구약성서의 토지법이 어겨지던 사회였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대토지 소유가 도둑질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는 예수의 지적은 문맥상 앞에서 언급한 계명 또는 구약성서에 담긴 율법을 실천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킬 때 토지법까지도 잘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신 것(21절)도 그가 율법을 모두 잘 지켰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을 지킴에 헌신한 정도를 일단 인정해 주시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헌신을 하도록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에게만 사랑을 표현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 외에는 흠 없이 율법을 지킨 이 사람에게 얼마든지 사랑을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이다. 또한 사랑을 표현하시면서도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우도록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다.  

마가복음 10:17-31의 흐름 속에서의 토지와 재물 

마가복음 10:22에는 ‘끄떼마따’가 사용되고 23절에는 ‘크레마따’가 사용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는 토지를 다른 하나는 재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은 과연 본문을 일관성 있게 읽는 것인가? 22절의 ‘끄떼마따’를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하려면 이러한 의문도 해소하여야 한다.

23절에 ‘크레마따’를 사용한 것은 마가복음의 서사의 흐름 속에서 예기하지 못한 전환을 통해 놀라움을 자아내는 문학적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영생을 얻는 길을 율법, 특히 십계명에 관련시킨 후 십계명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부자에게 토지법을 지켜야 함을 지적하여 그를 놀라게 한다. 이어서 토지만이 아니라 부 일반의 소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토지법을 지킴으로 인해 안심하는 제자들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침내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는 절망으로 제자들을 몰아간다(26절). 이 절망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에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이러한 절망 후에 반전이 도래한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7절). 이러한 흐름 속에서 22절은 “토지”에 관하여 23절은 “재물”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일관성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극적 효과를 낳는 문학적 기법으로 볼 수 있다.

28-31절의 말씀은 27절에 도입된 반전에 이어지는 위로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신다(27절). 그리하여 반드시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전토를 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29-30절). 여기서 재물 일반에 관한 가르침은 가옥, 전토 등의 부동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가족이 추가적으로 다루어진다. 복음에 반응하여 가옥이나 전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어놓고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마가복음의 독자들 중에는 이미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물한다. 

왜 좀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다면, 마가는 왜 더 명확한 용어대신에 이처럼 애매한 용어를 선택하였을까?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였다면 마가는 22절에서 얼마든지 30절에서처럼 ‘아그루스’(전토)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끄떼마따’처럼 토지나 재물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 애매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가가 이 단어를 “재물”이란 뜻으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만 ‘끄떼마따’는 우리에게 명확하지 않을 뿐이며, 마가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언제나 토지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 그러므로 1세기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단어는 명확하게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볼 수 있다.

22절에 ‘아그루스’대신 ‘끄떼마따’가 쓰인 것은 23절에 등장하는 ‘크레마따’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운율을 위한 고려였을 수도 있고, 토지를 다루는 22절에서 재물을 다루는 23절로 매끄럽게 넘어가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토지를 가리키려면 22절에서 다른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는 설명은 이 단어가 “재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설명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재물”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이라, 문맥에 맞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따라 ‘끄떼마따’를 “재물”보다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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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12) 마가복음 10:22의 주해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10. 2. 23. 16:5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친숙한 주해 

번역 성경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주석서를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보다는 “재물”을 접하게 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마가복음 10:22에 쓰인 헬라어 단어 ‘끄떼마따’가 “재산”이나 “재물”의 뜻을 가진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건드리(R. H. Gundry)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그 어원인 ‘끄따오마이’(획득하다) 동사에 관련시켜 “획득물”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획득물’은 물론 문맥에 따라 토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좀더 넓은 의미로 쓰여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재산’이란 단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네덜란드의 판 이어설(B. M. F. van Iersel)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도나휴와 해링턴(J. R. Donahue & D. J. Harrington)이나 에반스(C. A. Evans)의 이해도 동일하다. 후커(M. D. Hooker)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부”(wealth)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독일학자 그닐카(J. Gnilka)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소유”란 뜻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사본 필사자들이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듯이 성경주해자들도 평행구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많은 주해자들이 마가복음 10:22를 해석할 때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누가복음 18:23의 영향일 수 있다. 

“그 사람은 끄떼마따를 많이 소유하였으므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가복음 10:22, 사역).

그 사람은 큰 부자였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슬퍼하였다”(누가복음 18:23, 사역). 

사본학에서 친숙한 읽기가 원래의 읽기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듯이 주석학에서도 친숙한 주해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왜곡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본문을 주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서 본문을 주해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안경으로 본문을 보며 본문을 자신에게 친숙한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해자들의 경향을 벗어나려면 덜 친숙한 주해를 선택해야 한다. 많은 주해자들이 동의하는 친숙한 주해를 따르는 것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일 수는 있으나 학문적으로 바르지는 않다. 본문 주해에 있어서도 진리의 길은 좁아서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원문을 복원할 때 기계적으로 사본의 수를 따라가는 것이 위험하듯이 본문을 주해할 때 무조건 학자들의 수를 따라가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대신 독자들의 반응을 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덜 친숙한 주해 

주석가들 가운데에는 동료 주석가들이 빠져 있는 경향성을 벗어나 낯선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제안을 엉뚱한 소수 의견이라고 간주하지 말고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성경 주석가들은 언제나 주관적 경향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본문 연구를 통하여 독자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경향성을 극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반적인 경향성을 벗어나는 주해는 낯선 제안이며 한동안 소수 의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주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해를 하면서 주관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지만, 주관성을 많이 극복한 주해는 본문의 의미를 많이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없다면 주해 작업은 애초부터 무의미할 것이다. 개인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자들의 주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빠지는 공통적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창조적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에드워즈(J. R. Edwards)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또는 “소유지”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지적하면서 이 단어가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밝히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우트레흐트 대학 교수였던 발욘(J. M. S. Baljon)은 이미 20세기 초에 ‘끄떼마따’가 재물을 가리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이 단어가 특히 소유지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런데 테일러(V. Taylor)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소유지”를 가리키며, 따라서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그 사람은 지주임이 밝혀진다고 주장하였다. 레인(W. L. Lane)과 스웨테(H. B. Swete)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고 간주한다. 독일에서 페쉬(R. Pesch)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소유를 가리킨다고 간주하였고, 만(C. S. Mann)도 이 구절에서 ‘끄떼마따’가 재산 중에서 특히 토지와 관련된다고 본다. 성서번역학자들 중에는 브랫처(R. G. Bratcher)와 나이다(E. A. Nida)가 ‘끄떼마따’가 일반적으로는 재산을, 특수하게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문화권에 따라 농장’이나 ‘가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해는 흔히 접하게 되는 주해들과 달리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해는 번역 성경의 영향을 받거나 통설의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학문적인 통찰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비유사한 예수의 모습을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영향에 의하며 채색된 모습이라고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예수의 모습이 전승된 이유는 그것이 진짜 예수의 모습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 원리는 주석학에도 다음과 같이 응용될 수 있다. 즉 주석학자들의 경향성에 상반된 주해는 성경저자의 의도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문맥을 통한 검증 

위에 제시한 주석학자들의 제안은 참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므로 참된 본문의 뜻을 드러내는 주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은 증거의 제시 없이 단지 주장된 것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과연 “토지”를 뜻할 수 있는 지는 단지 주장될 것이 아니라 검증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뜻은 그 문맥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가 “토지”를 뜻할 때 문맥에 더욱 잘 맞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주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리는 문맥이다. 주해는 문맥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 나가는 학문적 작업이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를 많이 가진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가 가진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1절). 즉, 그가 슬퍼한 이유는 포기해야 하는 끄떼마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문맥에서 ‘끄떼마따’는 토지일 수도 있고 다른 유동성 재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팔아야만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토지나 집일 가능성이 높다. 유동성 재산, 즉 돈이나 보물이라면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의 의미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께서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명령할 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신 데에 있다(21절).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임이 19-20절을 살펴보면 곧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기에, 부족한 것은 율법 지킴과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끄떼마따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이유는 율법 준수와 관련되어 있다.

도대체 끄떼마따가 무엇이기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게 되는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율법은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을 금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을 따른 사람은 토지를 많이 가질 수 없었다. 소유지의 경계를 나타내는 토지 경계표를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자신의 토지와 이웃의 토지의 경계표를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이웃의 토지를 영구적으로 구입할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넓힐 수 없음을 뜻한다. 레위기의 토지법에 의하면 토지를 영구 매매하면 안 되고(레위기 25:23), 희년 때까지 임대할 수 있을 뿐이다(레위기 25:14-16, 28). 희년이 되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토지 경계표는 옮겨지지 않게 된다.

대토지 소유를 금하는 율법 조항은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레위기 25:23).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배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민수기 32장; 여호수아 13장 이하) 마땅히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땅을 많이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아합 왕의 땅과 교환하기를 거부한 것은(열왕기상 21:3) 이러한 토지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나봇의 시대에도 토지법은 나봇처럼 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었다. 아합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나봇의 거절 앞에 어찌할 수 없어 근심한 것은(열왕기상 21:4) 그 역시 토지법을 쉽사리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 여인 이세벨이나 이 토지법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토지법이 점점 더 어겨지게 되었고, 드디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마저도 토지법을 지키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구약성서에 담긴 토지법을 따르면 토지를 많이 가지게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 영생의 길을 질문한 이 사람이 “많이” 가짐으로써 율법을 어기게 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토지였을 것이다. 조상이 율법을 어기고 취한 토지를 물려받아 소유하고 있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해도 그가 그러한 토지를 돌려줄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9절에서 버림의 목록에 ‘전토,’ ‘집’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끄떼마따’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키지 않는 증거이다. 29-30절은 가옥이나 전토, 가족을 포기한 자가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21절은 가진 것들을 포기한 자가 하늘에서 보화를 받는다고 약속한다. 따라서 29-30절은 21절과 평행된다.  

네가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며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가질 것이다(21절, 사역).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 전토를 버린 자들 중에 ...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아무도 없다(29-30절, 사역). 

그리하여 21절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해진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이 언급하는 가옥, 가족, 전토에 평행된다. 그러므로 21절의 ‘네가 가진 것들’은 29절의 목록 중에서 팔 수 있는 가옥과 전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2절에서 그 부자에게 끄떼마따가 많았다고 할 때 그것은 가옥 내지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끄떼마따’는 용례상 가옥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문맥은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게 한다. 

맺음말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하여 재물이나 재산이라고 해석되지만,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러한 소수의 의견은 친숙하지 않은 주해이므로 오히려 주해자들이 흔히 빠지는 경향성을 극복하고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주해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문맥을 통하여 검증된다.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문맥에 맞는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는 토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신학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10. 1. 9. 00:4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신학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을 준비하며 (2)

지난 필자의 글 '한국교회 개혁은 신학 교육의 변화로부터'에 이어 이번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적 신학 교육의 방향과 정신을 풀어 보고자 한다. 현재의 상황이 어찌 보면 쉽지 않지만, 그 속에서 그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기대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다.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역사를 이룬 느헤미야의 사역처럼 우리도 한국교회의 새로운 재건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신학 교육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만이 아닌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온 백성 중 목회를 전문으로 하는 백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목회를  전문적으로 하기 위한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아닌 백성들은 신학을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인 신학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다.  흔히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도 신학을 배우는 방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을 배우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분을 알아갈수록 그분께 더 깊이 알아가고자 하는 욕구는 늘고, 결국 신학 교육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는,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을 위한 신학 교육도 당연히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이들을 위한 교육을 하지 않는다.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이 목회자 과정만 운영해도 지원자가 많아 수용하기 힘든데, 확실한 수요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교육과정을 만들어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고 이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니다. 또한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에서 수용하기가 여간 거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원칙적으로 신학은 목회자가 해야 하는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가진 신학교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학 교육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일상을 더 풍요롭게 꾸미고 싶어 한다. 느헤미야에 대한 <뉴스앤조이> 기사를 보고 문의하는 분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이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 소양을 구비한 성도들이 하나님나라 구현과 기독교 재구성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신학은 기독교 내에서의 소통만이 아닌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가 수반해야 한다.

신학이  정치학이나 경제학, 사회학 등의 일반 학문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열린 신학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 학문도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에도 자유롭게 소통할 대상으로 여기지 못해 결국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로 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보자. 강의실에서 경제학자와 신학자가 공동으로 연구한 논문을 가지고 강의하고 학생들이 주저없이 학자들에게 질문하는 자유로운 풍경,  신학자가 정치학을 전공하여 신학이 기반된 학문을 하고, 또한 정치학자가 신학을 공부하여 그 깊이를 더하는 광경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도  그 부분에 대한 심화 과정을 이수함으로 더 나은 학문적 체계를 잡는 것은 어떠한가?  우리는 연구를 통해 정치와 경제, 사회와 역사, 문화와 예술, 과학과 기술, 생태와 생명을 다루는 다양한 학문과 겸손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우리 주변에도 이만열 교수님이나 손봉호 교수님 같은 분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와 아울러 신학적 깊이도 갖추고 있음을 본다. 이외에도 기독 운동을 하는 분들 중 여러 분들은 이분들처럼 신학에 바탕을 둔 자신의 전공을 살린 일들을 하고 있음을 본다. 죽어 있는 신학이 아닌 살아 있는 신학이 되려면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가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신학은 성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나누지 못하는 종교는 결국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게 된다. 길에 버려진 소금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 고유의 맛을 내야 한다. 고난당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과 같이 울고, 소외된 자들이 있으면 안아 주며,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는 곳에 찾아가는 것이 예수의 삶이자 신학이다. 성경은 죽은 자들의 경전이 아니라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을 믿는다면 신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으로 이어짐을 알아야 한다. 단지 앉아서 글자에 파묻히는 공부가 아닌, 가슴으로 뜨거워지는 그런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학 교육의 틀은 인프라의 구축이 아닌 컨텐츠가 우선되어야 한다.

신학연구원 설립을 처음으로 주장했을 때 여러 반응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많은 분들은 인적, 물적 인프라에 대한 우려였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신학 교육을 하려는 것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는 수년간 기독청년아카데미 등을 비롯한 아카데미를 벤치마킹하면서  인프라의 구축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준비하며 시간만 허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격 교육이 활성화하고 노트북이나 PDA 하나만 가지면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의 신학 교육은 결국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라 컨텐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신학 교육과 차별화한 신학 교육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강의의 내용으로 수강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년간 변변한 강의실도 없이 여러 교회를 전전하면서도 매학기마다 300명의 수강생이 신청하는 기독청년아카데미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면 결국 그것은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라 컨텐츠의 문제일뿐이다. 또한 느헤미야의 장점은 자신의 분야에서 때묻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연구하는 강사진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헌신이 결국 여러 부분의 단점들을 보완하게 될 것이다.

<뉴스앤조이>에 신학연구원에 관한 첫 기사가 나간 이후 많은 분들의 격려와 문의를 받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신학 캠프 신청이 오는 것을 볼 때에 우리의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일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 다음번에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교육과 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부분을 기술하고자 한다.

고상환 /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 준비위원

* 신학연구원 느헤미야의 교육과정을 미리 맛보는 신학 캠프에 대한 사항은 www.nics.or.kr 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 이글은 기독교인터넷신문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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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삶으로 교회 개혁을 열망한다
교회개혁실천연대 남오성 신임 사무국장과 정운형 전 사무국장 인터뷰

입력 : 2010년 01월 03일 (일) 00:09:28 [조회수 : 346] 김세진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남오성 목사(좌)와 정운형 목사는 인상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 교회 개혁을 하기에 너무 순해 보인다고 하지만 삶에서 개혁을 해온 경험에서 개혁의 힘이 나온다. ⓒ 뉴스앤조이 김세진  
 
말한 대로 살고 사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신뢰할 수 있다. "말과 삶이 나란히 간다면 그것은 철학의 완성이다"는 베네딕트 수도회 조안 치티스터의 말을 교회 개혁 현장에 적용한다면, 개혁을 외치는 말과 삶이 나란히 가야 그것이 개혁의 완성일 것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 전 사무국장 정운형 목사(40)와 현 사무국장 남오성 목사(41)는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시도를 각자의 자리에서 해 왔다. 그렇기에 이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외치는 소리는 공허하지 않다.

정운형 목사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중형 교회의 부목사 자리에서 나와 3년 동안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다시 작은 교회의 부목사로 돌아갔다. 남오성 목사는 세습하라는 교회에서 굳이 나와 교회 개혁의 최전선에 있는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왔다. 권력과 자본이 집중된 교회와 교권을 감시하고 자정하라고 외치는 일은 거친 일에는 틀림없다. 남오성 목사 스스로 개혁연대를 '특공대', '총알받이'라고 부른다. 알면서도 무슨 이득을 보자고 특공대에 자원했을까.

부흥하는 교회에서 떠나고, 세습 유혹 떨치고

정운형 목사는 안정적인 중형 교회의 부목사 자리를 내놓고 나왔다. 교회 회복을 바라는 마음에서다. 담임목사의 전횡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많은데, 정 목사가 맡은 부서는 사람이 많아졌다. 오래 고민하다가 "교회가 엉망인데 혼자 사역을 잘하고 있는 게 개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담임목사는 "개척을 시켜주겠다"며 붙잡았지만 뿌리치고 나왔다. 사임한 후에도 오랜 시간을 기도한 뒤 담임목사를 찾아가 충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교회를 나온 후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가자 정 목사의 어머니는 좋아하지 않으셨다. 중대형 교회에서 안정적으로 사역하기 원하는 어머니의 바람과 다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께 "교회의 허물은 내 아픔과 같고, 그 기도 제목은 곧 어머니의 기도 제목"이라고 설득했다.

남오성 목사는 교회를 세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기까지 갈등이 심했다. 교회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세습해도 문제되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최근에 교회는 남 목사로 인해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남 목사는 개인 구원에 집중하던 교인들의 시각을 사회 참여로 확장시키기 위해 애썼고, 담임목사인 아버지를 계속 설득했다. 목사 아들이라는 이유로 교인들이 남 목사를 잘 따랐다. 남선교회가 장애인을 찾아가고, 청년회가 외국인 노동자를 섬기고,  고난 받은 이들을 위한 성탄 모임 등에 함께하는 것은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지금 교회를 떠나면 그마나 있었던 개혁의 움직임이 도루묵이 될 것 같아서 갈등했다. 반면 마음 한구석엔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를 물려받으면 최소한 평생 굶지 않고 애들 대학 등록금 걱정은 안 하고 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이 깊어져 주변에 신뢰할 수 있는 분에게 조언을 구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도 물었다. 어떤 사람은 가지 말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그런 세습이라면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러 어찌하든 좋다고도 했다.

동일한 처지였던 김장생 박사를 만났는데, "남 목사가 교회를 물려받는 게 이 교회에는 유익할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에는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타격이 있지만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것에는 세습을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남 목사는 망설임 없이 세습을 포기했다.

독단적인 목사, 가식적인 교수가 바로 나

정운형 목사와 남오성 목사가 교회 개혁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생뚱맞은 일이 아니다. 그들 삶의 연장선인 셈이다. 본인이 살았던 대로 한국교회에 말하기 위해서고, 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기도 하다. 하지만 조심스럽기도 하다. 나날이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 개혁연대 7,000인 찾기 프로젝트 전국 투어하면서 지방의 분쟁 교회를 찾아 예배하고 모임하던 사진. 사무실 직원들이 한사코 사양해도 지방에 있는 개혁연대 회원들은 멀리 찾아 왔다며 밥을 사려고 했다. ⓒ 뉴스앤조이 김세진  
 
정운형 목사는 교회 문제를 상담하면서 자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 힘들었다. 독단적, 파행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난 것 같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았고 거듭 채찍질하면서 성찰하려 애썼다.

남오성 목사도 웨신에서 교수로 있을 때, 허위와 가식이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교수가 되니 사람들이 엄청난 권위를 실어줬다. 같은 말을 해도 이전과 다르게 주의 깊게 경청하고 모두 꾸벅 인사했다. 연봉도 괜찮았고 사회의 존경을 받는 자리였다. 어느새 즐기고 있는 자신을 봤다. 그런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기에 교만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에서 추방당하고, 교수직에서 물러났지만

정운형 목사와 남오성 목사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사역하다가 한계에 부딪혔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 목사나 남 목사는 이를 실패라고 생각하기보다 사명이 거기까지려니 생각했다.

정운형 목사는 탈북자를 돕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추방당하면서 깊은 좌절을 경험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부터 탈북자 사역에 관심이 있었기에 교인들과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행을 결심했다. 정 목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20여 명이 함께 모이던 가정 교회가 공안의 단속에 걸렸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이 내국인을 대상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위법이다. 같이 일하던 중국인 전도사가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따귀를 맞고 협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동료 선교사의 이름을 대지는 않았다.

조사 끝에 바로 추방을 당해 공항으로 가는데, 마음이 허탈했다. 1년의 시간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절한 무기력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중국에 가서 탈북자들을 돕겠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를 하실 것이다 하는 마음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기대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하게 쫓겨나면서 마음이 어찌나 절박했던지, 공항까지 동행한 공안에게 마지막으로 전도했다.

당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 목사는 중국에서의 시간을 통해 교회 개혁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에서 초대 교회 형태의 '날복음'을 접했는데 그에 비해 한심하기 그지없는 한국교회의 상황을 봤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은 당장 생존하는 문제로 고민하며 "하루라도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살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교회 건축과 직분자 임직식에서 돈 내는 것 때문에 싸우는 모습이 너무나 한심해 보였다. 그 경험을 하니 개혁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남오성 목사는 사실 교수가 되기엔 조금 부족한 스펙이었다. 박사 과정을 공부하다가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할 수 없이 휴학하고 귀국했기 때문이다. 남 목사는 웨신에서 교수와 기획처장 제의를 받았다. 근본주의였던 웨신을 개혁적으로 바꾸는 일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남 목사가 개혁을 위한 실질적인 일의 진행을 맡았다. 웨신이 개혁연대, 성서한국, 성토모 등과 제휴를 맺고 '기독교 경제학과 사회 윤리' 같은 과목을 개설한 것도 남 목사가 있을 때 일이다.

남 목사는 지난 2월, 3년여 일했던 웨신 교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모두가 선망하는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었지만 남 목사는 홀가분하다고 했다. 교수라는 옷이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옷을 입으면 뒷목이 당기는 듯 불편했다. 학교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이 가식적인 것을 털어버리라고 좋은 자리 주셨나 보다" 하고 마음을 먹었다.

   
 
  ▲ 남오성 사무국장이 '사랑의교회 건축, 어떻게 볼 것인가' 포럼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 뉴스앤조이 유연석  
 
웨신에서의 경험은 남 목사를 교회 개혁의 현장과 연결해 주었고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해 주었다. 연봉이 괜찮고 존경받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싸움이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이 개혁 운동의 교두보가 되었다.

교수 자리에서 나왔다고 남 목사가 신학 교육을 통한 교회 개혁 운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웨신에 있을 때도 활동가였고 지금도 활동가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개혁연대에서도 특히 교육 사업에 힘을 쏟을 생각이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교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인들과 함께 교회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내 좌표가 어느 위치에 있고 내 임무와 교회 임무는 무엇인지를 아는 역사의식이 있으면 문제를 달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 목사는 지금 한국교회가 중세 시대와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둠이 깊기에 희망도 있다. 남 목사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있다"는 말을 인용했다.

교회 분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지만 현장에 있기에 감사

이제 인수인계한 지 한 달여 지났는데 정 목사는 아직 교회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담했던 교회의 이야기가 아직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교회 문제에 관한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왜곡된 구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이 사무국장의 일이다. 하지만 안 좋은 사건을 주의 깊게 들으니 감정이 이입되어 덩달아 힘들다. 그들 문제는 대부분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힘을 얻기도 하지만 힘에 부칠 때도 있다.

어느 날은 너무 지쳐 상담하기 싫은 마음이 생겼다. 힘든 마음을 안고 강남제일교회가 여는 '양들을 위한 음악회'에 참석했다. 분쟁을 겪고 있는 강남제일교회가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다른 교회 교인들을 초대해 위로하는 자리였다. 음악회에 참석한 교인들이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찬양하는데 눈물이 났다. 교회에서 불의가 이기는 것 같아도 감춰진 것들이 밝히 드러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교인들이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교인들은 불의에 동조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무국장으로서는 일을 잘하기 위해 학자의 혀, 듣는 귀, 철면피 같은 얼굴을 달라고 기도했다. 개혁연대에 부임하기 전, 금식 기도를 하면서 마음에 이사야 50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기도를 하라는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도는 곧 하나님의 정의를 잘 설명하고 잘 듣고 어떤 상황에서도 견디는 힘을 달라는 기도였다. 개혁연대 협동 사무국장으로 있는 지금도 그 기도를 하고 있다.

정 목사는 이제 뜨인돌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한다. 담임목사와 교인들이 정 목사에 대한 기대감을 내보이지만 부담스럽다. 그동안 개혁 운동을 하면서 했던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댈 생각을 하니 두렵다. 개혁 운동의 기운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긴장감 있게 매사에 임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단순히 목사라는 이유로 교인들이 교역자를 우대하는 것을 지혜롭게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목사와 교인이 하나님 앞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남 목사는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오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아침에 즐겁게 출근할 수 있을까'와 '저녁에 보람찬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을까'였다. 지난 한 달여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없어졌고, 분쟁 교회 상담이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어렵고 답답한 얘기를 참고 오래 들어주는 것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 목사는 이제 더 이상 <뉴스앤조이>에 실린 교회 문제 기사를 읽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힘이 난다. 눈물 흘리고 답답해하는 대신 직접 개혁 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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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은 신학 교육의 변화로부터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10. 1. 5. 00:0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국교회 개혁은 신학 교육의 변화로부터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을 준비하며 (1)

필자는 대학 시절 선교 단체 활동을 하면서 몇 가지 비전을 세워 보았다. 그중에 하나는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막연한 것이었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신학 공부에 대한 매력이 컸다. 대학에서 다른 학문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신학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도 깊었지만, 그런 기회가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던 중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복음과상황>에 실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의 '성경 연구와 기독교 세계관' 과정 신입생 모집을 보는 순간, 뇌리에는 '이거구나' 하는 강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여러 상황들, 특히 직장과 가족들의 이해가 쉽지 않았지만 입학을 하게 되었고, 2006년부터 2년간 이 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다. 공적인 일로 하루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개근하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너무나 신나고 즐거운 신학 공부였다. 같은 동료 학생들 7명은 학문적 호기심과 그동안의 갈증을 풀어 놓았다. 교수님들이 골머리가 아플 정도의 질문과 열정은 학교의 분위기를 바꿔 놓은 듯하다. 물론 교수님들의 성의 있는 답변과 강의는 많은 변화를 이끌게 되었다. 그야말로 평신도 신학의 가능성을 보여준 시간이었다.

현직 판사, 의사, 경영인, 회사원, 목사, 전직 은행 지점장 등으로 구성된 반은 그야말로 사회에서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신학적 열정은 대학 신입생들과 같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학교가 봉천동에서 용인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더 이상 후배들을 키울 수 없었지만, 2년간의 과정을 통한 변화는 놀라왔다. 신앙적 회의를 느꼈던 현직 판사의 변화, 해외 전문인 선교를 지망하는 치과의사, 그동안 자본주의에 물들었던 전직 은행 지점장님의 변신 등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기독 시민 활동을 하던 나에게는 그 과정을 통해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되었고 신앙적 부흥의 일어났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과정이 학교가 용인으로 이사하고 나서 지원자가 없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점이다.

교회 개혁 운동을 한 지 8년 정도가 지났다. 교회 개혁 운동을 하면서 가장 큰 아쉬움은 교회 개혁 운동의 백그라운드가 되어줄 신학적 배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개 전투식인 교회 개혁의 자료들을 망라하고 교인들을 깨울 신학적인 강의가 필요성이 크다. 특별히 각 아카데미의 활성화로 많은 청년들의 변화는 이어지고 있으나, 특히 청장년층이나 중년층의 욕구를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중세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사회를 견인하지 못하고 하나님나라보다는 자본주의의 나라를 꿈꾸고 맘몬에 종속되어가고 있다. 특히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는 잘못된 신학과 이에 바탕을 둔 잘못된 가르침이 원인이 되고 있다. 공의와 정의보다는 출세와 부흥이 우선시되고 있고 이것이 교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신앙의 목표가 되고 있다. 말로만 하나님을 외치지만 마음은 세상적인 욕심이 우선시되고 있다. 교회는 규모가 크고 교인이 많을수록 큰 소리치고 칭송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이에 대한 신학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을 준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2009년도 명지대학교에서 열린 성서한국 전국대회를 통해서였다. 성서한국대회 강사진들과 얘기를 하던 중 대안적인 신학 교육 기관의 필요성에 대하여 동의하였고, 꾸준한 의견 교환이 이뤄지게 되었다. 2009년 말 기독 활동가들이 이 논의의 중심에 서서 과감히 일을 벌이기로 했고 강사진을 확보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되었다. 다행히 외형도 없고 재정적인 뒷받침을 약속할 수도 없었지만 기꺼이 여러분들이 헌신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평신도들의 신학 공부를 위한 터전이 없어 아쉬웠던 부분부터 채워질 수 있게 되었다.

느헤미야의 과정을 맛볼 수 있는 시범 프로그램인 신학 캠프를 준비한 것도 단순한 신학교 과정이 아닌 새롭게 태동하는 신학연구원의 강사진과 만나 2년 과정의 맛보기를 준비한 것이다. 기존에 수업 방식을 탈피하여 강사진과 생동력 있게 교류하는 시간을 만들고자 한다. 그동안 속으로만 삭혔던 고민과 한들을 풀어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 안에 잘못된 신학과 성경의 해석을 하나하나 고칠 수 있는 첫발을 내딛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상환 /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설립준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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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신학캠프2010 소개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2. 27. 13:47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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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11) 신약성서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2. 18. 12:3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에 등장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가 과연 토지를 뜻하는지 재물을 가리키는지 알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마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추측하기 위해서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끄떼마’의 용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가 읽은 성서는 신약성서가 아니라 구약성서였으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는 마가복음과 동시대(1세기)에 저술된 헬라어 작품들로 되어 있고, 모두 기독교인들의 작품이므로 이 작품들은 동일한 단어를 비교적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끄떼마’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의 ‘끄떼마’의 뜻을 추측하기 위한 보조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끄떼마’는 네 번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0:22을 제외하면 마태복음 19:22, 사도행전 2:45; 5:1에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의 평행본문이다. 즉, 마태복음 19:22은 마가복음 10:22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 2:45과 5:1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발생한 일들을 다룬다.

마태복음 19:22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그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역). 

‘끄떼마따’는 ‘끄떼마’의 복수형이다. 마태복음은 다른 곳에서 ‘끄떼마’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를 살펴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9:22의 문맥을 살펴보는 길밖에 없다.

본문에 의하면 젊은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간 이유는 ‘끄떼마따’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떼마따’를 많이 가져서 슬픈 이유는 예수께서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21절).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팔 수 있는 소유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는데, 이 젊은이에게는 소유가 매우 많았고 이 말씀대로 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슬퍼하였을 것이다.

‘끄떼마따’가 팔 수 있는 소유라면 그것은 최소한 돈은 아니다. 돈은 파는 것이 아니라, 팔아서 받는 것이다. 팔 수 있는 소유는 돈 이외의 재물인데, 특히 토지이다. 팔아서 돈이 되는 것은 토지이기 때문이다. 귀금속이나 보석도 팔면 돈이 되지만 이러한 것은 팔지 않고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팔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끄떼마따’는 아마도 토지를 가리킨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 주어진 맥락은 율법을 지킴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는데(17절), 이 계명들은 특히 10계명 중 5~9계명과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18-19절). “온전하고자 할진대” (즉 이러한 계명들을 온전하게 지키기 원한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젊은이의 질문과 관련된다. 이 질문은 “이 모든 것” 즉 앞에 언급된 계명들을 지켰는데 아직 어떤 점에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지 묻는 것이다. 이 부족함을 채우고 온전하게 계명들을 지키기 위한 방도로 제시된 것이 바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특히 염두에 두어진 계명은 앞에 제시된 계명들 중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게 재물이 많고 이웃이 가난할 때 나의 재물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많은 토지를 가지면 분깃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율법은 토지의 경계표를 이동시키는 것을 금한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나의 토지를 넓히고 이웃의 토지를 좁히는 행위, 즉 경계표를 옮기는 행위는 저주를 받을 행위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많이 가진 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더더구나 토지를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사도행전 2:45 

또 그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아 그것들을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끄떼마따와 소유를 팔았다. 여기서 ‘끄떼마따’는 팔아야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최소한 돈이 아니다. 또한 ‘끄떼마따’는 ‘소유’와 구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진 두 가지 뜻 “소유,” “토지” 중에서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4:34-35은 사도행전 2:45과 평행을 이루며 예루살렘 성도들이 판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들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토지나 가옥을 소유한 자들은 누구든지 그것들을 팔아서 그 판 것들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누구든지 핍절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사역). 

예수의 제자들이 판 것은 토지나 가옥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토지나 가옥을 가진 자는 이것들을 팔았고,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가난한 자는 토지나 가옥을 판 값을 나누어받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45에서 ‘끄떼마따’는 이 단어가 가리킬 수 있는 “토지,” “소유” 중에서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토지를 판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복음 19:21; 마가복음 10:21)고 명하셨는데, 제자들은 토지나 가옥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이 명령을 지킨 것이다. 왜 하필 토지나 가옥을 팔았을까? 예수께서 소유를 팔라고 명하셨을 때 이것들을 팔도록 의도하셨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에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다. 이 명령을 최초로 들은 사람은 이 명령을 따를 자신이 없어서 슬퍼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제자들이 토지와 가옥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예수께서 원하신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 공동체 속에서는 구약성서가 명하는 토지법이 준행되어 사람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지 않으며, 예수의 토지반환명령이 준행되어 지계표를 넘어 확장한 토지가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진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34-35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교회들의 모델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기를 부정하는 것은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유학시절에 동구권 신학생들이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열심히 분배를 행하다가 결국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체제 속에서 그들이 경험한 가난이 그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읽게 했다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그들의 해석은 예루살렘 교회의 행함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임을 알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행하다가 가난해진다면 그러한 가난을 감수해야 한다. 교회의 목표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의 명령을 따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나 모세의 토지법을 지킨 구약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 소유하는 평균지권사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이러한 성서적인 사회 체제를 공산사회라고 비판하는 것은 생산수단을 국유화시키는 공산사회와 모든 개인이 생산수단을 평등하게 소유하는 성서적 사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또한 공산주의가 싫어서 사도행전 교회를 부정하고 구약의 토지법도 부정하는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성경이나 예수보다 더 높이는 우상숭배적인 태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성경과 예수보다 더 높아져 있다. 그들은 성경과 예수를 지극히 자본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면 예수의 명령마저도 ‘율법’이라고 부르거나 우리와는 관계없는 명령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이다. 마치 소가 농부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기독교는 본래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유전자가 바뀐 기독교는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재앙일 뿐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탈을 쓴 바알의 종교일 뿐이다. 소가 풀을 먹지 않고 동물성 사료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리듯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 다른 것을 먹고 살 때에는 광교회병에 걸리게 된다. 소가 풀을 먹고 살아야 하듯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5:1 

그런데 이름이 아나니아인 어떤 남자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끄떼마를 팔았다(사역). 

사도행전 5:1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팔았다고 한다. 이 ‘끄떼마’가 무엇인지는 근접문맥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사도행전 5:1의 직전에는 바나바가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기사가 나온다(4:36-37). 즉 바나바는 사도행전 4:34-35에 언급된 토지나 가옥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바나바는 레위인이었으며 구약성경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민수기 26: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인 바나바에게 토지가 있었던 것은 지계표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레위기 25:23-28을 어기어 토지를 (임대하지 않고) 매매하고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바나바가 토지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내어 놓은 것은 조상이나 자신이 율법을 어긴 잘못을 회개한 것이다. 이러한 바나바의 행동에 이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끄떼마를 판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의 행동을 흉내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끄떼마’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판 토지는 약간의 토지였을 것이다. ‘끄떼마’라는 단어가 단수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넓은 토지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2:45이나 마가복음 10:22; 마태복음 19:22에서처럼 복수형 ‘끄떼마따’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5:2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를 판 값의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음을 언급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아마도 그들이 가진 토지의 일부만을 처분하고 그 값 중에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이 문제되지 않고 토지를 판 값의 일부를 감춘 것이 지적된다(사도행전 5:3). 토지의 일부만을 판 것은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는 부분(기업)을 제외한 토지를 판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업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비판받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업을 초과하는 토지(즉 평균지권이 허용하는 토지가치 이상의 토지 소유, 또는 토지 경계표를 넘어서 확장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문제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토지를 처분하여 일부를 바치고 일부를 숨기는 것은 큰 잘못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의 일부를 팔아 바친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한 것이므로 선행이 아니며, 그들이 판 값 중에 일부를 바치지 않은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므로 악행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사도행전 5:5, 10) 그러한 악행에 대한 벌이었다.

사도행전 5:3에서 베드로는 ‘땅 값’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을 언급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5: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팔았다고 하는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킴을 분명히 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신약성서의 다른 곳들에서 사용된 ‘끄떼마’의 용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끄떼마’는 이 곳들에서 언제나 토지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이 드러났다.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키지 않음이 명확한 곳은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용례는 마가복음 10:22에서도 ‘끄떼마’라는 단어가 토지를 가리킨다고 추측하게 한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만이 독특하게 ‘끄떼마’에 토지라는 뜻보다는 재물이나 소유라는 뜻을 담아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기독교인들이 한결같이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의 저자도 이 단어를 그러한 뜻으로 사용하였으리라고 추측하게 한다.

마가복음 10:22에 나오는 ‘끄떼마따’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예수의 명령을 듣고 근심하며 간 그 사람은 재물 중에서도 토지를 많이 가진 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예수의 명령(마가복음 10:21)은 사실상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들이 이 명령을 듣고 근심하게 되어야 이 말씀이 제대로 이해된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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