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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 토지법7)교회와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9. 7. 16:17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교회와 토지

마가복음 10:29-30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주택이나 가족, 토지를 포기한 자에게 백 배의 주택과 가족, 토지가 주어질 것을 약속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마치 한 알의 씨앗이 100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마가복음 4:8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가 되었느니라.”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싹이 터서 100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마치 이처럼 한 채의 집을 포기하면 100 채의 집을 얻게 되고, 한 평의 땅을 포기할 때 100 평의 땅을 얻게 된다. 한 사람의 가족을 포기할 때에는 100 명의 가족을 얻게 된다. 부활 이후가 아니라 현세에 그렇게 된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그런데 이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가능해 지는 기적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야말로 한 알의 씨앗이 100 배의 결실을 맺는 기적의 장소이다.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가? 교회는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므로 교회에서 이러한 기적이 이루어진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자식(‘떼끄논’)이라고 부르고,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로마서 16:13). 초기 기독교인들은 서로 형제, 자매라 불렀다. 이처럼 ‘어머니,’ ‘형제,’ ‘자매’라고 부른 것은 서로 서로를 가족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를 믿기 위해 가족과 결별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인 교회에서 100 배의 가족을 얻는다.

포기되는 목록 중에서 ‘자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어른에게도 사용될 수 있는 ‘떼끄논’이다.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빠이디온’이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복음을 핑계로 부모의 의무를 회피하지는 말아야 함을 암시한다. 포기될 수 있는 목록에서 ‘아내’가 빠진 것도 복음을 핑계로 이혼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혼을 금하는 마가복음 10:9과 일관성 있게 연결된다.

100 배 받는 목록 속에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며 사람 중에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는 전통적인 아버지가 없어야 함을 암시한다(마태복음 23:9 참조).

가족은 재산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가족을 100 배 얻을 때, 재산도 100 배 얻게 된다. 따라서 집이나 토지도 100 배 얻게 된다. 교회가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라면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가옥이나 토지는 그들 모두의 소유처럼 여겨진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집과 가족을 떠난 선교사들은 선교 여행 때 가는 곳마다 기독교인 형제들에 의하여 집들을 제공받으며 결과적으로 많은 집들을 소유함이나 다름없게 된다.

가옥과 토지를 100 배나 얻게 되는 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사도행전 4:32). 이러한 교회에 소속한 사람은 그 교회의 성도들의 재산을 모두 공유하므로 재산을 100 배 이상 얻게 된다. 단 이러한 교회에 소속하기 위해서 (여분의) 토지나 가옥이 있는 자들은 이것을 포기해야 했다.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사도행전 4:34-35). 토지를 제대로 포기하지 않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결국 죽음을 당한다(사도행전 5장). 그러나 집과 토지를 포기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공유되는 모든 재산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가옥과 토지를 포기한 자가 현세에서 100 배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은 교회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가옥이나 토지를 포기한 자는 교회를 통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교회는 그러한 가옥과 토지를 공동재산으로 관리하여 가난한 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소유를 포기한 사람도 교회가 관리하는 모든 재산들을 공유하며 사용할 수 있게 되어 포기한 재산의 100 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교회들은 성도들이 포기한 것의 100 배를 얻게 하는 공동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그들이 포기한 것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포기한 자들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집을 포기한 자들에게 집이 되어 주고 전토를 포기한 자들이 일할 수 있는 전토를 제공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전체 교회가 그렇게 될 수 없을 경우에는 최소한 교회 속에 그러한 공동체를 두어야 한다.

교회에는 예배당이 필요하고 교육관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생활관이나 숙소들이 필요하다. 그곳에는 집 없는 사람, 복음전도자, 은퇴한 선교사 등이 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숙소들이 많이 생겨나서 집이 없는 자들과 복음을 위하여 집을 버린 자들이 세계 어디를 가든지 자기 집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토지나 가옥을 교회에 내어 놓은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마땅히 현세에서도 100 배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내세의 구원과 함께 현세에서 약속받은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그것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는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나야 하며, 교회들 사이에서도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나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예수를 믿고 그의 계명을 따르기 위하여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전토를 떠나고 포기한 자는 현세에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100 배나 보상받을 것이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21절)이 지켜지는 교회에서는 또한 복음을 믿다가 가족의 버림을 받고 상속받을 집과 토지도 잃어 가난하게 된 자들 역시 교회에서 형제들, 자매들, 어머니들, 자녀들을 100 배나 만날 것이며 집과 토지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교회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는 더더구나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교회이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교회가 예수께서 기대하신 교회이다. 우리는 현실의 교회를 예수께서 기대하시고 원하신 교회의 모습으로 바꾸어야 한다.

부자들을 위한 복음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이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을 수혜자로 하는 듯하지만 실은 부자들을 가장 큰 수혜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예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마가복음 10:30), 현세에서도 토지와 가옥, 가족을 100 배나 더 받을 수 있기에 가장 큰 수혜자들이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가르침은 토지를 많이 가짐으로 율법을 어긴 자들이 죄를 사함 받을 뿐 아니라 현세에 100 배의 토지를 더 얻을 수 있고 또한 내세에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이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가난한 자들이 들으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부자들이 포기하는 토지로부터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100 배의 재산을 얻을 기대도 할 수 없다. 그들이 영생을 얻을 것을 확신하고자 한다면 많은 재산을 모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아주 기쁜 소식은 아니다. 그들이 언제 재물을 모으고 토지를 마련하겠는가? 언제 율법이 허락하는 평균지권의 분량 이상의 토지를 마련하여 그것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한 채의 가옥도 없는 그들이 언제 여러 채의 집을 마련하여 남는 집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는가?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사실상 복음이 아니라 절망의 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 오히려 부자들에게 슬픈 소식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을 포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100 배를 남기고 내세에 영생까지 얻는 결과를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손에 든 것을 포기하기 아까와 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깝게만 여겨지는 것은 예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남는 투자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망설이다가 투자를 하지 않게 되고, 그들은 포기하지 못한 재물을 세상에 버려두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때엔 그들이 손에 쥐고 있던 재물마저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된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마가복음 4:25)는 말씀은 토지의 포기의 경우를 잘 반영하는 말씀이다. 복음을 위해 토지를 투자할 믿음이 있는 자는 100 배를 얻고 영생까지 얻게 될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 없는 자는 그 가진 재물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소유하지 못할 토지를 포기하여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다. 예수께서는 토지부자들에게 그러한 길을 열어주셨다. 영원하지 않은 토지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는 길을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이러한 복음을 부자들이 싫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세상에서 포기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가난한 자들이 이 가르침을 싫어할 이유는 있다. 그들은 예수께 항의할 것이다. 빚을 지지 않고 연명하는 것도 힘이 든데 남에게 주라니요? 우리는 언제 빚을 면하고 돈을 벌어 땅까지 사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이는 복음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을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먼저 받아들였듯이, 부자들을 위한 복음은 부자들에 의해 먼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 의해 먼저 받아들여진다. 마가복음 10:31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여기서 ‘먼저 된 자’는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권력의 서열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다. 마가복음 6:21에서 이 단어는 “권력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9:35에서도 ‘먼저 된 자’는 ‘종’에 대조되어 쓰였으므로 섬김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마가복음 10:44에서 ‘먼저 된 자’는 ‘노예’(둘로스)에 대조되어 쓰여서 주권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31에서도 ‘먼저 된 자’는 권력자, 주인, 높은 자 등을 가리키며, 부에 관하여 이야기되고 있는 문맥상 부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자들이 나중 된다는 것은 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중에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그들은 “나중 된 자”들이다.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에 대조되었고 ‘먼저 된 자’는 부자를 가리키므로 ‘나중 된 자’는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 가난한 자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다.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서 쓰인 ‘먼저 될 자’는 ‘나중 되고’에 대조되어 시간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 10:31은 부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나중에 받아들이게 되고,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이게 됨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부자가 구원받는 길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을 가난한 자들이 먼저 받아들인다. 가난한 자들은 이 가르침으로부터 직접 얻는 것이 없는데도 이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부자들은 이 가르침의 가장 큰 수혜자인데 이 가르침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물질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된다. 문제는 이때 발생한다. 가난할 때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부자가 된 후에는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 이제 그가 가난할 때 받아들인 복음을 따라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만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

부자가 된 후에 복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복음을 변질시켜서 믿는 사람들도 생긴다. 부자들에게 토지를 포기하라고 주신 말씀을 흐려버린다. 부는 물론이고 토지나 가옥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괜찮다고 성경이 가르친다고 왜곡한다. 나아가 토지와 가옥을 많이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대적한다. 이렇게 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복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 못지않게 악한 것이다.

교회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수적인 성장의 기반을 다지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면 교회를 부자친화적으로 변질시키고 복음도 물질친화적으로 변질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참으로 부자들을 위한 복음을 이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못주는 복음으로 전락시킨다. 재물친화적인 복음의 수혜자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자도 아니다. 그 속에서 부자들은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며, 가난한 자들은 무시당하여 실족한다. 그러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마저도 수혜자는 아니다. 심판 때에 그들이 받을 벌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복음을 왜곡하는가?

우리는 복음을 믿고 복을 받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을 피할 필요는 없으며 벌어서 남에게 주기위하여 부자가 되려고 힘쓰면 좋다. 그러나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고 복음을 부자들이 받아들이기 좋게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복음을 그렇게 변질시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자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게 된다. 부자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복음은 더 이상 부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복음이다.

세상이 바뀌고 그리스도인들이 부자들이 되어도 복음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교회의 편의를 위해서나 우리의 기분을 위해 그것을 바꾸면 안 된다. 교회성장을 위해 복음을 변질시키는 죄, 토지를 포기하기 싫어서 복음을 변질시키는 죄, 이 죄는 복음을 따르지 않는 죄보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구원의 확신

예수께서는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마가복음에서 구원의 확신에 관련한 예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29-30이다.

이 본문은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되는지 알려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마가복음에서 ‘영생을 얻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과 동의어이며(마가복음 9:45-4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다’는 표현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25-26). 그러므로 이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반드시 받는 지 알려주는 본문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배운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당혹해 할 것이다. 집이나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리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 의문은 다분히 흑백논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본문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에 관해 말하지 않고 누가 반드시 구원을 받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즉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 중에도 구원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마치 합격의 확신이 없는 수험생 중에 합격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있는 자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와 복음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다. 예수를 참으로 믿지 않으면서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포기를 못하는 사람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말로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며 신앙생활을 할 경우에 우리는 늘 입시생처럼 불안하지만, 구원을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시험에 합격하고 입학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쁘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하게 만들기도 한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에게 방종과 죄의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러한 구원의 확신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을 보고 초신자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날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조롱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도의 문은 막힐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아무리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더라도 나의 구원의 확신으로 남이 구원받는 길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먹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헛된 구원의 확신은 일찌감치 없애는 것이 좋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교리는 무슨 죄를 지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한국교회에서 왜곡, 과장되어 가르쳐졌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아무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으로부터 탈락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었다. 결국 잘못된 구원의 확신은 많은 교인들이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차라리 구원의 확신 없이 구원의 길을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지 분명히 알려준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가 그들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믿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자의 믿음이 거짓 믿음일 수는 없다. 예수와 복음을 선택하기 위하여 집, 가족, 또는 토지를 포기한 사람에게는 그가 포기한 것보다 더 큰 보상이 기다린다. 그것은 구원이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버림의 의미

그런데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라고 할 때, ‘버린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과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버린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마가복음 10:28에서도 사용되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할 때, 그는 재물을 가진 자가 구원 받기 어렵다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물을 버렸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하였는가? 베드로는 예수를 따를 때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마가복음 1:18).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마가복음 1:20). 그렇지만 그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린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른 후에도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마가복음 1:29). 그러므로 ‘버리다’는 말은 소유의 포기로 이해할 수 없다.

‘버리다’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허락하다”(1:34; 5:37; 7:12, 27; 10:14; 11:6, 16), “용서하다”(2:5, 7, 9, 10; 3:28; 4:12; 11:25[2회]), “거절하다”(5:19; 7:8), “남기다”(12:19, 20, 22; 15:37), “남아있다”(13:2),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14:6; 15:36)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러한 의미는 마가복음 10:28의 문맥에 맞지 않는다.

이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떠나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1에서 이 동사는 열병이 떠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4:36; 8:13; 12:12; 14:50에서 이 동사는 사람들을 떠나가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3:34에서 이 동사는 집을 떠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18에서는 그물을 관리하기를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20에서 이 동사는 아버지 세베대를 돕는 것을 중단하고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0:28의 문맥은 마가복음 1:18, 20을 연상시키는 문맥이므로 ‘버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문맥상으로나 마가복음의 용례상으로나 “떠나다”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실제로 소유를 버린 것이 아니므로, ‘버림’은 순회 사역 기간 동안 가족이나 소유를 떠나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마가복음 10:28)라는 베드로의 말은 “우리가 모든 것을 떠났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열두 제자들은 재물과 가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따라다니며 복음 사역을 하기 위하여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떠났다.

그런데,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릴 때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의 말씀(29-30절)에서도 ‘버리다’는 단어를 “떠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문맥은 이러한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들이 이것들을 100배나 받을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은 ‘버리다’는 단어가 단지 내버려 두고 떠난다는 뜻에서 더 나아가 소유의 포기와 관련됨을 암시한다. 집, 가족, 토지를 100배나 더 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믿음의 가족을 100배나 얻고 많은 집과 토지를 공동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버리다’는 단어도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공동소유로 내어놓는다’는 뜻으로 또는 ‘그 혜택을 독점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집, 가족, 토지의 버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마가복음 10:21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가르침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족의 버림은 가족을 떠남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집이나 토지의 버림은 단지 떠남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의 경우에도 기업의 분량에 해당하는 토지나 가옥까지 포기하라는 것은 아님을 베드로와 안드레의 경우에 여전히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마가복음 1:29).

‘버림’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최소한 떠남을 뜻하고 공동소유 내지 소유포기를 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버림’이 어떻게 이해되든지 간에 가족이나 집, 토지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은 동일하다.

버림의 이유: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다. 그런데, 이 때 한 가지 단서가 있다. 무엇을 위하여 가옥이나 가족, 토지를 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그런데,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가 무슨 뜻인가?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가옥, 가족, 또는 토지를 버린다는 뜻일 수 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예수는 소유(문맥상 토지)의 포기를 명하셨기 때문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복음을 위하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집, 가족, 또는 토지’의 “포기”는 그것들을 “떠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도 여행을 하고 계신 예수를 따라 나서려면 집과 가족과 전토를 떠나야 한다. 그래야 전도 여행을 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가옥,’ ‘가족’이 포기의 내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문맥에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포기’가 마가복음의 용례상, ‘떠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지원한다(위 참조).

집과 가족을 떠나 전도 여행하는 복음 전도자들에게 예수께서는 100배의 집과 가족을 약속하신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30절). 그들에게는 가는 곳마다 거할 곳이 생기고 그들을 보살펴 주는 믿음의 가족이 생긴다. 물론 그들은 전도 여행 과정에서 고난도 받을 것이다. “박해를 겸하여 받고”(30절).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구원이 확실히 약속된다.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30절).

그런데, 버림의 목록에서 ‘아내’가 빠져 있는 것은 ‘버림’이 문자 그대로의 ‘버림’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누가복음에서처럼 ‘아내’가 버릴 목록에 포함된 전승이 본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누가복음 18:29). 그러나 마가복음의 문맥에서는 ‘아내’가 빠진 것을 고려하여 본문을 해석하여야 한다. 아내를 버리는 것, 즉 이혼을 금하는 예수의 가르침(마가복음 10:9, 11)의 일관성이 여기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버림’이 잠시 떠나는 것이었다면 유독 ‘아내’만을 떠나야 하는 목록에서 뺐을 리 없다. 예수의 12제자들이 아내를 동반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며 사역을 하였다고 볼 수도 없기에, ‘버림’은 단지 ‘떠남’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옥, 가족, 토지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율법이 허락하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들)이나 토지의 소유를 포기하고, 복음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들과 결별하는 것을 뜻한다. 다만 아내는 복음 전파의 삶을 원하지 않더라도 이혼시킬 수 없다. 그녀가 함께 살기 원하는 한 이혼시키지 말아야 한다(고린도전서 7:12-13 참조). 복음을 따르는 것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그러나 복음 자체가 이혼을 금하기 때문에 버릴 수 있는 목록에서 ‘아내’(또는 ‘남편’)는 제외된다.

본문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예수와 복음을 믿기 때문에 가정에서부터 쫓겨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가옥, 토지 등의 상속자로서 권리를 함께 상실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구원을 약속하신다. 세상에서 기업을 잃은 그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신다. 그러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된다.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크나큰 위로와 소망이다. 그에게 구원의 확신마저 없다면 너무도 비참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고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죄를 지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이 없는 자들에게 마가복음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마가복음은 그들에게 구원을 확신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토지의 포기와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누가 가질 수 있는가?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하여 집이나 가족, 토지를 포기한 사람은 마가복음 10:30에 토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축적한 가옥이나 토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정설을 믿은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하여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하였다. 부의 축적에 성공하는 것이 자신이 예정 받은 자인 증거라고 여긴 칼빈주의자들은 열심히 일하여 벌고 절약하여 씀으로써 부를 축적하여 자본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부의 축적이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축적된 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가옥과 토지를 포기할 수 있을 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부의 축적을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본 칼빈주의자들의 근검절약은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렇다면 부의 포기를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보는 예수주의자들은 새로운 경제체제를 태동시키지 않을까? 근검절약하며 부를 축적하되 부동산투기 등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축적된 부를 지속적으로 포기하여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만드는 예수경제체제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토지를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토지에서 나그네가 쉼을 얻을 때,

그는 낙원에 예수와 함께 거할 곳을 얻을 것입니다.

가옥을 버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은 집에 가난한 자들이 깃들일 때,

하늘의 도성에 그를 위한 집이 마련될 것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가족에게마저 버림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지만

영원한 것을 얻는 그에게 복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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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도 천국 갑시다

하나님나라운동/교회개혁 | 2009. 7. 17. 14:1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목사도 천국 갑시다!"
[칼럼]목사의 원래 자리 찾기 위해 필요한 법과 제도

언젠가 어느 목사님들의 모임 슬로건이 '목사도 천국가자'라는 말을 듣고 공감하며 크게 웃었다. 내가 '우리도 천국가자'는 목사님들의 구호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목사들이 천국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교회문제상담소를 통해 수많은 '문제(?) 목사'들을 접하다보니 이런 발칙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내담자 A집사는 지인을 전도하면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소개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 교회 담임목사의 인격이 너무 부끄러워, '우리 교회 나오지 말고, 자네 동네 교회로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 교회 목사의 인격이 너무 상식 이하라며, 교회 안 다니는 일반인들(?)의 평균 수준만 됐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모든 목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목사님들도 적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그러면 '모든' 목사들이 자신을 그 '적지 않은 선한' 목사로 생각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말하기는 했다.) 물론 글을 쓰는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나 자신도 목사로서 그 위험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음을 가끔 자각하게 된다. 삶은 그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선한 목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고 돌아볼 일임을 고백한다. 작년 한해 동안 200회가 넘는 교회 문제를 상담하면서 절감한 바는, 목사들이 심심히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목사의 이러한 모습이 교회 분쟁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고치는 목사가 '믿음'이 좋다?

한국의 대다수 교회가 지닌 신학에 따르면, 우리도 천국 가자고 외치는 목사는 목사로서 자격이 없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런 나약한 믿음으로 어찌 목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사고 치는 목사'는 믿음이 투철하다.

오래 전 여자 문제와 돈 문제로 교회를 발칵 뒤집어 놓고도, 자리를 지키며 버티던 B목사에게 선배 목사가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지옥가고 싶으냐'며 충고를 했단다. 그러자 B목사 왈, '믿음으로 구원받지 행위로 구원받습니까?' 우리도 천국 가자는 목사님들의 외침이 반가운 것은, 보기 드물게도 이분들이 스스로를 성찰하는 분들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런데 참 궁금하다. 왜 이렇게 상식 이하의 목사들이 많은가? 개혁연대에 제보되는 목사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는가? 아마 처음부터 '진정성' 자체가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내담자들이 심심치 않게 하는 이야기가 '우리 목사님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엔 좋은 분이었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사람이 변하더란다. '변화'가 아니라 '변질'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성도들의 과도한 섬김이 목사를 망친다

내담자 C장로의 분석에 따르면, 성도들이 맛있는 것, 좋은 옷, 좋은 차를 갖다 바치고 섬겨주니까 교만해져서 그렇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목사로서 지금도 얼마나 과분한 섬김을 받고 있는가. 가끔 그런 과분한 섬김을 당연하게 받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스스로를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며, 섬길 것을 강요하기도 한단다. '주의 종'이란 말이 무색해진다. 처음 목사가 될 때 초심이 어떠했든지, 생각이 이렇게 뻔뻔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에게서 다른 뭘 더 기대하겠는가.

설교에 대한 피드백도 큰 역할을 한다. 우리 한국 사회, 한국교회에서 누가 설교자에게 부정적 반응을 보이겠는가. '은혜 받았습니다' 일색이다. 자신이 설교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는 드물 것이다. 얼마 전 S교회 장로들이 자기 교회 담임목사가 다른 목사 설교문을 그대로 베껴 설교하는 걸 알게 되었단다. 장로들이 모른 채 하며 '우리 교회 상황에 맞는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하자, 목사는 오히려 '내가 우리 지역에서 설교 제일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역정을 내더란다. 이런 지경이다보니 성도들 앞에서 '모른다' 소리도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아는 듯 착각한다. 심지어는 성도들의 사업에까지 관여하고, 부동산 투기 상담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대형 교회 목사가 설교 중에, '자신이 교인들에게 사라고 땅을 지정해주면 땅 값이 몇 십 배 오른다'며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이래저래 목사들은 교회라는 성 안에 갇혀서 정작 세상이 자기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목사들의 의식이 세상의 상식으로부터 격리되어 게토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목사님들이여, 착각하지 마시라.

목사를 무당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목사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가 있다. 목사 스스로뿐 아니라 성도들이 목사를 하나님과의 중보자로 착각하는 것이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도들의 이러한 인식은 한국인의 종교의식 밑바탕에 깔린 무속신앙에서 뿌리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일부(?) 목사들이 이를 악용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든 아니든 목사들 자신이 스스로를 성도들과는 다른 어떤 존재로 여기기 시작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무당이 된 목사에게 도덕성이나 윤리성은 중요하지 않다.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과 선포는 오히려 불편하다. 기적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홍보하고, 강한 '카리스마'로 성도들을 압도하는 그런 목사가 능력 있는 종이다.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능력과 카리스마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목사들의 능력으로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병든 육신이 건강해지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대한다. 능력의 종! 기복주의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목사가 아닌가? 하지만 이로 인해 목사와 성도들 모두 심각하게 병들고 변질 되는 것이다.

목사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한이 목사를 망친다

목사에게 주어진 과도한 권한 역시 목사를 병들게 한다. 각 교단이 가지고 있는 '헌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헌법'이라는 것은 한 국가 통치 체제의 근본이 되는 최고 법규를 말하는 것인데 버젓이 '헌법'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용어 사용에서부터 '헌법'을 만들고 시행하는 목사들의 권위 의식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헌법'의 내용은 어떠한가? 독소조항투성이다. 모든 권한을 담임목사가 가지고 있다. 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회의체의 의장을 담임목사가 맡는다. 장로교의 경우 당회장, 제직회장, 공동의회장을 모두 담임목사가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헌법'에 보면, '목사의 의의'를 이렇게 규정한다. '양의 무리를 감시하는 목자', '그리스도의 사역자', '신약의 집사', '치리하는 장로', '교회의 사자(천사·계2:1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사신', '오묘한 도를 맡은 청지기' 등등.('헌법' 제4장 제1조) 이러한 내용은 타교단의 경우에도 대동소이하다. '헌법'에 따르면 목사는 법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감히 평신도가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다.

한국교회는 개 교회 목사에게 그런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음에도 이를 통제할 장치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 다수의 목사들은 북한에 대해 목숨 걸듯 비판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그들과 꼭 닮아 있는가? 비민주적이고, 반대 의견은 철저히 묵살하는 행태는 김일성 정권과 못지않다. 게다가 세습까지 하는 걸 보면 그야말로 독재다.

목사 제자리 찾아주기

이렇듯 왕처럼 섬김 받고, 자타 공히 하나님의 천사라 여기며, 무소불위의 법적 권한을 부여 받은 목사들이 겸손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어렵다. 자칫하는 사이 자신을 하나님 바로 다음 자리에 앉히기 쉽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을 기억하라. 절대 권한을 부여 받은 목사는 '부패'와 '변질'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저 추상적인 규정이 아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는 것은 위험하다. 목사 개인의 인격이나 믿음만을 믿고 맡기기엔 너무 위험하다. 교회도 위험하고 목사도 위험하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한국교회에는 교회의 분란이 잠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목사들에게 그런 자리에 서게 되더라도 교만해지지 말고 겸손하라고 요구만 하면 될 것인가. 이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 놓고 참으라 하는 격이다. 혹시 대단한 영성을 소유한 몇몇 고양이가 참아낼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고양이는 생선을 먹고 말 것이다. 현재의 이런 구조는 목사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에게 기대하기 어렵다면, 성도들이 깨어날 것을 기대하겠는가. 성도들이 누구에게 교육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보시라. 왜곡된 자기 정체성을 가진 목사들이 가르친 성도들에게 깨어나길 기대하기는 요원한 일이다.

목사가 겸손한 자세로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교회에 민주적인 정관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민주적 정관 도입을 통해 목사, 혹은 소수의 장로에게 편중된 과도한 권한을 제한하고, 교회의 주권을 성도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정관 도입만으로 교회 내 모든 비성경적인 권위주의 문제와 그로 인해 불거지는 문제들이 일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민주적 정관을 도입해 운영하는 것은 교회 분쟁 원인인 목사에게 집중된 권력 문제와 부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민주적 운영은 건강한 목사,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를 통해 목사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인 올바른 해석을 위한 말씀 연구와 선포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담임목사의 독재 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실하다.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는 중세의 사제주의와 권위주의에 저항했던 개신교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모든 권한을 향유하고 있는 목사들은 반성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심을 인정하고, 교회의 주권을 교인들에게 돌려주어 성경이 기대하는 바, 민주적인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교회의 민주적 운영에 관하여는 백종국 교수의 저서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를 참고하라.)










정운형 목사(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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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토지법5)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7. 9. 10: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재물에 관한 구원론적 평가

마가복음 10:23에서 우리는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얻는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여기서 ‘재물’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원어는 ‘크레마’이다. 이 단어는 단지 토지만이 아니라 유동성 재산도 가리킨다. 70인역 다니엘 11:28에서 ‘크레마’는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킨다. “그가 많은 재산(크레마)을 가지고 그의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일 수는 없다. 사도행전 4:37에서도 ‘크레마’는 토지를 팔아 받은 돈을 가리킨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크레마)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러한 용례를 통하여 볼 때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0:23에서도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다.

마가복음에서 ‘크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곳은 오직 마가복음 10:23 뿐이므로 마가복음의 용례로 마가복음 10:23의 ‘크레마’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고 검증할 길은 없다. 그렇지만 마가복음 10:23의 문맥을 통하여 이 단어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를 가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24절)은 ‘크레마’의 뜻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만일 ‘크레마’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은 율법(레위기 25:23; 신명기 27:17)을 어긴 자들이므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은 ‘크레마’가 토지가 아닌 (토지의 소산으로서의) 재물을 가리킴을 암시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데, 재물은 많이 소유해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율법이 문제 삼지 않는 것까지 예수께서는 문제 삼으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물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도덕적으로 불의하다고 평가하지 않으셨다. 세상에는 깨끗한 부자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모든 부자들을 비윤리적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내리신 평가는 구원론적 평가이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 받는다”는 뜻을 가진 표현임을 26절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말씀을 제자들은 “구원받기 힘들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많이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즉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본문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맥을 통하여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자의 경우처럼 율법을 어기면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깨끗한 부자가 존재하기 어려운 만큼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부자의 경우에도 또 하나의 장애물이 존재한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신다(21절). 불의한 재물의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재물을 사용하기 원하실 것이다. 깨끗하게 재물을 모은 부자들 중에서도 재물을 사랑의 실천에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최소한 부자들이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지키기 어려운 만큼 부자들이 구원받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의 불가능성

사람이 구원받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함을 25절은 지적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랍비문헌들은 불가능의 이미지로서 코끼리가 바늘귀로 나간다는 비유를 쓴다. 동일한 이미지를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동물인 낙타는 자연스런 선택이다. 25절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26절: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은 25절의 비유가 구원의 불가능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음을 보여 준다.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으로서 나귀가 짐을 내리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이었다면 제자들이 놀라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였을 이유가 없다. 또한 바늘귀라는 예루살렘 성문이 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예수께서 당시에 존재하지 않은 성문을 언급하셨을 리 없다. 그러므로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의 바늘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불가능한 것보다 어려운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은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부가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로 여겨진 문화 속에서는 부자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받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은 부자들에게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그러한 복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불가능할 것인가? 26절은 이러한 생각의 결론을 보여준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제자들의 이러한 결론을 예수께서는 긍정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27절).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예수께서는 부자는 구원받기 힘들지만 가난한 자들은 구원받기 쉽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부자가 구원받기 힘들면 가난한 자들은 더더구나 구원받기 힘들다는 생각을 전제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 불가능하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도 부자들처럼 구원받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부자들은 21절 말씀대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의한 부자가 불의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줄 때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진다면(21절), 깨끗한 부자가 깨끗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줄 때 더더구나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그들이 언제 많은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구원받기도 역시 힘들다.

예수께서는 부유함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셨다. 예수께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신 것은 단지 토지만이 아니다. 율법의 견지에서 보면 토지를 과다 보유한 지주는 악하고 재화를 많이 보유한 자본가는 선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깨끗한 부자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렇지만 부자에 관한 예수의 평가는 부자를 가난한 자와 대조시키면서 부자를 심판하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관점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선언함으로써 가난한 자도 구원받기 어려움을 암시한다.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기 어려움을 깨닫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

예수께서는 구원의 불가능성을 지적하시면서 가르침을 끝맺지 않으신다. 구원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예수께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조시키지 않으시고,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신다. 하나님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모두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익숙한 구원론으로 환원하면 안 된다. 27절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음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시는지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왜 부자에게 불가능한 지 살펴야 한다. 구원이 부자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토지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간 익명의 부자와 관련이 있다. 그는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포기하기 힘들어 고민하였다. 그렇다면 합법적으로 소유한 재물을 포기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재물의 포기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는 명령과 관련된다. 이 명령은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즉,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가진 명령이므로 구원론적 함의를 지닌다.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산의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땀 흘려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는 더더구나 구원이 약속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랑을 명하신다.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명하신다. 이것은 인간에게 심히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심으로써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사랑은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므로(갈라디아서 5:6)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궁극적인 조건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고 말해야 옳다.

재물과 제자도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으셨다. 다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지 가르치셨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악하지 않다.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도 악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우리의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남에게 주기 위하여 열심히 벌어야 한다.

재산을 축적하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 아니라 축적된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다. 근면검소하게 생활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축적된 자본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근심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근심할 때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가난에 처한 사람에게 부유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부유한 자들이 가진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가난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재물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토지 투기를 통해 재물을 축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며 근검하게 재물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깨끗하게 경제활동을 하여 깨끗한 부를 모아야 한다. 우리의 경제활동은 또한 신앙생활이다. 우리는 더러운 부를 많이 모으는 것보다 깨끗한 부를 적게 모으는 쪽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모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예수 제자의 길일 뿐 아니라,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기도 하다. 구원받은 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걸어가야 할 길이므로 그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함부로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기준에 미달된 사람들을 은혜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 은혜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여 이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들을 심판하실 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의 하나님은 또한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참된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변화시켜 참된 제자의 길을 가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삶의 변화시키어 바른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구원은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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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살. 죽고 싶어 죽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 유명인들의 자살이 많아지면서, 자살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기 원한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도덕과 논리 이전에 정말 최악의 결과다. 너무 손쉬운 훈계처럼 결코 자살하는 당사자가 죽기를 좋아했기 때문도 아니고, 목숨을 경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정말 죽고 싶어 죽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2. 자살을 개인화시키지 말라.

자살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밑바탕에는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만 보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나 자살은 결코 개인의 일이 아니다. 확신컨대 모든 자살은 사회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살은 반드시 그 사회적 의미를 물어야 한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전태일의 분신까지 말할 수 있겠지만, 최근의 기억만으로 충분하다. 작년 10월 톱 탈랜트 최진실씨가 자살했다. 죽기 전 그는 동료 안재환 죽음의 원인제공자로 잘못 알려져 근거 없이 시달려 왔다. 물론 잘못된 루머를 퍼뜨린 사람은 진즉 잡혀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미 유포된 거짓들은 억측과 함께 숨겨진 진실처럼 커져만 갔고, 가능한 한 큰 파장만을 원하는 황색언론들은 한편에서는 최진실의 억울함을, 돌아서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식의 자가발전을 유도했다. 나는 확신컨대 만약 최진실이 죽지 않았다면 그런 식의 이중플레이는 지금도 계속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최진실의 죽음은 개인적 불행만이 아니다.

올해 3월에 자살한 장자연씨 사건은 더욱 허망하다. 그녀는 연예인 성상납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면서, 그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여기저기 큰소리들만 많았지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았고 ‘꽃보다 남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정치권도, 언론도, 심지어 동료들도 그저 개인적 불행으로만 기억하고 싶어 했다. 흔히 하는 말로, ‘죽은 놈만 불쌍하다.’ 죽음을 통한 호소조차 통하지 않으면 죽을 사람들은 더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장자연의 죽음도 그저 개인적 불행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좀 더 복잡하다. 정치적 지형이 급격히 나뉘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냐, 어떤 주장을 했느냐에 따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갈려 버리기에 처음부터 지지와 반대 이상을 넘어서기 참 힘들다. 그래도 고민해 보자.

지난 5월 목숨을 끊은 화물연대 광주지부장 박종태씨를 기억하는가?

풀리지 않는 비정규직제와 최저임금문제를 갖고 씨름하다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죽음을 보면서, 그가 살고 싶었던 세상도 알지 못하는 우리가 너무 쉽게 ‘자살은 죄다’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죽기 며칠 전 그는 유언처럼 10년을 같이 산 아내에게 이렇게 글을 남겼다.

“…잘 나가지도 못한 나에게 당신은 항상 힘이 되고 의지할 등받이였어. 못 먹고 못 입고 맘편히 나들이 한번 못가는 재미없는 10년 결혼 생활 견뎌줘서 고맙고 미안해.…항상 미안하다고 하면서 또 미안하다고 해야 할거 같애.…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나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사랑하는 수진씨 그럼 안녕…자기가 세상에서 최고야. 죽음의 문턱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당신은 나의 생애 최고의 여자요 친구였어. 박종태란 못난 남편을 빨리 잊어.…애들한테 말하고 싶은 게 진짜 많은데...시골에서 살고 싶었어. 나 진짜 농장하고 싶었거든.…”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과 가족들도 걱정했다.

“잘 놀아 주지도 못해 아빠가 안들어 오는 게 좋다며 장모님을 더 찾는 정하가 아예 아빠를 영영 잊어버릴까 두려워.…아빠가 없어 심심하다는 예쁜 혜주가 학교에서 기죽고 살지나 않을까 두려워. 항상 어머니 이상으로 미운 동생 뒷바라지 했던 누님이 쓰러지지 않을까, 큰형과 형수님이 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돼서 두려워.…혜주, 정하가 눈에 밟혀 뭐라고 애기하지? 정하야, 혜주야 아빠가 없더라도 기죽지 말고 엄마가 울지 않게 늘 엄마 곁에 있어야 한다. 엄마가 건강도 좋지 않은데 힘들지 않게 엄마 보살펴 줘야 된다. 항상 그랬지만 혜주하고 정하는 든든한 내 아이들이자 친구야.”

이렇게도 살고 싶었던 그에게 우리가 그저 “자살은 죄다. 생명을 존중하라”고 값싼 도덕적 훈계 따위나 날린다면 그게 어디 종교가 할 일인가? 한편에서는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는 ‘열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는 무지하게 살고 싶었다. 그것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백번 양보해 그의 정치적 견해가 부족해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해도 우리는 그저 ‘자살은 죄다’는 식의 빈껍데기 소리만 던져놓고 끝나서는 안 된다.

결국 전직 대통령까지 목숨을 끊었다.

나는 아직도 그의 5년 재임기간을 전부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친노든 반노든 중요한 것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선호도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전직 대통령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에 빠지게 되었는가하는 점이다. 또 이번 사태가 정말 정치적 타살이라고 볼 수 있다면 같은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우리사회는 어떻게 고쳐야할 것인지 깊이 고심해야 한다. 더구나 재임 중에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노 전 대통령이 죽은 후 이토록 추앙받는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결코 적지 않은 사회적, 신학적 숙제들이다.

그리고 강희남 목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게 결코 아니다. 자살할 작정을 한 사람은 어떻게든 일단 뜯어말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두고서는 그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남은 자들의 의무다. 그들이 살고 싶었고, 만들고 싶었던, 결국 목숨과 바꾸고 말았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는 1/10, 1/100도 모르면서, 얄팍한 도덕적 훈계나 율법주의적 신앙적 단정으로 개인화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미화할 생각도, 그들의 선택을 추앙할 생각도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왜 우리는 마땅히 살아 있어야 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지 못했는가이다. 그래서 남은 우리들은 함부로 그들을 정죄할 수 없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도 자기 생명 아까운 줄 몰라서, 생명을 경시해서 자살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경박한 교훈은 더 이상 하지 말자.

3. 그래도 산 사람의 생명은 지켜야 한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숨을 끊는 방법은 택하지 맙시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이 척박한 우리 노동현실과 서민들의 삶을 고발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80년대 수많은 젊은이들의 분신으로 이 땅의 민주화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최근에도 계속되는 희생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이제 정말 그만 돼야 한다.

80년대 거듭된 젊은이들의 희생을 목도하며 문익환 목사가 절규하였듯이 우리도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고 호소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부끄럽다. 그만큼 열심히 살아오지도 않았고, 목숨 걸고 헌신할 각오도 부족하기에 지극히 부끄럽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호소하자.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살인은 죄다. 그런 면에서 자기 목숨을 죽이는 자살도 살인이니 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틀린 점을 지적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뭔가 아쉽다.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창백한 훈계로 죽을 뻔 할 사람을 살릴 것 같지도 않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정말 죽음을 막고 싶다면 섣부른 훈계가 아니라, 머리 숙여 깊이 참회하고 눈물로 호소해야할 것이다. 세상 어떤 이들의 생명도 순교자나 열사라는 칭호, 그리고 정통신학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등에 쓸 모 없어 가는 자살 논란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강희남 목사의 죽음이 뒤따르자 예상대로 한국교회에는 때 아닌 자살논쟁이 한창 뜨겁다. 이러한 논쟁들은 단지 교회 울타리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 밖 세계에까지 펴졌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싸우는 시어미보다 말린다고 나타났지만, 더 미운 짓만 하는 시누이’처럼 보이는 것 같다. 죽을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없음은 물론, 죽은 사람은 욕보이고, 남은 유가족들에게는 염장을 지른다. 진정성이 보이지도 않는다.

우선, 자살은 죄인가 아닌가?

죄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두 다 죄’(롬 14:23/공동번역)라는 의미에서의 죄다. 그들의 죄가 더 나은 믿음이 아닌 비극적 표현으로 끝맺었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줄기차게 살아있기만 한, 그러면서도 단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신앙적 우월성을 누리려는 죄를 범하고 있다.

‘자살은 죄’라는 정죄함은 진지한 신학적 주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살하지 않은 나는 상대적 의인이라는 교만이 숨어있는 위선적 언어다.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죽은 그들을 훈계할 아무런 도덕적, 신학적 우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눅 13:1~4).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단지 질기게 살아남았다는 것이 무슨 자랑인가? 자살하지 않았다고 의인이 결코 아니다. 자살하지 않은 우리가 하등의 의로울 게 없다는 말이다.

둘째, 자살하면 지옥 가는가?

나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이 나도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지옥 가는 죄의 부류를 규정짓는 권세를 갖기 시작했는가? 성경에는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표현이 도무지 없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보면서 내린 내 결론은 이렇다. ‘살인은 큰 죄이고 자살도 살인이므로, 자살하면 지옥 간다.’ ‘가룟 유다를 포함해 성경에서 자살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큰 죄인들이었고, 그 결과 자살했기에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과 같다.’는 식의 목회자들의 자의적 해석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전해 들은 기독교인들의 입소문이 덧붙여져 이젠 마치 확실한 성경의 가르침처럼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살을 막기 위한 예방조처로서 과장을 부렸을 것이라는 이해도 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많은 경우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서도 지옥 운운하는 것을 볼 때는 저주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건 마치 ‘술, 담배를 하면 죄냐, 아니냐?’라는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술, 담배하면 가장 타락한 신자인 것처럼 여기고, 반대로 그것만 하지 않으면 마치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처럼 인정해 주는 엇나간 한국교회 윤리 수준을 보여주는 것과 흡사하다.

‘자살하면 지옥 가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면 자살하지 않으면 천국 가는가?’ 이것은 ‘내가 어떤 선행을 하면 천국 가는가?’(마 19:16)와 똑같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자주 자기 구원에 관해서는 무조건적인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행위의 문제로 착각하곤 한다. 거짓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고한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수고하는 데는 조금의 관심도 없으면서, 우리끼리만 생명을 존중하고 숭고한척 훈계하는 행위는 분명 위선이다.

5. 현학적 논쟁이 아닌 사람 살리는 능력을 기르는 기독교윤리여야 한다.

자살논란을 보면서 내가 정말 아쉬운 것은 생명을 살리려는 안타까운 진심은 별로 묻어나지 않은 채, 막연한 신학논쟁과 일방적 정죄만 난무하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우리 기독교윤리가 너무 얄팍하고, 일 터진 뒤 탁상공론이나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자주 받는다. 자살, 안락사 등은 사실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이미 죽겠다고 결심한 소수의 사람들을 뜯어 말리는 문제에는 이토록 관심이 많으면서도, 정작 조금의 관심만 있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는 너무도 무관심하다.

죽을병이 아닌데도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죽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강남 부자들의 회식비 정도도 안 되는 전세값이 없어 거리에서 전전하다가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 온갖 분쟁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학살당하는 무고한 어린이들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용산에서 원통하게 희생된 철거민 5명이 죽은 지 벌써 5달이 가깝지만, 아직 보상은 커녕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교회가 이들의 허망한 죽음에 대한 공분을 느끼고, 그 개선을 위해 개인화된 자살이나 안락사 문제만큼 열정을 보일 때 우리의 논쟁은 허망하지 않고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기독교윤리는 이미 죽은 사람 앞에 두고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이 계속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자살논쟁은 자칫 우리가 함께 붙잡아야할 사회적 책임은 손쉽게 떨어버리고, 문제를 온통 개인의 책임으로만 던져 놓는 말장난이 되기 쉽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 한국교회는 혼전순결운동을 열심히 벌이고 있다. 이는 성경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건강한 가정과 책임 있는 출산을 위해서도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건 아직 문제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갈수록 개방적 성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 개인적 혼전순결운동만으로는 뜻밖에 낙태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미 뜻하지 않은 임신(미성년, 강간 등)은 일어났는데, 일방적 정죄분위기만 존재하는 기독교 문화에서 기독교인이 출산을 생각한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문둥병자가 되는 것과 같은 차별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윤리는 아직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사람들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윤리가 아닌, 이미 문제가 터져 죽을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우선 살리는 윤리로 거듭나야 한다.

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지켰던 안식일 문제를 갖고 바리새인들과 죽기로 싸웠을까? 안식일 법을 비롯한 모든 율법은 본래 타락 이후 온갖 불의, 탈취, 억압이 세상에 난무하지만, 아름다웠던 창조의 그 날(출 31:14-17)과 해방절의 은혜(신 5:12-15)를 기억하면서 적어도 그 날만큼은 사회적 불의를 풀고 구속의 은혜를 함께 맛보는 공동체적 축제일이었다(신 16:9~17).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회기득권층이 된 종교지도자들은 자유와 해방에는 관심이 없고, 갈수록 더 복잡하고 어려운 율법조항들을 만들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일반백성들이 개인적으로 그 조항들을 얼마나 지키는지 감시하며 손쉽게 정죄를 일삼았다. 결국 안식일 규례는 본래의 법정신처럼 자유와 은혜, 공동체적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살리는 날’이 아니라, 더 속박되고, 더 배고픈 ‘죽이는 날’이 된 것이다(마 12:1~14). 주님이 사랑했던 백성들은 불편하고, 위선적인 종교기득권층만 호사를 누리는 안식일. 예수님께 그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불의한 제도였다. 지금 우리도, 우리가 그토록 자부하는 보수신학, 정통신앙이 서민들의 살 의지를 더 꺾고, 억압과 탈취에 눈이 먼 기득권자들을 더 격려하는 ‘죽이는 윤리’가 되지 않도록 깊이 고민해야 한다.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의인이라던 욥도 결국 믿음으로 이겨 실행해 옮기지는 않았지만 정말 죽고 싶었다(욥 3장). 자살자들이 속출하는 우리시대가 참 슬프다. 개인의 실존적 고민에 의한 것이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든 사실 나는 자살현상이 걱정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든 뜯어 말려야하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죄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유가족을 위로하고 그와 같은 비극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세상을 개혁해 나가는 게 주님이 바라시는 남은 자들의 몫이 아닐까? 우리가, 그리고 한국교회가 살아남은 자의 몫을 생각하면서 좀 더 겸손해지면 좋겠다.







구교형 목사 
(성서한국사무총장/교회개혁실천연대집행위원/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 이 글은 뉴스앤조이, 뉴스파워 등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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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4)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6. 24. 10: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부유함 자체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다(마가복음 10:19). 즉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답하신다. 질문한 사람은 이것을 다 지켰다고 대답한다(마가복음 10:20). 이에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신다(21절).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

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가?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부유함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잘 지킨 자에게 주시는 복일 수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명기 28:2-6).

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부유한 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선행의 결과일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의 복으로서의 부는 자녀, 토지의 소산, 가축 등의 복이다. 따라서 부유함 자체는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증거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킨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부의 소유 자체를 문제 삼았다고 볼 수 없다.

토지 과다 소유가 문제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그에게 단지 소유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22절에 등장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서 ‘재물’이라고 번역된 말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끄떼마’는 재물 중에서 특별히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잠언 23:10은 지계표를 옮기지 말고 고아들의 밭(‘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끄떼마)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에 나오는 ‘사데’(땅)의 번역어이다. 70인역 잠언 31:16에도 ‘끄떼마’가 사용되는데, 여기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케렘’(포도원)의 번역어이다. 호세아 2:17에서도 ‘끄떼마’는 히브리어 ‘케렘’(포도원)의 번역어이다. 사도행전 5:1에서도 ‘끄떼마’는 땅을 가리킨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끄떼마)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사도행전 5:1-4).

‘끄떼마’라는 헬라어는 ‘토지’로 번역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번역은 문맥상 정당하기도 하다. 21절은 율법 지킴에 있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는데, 토지가 많은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토지를 일정한 분량, 즉 기업으로 물려받은 분량이상으로 소유하지 못하게 규정한다. 레위기 25:23은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다만 임대만 허용함으로써 토지소유의 집중을 막고자 한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23). 임대는 희년까지만 할 수 있었고 희년이 되면 원소유주가 다시 토지의 소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위기 25:28). 하나님께서는 토지 소유의 경계를 옮기는 것을 금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으로 소유지를 넓히는 것을 금하셨다. “그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토지의 소산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복일 수 있지만(신명기 28:11),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어기고 있는 상태이다. 스스로 영구매매를 하거나 지계표를 옮기지 않았고 조상들이 그렇게 한 것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 책임을 면하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량이상의 토지, 즉 본래 이웃의 것이었던 토지를 처분해야 하고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들이 가난해진 중요한 원인이 그들의 삶의 터전인 토지를 빼앗긴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토지와 함께 자본이 중요한 경제 변수인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구약성경의 토지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토지법은 토지를 잃어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하여 결국 노예가 되는 것을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법제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변함이 없고 농경 사회에서나 공업 사회에서나 정보 사회에서나 변함없다. 또한 오늘날 토지(특히 도시 속의 토지)는 불로소득의 중요한 원인이며 토지 투기는 이웃에게 많은 피해를 준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과 예수의 가르침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율법을 지킴에 있어 부족한 것은 바로 토지의 과다 보유였다. 그러므로 그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처분해야하는 것은 토지였다. 따라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은 곧 “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예수께서 팔라고 명하신 것은 바로 토지였다.

개역성경에는 ‘네 있는 것을 다 팔아’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 번역에 해당하는 본문은 그저 ‘네 가진 것을 팔아’로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호사’는 “모든 것” 등으로 번역되더라도 예외 없는 모든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마가복음 3:28에서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에서 ‘모든’은 헬라어 ‘호사’의 번역어인데, 이것은 예외 없는 ‘모든’을 뜻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3:29은 곧 바로 예외를 언급한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기업으로 받은 토지는 구약 성경에 의하면 팔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팔아야 하는 재물로부터 예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까지 팔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라고 명하시면서 율법을 어기고 토지를 전부 팔라고 명령하셨을 리 없다. 팔아야 하는 것은 고유한 토지 경계표를 넘어서 빼앗은 이웃의 토지이다. 이것은 율법이 허용하지 않는 불법거래를 통해서 획득한 토지이거나 임대한 토지를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고 계속 점유한 토지이다. 예수께서는 이것들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계표를 옮겨가며 남의 토지를 점령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신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미가 2:2-4).

토지를 넓히는 자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재앙은 그들이 땅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남의 땅을 빼앗았으니 이제 남에게 땅을 빼앗기는 것이다. 동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빼앗아 넓힌 이스라엘의 대토지소유주들의 땅은 이 말씀대로 빼앗겼다. 그들의 땅은 결국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로마에게 빼앗겼다. 나라를 잃고 땅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빼앗긴 땅에는 자유도 풍요도 없이 슬픈 노래만 남을 뿐이다. 빼앗긴 땅에는 봄이 올지라도 그것은 남의 봄이다. 빼앗긴 땅에는 가을이 올지라도 그것은 빼앗긴 가을이다. 정복자들에게 토지의 소산을 빼앗기는 가을이다. 토지를 빼앗기어 토지의 소산도 빼앗기고 그 땅에서 흘린 땀방울까지 빼앗기는 가을이다.

제자의 조건

예수께서는 동족의 토지를 빼앗아 지계표를 옮기고 땅을 넓힌 사람에게도 사랑을 표현하셨다. 단지 그가 다른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초청하시기까지 하셨다. 그에게 기회를 주신다. 그 토지들을 정리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가르침은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가 근심하며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본래 더 철저하다. 그것은 불법 소유지의 포기 정도가 아니라 목숨의 포기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자기를 포기하는 것은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죽으러가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매달려 처형당할 십자가를 가리킨다. 또한 십자가는 영광스런 죽음이 아니라 수치스런 죽음의 형틀이었다. 그것은 로마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죄수들이 로마 권력에 의해 멸시당하는 고통과 수치의 사형 도구였다.

예수를 따르는 조건은 생존의 포기이다. 즉 죽을 각오이다. 그것도 죄수로 죽을 각오이다. 보통 죄수도 아니고 반로마 정치범으로 죽을 각오이다. 반로마 무장투쟁을 한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오해 받고 죽을 각오이다. 지계표를 옮기며 불법적으로 확장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명령에 근심하며 떠나는 자가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겠는가?

예수를 따르는 조건, 즉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준행되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사도행전 2:45). 여기서 ‘재산’이라는 단어는 토지를 가리키는 헬라어 ‘끄떼마’의 번역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행위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른 실천이었다. 사도행전 4:34-35은 좀더 명확하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토지를 모두 처분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므로 그들이 판 것은 지계표를 넘어 확장한 토지였을 것이다. 바나바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 토지를 처분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 4:36-37). 구약에 의하면 레위인은 토지를 가질 수 없었고 다만 집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인 바나바는 구약에 따라 토지를 처분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는 그 자체로 오늘날의 교회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유효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모델이 아니라고 하며 거부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조건은 12명의 사도들을 위한 조건이 아니었고, 모든 제자를 위한 조건이었다. 그것은 교회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기준이 강조되는 교회는 없어졌다. 그와 함께 기독교의 위대함도 사라지고 말았다. 위대함이 사라진 기독교를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기독교의 위대함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예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조건을 회복하면 위대한 기독교는 회복될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예수와 토지법 3) 구원과 율법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6. 5. 09:3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영생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토지 문제에 관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살피기 위하여 우선 영생에 관하여 다루어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토지 문제는 영생에 관한 관심과 관련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장에서 22절과 30절은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이것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다.

토지와 관련된 경제 윤리적 문제는 마가복음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의 일부가 아니라 영생과 관련된 신앙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토지 문제는 교회의 사회 참여 문제나 기독교 경제학의 맥락에서 다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제자도의 문제와, 영생을 얻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진다.

마가복음 10:17-31은 영생에 관한 한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생을 얻는다’는 표현은 원어를 직역하면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다”고 번역된다. ‘상속받는다’는 용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후(민수기 26:55) 각 가족이 상속받은 것은 토지였다. 토지는 각 가족에 속하여 상속되었다. 그것을 매매하여 소유권을 이전할 수 없었다(레위기 25:23). 이러한 ‘상속’ 개념을 배경으로 ‘영생을 상속받는다’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소유로 확실하게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영생’이란 무엇을 가리킬까?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이 ‘영생’이란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용례를 살펴야 한다. 마가복음 9:45에는 ‘영생’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여기서 ‘영생’은 ‘지옥’의 반대말로 쓰였는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동의어로 등장한다.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9:45).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9:47).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마가복음 10:23에도 나온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상속받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표현과 같은 뜻을 가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마가복음 10:25-26은 이를 명확히 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이를 구원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구원 얻는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영생을 상속받는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들이다. 그렇다면, 영생을 상속 받는 길에 관한 질문은 곧 구원을 얻는 길에 관한 질문이다. 영생에 관하여 좀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다니엘 12:2을 읽어보아야 한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여기서 ‘영생’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받을 수 있는 상태이다. 즉, 영생이란 부활 후에 얻을 수 있는 복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단지 현세에서 누리는 복된 상태 이상의 종말론적 구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러한 미래적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구원의 길

종말론적인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관한 질문에 예수께서는 무어라고 답하시는가? 예수께서는 “네가 계명을 안다”고 답하신다. 이것은 문맥상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질문한 사람은 그렇게 알아듣고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마태복음 19:17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명확하게 진술한다. 이 말씀에 예수의 구원론이 담겨 있다.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

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결론은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야고보서 2:26은 이것을 명확히 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4은 행함이 없는 믿음, 즉 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함을 수사의문문의 형태로 주장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런데 행함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함, 즉 계명을 지키는 행함이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믿음을 행함과 무관한 지식적 믿음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믿음에 관하여 야고보서 2:19은 말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임을 믿는 믿음, 예수는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믿음은 귀신들도 가진 지식적 믿음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순종적 믿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다. 믿음 없이 행위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행위 없는 죽은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도 없다.

어떠한 행함인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그렇지만 행함이란 어떠한 행함을 말하는가? 구원의 조건을 논할 때 막연하게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대체 어떤 행함이란 말인가? 행함도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의 본질적 필요조건으로서의 행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행함이다. 우리의 행함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면 그 행함은 믿음의 행함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대로 행하면 그 행함은 믿음이 없는 행함이다. 행함 자체를 미화할 수 없다. 죽은 믿음이 문제가 되듯이 죽은 행함도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것인가? 각자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어 행동할 것인가? 물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알려주셨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관한 지침을 제공해 준다. 그 지침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율법을 배제할 수 없다. 율법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질문 받으셨을 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율법 조항들은 주로 십계명에 담긴 계명들이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처럼 예수께서 제공하신 행함의 기준은 계명들이다.

행위 구원 교리가 틀렸다고 할지라도 행함은 강조해야 하고, 율법주의는 틀렸다고 할지라도 율법은 강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구원과 관련하여 명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의 기능이 예수로 대체된 신약 시대에 율법의 역할이 상대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십계명을 제외하고 율법이 모두 폐지되었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십계명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십계명에 포함된 안식일 계명은 어찌하여 지키지 않는가? 참으로 십계명 외의 모든 법이 폐지되었다면 왜 십일조법은 열심히 지키는가? 무엇이 폐지되고 폐지되지 않았는지 인간의 편리에 따라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5:17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완성함으로써 율법을 폐지하러 오셨다고 해석할 것인가? 제사법에 관하여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계명이 폐지되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마태복음 5:19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우리는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현대사회 속에서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킬 수 없더라도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버릴 수 없다. 명확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담은 구약 성경을 버리고 단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겠다고 하는 것이나 자신의 직관이나 도덕적 감정에 의지하는 태도나 단지 합리적 계산에 의존하는 것은 모두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내어야 하고 그 뜻을 적용해야 한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적용할 때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런데 율법 없는 행함은 죽은 행함이다. 행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율법을 떠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열심히 행하는 행함이라면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행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특히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들과 신약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의 새 계명들과 관련될 때 구원과 관계된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갈라디아서 5:6).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이다. 성경은 행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강조되는 행함은 성령께 순종하는 행함이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라디아서 5:16).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성취하는 삶이다(갈라디아 5:23).

행함 없는 믿음의 강조도 율법 없는 행함의 강조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생의 길과는 무관하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길에 관한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신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태복음 19:17).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예수의 말씀을 행위 구원이라면서 배격하고 율법주의라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과연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인가? 예수를 믿음이 없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교리에 관한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교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서 계명들을 어기고 살인하고 간음하며 도적질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자유가 하나님께 있지만 구원하지 않으실 권리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신다면 우리가 이신칭의 교리를 근거로 하나님께 부당하다고 따질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리를 용서해 주실 의무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법칙이 아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도 법칙이 아니라 구속사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신칭의 교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교리적 법칙 속에 가두면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을 제한하게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한 성도가 드리는 겸허한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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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2)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넘어서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5. 21. 12:2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성서와 사회

예수를 믿는 우리의 신앙이 어찌하여 삶 속에서 힘을 잃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분리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의 분리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신앙과 삶이 종종 분리되어 왔다. 그리하여 성서와 사회도 분리되어 왔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신앙생활이 사회 속에서의 삶과 무관하였다. 성경을 연구하며 성경에서 깨달은 만큼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사회 정의를 세우는 실천에까지 쉽게 나아갈 수 없었다. 성경에서 사회 정의 운동을 위한 토대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종 발생했다. 그들의 사회 참여는 성경이 명하는 규범에 따르기보다는 시대가 요청하는 필요에 따라 일어나곤 했다. 그리하여 성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나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사회와 관계없는 책으로 여겨지곤 했다.

성서가 사회와 분리되면, 성서는 그저 종교적인 책으로 남게 된다. 성서가 종교 영역을 다루는 책으로 제한되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고백도 예수의 왕 되심에 대한 신앙 고백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성서가 사회 문제에 대한 지침을 주는 책이 되지 않는 한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은 그저 말뿐이게 된다.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이 참으로 진실되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메시지를 사회에도 적용해야 한다.

그리스인들의 삶 속에서 왜 성서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었을까? 왜, 정의감이 충만한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서 없이 행동해야 했을까? 왜, 성경을 사랑하는 신실한 기독인들이 성경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비전을 얻지 못하였을까?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안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기는 경우에는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이를 사회 문제에 적용하지 못한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거룩한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을 개인의 종교적 삶을 위한 책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위대한 성경을 이렇게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약 성경과 기독교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교회가 사회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이다. 믿음과 행함이 연결되어도 성서와 사회가 분리된다면 행함은 교회 속에서의 종교적 행위로 제한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힘을 잃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하려면 우선 그러한 분리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의 원인은 성서 안에서 구약을 삶의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시작한다. 한국 교회들은 구약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며 구약 성경의 형식적 권위를 존중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구약 성경의 형식적인 권위는 인정하면서 실제적 권위는 부정하는 셈이다. 구약 성경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처럼 물러나게 된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되면 왜 성서와 사회가 서로 분리되는가? 구약 성경에 사회와 관련된 법들이 많기 때문이고 이러한 법들과 관련된 선지자들의 선포가 많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될 경우에는 이러한 법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에 적용되지 못하게 된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를 위한 원리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잘 알아도 그러한 내용들이 폐지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구약 성경은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이 사회와 분리된 상태에서 신약 성경만을 사회와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 가진 사회적 차원을 전제하고 이것을 기초로 영적인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고 신약 성경을 읽으면 사회적이면서 영적인 신약 성경은 단지 개인적이면서 영적인 것으로 오해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구약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삶의 기준이라고 고백하지만, 동시에 구약 성경의 규범적인 효력은 폐지되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구약 성경 39권의 삶의 기준으로서의 효력을 믿지 않고 있다. 신구약성경 66권 전체가 삶의 기준이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동시에 신약시대에는 구약의 법들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이러한 모순이 위대한 구약 성경의 빛이 사회 속에 비치는 것을 가리고 말았고, 구약 성경을 맛 잃은 소금처럼 만들고 말았다.

구약 성경의 율법 조항이 폐지되어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적용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교회의 삶 속에 제멋대로 적용하는 것은 또 하나의 모순이다. 교회 생활에 구약 성경을 적용할 때에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며 적용한다. 그리하여 구약 성경은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나 헌금을 강조할 때, 목사의 권위를 강조할 때 이용된다. 구약의 제사는 헌금으로, 제사장은 목사로, 성전은 예배당으로 연속되는 것처럼 적용한다. 사회를 향한 구약 성경의 메시지는 무시하면서 교회를 위해서는 마음껏 이용한다. 이것은 성경을 믿는 태도가 아니라 이용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태도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성전 제사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예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므로 구약 성경의 제사법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헌금을 만들어 내며 이를 설득하기 위하여 구약의 다양한 제사들을 언급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폐지된 제사법들을 적용하는 한편 폐지되지 않은 계명들은 율법 폐지를 외치며 지키지 않는다. 십계명은 신약 시대에 계속 지켜져야 한다는 데에도 대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일요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전통마저도 점점 사라지면서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이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십계명을 무시하면서 제사법은 적용하려고 하는 모순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엄연히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다른 율법 조항들이 존중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예배당 건축이나 헌금과 관련하여 이용할 수 있는 율법들은 열심히 강조되고 적용된다. 한국 교회에선 십일조법도 열심히 지켜지고 있다.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십일조법이 지켜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안식일법은 헌금과 관련되지 않지만 십일조법은 헌금과 관련되기 때문은 아닌가?

물론 필자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율법 폐지론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십일조만은 예외라고 하며 열심히 지키는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폐지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십일조를 폐지하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니라”(마태복음 23:23).

십일조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바리새파 비판은 더군다나 폐지되지 않았다. 십일조를 드리지만 더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비판되어야 마땅하다. 율법에 담긴 공의를 내어버린 반율법주의는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렸다. 어찌하여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리면서 덜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담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내어버리고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아닌가?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신 율법의 효력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인정하신 율법은 신약 시대에도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더 철저하게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신약 시대에도 지켜져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과 제사장,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십일조법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이 사라진 현대에도 지켜져야 한다면,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지켜져야 마땅하다.

예수와 율법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셨는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율법을 버리고 폐하는 자들을 비판하신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부여잡고 있다”(마가복음 7:8). “너희들은 너희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부수고 있구나!”(마가복음 7:9). “너희들은 너희들이 전수받은 너희의 전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마가복음 7:1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신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율법을 잘못 적용하여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전통을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5:17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으셨고 완성하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9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키도록 가르칠 것을 권장한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구약에 명령된 율법을 신약 시대에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며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는 율법의 일부로서 토지법이 담겨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레위기 25: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토지는 단지 임대될 수 있을 뿐 매매될 수 없었다. 이것은 율법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19을 토지법과 관련시켜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토지법을 폐지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또한 토지법을 지키며 이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토지법을 신약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토지법을 폐지하셨다는 증거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한 증거가 없는 한 우리는 구약의 율법들을 지키려는 시도와 노력을 존중해야 한다. 폐지된 흔적도 없고 지키라고 명해진 증거도 없는 율법 조항들은 열심히 지켜지는 것이 안전하다. 적어도 그러한 율법 조항들을 열심히 지키려는 사람들을 신율주의자라고 부르며 정죄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켜야 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낭패를 당하기보다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을 지키는 불편을 겪는 것이 더 안전하다.

율법 조항들 중에서 예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율법들은 신약 시대에도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 예수께서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이 율법의 일부라는 이유로 거부된다면 이는 예수를 믿지 않는 태도이다. 율법폐지론이라는 신학적 입장이 중요한가, 예수의 가르침이 중요한가? 율법폐지론은 신학자들의 가설이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메시아의 명령이다. 인간의 가설을 따를 것인가,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인간의 신학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이 폐지된 흔적이 없다면 그것을 지키려는 운동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폐지론에 은연중에 빠져 있다. 토지법이 폐지된 증거가 없다는 소극적인 논리로 그들이 토지법을 존중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 율법폐지론에 빠진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예수께서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만일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 과연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는가? 예수께서 토지법에 관하여 어떠한 태도를 보이셨는지 알려주는 본문이 복음서에서 발견된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17-31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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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3일 총신대학교 제6회 죽산기념강좌에서 ‘박형룡의 교회정치윤리’란 제목으로 발제를 맡은 이상원 교수(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는 “광대회의의 권세는 지교회의 당회가 다룰 수 없는 사안에 한하여 행사되는 것에 제한되어야 한다. 광대회의를 ‘상회’라고 부르는 것은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라며 박형룡 박사의 견해를 소개했다.

▲ 이상원 교수 "광대회의를 ‘상회’라고 부르는 것은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 뉴스파워 최창민

 이어 이상원 교수는 “사실상 한국교회에서는 광대회의를 ‘상회’라고 부른다. 광대회의는 지교회로부터 위탁받은 사안들과 지교회간의 사안들에 한하여 한시적이고 직임적으로 제한적인 ‘상회’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일 뿐 항구적인 상회는 결코 아니”라며 “오히려 지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섬기는 기관일 뿐”이라고 총회의 역할을 규정했다.

 이 교수는 특히 박형룡 박사가 교회정치윤리를 신율적 지평 안에서의 ‘민주적 대의정치’라는 점을 일관성 있게 강조했다고 밝혔다. “오늘날 대교회에서 담임목사는 제왕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부목사들은 그 밑에서 수종을 드는 위계구도를 형성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로마 카톨릭적인 계층적 성직계급화되어 가고 있다.”며 일부 대형 교회에서 나타나는 담임목회자의 제왕적 권위를 통한 계급화 현상을 비판했다. (이상 ‘뉴스파워’ 기사 인용)

 이것은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인 백종국 교수(경상대)가 수년간에 걸쳐 주장한 내용에 대한 신학자가 다시 확인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백종국 교수는 각 교단의 총회가 광대회의체라는 의미에서 각 교회의 정관이 각 교단 총회의 헌법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치며, 각 교회 모범정관제정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물론 박형룡 박사나 박윤선 박사가 이러한 주장을 했지만 그동안 한국교회의 상회 우선주의에 묻혀 있었다. 그러한 주장은 한국교회의 성장 지향적인 모습 속에서 교단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주장으로 여겼으며, 이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소수로 전락하였다.

 백종국 교수는 그의 저서인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에서 한국의 개신교에 파고든 사제주의는 프로테스탄트의 복음적 맥락을 사로잡고 있는 바벨론의 세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바벨론의 세력이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힘을 과시해왔다. 지금도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이 세력은 정부의 권력과 영합하여 개신교를 움직이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동안 몸집을 불려 힘을 과시하는 맘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카톨릭과 같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사제주의를 따라 갈 것인가? 아니면 민주적 대의정치를 정착하여 새로운 물결을 만들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총회나 노회를 교회의 상회로 왜곡하며 간다면 결국 교회를 줄세우기하고 교권주의자들의 욕심을 따라 이합집산하게 될 것이며, 교단을 정치적 집단으로 만들 것이다.결국 이러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총회나 노회는 각 교회들이 하기 힘든 사회봉사나 선교사업을 위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일명 ‘상회비’라는 이름의 회비를 헛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교회에서는 교회의 실정에 맞는 정관을 만들어 바르고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결국 한국 교회를 맘몬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바벨론에 사로잡힌 한국교회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고상환 집사(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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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지난 20여 년 간 함께 공들여 쌓아 올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족화해와 통합의 기반이 단 1년 여 만에 이토록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처절히 체험하고 있다.

권력기관 및 공권력의 권위주의는 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고, 사법은 최소한의 공정성도 상실한 채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법을 지키라’ 윽박지르고, 조금만 비판적이면 방송도, 통신도, 인터넷도 쉽게 처벌하며, 조금씩 쌓아올려 가던 사회복지의 토대는 한순간 무너져가고 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조금씩 쌓아온 소중한 가치들이 오직 막개발을 통한 경제성장, 이 단일한 정권적 가치 앞에서 송두리째 날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민족화해와 평화의 기초가 산산조각 나고 있다는 것이다

1. 지금의 잘못된 기초는 분명 이명박 정부가 세웠다.

지금 남북관계는 더 이상 악화되기 힘들만큼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뭐니뭐니해도 이명박 정부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다른 모든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대북, 통일정책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임 정부의 것이라면 무조건 부인하는, ‘정책 아닌 정책’을 만들어 스스로 갈 길을 묻어 버렸다.

지난 6공화국 때부터 시작되어 10년 간의 오랜 산고 끝에 조금씩 꽃피워가던 남북화해, 협력, 공존의 기틀은 ‘햇볕정책=북한퍼주기=친북/좌파정책’라는 단순한 공식 하나에 묶어 한 순간에 폐기처분해 버렸다. 그리고 공식적 대북/통일정책이라고 만든 ‘비핵개방 3000’정책은 비핵과 개방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현실적 이정표는 없이, ‘당장 핵을 없애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개방을 하면, 북한 1인당 GDP를 3000달러까지 만들어 주겠다.’는 당근 같지만 사실은 우롱에 불과한 말로 대신해 버렸다. 전쟁까지 치르고 지난 60여 년간 죽기로 싸워왔던 남북관계 가운데서 ‘당장 고분고분해지면, 최소한 먹고는 살 게 해 주마.’는 식의 시나리오를 대북정책이라 한다면 과연 대화를 하자는 것으로 보이겠는가?

그 속내를 보이듯이 현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7.4남북공동성명(박정희 정부), 남북기본합의서(노태우 정부)는 계승한다면서도, 유독 6.15 남북공동선언(김대중 정부)과 10.4선언(노무현 정부)만큼은 분명한 계승의지를 회피하고 늘 은근슬쩍 넘어갔다. 그것은 두 선언을 통해 지난 10년 간 남북정부가 함께 만들어낸 모든 대북화해정책을 거부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지난 10년 간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였던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이 지금 거의 좌초의 위기를 당했다. 현 정부와 수구언론들은 마치 이 사업이 북한정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방적으로 혜택을 베푸는 ‘북한 퍼주기’의 전형으로 선전해 왔다. 이건 정말 어불성설이다. 우리 남측 관광객들에게는 ‘그저 꿈에서도 그릴만한 아름다운 금강산’에 불과하지만, 사실 그곳은 잠수함 기지를 비롯한 북한 해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북한의 자존심이자 전략 요충지에 드나드는 대가로 지급되는 관광대가가 매달 100만 달러 정도니, 일 년에 고작 1200만 달러에 불과하다.

개성은 북한 유일의 고속도로를 통해 심장부인 평양까지 가는데, 겨우 2시간 거리에 있고 주변에 인민군 6사단과 64사단, 그리고 62포병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전략적 사활지역이다. 무엇보다 62포병여단은 서울 용산까지 사정거리에 두고 시간당 1만발 안팎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무서운 장사정포를 보유한 최정예 부대다. 개성공단은 바로 이러한 군사기지와 무기들이 배치되어있던 적진 한 가운데에 들어서서 남측 자본과 북측 노동자들이 함께 협력해 만든 화해의 토대가 되었고, 적대 국민이었던 남측 관광객들은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리고 이 남북협력사업을 위해 북한군은 불가피하게 그러한 무기들을 10km이상 후방으로 물려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위해 남측이 지불하는 비용도 역시 연간 1200만 달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금강산과 개성공단 비용을 합해야 연간 24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400억원이 채 못된다. 이 정도면 ‘북한 퍼주기’가 아니라, 평화를 사는 비용인데도 값은 ‘껌 값’이 아닌가? 400억원은 08년 서울시 예산 19조 4343억원의 1/485이다. 또 2009년 우리나라 예산 284조5000억 원에 견주어 보면 1/7112에 불과하다. KF-16 전투기 한 대 가격이 426억원이니, 남북평화 만들어 전투기 한 대 덜 사면 딱 떨어지는 돈이다.

요즘 햇볕정책은 완전히 실패한 정책이라고 쉽게들 말한다. 그렇다. 실패를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정책자체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요인을 막아 놓아 성공할 수가 없는 정책이다. 햇볕정책은 현 정부에 의해서 정치적 타살을 당하고 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노력해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은 근본부터 세부적 운영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잘못됐다. 자존심을 내세울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생존과 나아가 한민족, 동북아의 번영을 위해서도 화해협력 기조로 극적 전환을 시작해야 한다. 

2. 북한정권의 중심에는 백성이 없다.

그토록 우려했지만 북한은 너무도 의연히(?) 결국 로켓을 쐈다. 로켓실험이 궤도를 돌고 있는지, 예상 사거리에 도달했는지는 처음부터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예상대로 한미일 세 나라는 공조를 이뤄 북한제재를 만들어가고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북한은 전략적으로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달성했다. 1994년 1차 핵위기 때나 1998년과 2006년 미사일 발사 때나, 2006년 핵실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로켓 실험도 기술적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북한이 전략적으로 기대했던 효과는 충분히 얻었다.

아마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은 자신감에 차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성공한 위기전략, 변함없이 위력을 발휘하는 벼랑 끝 전술에 스스로도 감격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눈앞의 정권적 전략에는 거듭 성공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민족공동체 운명이라는 관점에서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지금 북한은 모든 면에서 수세에 처해있고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기에 기본적으로는 자기 보호적이고, 체제유지 전략에 의지하게 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된다. 전략적으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김정일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정권과 체제의 방어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백성의 안위쯤은 쉽게 내칠 수 있어 보이는 몰인정한 단호함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이미 60여 년이 넘게 한 체제를 지배해온 기득권자들이기 때문이다. 기득권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개혁과 변화를 위한 조그마한 시도를 보이다가도 조금만 손해가 날 것 같거나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자기 것을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키려고 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우리사회 모두가 지켜야할 가치’라고 선전한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사회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조금 개혁적인 실험들을 해 보았지만,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수구세력들이 이명박 혁명(?)을 통해 단 1년 만에 총체적으로 뒤집으려 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김정일 정권 역시 우리 사회가 보기에는 급진적이지만, 60여 년 동안 권위주의적으로 유지된 북한사회에서 본다는 엄연한 보수, 수구정권이다. 그래서 지난 10년처럼 대북우호적인 한국정권이 유지되거나 유화적 국제 분위기가 조성되면 개혁과 개방을 위해 조심스러운 시도를 모색하는 듯 하다가도, 자기 지도자의 자존심과 체제비판적인 분위기가 조금만 조성되면 언제든 벼랑 끝으로 달려가 “모두 함께 죽자”고 소리를 친다.

이명박 정부가 어떻게든 남북협력 정책을 무너뜨리려는 판에 박왕자 씨 사건처럼 금강산 폐쇄의 정치적 동기를 제공하거나, 개성공단을 열었다 닫았다하며 정치적 흥정꺼리로 만든 것은 이명박 정부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진 꼴이다. 그럴 때마다 지금껏 북측과 협력해 왔던 남측 파트너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솔직히 말한다면 북한은 지금 큰 것 한 방만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자질구레하게 공단이니 남북협력이니 하며 남한 따위는 상대할 것 없다. 미국과의 수교, 한 방이면 끝난다.’는 대박주의다. 한국에 대해서는 항상 자주성을 요구하지만, 북한 정권 역시 조금만 수가 틀리면 언제든 ‘通美封南'(미국과만 대화하며 남한은 따돌리는 전략)으로 돌아가는 매우 사대적인 발상이다. 통미봉남 전략은 결코 옳은 전략이 아니다. 그들의 구호처럼이나 ‘우리 민족끼리’는 수월할 때 뿐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도 지켜야할 원칙이다.

북한 지도부는 이제 기껏 자기 정권 방어가 아니라, 2,300만 인민들의 안위를 위해 사활을 걸어야 한다. 이미 3세대 세습을 진행하고 있지만 자기 백성에게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위대한 지도자’로서 백성의 안위와, 대남 파트너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지금 고민해야 한다.  

3. 아직은 기회가 있다.

개인이나 국가, 민족 가릴 것 없이 세월이 흘러 “그 때 좀 더 잘할 걸!”하며 후회하지만, 이미 기회를 잃어 한탄할 때가 있다. 지난 20여 년간 남과 북은 국제적 냉전종식과 시대흐름을 같이 하여, 민족공존과 번영을 향해 갈 수 있는 몇 번의 호기를 아쉽게 놓쳤다.

노태우 정부 때 북방정책에 기반 한 91년 남북한 유엔공동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발표는 의미 있는 첫 출발이었다. 이어 등장한 문민 김영삼 정부는 한완상 총리를 내세워 비전향 장기수를 북한에 인도하고 마침내 94년 김일성 주석과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을 합의하는 등 결정적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갑작스런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조문파동을 비롯해 최악의 북한 식량위기 때도 방관하는 등 이후 임기 내내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듯 한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해 스스로 기회를 내 버렸다. 이제 10여 년이 지난 지금 또 하나의 장로대통령이 민족이 공존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고 스스로 역사의 죄인이 되려하고 있다.

지금 동북아 상황이 이 지경이 된 데에는 미국의 책임도 크다. 부시정권은 집권 초부터 북한에 적대정책을 공언했고, 심지어 9.11테러 후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북한의 반응마저 깡그리 무시하며 스스로 대화의 길을 끊었다가, 핵도, 미사일 억제도 다 실패한 후 임기 말 뒤늦게 대북유화로 돌아서려다가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여기엔 김정일 위원장도 한 몫 크게 했다. 그는 2000년 남북정상 회담 후 심지어 조중동 조차 남북화해협력의 거센 물줄기를 거역할 수 없었던 그 좋은 기회에 더 좋은 시기, 더 큰 몸값만 기대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대남창구가 막혔던 그 시절, 북한은 상대적으로 우호적일 수 있는 민주당 클린턴 정부와 적극 협력을 모색했어야 했는데, 그의 임기 내내 신경전을 벌이다가 클린턴 임기 말 뒤늦게 제네바 합의 등을 이뤄냈으나, 그 합의는 이후 8년을 집권한 부시정부 동안 다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허망함은 대남관계에서도 또다시 재현돼 지난 2007년 가을 돌연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과 2차 정상회담을 통해 좋은 합의들이 있었지만, 이 역시 노 대통령의 임기 말로 힘도, 인기도 다 떨어져버린 뒤였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은 엄연히 이명박 씨다. 그 다른 파트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씨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힘겨루기 막전막후에 엄연히 2,300만 북측 인민들과 4,800만 우리 국민들이 있다. 우리는 100여 년 전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질 줄 몰라서 거듭 외세의 힘만 의지하다가 결국 식민화와 분단, 전쟁을 겪어 왔던 것처럼 이제도 스스로 문제를 풀지 못해 주변 강대국의 도움만 바라보다가 민족공멸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그러나 두 지도자들의 지혜로운 선택과 우리 백성들의 현명한 책임 여하에 따라서 포용력 없는 신자유주의의 포로가 된 대한민국과 총체적 부실에 빠져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넘어 평화와 공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새로운 통일조국을 새롭게 만드는 하늘이 주신 기회를 맞을 수도 있다. 우리의 선택 속에 아직 기회는 있다.






구교형 목사 
(성서한국사무총장/교회개혁실천연대집행위원/통일시대평화누리실행위원)

*  이 글은 복음과 상황 5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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