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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복음과상황기사)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2. 15. 09: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 개원, 원장 박득훈 목사를 만나다

   
▲ 신학연구원‘느헤미야’의 원장으로 내정된 박득훈 목사(언덕교회). ⓒ복음과상황 이종연
대안 신학교육의 장이 열린다.

성서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권 활동가와 신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학연구원 느헤미야’가 그것.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개혁을 열망하며 뜻을 모아 온 이들은 지난 11월 중순 첫 모임을 갖고 느헤미야와 같은 진정한 개혁가를 양성하는 대안신학교의 장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신학을 기반으로 학제 간 연구를 통해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 목표다. 이곳에서는 목회자, 평신도라는 틀을 벗어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배울 수 있다. 복음주의권 신학 풍토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느헤미야’의 원장으로 내정된 박득훈 목사(언덕교회)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복음주의권 신학 교육 기관이 나오는 것이라고 봐도 되나요

예민한 질문이네요.(웃음) 요즘 ‘열린’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열린 복음주의’라고 하면 어떨까요. 복음주의의 전통과 기반을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끊임없이 진리에 대해 열린 추구를 하는 것이죠.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신학연구와 교육’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2000여 년 기독교 역사상 신학은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어요. 존경하는 루터나 칼뱅의 신학조차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거든요. 아무리 훌륭한 신학적 전통이라도 역사 발전과 함께 하나님의 성경적 계시의 이해가 깊어지기 때문에 수정될 여지가 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 복음주의’라는 것입니다.

‘열린 복음주의’와 성경은 어떤 관계인가요

복음주의의 핵심 슬로건 중 하나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의 자명성이 진지한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배제한 것이 아니었죠. 또한 어느 시대, 누가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했는가 하는 것은 열려 있는 질문이죠. 역사가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성경의 본뜻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신학은 발전되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열린 복음주의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고 새로운 사상이면 뭐든지 받아들이겠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어떤 해석 혹은 신학적 입장이 성경 본연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지 치열하게 탐구하면서 성경이 현재 복음주의 전통에 수정을 요구한다는 확신이 들면 얼마든지 수정할 용의가 있다는 점에서 이해해 주면 좋겠네요.

한국의 신학교가 말씀하신 부분을 지향하지 않았다고 보시나요

굳이 우리만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에 깊이 공감하는 신학자들과 기독운동가들이 ‘느헤미야’에 다양한 역할로 집결하게 되었다는 점에 그 독특성이 있다고 봅니다. 런던 바이블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전공분야가 서로 다르지만 신학교수들의 중심을 관통하는 일관적인 흐름이 있다는 것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회 정의에 대한 열망을 발견했을 때, 저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죠. 중요한 신학적 이슈와 관련해서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하거나 강조점이 다른 교수들에게 배울 때, 학생들은 과연 누가 옳은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신학연구원 느헤미야’가 일반 신학교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신학연구원을 만들게 된 배경부터 남다릅니다. 대안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신학연구원을 만들도록 자극한 사람이 기독운동가들이었어요. 이 점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출발점 자체가 신학자와 성도의 합작품 아닙니까. 아마 이것이 앞으로 우리 연구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봅니다. 신학자 중심주의, 사제 중심주의가 아니라 신학자․목회자․성도가 함께 연구원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는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비전과 사명이 새롭다고 할 수 있어요. 비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 사회 그리고 자연 등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나라를 구현해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 즉 목회자 중심의 교계를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함께 일하는 기독공동체로 전환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사명은 첫째,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교육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하여 성도를 위계적으로 차별하지 않고, 목회자 성도와 비목회자 성도가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함께 신학을 공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둘째, 세상과 소통하는 연구입니다. 신학적 기반 위에서 학제 간 연구를 하려는 거죠. 신학과 일반 학문을 단순히 병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역동적으로 스며들게 하는 연구를 할 것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아야만 세상에 나가서 호소력 있는, 영향력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가령,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기독교적 언어와 일반적 언어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흑인인권운동에 대한 충분한 지지를 교회와 사회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거든요. 학제 간 연구란 바로 그런 실천적 인물 양성에 목적이 있음을 의미해요. 단순히 지적 엘리트를 길러 내려는 것이 아니에요. 일반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실현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을 키울 겁니다.

셋째로,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을 품고 그 비전과 가치에 따라 한국교회와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수 있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자도를 구현해나갈 수 있는 사람 말이죠.

하지만 강사진은 신학자 혹은 교수 아닌가요

현재로선 사실이지만 그렇게 우려는 하지 않아요. 언젠가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가 시민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자적 소양을 갖고 있는 운동가, 운동가적 소양을 갖고 있는 학자, 시민운동을 지지해 주는 후원자’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연구원 강사진은 말하자면 기독 운동가적 소양을 갖춘 신학자들입니다. 그분들은 학제 간 연구에 익숙한 분들이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학교를 만들어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 중엔 신학적 소양과 기독교적 영성을 잘 갖춘 기독 운동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학교 강의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도 강사진에 포함해서 공동으로 강의하고 연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거예요.

교회와 사회를 변혁시켜나가는 ‘일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 교육 목표라고 하셨는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교회와 사회에 깊이 침투해 있는 맘몬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맘몬에 친화적인 모든 것들을 혁파하는 데 그 일차적 목표가 있습니다. 덩치가 커져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맘몬의 가치와 전략이 교회와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덩치를 키우는 데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데 있어요.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가치대로 살아갈 때 덩치가 커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무능력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강압적으로 세상의 역사를 이끌지 않으십니다. 기다리고 상처를 받고 고통을 입으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규모를 확대하려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돼요. 오늘 신학교나 교회가 병든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덩치가 커져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맘몬의 논리에 속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따라 교회와 세상을 변혁해나가는 것은 우선 맘몬의 논리의 기만성과 위험성을 폭로하고 배격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나라를 펼쳐가는 진정한 힘은 ‘작은 밀알의 생명력’에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밀알로 땅에 떨어져 썩어 죽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역동적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맘몬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 세속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어떻게 변혁 가능하다고 보시는지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죠. 우선 세속 사회의 변혁자로 살아가려면 맘몬의 가치와 하나님나라 가치가 강력하게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견뎌 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 가면 그걸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요. 갈등 속에서 사는 게 힘들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없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충돌 속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참아 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경로를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형편과 은사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크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맘몬과 하나님이 일상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일터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일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혜롭게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맘몬의 질서와 타협하고 기다려야 하기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변질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며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일터를 박차고 나와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일터의 구조와 틀을 바꾸는 법을 만드는 정치인 혹은 시민운동가가 될 수도 있고 비록 근본적인 제도와 법을 바꿀 수는 없지만 틈새에서 대안적 일터를 스스로 만들어 갈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이런 길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구원받을 이의 특징 중 하나로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를 언급하고 있어요. ‘느헤미야’에서 이런 사람을 키워 내고 싶습니다. 외로운 광야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언덕이든,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영광임을 확신하고 그 길로 가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깊은 영성이거든요. ‘느헤미야’는 그런 영성을 길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신학의 양극화를 해소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으로 예상하지는 않나요

그럴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신학계나 교계의 주류가 되려는 의지나 욕망이 없습니다. 외로움을 각오하고 광야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며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데 초점이 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에 대해 크게 마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만의 특징을 구현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이들의 열정과 눈물 그리고 헌신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일으켜 주셔야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신학연구원의 실질적 운영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이 깊고 인격이 탁월한 실천적 지도자였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할 뿐 아니라 사회ㆍ경제적 개혁, 그리고 영적 갱신을 주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사장이며 신학자였던 에스라와 아름답게 동역을 하였던 느헤미야. 신학연구원 ‘느헤미야’의 노고와 기도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아름답게 변혁해 나갈 이들이 배출될 것을 기대한다. 

글 사진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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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희망을 본다.

하나님나라운동/교회개혁 | 2009. 11. 30. 13:4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제가 속한 교회개혁실천연대 부설 교회문제상담소의 상담 사례를 보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몰상식한 일이 많아 입에 거론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흔히 말하는 파렴치범은 교회에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물론 많은 내용은 목회자들의 부정과 불륜, 재물횡령, 거짓말 등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문제를 일으키는 목회자들은 벽창호처럼 일반 교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한다. 자기가 말한 것이 곧 법인 양 호도하고 교인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교인들로서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말로 교인들에게 말한다. 이것은 목회 사항이므로 목회자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예배에 대한 문제이니 이는 건드리지 말라. 목회자는 하나님이 기름부으셨으니 괴롭하면 벌을 받는다. 등등,,,

만인제사장설이 보편적인 진리임에도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인들을 바보로 취급하는 목회자들이 너무 많다. 또한 예배당 건축을 성전(聖殿)건축이라는 말을 포장하여 헌금을 강요하고 이를 통한 자신들의 업적을 쌓는데 혈안이다. 예배당의 크기, 교인의 수, 헌금의 액으로 교회의 서열을 매기는데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교인들의 반응 또한 가관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종이라 자청하는 사람들에게 종이 된지 오래고, 그들의 말이라면 사회에서의 상사의 명령보다 더욱 복종하며, 비상식적인 것도 은혜로운 것으로 합리화하여 넘어가는 현상이 우리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니다. 교회는 이들의 사교장이 되어가고 있고,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의 계급화된 서열을 좇아 가식된 모습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에 거품을 물며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교회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며 은혜롭게 하자는 이율배반적 태도는 이미 관례화된 지 오래다, 비상식의 차원을 넘어 몰상식의 단계이다.

이제 교회개혁이라는 목적을 향해 뛰어본지 10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나름 보람을 느끼며 운동을 해왔지만 너무나 상황은 절망적이다. 군부독재를 살던 선배들의 시대상황을 보는 듯하며 선지자들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보는 것 같다. 과연 희망은 있는 것일까?

그러나, 황무지 같은 한국교회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날 것이라고 본다. 그동안의 우상화된 가치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자라나리라고 본다. 이 한국교회의 무덤을 뚫고 나갈 교회 공동체들이 생겨나고 있고, 자신들의 권위를 부정하며 새로운 권위를 쌓은 목회자들이 분투하고 있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투쟁하는 교인들이 있기에 가능하리라고 본다. 또한 이제는 이 개혁을 뒷받침할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고, 기독 경영을 바탕으로 하는 착한 소비와 문화운동, 그리고 언론 매체들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말씀 위에 서서 우리는 그 희망을 향해 뚜벅 뚜벅 가야한다.









고상환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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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실천연대 사경회 2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1. 30. 11:3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일시 : 2009년 11월 16일 장소 : 교회 다움 강사 : 정준경 목사 (뜨인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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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실천연대 사경회 동영상1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11. 30. 11:2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일시 : 2009년 11월 16일 장소 : 교회 다움 강사 : 정준경목사(뜨인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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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10) 구약 70인역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1. 24. 14:3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단어의 뜻과 용례

한 단어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의 용례를 관찰하여야 한다. 특히 동일한 저자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하여야 한다. 한 단어는 불변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사용자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의 의미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마가복음의 저자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하여야 한다. 사전을 보고 이 단어의 뜻이 ‘토지’라고 하거나 ‘재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것이다. 사전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아니라 저자의 용례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끄떼마’는 마가복음에서는 10:22에 한 번 등장한다. 또한 마가복음의 저자가 쓴 작품이 마가복음 이외에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으므로 마가복음의 저자가 ‘끄떼마’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였는지 관찰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 차선책은 마가복음의 저자가 읽었던 문헌들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가 읽었던 문헌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번역인 70인역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 인용된 구약본문들이 70인역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이 구약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부분들을 관찰해 보면(1:2, 3; 7:6-7, 10; 10:19; 11:17; 12:10-11, 19, 26, 29, 30, 31, 32, 36), 이 부분에 사용된 206 단어 중에 178 단어가 70인역과 그 형태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비교를 위하여 편의상 네스틀레-알란트 27판의 마가복음 본문과 A. Rahlfs가 편집한 Septuaginta,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35]의 본문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86.4 %의 일치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에 입각하여 마가복음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70인역에서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가 70인역을 인용하였다면 이것은 그가 평소에 70인역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70인역에 사용된 헬라어 용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끄떼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 단어가 70인역에서 가지는 의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70인역에서 ‘끄떼마’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관찰하여 그 단어가 마가복음에서 어떠한 뜻을 가질 수 있는지 추측할 수 있다.

70인역과 끄떼마

70인역에서 ‘끄떼마’는 잠언 12:27; 23:10; 31:16; 욥기 20:29; 27:13; 호세아 2:17; 요엘 1:11에서 사용되었다. ‘끄떼마’의 뜻은 우선 히브리어 구약 성경과 비교하여 파악될 수 있다. 70인역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70인역의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성경 본문과 동일한 본문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70인역의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성경 본문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본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성경 본문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70인역 번역자들이 그들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에 어떠한 뜻으로 사용하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히브리어 본문으로는 맛소라 본문을 담은 BHS 본문을 편의상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70인역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구약 본문과 BHS 본문이 서로 동일하다고 간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70인역을 읽는 독자들이 70인역을 읽으면서 히브리어 성경과 비교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70인역의 독자의 하나로서의 마가복음 저자도 70인역에 사용된 ‘끄떼마’의 의미를 히브리어 성경과 비교하여 파악하기 보다는 70인역의 자체 문맥 속에서 파악하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끄떼마’가 사용된 70인역의 문맥이 이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70인역에 담긴 ‘끄떼마’의 의미가 아니라 70인역의 독자로서의 마가가 사용한 ‘끄떼마’의 의미를 찾는 것이 목적이므로 70인역 문맥의 관찰은 더더구나 중요하다.

잠언 23:10

70인역 잠언 23:10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성경 잠언 23:10의 ‘사데’(토지)에 해당한다. 70인역 잠언 23:10의 번역자는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생각하였기에 토지를 뜻하는 ‘사데’를 ‘끄떼마’로 번역하였을 것이다.

또한, 70인역 잠언 23:10의 독자는 문맥을 통해서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70인역 잠언 23:10은 다음과 같다.

영원한 경계들을 변경시키지 말고

고아의 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

여기에서 ‘끄떼마’는 ‘경계’(호리아)에 평행된다. ‘영원한 경계’란 조상대대로 기업으로 내려오는 토지의 경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토지의 경계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7:17을 배경으로 한다. 70인역 신명기 27:17은 이웃의 ‘경계’(호리아)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토지의 경계를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희년이 되면 토지가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레위기 25장의 토지법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70인역을 읽는 독자들은 잠언 23:10에서 ‘끄떼마’를 토지의 경계를 뜻하는 ‘호리아’와 관련시켜서 재물이 아니라 토지를 뜻하는 말로 이해하게 될 수 있다. 또한 ‘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는 표현은 ‘끄떼마’가 재물이 아니라 토지를 가리킴을 분명하게 해 준다. 마가복음의 저자도 70인역을 읽었다면 ‘끄떼마’의 의미를 그렇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를 토지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잠언 31:16

잠언 31:16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케렘’(포도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재물보다는 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잠언 31:16의 70인역 문맥도 ‘끄떼마’가 토지라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려준다. 70인역 잠언 31:16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농토를 보고 구입한 후에 그녀의 손의 열매로부터 끄떼마에 심었다.

농토를 구입한 후에 끄떼마에 심었다면 ‘끄떼마’는 농토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호세아 2:17

70인역 호세아 2:17에서 ‘끄떼마따’는 히브리어 본문의 ‘케렘’(포도원)에 대응한다. 따라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70인역 자체의 문맥도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께서 ‘끄떼마따’를 주신다는 맥락이다(“내가 그에게 끄떼마따를 줄 것이다”). 출애굽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가나안 땅이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요엘 1:11

요엘 1:11에서 ‘끄떼마따’는 히브리어 본문의 ‘코르밈’(포도원들)에 해당한다. 또한 70인역 요엘 1:11은 “추수를 망쳤기 때문에 끄떼마따를 위하여 슬퍼하라”는 내용이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추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끄떼마따’는 농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욥기 20:29

욥기 20:29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나할라’(기업, 분깃)에 해당한다. ‘나할라’는 일차적으로 상속 재산을 가리키는데 상속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토지였다(민 26:53; 33:54; 신 4:21; 수 11:23; 13:6; 시 105:11; 겔 47:14; 48:29 참조). 그러므로 이 단어에 대응하는 ‘끄떼마’는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 70인역 욥기 20:29의 문맥 내에서 보면 ‘끄떼마’는 ‘분깃’에 평행된다.

이것은 불경건한 사람이 주로부터 받는 분깃이며

감찰자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소유들 가운데 끄떼마이다.

‘분깃’은 이스라엘 각 집이 분배받은 분깃(몫)으로서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민 18:20; 수 14:4; 18:5). 그런데, 욥기 20:29에서 ‘끄떼마’는 하나님의 보응을 가리키기 위해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유적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속 재산으로서의 토지를 가리키는 1차적 의미를 토대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욥기 20:29에서의 ‘끄떼마’의 용례는 이 단어가 1차적으로 토지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음을 알려준다.

욥기 27:13

욥기 27:13에서도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나할라’(기업, inheritance)에 대응한다. 또한 70인역 문맥에서 ‘끄떼마’는 ‘분깃’에 평행된다.

이것은 불경건한 사람이 주로부터 받는 분깃이며,

전능자로부터 권력자들에게 끄떼마가 임할 것이다.

여기서 ‘끄떼마’는 이스라엘 각 집이 분배받은 분깃으로서의 토지를 염두에 두고 쓰였다. 물론 근접 문맥 속에서 이 단어는 비유적 의미(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보응)를 가진다. 그렇지만 비유되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서의 토지에 비유되었다. 이러한 비유는 ‘끄떼마’가 1차적으로 토지를 가리킬 때 가능하다.

맺음말

70인역에서 사용된 ‘끄떼마’라는 단어는 대개 토지를 가리키거나 토지라는 구체적 개념을 기초로 형성된 추상적 개념을 가진다. 70인역에서 ‘끄떼마’가 토지를 의미하지 않는 본문은 잠언 12:27뿐이다. 잠언 12:27에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의 ‘혼’(부)에 대응하고 문맥상으로도 ‘토지’를 뜻한다고 볼 근거가 없으므로 부(wealth)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끄떼마’가 70인역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토지를 가리킨다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70인역을 읽으면서 ‘끄떼마’가 토지를 뜻하는 단어임을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마가복음을 기록하며 ‘끄떼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도 이 단어에 “토지”라는 뜻을 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라는 단어의 의미를 해석할 때, 우리는 마가복음의 독자들이 이 단어를 “재물”을 뜻한다고 간주해온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마가복음의 저자가 이 단어를 사용하며 의도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토지”라는 의미의 정당성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독자들의 함성에 의해 묻혀진 저자의 세미한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독자들은 저자가 아무리 작은 소리로 말한다고 할지라도 저자가 말하기 시작하면 침묵하여야 한다. 저자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수천년의 거리에 떨어진 우리가 분간할 수 없을 때에는 저자에게 확성기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70인역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위하여 그러한 확성기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재물’인지 ‘토지’인지 분간되지 않던 세미한 음성이 70인역이라는 확성기를 통과할 때 ‘토지’라고 크게 들려지게 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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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목사와 용기있는 성도

하나님나라운동/정치 | 2009. 11. 3. 10:0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작은 개척 교회를 2년째 섬기고 있지만 가슴은 겁 없이 더 커져 가고 있다. 말씀을 마음으로 곱씹으며 다양한 삶의 현장을 적용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만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목사로 산다는 것은 신명나는 일이지만,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가 더 많다.

요즘 내가 서성거리는 현장은 재래시장의 야채가 널려 있는 곳이다. 장터에서 먹거리를 팔고 사시는 분들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야채 장사 즉 먹거리를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청년들과 성경 공부를 하며 '세상을 바꾸는 대안 경제'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와 청년 실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속에서 나만의 '성공 비결'을 위한 성경 공부가 아닌 하나님나라를 위한 경제 활동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일터를 생각해 보고 책도 읽었다. 투자자는 마냥 이익을 보고 노동자는 일만 하는 그런 구조가 아닌 일터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생산자나 소비자가 함께 정당한 이익을 보는 구조를 세워 보기로 했다. 결국 생존 경쟁의 가장 치열하고 적나라한 야채 시장에 뛰어들기로 했다.

새벽 3시에 도매시장을 돌며 야채를 매입하여 복지관이나 도시락 업체에 납품을 하는 것이다. 이런 고된 일을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주중에 일하는 청년들의 꾀죄죄한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 나는 왜? 작은 개척 교회를 어렵게 찾아온 청년들에게 긍정적인 사고를 심어 주고 세상의 성공 방법론을 설교하고 가르치지 못할까. 그래도 우리 성도들과 청년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세속적 가치를 부추기는 가르침보다는 서투른 나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부쩍 교회 식구들이 경제적 삶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나눔과 섬김을 생각하면서, '공정 무역'이나 '사회적 기업'과 같은 단어를 자신의 일터에 적용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는 몸부림에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좋은 직장에 다니는 분들도 상대적으로 어렵게 일하시는 식구를 보며 미안해하고 빚진 마음을 갖고 있다. 대기업을 다니는 어느 집사님은 "나는 로마군인 같아요. 왜 주님은 그만두라고 하시지 않나요?"라며 신앙인으로 직장 생활의 괴로움을 토로한다. 나는 "집사님! 복음을 받고 거듭난 고넬료에게 로마군대의 백부장을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답변하면서 같이 아픔을 나누어 본다.

내가 용산 참사 현장을 자주 방문하여 예배드리고, 고통당하는 그들을 위해 작은 헌신을 할 수 있는 것도 성도들의 너그러움 때문이다. 사실 나는 설교 준비와 함께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의 일들로 바쁜 일정을 보낸다. 그러다 보니 우리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매우 미안하다. 그러면서도 설교 시간에는 "아파트 평수 늘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 축복입니다"라고 큰소리치니 간 큰 목사이다.

요사이 가슴으로 많이 울고 있다. 꾀죄죄하지만 세상에 도전하는 청년들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용기를 갖고 있는 성도들 때문이다. 부자 되기를 포기하고 교회 나오는 식구들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경제 성장을 목표로 용산 참사를 외면하고 자연 파괴를 무시하면서까지 뉴타운 개발과 4대강 사업으로 무한 질주를 하고 있으니 가슴이 찢어진다. 상대적으로 성장 위주 앞에선 우리 교회 성도들은 더욱더 작아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방인성목사  함께여는교회 목사 
                뉴스앤조이발행인 겸 편집인

*이글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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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방법'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
언덕교회 선교부, 독서 토론·후원 단체 초청 강좌·선교 심포지엄
(이명구 기자)

보통의 한국교회는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서 노력한다. '총동원 주일'이나 '전도 대잔치'라고 이름 붙여진 행사가 봄과 가을마다 있다. 전도 활동을 지원하는 세미나를 하는 교회도 많다.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큰 차이는 없다. 교단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몇 백만 명을 넘기자는 배가 운동을 교단마다 하고 있다.

언덕교회(박득훈 전임목사)는 어린이까지 합쳐도 200명이 채 안 되는 교회다. 교회 크기에 비해서 언덕교회는 유명한 편이다. 작년 MBC '100분 토론'에 박득훈 목사가 패널로 출연한 이후 기독교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언덕교회 홈페이지는 방문자가 폭주해 다운되기도 했다. 방송을 보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이 교회를 방문하고 있다.

언덕교회가 10월 25일 선교 심포지엄을 열었다.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한 '전도 폭발'이나 '전도 전략 세미나' 같이 전략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전도 자체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하고, 인식을 전환하려는 취지였다.

언덕교회 선교부장 이용관 집사는 "막상 '선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는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등식을 생각하기 쉽다. 특히 언덕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은 이런 생각 때문에 언덕교회는 선교에 관심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며, 이런 분들에게 선교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 언덕교회 선교부가 '선교하면 생각나는 것'을 조사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이를 위해서 언덕교회 선교부는 1년에 2회 선교에 관한 책을 선정해 독서 토론회를 한다. 올해 상반기에는 엔도 슈샤쿠의 <침묵>을 함께 읽었고, 후반기에는 짐 월리스의 <회심>을 읽고 공부할 예정이다. 또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청년아카데미,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현대기독교아카데미 등 언덕교회에서 후원하는 사회 선교 단체들이 직접 교회를 찾아와 자기 단체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번 선교 심포지엄도 선교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기 위해서 마련한 것이다.

언덕교회에서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부서는 선교부와 사회복지부이다. 선교부는 특히 사회 선교와 한국교회 현안에 대해 공부하며 교인들의 선교에 대한 인식 전환에 주력한다. 사회복지부는 교회 내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지역 봉사 및 후원에 집중하고 있다.

교회 재정의 상당 부분을 외부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작년까지는 교회 예산의 20~25% 정도를 선교와 사회 복지에 사용했지만, 올해에는 30%까지 늘리기로 결의하고 이를 지켜오고 있다. 매월 마지막 주일 예배를 한 후에 화곡동 교남어린이집, 마포 재가노인복지센터 등을 찾아가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 선교 심포지엄에 참석한 언덕교회 교인들이 집중해서 경청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우리 교회의 선교를 다시 생각한다"
언덕교회, 선교 심포지엄 열고 교회의 선교 활동 고민

"전도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선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지금 하고 있는 방법이 틀린 건 아닐까" 사회자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언덕교회 선교 심포지움은 시작됐다.

언덕교회 교인들은 한국교회의 전도 활동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을 반성하고, 언덕교회의 선교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언덕교회 선교부는 심포지움을 준비하면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128명의 교인들이 설문에 응답했다. 교인들은 언덕교회에 출석하기 전에는 '노방전도'와 '개인 전도', '중보 기도' 등을 위주로 선교 활동을 했지만, 언덕교회에 출석한 이후에는 '기독교 시민 단체 지원'과 '사회봉사 단체 지원 활동', '성경 공부', '공의로운 정치를 위한 참여와 관심' 등의 선교 활동을 주로 했다고 답했다. 또 교인들은 언덕교회가 '해외 선교'나 '복음 전도'보다는 '사회참여'와 '구제·봉사'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선교부는 "교인들의 선교에 대한 인식이 언덕교회에 와서 변했다"고 분석했다.

   
 
  ▲ 박득훈 목사는 복음 전도와 사회 갱신의 선교 개념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한 후 박득훈 담임목사가 '성경이 말하는 선교'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박 목사는 복음 전도를 강조한 좁은 의미의 선교와 사회적 갱신을 강조한 넓은 의미의 선교의 개념을 구분하고, 이 두 가지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선교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 양진일 목사는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교"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이어서 양진일 목사(가향공동체), 송강호 교육원장(개척자들), 정정훈 공동대표(연구 집단 카이로스)가 발제를 했다. 발제자들은 한국교회의 선교 활동에 문제가 있다며 선교에 대한 인식 전환을 주장했다.

양진일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는 이유가 "복음을 살아내는 신앙인과 교회의 부재 때문이다"고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속의 가치에 지배받거나 굴복하지 않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내야 한다. 1차적 선교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교다"고 했다.

   
 
  ▲ 송강호 교육원장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 이웃들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평화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선교"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송강호 교육원장은 "묻지도 않고 가입을 요구하는 보험처럼 복음을 전하는 전도 방식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거품화 현상을 보여준다. 협박하고 겁주는 전도가 아니라, 자유롭게 판단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전해야 한다"고 했다. 또 "예수는 약하고 가난한 자, 억눌린 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역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 이웃들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평화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선교다"고 했다.

   
 
  ▲ 정정훈 공동대표는 "복음은 폭력의 자리가 아니라 약한 자의 자리에 있을 때 제 모습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정정훈 공동대표는 "비기독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변화시켜야 할 존재로만 그들을 대하고 있다. 이미 주류 세력이 되어버린 기독교가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논리로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했다. 이어 "1세기 초대교인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이었다. '만물의 찌꺼기'라고 자신을 고백한 바울처럼 복음은 폭력을 휘두르는 힘의 자리가 아니라, 약한 자의 자리에 있을 때 제 모습을 찾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포기할 수 없다면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발제가 끝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언덕교회 교인 김동규 씨는 발제자들이 선교에 대해 접근할 때 기독교 내부의 자정과 기독교 외부와의 관계로 나누고 있다고 지적하며, 선교에 대한 문제 해결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발제자들은 한국교회의 선교 활동이 내부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으면, 외부적인 모든 사역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박득훈 목사는 "복음 때문에 자기 자신이 변한다면 당연히 외부의 변화를 위해 힘쓸 것이다. 진정 예수를 알고 만났다면, 우리가 밖으로 어떻게 안 나갈 수 있겠는가"라며 선교는 교회의 자기 갱신부터 시작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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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토지법9)사본학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10. 19. 15:5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가복음 10:22과 사본들

마가복음 10:22은 ‘끄떼마따’라는 헬라어를 담고 있으며 이것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모든 사본들이 일치하여 이 헬라어 단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저술하여 출판한 이후에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을 필사를 하여 전수할 때, 모든 필사자들이 마가복음의 원문을 있는 그대로 필사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필사자들에 의하여 마가복음 본문이 필사되어 전수되는 가운데 어떤 필사자들은 마가복음의 본문을 변경하였다. 그렇게 변경된 본문은 또 다른 필사자들에 의하여 필사되어 전수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 사본들을 비교하여 원래의 본문을 복원하는 작업을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하는데, 편의상 이를 사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가복음 10:22에서 많은 사본들에 ‘끄떼마따 뽈라,’ 즉 ‘넓은 토지’라고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 담겨 있지만, 서방 사본들에는 다른 표현들이 발견된다.

(1) 끄떼마따 뽈라 나머지 사본들

(2) 뽈라 크레마따베자사본, 고대 라틴어 역본

(3)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 클레멘트

베자 사본과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서방 사본들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대 라틴어 역본들이 로마제국의 서방 지역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은 칼빈의 제자인 베자가 소장하고 있다가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 기증한 사본으로서 지금 켐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에는 마가복음 10:22에서 ‘뽈라 크레마따’ 또는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많은 재산’이라고 번역된다. ‘크레마따’는 ‘크레마’의 복수형이며, ‘크레마’는 ‘재산,’ ‘부,’ ‘돈’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37에서 ‘크레마’는 토지를 팔고 받은 돈을 가리킨다.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값’이라고 번역하였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다니엘 11:28도 ‘크레마’가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많은 ‘크레마’를 가지고 그의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가 아니라 돈이나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

만일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가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면 이것은 ‘토지’로 번역되기보다는 ‘재산’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끄떼마따’가 원래 마가복음 10:22에 담겨 있지 않았다면 ‘토지’라는 번역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0:22에서 ‘재산’이 옳은 번역인지 ‘토지’가 옳은 번역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방 사본들에 담긴 ‘크레마따’와 대부분의 사본들에 담긴 ‘끄떼마따’ 중에서 어느 것이 마가복음이 원래 가진 표현인지 검토하여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마가복음 인용에는 ‘뽈라 크레마따 까이 아그루스’(많은 재산과 전토)라고 되어 있다. 서방 사본들 중에 일부 고대 라틴어 역본(b k)은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을 가진다. 이것은 위의 (3)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이것은 아마도 (2)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2)의 ‘크레마따’는 토지를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필사자들은 ‘까이 아그루스’(~와 전토)를 추가하여 토지가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3)은 (2)의 ‘뽈라 크레마따’(많은 재산)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그것의 기원인 (2)를 지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서방 사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본들은 (1) 즉 ‘끄떼마따 뽈라’를 지원한다. 더구나 고대 라틴어 역본들 중에 일부(f, q)는 마가복음 10:22에서 divitias(부) multas(큰)라는 표현을 가지는데 이것은 (1)의 어순에 일치하므로 (1)을 지원한다. 많은 사본들에서 (1)이 발견된다고 (1)이 원래 마가복음 10:22에 있던 표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1)을 담은 많은 사본들 중에는 매우 오래된(4 세기) 사본이면서 우수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들이 있으므로 (1)이 원래의 것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본들도 언제나 원문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증거를 좀더 수집해야 한다.

마태복음 19:22의 영향인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인가?

마태복음 19:22에는 마가복음 10:22와 유사한 본문이 발견된다. 동일한 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인데, 마태복음 19:22도 ‘끄떼마따 뽈라’란 표현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1) 즉 ‘끄떼마따 뽈라’가 마태복음의 영향에 의하여 발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한 변화를 사본학자들은 조화(harmoniz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원래부터 마가복음에 일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마가복음을 마태복음 저자가 자료로 사용하였다는 가설(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가능성을 더더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설에 입각하면 마태복음의 ‘끄떼마따 뽈라’는 마가복음의 ‘끄떼마따 뽈라’에서 그대로 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마태복음 19:22의 ‘끄떼마따 뽈라’가 마가복음과 본래부터 일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많은 곳에서 문자적 일치를 보이므로 이곳에서도 그러한 일치가 본래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이 마태복음 19:22의 표현과 동일한 표현이라는 이유만으로 (1)은 마태복음의 영향을 받아 조화된 것이라고 단정하여 이것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 아니라고 판단할 개연성이 없다. 더구나 (2)의 ‘크레마따’가 바로 다음 절(막 10:23)에 나오는 ‘크레마따’의 영향으로 동일하게 변화된 결과일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1)이 마태복음 10:22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은 (2)가 마가복음 10:23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다.

마가복음의 문체가 주는 증거

성경의 각권은 저자에 따라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책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사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듯이 성경도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다. 마가복음이 가지는 독특한 문체도 성경의 인성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은 ‘뽈라’(많은)라는 단어가 명사를 꾸며주기 위해 사용될 경우에 언제나 예외 없이 그것이 수식하는 명사 뒤에 위치시킨다(1:34; 4:2; 6:13; 7:4, 13).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세 가지 표현들 중에서 이러한 마가복음의 문체에 일치하는 표현은 (1)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이 원래의 마가복음에 담긴 표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성경 독자의 경향성

(1)이 마가복음 10:22에 담긴 원래적 표현이라면 이것은 ‘넓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번역 성경들이 한결같이 ‘많은 재산’에 해당하는 번역만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가복음 10:22의 번역자들은 (1)을 원문으로 택하였어도 그 의미를 (2)처럼 이해하여 번역하였다. (1)을 원문으로 택한 네스틀레-알란트 27판이나 UBS 4판의 본문을 눈앞에 두고 번역자들이 이를 (2)처럼 번역한 것은 (1)을 담은 원본이나 사본을 눈앞에 두고 필사자들이 이것을 (2)로 고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필사자들의 경향성과 번역자들의 경향성은 서로 일치하기도 한다.

필사자나 번역자나 모두 성경 독자의 일종이므로 이들은 서로 유사한 경향성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어떠한 경향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대의 필사자들의 경향성을 살펴봄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필사자들이 어떤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변경시켰는가를 관찰해 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들이 그 구절을 어떻게 곡해할 수 있는 지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추측을 토대로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성을 조심하며 본문을 번역하거나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비유사성의 원리와 성경 본문 이해

독자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을 저자의 의도대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고의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재해석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곡해하기도 한다.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의미를 곡해하는 독자들의 경향성을 극복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독자들의 경향성은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필사자들의 본문 변경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일단 독자들의 경향성이 파악되면 “비유사성 원리”를 통해서 본문의 본래적 의미 파악을 시도할 수 있다. “비유사성 원리”(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되는 방법론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 발생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원리이다. 초대교회의 전승 경향에 유사한 예수 전승의 경우에는 그 역사적 진정성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초대교회는 그 경향성에 유사한 예수의 말씀을 왜곡함 없이 전승하였을 것이지만, 그 경향성에 유사하지 않은 말씀은 때로 그 경향성에 맞게 소화하여 전승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가능성이지만 이 가능성 때문에 초대교회의 경향성에 유사한 전승들은 그 진정성이 의심될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경향성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들은 초대교회가 지어낸 전승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경향에 비유사한(비일치하는) 예수 전승을 역사적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론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비유사성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는 성경의 독자들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비유사한 해석을 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독자들의 주관성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다. 비유사성의 원리에 따르면, 사본 필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마가복음 독자들의 해석 경향성에 일치하지 않는 마가복음 해석은 독자의 주관성에 의해 왜곡된 본문 해석일 가능성이 비교적 낮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마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지는 마가복음의 용례와 문맥에 맞는지 검토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비유사성 원리는 성경 이해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지만 이해된 내용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방법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에서 필사자들이 “토지”를 가리킬 수 있는 ‘끄떼마따’를 “재물”을 뜻하는 ‘크레마따’로 바꾸어 읽은 것은 오늘날의 성경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경향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고한다. 비유사성 원리를 따라 이러한 경향성을 조심하면서 그 경향성에 역행하여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읽으면 이것은 “토지”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본문 이해가 과연 정확한지는 용례와 문맥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하나님나라운동/신학 | 2009. 9. 18. 18:3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거짓신앙에서 벗어나기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도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누가복음 3:7-14


제가 몇 분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이상림씨, 윤용현씨, 양회성씨, 이성수씨, 한대성씨. 들어본 적 있습니까? 전재숙씨, 유명숙씨, 김영덕씨, 권명숙씨, 신숙자씨.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앞서 불러드린 분들은 용산 참사로 숨진 철거민들입니다. 나중에 불러드린 분들은 그 분들의 아내죠. 그들은 지금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남편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이름이 여러분의 신앙과 나의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이해하는 성서한국운동은 바로 그런 질문에 바른 해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한국운동은 사회의 모든 영역이 성서의 토대위에 아름답게 세워진 한국을 의미합니다. 성서한국의 비전은 일제시대 양정 고등학교 교사였던 김교신 선생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은 그에게 조선이었죠. 하여 그는 성서조선의 비전을 품고 1927년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저는 창간사의 마지막 대목을 읽으면 여전히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성서조선>창간사 중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는 1942년에 폐간 당했습니다. 그러나 성서한국이란 화두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서한국을 이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회심’입니다. 회심의 깊은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나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1:15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역사 한 가운데로 뚫고 들어왔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는 아름다운 실재가 강력한 힘으로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것입니다. 회심이란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맞닥뜨리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된 삶으로부터 총체적으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펼쳐주신, 열어주신 새로운 삶의 세계로 과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죠. 두 가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아직 믿음은 없는 것 같지만 회개하는 순간에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했던 나의 삶에 대한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 없이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세례요한의 설교를 통해 회개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두 가지 질문을 갖고 생각하겠습니다. 누가 회개가 필요한가?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1.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7-9)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그런 사람에게만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왔던 사람, 성경을 잘 아는 사람, 주일 예배를 잘 지키는 사람, 헌금도 적당히 잘 내는 사람, 저처럼 설교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가장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본문 말씀 7절에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어떻게 세례를 받고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한테 “독사의 자식들아!” 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세례요한은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진정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심판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례요한이 세례를 준다. 그 세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길래 세례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왜 그들은 형식적으로 세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죠. 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8) 회개에 알 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거죠.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안전하다. 완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적당히 종교적 형식만 잘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나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오랫동안 찌들어 있었습니다. 무늬만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삶의 내용은 없었습니다. 짝퉁 물건을 명품 가방에 집어넣은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니 그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회개가 필요합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기준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삽니다. 겉으로 볼 때 무척 경건하지요. 성경읽기, 신앙서적 읽기, 기도하기, 헌금 및 십일조 드리기, 주일성수하기, 전도하기 등. 아주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신앙의 알맹이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돌들로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회개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렇게 쉽게 세상을 향해 ‘불신지옥’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말은 우리들 자신에게 먼저 돌려야 할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얼마 전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서 직업군 33개를 놓고 신뢰도 조사를 했습니다. 1등이 어떤 직업일까요? 소방관입니다. 2등은 간호사, 3등은 환경미화원입니다. 개신교 목사는 몇 등쯤 될까요? 25등입니다. 신부님은 11등, 승려는 18등. 꼴찌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언젠가 지하철 전동차에서 ‘어느 소방관의 기도’라는 짤막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A. W. Linn이라는 소방관이 직접 지은 기도시라고 하더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가 업무의 부름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시여/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나이와 상관없이/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너무 늦기 전에/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언제나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어/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저는 제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기 원하며/최선을 다해/저의 모든 이웃을 지키며/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길 원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저의 목숨을 잃어야만 한다면/부디 당신의 보호의 손길로/저의 자녀들과 아내를 축복하여 주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삶으로 실천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목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목사가 그럴 것이라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방관을 더 신뢰합니다. 그래서 소방관의 직업 신뢰도가 1등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회개가 필요합니까, 누가 먼저 회개하길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실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전도할 때 이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뜨뜻미지근합니다. 돌같이 굳어졌습니다. 느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아픔에 대한 눈물이 없습니다. 억울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도 같이 울어줄 줄을 모릅니다. 한참 시국선언이 진행될 때였습니다. 지난 6월 9일 젊은 작가들의 선언문에 담긴 한 대목이 제 가슴을 때렸습니다.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교회가 먼저 해야 할 말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가냘픈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교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주님이 쫓겨나서 너무 속상해서 ‘내가 다시 너와 있고 싶다. 들어가고 싶다. 문을 열어다오. 제발 문 좀 열어다오. 내가 너희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 불붙는 사랑을, 진리의 말씀을 너희들과 나누고 싶다. 너희들과 식사를 하듯 가깝게 교통하면서 나의 나라를 이 세상에 펼쳐가고 싶다. 문을 좀 열어다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누가 필요한 것입니까? 회개는 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우리 한국교회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에 대해 ‘95%는 참 괜찮은데 5%가 문제다’ 라고 변호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리석은 변명입니다. 잘못된 5%가 바로 교회지도층이라면 그들을 지도층으로 세운 95%도 역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좋은 점이 많이 있어보여도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이건 아니다’ 짚으신 것이 있으면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니고 있던 점검표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점검표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스스로 성적을 매겼습니다. ‘A+++입니다! 절기 잘 지키잖아요. 두 손 벌려 기도하잖아요. 십일조 잘 하잖아요. 절기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모이는데요!’ 그러나 하나님의 점검표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 가운데 있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진실로 안아주고 있느냐. 과부를 돌아봐주고 있느냐. 고아를 돌아봐주고 있느냐. 땅 잃은 사람을 돌아봐주고 있느냐. 외국에서 흘러들어와 힘겹게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감싸주고 있느냐?’ 우리가 스스로 만든 점검표에 따른 점수가 아무리 높은들 하나님 앞에선 휴지조각일 뿐입니다. 변명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입을 닫고 무릎을 꿇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일까요?

2. 진정한 회개(8, 10-14)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진정한 회개란 회개에 걸맞은 좋은 열매를 잘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점검표에 맞지 않는 삶을 구체적으로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도(道)를 따르는 사람들’로 불렸는데요(행 9:2; 19:9, 23; 22:4; 24:14, 22). 이는 기독교를 ‘道’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짐 월리스가 <회심>이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뭔가 살아가는 법이 우리와는 다르구나!’ 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경우 사람들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놀라운 삶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을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짐 월리스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는 전도할 때 야박하게 전도할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이야, 믿고 살래, 안 믿고 죽을래. 왜 이렇게 협박하는 전도를 할까? 그것은 그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삶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전도는 초대 교회처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나! 멋지다. 그 비밀이 어디 있나,’ 묻고 싶어져야 합니다. 그때 ‘아, 내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얼마나 멋지고 감동적이겠습니까? 그러나 보여줄 감동적 삶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진 않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다보니 ‘안 믿으면 죽어! 지옥 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삶 전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회개하면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이고 수직적인 만남을 떠 올립니다. 이웃 문제, 사회문제는 부차적인 단계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첫 순간부터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의 빛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용산에서 5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살았는데 하나님,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잘 된 것입니까?’ 물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묻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세례요한이 요구하는 회개의 실례를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무리들의 예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의 준엄한 경고에 가슴이 찔린 무리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이에 그는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답합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내가 지닌 것 중 남는 것으로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한 벌을 나눠 주어 그와 같이 나도 한 벌로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김규항 씨는 <예수전>에서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이렇게 설파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이른바 ‘나눔’에 대한 우리의 알량하고 가식적인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부모들은 제 아이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욕망을 ‘부자가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우라’는 식으로 우회하여 표현하곤 하는 것이다. …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지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 (109-110 쪽)

그러므로 그가 잘 말한 것처럼 진정한 나눔이란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깊이 파고들어온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소비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기복신앙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석훈 씨는 <괴물의 탄생>에서 설날이 되면 서로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형편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인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한국경제의 위대한 선택이라고 부르고 싶고’ 그 말을 아예 ‘마음속에서 지우는 순간, 그것을 대전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들부터 앞장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사랑해야 합니까? 절대로 기독교가 금욕주의를 가르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이 그 유일한 이유입니다. 지구촌에는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이 15억에 이르는데, 먹는 물을 하루에 몇 번씩 길어 오느라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우리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세상은 냉혹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필요한 소비에 자원을 동원하는 만큼, 지구촌의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갈 자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부에 대한 태도만 바로 잡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짐 월리스가 <회심>에서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마 6:21)’ 는 예수님의 말씀을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보물도 있다’ 로 바꿔서 이해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올바른 곳에 있는 한, 우리가 얼마나 많이 쓰느냐 혹은 우리가 얼마나 축적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데 총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자발적 가난 혹은 복음적 가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누리는 부의 양을 주려 소박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진실로 하나님나라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사적재산권에 대한 왜곡된 사고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희년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까워서 혹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원주인에게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입니까, 어긴 것입니까? 어긴 것입니다. 우리는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너무 자본주의식으로 해석합니다. ‘내가 땀 흘려 번 것은 내 꺼야! 내가 스스로 내어 주기 전에 그것을 누구도 건드리면 절대 안 돼! 그건 도적질이야!’ 그러나 ‘무엇이 도적질인가’ 하는 것은, 중미의 경제학자이며 신학자인 힌켈러머트(F. J. Hinkelammert)가 잘 밝힌 것처럼, 특정 사회가 인간의 삶과 권리 그리고 사회에 대하여 어떤 이상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누스(R. Gnuse)도 잘 지적한 것처럼, 성경이 보장해주는 사적재산권이란 부를 무한대로 축적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일원은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원을 소유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 도덕성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별도의 차원 즉 인격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한 사회가 이런 저런 그럴 듯한 사유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도적질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희년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눅 4:16-21).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선포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런대 그 전통이 왜 사라졌습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격되어 세속권력을 얻게 된 데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이 없는데 내가 여유분의 먹을 것을 갖고 있으면 그것이 도적질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진실한 관심을 잃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는데 매몰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자본주의식 사적재산권을 지키는데 앞장서는 대표적인 세력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선 소비주의와 기복신앙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우리의 잘못된 의식과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나눔의 정신을 몸에 익혀 소박한 삶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보호하기 원하시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고 있는 세상의 불의한 제도를 변혁시켜나가는 일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맺음말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며 조심해야할 두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멋진 길을 가고 있다’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우상입니다. 부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로 이 함정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제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직접 찾아가셨고, 부자들은 자기에게 찾아오게 하셨다’ 성경의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를 신랄하게 책망하시고 냉혹한 요구를 하셨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회개의 길은 걸어가면서 이 주님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함정은 절망입니다. 노동가요 중 ‘길 그 끝에 서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섰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 온 것처럼/ 눈앞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먼저 간 사람들의 빛을 따라 온 것처럼/이제 우리가 스스로 빛이 될 차례야…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새길 만한 노래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종종 길 끝에 서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기억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바른 길을 걸어온 증거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야말로 바로 길 끝에 서 계셨던 분임을 기억합시다. 그 순간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 끝에서 기꺼이 죽음의 잔을 삼키셨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셨음을 아셨습니다. 죽음으로 우리 앞에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 다 끝난 곳에서 정호승이 노래한 것처럼 스스로 ‘봄 길’이 되셨습니다. 이 주님을 늘 믿고 사모하면서 힘들다고 결코 뒤돌아서지 맙시다. 변절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서 꼭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부둥켜안고 울고 웃고 춤출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박득훈 목사 : 언덕교회 담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공동대표 
                 통일시대평화누리 공동대표

* 이 글은 2009년 성서한국전국대회 저녁집회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요약 : 오수경간사(학원복음화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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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8)성경번역과 토지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9. 18. 11:08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글 번역 성경들과 ‘토지’

마가복음 10:22은 ‘토지,’ ‘소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담고 있다. 이 단어가 ‘토지’나 ‘소유지’를 뜻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마가복음 10:21에서 예수께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명하신 이유를 깨달으며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끄떼마’의 복수형)를 토지를 뜻하는 것으로 읽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끄떼마’가 기본적으로 토지를 뜻하는 단어라는 것은 간단한 헬라어 사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읽을 때에는 ‘끄떼마’가 토지를 뜻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성경번역자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을 뜻하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마가복음 10:22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후에 헬라어로 마가복음 10:22을 읽어도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의 뜻으로 이해하게 된다. 성경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지는 번역 성경들이 오히려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한글 번역성경들은 마가복음 10:22의 ‘끄떼마따’를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개역개정).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그러나 그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은 ‘재물’이나 ‘재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본문을 의역한다. “이 말씀을 듣자 그 사람은 무척 근심스런 얼굴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대단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글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마가복음10:21-22이 토지와 관련됨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를 ‘재산’이나 ‘재물’로 번역한 한글 번역성경들 중에는 사도행전 5:1에서 동일한 단어(단수형, ‘끄떼마’)를 ‘땅’으로 번역한 성경들이 있다. 바로 공동번역 및 공동번역개정판,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이다.

그런데 아니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을 판 다음(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삽비라와 의논하고 을 팔아(현대인의 성경).

아나니아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삽비라도 자기들의 일부분을 팔았습니다(쉬운 성경).

이 번역성경들을 읽는 독자들은 아나니아가 판 ‘땅’이 마가복음 10:22의 ‘재물,’ ‘재산’과 동일한 단어의 번역임을 알 수 없기에 이러한 번역성경들을 읽으면서 이 둘을 연결 지을 수 없다. 개역이나 개역개정판, 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을 읽는 독자들의 경우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이 번역본들은 사도행전 5:1의 ‘끄떼마’를 ‘소유’라고 번역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개역개정).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를 팔아서(새번역, 표준새번역개정).

이 번역본들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이나 ‘재산’으로 번역되었기에 두 본문 뒤에 동일한 헬라어 ‘끄떼마’가 있음을 알기 어렵다. 물론 ‘소유’는 ‘재산,’ ‘재물’과 동의어이므로 두 본문을 서로 연결할 수 있지만 사도행전 5:1에서 ‘소유’가 토지를 가리키는 것을 파악하기는 쉬워도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도행전 5:1에서 ‘땅’대신 ‘소유’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해도 이것이 결국 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문맥 때문이다. 사도행전 5:8에서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땅을 판 금액에 관하여 언급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은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재산’으로 번역한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습니다.” 사도행전 5:1에서는 문맥상 ‘재산’이 토지를 가리킴을 곧 알 수 있게 되지만 마가복음 10:22에서 토지가 언급되었음을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서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외국어 번역 성경들과 ‘토지’

외국어 번역 성경들도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의 번역에 토지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선 영어번역본들을 살펴보면 킹 제임스 역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possession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NIV는 ‘wealth’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본들도 ‘Güter’(재물), ‘Vermögen’(부) 등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여, 토지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없게 한다. 불어 번역본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biens’(재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므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한 네덜란드어 번역본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마가복음 10:22에서 ‘끄떼마따’는 토지를 가리킬 수 있다. 또한,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때 율법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마가복음 10:21의 말씀이 구약의 토지법을 배경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가복음 10:22을 헬라어 본문으로 읽어도 그 속에 토지가 언급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번역 성경들의 영향 때문이다. 번역 성경을 읽은 사람은 원어로 성경을 읽을 때 번역 성경에서 파악한 의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성경 번역은 헬라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성경의 의미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지만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역할도 한다. 모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은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이 소유나 재물을 뜻하는 단어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한 이유는 이 헬라어 단어가 토지를 뜻할 수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토지를 가리킬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DRA(The Douay-Rheims American Edition, 1899)는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를 ‘land’로 번역하였다. 독일어 성경들 중에서, EIN(Einheitsübersetzung, 1980)은 ‘Grundstück’(토지)을, LUT(Revidierte Lutherbibel, 1984)‘Acker’(농토)를 사도행전 5:1에서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불어성경 중에는 BFC(1997)가 ‘terrain’(토지)을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네덜란드어성경 중에서 LEI(Leidse Vertaling, 1912/1994)‘akker’(농토)를 ‘끄떼마’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들 번역본들은 동일한 헬라어 단어 ‘끄떼마’를 마가복음 10:22에서는 재물을 뜻하는 말로 번역하였다. 그들이 ‘끄떼마’가 토지를 가리킬 가능성을 알면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는 ‘끄떼마’를 ‘토지’로 번역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번역자들 역시 그들이 읽은 성경 번역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 번역과 기독교 세계관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구절은 마가복음 10:21-22과 그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9:21-22이다. 마태복음 19:22에서도 마가복음 10:22에서처럼 헬라어 ‘끄떼마따’가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9:22의 경우에는 토지를 뜻하는 번역어를 사용한 번역본이 없을까?

개역과 개역개정판은 마태복음 19:22에서 ‘재물’을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공동번역개정판, 표준새번역, 쉬운 성경은 ‘재산’을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우리말 성경은 이곳에서도 “그는 굉장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의역한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possessions’를 ‘끄떼마따’의 번역어로 사용하였고(ASV, DBY, DRA, ESV, GNV, KJV, NAB, NKJ, NLT, NRS, RSV, RWB, WEB, YLT), ‘property’를 번역어로 사용한 역본들도 있다(BBE, NAS, NAU). NIV와 NJB는 ‘wealth’를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독일어 번역성경들도 마태복음 19:22에서 ‘Güter’(재물)나 ‘Vermögen’(부)을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불어 성경번역본들은 ‘biens’(재물)을, 네덜란드어 성경번역본들은 ‘bezittingen’(소유)이나 ‘goederen’(재물)을 번역어로 택하였다. 이처럼 마태복음 19:22에서도 성경 번역자들은 ‘끄떼마따’를 토지를 가리키는 단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번역 성경들의 상황이 이러하므로, 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서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빠져버린 번역 성경을 읽는 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토지와 관련된 경제 윤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구약의 토지법을 존중하는 입장의 교회들은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레위기 25:23 말씀과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신명기 27:17 말씀에 입각하여 대토지소유의 비윤리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들의 규범성을 무시하는 교회들은 토지를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이 시대의 정신에 따라 생각하며 대토지소유가 정당한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성경 번역은 그 번역을 읽는 기독교의 모습의 밑그림을 그린다. 토지를 재물과 혼동한 번역 성경을 가진 기독교는 지주와 자본가를 혼동하는 기독교가 된다. 그리하여 자본가만이 아니라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한 소유권자로 간주하는 실수를 범하거나, 대지주만이 아니라 자본가까지 비윤리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자본가와 함께 대지주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면, 대지주와 자본가를 함께 묶어서 비윤리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사회주의이다. 성경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도록 무의식적으로 강요받아왔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입장을 택하였고, 자본주의적 기독교는 가진 자들을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을 택하곤 하였다.

생산수단을 모두 국유화하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와 자본을 모두 국가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지만, 성경(구약)은 토지와 자본 등의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도록 한다. 자본주의자들은 개인이 토지마저도 무한히 많이 소유해도 된다고 여기지만 성경(신명기 27:17)은 토지를 제한적으로 일정 분량만 소유하도록 명한다. 성경이 그려주는 사회의 모습은 분명히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성경의 토지법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길과도 다르다. 중국에서는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국민에게 불평등하게 임대해 주지만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소유하도록 한다. 헨리조지의 토지가치세의 경우에도 이를 실행하면 모든 사유지에 지대에 해당하는 세를 부과하여 결국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토지를 국민이 평등하게 나누어 소유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소유한 것은 임대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므로 지대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게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헨리조지가 제안한 토지가치세를 적용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성경의 토지법을 적용하면 모든 국민이 평등한 토지권을 누리게 되고,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국토를 소유하게 되며, 토지를 많이 가진 사람들은 권리이상으로 가진 부분에 대한 세를 국가에 내게 되고 국가는 이를 사회 복지를 위해 사용하게 된다.

성경의 한 단어의 번역이 부정확할 때 성경으로 세상을 보는 눈은 크게 왜곡될 수 있다. 물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부분적인 부정확함이 교정되기도 하지만, 부정확한 부분들이 모여서 부정확한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교회가 세상의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인식하고 바른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확한 성경 번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세계관을 성경적으로 교정하려면 기독교인들이 읽는 번역 성경을 바르게 교정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성경을 번역할 때나 번역된 성경을 교정할 때, 이미 번역된 성경들이 미치는 영향을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우리는 번역 성경을 전보다 좀더 정확하게 개정할 수 있다.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고, 한 걸음에 천리 길을 갈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단번에 완벽한 번역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여 이러한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오히려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원망하는 게으른 종(마태복음 25:24-25)처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세상에서 살 수 없지만 점점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좀더 나은 번역 성경을 만들 수 있기에 우리는 끝없는 개정작업을 통해 좀더 원어와 원문을 잘 반영하는 번역성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 번역 성경을 좀더 정확하게 개정하는 작업은 기독교 세계관을 교정하는 작업이며, 또한 교회를 회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초 작업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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