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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옥한흠 목사님께 (뉴스앤조이 기사)

맘몬주의???/교회와 신학 | 2009. 12. 18. 12:23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눈 뜨기를

제 이름은 고세훈입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신도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을 뵌 적은 몇 차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만난 적은 없습니다. '사랑의교회'에 몇 번 가 보기는 했지만, 그곳 교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득 이 시기에 옥 목사님을 수신인으로 편지를 쓰고픈 마음이 계속 저를 붙들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지체의 하나로서 같은 편끼리 투정 부린다 생각하시고, 부디 이 느닷없는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공개편지인 것은 이미 '사랑의교회' 이전 문제가 공론화했고, 또 저로서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형식의 글이 됐습니다.

제게는 벌써 20년도 더 전 미국 유학 시절, 옥 목사님이 쓰신 <나의 고통 누구의 탓인가>를 몇몇과 함께 읽으며 감동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사이는 제 아내가 틀어 놓는 옥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이따금 들으며 옥 목사님의 '신학적' 근황을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한국 교계 안팎의 상황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마음을 울리는 설교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옥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말씀에 갈급한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빗줄기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제 마음속에 옥 목사님께서는 뭇 대형 교회들의 목사님들 중 하나여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 혹은 깊은 신뢰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따금은 옥 목사님께서도 자신의 설교에 대해 자유로움을 못 가지신 것은 아닌지 하는 답답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왠지 바로 핵심을 치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안타까움 같은 것입니다. 혹시 어떤 경계(인의 심정)에 갇혀서 목사님 스스로도 갑갑해 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에 젖어 보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반쪽 진리가 횡행하고 방송 전파에서는 거의 약장수 수준의 '말'들이 설교라는 이름으로 범람하는 세상인지라, 제가 너무 민감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옥한흠 목사 제자 훈련 성공 사례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 제일 먼저 터져

얼마 전에 있었던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가 문득 생각납니다. 두루 알다시피, 신자유주의적 경제 현상의 중심에는 노동 유연화 정책이 있고, 노동 유연화 정책의 가장 보편적인 귀결이 다름 아닌 비정규직의 양산입니다.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노동 인구의 6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이는 이른바 선진국의 2-30%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기업하는 사람들과 기업에 돈을 빌려 준 금융권에게 비정규직이야말로 이윤 확대를 위한 가장 매력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비정규직처럼 항시적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한 국가 복지 수준이 매우 열악합니다. 국민총생산 대비 국가의 복지 관련 지출 또한 선진국의 25%에 불과하니까요. 기업은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국가마저 그들을 내치는 형국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 삶이 거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기독교를 전면에 걸고 출발했던 이랜드라는 기업에서 그 문제가 가장 먼저 터졌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랜드는 기독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기업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영 논리가 압도적인 기업임을, 그것도 다른 보통의 기업들보다 선도적으로 만천하에 보여 주었던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에 투철하여 기업을 운영한다 한들 일반적으론 존경받을 일은 아닐지 모르나 책잡힐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애초에 내걸었으며, 그것도 다름 아닌 비정규직 문제로 일반 기업들에게 '모범'을 보일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지요.

한때 그 기업은 옥 목사님 제자 훈련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혔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이 자신이 경영하는 대형 마트의 매장에서 휴게실을 없애고 기도실을 만들고는, 기도실 벽면 곳곳에 "우리 회사를 더 성장하게 해 주세요", "세후 이익 x% 달성", "총매출 00억 달성" 같은 기도 제목을 내걸었답니다. '기도실'은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를 빙자한 '장사하는 곳'이 돼 버린 것이지요. 심하게 말하면 장사를 위해 기독교가 동원된 것입니다. 그쯤 되면 그것은 기독교 원리를 삶에 적용하는 차원에서의 실패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의 문제입니다.

저는 올해 초인가에 출판된 이랜드 아주머니들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참담한 노동 여건을 책으로나마 접하고는, 계산대 앞 긴 줄에 서서 가끔 불평을 했던 제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느닷없이 이랜드 문제를 거론해서 목사님께 당황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랜드 문제가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 사역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첫 번째 사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저만의 아전인수인지요. 당시 옥 목사님께서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목사님께서 공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실 저로서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 누적된 수순의 자연스런 결과

그러다가 이번에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많은 얘기들이 오갔지요. '사랑의교회' 교인들의 압도적인 다수가 건축 헌금을 작정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것이 일으킨 교계 안팎의 파장에 대한 현 담임목사의 이상한 독려에 관한, 제가 보기엔 기이함을 넘어서 충분히 흉흉하다 할 수도 있는 말들까지 그 목사님 입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혼란케 만들었던 것은 옥 목사님께서 그 모든 일에 대해 보이신 반응이었습니다. 과연 놀라야 할지 아니면 태연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섭섭하실지 모르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애초에 옥 목사님을 저희 쪽에서 오해했든, 아니면 옥 목사님께서 대형 교회에 대한 입장을 스스로 바꾸셨든, 어느 쪽이든 실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도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될수록 빠른 시일 내에, 옥 목사님께서 깊고 명쾌한 입장을 교계 일반을 대상으로 표명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처음 '사랑의교회' 이전 관련 기사를 접했을 때, 저의 심정은 '사랑의교회, 너마저!'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꽤 오랫동안 '사랑의교회'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 하던 일들이 누적돼 오다가 마침내 이번에 교회 이전 문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것이 온 것 아니겠냐는 생각 같은 것이지요. 이런 말씀까지 드리긴 뭐하지만, 얼마 전부터 '사랑의교회'는 무언가 바빠지고, 좋게 말하면 활기를 띠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왠지 그런 변화를 지켜보는 저와 제 주위 많은 사람들은 불안하고 때로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조마조마했습니다. 무엇인가 미덥지 못하고 아슬아슬했습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교회 조직이란 것도 교회의 규모에 맞게 운영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과 공의를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한 교회 공동체의 본래 목적과 별개로, 마치 그 자체가 합리적 목적을 지닌 것처럼 운영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고 말 것입니다. 혹시 이번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교회가 커지면서 수단이 목적을 점차 압도해 가는, 한국교회의 고질적이고 통상적이고도 지속적인 어떤 경향이 마침내 다다른 지점은 아닌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점에서 '사랑의교회'는 다른 대형 교회들과 너무나 닮아 있었고, 이번만은 예외라는 증거를 도무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교인 숫자가 늘어난다고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사랑의교회'가 그간 성취한 것들을 폄하하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 문제라면, 저는 어떤 신학적인 입장을 피력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합니다. 단지 한국 교계가 걸어온 지난날들을 돌아보면서, 수적으로 양적으로 교회인을 양산하는 일이, 다른 쪽에서는, 잘 포착되지는 않지만, 진정한 신앙인들을 뭉텅뭉텅 덜어 내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가 큰 쓰임 받는다? 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어떤 사람들은 큰 교회가 큰 쓰임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말은 '쓰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심'을 무시한 궤변입니다. 교회는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 땅에서 결실을 맺어 나갈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소관을 나의 소관으로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교만이요 곁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구제나 봉사의 문제라면, 기독교에서 소위 이단시하는 많은 단체나 세속적 집단들 가운데도 헌신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진정으로 약자를 돕기 위해 애쓰는 곳은 널려 있습니다. 무릇 자선의 윤리란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포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교회의 이름을 구태여 빌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필요조건일지언정, 진정한 기독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열매로서 그냥 맺어지는 것이며, 모든 열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해서 위로나 자랑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전장에서 정의 아닌 승리가 지고의 가치가 될 때, 맹목적이고 공격적인 애국주의가 판을 치기 쉽습니다. 일부러 조심하고 부단히 경계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사랑과 정의이되, 결코 이 땅에서의 승리를 장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승리케 하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나는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대학에 합격해야 하고, 큰 교회를 건축해서 큰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남은 소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큰 교회는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닙니다.

대형 교회가 큰일을 못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큰 교회니까 큰일을 한다는 말은 큰일을 하기 위해 부자가 돼야 한다는 말처럼 위험한 억지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래 크기를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속성이고, 죄가 부추기는 인간의 경향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만 놔두면 대형화는 거의 자동적으로 더 큰 대형화를 추구합니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현재 영적 상태에 비춰 볼 때 특정 교회의 대형화가 그 교회의 영적 진운을 긍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대형 교회로 나아가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축복이니, 영적 성장이니 하며 자만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개인(의 부)이 그런 것처럼, 교회가 커지면, 자기 의가 덩달아 커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용하시기가 더 어려워지기 쉽습니다. 크기는 영적 상태와 긴밀히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 시절과 큰 교회 시절, 교인들이나 목회자의 영적 상태가 같을 수 없습니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자와 영적 상태가 같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가 부의 문제를 그토록 경고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부의 축적 과정이 영적 과정이듯이, 교회의 크기의 문제는 곧 영적인 문제이기 쉽습니다. 왜 우리는 '부의 기만성'(deceitfulness of riches)(마 13:22)에 관한 예수의 경고를 예배당의 크기에 적용하려는 용기와 지혜를 갖지 못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교인 몰려드는 현실은 재앙

크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기는, 지식이 그렇고 부가 그런 것처럼,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교회가 작고, 지식이 적고, 부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날로 대형화하고, 지식인은 넘치고, 부자들은 많아지는데, 빈곤과 소외, 양극화와 불안은 커져 가고 있습니다. 준비된 교회, 준비된 지식인, 준비된 부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말했듯이 세 살배기에게 억지로 살을 찌운다 해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건강한 유아라는 점을 반증해 줄 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재앙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지식을 쌓고 부자가 되는 것이 그 개인에게 재앙인 것과 꼭 같습니다. 그때의 부와 지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방치하신 것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서 교회 건물이 감당하지 못할 즈음, 오히려 교회는 이미 그때부터 발전 방향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양적인 외양에 취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물량적 성장 자체가 목적이 돼서 복음은 이미 상실돼 있기가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규모 자체가 중요해질 때, 그때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 교회는 넓은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자기 진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큰 기독교 기업을 일으키고, 큰 교회 건물을 건축해서, 큰일을 하겠다는 것은 철저하게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목사님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방 족속에처럼 왕을 허락하신 것은,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인간의 사악함과 고집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체념하고 방치하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악의 번성과 횡행을 이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세속의 역사에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그랬고, 심지어는 도적떼의 수괴들도 구름떼 같은 추종자를 거느렸던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양지에 앉아 승자의 편에서 강한 자를 거들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리화했던 예들은 역사에서 넘쳐납니다.

사람의 눈에 성공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며, 그것이 교회와 관련될 때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에 적당히 얼버무려 접목하면, 쾌감은 몇 배로 늘어납니다. 세상적 욕구도 은근히 충족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뤘다는 뿌듯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교회 안의 보통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심리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포퓰리즘의 위험성

목사님, 사람을 너무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의견이 어찌어찌 만들어졌다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치환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 의견이 차선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도출되는 과정이 또한 정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소 극단적이고 지나친 비유일수도 있겠습니다만, 히틀러의 집권과 만행 배후에는 수많은 기독교인을 포함한 멀쩡한 독일 중산층이 열렬한 지지가 있었습니다. 그간 한국교회는 그것이 세습이든 교회 건축이든 교인들의 다수 의사를 앞세워 정당화해 왔습니다.

포퓰리즘은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것은 오히려 대형 교회일수록 편만한 게 현실입니다. 포퓰리즘이 문제인 것은 어떤 결정이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거나,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따르는 부작용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 있습니다. 포퓰리즘은 그것이 대중의 욕구를 수단으로 지도자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다는 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는 대중의 의사와 욕구를 조작하려는 (때로는 지도자 자신도 스스로 합리화하는) 술수가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국가든 교회이든 구성원이 깨어 있을수록 포퓰리즘은 힘겨운 전략이 되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목회자 개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한국적 상황에서, 일반 교인들의 개입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은 대형 교회일수록, 그런 일을 기대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대형 교회에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일에 소극적이거나 나아가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기 쉬우며,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교회의 크기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식의 문제 제기 자체를 불순한 것으로 불쾌해 합니다. 목회자의 할 일은 교인들을 늘 깨어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회자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약해지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레 차단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도 살고 교회도 사는 길일 것입니다.

'사랑의교회'가 건축 문제를 결정할 때, 대형 교회가 스스로 빠질 수 있는 이런 위험을 충분히 고려하여, 가능하면 보수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는지 궁금합니다. 이 궁핍한 시대에 그런 어마어마한 결정 앞에서 교인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토론의 기회를 부여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며 최선을 다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명실상부한 민주적 과정을 거치기 위해 교인들의 적극적 관심을 유발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는지 진정 궁금합니다. 그런 과정이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왜곡된 상태에서 도출된 합의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 만들어진 '억압적 합의'일 뿐입니다.

전간 시절 영국의 유명한 정치학자이며 노동당 정치인이었던 해럴드 라스키는 "누구나 빵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아무도 케이크를 먹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노동자들 앞에 설 때마다 매번 자신이 부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말로 연설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이론에 투철하게 살았던 비기독인이었습니다. 저는 라스키의 태도가 반드시 우리가 따라야 할 준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교회에 만연된 불평등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급진적'(radical) 통찰을 떠올립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의 소리로 교회 '안'을 깨우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 있다면, 정말 모골이 송연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더 뻔뻔스럽게 불의와 타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일을 일상적으로 반복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기커녕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강변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를 말로써 부인하는 일을 단죄하는 데는 재빠르지만, 행동으로써 일상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일에는 관용이 넘치거나 무감각합니다. 교회가 마땅히 맡겨진 책무를 소홀히 할 때, 이단과 반쪽 진리가 판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상도 타기하는 세습과 대형화를 탐한다 한들, 이제 별로 놀랄 일도 아닐지 모릅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이제 세상은 교회를 향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너무도 다르지 않거나(거룩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지요), 아니면 그 악행에서 세상을 오히려 앞서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하는 일에 무관심합니다. 교회는 그들의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끼리끼리의 모임이요, 예수 이름을 입에 달고 훈계를 일삼는 가소로운 집단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밀알은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란 썩지 않는 웅장한 건물과 허공에 새길 명성을 위해 혈안이 된 집단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의 예배당은 이 땅을 잠시 스쳐 가는 이방인들이 모여 주를 고백하는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거주할 부동의 부동산의 중요성을 앞장서서 일깨우는 진원지가 바로 교회일지도 모릅니다. 그 거창한 건물로 어떤 거창한 일을 할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잃어버린 사랑의교회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사랑의교회' 문제는 단순히 새 예배당을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마음을 한없이 짓누르는 것은 그것이 어쩌면 사소한 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교회'가 혹시 이미 슬픔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진 않았는지, 두렵습니다. 예수는 죄에 휘둘리는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이 깃든 깊은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슬픔이 마르면 남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 슬픔을 아는 자가 잠 못 이룰 때, 어리석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셨다며 자신의 태평한 잠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통곡하셨습니다. 과연 오늘의 상황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점은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통곡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덕담을 건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랑의교회'가 새 건물을 짓고 다시 한번 도약하겠다는 데 축하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요, 목사님. 한편 생각해 보면, 악이 도처에 편만한데, 축복의 말을 또 하나 첨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에 대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일이야말로 한국의 기득 계층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대형' 매체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 해 오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별 문제 없이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잘 돼 가고 있다고 국민의 눈과 판단력을 가리는 일을 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럴수록 교회 안팎에서 불의는 더 만연하고 약자들의 고통은 갈수록 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양지만을 자꾸 비추자는 것이 어쩐지 문제를 회피하거나 은폐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셨을 겁니다. 목사님, 부디 작금의 일련의 상황들이 '사랑의교회'가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대해 마침내 눈을 뜨고, 목사님의 사역에는 일대 쇄신의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고세훈 /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개혁연대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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