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고세훈입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신도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을 뵌 적은 몇 차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만난 적은 없습니다. '사랑의교회'에 몇 번 가 보기는 했지만, 그곳 교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득 이 시기에 옥 목사님을 수신인으로 편지를 쓰고픈 마음이 계속 저를 붙들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지체의 하나로서 같은 편끼리 투정 부린다 생각하시고, 부디 이 느닷없는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공개편지인 것은 이미 '사랑의교회' 이전 문제가 공론화했고, 또 저로서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형식의 글이 됐습니다. 한국 교계 안팎의 상황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마음을 울리는 설교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옥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말씀에 갈급한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빗줄기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제 마음속에 옥 목사님께서는 뭇 대형 교회들의 목사님들 중 하나여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 혹은 깊은 신뢰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 제자 훈련 성공 사례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 제일 먼저 터져 얼마 전에 있었던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가 문득 생각납니다. 두루 알다시피, 신자유주의적 경제 현상의 중심에는 노동 유연화 정책이 있고, 노동 유연화 정책의 가장 보편적인 귀결이 다름 아닌 비정규직의 양산입니다.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노동 인구의 6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이는 이른바 선진국의 2-30%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기업하는 사람들과 기업에 돈을 빌려 준 금융권에게 비정규직이야말로 이윤 확대를 위한 가장 매력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비정규직처럼 항시적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한 국가 복지 수준이 매우 열악합니다. 국민총생산 대비 국가의 복지 관련 지출 또한 선진국의 25%에 불과하니까요. 기업은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국가마저 그들을 내치는 형국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 삶이 거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에 투철하여 기업을 운영한다 한들 일반적으론 존경받을 일은 아닐지 모르나 책잡힐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애초에 내걸었으며, 그것도 다름 아닌 비정규직 문제로 일반 기업들에게 '모범'을 보일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지요. 저는 올해 초인가에 출판된 이랜드 아주머니들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참담한 노동 여건을 책으로나마 접하고는, 계산대 앞 긴 줄에 서서 가끔 불평을 했던 제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느닷없이 이랜드 문제를 거론해서 목사님께 당황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랜드 문제가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 사역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첫 번째 사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저만의 아전인수인지요. 당시 옥 목사님께서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목사님께서 공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실 저로서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 누적된 수순의 자연스런 결과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혼란케 만들었던 것은 옥 목사님께서 그 모든 일에 대해 보이신 반응이었습니다. 과연 놀라야 할지 아니면 태연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섭섭하실지 모르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애초에 옥 목사님을 저희 쪽에서 오해했든, 아니면 옥 목사님께서 대형 교회에 대한 입장을 스스로 바꾸셨든, 어느 쪽이든 실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도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될수록 빠른 시일 내에, 옥 목사님께서 깊고 명쾌한 입장을 교계 일반을 대상으로 표명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처음 '사랑의교회' 이전 관련 기사를 접했을 때, 저의 심정은 '사랑의교회, 너마저!'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꽤 오랫동안 '사랑의교회'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 하던 일들이 누적돼 오다가 마침내 이번에 교회 이전 문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것이 온 것 아니겠냐는 생각 같은 것이지요. 이런 말씀까지 드리긴 뭐하지만, 얼마 전부터 '사랑의교회'는 무언가 바빠지고, 좋게 말하면 활기를 띠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왠지 그런 변화를 지켜보는 저와 제 주위 많은 사람들은 불안하고 때로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조마조마했습니다. 무엇인가 미덥지 못하고 아슬아슬했습니다. 큰 교회가 큰 쓰임 받는다? 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어떤 사람들은 큰 교회가 큰 쓰임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말은 '쓰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심'을 무시한 궤변입니다. 교회는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 땅에서 결실을 맺어 나갈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소관을 나의 소관으로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교만이요 곁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구제나 봉사의 문제라면, 기독교에서 소위 이단시하는 많은 단체나 세속적 집단들 가운데도 헌신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진정으로 약자를 돕기 위해 애쓰는 곳은 널려 있습니다. 무릇 자선의 윤리란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포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교회의 이름을 구태여 빌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필요조건일지언정, 진정한 기독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열매로서 그냥 맺어지는 것이며, 모든 열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해서 위로나 자랑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오히려 개인(의 부)이 그런 것처럼, 교회가 커지면, 자기 의가 덩달아 커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용하시기가 더 어려워지기 쉽습니다. 크기는 영적 상태와 긴밀히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 시절과 큰 교회 시절, 교인들이나 목회자의 영적 상태가 같을 수 없습니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자와 영적 상태가 같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가 부의 문제를 그토록 경고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부의 축적 과정이 영적 과정이듯이, 교회의 크기의 문제는 곧 영적인 문제이기 쉽습니다. 왜 우리는 '부의 기만성'(deceitfulness of riches)(마 13:22)에 관한 예수의 경고를 예배당의 크기에 적용하려는 용기와 지혜를 갖지 못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교인 몰려드는 현실은 재앙 어느 분이 말했듯이 세 살배기에게 억지로 살을 찌운다 해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건강한 유아라는 점을 반증해 줄 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재앙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지식을 쌓고 부자가 되는 것이 그 개인에게 재앙인 것과 꼭 같습니다. 그때의 부와 지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방치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성공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며, 그것이 교회와 관련될 때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에 적당히 얼버무려 접목하면, 쾌감은 몇 배로 늘어납니다. 세상적 욕구도 은근히 충족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뤘다는 뿌듯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교회 안의 보통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심리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포퓰리즘의 위험성 대형 교회에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일에 소극적이거나 나아가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기 쉬우며,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교회의 크기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식의 문제 제기 자체를 불순한 것으로 불쾌해 합니다. 목회자의 할 일은 교인들을 늘 깨어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회자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약해지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레 차단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도 살고 교회도 사는 길일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의 소리로 교회 '안'을 깨우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 있다면, 정말 모골이 송연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더 뻔뻔스럽게 불의와 타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일을 일상적으로 반복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기커녕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강변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를 말로써 부인하는 일을 단죄하는 데는 재빠르지만, 행동으로써 일상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일에는 관용이 넘치거나 무감각합니다. 교회가 마땅히 맡겨진 책무를 소홀히 할 때, 이단과 반쪽 진리가 판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상도 타기하는 세습과 대형화를 탐한다 한들, 이제 별로 놀랄 일도 아닐지 모릅니다. 밀알은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란 썩지 않는 웅장한 건물과 허공에 새길 명성을 위해 혈안이 된 집단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의 예배당은 이 땅을 잠시 스쳐 가는 이방인들이 모여 주를 고백하는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거주할 부동의 부동산의 중요성을 앞장서서 일깨우는 진원지가 바로 교회일지도 모릅니다. 그 거창한 건물로 어떤 거창한 일을 할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잃어버린 사랑의교회 그런데 목사님, 슬픔이 마르면 남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 슬픔을 아는 자가 잠 못 이룰 때, 어리석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셨다며 자신의 태평한 잠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통곡하셨습니다. 과연 오늘의 상황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점은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통곡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늘 별 문제 없이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잘 돼 가고 있다고 국민의 눈과 판단력을 가리는 일을 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럴수록 교회 안팎에서 불의는 더 만연하고 약자들의 고통은 갈수록 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양지만을 자꾸 비추자는 것이 어쩐지 문제를 회피하거나 은폐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셨을 겁니다. 목사님, 부디 작금의 일련의 상황들이 '사랑의교회'가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대해 마침내 눈을 뜨고, 목사님의 사역에는 일대 쇄신의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고세훈 /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개혁연대 지도위원 |
'맘몬주의??? > 교회와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력적인 차선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라 (0) | 2010.01.09 |
---|---|
'웃기는' 목사 VS '울고싶은'교인들 (2) | 2009.09.07 |
한국교회 타락 주범, 맘몬신앙과 기복주의 (0) | 2009.05.11 |
맘몬이 주인되는 교회 (0) | 2009.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