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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운동 블로그 - 현재 우리 사회는 맘몬주의에 물든 기독교신학과 비성경적 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나라 운동가들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그들과 싸워보고자 한다. 봄풀내음


 
 

(예수와토지법5)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7. 9. 10: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재물에 관한 구원론적 평가

마가복음 10:23에서 우리는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얻는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여기서 ‘재물’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원어는 ‘크레마’이다. 이 단어는 단지 토지만이 아니라 유동성 재산도 가리킨다. 70인역 다니엘 11:28에서 ‘크레마’는 이동 가능한 재산을 가리킨다. “그가 많은 재산(크레마)을 가지고 그의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크레마’는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토지일 수는 없다. 사도행전 4:37에서도 ‘크레마’는 토지를 팔아 받은 돈을 가리킨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크레마)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러한 용례를 통하여 볼 때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0:23에서도 ‘크레마’는 유동성 재산을 가리킬 수 있다.

마가복음에서 ‘크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곳은 오직 마가복음 10:23 뿐이므로 마가복음의 용례로 마가복음 10:23의 ‘크레마’가 유동성 재산을 가리킨다고 검증할 길은 없다. 그렇지만 마가복음 10:23의 문맥을 통하여 이 단어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크레마’를 가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24절)은 ‘크레마’의 뜻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만일 ‘크레마’가 토지를 가리킨다면 제자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은 율법(레위기 25:23; 신명기 27:17)을 어긴 자들이므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은 ‘크레마’가 토지가 아닌 (토지의 소산으로서의) 재물을 가리킴을 암시한다. 구약에 의하면 부유함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신명기 28:2-6). 이러한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데, 재물은 많이 소유해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율법이 문제 삼지 않는 것까지 예수께서는 문제 삼으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물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도덕적으로 불의하다고 평가하지 않으셨다. 세상에는 깨끗한 부자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모든 부자들을 비윤리적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내리신 평가는 구원론적 평가이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는 표현은 “구원 받는다”는 뜻을 가진 표현임을 26절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말씀을 제자들은 “구원받기 힘들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많이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즉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본문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맥을 통하여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자의 경우처럼 율법을 어기면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경우에 해당하는 부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깨끗한 부자가 존재하기 어려운 만큼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부자의 경우에도 또 하나의 장애물이 존재한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신다(21절). 불의한 재물의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재물을 사용하기 원하실 것이다. 깨끗하게 재물을 모은 부자들 중에서도 재물을 사랑의 실천에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최소한 부자들이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지키기 어려운 만큼 부자들이 구원받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의 불가능성

사람이 구원받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함을 25절은 지적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랍비문헌들은 불가능의 이미지로서 코끼리가 바늘귀로 나간다는 비유를 쓴다. 동일한 이미지를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동물인 낙타는 자연스런 선택이다. 25절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26절: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은 25절의 비유가 구원의 불가능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음을 보여 준다.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바늘귀가 예루살렘 성문으로서 나귀가 짐을 내리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이었다면 제자들이 놀라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였을 이유가 없다. 또한 바늘귀라는 예루살렘 성문이 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예수께서 당시에 존재하지 않은 성문을 언급하셨을 리 없다. 그러므로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의 바늘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불가능한 것보다 어려운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은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부가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로 여겨진 문화 속에서는 부자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받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은 부자들에게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그러한 복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불가능할 것인가? 26절은 이러한 생각의 결론을 보여준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제자들의 이러한 결론을 예수께서는 긍정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27절).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예수께서는 부자는 구원받기 힘들지만 가난한 자들은 구원받기 쉽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부자가 구원받기 힘들면 가난한 자들은 더더구나 구원받기 힘들다는 생각을 전제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 불가능하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도 부자들처럼 구원받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부자들은 21절 말씀대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의한 부자가 불의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줄 때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진다면(21절), 깨끗한 부자가 깨끗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줄 때 더더구나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그들이 언제 많은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구원받기도 역시 힘들다.

예수께서는 부유함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셨다. 예수께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신 것은 단지 토지만이 아니다. 율법의 견지에서 보면 토지를 과다 보유한 지주는 악하고 재화를 많이 보유한 자본가는 선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깨끗한 부자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렇지만 부자에 관한 예수의 평가는 부자를 가난한 자와 대조시키면서 부자를 심판하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관점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고 선언함으로써 가난한 자도 구원받기 어려움을 암시한다.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기 어려움을 깨닫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

예수께서는 구원의 불가능성을 지적하시면서 가르침을 끝맺지 않으신다. 구원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예수께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조시키지 않으시고,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신다. 하나님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모두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익숙한 구원론으로 환원하면 안 된다. 27절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음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구원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시는지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왜 부자에게 불가능한 지 살펴야 한다. 구원이 부자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토지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간 익명의 부자와 관련이 있다. 그는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포기하기 힘들어 고민하였다. 그렇다면 합법적으로 소유한 재물을 포기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재물의 포기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는 명령과 관련된다. 이 명령은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즉,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가진 명령이므로 구원론적 함의를 지닌다.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산의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땀 흘려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에게는 더더구나 구원이 약속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랑을 명하신다.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명하신다. 이것은 인간에게 심히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심으로써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사랑은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므로(갈라디아서 5:6)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의 궁극적인 조건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고 말해야 옳다.

재물과 제자도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으셨다. 다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지 가르치셨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악하지 않다.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도 악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우리의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남에게 주기 위하여 열심히 벌어야 한다.

재산을 축적하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 아니라 축적된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성공하는 것이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다. 근면검소하게 생활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축적된 자본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근심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근심할 때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가난에 처한 사람에게 부유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부유한 자들이 가진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가난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재물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토지 투기를 통해 재물을 축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며 근검하게 재물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깨끗하게 경제활동을 하여 깨끗한 부를 모아야 한다. 우리의 경제활동은 또한 신앙생활이다. 우리는 더러운 부를 많이 모으는 것보다 깨끗한 부를 적게 모으는 쪽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모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예수 제자의 길일 뿐 아니라, 구원을 확신하는 길이기도 하다. 구원받은 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걸어가야 할 길이므로 그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함부로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기준에 미달된 사람들을 은혜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 은혜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여 이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들을 심판하실 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의 하나님은 또한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참된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변화시켜 참된 제자의 길을 가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삶의 변화시키어 바른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구원은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

(예수와 토지법 4)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6. 24. 10: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부유함 자체는 하나님의 복일 수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다(마가복음 10:19). 즉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답하신다. 질문한 사람은 이것을 다 지켰다고 대답한다(마가복음 10:20). 이에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신다(21절).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

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가?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과연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부유함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잘 지킨 자에게 주시는 복일 수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명기 28:2-6).

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부유한 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선행의 결과일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의 복으로서의 부는 자녀, 토지의 소산, 가축 등의 복이다. 따라서 부유함 자체는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증거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킨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부의 소유 자체를 문제 삼았다고 볼 수 없다.

토지 과다 소유가 문제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그에게 단지 소유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22절에 등장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서 ‘재물’이라고 번역된 말은 ‘토지’로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끄떼마’는 재물 중에서 특별히 토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의 잠언 23:10은 지계표를 옮기지 말고 고아들의 밭(‘끄떼마’)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끄떼마)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끄떼마’는 히브리어 본문에 나오는 ‘사데’(땅)의 번역어이다. 70인역 잠언 31:16에도 ‘끄떼마’가 사용되는데, 여기서 ‘끄떼마’는 히브리어 ‘케렘’(포도원)의 번역어이다. 호세아 2:17에서도 ‘끄떼마’는 히브리어 ‘케렘’(포도원)의 번역어이다. 사도행전 5:1에서도 ‘끄떼마’는 땅을 가리킨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끄떼마)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사도행전 5:1-4).

‘끄떼마’라는 헬라어는 ‘토지’로 번역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번역은 문맥상 정당하기도 하다. 21절은 율법 지킴에 있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는데, 토지가 많은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토지를 일정한 분량, 즉 기업으로 물려받은 분량이상으로 소유하지 못하게 규정한다. 레위기 25:23은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다만 임대만 허용함으로써 토지소유의 집중을 막고자 한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23). 임대는 희년까지만 할 수 있었고 희년이 되면 원소유주가 다시 토지의 소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위기 25:28). 하나님께서는 토지 소유의 경계를 옮기는 것을 금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으로 소유지를 넓히는 것을 금하셨다. “그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명기 27:17).

토지의 소산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복일 수 있지만(신명기 28:11),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어기고 있는 상태이다. 스스로 영구매매를 하거나 지계표를 옮기지 않았고 조상들이 그렇게 한 것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 책임을 면하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량이상의 토지, 즉 본래 이웃의 것이었던 토지를 처분해야 하고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들이 가난해진 중요한 원인이 그들의 삶의 터전인 토지를 빼앗긴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토지와 함께 자본이 중요한 경제 변수인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구약성경의 토지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토지법은 토지를 잃어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하여 결국 노예가 되는 것을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법제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변함이 없고 농경 사회에서나 공업 사회에서나 정보 사회에서나 변함없다. 또한 오늘날 토지(특히 도시 속의 토지)는 불로소득의 중요한 원인이며 토지 투기는 이웃에게 많은 피해를 준다. 그러므로 구약의 토지법과 예수의 가르침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율법을 지킴에 있어 부족한 것은 바로 토지의 과다 보유였다. 그러므로 그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처분해야하는 것은 토지였다. 따라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은 곧 “네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이다. 예수께서 팔라고 명하신 것은 바로 토지였다.

개역성경에는 ‘네 있는 것을 다 팔아’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 번역에 해당하는 본문은 그저 ‘네 가진 것을 팔아’로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호사’는 “모든 것” 등으로 번역되더라도 예외 없는 모든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마가복음 3:28에서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에서 ‘모든’은 헬라어 ‘호사’의 번역어인데, 이것은 예외 없는 ‘모든’을 뜻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3:29은 곧 바로 예외를 언급한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기업으로 받은 토지는 구약 성경에 의하면 팔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팔아야 하는 재물로부터 예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까지 팔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라고 명하시면서 율법을 어기고 토지를 전부 팔라고 명령하셨을 리 없다. 팔아야 하는 것은 고유한 토지 경계표를 넘어서 빼앗은 이웃의 토지이다. 이것은 율법이 허용하지 않는 불법거래를 통해서 획득한 토지이거나 임대한 토지를 희년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고 계속 점유한 토지이다. 예수께서는 이것들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계표를 옮겨가며 남의 토지를 점령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신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미가 2:2-4).

토지를 넓히는 자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재앙은 그들이 땅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남의 땅을 빼앗았으니 이제 남에게 땅을 빼앗기는 것이다. 동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빼앗아 넓힌 이스라엘의 대토지소유주들의 땅은 이 말씀대로 빼앗겼다. 그들의 땅은 결국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로마에게 빼앗겼다. 나라를 잃고 땅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게 빼앗긴 땅에는 자유도 풍요도 없이 슬픈 노래만 남을 뿐이다. 빼앗긴 땅에는 봄이 올지라도 그것은 남의 봄이다. 빼앗긴 땅에는 가을이 올지라도 그것은 빼앗긴 가을이다. 정복자들에게 토지의 소산을 빼앗기는 가을이다. 토지를 빼앗기어 토지의 소산도 빼앗기고 그 땅에서 흘린 땀방울까지 빼앗기는 가을이다.

제자의 조건

예수께서는 동족의 토지를 빼앗아 지계표를 옮기고 땅을 넓힌 사람에게도 사랑을 표현하셨다. 단지 그가 다른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초청하시기까지 하셨다. 그에게 기회를 주신다. 그 토지들을 정리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가르침은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가 근심하며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본래 더 철저하다. 그것은 불법 소유지의 포기 정도가 아니라 목숨의 포기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자기를 포기하는 것은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죽으러가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매달려 처형당할 십자가를 가리킨다. 또한 십자가는 영광스런 죽음이 아니라 수치스런 죽음의 형틀이었다. 그것은 로마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죄수들이 로마 권력에 의해 멸시당하는 고통과 수치의 사형 도구였다.

예수를 따르는 조건은 생존의 포기이다. 즉 죽을 각오이다. 그것도 죄수로 죽을 각오이다. 보통 죄수도 아니고 반로마 정치범으로 죽을 각오이다. 반로마 무장투쟁을 한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오해 받고 죽을 각오이다. 지계표를 옮기며 불법적으로 확장한 토지를 포기하라는 명령에 근심하며 떠나는 자가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겠는가?

예수를 따르는 조건, 즉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준행되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사도행전 2:45). 여기서 ‘재산’이라는 단어는 토지를 가리키는 헬라어 ‘끄떼마’의 번역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행위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른 실천이었다. 사도행전 4:34-35은 좀더 명확하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토지를 모두 처분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므로 그들이 판 것은 지계표를 넘어 확장한 토지였을 것이다. 바나바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 토지를 처분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 4:36-37). 구약에 의하면 레위인은 토지를 가질 수 없었고 다만 집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인 바나바는 구약에 따라 토지를 처분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는 그 자체로 오늘날의 교회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유효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토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모델이 아니라고 하며 거부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를 따르기 위한 조건은 12명의 사도들을 위한 조건이 아니었고, 모든 제자를 위한 조건이었다. 그것은 교회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기준이 강조되는 교회는 없어졌다. 그와 함께 기독교의 위대함도 사라지고 말았다. 위대함이 사라진 기독교를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기독교의 위대함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예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조건을 회복하면 위대한 기독교는 회복될 것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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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3) 구원과 율법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6. 5. 09:34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영생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토지 문제에 관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살피기 위하여 우선 영생에 관하여 다루어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토지 문제는 영생에 관한 관심과 관련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장에서 22절과 30절은 토지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이것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다.

토지와 관련된 경제 윤리적 문제는 마가복음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의 일부가 아니라 영생과 관련된 신앙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토지 문제는 교회의 사회 참여 문제나 기독교 경제학의 맥락에서 다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제자도의 문제와, 영생을 얻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진다.

마가복음 10:17-31은 영생에 관한 한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생을 얻는다’는 표현은 원어를 직역하면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다”고 번역된다. ‘상속받는다’는 용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후(민수기 26:55) 각 가족이 상속받은 것은 토지였다. 토지는 각 가족에 속하여 상속되었다. 그것을 매매하여 소유권을 이전할 수 없었다(레위기 25:23). 이러한 ‘상속’ 개념을 배경으로 ‘영생을 상속받는다’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소유로 확실하게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영생’이란 무엇을 가리킬까?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이 ‘영생’이란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용례를 살펴야 한다. 마가복음 9:45에는 ‘영생’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여기서 ‘영생’은 ‘지옥’의 반대말로 쓰였는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동의어로 등장한다.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9:45).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9:47).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마가복음 10:23에도 나온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상속받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표현과 같은 뜻을 가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마가복음 10:25-26은 이를 명확히 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이를 구원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구원 얻는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영생을 상속받는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들이다. 그렇다면, 영생을 상속 받는 길에 관한 질문은 곧 구원을 얻는 길에 관한 질문이다. 영생에 관하여 좀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다니엘 12:2을 읽어보아야 한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여기서 ‘영생’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받을 수 있는 상태이다. 즉, 영생이란 부활 후에 얻을 수 있는 복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단지 현세에서 누리는 복된 상태 이상의 종말론적 구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러한 미래적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구원의 길

종말론적인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관한 질문에 예수께서는 무어라고 답하시는가? 예수께서는 “네가 계명을 안다”고 답하신다. 이것은 문맥상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질문한 사람은 그렇게 알아듣고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마태복음 19:17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명확하게 진술한다. 이 말씀에 예수의 구원론이 담겨 있다.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

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결론은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야고보서 2:26은 이것을 명확히 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4은 행함이 없는 믿음, 즉 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함을 수사의문문의 형태로 주장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런데 행함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함, 즉 계명을 지키는 행함이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믿음을 행함과 무관한 지식적 믿음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믿음에 관하여 야고보서 2:19은 말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임을 믿는 믿음, 예수는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믿음은 귀신들도 가진 지식적 믿음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순종적 믿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다. 믿음 없이 행위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행위 없는 죽은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도 없다.

어떠한 행함인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그렇지만 행함이란 어떠한 행함을 말하는가? 구원의 조건을 논할 때 막연하게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대체 어떤 행함이란 말인가? 행함도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의 본질적 필요조건으로서의 행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행함이다. 우리의 행함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면 그 행함은 믿음의 행함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대로 행하면 그 행함은 믿음이 없는 행함이다. 행함 자체를 미화할 수 없다. 죽은 믿음이 문제가 되듯이 죽은 행함도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것인가? 각자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어 행동할 것인가? 물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알려주셨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관한 지침을 제공해 준다. 그 지침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율법을 배제할 수 없다. 율법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질문 받으셨을 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율법 조항들은 주로 십계명에 담긴 계명들이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처럼 예수께서 제공하신 행함의 기준은 계명들이다.

행위 구원 교리가 틀렸다고 할지라도 행함은 강조해야 하고, 율법주의는 틀렸다고 할지라도 율법은 강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구원과 관련하여 명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의 기능이 예수로 대체된 신약 시대에 율법의 역할이 상대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십계명을 제외하고 율법이 모두 폐지되었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십계명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십계명에 포함된 안식일 계명은 어찌하여 지키지 않는가? 참으로 십계명 외의 모든 법이 폐지되었다면 왜 십일조법은 열심히 지키는가? 무엇이 폐지되고 폐지되지 않았는지 인간의 편리에 따라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5:17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완성함으로써 율법을 폐지하러 오셨다고 해석할 것인가? 제사법에 관하여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계명이 폐지되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마태복음 5:19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우리는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현대사회 속에서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킬 수 없더라도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버릴 수 없다. 명확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담은 구약 성경을 버리고 단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겠다고 하는 것이나 자신의 직관이나 도덕적 감정에 의지하는 태도나 단지 합리적 계산에 의존하는 것은 모두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내어야 하고 그 뜻을 적용해야 한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적용할 때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런데 율법 없는 행함은 죽은 행함이다. 행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율법을 떠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열심히 행하는 행함이라면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행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특히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들과 신약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의 새 계명들과 관련될 때 구원과 관계된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갈라디아서 5:6).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이다. 성경은 행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강조되는 행함은 성령께 순종하는 행함이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라디아서 5:16).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성취하는 삶이다(갈라디아 5:23).

행함 없는 믿음의 강조도 율법 없는 행함의 강조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생의 길과는 무관하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길에 관한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신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태복음 19:17). 구원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예수의 말씀을 행위 구원이라면서 배격하고 율법주의라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과연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인가? 예수를 믿음이 없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교리에 관한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교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서 계명들을 어기고 살인하고 간음하며 도적질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자유가 하나님께 있지만 구원하지 않으실 권리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신다면 우리가 이신칭의 교리를 근거로 하나님께 부당하다고 따질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리를 용서해 주실 의무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법칙이 아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도 법칙이 아니라 구속사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신칭의 교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교리적 법칙 속에 가두면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을 제한하게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한 성도가 드리는 겸허한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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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토지법 2)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넘어서

하나님나라운동/경제 | 2009. 5. 21. 12:2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성서와 사회

예수를 믿는 우리의 신앙이 어찌하여 삶 속에서 힘을 잃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분리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의 분리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신앙과 삶이 종종 분리되어 왔다. 그리하여 성서와 사회도 분리되어 왔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신앙생활이 사회 속에서의 삶과 무관하였다. 성경을 연구하며 성경에서 깨달은 만큼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사회 정의를 세우는 실천에까지 쉽게 나아갈 수 없었다. 성경에서 사회 정의 운동을 위한 토대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종 발생했다. 그들의 사회 참여는 성경이 명하는 규범에 따르기보다는 시대가 요청하는 필요에 따라 일어나곤 했다. 그리하여 성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나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사회와 관계없는 책으로 여겨지곤 했다.

성서가 사회와 분리되면, 성서는 그저 종교적인 책으로 남게 된다. 성서가 종교 영역을 다루는 책으로 제한되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고백도 예수의 왕 되심에 대한 신앙 고백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성서가 사회 문제에 대한 지침을 주는 책이 되지 않는 한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은 그저 말뿐이게 된다. 예수는 모든 영역의 주라는 고백이 참으로 진실되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메시지를 사회에도 적용해야 한다.

그리스인들의 삶 속에서 왜 성서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었을까? 왜, 정의감이 충만한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서 없이 행동해야 했을까? 왜, 성경을 사랑하는 신실한 기독인들이 성경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비전을 얻지 못하였을까?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안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종교적인 책으로만 여기는 경우에는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이를 사회 문제에 적용하지 못한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거룩한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을 개인의 종교적 삶을 위한 책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위대한 성경을 이렇게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약 성경과 기독교

성서와 사회의 분리는 교회가 사회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이다. 믿음과 행함이 연결되어도 성서와 사회가 분리된다면 행함은 교회 속에서의 종교적 행위로 제한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힘을 잃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를 극복하려면 우선 그러한 분리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성서와 사회의 분리의 원인은 성서 안에서 구약을 삶의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시작한다. 한국 교회들은 구약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며 구약 성경의 형식적 권위를 존중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구약 성경의 형식적인 권위는 인정하면서 실제적 권위는 부정하는 셈이다. 구약 성경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처럼 물러나게 된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되면 왜 성서와 사회가 서로 분리되는가? 구약 성경에 사회와 관련된 법들이 많기 때문이고 이러한 법들과 관련된 선지자들의 선포가 많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실제적 권위가 부정될 경우에는 이러한 법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에 적용되지 못하게 된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를 위한 원리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잘 알아도 그러한 내용들이 폐지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구약 성경은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이 사회와 분리된 상태에서 신약 성경만을 사회와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 가진 사회적 차원을 전제하고 이것을 기초로 영적인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고 신약 성경을 읽으면 사회적이면서 영적인 신약 성경은 단지 개인적이면서 영적인 것으로 오해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구약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삶의 기준이라고 고백하지만, 동시에 구약 성경의 규범적인 효력은 폐지되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구약 성경 39권의 삶의 기준으로서의 효력을 믿지 않고 있다. 신구약성경 66권 전체가 삶의 기준이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동시에 신약시대에는 구약의 법들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이러한 모순이 위대한 구약 성경의 빛이 사회 속에 비치는 것을 가리고 말았고, 구약 성경을 맛 잃은 소금처럼 만들고 말았다.

구약 성경의 율법 조항이 폐지되어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적용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교회의 삶 속에 제멋대로 적용하는 것은 또 하나의 모순이다. 교회 생활에 구약 성경을 적용할 때에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며 적용한다. 그리하여 구약 성경은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나 헌금을 강조할 때, 목사의 권위를 강조할 때 이용된다. 구약의 제사는 헌금으로, 제사장은 목사로, 성전은 예배당으로 연속되는 것처럼 적용한다. 사회를 향한 구약 성경의 메시지는 무시하면서 교회를 위해서는 마음껏 이용한다. 이것은 성경을 믿는 태도가 아니라 이용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태도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성전 제사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예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므로 구약 성경의 제사법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헌금을 만들어 내며 이를 설득하기 위하여 구약의 다양한 제사들을 언급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폐지된 제사법들을 적용하는 한편 폐지되지 않은 계명들은 율법 폐지를 외치며 지키지 않는다. 십계명은 신약 시대에 계속 지켜져야 한다는 데에도 대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일요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전통마저도 점점 사라지면서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이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십계명을 무시하면서 제사법은 적용하려고 하는 모순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엄연히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다른 율법 조항들이 존중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예배당 건축이나 헌금과 관련하여 이용할 수 있는 율법들은 열심히 강조되고 적용된다. 한국 교회에선 십일조법도 열심히 지켜지고 있다. 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법도 무시되는 상황에서 십일조법이 지켜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안식일법은 헌금과 관련되지 않지만 십일조법은 헌금과 관련되기 때문은 아닌가?

물론 필자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율법 폐지론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십일조만은 예외라고 하며 열심히 지키는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폐지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십일조를 폐지하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니라”(마태복음 23:23).

십일조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바리새파 비판은 더군다나 폐지되지 않았다. 십일조를 드리지만 더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비판되어야 마땅하다. 율법에 담긴 공의를 내어버린 반율법주의는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렸다. 어찌하여 더 중요한 것을 내어버리면서 덜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담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내어버리고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아닌가?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신 율법의 효력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인정하신 율법은 신약 시대에도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더 철저하게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신약 시대에도 지켜져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과 제사장,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십일조법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이 사라진 현대에도 지켜져야 한다면, 예수께서 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신 율법 조항들은 더더구나 지켜져야 마땅하다.

예수와 율법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셨는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율법을 버리고 폐하는 자들을 비판하신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부여잡고 있다”(마가복음 7:8). “너희들은 너희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부수고 있구나!”(마가복음 7:9). “너희들은 너희들이 전수받은 너희의 전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마가복음 7:1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신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율법을 잘못 적용하여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전통을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5:17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으셨고 완성하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9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키도록 가르칠 것을 권장한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구약에 명령된 율법을 신약 시대에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며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는 율법의 일부로서 토지법이 담겨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레위기 25: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토지는 단지 임대될 수 있을 뿐 매매될 수 없었다. 이것은 율법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19을 토지법과 관련시켜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토지법을 폐지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또한 토지법을 지키며 이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토지법을 신약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토지법을 폐지하셨다는 증거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한 증거가 없는 한 우리는 구약의 율법들을 지키려는 시도와 노력을 존중해야 한다. 폐지된 흔적도 없고 지키라고 명해진 증거도 없는 율법 조항들은 열심히 지켜지는 것이 안전하다. 적어도 그러한 율법 조항들을 열심히 지키려는 사람들을 신율주의자라고 부르며 정죄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켜야 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낭패를 당하기보다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을 지키는 불편을 겪는 것이 더 안전하다.

율법 조항들 중에서 예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율법들은 신약 시대에도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 예수께서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이 율법의 일부라는 이유로 거부된다면 이는 예수를 믿지 않는 태도이다. 율법폐지론이라는 신학적 입장이 중요한가, 예수의 가르침이 중요한가? 율법폐지론은 신학자들의 가설이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메시아의 명령이다. 인간의 가설을 따를 것인가,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인간의 신학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구약 성경의 토지법이 폐지된 흔적이 없다면 그것을 지키려는 운동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폐지론에 은연중에 빠져 있다. 토지법이 폐지된 증거가 없다는 소극적인 논리로 그들이 토지법을 존중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 율법폐지론에 빠진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예수께서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만일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 과연 구약 성경의 토지법을 지키도록 명하셨는가? 예수께서 토지법에 관하여 어떠한 태도를 보이셨는지 알려주는 본문이 복음서에서 발견된다. 그 본문은 마가복음 10:17-31이다.







     신현우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 이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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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우리는 다른 주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예수는 만 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이시다(계시록 17:14). 우리에게는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고 두 왕이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고린도전서 8:6).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주이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오직 예수만을 왕이요 주로 모신 사람들이다.

우리가 오직 예수를 주라 고백할 때, 예수는 종교 영역에서만 주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의 주라고 고백한다. 예수는 교회의 주인이시며, 가정의 주인이시며, 또한 사회의 주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개인의 주로 고백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예수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지극히 중요하며 개인적인 영역에서 예수는 분명 우리의 주이시다. 그러나 예수께서 개인의 주라고만 고백하며 교회의 주이심을 잊어버리진 않았는가? 그리하여 교권주의자들이 교회의 주권을 찬탈할 때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는가? 우리는 예수를 개인의 주로 고백하면서 과연 세상에서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살려고 했는가? 예수를 성경과 교회 속에 가두어 놓고 사회에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는 않았는가?

예수는 온 세상의 주이시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자연도, 온 우주도 그의 주권에서부터 제외된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 활동은 이윤을 추구하는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그러한 원리에 따라 약육강식하는 것을 그 영역의 법도라며 예수의 주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수를 대항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멸하실 것이다.

왕의 명령을 실행하지 않는 백성

우리는 예수께서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영역의 주인이심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주권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순종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주신 명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의 명령을 알지 못한다면 예수께서 주라는 고백은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예수는 명목상의 주로 대접받게 되고 기독교 전통과 개인의 견해가 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처럼 예수를 대접하고 실제적 통치권을 기독교인들이 행사하게 된다. 이러한 불행은 오로지 지식이 없음으로 발생한다. 예수의 명령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 4:6).

예수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예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여 멸망하는 것을 방관하고 서로 위로할 것인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하게 하는 것은 머리를 눈 속에 파묻고 사냥꾼이 다가오는 진실을 외면하는 꿩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를 참으로 자유하게 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우리는 먼저 무지와 싸워야 한다. 예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함을 벗어나지 않으면 기독교에는 소망이 없다.

예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는 예수의 이름을 내걸고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불법 종교 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회원들을 늘려 교세를 확장시키고 그 교세를 힘입어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삯꾼들의 사조직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수의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맛 잃은 소금처럼 되고 말 것인데, 하물며 예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오죽하겠는가?

우리의 왕 예수의 명령을 알지 못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를 높이는 찬양도 시끄러운 목청의 떨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왕 되심을 존중하고 그 분을 높이는 방법은 예수의 왕명을 받들어 따르는 것이다. 왕명이 적힌 칙서를 읽지 않거나 해독을 못하여 알지 못하면서 왕께 충성할 수 있겠는가? 왕의 칙서를 읽고도 따르지 않으면서 왕을 존경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백성들에게 예수께서 무어라 하시겠는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23)고 하시지 않겠는가?

토지의 주인은?

토지, 자본, 노동은 생산의 3요소이다. 토지와 자본, 노동은 생산을 위해 사용되고 여기서 창출된 이윤은 각각 지대, 이자, 임금으로 지불된다. 자본은 노동의 결과 발생한 임금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며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지만, 토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인간이 토지를 점유하고 사용하지만 그 소유주는 궁극적으로 조물주이시다.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의 것이며, 그러한 인간으로부터 유래하는 자본과 노동도 결국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것인 토지를 소유하는 제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것인 다른 인간을 소유하는 제도처럼 불합리하다.

토지와 자본, 노동 중에서 가장 공급의 유동성이 없는 것은 토지이다. 토지는 그 값이 오른다고 해서 더 생산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물론 간척 등을 통해 넓혀질 수 있고 고층빌딩을 통해 활용이 가능한 공간을 넓힐 수도 있지만 이것은 토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용을 위하여는 엄청난 자본과 노동이 투입되어야 한다.

열심히 일하여 임금을 지급 받는 근로자와 열심히 모은 자본을 투자하여 이자를 받는 자본가와 달리 토지를 빌려 준 지주는 가만히 앉아서 지대를 받는다. 물론 토지의 소유자는 열심히 일하여 모은 자금으로 토지를 구입하였을 수도 있다. 토지를 구입하는 이유는 토지를 임대하는 것보다 구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지대가 이자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토지를 구입하는 것이 토지를 임대하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토지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토지의 가치는 점점 상승하게 된다. 이러한 상승세를 더욱 부추기는 것은 자신의 필요와 관계없이 토지를 구매하는 사람들이다. 토지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남는 것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급적 많은 토지를 사두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런 경제 행위이다.

토지의 값이 급격히 오르는 것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그렇지만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는 나쁜 소식이다. 토지가격이 상승하면 주택가격이 상승한다. 주택가격은 오르고 또 올라 근로자들이 평생 저축해도 살 수 없을 만큼 상승한다. 융자를 받아서 구입해도 갚기 힘들만큼 상승한다. 그리하여 임금 인상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물가도 상승하게 된다. 집값이 오르면 전세값도 따라 올라가서 서민들은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게 된다.

토지 가격의 상승은 기업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토지 값이 오른 사회 속에서 공장이나 사무실을 마련하려면 고액의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거나 오를 대로 오른 값의 토지를 사야한다. 또한 근로자들을 고용하려면 이러한 사회 속에서 적어도 생존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토지 구입 내지 사용 비용과 임금을 감당하려면 생산품의 가격을 낮게 책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가격이 높으면 생산품이 팔리지 않게 된다. 결국 기업의 운영자는 토지 가격과 임금이 낮은 지역으로 공장을 옮겨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한국의 기업들은 이미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였다. 많은 기업들이 이주한 후 한국 사회엔 일자리가 부족해 질 것이다. 그리하여 취업이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취업을 해도 평생 일하여 주택 하나 마련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정규 직업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토지의 값이 오르는 사회엔 빈곤이 찾아온다. 값비싼 토지를 많이 소유한 소수를 제외하고 많은 서민들과 기업인들이 힘겹게 살아가게 된다. 많은 가정들이 빚에 시달리게 되고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게 된다. 투기를 통해 고가의 토지를 많이 구입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사회 전체가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망해가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고, 기회조차 불평등하게 하는 것이 과연 용납되어야 할까?

구약 성경의 토지법

만 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무어라 말씀하실까? 예수께서는 토지에 관하여 가르치시지 않으셨는가? 토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전해지지 않았을까? 이러한 의문에 관한 답을 얻기 전에 먼저 구약 성경은 토지에 관해 어떤 가르침을 주는 지 살펴보자.

구약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잃고 빚에 허덕이다가 남의 노예가 되는 상황을 방지하려는 장치로 가득하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시고 다시는 노예 상태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를 주셨다. 빚탕감(신명기 15:1), 노예해방(출애굽기 21:2; 신명기 15:12), 토지매매금지(레위기 25:23) 등이 그것이다.

레위기 25장에는 토지와 관련된 제도가 소개된다. 이 제도에 의하면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은 토지를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고, 한시적으로 임대할 수도 있으나 매매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는 토지를 투기적 목적으로 사고파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토지투기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토지 문제에 관한 해법은 이미 성경 속에 제시되어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구약의 토지법을 잘 알고 못하며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천덕 신부나 그의 제자들이 만든 “성경적 토지 정의를 위한 모임”을 통해 구약의 토지법이 교회와 사회에 계속 전파되어 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구약의 토지법을 토지가치세제를 통해 현대 사회에 적용하려한 헨리 조지의 경제학도 대천덕 신부나 김윤상 교수, 전강수 교수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 계속 전파되어 왔다.

한국에 실행되는 종합토지세는 일종의 토지가치세로서 토지 투기를 방지하는 효과를 가진다. 아직 세율이 매우 낮지만 과세 표준이 현실화되고 있고 세율이 조금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점점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구약 성경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존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토지세를 매우 기쁘게 내어야 할 것이다.

토지의 값이 오르지 않게 되어 투기가 발생하지 않는 상황은 매우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토지를 조금이라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의 가치가 상승하기를 바란다. 주택을 한 채만 소유해도 그 주택의 값이 오르게 되기를 염원하게 된다. 주택 한 채의 값이 오를 때 다른 주택의 값이 동시에 오르기 때문에 그 주택을 팔아도 비슷한 조건의 주택밖에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지 구약 성경이 제시하는 토지법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사회에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또 복권에 당첨되지 않지만 그 복권을 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소수의 부유층에 진입할 기회와 환상을 택하며 결국 그 소수에게 자신이 힘써 번 돈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는 대신 계속 복권을 사서 복권 당첨자에게 돈을 몰아준다. 한 채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상황도 그러하다.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은 결국 많은 주택을 투기적으로 구입하여 실수요자들에게 팔아넘기는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간다. 간신히 주택을 한 채 구입한 실수요자는 자신이 산 집의 값이 오르기를 바라지만, 차라기 투기가 없었다면 그는 애당초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주택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 가지 경제 체제

구약의 토지법이 적용되는 사회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토지에 관한 권리를 가지는 사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평등하게 토지를 나누어 주셨듯이(민수기 26:52-56) 모두 평등하게 토지의 가치를 나누어 가지는 사회이다. 이에 반해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국가가 모든 토지를 소유한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국민은 결국 국가의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 중국의 경우처럼 공산주의 국가가 토지를 임대하는 제도를 도입할 경우 토지를 최초로 임대받는 사람들은 대개 공산당원들이다. 그들은 값싸게 임대받은 토지를 재임대하여 엄청난 부를 얻는다. 결국 그들은 권력만이 아니라 재력까지 얻게 된다. 이 사회 속에서 권력도 없고 재력도 없는 대다수의 인민들은 노예처럼 살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는 토지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자신의 토지를 넓힐 수 있다. 자유경쟁체제 속에서 부의 불균형이 발생하고 국민의 약 1%(50만명)가 민유지의 57%를 차지하고 전체가구의 40.1%가 한 조각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있는 한국사회와 같은 상황이 전개된다(2005년). 토지를 많이 차지한 극소수는 엄청난 부를 누리고 토지가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예처럼 살아가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도 자본주의 사회도 대다수의 인민을 노예화시키는 사회이다. 그 속에 노예화방지 장치를 만들지 않는 한 노예화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이 디자인하는 출애굽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사회이며 그들이 노예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사회이다.

구약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법이 집행되는 사회는 복지 사회와도 다르다. 복지 사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지원금을 주지만 그들이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치료하지 못한다. 구약 성경의 사회는 가난한 자들이 발생하는 원인까지 없앤다. 노예 상태가 6년보다 길게 지속되지 않게 하고, 주요 생산수단인 토지가 임대될 뿐 매매되지 못하게 하여 결국 모든 국민이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유인의 신분을 되찾고 유지하게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회는 분명히 공산주의 사회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흑백논리에 빠졌었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도 한 때 공산주의 체제가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흑백논리에 빠졌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이 그려주는 사회는 모든 국민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는 공산주의 사회도 아니고 소수의 국민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는 자본주의 사회도 아니고 모든 국민이 토지를 평등하게 소유하는 평균지권 사회이다.

이 사회 속에서는 토지가 많이 필요한 사람은 토지를 다른 개인들로부터 임대할 수 있으므로 얼마든지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이 사회는 모든 국민이 국토의 주인이 되어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참된 민주주의 사회이다. 국토에 관한 권리 없이 어찌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주권은 모든 국민이 국토에 관한 평등한 권리를 누릴 때 실현된다. 자유와 평등, 참된 국민의 주권은 공산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평균지권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체 세대의 59.9%가 평균 1억 1800만원(공시지가기준) 상당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2005년 현재). 그러므로 1세대는 7068만원 상당의 토지 소유권(평균지권)을 가질 수 있다. 평균지권이 세제에 적용된다면 세대당 7068만원까지의 토지 보유는 과세 때에 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토지보유(즉 초과분)에 대해서는 정부가 임대료를 징수해야 한다. 그 임대료는 토지를 기준치보다 적게 가진 세대들 및 가지지 못한 세대들 중에서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평균지권 제도를 토지 소유의 불균형이 있는 사회에 갑자기 적용하면 열심히 일하여 번 돈으로 토지를 구입한 사람에게 잔인하다. 그들은 애써 마련한 토지로부터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은행에 저금을 해 두었더라면 최소한 이자는 받았을 것이다. 김윤상 교수(경북대)는 이러한 문제의 해법을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세금를 부과할 때 은행 이자에 해당하는 정도를 공제하면 된다. 토지보유로 인해 70만원을 토지세로 내어야 하는 사람의 경우, 그 토지가치만큼의 금액을 예금했을 경우 이자가 50만원이라면 이를 제하고 20만원만 내면된다. 이러한 제도가 실시되면 토지에 투자하는 것이 은행에 예금하는 것보다 벌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토지투기는 사라지게 된다. 결국 토지가치가 안정되어 토지를 구입하는 실수요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토지법이 실현되는 사회를 꿈꾸어 왔다. 미국에서는 헨리 조지가 이러한 꿈을 꾸었고, 러시아에서는 톨스토이가 그러한 꿈을 꾸었다. 중국에서는 손문이 삼민주의의 일부로 이를 실천하고자 했고 결국 손문의 제자 장개석을 통해 대만의 토지법은 구약 성경의 디자인을 일부 반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천덕 신부와 그의 제자들을 통해 구약 성경의 토지법이 교회와 사회에 알려져 왔고, 종합토지세 등으로 조금씩 법제화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를 기독교인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교회가 오히려 앞장서서 반대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는가? 이 백성들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신현우 교수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신약학

  * 이 시리즈는 복음과 상황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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